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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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생명] 의학윤리를 위한 가치 판단의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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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3 ㅣ No.239

의학 윤리를 위한 가치 판단의 기준

 

 

단 하나의 가치 만을 기초로 하여 의학 윤리의 여러 문제점들을 해결한다는 것은 전혀 가능하지가 않다. 그러나 여기서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각각의 경우에 있어서 함께 고려해 볼 수 있는 가치의 어떤 등급이나 완전한 체계가 있다는 것이다. 즉 건전한 인간 관계들, 그리고 인간관계를 건전하게 개선하는 그 무엇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가치들의 총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 통합과 완성

 

치유를 위한 모든 작업을 위해서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하나의 밝은 전망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특별히 인간의 건강은 육체 및 정신의 통합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건강은 하나의 긍정적 정체성을 가지기 위해서, 또한 항상 더 완전한 완성을 이루기 위하여 결코 종착점이 없는 원숙함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윤리적 규범들을 결정하기 위해서 단순히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 자체로부터 출발하여 그것들을 논한다면 이는 분명히 비인간적이며, 동시에 반(反)인간적일 것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육체적 범주의 기능들과 기준은 분명히 존중되어야 하지만, 인간의 전체성 안에서 나타나는 인격, 특히 가치들을 평가할 수 있는 인격에 손상을 주면서 생물학적인 필요성들을 절대화시켜서는 안된다. 생물학 자체의 범위가 의사나 환자를 제한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2. 신뢰를 줄 수 있는 사랑의 능력

 

신뢰를 가지고, 또한 충실한 마음으로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 본성의 핵심이며 본질이다. 구원을 줄 수 있고, 또 구원을 받는 방법, 그리고 건강하게 할 수 있고, 또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 안에서 이렇듯이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증가시키고 보존시킨다는 측면에서 사랑의 능력 외의 다른 가치들은 유보되거나 종속되어 버리는 것이다.

 

만일 어떤 중한 상태에 있는 환자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랑의 능력이 있다면, 그는 이미 온전히 건강한 사람이며, 벌써 치유가 된 사람이다. 자기 안에 내재해 있는 더 잘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파괴시킨다는 것은 자신의 고유한 인간성을 말살 시키는 행위와 다를 바 없으며, 자신을 치명적인 죽음으로 몰아 넣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의사는 드물지않게 생물학적 완성이나 법률의 완전한 준수, 그리고 변하지 않는 하나의 견고한 사랑을 위해 불가피하게 요구되는 심리적 건강과 또 다른 편으로부터의 생물학적 목표 사이에서 방황하기도 한다. 우리의 결정은 인간으로서의 통합과 완성, 그리고 성실하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최대한으로 가능하게 하는 관점에서 가치를 추구하는 발걸음이어야 할 것이다.

 

 

3. 신뢰할 수 있는 자유

 

우리 인간은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선사하시는 자유로부터 창조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우리가 어떠한 자세로 이러한 하느님의 선물을 받아들이느냐에 종속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유의 가치와 그 참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감사하는 마음과 용기있는 노력이 요구된다.

 

우리들을 생명에로 불러준 자유는 하느님의 사랑의 자유에 기꺼이 참여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자유이며, 따라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자유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어가지기 위한 자유이다. 우리 모두는 참된 자유를 통하여 자유롭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자유로 말미암아, 또한 구원하시는 자유를 통하여 구원 되었다.

 

책임감 있는 사랑을 통해서 나타나는 자유는 무엇보다도 의미 치료(로고테라피)와 심리 치료 안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기에 의학에 있어서 신체적, 물리적인 시각만 중요시하는 사람은 분명 위와 같은 분야를 소홀히 다루게 될 것이고, 나아가서 그러한 심리적, 의미적인 면에 큰 손상을 끼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의 영적 범위, 말하자면 충실하게 사랑할 수 있는 자유와도 같은 영적 능력이 과소 평가 된다면 인간에 대한 신체적, 육체적 접근도 결코 충분하게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 인격에 대해 존중하는 시각을 가진 사람은 분명히 그러한 정신적 가치의 중요성을 감지하게 된다. 책임감 있는 자유에 대한 총괄적인 전망은 슈바이쳐, 로저스, 에릭슨, 프랭클, 그리고 그밖의 여러 사람들의 위대한 업적들을 탄생시킨 것이다.

