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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생명] 어떻게 생명을 지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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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3 ㅣ No.263

어떻게 생명을 지킬 것인가?

 

 

현대세계는 급속한 변화의 소용돌이를 경험하고 있다. 사회적 상황과 관습의 급속한 변화뿐만 아니라 거기에 따르는 의식의 변화, 나아가서는 인간의 영혼까지도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여름에 까만 가죽장갑을 끼고 활보하는 젊은 여성이나 추운 겨울에나 봄직한 롱 부츠를 마음껏 뽐 내면서 다녀도 이제는 전혀 이색적이 아닌 풍경이 된 시대이다. 우리나라도 이미 미국에서나 있음직한 높은 이혼율이 서서히 현실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과거의 삶이나 의식은 어쩌면 고리타분한 구식 사고방식, 시대에 떨어진 생각이나 행동이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실제로 변화된 새로운 의식은 시민 생활의 대부분의 영역을 침투하게 되면서 전쟁과 그 후의 혼란을 과감하게 떨쳐 버릴 수 있었고, 변화에 따라온 새로운 기술의 발달과 함께 계속해서 수많은 새로운 기술들이 개발되면서 인간의 삶은 질적으로 엄청난 향상과 편리함을 갖게된 긍정적 측면도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편리함은 상상할 수도 없는 수많은 문제점들을 동시에 안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과거에 비해 교통이 놀랄만큼 발달했지만 사고가 나면 과거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대형사고의 위험을 안고 있다. 전기가 인류의 삶에 편리함을 제공해 주었지만 전기가 끊어지면 인간 생활의 거의 모든 영역이 정지된다. 컴퓨터는 작동할 수 없을 것이고 컴퓨터 없는 정보화 사회는 생각할 수도 없다. 피임약이라든가 기구가 발달하여 원치않는 임신을 얼마든지 피할 수 있게 되었지만 만약 실패하는 경우 곧바로 낙태로 이어지는 현실인가하면, 시험관 아기 시술의 발달로 수많은 불임부부들에게 아기를 갖게하는 기쁨을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상으로만 여겨졌던 복제인간의 출현이 현실화된다고 할 때 끔찍하기만 하다. 

 

이러한 변화된 모습은 지난 세기부터 시작된 산업화 시대가 가져다준 하나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산업화 시대의 시작과 함께 시민생활은 경제적인 풍요와 생활의 편리함이라는 긍정적인 면들을 체험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시민들 의식은 자신들이 점점 더 비참한 상태로 빠져들어가고 있음을 자각한다. 너무 편하고 풍부해지니까 현대인들의 삶의 방식은 더 편한 것, 더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고 되고, 결국 마약이라든가 자살의 문제는 고도의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사회에서는 매우 심각한 문제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농경사회가 산업사회로 변화된 인류 역사는 유럽의 경우 불과 150년 정도에 지나지 않고 우리나라의 경우는 그보다도 훨씬 짧은 30년도 채 되지 않는다고 볼 때 이 짧은 시기가 가져다 준 내외적 변화는 실로 충격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특별히 금세기에 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배 영역에서 이루어진 전대미문의 거창한 진보에 대해 피조물이 제구실을 올바로 하지 못하고 있다. 급속한 공업분야에서 빚어지는 자연 환경 오염의 위협이라든가, 끊임없이 거듭거듭 발생하는 무력 충돌이라든가, 원자탄, 수소탄, 중성자탄 및 이와 유사한 무기들의 사용으로 자멸할지도 모르는 현실에서의 몇가지 현상들만 지적해도 충분하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또한 이 회칙에서 인간은 자신이 온갖 재능과 창의력을 발휘하여 이룩해 놓은 업적에 의해서 배반당할 수 있다는 사실에 심각한 두려움을 갖는다는 현대 인간이 느끼는 실존적 위기감을 간과하지 않는다. 인류가 이룩한 가장 위대한 업적 중의 하나는 핵 에너지의 이용으로 이 때문에 인류가 입고 있는 혜택은 실로 엄청나지만 동시에 그러한 혜택 보다도 더 심각하게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핵무기는 인류를 잠시도 긴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기도 하다. 요한 바오로 2세가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인간은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서 거창한 진보를 이루었고, 그렇지만 그러한 진보가 이미 인간에게 위협이 되어 버렸다는 현실에서 그러한 진보 개념은 현대 세계 안에서 하나의 죄라고 말한다고 해도 틀리지 않은 것이다. 

