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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성사] 신앙교리: 성체에 대한 공경 (3-4) 중세교회에서의 성체공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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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3-05 ㅣ No.297

[공부합시다! 신앙교리] 성체에 대한 공경 (3) 중세교회에서의 성체공경 ①

 

 

개인신심미사의 번성

 

중세에 들어 성체성사가 가졌던 공동체적인 특성이 갈수록 희박해지고 사제가 홀로 집전하는 사적(私的)인 미사가 더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성찬례는 주교에 의하여 집전되고 사제들은 하나의 사제단으로서 참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요. 그러다가 로마와 같이 큰 도시에서는 하나의 성찬례로 모자라 주교가 주례하는 성찬례 외에도 다른 성당의 주임 사제들이 따로 집전하는 미사가 많아지게 된 것입니다.

 

또한 순교자의 무덤 위에 세워진 제단에서는 그곳을 순례하는 이들을 위한 성찬례가 성행하였고, 큰 수도원의 경우에는 공동집전 외에 개인적으로 성찬례 거행을 원하는 사제가 많아졌습니다. 그렇게 하여 7세기 이후 서방교회에서는 사제들이 성찬례를 공동으로 집전하기보다 개별적으로 집전하는 것이 일반적이 되었고, 이러한 경향이 오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미사가 사제의 공동집전보다는 개인적으로 거행하는 신심으로 성행하게 된 것은 특히 8-11세기경까지의 미사이해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즉 미사가 공동체의 전례가 아닌 개인적인 기도의 장으로서 가장 효과적인 신심행사로 이해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같은 성당 내에 여러 제단이 생기게 되었고, 사제는 신자들과는 무관하게 벽을 보고 혼자서도 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한 해 전체의 미사 본문이 담긴 ‘완전한 미사경본’이 생겨남)

 

 

미사는 성직자의 전유물이고 신자들은 그 구경꾼?

 

13세기에 들어서 미사는 전 교회 구성원이 함께 거행한다는 개념이 사라지고 성직자만의 전유물이 된 듯 했습니다. 미사거행에 있어서는 사제가 행하는 것만 ‘유효’하다는 인식이 생겨나, 평신도는 독서낭독도 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어려운 전례언어가 신자들의 이해를 가로막아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미사는 말씀을 선포하는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고, 말씀보다는 전례 의식과 또 예식에 쓰이는 외적인 물건, 그리고 성사들의 표지가 더 큰 비중을 갖게 되었습니다. 적지 않은 신자들이 미사언어인 라틴어를 잘 이해할 수 없어 미사참여에 소극적이 되었고, 미사를 바라보기만 하는 시청자요 성체성사의 구경꾼이 되어 갔습니다.

 

또한 성당이 커지면서 신자석은 사제석에서 완전히 분리되었고, 그에 따라 평신도와 성직자 간의 차별도 켜져 갔습니다. 한편 이때부터 그리스도께 대한 기도를 중재해 줄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에 대한 신심’이 성행하여 교회력에 성인을 기념하는 축일들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미사를 거행하는 제단은 공동체의 식탁으로 신자들 가까이 있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여러 층계와 칸막이와 문턱으로 이루어진 높은 제단이 신자들에겐 근접하기 어려운 대상이 되었습니다.

 

 

실체변화교리와 영성체 기피 현상

 

12세기 말에는 “빵 그 자체가 그리스도 자체로 변화한다.”고 하는 ‘실체변화’(Transsubstantiatio) 개념이 등장했습니다. 실체변화 개념은 ‘성체 안의 그리스도’, 정확히 말하자면 ‘성체이신 그리스도의 실제적 현존’을 강조하는 개념이지요. 그러다보니 이제 미사성제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이 빵의 형상에만 제한되어 있는 듯이 이해되는 경향이 생겨났고, 이에 따라 눈에 보이는 성체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지나친 경외사상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성체를 영하는 관습이 생겨난 것도 이 때부터입니다.

 

유감스러운 것은 그리스도의 성체 현존을 강조함에 따라 신자들은 영성체를 더 멀리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제 신자들은 ‘성체를 잘못 영하면 스스로를 단죄한다’는 식의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니 각 사람은 자신을 돌이켜보고 나서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합니다.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운데에 몸이 약한 사람과 병든 사람이 많고, 또 이미 죽은 이들도 적지 않은 것입니다.”(1코린 11,27-30)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의 영성체 규정

 

신자들의 영성체 기피 현상이 심화되자 교회는 이제 “신자는 적어도 1년에 한번은 영성체를 해야 한다.” 라는 규정을 발표하였습니다. 1215년의 제4차 라떼란 공의회는 ‘실체변화’라는 표현을 정식으로 이용하여 “미사성제 안에서의 축성으로 빵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고 하면서, 신자들은 적어도 1년에 한번 부활 전에 고해성사를 받고 영성체를 해야 한다고 규정한 것입니다.(1983년, 새교회법 920조의 규정도 그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성체를 위한 교회의 철저한 준비 규정은 신자들의 영성체를 여전히 어렵게 한 면이 있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인간은 죄인’이라는 점을 많이 강조,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철저한 신앙생활이 필요하다고 가르쳤지요. 따라서 신자들은 영성체에 지나친 주의를 기울여야 했고, 그 결과 그들은 성체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거양성체의 등장