 

책임감 있는 자유는 또한 생명에 대한 인위적 조작에 관한 윤리적 성찰을 위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사실 이 세상 안에서, 그리고 이 세상을 통해서 책임감 있는 자유를 존중하지 않으려는, 또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우리 인간들 내부에는 너무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질병의 대부분은 사실상 각자의 고유한 건강, 다른 사람들의 건강, 그리고 환경을 통해 고려되어야 하는, 건강에 대한 인간의 무책임성에서부터 나타난다. 활기를 띠고 있는 모든 과학-기술-의학적 발전은 바로 이러한 무책임성 앞에서 중대한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무책임한 인간은 분명 한 사람의 환자이며, 또 다른 차원에서의 장애자라는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 슬픈 현상이다.

 

단지 육체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줄 뿐 아니라 심리적, 영성적으로 숱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기아와 영양 실조의 문제 등은 책임감이 결여된 결과로 나타나는 문제들이며, 또한 동시에 심각한 질병의 상태를 치유하려는 의지가 부족하다는 증거이기도 한 것이다.

 

현대 세계에서, 인간의 건강에 대한 관심은 인간 세상에 고통을 주는 무책임한 정신 상태로부터의 전환을 매우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으며, 또한 현대 의학의 과학 및 기술적 조작이라는 형태를 허용하게 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전달되는 건강', '만들어지는 건강', 그리고 '의학적 기술이나 기계 장치로부터 공급되거나 연장되는 건강'에 대해서 말하곤 한다. 이렇게 사람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 건강이 무엇이며, 책임감이 어떠한 것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다음 몇 가지 점들을 정착시키도록 하는 일이다. 즉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인간들을 위한 진실된 비젼을 제시하는 일, 참된 양심을 촉구하는 일, 그리고 책임감 있는 자유에 대해 교육하는 일 등이다. 의학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로 그들이 대하는 각각의 환자들과 그 환자들의 가족들에 대해 마음속 깊이 책임감을 느끼고 행동하는 것을 그들의 첫째 임무로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국가 역시 예외는 아니다. 국가는 국민 모두가 책임감 있는 국민이 될 수 있도록 많은 관심을 가지고 좀 더 적극적으로 노력해야만 한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영적 분야에 대한 관심이 인간의 건강과 생명에 커다란 책임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겠는가 ?

 

이러한 비판은 특별히 임종자를 지켜볼 때 그 참된 의미를 깨달을 수 있게 된다.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는 사람의 결정적인 순간에 책임감 있는 자유를 존중하고 장려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현대 의학만의 도움으로 고통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것이, 임종자가 그의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신 분께 최상의 방법으로 응답하기 위해 준비하는 책임감 있는 자유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교 정신은 인간의 책임감 있는 자유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또 인간 건강을 위해 장애가 되는 여러가지 타부들을 제거해 나가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4. 진리에의 헌신

 

결의론 안에서 다루어지는 의학 윤리는 의사들은 항상 진리만을 말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다루어왔다. 그러나 진리와 진실을 가르치고 제시해 주는 의학 윤리 안에서 이러한 문제는 가치의 문제 안에서 취급된다. 의사와 환자 모두 진리가 말해 주는 핵심을 발견할 때까지 진리에의 헌신을 위한 여로를 함께 가고 있고, 항상 진리를 생각하고, 진리의 삶을 실천하고 있다면, 의사-환자라는 관계는 두 사람 모두에게 아주 건전한 관계이며, 서로를 치유케 해주는 관계라고 말 할 수 있다. 곧 여기서 말하는 진리란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인간은 그분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진리이다. 또한 투병 시기나 죽음의 순간에 있어서 까지도 노력해서 찾아야 할 사랑과 진리 안에 분명히 출중한 가치가 함께 내재되어 있다. 마하트마 간디는 인간의 관계, 공인으로서의 삶, 그리고 환자들을 치유하기 위해 철저하게 진리를 따라 생활한 아주 출중한 모범이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서, 치료의 과정을 통해서 드러나는, 진리를 위한 헌신에 방해가 되고 어렵게 하는 점들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비판 기준을 가져 볼 수도 있을 것이다.

