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1일 (목)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십자가의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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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11-07 ㅣ No.900

[레지오 영성] 십자가의 복음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코린토 전서(1,23-24)의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씀의 더 깊은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이 말씀의 전반부로 덧붙여진 말씀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1코린 1,22-23) 즉,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과연 그리스도인의 상징은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불자들의 상징인 평온하고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좌정하신 부처님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두 분이 지향하신 삶은 모두 사랑과 자비이며, 참된 평화와 행복의 길을 가르쳐주셨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죄와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역설적으로 당신이 죄인의 십자가를 지셨고, 이렇게 우리의 죄를 끌어안으시며 그 고통과 죽음 속으로 깊이깊이 들어오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처참한 십자가가 오히려 순수한 사랑의 결정체가 되게 하시고 우리도 이 십자가의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도록 초대하십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앞장서서 십자가를 지고 나아가셨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를 내어주는 것, 한 알의 밀알처럼(요한 12,24 참조) 자기에게서 죽는 것임을 십자가를 통하여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의 천주성을 온전히 숨기시며 수난의 길을 걸으시고, 아버지를 사랑하는 아들로서 죽기까지 순명하시고 의탁하신 예수님께서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아버지의 모습을,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그대로 드러내셨습니다. 스스로 섬기는 사람이 되시고, 결박되어 모욕과 수난을 당하시고, 극도의 고통 속에 당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여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인간적인 몸짓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이분의 순명은 단순한 복종이 아니었습니다. 그 순명은 아버지의 모습을, 그분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심으로써 그분께 순명하셨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인지도 모릅니다. 이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죽음과 공포와 저주의 비참한 십자가를 생명과 평화와 축복의 아름다운 십자 나무로 만드셨습니다. 그야말로 ‘죽도록 사랑하시는’ 눈물겨운 사랑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 드러내

 

예수님께서 평생 추구하시고 이루시고 완성하신 것은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그분에게 당신 자신의 일이란 없었습니다. 오로지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고, 그리하여 그분의 말씀과 행동은 모두 아버지를 드러내고 아버지를 느끼게 하였습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만나신 후에 먹을 것을 권하는 제자들에게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4)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다고 당신을 박해하기 시작하는 유다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로 강생의 순간부터 십자가의 죽음까지 예수님께서는 하나둘 모든 것을 비워내시고 내어주셨지만, 끝까지 포기하지도 양보하지도 않으시고 짊어지고 가신 것은 바로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마치 빈 잔의 공간처럼 그분의 비우심은 어떤 체념과 같은 막연한 허공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담기 위한 적극적인 투신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아버지의 뜻’은 우리가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매일 바치는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는 바로 그 ‘아버지의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도를 항상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 되어 하느님께 바칩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수난의 신비는 바로 사랑의 신비입니다. 또한 사랑의 신비는 이렇게 수난의 신비를 통하여 가장 결정적으로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대로 십자가를 통하여 가장 큰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바로 이 사랑을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벗어 던지시고 수난을 향하여 나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여러 차례 쓰러지셨지만 거듭거듭 일어서셨고 그 혹독한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지극히 역설적이게도 당신의 죽음으로써 생명을, 영원한 생명을 피워내셨습니다.

 

이렇게 십자가는 죽음의 독침을 무력하게 하였고, 이제 우리에게 구원의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레지오 단원들은 바로 십자가의 사도

 

많은 경우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부담스러워하거나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십자가는 고사하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나약하신 모습에 원망을 늘어놓는 사람도 보았으며, 저도 한때는 십자가가 그냥 싫었고 슬펐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왜 하필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의 성업을 이루셨는가 불만스러운 의문을 품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제는 이 세상에 죄와 고통과 죽음이 있는 한 십자가는 피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임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저의 이 십자가를 잘 짊어지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앞장서 가시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끊임없이 바라보아야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힘과 하느님의 지혜를 체험으로 배우고 익히는 삶의 여정을 인내롭게 걸어가야 함을 스스로 다짐해 봅니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사도 바오로와 함께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토 4,10)라고 선포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갈라티아 6,14)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레지오 마리애 교본에서는 십자가의 표지는 희망의 징표임을 역설하면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업은 주님 자신의 표지, 즉 ‘십자가’ 표지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십자가’ 표지가 찍히지 않으면 활동의 초자연적 특성이 흐려지며, 참된 성과를 얻기도 힘들다.”(교본 453쪽) 과연 단원들의 활동에 있어서 여러 악조건과 십자가는 이에 굴하지 않는 단원들의 지속적인 분투 속에 성공의 장애가 아니라 오히려 성공의 전제조건이 되며, “불가능 속에서 성공을 이끌어 내시고, 불완전한 연장으로 당신의 위대한 사업을 일구어 내심으로써 당신의 권능을 기꺼이 드러내고자”(교본 453-454) 하시는 하느님을 더욱 깊게 체험하는 기회가 됩니다. 그러므로 레지오 단원들에게 십자가는 상처가 아니라 사랑의 승리를 보장해주며, 실패는 늦추어진 성공이며 믿음과 희망 속에 한 차원 더 높은 기쁨입니다. 레지오 단원들은 바로 십자가의 사도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11월호, 안정호 이시도르 신부(이주노동자 지원센터 이웃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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