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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유익한 심리학: 아담의 원죄와 인간의 나르시시즘(narcissis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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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심리학] 아담의 원죄와 인간의 나르시시즘(narcissism)
첫 인간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죄를 범한다(창세 3장). 그 결과 인간은 더는 하느님과 함께 살지 못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원죄로 시작된 곳으로 죄악이 넘치는 곳이다. 죄악은 형제 살육과 바벨탑 사건으로 점차 커지고 마침내 하느님은 홍수로 징벌하기에 이른다.
원죄 교리에 의하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의 뿌리’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죄의 뿌리’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 간교한 뱀이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창세 3,5)이라고 유혹한다. 그리고 그 나무열매를 먹은 인간은 눈이 열려 자신들이 알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두려워 숨는다(창세 3,10 참조). 죄악의 결과는 분열이다. 하느님과 인간의 분열이요, 인간과 인간의 분열이요, 인간 자신과의 분열이다.
눈이 열려 ‘선과 악을 알게 되는 것’이 왜 문제인가? 문제는 아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처럼 되려는 것(narcissism)’이 아닐까? 우리가 선악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선과 악을 구분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평가하고 판단하게 된다. 자신을 평가하여 열등감에 빠지기도 하고 타인을 평가하고 비난한다. 문제는 평가와 판단 행위가 자신을 절대적 위치에 세우는, 즉 하느님만이 심판자요, 절대자이신데 원죄는 그 경계를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우리는 선악을 구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과 타인을 평가하고 판단한다. 심지어 잘못된 행동(악)을 지적하며 그 사람과 동일시하는 만행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고 했는데, 우리는 마치 절대적 심판자인 양 자신의 판단대로 상대를 규정해 버린다. 심지어 타인의 행위에 ‘자신의 느낌’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타인을 단죄하고 비난한다.
어딜 가나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꼭 있다. 다 좋은데 꼴 보기 싫은 사람이 꼭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내가 아직 부족하기 때문이다. 아직 그런 감정이 내 안에서 일어날 만큼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까닭이다. 어느 철학자는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다.”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누군가 악을 행하면 우리는 측은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다. 또 인간의 악으로도 선을 끌어내시는 하느님께서 지금 그 사람에게 악을 허용하시어 더 큰 은총으로 예비하고 계시는지도 모르지 않은가? 누가 누구를 단정 짓듯이 단죄할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은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하느님의 뜻을 잘 살아가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악을 피하지 못하고 어두운 밤에서 빠져 길을 찾아 헤매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누구 하나도 예외 없이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고’, ‘잘 살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이 마음을 ‘양심’이라고 해도 좋고 인간의 자기실현 경향성이라고 해도 좋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을 해치는 것이 있으니 ‘나르시스’(narcisse)다.
많은 심리학자가 어느 시대보다 현대인의 ‘나르시스’가 강하다고 말한다. 물질화, 세속화와 관련이 되겠지만, 우리 내면에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절대화하려는 내적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적 과정은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던 타인의 행위와 존재를 분리하지 못하고 동일시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리하여 ‘나쁜 사람’, ‘불편한 사람’, ‘부담스러운 사람’ 등의 거짓과 악을 만들어낸다. 많은 공동체가 이러한 거짓과 악으로부터 신음하고 분열된다. 이 악은 타인만이 아니라 자신까지도 해치는데 우리는 그다지 깨닫지 못하고 살아간다. 우리의 존재에 관한 규정(심판)은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 하실 일이며, 우리는 다만 서로에게 ‘형제-사랑’일뿐이 아닐까?
[2024년 2월 25일(나해) 사순 제2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김정민 라자로 신부(아중성당)] 0 211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