 

현대 인간의 특징을 말한다면 '위기의 인간'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를 '현대 인간이 겪고 있는 실존적 위기'라고 표현한다. 곧 인간 생명의 위기이다. 교통사고로 연간 15,0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고, 아직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태아에 대한 낙태도 150만건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각종 산업재해 수만명의 사상자가 매년 생겨나고 있고,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생태계 파괴와 환경오염으로 인한 인간 생명에 대한 위협은 그칠줄을 모르고 있는 현실이다. 현대인은 가히 인간 생명에 대한 실존적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인간 생명의 위협을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겠는가에 초점을 맞추면서 우선적으로 인간생명에 대한 현시대의 의식과 그에 따라 드러나고 있는 현실을 분석, 진단하고, 그 몇 가지 원인을 살펴본 다음에 인간생명을 귀중히 여기고 보호할 수 있기 위해 요구되는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본고에서 인용되는 통계는 지난 1992년 6월 서강대학교 생명문화연구소에서 실시한 {생명에 대한 사회의식 조사}를 참고하였음을 밝혀둔다.

 

 

1. 생명에 대한 오늘날의 의식과 현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 어느때 보다도 인간 생명이 위협받고 있는 이 시대의 문화를 '죽음의 문화'로 정의하고 있다. 현대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도덕적 불확실성이라는 풍조와 함께 실로 심각한 죄의 구조가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의 온갖 분야를 조정하면서 일종의 생명에 대한 음모가 생명을 거부하도록 부추키는 이 사회의 현실이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인간생명에 대한 많은 범죄와 공격들을 강력하게 단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온갖 종류의 살인, 집단 학살, 낙태, 안락사, 고의적인 자살과 같이 생명 자체를 거역하는 모든 행위와, 지체의 상해, 육체와 정신의 고문, 심리적 탄압과 같이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와 인간 이하의 생활 조건, 불법감금, 추방, 노예화, 매춘, 부녀자와 연소자의 인신매매, 또는 노동자들이 자유와 책임을 가진 인간으로 취급되지 못하고 단순히 수익의 도구로 취급되는 노동의 악조건과 같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모든 행위 등, 또 이와 비슷한 다른 모든 행위는 실로 파렴치한 노릇이다. 그것은 인간 문명을 손상시키는 행위이며 불의를 당하는 사람보다 불의를 자행하는 사람을 더럽히는 행위로서 창조주께 대한 극도의 모욕이다". 이미 30여년 전의 고발 내용이지만 오늘날의 모습은 인간 생명의 존중에 대한 의식이 개선되기는커녕 오히려 그 심각성을 더해하고 있는 현실임을 부정할 수 없다. 

 

실제로 1992년 6월 서강대학교 생명문화연구소가 실시한 {생명에 대한 사회의식조사}는 한국사회 안에 깊숙히 침투한 죽음의 문화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위 연구소가 작성한 설문지를 통해 응답자들은 낙태, 사형제도, 안락사, 자살 등의 행위들을 명백히 '반생명적' 행위라고 응답하고 있으면서도 응답자의 대부분은 이러한 행위들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데에 찬성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조사를 통해서 응답된 반생명적 행위들 가운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가장 반생명적 행위로 생각하는 행위는 의약품이나 식품등에 유해물질을 사용하는 행위와 폐수 등의 공해물질을 사용하는 등의 공해 산업으로 나타났고, 마약, 낙태, 자살, 안락사 등의 행위들이 그 다음의 순서를 나타내 보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의식 조사를 바탕으로 반생명적 행위들로 꼽히고 있는 몇 가지 심각한 행위들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1.1. 먼저 환경오염의 문제부터 보자. 사실상 오늘날 환경오염의 문제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온 인류가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현상으로 여기고 있다. 산업이 고도로 발달되면서 세계 각국은 이제서야 생산 보다는 인류의 건강과 생명을 생각하게 되었고, 이러한 생각은 각국의 정치, 경제, 문화 정책이라든가 국제 관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주제도 등장하고 있는 현실이다. 환경오염의 현실은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인간생명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요인으로 지목하는 데에는 사실상 많은 검증적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환경오염은 어떤 특정한 개인의 영역보다는 그 범위가 훨씬 더 광범위하다. 바로 지금 나에게 그 피해가 오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자각은 다른 어떤 반생명적 행위보다도 그 심각성을 깨닫는 데에는 더 많은 희생을 감수했어야만 했던 것이다. 환경오염의 피해는 개인적인 피해의 차원을 넘어서 엄청난 다수의 생명을 위협하게 되며, 결국은 죽음에까지 이르게하는 위협이다. 

