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ㅣ 봉헌생활
유럽 수도원 기행: 베네딕도회의 본산 로마 성 안셀모 수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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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수도원 기행] 베네딕도회의 본산 로마 성 안셀모 수도원 안셀모 수도원에 없는 딱 한 가지 안셀모 수도원도 생활면에서는 여느 베네딕도회 수도원들과 다른 점이 없다. 아빠스, 원장, 당가도 있고, 장로회, 참사회 같은 것도 있으며, 시간 전례, 식당 독서, 식당 봉사까지 여느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갖추어야할 것이 다 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안셀모 수도원에 없는 게 있으니, 그것은 바로 ‘정주(定住)’다. 안셀모 수도원에 정주해서 살아가는 수사들이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이 수도원의 장상인 수석아빠스 역시 선거를 통해 주어진 임기 동안만 정주하는 것이니, 안셀모 수도원이 뼈를 묻어야 할 평생 수도원은 아닌 셈이다. 베네딕도회의 수사들이 모여서 공부하는 이곳은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수도원보다는 학교에 더 가깝다. 그렇지만 현재 안셀모 수도원이 전 세계 베네딕도회 21개 연합회의 중심이 되는 수도원이자, 그 일치의 상징인 수석아빠스가 상주하는 수석아빠스좌 수도원인 점을 고려하면, 학교보다는 수도원으로서 훨씬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성 베네딕도의 수도규칙을 따르며 살아온 수많은 수도원들이 안셀모 수도원의 시작과 더불어 비로소 베네딕도회 총연합을 이루며, 이른바 “베네딕도회”로 탄생했기 때문이다. 로마 아벤티노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베네딕도회 학교 성 안셀모,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인 사실 안셀모 성인의 생애를 들여다보면, 베네딕도회 학교를 위해 이보다 더 적합한 분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실력뿐만 아니라 경력도 화려하다. 태어난 곳은 이탈리아요, 수도원에 입회하고 살다가 아빠스까지 된 곳은 프랑스이고, 그러다 너무 유명해져 대주교로 발탁되어 간곳이 영국, 여기서 또 너무 열심히 교회 개혁운동을 벌이다가 왕에게 미움을 사서 쫓겨 간 곳이 로마, 마침내 로마와 영국이 화해한 뒤 돌아와 생을 마친 곳은 다시 영국이었다. 이러한 안셀모 성인의 지성적이고 국제적인 면모가 그대로 로마 안셀모 수도원에 이어졌다. 실제로 레오 13세 교황이 베네딕도 수도자들을 위해 학교를 만든 것도 실은 동방교회와 대화할 인재를 양성하려는 목적이었다고 한다. 가톨릭과 사이가 좋지 않은 동방교회도 가톨릭 베네딕도 수도자들만큼은 존중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셀모 성인의 모토인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지만, 신앙도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써가며 이해할 수 있는 데까지 이해하면서 믿는 것이다. 그렇게 믿음의 폭이 넓어지면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끼리 대화의 폭도 아울러 넓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서로간의 이해도 깊어지게 된다. 이렇게 배움을 통해 일치에 이른다는 이상은 안셀모 대학의 시작과 더불어 “베네딕도회 총연합”의 결성이라는 첫 열매를 맺었다. 전 세계 베네딕도회의 수장이 계신 곳 다양성 안의 일치를 배우는 배움터 수도원에 사는 사람 수는 약 백 명인데, 이들의 국적 수는 서른 개도 넘는다. 다양하다 못해 ‘인종 전시장’ 같은 안셀모 수도원이지만 너무나 잘 어울려 지낸다. 보통 수도원에서 하듯 성당에서 함께 기도하고 식당에서 같이 밥 먹고 봉사하고 이야기하면서 서로를 점점 더 잘 알아가게 된다. 그러면서 때때로 깜짝깜짝 놀라기도 하는데, 나와 생판 다른 환경의 수도원 이야기를 하는데도 마치 왜관 수도원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한번 놀라고, 그 속에서 겪는 희노애락이 우리랑 너무 닮아서 두 번 놀라고, 끝으로 그 희노애락을 대처하는 태도나 사고방식이 다들 너무 달라서 세 번 놀란다. 같은 점이 많으니 공감할 부분이 많고 다른 점이 확실하여 사고의 폭이 넓어질 기회가 많으니, 안셀모 수도원이야말로 “다양성 안의 일치”를 배우는 최고의 배움터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오르페우스의 신화를 그린 바닥 모자이크가 안셀모 수도원 문간 바닥에 있어서 참 의아해한 적이 있었다. 원래는 안셀모 수도원을 짓다가 땅 속에서 발견된 것이라는데, 이교 신화의 내용이 담긴 모자이크를 복원해서 수도원 입구에 떡하니 깔아놓은 데는 사실 까닭이 있었다. 음악의 재능이 뛰어났던 오르페우스가 노래와 리라 연주로 야생동물들까지 순하게 길들여 춤까지 추게 만들었다는 이야기에서 교회 교부들은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오대양 육대주에서 온 야생 동물들이 로마에서 순하게 길들여져 즐겁게 살 수 있는 것은 역시 아름다운 그레고리오 성가를 부르며 전례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기 때문인 것 같다. 