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1일 (목)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레지오ㅣ성모신심

허영엽 신부의 나눔: 사랑의 사도 요한, 자녀들이여, 서로 사랑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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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11-07 ㅣ No.901

[허영엽 신부의 ‘나눔’] 사랑의 사도 요한, “자녀들이여, 서로 사랑하시오”

 

 

2010년 사제의 해 기념 성지순례로 에페소를 방문했다. 고대의 에페소는 튀르키예에서 가장 큰 고대도시이다. 과거에는 실크로드의 종착지요, 거대한 무역항이 발달한 항구도시였다. 에페소는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에 황금기를 누리면서 많은 역사적 변환기에도 엄청난 부를 축적했던 도시였다. 에페소 번성기에는 바닷가 근처에 자리 잡은 도시의 원형극장까지 대리석으로 도로가 이어져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번성하던 도시가 260년쯤 유럽에서 이주해 온 고트족들의 약탈과 방화, 말라리아와 때마침 일어난 대지진으로 폐허의 도시가 되었다. 특히 7세기부터 강에서 유입된 토사가 바다를 메우면서 에페소는 항구의 기능도 사라졌다. 지진으로 에페소는 폐허가 되어 땅속에 잠겼지만 근대에 와서 유적이 발굴되어 과거의 모습을 일부 드러내고 있다. 입구를 따라 내려가면 영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셀수스 도서관이 관광객을 맞이한다. 고대 로마 시대의 도서관 중 하나로, 학문과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기원전 1세기에 에페소는 당시 강대국인 로마제국에 귀속된다. 로마 통치를 거쳐 비잔틴 제국, 다시 오스만 튀르키예 등 강대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옛 영광의 자취는 뒤로한 채 지금은 폐허만 남아있다. 발굴된 에페소의 원형 음악당은 튀르키예에서 가장 큰 규모로 2만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다. 순례객 중 성악가 한 분이 보통의 소리로 음악당 가운데에서 노래를 부르셨는데 앞이나 뒤에까지 잘 들렸다. 당시에 어떤 기술로 이런 음악당을 만들었을까 놀라울 뿐이다. 누구 먼저일 것도 없이 신자들은 성가를 따라 불렀다.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느님을 향한 찬양 소리가 극장 전체를 감싸고 다시 우리의 귓속에 울려 퍼졌다.

 

에페소 성모 마리아의 집

 

 

신비롭게 찾아낸 성모님이 거처하시던 ‘성모 마리아의 집’

 

사실 에페소는 사도 요한과도 관계가 깊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 제자 요한에게 성모님을 모시도록 했다(요한 19,26-27). 이후 요한은 오래도록 에페소에서 활동했다고 전해진다. 에페소는 ‘사랑의 사도’ 요한이 생을 마치기까지 완전한 사랑을 역설한 곳이다.

 

신자들은 사실 에페소 관광지보다 에페소 앞산 남서쪽 능선 아래 ‘피니야 카풀루’의 ‘성모 마리아의 집’ 방문을 더 기다린다. 전승에 따르면 에페소에 도착한 사도 요한과 성모 마리아를 위해 에페소 신자들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에페소 언덕 위에 있는 성모님의 집은 순례자들의 방문이 줄을 잇는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성모님 집의 존재는 잊혀 갔는데 이 성모님의 집터를 찾아낸 역사도 특별하고 신비롭다. 한 번도 에페소를 방문한 적이 없는 독일의 가타리나 에머리히(1774-1824)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녀가 전신마비 증세로 마지막 12년을 침대에 누워 지내면서 자주 예수님과 성모님의 발현을 보았고 증언했는데, 독일의 가톨릭 시인 ‘브렌타노’가 이를 채록해 1852년에 ‘동정 마리아의 생애’라는 책을 냈다. 그는 이 책에서 성모님의 집과 그 주변 환경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했다.