 

우리는 10년전의 체르노빌 원전 폭발사고를 기억한다. 결국 이 사건 때문에 그 지역 전체가 핵으로 오염이 되었고, 수만명이 죽었거나 1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죽어가고 있다. 아직까지도 태어나는 아기들 중에는 기형아가 상당수에 이르고 있다. 그 지역의 오염으로 인해 이제는 생명이 발을 붙이지 못하는 곳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 오염이 언제 정상으로 돌아올런지는 아무도 모른다. 또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물고기의 내장이나 소. 돼지 등의 내장을 먹는 것을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물고기나 가축 등이 이미 심각하게 중금속에 오염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금속의 일종인 카드뮴은 인체에는 전혀 필요가 없는 유독물질인데 그것이 일단 몸 속에 들어오면 배출되지 않고 간과 신장 등에 축적되어 그 결과는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에도 인간 생명에 치명적인 것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손발이 떨리고, 꼬이며, 심지어는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게 되면서 서서히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물론 음식에 유해물질을 사용한다거나 공장 폐수 등으로 인해 물이 중금속에 오염되기 때문이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또한 오늘날 가장 심각한 자연파괴 현상의 결과 가운데 지구 온난화 현상을 들 수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이산화탄소, 메탄 등이 증가하면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 원인의 상당부분은 도시화, 산업화의 결과에 있다고 한다. 최근 몇 년동안 지구촌을 놀라게 하던 폭우라든가 폭풍, 이상 한파나 이상 난동, 해수면 증가 등의 현상을 단순히 자연현상이라고 여기기에는 의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자연의 현상이라기 보다는 자연을 우습게 보는 인간의 교만과 이기주의에 그 직접적 원인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이런 상태라면 언제 인간이 그러한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을런지 모른다. 자연파괴 현상은 그 어느 행위들 보다도 더 끔찍한 살인행위이다. 

 

1.2. 위의 조사는 심각한 반생명적 현상의 하나로 낙태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낙태는 곧 살인행위라는 의식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150만-200만건의 낙태시술이 불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 숫자라면 하루에 평균 약 6,000명의 무죄한 태아가 살해당하고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우리나라의 법에는 낙태죄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지만 낙태죄로 인해 처벌받은 사람은 아직까지 한 사람도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인공임신중절을 규제하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는 1953년 9월에 제정 공포된 형법 (법률 제 293호)의 낙태죄에 관한 것이 그 효시였지만 이 법에서는 인공임신중절을 제공한 의료인과 수용한 부녀 모두가 소정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으나 다른 허용하는 기준이 없었고, 그 후 1973년 5월에 제정 공포된 모자보건법은 몇 가지 인공임신중절 허용 기준을 마련하여 그 기준에 따라 임신 28주 내에 있는 자가 배우자의 동의를 얻어 의사가 인공임신중절을 시행할 수 있도록 명문화되었다. 그렇지만 그 후 지금까지 낙태죄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지만 낙태죄로 처벌받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하니 모자보건법의 시행으로 우리나라는 낙태가 허용된 셈이다. 

 

법 뿐만이 아니라 사실상 낙태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허용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라는 데에 그 심각성은 더하다. 1994년도에 실시한 미혼 남성의 성 행태에 관한 조사결과에 의하면 미혼 남성 근로자의 성 경험율이 78.1%, 그리고 남자 대학생의 경우는 36.3%로 매우 높은 수준을 나타내고 있을 뿐 아니라, 이들의 혼전 임신에 대한 태도를 보면 남성 근로자의 91.2%, 남자 대학생의 42.3%가 인공임신중절을 하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어 미혼층의 인공임신중절율은 날로 크게 증가될 것이 예상되기도 한다.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 기관들 중에는 '미혼모의 집'이 여러 곳 있다. 사회복지 차원에서의 사업이다. 생명존중 및 사회복지 차원에서의 사업이다. 낙태 방지의 차원에서 미혼모 상담하고, 그들이 원하면 출산 때까지 정신적, 육체적으로 편안하게 쉬면서 출산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물론 철저한 비밀을 보장해 주고, 출산 후에 아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다른 집에 입양까지도 도와주고, 건강한 정신으로 사회에 다시 복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업이다. 미혼모로서 임신한 여성들이 이 곳을 찾는 사람은 물론 극히 드물다. 아직도 이런 곳이 있는 것 조차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이다. 미혼으로 임신한 여성들 중에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이 곳을 찾는 여성들의 말에 따르면 성(性)은 이미 쾌락의 도구가 되어 버렸고, 생명전달을 위한 성, 책임있는 성이라는 말은 이미 고전으로 묻혀버린듯한 느낌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혼전 임신의 경우 대부분은 곧바로 낙태를 생각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인 것이다. 