사막의 땀방울과 오아시스의 시원함이 공존하는 곳 교황청립 대학 잠에서 깨어나 일상 속으로 뛰어들면 공부라는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 안셀모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안셀모 대학에는 400여 명의 일반 학생들이 통학하고 있다. 대개는 신부, 수사, 수녀들인데, 간혹 평신도 학생들도 있다. 안셀모 대학에는 여러 학부가 신설되어 있다. 일반 신학교처럼 기본적인 신학을 가르치는 신학 학부, 베네딕도회의 역사에 중점을 두면서 수도승 전통을 가르치는 수도승 신학 학부가 먼저 생겼고, 이후에 교황청립 전례연구소, 성사신학 학부, 신학사 학부, 철학 학부가 생겼다. 통학 학생의 절반 정도가 전례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한국에서 전례학을 가르치는 교수들 중 상당수도 이곳 안셀모 대학 출신이다. 1962년에 설립된 이 교황청립 전례연구소는 1978년에 들어 자체적으로 전례학 석박사 학위를 수여할 수 있는 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안셀모 대학이 시작된 백 년 전만 해도 주로 독일어권 베네딕도회 출신 교수와 학생이 많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교수와 학생 모두 다른 수도회의 수도자뿐 아니라 교구 사제, 평신도의 비율이 늘어났다. 더욱이 안셀모 대학에 다니는 학생은 베네딕도회 수도자가 아니더라도 안셀모 수도원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현재 안셀모 수도원에는 베네딕도회원인 나 말고도 전례를 공부하는 한국인 교구 사제 5명이 함께 살고 있다. 수도자들과 똑같이 짧게는 이삼 년, 길게는 십 년씩 수도원에서 살고 있으니, 이분들은 유학생활 동안 공부에 덤으로 ‘수도생활 체험학교’까지 다니는 셈이다. 베네딕도회 유대와 일치의 구심점 안셀모 수도원의 뿌리는 위에서도 말했지만 사도 바오로의 무덤이 있는 성 바오로 대성당 수도원이다. 안셀모 대학의 모태였다는 점 말고도 성 바오로 대성당은 안셀모 수도원을 지을 때에도 문자 그대로 모태가 되었다. 19세기에 성 바오로 대성당을 복원하고 남은 대리석 기둥들로 안셀모 수도원 성당을 세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로부터 백 년 세월이 지난 지금의 안셀모 수도원은 성 바오로 대성당 수도원을 넘어서서 상징적으로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베네딕도회의 모태가 되고 있다. 전 세계 베네딕도회 수도원들이 안셀모 수도원으로 수사들을 꾸준히 보내고, 이곳에서 공부한 수사들이 또 본국에 돌아가면 자기 수도원에서 나름 필요한 역할을 해낸다. 그런데 학생을 보내는 것은 자기 수도원의 필요를 위해 보내는 것이니까 그렇다 쳐도, 빠듯한 인원에 일도 많은 수도원에서 안셀모 수도원을 위해 교수도 보내고 수도원 행정이나 살림을 맡아볼 수사들까지 보내는 것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전체 베네딕도회 수도원들간의 일치와 유대가 안셀모 수도원 공동체 안에서 생생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어찌 보면 다 자기 수도원의 이익보다 대의를 먼저 생각하는 이런 통 큰 수도원들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땀 흘려 사랑을 배우는 학교 베네딕도 성인은 수도원이 ‘주님을 섬기는 학원’(성 베네딕도의 수도규칙 머리말 45)이 되기를 바랐다. 배움터라는 관점에서 보면, 안셀모 수도원은 주님을 섬기는 법을 배우고 익히는 직업 훈련소라고 할까. 문화, 인종, 국가, 모두 천차만별이라도 서로에 대해 배우고 이해하면서 사랑하려고 마음먹으면 언제든 하나가 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 한지고 형제들이 오순도순 한 데 모여 사는 것!”(시편 133,1)이 가능한지 안셀모 수도원에서 충분히 실습을 한 뒤, 때가 되어 과정을 마치면 수사들은 모두 떠나간다. 고생하며 배운 기술을 실전을 통해 더욱 갈고 닦기 위해 자기 수도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곳은 자기가 평생 뿌리박고 살겠다고 정주 서원을 한 사랑의 학교! 사랑이 넘쳐나는 학교가 아니라 땀 흘려 사랑을 배우는 학교이다. 안셀모 수도원이 어디에 붙었는지 거기에 누가 사는지 몰라도, 종치면 일어나 기도하고, 때 되면 일하러 나가고, 또 종치면 식당에 모여 독서를 들으며 같이 밥 먹고, 끝기도를 마치면 꿈나라로 직행하는 그런 수도 형제들이 사는 내 집이다. 한 지붕 한 식탁에서 가끔 아웅다웅 했어도, 이제 돌아보니 그게 다 우리가 얼마나 사랑을 배우려 노력하며 살았는가 하는 방증같다. 안셀모 수도원 생활을 끝내고 언젠가 한국에 돌아가게 되면, 수도원 우리 형제들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지지고 볶고 바람 잘 날 없어도, 삶의 열정만은 우리가 세계 최고라고. 글 최종근 파코미오 신부, 사진제공 박현동 블라시오 신부 [출처 : 분도, 2012년 봄호,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 0 2,853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