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1일 (목)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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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영성, 나는 평신도다43: 제언 (3) 제가(濟家) - 노인의 복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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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10-28 ㅣ No.118

[평신도 영성, 나는 평신도다] (43) 제언 (3) 제가(濟家) : 노인의 복음화


노인을 위한 노인에 의한 노인의 복음화가 필요

 

 

- 교회 공동체는 노인 평신도들이 교회 활동의 여러 분야에 참여할 수 있도록 조직을 개편하고 배려해야 한다. 사진은 수원교구 노인대학 예술제에 참가한 어르신들의 공연. 가톨릭평화신문 DB.

 

 

나이 많으면 고리타분하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도 여전히 젊은이다운 유머 감각과 활동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만약 하느님이 청년과 장년을 통해서만 일하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어마어마한 힘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나이가 많아 더 이상 일할 능력이 없다고 여겨지는 그 어르신들을 통해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늙었을 때 하느님 유일신 신앙의 출구를 여는 대장정에 들어갔고, 모세는 나이 들었을 때 지팡이 짚고 백성을 이끌었습니다. 엘리사벳의 남편 즈카르야는 노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성공적으로 사제직을 수행했습니다.

 

 

어르신은 신앙 전통의 증인

 

특히 성경은 주님을 두려워하는 지혜가 풍부한 사람의 상징으로 노인을 제시합니다.(집회 25,4-6 참조) 사실 노인은 교회와 사회에서 신앙의 전통에 대한 증인(시편 44,2; 탈출 12,26-27 참조), 인생의 교훈을 가르치는 스승(집회 6,34; 8,9 참조), 사랑의 장인이 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어르신의 의미’는 성경에만 국한하지 않습니다. 88세의 미켈란젤로는 교회 건축을 설계했고, 80세의 괴테는 파우스트를 완성했습니다. 톨스토이는 67세에 자전거를 배웠고,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는 89세에 아프리카 병원에서 수술을 집도하였습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81세에 미국 헌법 작성을 도왔고,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도 91세에 작품 활동을 하였습니다.

 

어르신의 힘을 과소평가하면 안 됩니다. 어르신들은 20대 혼돈의 시기를 질주했고, 시행착오 가득했던 30대를 거쳤습니다. 또 가정과 사회 공동체를 책임져야 하는 40대와 50대를 버텨내신 분들입니다. 그 과정을 거쳤기에 스스로의 단단한 껍질을 깨고 나오는 새로운 창조의 시기, 60~80대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교회는 일찌감치 노인에 대한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노인은 역사의식과 전통의 표징적 인물입니다. 그러므로 노인들을 소외시키는 사회는 결국 역사의식과 신원 의식, 그리고 전통의 상실을 맞게 될 것입니다.”(서울대교구 시노드 후속 교구장 교서 「희망을 안고 하느님께」 50항, 2003)

 

“교회는 노인들이 신앙의 빛 속에서 자신의 삶을 풍요하게 살찌우며 그 안에서 자신들이 여전히 이웃을 위하여 봉사할 수 있는 소중한 가치들을 재발견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희망을 안고 하느님께」 51항)

 

 

교회 공동체가 관심 가져야

 

따라서 교회는 노인 스스로의 복음화, 노인을 통한 세상의 복음화 노력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노인 평신도들이 교회 활동의 여러 분야에 참여할 수 있도록 교회 조직을 개편하고, 노인들이 미사, 고해성사, 순례, 피정 등에도 참여하도록 배려하여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걷기 힘든 노인들을 생각하여 건물 구조를 개선하고, 나들이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신자들을 배치하여 노인들이 교회의 각종 행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이는 것 또한 필요할 것입니다. 신자가 아닌 노인들에게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과 함께 가장 중요한 것은 노인들의 복음화일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제대로 자리 잡기 위해선 ‘노인 주일’의 제정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노인들은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삶의 링 위에서 평생 혼자 힘으로 혈투를 벌여온 분들입니다. 그 삶과의 싸움, 그리고 영적인 전투는 아마도 죽는 그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신앙인입니다. 그래서 압니다. 링 위에 우리를 올린 이유가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 이유를 찾다 보면 문득 깨닫게 됩니다. 할 일이 많습니다. 쉴 새 없이 팔을 앞으로 뻗어야 합니다. 삶의 링 위에 올린 분은, 링 위에서 버틸 힘도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링 위에서 땀 흘리다 보면, 언젠가는 경기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릴 것이고, 그때 기쁜 마음으로 링에서 내려오면 됩니다.

 

우리 모두 함께 오래 하느님의 은혜 안에서 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복음화의 기쁨을 충만히 만끽하면서 말이죠.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축복이 이 글을 읽는 모든 분에게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너는 장수를 누리고 무덤에 묻힐 것이다.”(창세 15,15)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10월 20일, 정치우(안드레아, 새천년복음화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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