 

실제로 낙태의 합법화가 가장 먼저 이루어진 나라는 미국이라고 할 수 있다. 50개 주중 대부분의 주에서는 이미 낙태를 합법화하고 있다. 합법화의 배경에는 소위 말하는 일부 여권신장주의자(Feminist)들의 주도적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 곧 여성은 자신의 몸에 일어난 일을 선택할 권리를 갖는다는 주장이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태아는 생명에의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신체를 사용할 권리는 여성의 판단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미혼으로 임신했을 경우에 당사자가 느끼는 심각성은 대단히 크다. 정신적 피해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한다. 사회로부터 멸시받고, 직장내에서 손가락질당하고, 심지어는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기도 하고, 친구관계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고, 가족들로부터 냉대받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미혼모는 자신이 당하는 고통의 원인을 뱃속에 있는 아기에게 돌린다. 뱃 속의 아기 때문에 이러한 고민을 해야하고 여러가지 고통을 당하고 있으니 아기만 없어지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곧 내가 살기 위해서는 뱃 속에 든 아기가 없어져 주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윤리신학에서 말하는 '전체성의 원리'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전체성의 원리'란 한 유기체에 있어서 한 지체가 유기체 전체에게 심각한 해를 끼치게 될 때 그 지체는 유기체 전체를 위해서 부분적 혹은 전체적으로 희생될 수 있는데 이는 윤리적으로 정당하다는 이론이다. 그들은 뱃 속의 아기를 자신의 몸의 일부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태아의 생명은 엄연히 하나의 독립된 생명체이다. 

 

태아의 생명을 자신에게 속한 것으로 여기고 자기자신을 위해서 태아가 희생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현대의 극단적인 개인주의의 사고에서는 아무런 이의도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이다. '아무도 2 등을 기억해주지 않는다', '내가 잘되기 위해서는 남이 희생되어야 한다',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남을 밟고 일어서야 한다'는 논리가 당연하게 현실을 지배함으로써 결국 태아까지 죽이는 결과를 낳게되는 것이다. 

 

1.3. 이제 날로 증가하고 있는 자살의 심각성에 대해서 말해 보자. 경찰청 집계에 의하면 1995년 자살건수 7,401건, 1991년에는 6,593건이다. 4년전에 비해 12.2%가 증가했고, 매년 증가추세에 있다. 인구 10만명당 자살자 17.2명, 매일 20명 이상이 자살한 셈이다. 자주 신문지상에 인기가수 누구 자살, 고등학생 성적 비관 자살 등의 기사를 읽을 수 있는 현실이다. 생명문화연구소의 조사에서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놀랍게도 52.4%가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이유는 삶의 의미 상실 혹은 삶 자체의 회의가 53.3%로 삶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의 부재나 혼란 등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살은 보통 일종의 절망행위이다. 자살자는 그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데 실패한 사람이거나, 전체적인 면에서 경솔한 결정이나 혼란을 통해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 순간에 자기 자신을 어리석게 만들고, 또 자신의 삶을 망쳤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순간의 결정이 그의 삶을 캄캄한 암흑 속으로 던져놓고 마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본질적으로 사회적 존재이고 사회와 더불어, 주위의 다른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본질적으로 주위의 도움을 필요로하는 존재인 인간에게 있어 절망적 고립이라는 극단적 상황이 찾아온다면 그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는 상실되고말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만 갇혀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존재성을 확인하는 일일 것이다.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도움을 받는다는 인간으로서의 지극히 정상적인 관계로 되돌아갈 필요가 절실히 요구된다. 자포자기나 절망은 그가 속한 사회의 책임이 크다. 사회가 당연히 그러한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대한 관심과 정의를 보여주어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를 상실했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주위의 관심이 필요하다. 아니 그보다도 그런 상황 이전에 서로에게 관심을 주고 서로의 관계에서 신뢰를 확고히 할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충동적인 자살 성향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자기 파괴적 충동에 스스로의 삶을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종종 그들이 갖고 있는 장점들을 끄집어내어 줌으로써, 또한 그들의 긍정적인 특성을 부각시켜 줌으로써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1.4. 안락사 

