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홍)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가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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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규 [mugeoul] 쪽지 캡슐

2001-03-05 ㅣ No.208

"가난은 미덕이다."

"아니다."

그런 식의 논쟁은

그리스도교적인 가난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가난해져야 하는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과 갈바리아 사이의

그 삶에서의 양식으로 가난을 취하셨기에,

그 속에 깃들이었을 의미를 깊이 생각한다면,

무엇보다 주님을 따라야 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선

가난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의 가난은

그 주님에 대한 사랑의 따름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설사 그것이 외형적으론 그런 모습으로 발현되었을 지라도

궁극적으론 도덕이나 윤리완 별 무관한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켈빈적인 근검절약의 정신이

그리스도인의 생활태도로 등장했음은

오해에서 비롯된 또 하나의 크나 큰 오류이랄 수 있다.

왜냐면 그것은 결코 가난의 정신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적인 참된 가난은 결코 금욕적이지 않다.

우리가 복음의 말씀에서

금욕적인 면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더욱이 그것이 켈빈적인 근검절약의 생활 같은 것일 순 없다.

 

오히련 가난은

모든 걸 아껴 모으는 것이 아니라

아예 포기하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소유를 포기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지니지 않기에

욕망도 없고 또한 근검절약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했기 때문에

그는 오직 창(窓)처럼 그냥 맑은 뿐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하느님 앞의 가난"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하느님의 현존 그 풍요로움"을 나타내 준다.

따라서 인간의 그런 가난은

그로 하여금 신앙의 참된 증거자 되게 한다.

 

이런 초라한 말구유 속의 탄생에도,

그토록 비참한 십자가상의 죽음에도,

그런 기막힌 순간에도 하느님은 함께 하심을,

가난은 침묵으로 말해 주고 있다.

아니 오히려 더 풍성해지는 하느님의 현존을 보며,

이 세계의 모든 가난한 자는 희망적이 된다.

가난은 끔찍스러운 게 아니라,

의미 깊은 한 삶의 양식임을

그런 가난은 증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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