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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생명] 현대사회와 생명윤리(아시아 생명대회 강연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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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3 ㅣ No.241

현대사회와 생명윤리

 

아시아 생명대회 강연내용(1998년 10월 22일, 대구 효성 가톨릭대학교)

 

 

현대세계는 급속한 변화의 소용돌이를 경험하고 있다. 사회적 상황과 관습의 급속한 변화뿐만 아니라 거기에 따르는 의식의 변화, 나아가서는 인간의 영혼까지도 변화의 소용돌이에 있다. 한 여름에 까만 가죽장갑을 끼고 거리를 활보하거나 추운 겨울에나 봄직한 롱 부츠를 마음껏 뽐내면서 다녀도 이제는 전혀 이색적이 아니다. 변화된 새로운 의식은 시민 생활의 대부분의 영역을 침투하게 되면서 전쟁과 그 후의 혼란을 과감하게 떨쳐 버릴 수 있었고, 변화에 따라온 새로운 기술의 발달과 함께 계속해서 수많은 새로운 기술들이 개발되면서 인간의 삶은 질적으로 엄청난 향상과 편리함을 갖게된 긍정적 측면도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편리함은 상상할 수도 없는 수많은 문제점들을 동시에 안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과거에 비해 교통이 놀랄 만큼 발달했지만 사고가 나면 과거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대형사고의 위험을 안고 있다. 전기가 인류의 삶에 편리함을 제공해 주었지만 전기가 없다면 인간 생활의 거의 모든 영역이 정지된다. 피임약이라든가 기구가 발달하여 원치않는 임신을 얼마든지 피할 수 있게 되었지만 만약 실패하는 경우 곧바로 낙태로 이어지는 현실인가하면, 시험관 아기 시술의 발달로 수많은 불임부부들에게 아기를 갖게하는 기쁨을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상으로만 여겨졌던 복제인간의 출현이 현실화된다고 할 때 끔찍하기만 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특별히 금세기에 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배 영역에서 이루어진 전대미문의 거창한 진보에 대해 피조물이 제구실을 올바로 하지 못하고 있다. 급속한 공업분야에서 빚어지는 자연 환경 오염의 위협이라든가, 끊임없이 거듭거듭 발생하는 무력 충돌이라든가, 원자탄, 수소탄, 중성자탄 및 이와 유사한 무기들의 사용으로 자멸할지도 모르는 현실에서의 몇 가지 현상들만 지적해도 충분하다".(회칙 {인간의 구원자} 8항) 요한 바오로 2세는 또한 이 회칙에서 인간은 자신이 온갖 재능과 창의력을 발휘하여 이룩해 놓은 업적에 의해서 배반당할 수 있다는 사실에 심각한 두려움을 갖는다는 현대인간이 느끼는 실존적 위기감을 간과하지 않는다.({인간의 구원자} 15항 참조) 인류가 이룩한 가장 위대한 업적 중의 하나는 핵에너지의 이용으로 이 때문에 인류가 입고 있는 혜택은 실로 엄청나지만 동시에 그러한 혜택보다도 더 심각하게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핵무기는 인류를 잠시도 긴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기도 하다. 요한 바오로 2세가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인간은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서 거창한 진보를 이루었고, 그렇지만 그러한 진보가 이미 인간에게 위협이 되어 버렸다는 현실에서 그러한 진보 개념은 현대 세계 안에서 하나의 죄라고 말한다고 해도 틀리지 않은 것이다.({인간의 구원자} 8항 참조)

 

현대 인간의 이러한 특징 때문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현대의 인간을 가리켜 '위기의 인간'이라고 정의한다. 이 위기는 곧 '실존적 위기'이며,(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 10항 참조) 인간 생명의 위기이다. 교통사고로 연간 15,0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고, 아직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태아에 대한 낙태도 150만 건을 넘어선다. 뿐만 아니라 각종 산업재해 수 만 명의 사상자가 매년 생겨나고 있고,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생태계 파괴와 환경오염으로 인한 인간 생명에 대한 위협은 그칠 줄을 모르고 있는 현실이다. 현대인은 가히 인간 생명에 대한 실존적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생명윤리에서 다루어지는 인간 생명에 대한 위협과 관련된 주제들은 현대 사회의 이러한 현상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현대사회의 급속한 변화는 인간의 의식 구조를 변화시켰고 가치관을 전도시켰으며, 인간의 생명까지도 유용함과 편리함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오늘날의 사회에서 인간 생명의 존엄성 수호를 위해 노력하는 가톨릭 윤리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몇몇 문제들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하면서 그 극복을 위한 몇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한다.