 

지난 3월 어느 일간 신문에서 미연방항소법원이 미국 헌법이 '죽을 권리'를 보호하고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는 보도를 접하였다. 곧 어쩔 수 없이 죽음에 임박한 환자가 원치 않는 치료를 거부할 수 있도록 허락한 1990년의 미연방법원의 판례에 근거해서 정신 상태가 양호한 육체적 말기 환자는 의사가 처방해준 약을 사용해서 자신의 죽음을 앞당길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서강대학교 생명문화연구소의 설문조사에서 81.1%가 부분적으로 혹은 완전히 허용하는데 찬성하고 있는 현실과 위의 보도는 사실상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법이라는 것이 다수의 의견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기에 법의 해석 또한 이를 붸아간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러한 보도에 실상 많은 사람들이 말기 환자의 고통을 단축시켜 인간 존엄성에 부합되는 것처럼 보이는 '편안한 죽음 (안락사)'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심히 염려스럽다. 

 

인간이 지니는 가치와 권리 중에서 가장 으뜸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입각한 생명의 권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온갖 종류의 살인, 학살, 낙태, 안락사, 고의적인 자살과 같이 생명을 거역하는 행위들을 단죄했다. 그렇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인간 생명의 근본 가치마저도 의문시되고, 고통과 죽음을 보는 눈도 달라지면서 사람들은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도 하지 않는다. 죽는다는 것은 육체적 생존의 끝이며, 따라서 인간으로서의 모든 가능성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세상과 하직하고 가족 친지들과 영원히 이별하고, 온갖 것을 다 잃어버리는 상실의 공포가 엄습하면서 지금까지의 삶이 마치 허구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죽음이기도 하다. 고통 중에 있는 말기 환자의 경우 이러한 죽음을 생각하는 정신적 고통은 어쩌면 육체의 고통보다도 더 클 것이며 결국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그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며, 그 방법만이 가장 인간다운 죽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문제는 인간적 죽음이 무엇이냐?하는 문제이다. 죽음이란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전혀 피할 수 없는 사건이다. 인간은 반드시 죽어야만 하고 따라서 이러한 피할 수 없는 사실 앞에서 죽음으로 운명지워진 모든 인간은 같은 조건에 처해 있다.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사실 앞에서 인간은 인격적 존재로서 불리움을 받았으며, 또한 양심을 가지고, 자유롭게, 책임감을 가지고 인간됨을 실현하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기 위한 존재로 불리움을 받은 존재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적 죽음이란 인간 존재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하고도 거절할 수 없는 요소이며, 또한 생명 전체를 요약하는 것이고, 나아가 완전하게 되는 순간으로서 평화로움과 용기를 가지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은 책임감있는 자유와 의식을 통해서 받아들여져야 하며, 나아가 각자의 고유한 삶을 통해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죽음이란 인간적이고 그리스도적 존엄성을 지니는 죽음이어야 한다. 

 

1.5. 서강대학교의 생명문화연구소가 조사한 {생명에 대한 사회의식조사}에서는 응답자들이 체외수정(시험관아기)은 반생명적이 아닌 것으로 응답하고 있다. 체외수정이 아기를 갖지 못하는 불임부부들에게 아기를 갖게 해주는 좋은 기술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이 비록 수많은 불임부부들에게 아기를 가질 수 있다는 희망과 기쁨을 가져다 주기는 하였지만 우리는 이 기술에서 볼 수 있는 심각한 윤리적 문제를 외면할 수는 없다. 

 

체외수정의 방법은 어머니의 몸에서가 아닌 시험관 위에서 생식세포를 수정시켜 여성의 자궁에 착상시키는 방법이다. 사람의 생명이 부부의 사랑을 통해서가 아니라 의사의 손에 의해 실험실의 시험관 위에서 만들어져 생겨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보여지는 인간학적 및 심리학적 측면에서의 비인간화의 실상은 차치하고라도 학문의 여러분야에서 인간 생명의 시작이라고 여기고 있는 수정란에 대한 손실은 가히 인간 생명의 온전성에 해를 가하는 일임에 틀림이 없다. 유전공학의 발달로 수정란을 가지고 수많은 실험, 조작, 연구가 실행되고 있고, 결국 수정란 손실로 나타나게 된다. 예컨대 사람과 동물 생식 세포 사이의 수정이라든지, 인간 배아를 동물 자궁에 착상시키는 일에 대한 시도나 계획, 수정란 복제, 염색체 조작, 그리고 인간 배아를 위하여 인공자궁을 만들어 내는 일, 배아 보존을 위한 저온냉동 등의 끔찍한 일들이 소위 인간을 위한 의학 기술이라는 미명하에 한계를 모르고 발전하고 있는 현실이다. 과연 과학기술의 발전은 어떤 목적을 가지는가?

