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홍)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그분은 충실의 길로 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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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규 [mugeoul] 쪽지 캡슐

2001-03-05 ㅣ No.205

참되게 희망을 낳는 현실상황은 오히려 ’곤경’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단순한 낙관적 갈망이 아니라

믿음과 함께 하는 낙관에서 비롯되는 갈망이다.

 

그것은 마치 그날과 그 시간이 언제 올지도 모르면서

반드시 오리라 믿고 곤경을 참으며 기다리는

충성스런 종이나 슬기로운 처녀와 같은 희망,

따라서 그 희망은 ’오시는 자’에 대한 신뢰,

그 외가 아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결코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다,

그럴 경우 쉬 지치고 체념하며

마치 불충한 종이나 미련한 처녀처럼

태만에 빠지기 쉬운 까닭이다.

오히려 그것은 그리운 님을 기다리는 마음,

순간 순간이 새롭고 간절한 초시간적인 기다림이다.

 

그와 함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은 자기충실성을 반드시 동반하게 된다는 점이다.

 

사실 성실은 사랑 안에서만 참으로 꽃핀다.

님에 대한 사랑이 뜨거울 때

자연 님을 대하는 나의 모든 태도는 지극해진다.

그 지극함이 충실이다.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

자기현실 상황이 아무리 보잘것없고 형편없을지라도

지성을 다해 다듬으며

오시는 그분이 발을 디딜 땅을

곱게 다듬어 마련해 보려는 그 지극함,

즉 작은 일에도 온 정성을 다하는

마치 ’묵시록 21장’의 ’단장한 신부’처럼

그 단정한 자세만이 희망을 실현시킬 수 있다.

그런 자에게만이 곤경이 구원의 씨앗이 될 수 있다.

 

그럼 이 시대에 있어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당연히 ’자기충실성’에서 모든 것을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마라나타!" 울부짖지 않더라도

’오시는 그분’은 이 시대에

분명 우리 앞에 와 계시리라고 본다(묵시 3,20).

 

문제는 우리가 문을 열어 그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아니 캄캄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감춰진 그분의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그를 위한 기본적인 바탕이 충실이어야 한다.

충실은 그분이 사뿐이 즈려밟고 오실 길인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이 ’충실’은

외면적이고 속된 객관적 기준에 의해서가 아니라,

양심적이고 신적인 주관적 판단에서의 것이다.

 

자기 삶에서 순교적 각오로 모든 것에 임할 때

그 충실은 반드시 지극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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