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24)
Ⅳ 친교의 교회
5. 세상과의 친교
5) ‘지역 사랑방’이 되어야 한다.
2005년 통계청에서 인구주택총조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그 결과 천주교는 10년 동안(1985년~1995년까지) 228만 명이 증가한 반면 개신교는 14만 4천 명이 감소하였다. 개신교는 원인 분석과 함께 대책마련에 들어갔다. 가장 큰 원인으로 “개신교는 지역 교회가 되지 않고 있다. 지역과 관계없이 교인들이 모이니 대형 버스가 신자들을 실어 나른다. 앞으로는 교회가 지역 사랑방이 되어 탄탄하게 뿌리를 박는 쪽으로 변해야 한다.”(시사저널 2006.10.19)고 진단하였다.
교회는 성사(聖事)이다. 성사는 목적이 아니고 도구이다. 교회가 교회를 위한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성사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개신교의 잘못이 여기에 있었다. 아직도 개신교는 교세확장에 혈안이 되어 있다. 이것은 복음화에 역행하는 행위이다. 복음화에 역행하면 복음과 멀어지게 되고 그 정체성도 상실하게 되면서 교회의 기능과 사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교회를 지탄하고 교회를 떠나게 된다.
“중생이 아프면 부처도 아프다.”
불교에서 하는 참으로 의미있는 말이다. 예수님 육화의 신비를 잘 설명해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온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인간과 똑같은 사람이 되셨고 뿐만 아니라 인간이 겪는 고통을 똑같이 겪으셨다. 정호승 시인이 지은 좋은 시가 있다.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
“서울에 푸짐하게 첫눈이 내린 날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고요히 기도만 하고 있을 수 없어 추기경 몰래 명동성당을 빠져나와
서울역 시계탑 아래에 눈사람 하나 세워놓고 노숙자들과 한바탕 눈싸움을 하다가
무료급식소에 들러 밥과 국을 퍼주다가 늙은 환경미화원과 같이 눈길을 쓸다가
부지런히 종각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껌 파는 할머니의 껌통을 들고 서 있다가
전동차가 들어오는 순간 선로로 뛰어내린 한 젊은 여자를 껴안아주고 있다가
인사동 길바닥에 앉아 있는 아기부처님 곁에 앉아 돌아가신 엄마 얘기를 도란도란 나누다가
엄마의 시신을 몇 개월이나 안방에 둔 중학생 소년의 두려운 눈물을 닦아주다가
경기도 어느 모텔의 좌변기에 버려진 한 갓난 아기를 건져내고 엉엉 울다가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부지런히 다시 서울역으로 돌아와
소주를 들이켜고 눈 위에 라면 박스를 깔고 웅크린
노숙자들의 잠을 일일이 쓰다듬은 뒤 서울역 청동빛 돔 위로 올라가
내려오지 않는다. 비둘기처럼”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밤에 몰래 바티칸을 빠져나가 노숙자들을 만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교황께서 그들을 천주교 신자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다. 교회를 복음화하고 그들 또한 복음화시키기 위함이다. 앞에 소개한 시의 그 어느 구절에서도 특정 종교의 교세확장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복음화이다. ‘복음화’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로 인도하며,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내적 삶의 변화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 더욱 완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 또한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 계획에 반대되는 인간의 판단 기준, 가치관, 관심, 사상, 생활방식 등을 복음의 힘으로 바로 잡는 것” 이다. 또한 ‘새로운 복음화’는 “복음을 일방적으로 전하기보다는 다른 종교나 문화와 진솔한 대화를 통해서 진리를 찾아내고 구원을 위한 인류의 공동선을 증진하려는 노력을 포함한다. 나아가 세상과의 대화와 협력을 통해 평화 연대, 정의와 자유와 같은 보편적 가치들에 기초하는 생명과 사랑의 문화를 창출함으로써 인간생활 전반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변화시키는 것이다.”(평화신문 2014.7.27) 교회는 이 ‘복음화’, 혹은 ‘새로운 복음화’를 위해서 존재한다. 이태석 신부님은 아프리카 수단의 톤즈에서 성당을 짓기보다 학교를 먼저 세웠다. 교회가 ‘지역 사랑방’이 되기 위함이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마태 9,13) 바오로 사도도 말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1코린 1,17)
소공동체가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선교’ 개념에 붙들려 있거나 갇혀있다. 과거의 ‘선교’의 정의는 “교회로부터 파견된 선교사들이, 아직 복음을 받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민족이나 지역에 복음을 가르치고 그들을 개종시켜 교회를 부식(扶植)하는 활동”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성사성, 즉 ‘위함’의 의미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소공동체 사목을 통하여 우리 교회의 미래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야 한다. 종교를 위한 종교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교회를 위한 교회의 우물 안의 개구리식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떤 소공동체 본당은 성당 주차장으로 지역 주민들에게 주차 편의를 제공하고 또 어떤 본당은 공부방을 만들어 지역의 학생들에게 공부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또 어떤 본당은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무료급식소를 운영하거나 봉사하기도 한다. 이 모두가 교회가 ‘지역 사랑방’이 되기 위함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소집되면서 “교회가 현대 사회를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었다. ‘복음나누기 7단계’의 여섯 번째 단계인 활동 단계에서도 이것을 묻고 있다. “우리가 지역 사회를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세상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 “그들은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바라고 있는가?”를 묻고 토의하면서 구체적인 활동계획을 수립하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안 되면 레지오마리애 활동 보고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소공동체의 어려움이 여기에 있다. 아직도 의식 개혁이 안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자된 소명, 교회의 소명, 소공동체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모르거나 실천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이 소홀히 되면 소공동체는 힘을 잃게 되고 소공동체를 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아직도 많은 소공동체에서 본당의 일에 대해서는 활발하게 토의하면서 관심을 갖지만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들만의 잔치에 빠져있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하루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획기적인 의식전환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친교의 교회’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월간빛, 2014년 9월호, 박성대 요한(제2대리구장, 주교대리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