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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학 칼럼: 실존하는 인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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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학 칼럼] 실존하는 인간
우리는 흔히 “사람 참 안 변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또 어떨 때는 “사람 참 간사해.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인간의 특성을 철학에서는 본질과 실존으로 설명합니다. 본질이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변하지 않는 본성이라면, 실존은 ‘그때마다 다르게 드러나는’ 인간의 현실적 상황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금세기에 와서 두 차례의 세계대전뿐 아니라 산업사회 이후 엄청나게 변화된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문제를 해명하는 것이 철학의 시급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는 이 실존성을 해명하는 데 몰두합니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이런 경향을 잘 설명합니다. 이후 그를 실존철학을 정립한 사람으로 규정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실존주의는 매우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인간의 실존이 사람마다 고유할 수밖에 없으니 당연하지요.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을 ‘신 앞에 선 개인’으로 설명합니다. 인간은 하느님 앞에 홀로 서서 그분의 요구에 답해야 합니다. 그 명령은 고유할 뿐 아니라 절대적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응답해야 합니다. 인간은 그 결단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는 이를 저버린 채 절망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표현합니다. 절박한 상황에 처한 인간 실존이지요.
독일 철학자 야스퍼스는 철학의 과제를 세 가지로 꼽습니다. 철학은 인간의 실존을 해명하고, 그가 세계 안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지 설명할 뿐 아니라, 형이상학적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그는 인간이 처한 한계상황을 넘어서려는 것이 철학이며, 이는 초월적인 존재가 보내는 계시, 그의 표현대로 ‘암호’를 해명할 때 가능하다고 합니다. 한계상황은 유한한 인간이 마주하는 수많은 실존적 상황이지요. 그와 비슷하게 프랑스 철학자 마르셀은 물질적이며 기계적인 문화에 함몰된 현대사회에서 소유에 집착하는 인간의 소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랑과 희망을 통한 자유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이는 ‘절대적인 너’, 하느님을 향한 여정에서 찾을 수 있는 신비이며, 이것이 인간의 실존이라고 생각합니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혁명이 만들어 놓은 현대사회는 물질과 자본이 흘러넘치는 사회입니다. 또한 놀랍도록 발전하는 과학기술은 인간을 허무주의적이며 무의미한 상황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의미를 찾아야 할까요? 범람하는 경제적 풍요와 과학기술 문화 안에서 공허해지는 실존을 이해하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실존하는 인간의 현재를 해명하려는 것이 이런 철학입니다.
최근 독일 철학자 슬로터다이크는 이런 사회 안에서 인간은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덕목은 자기 절제와 기예적 삶입니다. 그것은 자기 존재를 절제하면서, 그를 위해 존재의 아름다움을 감지하면서 자기 삶을 도야하는 과정을 뜻합니다. 필리피서에서 예수님의 삶을 ‘자기 비움’(kenosis)으로 설명하는 말도 같은 의미입니다. 그 모두는 나와 너, 인간의 존재 의미를 드러내는 총체적인 태도에 관계됩니다. 이론적 삶이 아니라 생명의 아름다움, 삶의 신비를 감지하는 것이 기예적인 삶이지요. 그는 이러한 실존을 위해, 현대문화의 한계를 극복하는 비판적 삶을 요구합니다.
인간은 지금 여기서 구체적인 삶, 그 실존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 실존을 해명하고 그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2024년 4월 7일(나해)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서울주보 7면, 신승환 스테파노(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1 77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