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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교회 그때 그 순간 40선 (21) 김대건의 순교와 병오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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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5-29 ㅣ No.1689

[가톨릭평화신문 - 한국교회사연구소 공동기획] 한국 교회 그때 그 순간 40선 (21) 김대건의 순교와 병오박해


수선탁덕(首先鐸德) 김대건 신부, ‘사교의 괴수’ 죄목으로 새남터에서 순교

 

 

- 새남터 성지에 설치된 대형 유리화 ‘김대건 신부님의 축복’.가톨릭평화신문 DB

 

 

선교사 영입 바닷길 살피다 순위도에서 체포

 

병오박해는 헌종(憲宗) 12년, 1846(병오)년에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일어난 지엽적인 박해를 가리킨다. 당시 한국에 입국해 있던 페레올(Ferreol, 高) 주교는 다블뤼·김대건 신부와 함께 전교에 힘쓰는 한편, 조선 입국 기회를 살피며 만주(滿洲)에 머물러 있던 메스트르(Maistre, 李) 신부와 최양업(崔良業) 부제를 맞아들일 방도를 강구하고 있었다. 주교는 육로를 통한 입국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서해(西海)에서 비교적 안전한 바닷길을 찾아보게 하도록 김대건 신부를 황해도로 보냈다.

 

1846년 5월 13일 부활 대축일을 맞이한 다음 날 한양을 떠난 김대건 신부는 황해도 연안의 백령도(白翎島)에 다다랐다. 그는 중국 모인도(毛仁島)를 거쳐 조선에 은밀히 입국하는 해로(海路)를 구상, 배를 빌려 메스트르 신부 등을 데려올 방안을 살피던 중 순위도(巡威島)에서 포졸들에게 우연한 일로 잡히는 몸이 되었다. 그래서 김대건 신부는 배 주인인 임성룡과 뱃사공 엄수(嚴秀) 등과 함께 옹진(甕津)의 옥으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5일 후에는 해주(海州)로 이송되어 신문을 받았는데, 그의 신분이 알려지자 해주 감사는 일의 심각성과 중대성을 알고, 그를 곧 서울로 압송시켰다.

 

탁희성 작, ‘김대건 신부 새남터 순교 행렬’,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제공

 

 

서울로 압송돼 천주교 탄압 부당성 지적

 

김대건은 해주의 신문 과정 중에 처음에는 자신을 우대건(于大建)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하고, 자신은 마카오에서 여행을 왔다고 증언하였다. 이는 아직 한양 인근에 있을지 모르는 페레올 주교와 베르뇌 신부에게 피난 갈 시간을 벌어주고, 자신의 신분이 빨리 노출되지 않도록 하려는 방안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신문이 이어지자, 마침내 자신의 성(姓)이 김(金)가이며 “한번 나고 한 번 죽는 것은 인간이면 면할 수 없는 것인데, 이제 천주를 위해 죽게 되었으니 도리어 이것은 제가 원하는 것입니다. 오늘 묻고 내일 묻는다 해도 오직 마땅히 이와 같을 뿐이니⋯ 빨리 때려 빨리 죽이십시오”라고 증언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김대건은 계속되는 신문에도 불구하고 그가 천주교 신부임을 밝히며 천주교 탄압의 부당성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세계 정세를 알려 정부 당국의 각성을 촉구하는 한편, 교우들을 대라는 가혹한 추궁에도 굴하지 않고 이미 밝혀진 교인들만을 지적하였다. 그러는 동안 그와 관련된 10여 명이 잡혔는데, 그해 음력 6월에는 배 주인인 임성용의 부친 임치백(林致白, 요셉) 등이 잡히고, 음력 7월 10일에는 일찍이 「기해일기」를 적어나간 현석문(玄錫文, 가롤로) 등이 잡혔으며, 8월에는 한이형(韓履亨, 라우렌시오)이 체포되었다.