 

성체에 대한 경외심이 일방적으로 강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미사에 참여하는 신자들은 자신들이 영성체에 초대받고 있다는 의식을 갈수록 덜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라틴어로 거행되는 말씀의 전례를 잘 이해할 수 없어 영적으로 항상 부족함을 느꼈고, 그러다보니 미사전례를 거행하는 사제가 확실한 볼거리를 제공하면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신자들의 요구에 부합하여 생겨난 것이 바로 ‘거양성체’ 의식인데, 미사의 가장 중요한 순간으로 여겨진 ‘성체의 거양’은 12세기 말부터, ‘성혈(성작)의 거양’은 14세기 말부터 행해졌습니다. 게다가 거양성체와 관련하여 일어난 성체기적의 이야기들이 성체에 관한 신자들의 공경심을 자극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영성체 대신에 눈으로 성체와 성혈이 담긴 성반과 성작을 우러러보며 성체를 공경하는 신심이 큰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몇몇 학교의 경우에는 거양성체 때 수업을 중단하고 학생들에게 거양성체에 대한 주의와 공경을 강조할 정도였지요. 거양성체에서 성체를 올려다본다는 것은 구약성경의 ‘구리뱀 이야기’를 상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뱀에게 물렸을 때 모세가 쳐든 구리뱀을 쳐다본 사람은 죽지 않았듯이, 성체를 올려다보는 사람도 그와 같은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지요.(민수 21,4-9 참조)

 

이렇게 성체에 대한 과도한 공경심은 영성체 방법의 변화로 이어졌습니다. 즉 신자들은 차츰 성체를 영할 때 더러운 손으로 받아 모시면 불경하니 혀로 (사제의 손에서 바로) 받아 모셔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게 된 것이지요.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9년 3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목국장, CBCK교리교육위원회 위원)]

 

 

[공부합시다! 신앙교리] 성체에 대한 공경 (4) 중세교회에서의 성체공경 ②

 

 

성체조배와 같은 성체신심의 확산

 

13세기 즈음에 신앙생활에서 성체성사를 멀리하는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조성되었습니다. 하지만 교회개혁을 이끌었던 수도원 등에서는 이미 12세기경부터, 특히 분도회 내의 엄격수도회인 씨토회와 프란치스코회 등에서 성체에 관한 공경이 확산되어 나갔습니다. 성체조배와 같은 일반신자들의 성체신심의 경우에는 특별히 우리 교회내의 위대한 민중운동가라고 할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 힘입은 바가 컸습니다. 이와 함께 성체를 보존하는 제대 앞에서 가져야 할 경외(敬畏)의 자세도 강조되었습니다. 제대에 대한 이러한 경외심은 13세기에 파리 시노드에서 의결되어 다른 교회 시노드로 확산되었습니다.

 

 

병자성사를 위한 봉성체와 감실의 등장

 

미사 밖에서 성체공경이 본격적으로 행해진 것은 환자를 위한 사목적 배려에서, 즉 병자성사 때 성체를 모셔가는 데서 유래하였습니다. 10세기 말부터는 이렇게 임종을 앞둔 병자에게도 소위 ‘노자’(路資, Viaticum)로 성체를 영해주기 위해 성체를 (미사 시간 외에) 성당에서 보관하게 되었습니다. 즉 ‘미신적인 남용을 목적으로 한 도난’과 ‘이교도에 의해 저질러지는 모독’으로부터 성체를 보호하기 위해 ‘감실에 성체를 보관하고 열쇠를 채우기’ 시작한 것이지요.

 

네메세기의 글을 봅니다. “11세기에서 12세기에 걸쳐서 성체를 보존하기 위하여 아름답게 장식한 감실이 만들어졌다. 또 신자는 성찬례 때 이외에도 성체를 보기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름다운 성체 현시대가 만들어지고 성체가 신자에게 예배받도록 현시되고 성체를 들어 높여서 신자에게 축복해 주는 의식이 행해지게 되었다.”(P. 네메세기, 주의 만찬, 164.)

 

이러한 ‘미사 밖에서의 성체보존 규정’이 1215년 9차 라떼란 공의회에서 정식으로 의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은 사제가 병자성사를 집전하러 (성당 밖으로) 갈 때에도 성체에 대한 공경을 나타냈습니다. 즉 그들은 촛불을 들고 종을 치면서 행렬을 이루어 (문밖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함께하며) 병자를 방문하는 사제와 동행하였던 것입니다. 때문에 13세기 말 교회에는 사제가 병자성사를 집전한 다음에도 (환자의 집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신자들이 성체를 공경할 수 있도록 ‘적어도 두 개의 축성된 제병을 모셔가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병자 봉성체는 특별히 16-17세기에 걸친 공의회에서 강조되었습니다.)

