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홍)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함께 쇼핑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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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규 [mugeoul] 쪽지 캡슐

2001-03-05 ㅣ No.206

이른바 하느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종이 주인의 뜻을 받는 것하곤 다르다.

 

물론 때때로 초자연적으로

하느님께서 신앙인에게 또렷한 음성으로

오를레앙의 소녀 잔다르크에서처럼

직접 자신의 뜻을 드러내는 경우도 분명 있으나,

이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되는 방법은

반드시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대개는 그와 대화를 계속하면서

그 속에서 자신이 스스로 발견하고 자각하게 된다.

즉 어떤 한가지 일로나

또 그냥 그분과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신앙인의 마음이 어느덧 정돈되면서

그 속에서 어떤 확신 같은 게 떠오르게 된다.

마치 휘젓는 짓을 멈추면

떠돌든 것들이 한 곳으로 조용히 모여들 듯,

그것은 조용하나 대단히 강력히 솟게 된다.

 

오히려 그렇게 되면 이번엔

그것이 스스로 신앙인을 이끌게 된다.

흔들리는 마음과 불신마저 "극복하라!" 외치며

그것은 정말 지상명령으로까지 된다.

그리하여 현명한 신앙인은

그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직감하고서 그에 따르게 된다.

 

중요한 것은 위의 "마음의 정돈"을

단순히 "심리적 평온의 상태"와 같게 봐선 안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럴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의 경우는

오히려 불안 속에서 그것이 직감될 때가 많다.

그러기에 그것을 따르는데는 결단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알아내 보겠노라며

그분께 초자연적인 표징을 요구하는

어리석은 짓을 범해선 안된다.

그렇다 하여 내려오지도 않거니와,

오히려 하느님의 뜻을 그냥 아는 걸 넘어

참으로 품을 수 있으려면

그분과의 티없는 대화가 끊임없이 필요하다.

그럴 때 내면의 소리에 따를 수 있다.

 

아브라함과 모세가

단 한 번 들린 초자연적인 음성을 듣고서

자신을 온전히 바치려 결심했다고 봐선 큰 착각이다.

그 전 아주 어린 시절부터 노경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대화가 거기엔 함께 했을 것이다.

그것도 모두가 매양 천둥치는 것 같은

그런 식으로 진행되진 않았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신앙인에게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는 순간은

신앙인이 자기성찰의 시간을 가질 때이다.

그 고요한 순간에 그분은 다가오시어

신앙인과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마치 "같이 쇼핑하는 것처럼" 다정한 대화를 나누신다.

거기에 이른바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이는

초자연적인 것은 전혀 불필요하기만 하다.

아니 도체 그런 것이 굳이 왜 필요로 하는지 차라리 의문이 든다.

 

우상으로써의

모든 하느님의 모습이 모두 사라지는 때도

바로 그런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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