 

 

2. 생명경시현상의 원인들 

 

이미 서론에서도 언급했듯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생명의 복음}에서 생명에 대한 위협, 특히 생명의 초기단계와 마지막 단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공격을 근본적 문화의 위기로서의 '죽음의 문화'라고 단언한다. 위에서 우리가 볼 수 있었듯이 일반화된 여론은 죽음의 문화를 더 이상 범죄로서 간주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개개인의 자유에 기초한 일종의 권리로서 위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위장이 현대인간을 심각하게 오염시켜 놓고 있으며 더욱 비참한 것은 현대인 자신들은 그 오염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이러한 범죄로서의 생명경시현상의 원인들을 다음 몇 가지로 구분하여 보았다. 

 

2.1. 물질만능주의 

 

이러한 사조는 경제성장 제일주의를 바탕으로 한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가져다 준 가장 심각한 오류로서 물질만능주의를 고발하고 있으며, 이러한 사조는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유물론(唯物論)과는 또 다른 각도에서의 실천적 유물론인 것이다. 

 

물질만능주의는 한마디로 물질을 인간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사고방식이다. 사람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그 사람이 얼마만큼 많이 가지고 있고 또 어떤 지위에 있느냐가 척도가 된다. 돈이면 못하는 것이 없다는 사고방식이다. 오로지 생산적이며 쾌락적인 차원에서만 생명을 의미있게 받아들인다. 돈 때문에 아버지까지도 죽일 수도 있고, 돈만 있으면 불가능한 것도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는 사회이다. 경제적 능력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임신된 태아를 낙태시킬 수 있다는 현실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 아래서 경제성장을 국가의 최고 목표로 삼아온 우리나라는 최근 20여년간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었지만 그 반면에 잃은 것은 너무나 많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고,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이 정당화되어왔다. 공장에서 나오는 폐수가 물을 오염시키고 온 국민을 병들게 하는데도 최근 몇 년전까지만해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돈벌이에만 급급해온 것이다. 인간이 결국 물질에 예속되어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공해라든가 환경오염, 자연파괴 현상등이 이제 심각하게 인간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고 온 국민이 피부로 느끼고 있는 실정이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바꾸어 나가야 할지, 또 얼마나 오랜 시간을 두고 바꾸어야 할지 깜깜한 현실이다. 

 

2.2. 극단적인 자유주의적 및 개인주의적 사고방식 

 

오늘날 미국인들은 어떤 행위에 대해서 그 행위의 옳고 그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옳고 그름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의미가 없다는 말이며, 어떤 행동에 있어서 옳고 그름에 따라서 행동하는 시기는 이미 지났다는 것이다. 그들의 행동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1) 그 행위가 나에게 어떤 이익이 있는가? 2) 그 행위를 내가 하고 싶은가?이다. 아무리 옳은 행위라 하더라도 그 행위가 나에게 이익이 없다면 전혀 움직이지 않을뿐더러, 설사 이익이 있다하더라도 내가 하고 싶지 않으면 전혀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철저한 이기주의이다. 이런 모습이 비단 미국의 모습만은 아니다. 우리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과연 내가 행동하도록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 

 

현대인들이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가치로 받아들이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다. 이들이 내세우는 삶의 기본노선은 개별 실존을 위한 투쟁이며, 선의 기준은 '자유로이' 행할 수 있었느냐에 있다. 그러므로 자유가 곧 절대적 윤리규범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자유란 구속을 받지 않는 것,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고 따라서 각개인의 자유를 구속한다고 생각되는 의무, 덕, 권위, 전통, 법, 관습 등 객관적 윤리규범을 거부하고, 행위의 윤리도덕성을 상황에 따라 자유로이 판별하고자 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따라서 자유로운 낙태, 자살의 자유, 자유로운 안락사, 성의 해방을 주장하면서 무절제한 현세적 복지를 추구하고, 혼인 및 가정윤리를 파괴하며, 정치, 경제, 예술 등 제반 인간사와 도덕을 분리하는 결과를 빚는다. 충실과 책임을 도외시하는 그릇된 자유는 결국 개인과 공동체를 파괴하고 분해하고 말 것이다. 이러한 그릇된 자유와 함께 인간은 신과 진리, 절대적 규범을 상실하면서 이제 자신을 신화(神化)하여 생명마저도 계획, 조정할 수 있는 권한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자신이 세계의 절대 규범인양 버티고 있는 것이다. 