 

 

5. 평화

 

평화는 의심할 여지 없이 성서적 의미, 그리고 총괄적 의미 안에서 이해된다. 총체적 의미에서의 평화란 하느님과의 화해, 자기 자신과의 화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화해, 나아가서 고통, 질병, 죽음의 의미와의 화해라는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샬롬이란 단어에서 제일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열정적으로 하느님을 흠숭하는 사람이 지니는 평화이며, 또 평온한 마음이다. 그리고 이는 생명과 사랑의 충만함에로 직접 불리움을 받은 것에 대해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포함하는 진리이며, 따라서 자기 자신의 불확실성과 한계를 보면서도 그러한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도 포함한다. 이러한 자기 자신의 수락은 각자의 이기주의, 혹은 공격적인 성향등을 극복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자신과의 투쟁이며, 이로써 자신을 낫게하고 구원케 하는 하나의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평화는 치유를 위한 협동을 통해서 현재 앓고 있는 병과의 화해, 그리고 치유의 의미를 찾아 가는 가운데, 숱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치유되지 못할 것이라는 자포자기와의 화해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평화는 또한 노인이 되어가는 것에 대한 평온한 수락도 가져다 준다. 즉 이는 노인기에 따라오는 심리학적 쇠퇴, 그리고 노인기가 가져오는 소외현상과의 화해이기도 하다.

 

어떤 환자에게 있어서 "왜 이런 일이 남도 아닌 나에게 일어나는가?"라는 고뇌에 찬 질문이 "어떤 방법으로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이 상황의 의미를 찾을 수 있고, 또 깨달을 수 있을까?"라는 평정을 되찾는 질문으로 바뀔 때, 깊은 차원의 치유 표지로서의 평화가 그 환자와 함께 하게되는 것이다.

 

 

6. 구원 역사의 빛 안에서의 질병과 치유

 

건전하고 균형을 이루는 의학 윤리의 결실은 창조, 원죄, 그리고 종말론적 구원과 희망에 관한 교의들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전망과 가치를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질병과 치유,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음은 창조와 구원 역사의 조명 안에서 이해된다. 우리는 인간이 하느님의 가장 훌륭한 걸작품으로, 그리고 그분의 모상에 따라 창조 되었다는 교의에 대해서 얼마만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받아들이고 있는가? 죄란 하느님의 작품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타락하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인간을 자비롭게 부르시는 것을 거절하는 것이다. 또한 죄란 구원의 결속(結束)에로의 부르심을 거절하는 사람에게서 보여지는 타락된 연대성을 드러내 보인다.

 

질병, 고통, 그리고 죽음은 창조주의 계획과 구원자의 초대를 거절하면서 죄와 연관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그 사람들 자신 안에 저주의 의미로 다가가지 않겠는가?

 

의학 윤리가 구원의 실재에 대해서가 아닌 죄의 현실에 보다 더 큰 관심을 부여하게 될 때는 치유하는 기능을 가지는 의학 윤리의 특성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며, 오히려 환자에게 상처만 주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해 버리고 말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건강과 우리가 사는 이 사회를 건전한 사회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오직 구원에 대한 경이로운 찬미를 통해서만 죄와 그 해로운 결과들을 만나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 그 사회에 신뢰를 심어 줄 수 있는 그리스도적 의학 윤리는 분명 풍성한 구원에 대한 찬미이며, 따라서 인간과 그 사회를 낫게 하는 거대한 힘이 될 것이다.

