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1일 (목)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수도 ㅣ 봉헌생활

축성생활의 날에 만난 사람들 - 성 클라라 봉쇄 수도원의 관상 수도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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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1-30 ㅣ No.714

축성생활의 날에 만난 사람들 - 성 클라라 봉쇄 수도원의 관상 수도자들


봉쇄된 문 열고 외딴 기도 공간 들어서자 거룩함이 밀려왔다 

 

 

- 하느님만을 찾고자 세속과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봉쇄 수도자들. 성 클라라 장성 수도원 입구에 이를 드러내는 봉쇄 구역 표지판이 설치돼 있다.

 

 

수많은 정보가 쏟아지고 전쟁이 난무하는 시대다. 더불어 종교의 영향력과 권위도 줄어들고 있다. ‘하느님은 어디에 있는가. 종교는 왜 필요한가.’ 본질적인 질문에서부터 답을 찾기 쉽지 않은 현실이다.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보고 싶거든 봉쇄 수도원을 찾아가라고 했던 어느 신부의 말이 떠오른다. 세속과 떨어진 곳에 공동체를 이루고, 그 안에서 치열하게 기도하고 관계 맺는 봉쇄 수도자들에게 종교의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조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여자 관상 생활에 대한 교황령 「하느님 얼굴 찾기」를 통해 “봉헌된 이들은 일상생활에서 하느님 현존의 표징을 깨닫고 하느님과 인류가 우리에게 제기하는 질문들에 현명하게 대답하라는 부르심을 받는다”(2항)고 밝혔다. 또 “이는 특히 봉쇄 수도원에서 관상 수녀의 경우에 더욱 명백하다”(31항)고 강조했다.

 

축성생활의 날(2월 2일)을 맞아 봉쇄된 공간 안에서 가난과 자매애를 통해 치열하게 하느님을 찾고 있는 성 클라라 수도회 장성 수도원을 찾았다. 그곳에서 맛본 신앙의 정수를 전한다.

 

- 성 클라라 장성 수도원 초입.



- 성 글라라 장성 수도원에서 기도 중인 수도자들. 세속과 단절된 봉쇄 공간에서 치열하게 하느님을 찾고 있다.

 

 

봉쇄, 하느님만 바라보며

 

“성 클라라 익산 수도원이 재건축에 들어갔습니다. 수녀님들은 그동안 성 클라라 장성 수도원에서 함께 살게 됐습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수녀님들 모습 한 번 봐 주셨으면 해요.” 본지에 걸려온 성 클라라 수도회 후원자의 전화였다. 한 후원자의 관심과 요청이 봉쇄 수도원의 문을 열어줬다. 수녀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기도 공간을 세상에 처음 열어 보이기로 했다.

 

그 길로 전라남도 장성에 위치한 성 클라라 수도원을 찾았다. 봉쇄 수도원답게 지방 도심에서도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은 기도하는 봉쇄관상 수도원이오니 출입을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어렵게 찾아간 수도원 입구에는 세속과 완전히 단절된 공간을 알려주는 현판까지 붙어있다. 외딴 기도의 공간. 거룩함과 조심스러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멀리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하지만 성 클라라 익산 수도원 원장 마리아 요한 수녀의 따뜻한 환대는 입구에서 느낀 봉쇄의 벽을 금세 허물어버렸다.

 

“봉쇄로 살아가는 이유는 하느님 외에 다른 건 생각하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세상이 싫어서 도피한 것도, 안락을 추구하기 위해 온 것도 아닙니다. 어떤 면에선 세상보다 더 치열하기도 하답니다.”

 

봉쇄된 공간은 불필요한 세상 이야기에서 수도자들을 보호한다. 그렇기에 하느님만 바라볼 수 있는 단순한 환경을 조성한다. 오전 5시 20분에 기상해 오후 9시 30분 취침에 들기까지 기도와 묵상으로 일과의 대부분을 채우고, 중간중간 맡은 소임을 한다. 모두 한울타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럼에도 수녀들은 세상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고 했다. 외부에서 부탁한 기도가 한 묶음이다. 기도가 필요한 신자들이 상담하러 오기도 하는데, 봉쇄 수녀원이라는 믿음으로 어디서도 할 수 없는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봉쇄 수도원은 단순한 삶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 기도가 필요한 신자들, 세상과 보다 깊이 소통할 수 있는 매력적인 곳입니다.”

 

성 클라라 장성 수도원 전경.

