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일 (금)
(백) 모든 성인 대축일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강론자료

2024-01-14.....연중 제2주일 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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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24-01-12 ㅣ No.2425

                                          연중 제2주일 (나해)

1사무엘 3,3.4-10.19      1코린 6,13-15.17-20      요한 1,35-42

2024. 1. 14.

주제 : 나는 누구의 도움을 입고 사는가?

우리는 는 삶에서 미처 예상하지 못한 놀라운 소리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상상하는 놀라운 소리가 45개의 숫자에서 6개를 맞추는 로또복권에 1등으로 당첨되었다는 소리는 아닐 수 있어도, 그렇게 들리는 소리에는 삶을 바꾸는 소리가 함께 할 때가 있습니다. 놀랍다는 얘기는 내가 예상하지 못했거나, 내가 아는 세상의 논리에서는 실현되지 않을 일에 관한 내용을 들었다는 표현이고, 또 다르게 말하면 내가 알지 못하던 것을 누군가가 자기의 지혜를 담아서 나에게 알려주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놀라운 소리의 하나로,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어린양'을 가리키는 스승이신 요한의 말씀을 듣고서, 스승을 떠나 예수님을 뒤따라간 2명의 제자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2명의 제자가 스승에게서 들은 소리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에 가신다는 선포였습니다. 우리나라의 문화에서 양은 만나기가 어려운 동물입니다. 그러니, 양에 관해서 정확하게 알아들으려면, 오늘 복음이 배경으로 삼는 곳의 문화를 생각해야 하고, 그 문화에서 사용한 표현의 의미를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더더구나 오늘 복음에는 그저 양이 아니라,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향해서 말했으니, 그 표현에 담긴 의미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양이 사람이 범한 죄를 짊어지거나 덮어쓰고, 광야로 나가서 죽는 일로, 사람에게서 죄가 없어진다는 생각은 유목민족이었던 히브리인들이 지낸 광야생활에서 시작된 일이었습니다. 우리 문화에서는 생각하지 못하는 특별한 모습이지만, 그 의미를 알아듣는다면 죄를 없애는 방법으로 히브리민족은 특별한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문화에는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다른 대상이 또 다른 사람의 죄를 없앤다는 개념이 없습니다. 죄를 없애려면 세상의 표현으로, 감옥이나 교도소에 가야 했고, 징역을 살면서 죄의 갚음을 해야 더는 죄를 묻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나라에서 죄를 대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히브리문화에는 사람이 지은 죄를 없애는 방법으로 하느님과 사람의 삶을 연결하여, 하느님께서 죄를 용서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세상에 살면서, 사람의 힘만으로 사람의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자기들의 삶에 하느님의 도움과 사랑이 필요했다고 인정한 민족이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히브리 사람이 같은 자세로 살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를 지녔던, 자기의 민족을 향하여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로 죄를 없애시는 역할을 말했습니다만, 사람이 자기가 지은 죄에서 벗어나는 일은 다른 사람이 나를 대신해서 할 일은 아닙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나의 노력이 함께 있어야 좋은 결과가 생기는 일입니다. 내 행동으로 그 삶의 결실을 만들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신앙에서는 그 일에 상응하는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도, 하느님의 사랑으로 죄를 용서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죄의 용서는 신앙을 지키며 실천하는 사람에게 주는 하느님의 선물이지만, 사람이 그 선물을 항상 반기는 것은 아닙니다. 죄가 나의 삶에 붙어있는데도, 뗄 생각을 하는 것보다는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것이 일반적인 태도이고, 내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도 하느님의 사랑이 나에게 멀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일이 참으로 묘한 일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안타깝다고 여기면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내가 하느님을 만나기 싫다고 하면서 멀어지고, 뒷걸음질을 치는데, 우리가 그렇게 살아도 하느님의 선물은 나에게 오기는 할까요? 선물로 오는 그 일을 만나기가 싫다고 하면서 하느님을 멀리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삶이 하도 행복해서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하느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일까요?

 

우리 문화에는 좋은 소리를 세 번을 들으면 미안해서라도 그만하라고 한다고 했습니다만, 내가 행복해서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일이 부담스럽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겸손일까요? 나의 삶에서 죄를 없애시겠다는 하느님을 내가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할 수 있을 능력과 권리가 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생기는 결과가 나에게 좋은 일이 생긴다는 보장은 어디에서 얻겠습니까?

 

어릴 때부터 하느님의 계약궤가 있는 성전에서 살았던 사무엘은, 하느님께서 자기를 부르시는 소리를 사제 엘리의 도움으로 알아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소리를 자기 힘으로 듣지 못했던 소년, 사무엘의 삶을 대하면서, 우리도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초대에 바르게 응답할 방법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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