 

 

-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새남터 성지. 가톨릭평화신문 DB

 

 

1846년 9월 16일 한강 새남터에서 참수형

 

이때 김대건이 서해안을 통해 보낸 편지와 지도가 압수당했는데, 서양어의 필체가 다른 것을 보고 조선의 관리는 국내에 외국인 선교사가 있음을 의심하고 신문하였다. 그러자 김대건은 철필을 가져다주면 같은 사람이 다른 필체를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며, 실제로 시범을 보여줌으로써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신문 과정 중에 김대건은 자신이 예전에 마카오로 보내진 세 소년 중 한 명이라 증언하였고, 이를 들은 판관들과 구경꾼들은 “가엾은 젊은이! 어려서부터 고생이 많았군!” 하고 안타까워하였다. 김대건은 3개월이 넘는 옥살이 중 서양지도를 번역하고 지도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런데 때마침 그해 6월 하순 프랑스 군함 세 척이 조선에 와서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순교한 앵베르(Imbert, 范世亭) 주교와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 등 프랑스인 세 성직자를 죽인 책임을 묻자 민심이 매우 흉흉하여 정부는 김대건 신부 등의 처형을 서두르게 되었다.

 

 

- 김대건 신부가 그린 ‘조선 전도’.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김대건 신부는 그 해 9월 15일, 국가에 대한 반역과 사교(邪敎)의 괴수라는 죄목으로 군문효수(軍門梟首)의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다. 잡혀있던 교우들 가운데 배교한 자는 석방되고 신앙을 지키고 증언한 교인에겐 모두 사형이 선고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그해 9월 16일 한강 새남터에서 참수되어 순교하고, 김 신부의 뒤를 이어 끝까지 신앙을 지킨 현석문 등 남녀 교우도 그해 9월 20일 모두 순교의 피를 흘렸다. 이때 순교한 분은 김대건 신부를 비롯하여 현석문·임치백·우술임(禹述林, 수산나)·김임이(金任伊, 데레사)·이간난(李, 아가타)·정철염(鄭鐵艶, 가타리나)·남경문(南景文, 베드로)·한이형 등 9명이었다.

 

김대건은 사형 직전 자신에게 사제품을 주었던 페레올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 “제 어머니 (고) 우르술라를 주교님께 부탁드립니다. 10년이 지나 며칠 동안 아들을 볼 수 있었으나 다시 곧 아들과 헤어져야 했습니다. 부디 슬퍼하실 어머니를 위로해 주십시오”라고 하직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한글로 교우들을 향한 마지막 편지를 남겼다.

 

“교우들 보아라. 온갖 세상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다. 이 같은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 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를 알지 못하면 태어난 보람이 없고 살아도 쓸데가 없다. ⋯내가 죽는 것이 너희 육정과 영혼의 일에 어찌 거리낌이 없겠는가? 그러나 천주께서 오래지 아니하여 너희에게 나보다 더 착실한 목자를 주실 것이니, 부디 서러워 말고. ⋯영원히 천주 대전에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 천만 바란다. 잘 있거라.”

 

 

- 장발 화백이 1925년 김대건 신부 시복식에 참석한 후 그린 성화. 가톨릭평화신문 DB

 

 

한국인 첫 사제의 용덕과 굳건함 기록

 

페레올 주교는 수리치골 교우촌으로 피신하면서 아들처럼 여겼던 김대건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였다. 그리고 그의 순교와 조선의 순교자들에 대한 소식을 정리하여 「기해-병오박해 순교자전」을 프랑스어로 적어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보냈다. 페레올 주교가 전해주는 김대건의 새남터 순교 장면은 한국인 첫 사제의 용덕과 굳건함과 신앙을 전하고 있다.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였으니, 여러분은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을 한 것은 내 종교를 위해서였고 내 천주를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이어 조리돌림을 당한 후에 “이렇게 하면 ⋯마음대로 칠 수가 있겠소? ⋯자, 치시오. 나는 준비가 되었소”라며 새남터 형장에서 칼날을 받았다.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5월 26일, 한국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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