 

성숙한 인간은 그의 모든 인간적 범위 안에서 창조주의 경탄할만한 작품이지만, 때로는 성숙한 인간인 것처럼 가장하는 죄를 경험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죄를 통해서도 낫게 하시고 구원 하시는 주님의 강한 힘을 체험하기도 한다. 성숙한 인간에게 의무가 주어진다고 할 수 있는 하느님의 종말론적 약속에 대한 수락, 혹은 거부는 죽음에서와 마찬가지로 질병에 있어서도 전적으로 서로 다른 하나의 역동성 내지는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그리스도 문화권이 아닌 대부분의 다른 문화권 안에서는 - 그렇지만 때로는 불행하게도 거의 그리스도교 정신의 뿌리가 없다고 볼 수 있는 신자들과 그 반대로 아주 엄격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 질병, 고통, 그리고 죽음은 하느님의 거짓된 모상의 하나로 저주 받아 왔으며, 속죄 양이라는 일종의 강박 관념으로 변질 되었었고, 또한 하나의 강요 당하는 폭력으로 여겨지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낫게 하시고 구원 하시는, 그분의 인간에 대한 상상할 수 없는 연대를 통하여 죄 (구조 안에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죄, 악과 연관되어 나타나는 죄등을 말한다)를 이기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부터 나타난 획기적인 변화는 이제 더 이상 그 분의 역할을 구약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속죄 양과 비교하여 말할 수는 없게 되었으며, 오히려 숱한 속죄 양들을 찾는 모든 이데올로기들을 반대하는 분으로 이해해야만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입은 모든 속죄 양들과 함께, 또한 그들을 위해서 당신의 죽음 안에서 고통을 당하신다.

 

모든 인간적 고통은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에 다시 결정적으로 오시기 전까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분을 충실히 따르는 제자가 됨으로써 그 수많은 고통(인간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끼치게 되는 고통)은 극복 될 것이다. 연약함에서부터 나타나는 고통, 그리고 죄인들로부터 겪어야만 하는 고통도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들에게 있어서나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 각각 전혀 다르게 나타나게 된다. 말하자면,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의미로 다가오게 되며, 더 나아가서는 은총과 신앙, 그리고 온전한 회개를 통해서 하나의 새로운 의미와, 낫게 하시고 구원 하시는 하나의 강한 힘으로 다가올 수가 있는 것이다.

 

깊은 신앙과 함께 이해되는 구원은 질병, 고통, 그리고 죽음이 눈 앞에 있을 때에도 환자들에게 그것들의 새로운 의미, 새로운 역동성을 부여해 주면서 죄 때문에 생겨난 고통, 원한, 악의까지도 모두 제거하는 힘을 가진다.

 

신앙으로써 이해되는 빠스카 신비의 결실인 구원은 모든 인간적 울분과 한으로부터의 고통을 해방시켜 주며, 그 고통의 악순환을 분쇄하고 인간의 고통을 순화시켜 준다. 즉 고통이란 불신, 두려움, 원한, 폭력, 압박감, 복수 등의 마음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리스도께로의 회개는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견디어 낼 수 있도록 하는 힘을 주거나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 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을 준다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이 고통을 참아 받을 수 있는 힘을 부여한다. 바로 이 힘은 우리 인간들을 치유하게 하는 가장 위대한 덕을 지니고 있는 힘일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은 인간 역사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전환점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인간들 모두가 바로 이 변화에 참여하기를 원하시고, 우리 자신들이 구원 역사의 협력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바로 여기에서 구원과 치유의 계속적인 과정을 위한 아주 중요한 몇 가지 기준과 전망들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은혜로운 기억을 통해 지속되고 있는 과거, 예리한 분별력과 늘 깨어 준비하는 용의주도함을 통해 드러나는 현재, 그리고 책임감 있는 희망을 통해 가질 수 있는 미래와의 건전한 관계를 끊임없이 유지하는 것이 의학 윤리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기준이 될 것이다.

 

[개정판 생명의 관리자 - 의학윤리를 위한 몇 가지 주제들(가톨릭대학교 출판부, 1995), 이동익 신부 / 이동익 신부님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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