 

 

1. 유전자 개입 및 조작

 

오늘날 의료기술의 발달은 유전자 조작을 통해 생명의 복제까지도 가능하게 되었다. 이미 체세포 복제를 통해 복제양 돌리가 만들어졌고, 인간의 유전자를 가진 동물들, 머리없는 올챙이까지 생산 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술의 발달은 의료 분야에 신기원을 이룩했다는 평가를 이끌어내기도 하였지만 인간 유전자를 실험적으로 변형시키는 조작의 차원에서는 새롭고도 미묘한 윤리적 문제들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인간 유전자 조작이 불임부부들의 불임치료를 비롯해서 난치병이라고 여겨왔던 유전병을 해결하거나 장기이식에 필요한 장기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고 높이 평가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결코 이에 동조할 수 없다. 우리는 결코 상상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복제인간이라는 매우 가까운 미래의 현실을 그대로 방관할 수만은 없다. 인간의 생명이 실험실에서 생겨난다는 것이 분명히 생명 질서의 파괴라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복제인간의 현실은 근본적으로 인간 삶의 모든 기존 질서를 송두리째 바꾸어버리고 말 것이다. 복제인간의 범죄 이용, 장기 이식용 복제인간, 전쟁 수행을 위한 복제인간의 양산 등등으로 이제 인간의 존엄성이나 인권, 인간적 출생이니 하는 단어들은 사치스런 단어로 전락해 버리게될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런 지경에 그나마 다행한 것은 의학계를 포함한 사회의 각처에서 복제인간이 아무리 유용한 측면이 있다하더라도 인간 자신이 실험의 대상으로 사용된다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유럽 40개국으로 구성된 정치 사회분야 협력기구인 {유럽회의}(CE)는 이미 인간복제와 관련한 행동의 일체 금지를 압도적으로 통과시켰으며(1997년 7월), {유네스코}에서는 제 2의 인권선언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 게놈과 인권보호에 관한 국제선언]을 만장일치로 채택한 것이다.(1997년 11월 10일) 곧 인간복제와 같은 인간의 존엄성에 반하는 행위는 허용될 수 없으며, 또한 어떤 연구나 응용도 인간의 존엄성에 우선할 수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아직 인간 유전자 조작이나 실험에 관한 규정이라든가 윤리 강령도 찾아볼 수 없다. 인간 배아가 실험의 대상으로 사용되면서 숱하게 손실되는 현실에서 국가는 과연 인간의 기본권으로서의 생명권을 그대로 내팽개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을 직접적으로 해치고, 인간의 존엄성을 거스르는 어떠한 행위도 할 수 없다는 법의 보호가 절실하다. 과학 기술의 발전, 연구 및 응용의 목적은 한 마디로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결코 과학 기술의 효용성이라든지 당대의 사회 관념에 따라 결정되어서는 안된다. 즉 과학 기술은 무엇보다도 인간에게 봉사해야 하며, 또한 인간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존중하고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발전을 도모할 때 참된 가치가 있는 것이다.

 

 

2. 낙태

 

낙태가 살인행위라는 데에는 아무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150만-200만건의 낙태시술이 불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 숫자라면 하루에 평균 약 6,000명의 무죄한 태아가 살해당하고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우리나라의 법에는 낙태죄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지만 낙태죄로 인해 처벌받은 사람은 아직까지 한 사람도 없다. 우리나라에서 인공임신중절을 규제하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는 1953년 9월에 제정 공포된 형법 (법률 제 293호)의 낙태죄에 관한 것이 그 효시였고, 이 법에서는 인공임신중절을 제공한 의료인과 수용한 부녀 모두가 소정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으나 다른 허용하는 기준이 없었고, 그 후 1973년 5월에 제정 공포된 모자보건법은 몇 가지 인공임신중절 허용 기준을 마련하여 그 기준에 따라 임신 28주 내에 있는 자가 배우자의 동의를 얻어 의사가 인공임신중절을 시행할 수 있도록 명문화되었다. 곧 낙태죄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낙태죄로 처벌받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하니 모자보건법의 시행으로 우리나라는 낙태가 허용된 셈이다.

