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오ㅣ성모신심
성모님 발현과 레지오: 이탈리아 로마 산탄드레아 델레 프라테 성당(184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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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 발현과 레지오] 이탈리아 로마 산탄드레아 델레 프라테 성당(1842년)
- 발현하신 성모님의 모습. 교황 레오 13세가 봉헌한 왕관을 쓰고 계신다.
1) 시대적 배경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1810년부터 이탈리아 내에서는 통일 운동이 전개되었다. 1831년에는 공화주의 혁명을 주장하는 세력이 등장하면서 이탈리아 전역이 혁명의 소용돌이에 빠졌고, 가톨릭에 반기를 드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1848년에는 교황청 장관이었던 펠레그리노 로시가 암살당하고 교황 비오 9세는 로마를 탈출하여 시칠리아 왕국으로 피신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1840년대에는 이탈리아의 통일 운동 외에도 가톨릭을 위협하는 요인이 또 하나 있었는데 바로 유럽 각국에서 기반을 구축한 유대인들이었다. 유대인들은 새로이 등장한 직업을 독차지하며 시장을 장악해 나갔는데 특히 금융업에 대한 독점은 대단하였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대표적인 유대인 금융자본가인데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유럽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을 장악하였다. 이들은 유대인과 유대교를 적극 지원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가톨릭도 보이지 않는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렇게 가톨릭이 외적인 변화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로스차일드 가문과 가까운 은행가의 상속자이며, 가톨릭을 증오하고 있던 유대인에게 성모님이 발현하셨다.
- 산탄드레아 델레 프라테 성당의 외관.
2) 성모님의 발현
유대인 알퐁스 라티스본은 형이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사제까지 되자 형을 미워하며 가톨릭을 증오하였다. 그는 약혼을 하였지만 몸이 좋지 않아 1841년 말 따뜻한 남쪽의 나폴리와 몰타를 여행하다가 우연히 로마로 오게 되었다. 그는 로마 여행 안내를 친구의 형인 뷔시에르 남작에게 부탁하게 되었다. 남작은 가톨릭으로 개종했을 뿐만 아니라 알게 된 사람 모두를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남작은 알퐁스와 가까워지자 그를 개종시키기 위해 뤼뒤박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이 알려준 ‘기적의 메달’을 목을 걸고 매일 아침 성 버나드가 지은 성모님께 바치는 기도 ‘기억하소서’를 바칠 수 있냐고 알퐁스에게 제안하였다. 알퐁스는 잠시 고민하였지만 남작이 여행을 안내해 주는 것에 대한 고마움도 있고, 유대인이 가톨릭 신자들보다 융통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 제안을 수용하였다. 다음 날 아침 알퐁스는 기적의 메달을 목에 걸고 기도를 바쳤지만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가톨릭을 증오하는 마음만 있을 뿐이었다.
며칠 후 1842년 1월 20일 알퐁스는 알고 지내던 백작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남작과 함께 유명한 스페인 계단의 인근에 위치한 산탄드레아 델레 프라테 성당(이하 프라테 성당으로 표기)에 도착했다. 그런데 장례식 시간보다 너무 일찍 도착하여 알퐁스는 혼자 성당 안으로 들어가 제단 바로 앞에 서서 안드레아 사도가 십자가형을 당하는 장면이 그려진 제단화를 보고 있었다.
- 성모님 발현 당시의 알퐁스 라티스본, 말년의 알퐁스 라티스본, 알퐁스가 목에 달고 있었던 기적의 메달(좌로부터)
그때 성당의 제단에 갑자기 구름이 피어오르며 빛이 나와 주변이 환해지고 그 가운데에서 한 여인이 나타났다. 여인은 흰색 실크 옷을 입고 푸른색 망토로 양팔을 감싸고 있었으며 아래로 내린 손가락에서는 빛이 뻗어 나오고 있었다. 알퐁스는 여인이 자신을 그윽하게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자 자신이 하느님의 모후 앞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바로 그 자리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였다.
훗날 알퐁스는 이 순간을 이렇게 회상하였다. “위대하며, 위엄 있고, 이름답고, 자비가 넘치며, 축복받은 한 분이 제단에 서 계셨습니다. 그분은 가장 신성하신 성모 마리아였으며, 제가 목에 걸고 있는 기적의 메달에 새겨져 있는 분과 똑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밝게 빛나는 광채 때문에 그분을 제대로 올려다볼 수 없었지만 저는 그분의 손을 유심히 바라보았고 거기에서 용서와 자비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가장 복되신 성모 마리아께서는 제게 한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그분의 현존 앞에서 제가 처한 상황과 저의 죄, 그리고 가톨릭 신앙의 아름다움을 깨달았습니다.” 3분여의 짧은 시간이 흐른 뒤 성모님은 빛과 함께 사라지셨지만 알퐁스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기억하소서’를 바치고 있었다.