 

1878년 프랑스 번역본이 출판되었을 때 이 책을 읽은 라자로회의 앙리 융(Henri Yung) 신부와 그 일행이 이 책을 근거로 1891년 탐사반을 이끌고 방문하여 책에 기록된 내용과 일치하는 집을 찾았다. 그 이듬해 ‘이즈미르’ 대교구의 티오니 대주교가 이곳에서 미사를 봉헌함으로써 순례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1891년 당시 이곳에는 6~7세기 비잔틴 시대 집 주춧돌만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건물은 1950년 이탈리아 카푸친 수도회에서 건축한 것이다. 1961년 교황 요한 23세는 그 집에서 정기적으로 전례를 거행하는 것을 허락했고, 1967년 교황 바오로 6세,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이곳을 찾았다. 이후 많은 순례자들이 성모님의 집을 찾고 있다.

 

요한 사도가 성모님과 살았던 곳이라 방문하는 사람들의 분위기부터 다르다. 한 해설가분의 이야기에 따르면 오래전 이 산 전체에 큰불이 나서 모두를 태우고 성모님의 집마저 화염에 싸일 위기에 처했다고 한다. 많은 소방대원들이 전력을 다해 성모님의 집 앞 불과 몇 미터를 남겨놓고 불길을 잡았다는 이야기는 또 하나의 기적으로 사람들 사이에 전해진다고 한다.

 

성모 마리아의 집에서 기도하시는 염수정 추기경(좌) 벽에 가득한 기도 쪽지들

 

 

나를 진정으로 알아주는 것처럼 큰 위로와 기쁨이 있을까

 

성모님의 집에서 봉헌한 야외미사 강론에서 동생 허영민 신부는 “기적은 우리 삶 곳곳에 있으며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다. 기적이란 믿음의 결과가 아닌가. 겨자씨만 한 믿음이라도 주십사하는 간절한 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뜻하지 못한 기적을 체험한다.”라고 이야기했다.

 

2007년도에는 유재국 바실리오 신부님과 성지순례를 하면서 신자들과 미사를 조촐하게 봉헌했다. 그때 유 신부님께서 미사 집전을 하셨는데 시작 성호를 그으면서부터 눈물을 흘리셨다. 할아버지 신부님이 눈물을 흘리자 신자들도 덩달아 눈물의 미사를 지냈다. 버스를 타고 내려오면서 유 신부님께서 나에게 “막 미사를 시작하려는데 그 옛날 북한에 두고 온 가족들이 한 명 한 명 떠올라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어. 평상시에는 일부러 생각을 안 하려고 했는데 성모 어머님의 품에서는 마치 아기처럼 울 수 있었다네.”라며 환히 웃으셨던 기억이 난다.

 

몇 명이 들어가면 꽉 차는 성모님의 작은 집에 들어갔을 때 우리를 위해 전구하시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자 가슴이 쿵쿵 뛰었다. 우리 죄인을 위해 하느님께 대신 빌어주시는 성모님, 아, 우리의 어머니! 그곳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 이상하게 눈물이 나고 마음은 평화로워진다. 마치 성모님이 “내 아들아, 나는 너를 잘 안단다.” 하시는 것만 같다. 누군가를 나를 진정으로 알아주는 것처럼 큰 위로와 기쁨이 있을까. 성모님 집 근처의 맑은 샘물이 있고 각자의 소원을 적어 벽에다 붙인다. 사람들은 무슨 소원을 썼을까 하는 쓸데없는 호기심(?)이 발동하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 후 죄인들의 손에 잡혔을 때 요한도 다른 제자들처럼 도망쳤었다. 그러나 다음날 예수님이 처형당하는 십자가 밑으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을 데리고 다가갔다. 그는 십자가 밑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을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스승의 임종을 지키며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가슴 깊이 새겼을 것이다.

 

성모님을 예수님 대신하여 어머니처럼 평생 모셨던 사랑의 사도 요한은 전설에 의하면 거동이 불편해서 간신히 집회에 참석해서도 설교에서는 늘 “자녀들이여, 서로 사랑하시오”라며 사랑을 역설했다고 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11월호,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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