 

2.3. 과학기술주의적 사고방식 

 

이러한 사고방식은 인간의 지성은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가장 인간다운 특징이며, 또한 창조주께서는 인간에게 창조된 이 세상을 통치하라고 하셨기에 인간은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은 지성을 최대한 발달시키는 것이 창조주의 뜻을 가장 잘 실현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인간 지성이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한계가 없이 발전시켜 나가야한다는 사고방식이며, 결국 이러한 사고방식은 과학-기술적으로 가능한 것은 윤리적으로도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과학-기술의 발전, 의료 기술의 발전은 사실상 인간 삶에 있어서 엄청난 풍요로움을 제공해 주었지만 오늘날 인간은 그러한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부터 인간 삶이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한다. 핵이 질적으로 향상된 인간 삶을 위해서는 유용하지만 핵무기는 인류를 파멸시킬 수도 있으며, 장기이식이 비록 그리스도교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덕목으로서의 애덕(愛德)을 실천하는 한 방법이 되기는 하지만 그러한 방법이 인간의 본성을 무시하고 또 인간성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해를 끼치는 방향으로 발전되어 간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삶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한 것이지 인간을 비인간화시킬 때에는 의미가 없다. 인간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인간을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는 과학기술이라면 심각한 문제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 심각성을 직면하고 있다. 

 

"내가 할 수 있으니까 해도 된다", "내가 직접하지 못하면 과학의 도움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해도 된다"라는 사고로 인해 아기를 갖기 위해, 체외수정에, 대리모에 의존하며 병의 치유를 위해 장기적출용 태아를 임신하기도 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인간은 자신과 자연의 조작을 통하여 역동적인 자아 형성 및 발전, 자아실현을 기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적 조작이 자신과 공동체의 인간성 파괴를 가져온다면 그것은 윤리적으로 금지될 수밖에 없다. 

 

 

3. 인간생명의 보호를 위한 몇 가지 제언 

 

3.1. 의사들의 지성과 양심 

 

기원전 4-5세기경에 살았던 히포크라테스는 자신의 유명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통해 "나는 누가 요청하더라도 죽음에 이르는 약은 주지 않겠으며, 여인에게 유산시키는 도구를 주지 않으며... 순수하고 성스럽게 나의 인생과 의술을 지키겠다"고 했다. 당시의 퇴폐적 사회풍조에서 낙태가 성행했을 것이라는 것은 그의 이 선서를 통해서도 잘 알 수가 있다. 당시에는 아버지의 허락만 있으면 아무런 제약없이 낙태를 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신생아조차도 아버지 마음대로 죽이거나 짐승의 먹이로 내놓거나 아니면 노예시장에 팔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의사로서의 올바른 양심을 지킨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며, 그럼에도 히포크라테스는 인간의 생명을 위한 봉사직이라는 자신의 의사로서의 소명에 충실할 수 있었다는 것이 바로 오늘날의 모든 의사들의 모범이 되는 것이다. 

 

낙태가 반생명적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나라에서는 이미 낙태가 합법화되었고, 또 합법화를 위해 찬.반토론 중에 있는 나라들도 많다. 우리나라는 엄격히 말해 낙태는 엄연한 불법이지만 낙태죄에 관한 형법 폐지에 관한 찬.반토론이 매우 활발한 실정이다. 독일에서도 이 문제에 관한 논란이 이미 70년대 초에 있었다고 하는데 이 당시 낙태죄에 관한 형법 폐지에 관해 가장 결정적인 반대를 했던 집단은 바로 낙태를 직접 담당하는 산부인과 의사들이있다고 한다. 의사들이 낙태를 안하겠다는 상황에서 사실상 법의 개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겠는가? 독일에서 의사들의 낙태 반대는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의사들은 생명을 보호하고 살리기 위한 직업적 소명을 받은 자들이지 생명을 죽이는 자가 결코 아니라는 양심은 끝까지 지켜져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전문의사들의 생명 존중을 위한 가치관과 양심이 매우 중요한 시대이다. 인간생명의 존중을 위해 많은 종교단체들이 노력하고 있고 또 그에 따라 생명 존중을 위한 많은 교육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만일 우리나라에서도 종교를 가진 산부인과 의사들이 먼저 '우리는 인간생명의 보호를 위해 낙태를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선언을 할 수 있는 양심적인 의사들의 집단이 생겨난다면 그 어떤 생명운동보다도 큰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의사들은 인간생명을 다루는데 있어서 그 어떤 직업인들보다도 권위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가장 크게 요구되는 것은 그들 분야에 있어서의 전문적 지식이다. 이 전문적 지식이 부족하거나 없을 경우 그들에게 맡겨진 인간생명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인간생명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중요한 수술을 하면서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실수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실수를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실수로 여겨서는 안될 것이다. 