 

이 시기 교회는 성체를 영할 수 없는 환자들에게도 성체를 모셔가서 (영성체는 못하더라도) 성체를 바라보며 기도하도록 배려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그러한 환자들에게 신령성체(信領聖體)를 권하였습니다. (영성체를 못하는 환자에게 조배와 경배를 위해서 성체를 모셔가던 이 관습은 16세기에 금지되었습니다.)

 

 

성체행렬과 성체현시 및 성체강복의 시행

 

이제 ‘그리스도의 실제적 성체 현존에 대한 신심’은 신자들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는 욕구와 더불어 성체성사를 기념하는 행렬로 이어졌습니다. 즉 성체에 대한 신자들의 신심에 상응하여 성지주일과 성목요일, 성금요일 등에 성체를 모시고 사제들과 신자들이 성대한 행렬을 거행한 것입니다. 이는 1264년 우르바노 4세 교황에 의해 성체성혈대축일이 제정되고 경축됨으로써 본격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행렬의 방식은 신자들이 성체를 모시고 성가를 부르면서 꽃을 길에 뿌리는 등 여러 가지 의식으로 성체에 대한 신앙과 감사를 표하며 마을을 행진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아가 14세기엔 성체현시와 성체강복도 성행하였습니다. 이때 특이한 것은 그 전에는 성체를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상태로 (감실에만) 보관하며 공경하다가 이제는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상태로 (감실 밖에) 현시하며 공경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미신적인 미사신심의 발생

 

미사 밖에서의 성체에 대한 공경은 심화되었지만, (그에 비례하여 미사 안에서의) ‘성찬례가 가진 제사와 식사의 의미’가 희박하게 되어 14-15세기를 거치면서는 미사효과에 대한 지나치게 과장된 신심이 발견됩니다. 예를 들어, (미사에 참례하는 사람은) 미사시간 동안 더 이상 늙지를 않는다든지, 미사 참례하는 날은 벼락을 맞지 않는다든지, 급사를 면할 수 있다든지 하는 미신적인 믿음입니다. 미사 끝에 드리는 비를 기원하는 예식이 생겨난 것도 이때입니다.

 

한편 미사의 효과에 대한 지나친 생각으로 미사 신청이 쇄도하여, 미사만 많이 드리려고 하는 소위 ‘제단 사제’, 즉 미사를 드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사제들이 많아졌습니다. ‘(세상을 떠난) 죽은 이를 위한 미사’가 성행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미성숙한 교회전례는 종교개혁(분열)의 한 이유가 됩니다. 이해를 위해 다음 글을 인용합니다.

 

“사실 중세 말기의 그리스도인은 신학에 의한 충분한 지도를 받지 않았으므로 일반의 신앙생활은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끌리고 성체에 관해서도 사람들 간에 다양한 미신이 생겨났다. 예를 들면, 일정한 수의 성찬례를 계속 바치고 청원하면 그 청원은 꼭 들어 허락함을 받는다는 미신이나, 또 어떤 특정의 기원을 위하여 성찬례를 봉헌하도록 사제에게 청하는 경우에 신자가 사제에게 주는 예물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혼란한 방법이 취해졌다. 사제 중에는 예물을 받기 위하여 매일 3-4회나 성찬례를 바치는 것을 유일한 업으로 삼고, 그것만으로 하루 종일 태만하게 지내는 사제가 중세 말기에는 허다했다. 동시에 이 시기의 교회의 상태는 일반적으로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성찬례의 집행 방법도 충분한 경건이 결핍되고 사람들은 성당이 더러워도 모르는 척하고, 또 성찬례 중에 부르는 찬미가는 신심을 더하기보다는 세속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었다. 더욱이 신자가 성체를 영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이와 같은 일반적인 상황에서 성체에 관한 그릇된 생각이 나온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할 만하다.”(P. 네메세기, 주의 만찬, 167.)

 

 

성체공경에 대한 종교 개혁가들의 이견

 

‘사람의 의화는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원칙이 16세기의 종교 개혁자들의 주장입니다. 그들은 의화를 위한 조건으로 ‘하느님의 자애를 신뢰하는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강조했고, 이를 자신들의 근본교의로 내세웠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가 교회의 사제가 행하는 성찬례에 의하여 사람들에게 분배된다.” 라는 가톨릭교회의 교의를 배척했습니다.

 

그런데 종교 개혁자들 대부분은 성찬례가 ‘십자가상 그리스도의 새로운 봉헌’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일치하였지만, ‘성체 안의 그리스도의 현존’의 문제에 관해서는 의견을 달리했습니다. 즉 루터는 (실체변화라는 이론은 배척하면서) 복음서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몸의 현존을 굳게 믿었던 반면에, 쯔빙글리나 그의 제자인 칼슈타트(Karlstadt), 에콜람파디우스(Oecolampadius)의 경우에는 ‘성체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상징에 불과하다.’며 성체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실질적 현존을 부정하고, 미사의 거양성체와 감실의 성체보관에 대해 비난하는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9년 4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목국장, CBCK교리교육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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