 

법 뿐만이 아니라 사실상 낙태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허용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라는 데에 그 심각성은 더하다. 1994년도에 실시한 미혼 남성의 성 행태에 관한 조사결과에 의하면 미혼 남성 근로자의 성 경험율이 78.1%, 그리고 남자 대학생의 경우는 36.3%로 매우 높은 수준을 나타내고 있을 뿐 아니라, 이들의 혼전 임신에 대한 태도를 보면 남성 근로자의 91.2%, 남자 대학생의 42.3%가 인공임신중절을 하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어 미혼층의 인공임신중절율은 날로 크게 증가될 것이 예상되기도 한다. (서강대학교 생명문화 연구소, [생명에 대한 사회의식 조사])

 

(주) 한국 쉐링은 최근 전국 5대 도시에 사는 16-60살 여성 1200명을 대상으로 성 실태 및 출산에 관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성 경험이 있는 여성의 절반 가량(48%)이 계획하지 않은 임신을 했을 때 88.3%가 한 번 이상 낙태를 했다고 응답했다고 한다.(한겨레 신문 1998년 5월 11일)

 

더욱 심각한 것은 성개방 풍조로 인한 혼전 임신의 폭발적인 증가와 낙태 문제이다. 서울의 어느 산부인과 의사는 낙태 시술을 하러 오는 여성의 30%는 여중.고생이라고 털어놓기도 하고, 또 어떤 의사는 "교복을 입은 채 수술을 하러 오는 여중.고생들도 적지않은 현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한겨레신문 1997년 3월 6일)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 기관들 중에는 '미혼모의 집'이 여러 곳 있다. 생명존중 및 사회복지 차원에서의 사업이다. 낙태 방지의 차원에서 미혼모 상담하고, 그들이 원하면 출산 때까지 정신적, 육체적으로 편안하게 쉬면서 출산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물론 철저한 비밀을 보장해 주고, 출산 후에 아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다른 집에 입양까지도 도와주고, 건강한 정신으로 사회에 다시 복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업이다. 미혼모로서 임신한 여성들이 이 곳을 찾는 사람은 물론 극히 드물다. 그러나 아직도 이런 곳이 있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이다. 미혼으로 임신한 여성들 중에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이 곳을 찾는 여성들의 말에 따르면 성(性)은 이미 쾌락의 도구가 되어 버렸고, 생명전달을 위한 성, 책임있는 성이라는 말은 이미 고전으로 묻혀버린듯한 느낌이다.

 

올바른 성문화가 절실하다. 그리고 생명을 존중하는 사회의 모습이 아쉽다. 윤리적 부담감이라든가 사회적 통념, 경제적 이유 등이 쉽게 인간의 생명에 대해 사형선고를 내릴 수 있다는 의식에서부터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3. 안락사

 

오늘날 지구상의 일부국가에서는 이미 안락사를 합법화했고 또 이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극심한 고통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삶의 의미가 없다고 여기게 되면서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인간에게 있다는 주장이 법의 힘을 빌려 서서히 그 세력을 확장해 가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오래 지속되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 곧 안락사가 마치 인간의 품위를 유지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은 실제로는 거짓된 자유의 한 모습이며, 참된 인간성을 기만하는 행위일 뿐이다.

 

인간이 지니는 가치와 권리 중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입각한 생명의 권리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인간 생명의 근본 가치마저도 의문시되고, 고통과 죽음을 보는 눈도 달라지면서 사람들은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죽는다는 것은 육체적 생존의 끝이며, 따라서 인간으로서의 모든 가능성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세상과 하직하고 가족 친지들과 영원히 이별하고, 온갖 것을 다 잃어버리는 상실의 공포가 엄습하면서 지금까지의 삶이 마치 허구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죽음이기도 하다.

 

고통 중에 있는 말기 환자의 경우 이러한 죽음을 생각하는 정신적 고통은 어쩌면 육체의 고통보다도 더 클 것이며 결국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그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며, 그 방법만이 가장 인간다운 죽음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문제는 인간적 죽음이 무엇이냐?하는 문제이다. 죽음이란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전혀 피할 수 없는 사건이다. 인간은 반드시 죽어야만 하고 따라서 이러한 피할 수 없는 사실 앞에서 죽음으로 운명지워진 모든 인간은 같은 조건에 처해 있다.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사실 앞에서 인간은 인격적 존재로서 불리움을 받았으며, 또한 양심을 가지고, 자유롭게, 책임감을 가지고 인간됨을 실현하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기 위한 존재로 불리움을 받은 존재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적 죽음이란 인간 존재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하고도 거절할 수 없는 요소이며, 또한 생명 전체를 요약하는 것이고, 나아가 완전하게 되는 순간으로서 평화로움과 용기를 가지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은 책임감있는 자유와 의식을 통해서 받아들여져야 하며, 나아가 각자의 고유한 삶을 통해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죽음이란 인간적이고 그리스도적 존엄성을 지니는 죽음이어야 한다.