 

 

클라라를 따라서 가난과 공동체 삶

 

성 클라라 수도회 수녀들은 성 프란치스코의 ‘작은 나무’ 성녀 클라라를 따라 하느님을 찾는 수도자들이다. 프란치스코보다 12년 늦게 태어나 동시대를 산 클라라. 프란치스코의 첫 여성 제자로서 인노첸시오 3세 교황에게 가난 특전을 받고 수도회칙을 인준 받은 첫 여성 수도회이기도 하다. 가난과 형제애로 세상에 복음을 전한 프란치스코를 따라 클라라도 철저한 가난과 공동체성을 중심으로 수도생활을 이어갔다. 그 형태는 관상과 봉쇄의 삶이었지만, 프란치스코를 가장 완벽하게 따랐다고 평가받고 있다.

 

오늘날 클라라 수도원이 다른 봉쇄 수도원보다 중점을 두는 부분도 바로 ‘가난’과 ‘공동체성’이다. 수녀들은 경제활동이 전혀 없기에 신자들의 후원만으로 수도생활을 유지하지만, 수녀들은 “딱 필요한 만큼 그때그때 주신다”고 했다. 교회 내에는 모든 삶에서 철저하게 하느님을 홀로 대면하는 봉쇄 수도원도 있다. 하지만 클라라 수도원에서는 기도는 물론, 작업할 때도 둘 이상 짝을 지어서 한다. 더구나 지금은 익산 수도원 재건축 관계로 11명의 수녀가 장성 수도원에 합류해 함께 생활하고 있다. 4명이 있던 공간에 15명이 생활하게 된 것이다.

 

익산 수도원은 독일 클라라 수도원에서 파견돼 40년 전인 1984년 축성, 1993년에 자치 수도원으로 승격됐다. 장성 수도원은 2003년 익산 수도원에서 진출했지만, 아직 자치 수도원은 아니다. 두 수도원이 다시 함께하게 된 것이다. 같은 양식을 따르는 수도원이라 해도 서로 다른 생활을 하다 24시간 함께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봉쇄된 공간에서 공동체 생활을 함께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먹고 싶다고 마음대로 먹을 수도 없고, 가지고 싶은 것도 내려놔야 합니다. 가장 큰 가난 체험은 관계에서 오는 공동체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주체성을 가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죠.”(익산 수도원장 마리 요한 수녀)

 

그렇기에 클라라 수도원은 인간적 성숙에 중점을 둔다. 아무리 훌륭한 신학 지식과 영성이라도 미성숙한 상태로 습득하게 되면 교만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건물 재건축과 함께 내면도 쇄신의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한 인간 존재를 알고 이해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지만, 그걸 마주하는 순간 정말 위대한 세계가 열립니다. 가난 체험이 하느님 체험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그런 작업들을 거쳐 다들 행복한 성소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24시간 한울타리 안에서 말이죠. 이런 부분에선 세상보다 저희가 더 치열하게 살고 있지 않을까요?”

 

- 세속과 단절된 봉쇄 공간에서 치열하게 하느님을 찾고 있는 성 클라라 수도회 수녀들. 공동체 자매들은 하느님의 선물이자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가장 큰 보물이다.

 

 

성소, 하느님께 중심을 둔 희망의 여정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3년 성녀 클라라 탄생 800주년에 서한을 발표하고 “가난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 대한 뜨거운 열망만이 그녀를 불태웠다”고 밝혔다. 부르심의 과정은 모두 제각각이지만, 마리아 요한 수녀의 성소 여정은 마치 클라라를 연상시켰다.

 

“어릴 땐 그저 노는 게 좋았습니다. 수도 성소는 생각조차 없었죠. 그러다 교리교사 학교에서 예수님 현존 체험을 했고, 처음으로 어떻게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과정을 거친 후 십자가에 못 박힌, 아무도 돌보지 않는 그 예수님을 위로해 드리면서 살고 싶은 열망이 생겼습니다. 피에타상 성모님처럼 말이죠. 그렇게 드러나지 않지만 치열하게 기도하는 관상 수도자로 이끌어주시더라고요.”

 

저마다 이 같은 이끄심을 느낀 봉쇄 수도원 안의 수녀들은 수도 성소가 줄어드는 현실에서도 비교적 담담했다.

 

“성소의 근원은 하느님이십니다. 시대마다 어떤 수도원은 부흥하기도 하고 어떤 수도원은 문을 닫기도 했습니다. 넓게 보면 필요한 부분을 일으키고 계십니다. 마지막까지 우리 카리스마를 충실히 살아내겠지만, 하느님 뜻에 맡기고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시노드 여정에 있는데, 교회가 희망이 있다는 건 주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시대 징표에 고정관념을 넘어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하느님께 중심을 두면 분명 새로운 생명이 샘솟으리라 확신합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1월 28일, 박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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