마침 뷔시에르 남작이 성당으로 들어와 이 광경을 보고 알퐁스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라고 아무리 물어봐도 알퐁스는 대답하지 못하고 흐느끼기만 했다. 남작은 그를 데리고 나와 마차에 태워 호텔로 출발했다. 알퐁스는 울먹이며 기적의 메달에 입을 맞추고 말하였다.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저를 고해신부님께 데려가 주십시오. 제가 세례를 받지 않는다면 저는 더 이상 살 수 없습니다.” 남작은 알퐁스를 예수회의 빌포르 신부님에게 데려갔고 알퐁스는 고해성사를 받았다. 프라테 성당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기에 ‘침묵의 성모님’, 또는 뤼뒤박 성모님과 똑같은 모습으로 발현하셨기에 ‘기적의 성모님’으로 불린다.
- 성모 발현 경당, 좌측에 있는 흉상은 알퐁스 라티스본, 우측의 흉상은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콜베 신부는 1918년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이 성당에서 첫 미사를 집전하였다.
3) 성모님의 발현 이후
알퐁스는 자신이 가진 세속의 모든 지위는 물론이고 가업으로 물려받은 은행가라는 직업도, 그리고 결혼까지 모두 포기하였다. 그는 10일 후 로마의 추기경에게 세례를 받고 첫영성체를 하였으며, 자신의 형 테오도르와 화해하였다. 1년 후 형이 시온의 성모 여자 수도회를 설립하는데 적극적으로 협조하였으며, 5년 후 가톨릭 사제 서품을 받고 예수회 회원이 되었다.
1855년 알퐁스는 유대인의 개종에 전념하기 위하여 교황 비오 9세의 허락을 받아 이스라엘로 가서 예루살렘에 시온의 성모 여자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1860년 세례자 요한의 부모님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이 살았던 아인 카렘 마을에 노트르담 시온 수녀원과 소녀들을 위한 고아원, 교회를 세웠다. 그는 ‘시온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죽을 때까지 유대인과 무슬림의 개종을 위하여 헌신하다가 1884년 70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 산탄드레아 델레 프라테 성당의 내부. 신자들의 좌석이 제단 쪽이 아니라 성모 발현 경당을 향하여 배치되어 있다.(좌) 아인 카렘에 있는 노트르담 시온 수녀원의 전경(우)
교황청은 성모님의 발현이 있은 지 한 달 만에 신속하게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위원회는 관련자에 대한 조사와 수많은 증언을 통하여 알퐁스의 개종이 전적으로 기적이라는 판단과 그것이 성모님의 강력한 중재를 통해 이루어진 주님의 역사하심이라는 결론을 담은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1842년 6월 3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총대리 파트리치 나로 추기경은 보고서를 바탕으로 프라테 성당에서의 발현을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개입으로 일어난 신성한 기적으로 선언했다. 그리고 화가 나탈레 카르타는 알퐁스의 구술에 따라 발현 당시 성모님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고, 이 성모화는 프라테 성당 내 성모 발현(기적의 성모) 경당에 봉헌되었다. 성모화가 모셔진 프라테 성당에서 많은 기적이 일어나자 1892년 교황 레오 13세는 프라테 성당을 순방하고 성모화에 왕관을 봉헌하였다. 1982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2017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프라테 성당을 순방하였다.
알퐁스 자신의 개종과 유대인에 대한 개종 활동은 가톨릭을 배격하려는 사람들과 유대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알퐁스가 거대 금융자본가의 상속자임을 감안하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이다. 1830년 뤼뒤박에서 무염시태 성모님의 발현, 1842년 프라테 성당에서 무염시태 성모님의 발현, 1846년 라살레트에서 무염시태 성모님의 발현이 이어지면서 1854년 교황 비오 9세는 무염시태 교의를 선포하였다. 1858년 루르드에서 발현한 성모님 역시 당신의 신분을 무염시태라고 밝히시어 무염시태 교리가 합당하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12월호, 최하경 대건안드레아(서울대교구 도곡동성당)] 0 245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