 

 

마치는 글 : 인간 생명의 보호를 위한 몇 가지 제언

 

(1) 의사들의 양심

 

특별히 오늘날은 전문의사들의 생명 존중을 위한 가치관과 양심이 매우 중요한 시대이다. 만일 종교를 가진 산부인과 의사들만이라도 "우리는 인간 생명의 존중을 위해 낙태 시술을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선언을 하는 양심적인 집단들이 생겨난다면 그 어떤 생명운동보다도 큰 효과를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의사들의 직업윤리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통해 매우 잘 드러나지 않는가? "나는 누가 요청하더라도 죽음에 이르는 약은 주지 않겠으며, 여인에게 유산시키는 도구를 주지 않으며... 순수하고 성스럽게 나의 인생과 의술을 지키겠습니다." 곧 의사들은 생명을 보호하고 살리기 위한 직업적 소명을 받은 자들이지 생명을 죽이는 자가 결코 아니라는 최소한의 직업윤리는 양심적으로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이다.

 

(2) 예방차원에서의 입법

 

법의 분야에서 생명 존중과 관련하여 고려되어야 할 점이 있다면 그것은 예방 차원에서의 입법이다. 현행 의료법에서는 태아의 성감별 행위에 대한 처벌 규정을 1994년부터 두고 있다. 그러한 행위가 낙태가 거의 용인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도 여아 낙태의 원인이 된다고해서 과거보다는 더욱 엄격하게 벌금형 및 징역형을 부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법의 적용은 건전한 생명문화를 위해 근본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과거보다는 현격하게 여아 낙태를 감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것만은 사실이며, 이는 일종의 법의 예방적 차원에서의 효과이다. 입법 차원에서의 이러한 노력이 생명문화를 지키는데 일조를 한다면, 이제 인간생명을 대상으로하는 행위들이 단순히 의료윤리 차원에만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점이 명확해진다. 인간생명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법의 노력은 이제 사건의 결과에만 매달리기보다는 예방 차원에서의 규범적인 노력으로 나타나야할 것이다.

 

오늘날 생명공학의 영역에서 시도, 실험되고 있는 인간 배아를 동물 자궁에 착상시키는 일이라든가 복제 인간의 가능성을 현실화시킬 수도 있는 수정란의 인위적 증식 등의 방법이 인류의 미래에 미치게될 엄청난 파장을 미리 생각해볼 때 수정란 보호법이 입법된다면 그것도 역시 인간생명의 보호를 위한 예방 차원에서의 입법일 것이다.

 

(3) 종교단체의 노력

 

-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교육 : 무엇보다도 인간이 물질적 가치로 평가될 수 없다는 올바른 가치관 형성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현실을 눈에 보이는 것, 경험 가능한 것에로 국한 시키는 자연과학의 발달로 인해 인간까지도 더 이상 인간을 존재로 여기기보다는 현상, 사실로 인간을 국한시키는 가치전도의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가치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가치의 근원이 자리한다는 의식 고취를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

 

- 인간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꾸준한 교육 : 인간생명은 인간 자신에게 속한 영역이 아니라 하느님께 속해 있는 성스러운 영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생명은 성스러운 것이며, 이에 어느 인간도 이 영역에 대한 권한은 없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있게 하신 하느님께 순응하는 것이 인간의 몫이다. 인간은 단지 자신에게 맡겨진 생명을 잘 보호하고 가꾸어나가는 생명의 관리자일 뿐이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맡기신 인간생명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질적인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정신적 능력의 차이 때문에, 장애의 정도 차이 때문에 결코 인간 존재의 질적 구분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힘이 없고, 약하고, 자신의 힘만으로는 이 세상을 헤쳐나갈 수 없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살아있는 사람들의 예술이 절대적으로 요구될 뿐이다.

 

- 성교육 : 책임있는 성교육이 절실히 요구된다. 사랑을 자칫 감각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하는 쾌락주의나 경제적-사회적 이유 때문에 언제든지 낙태시킬 수 있다는 실용주의, 개인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서 성의 올바른 의미를 교육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지라도 어릴 때부터의 건전하고도 책임감 있는 성교육이 매우 필요한 현실이다. 생명의 신비를 비롯해서 성과 사랑의 의미, 혼인, 책임감을 요구하는 성에 대한 교육들이 각 교회의 초등부 학생들에게서부터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교회는 생명을 존중하는 모범을 이 사회에 보여주어야 한다. 미혼모가 처녀로서 아기를 가졌다는 것을 비난하는 사회이기보다는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아기를 낳아 기르고 있다는 용기와 결단, 생명에 대한 사랑을 높이 평가해주는 사회로서의 의식 전환이 요구된다. 이러한 의식 전환을 위한 실천은 우선적으로 교회에 맡겨져 있다. 아기를 낳아 기르고 있는 미혼모라 할지라도 교회라든가 종교 단체의 직원으로서 아무런 장애 없이 받아들여져 일할 수 있는 교회 자체의 의식 전환도 함께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동익 신부 / 이동익 신부님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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