 

3.2. 언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생명의 복음}에서 인간생명에 대한 다양하고도 치명적인 결과의 밑바닥에는 사회 '윤리의식'의 문제가 깊이 깔려있음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사회가 생명에 반하는 행위들을 용인하고 조장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생명을 거스르는 실제적인 '죄의 구조들'을 만들어내고 강화하는 죽음의 문화를 고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개인과 사회의 윤리의식은 모두 극도로 심각하고 치명적인 위험에 직면하고 있는데, 바로 이것은 침투력이 강한 대중언론매체의 영향력이 강하다는 것이다. 

 

실상 서강대학교 생명문화연구소의 {생명에 대한 사회의식조사}결과는 현재 생명존중의식의 고취를 위하여 가장 효과적인 역할을 당담하는 분야를 언론 홍보로 꼽고 있다. 언론이 인간생명을 직접 다루는 의료계보다 더 중요하다는 시민들의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반생명적 현상을 주도하고 있는 의식들 중의 하나는 소위 말하는 사회학주의적 사고방식이다. 이 사고방식은 모든 판단 기준은 사회를 초월할 수 없으며, 개인 양심은 집단 양심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에 사회가 곧 신(神)이요 절대자로 등장한다. 따라서 이러한 윤리관은 객관적이고도 영구적인 윤리규범을 거부하고, 가치의 기준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를 뿐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내포하고 있는 위험은 집단 양심의 조작이다.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는 것이 여론이고, 그 조작된 여론은 계속해서 사회의 집단 양심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며, 여기에 대중 언론 매체의 역할은 오늘날과 같은 사회에서는 거의 절대적이라고해도 틀리지 않다. 그렇지만 언론 매체가 개인 양심을 움직인다고 해서 인간생명의 존엄성이 변화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공청회에서 낙태의 합법화를 주장하는 비율이 90%가 넘는다고 해서 미혼모의 낙태를 정당한 시각으로 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소비주의가 인간의 사고를 조장하고 있는 현실에 있어서 언론 역시 이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람보다는 상품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그 사람이 어떤 물건을 가지고 있는지 혹은 어떤 물건을 구입할 능력이 있는가에 따라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소비주의적 사고가 대중언론 매체를 지배함에 따라 인간 존중의 모습은 멀리 사라져버린 느낌이다. 아무도 이등을 기억해주지 않는 사회라든가, 일류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식의 기업 광고를 아무런 비판도 없이 받아들이면서 그러한 사고에 익숙해져가는 현대인이 아닌가? 언론이 인간생명의 천부적인 가치를 객관화 상품화하여 생명경시 현상을 조장하고 있다면 언론 자체에서 심각한 반성이 있어야할 것이다. 대부분의 시민이 믿고 있고 또 기대하는 바대로 언론은 가장 존엄한 생명체로서의 인간 지위를 회복시켜주는 교육자, 봉사자로서의 기능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할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현실에서의 반생명 현상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개입과 함께 그 개선책을 제시하는데 노력해야할 것이다.

 

3.3. 생명존중을 위한 법의 역할 

 

몇 년전 낙태죄 폐지에 관한 형법 제 135조에 관한 입법 예고가 있었을 때 가톨릭 교회를 비롯하여 많은 종교 단체에서는 이를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곧 이 법의 취지는 1973년도부터 시행된 모자보건법을 보완하고 실질적으로 몇몇 경우에는 법이 낙태를 허용하고 이에 대한 형사적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법의 입법에 대해 많은 종교 단체에서는 우려를 표명했고, 특히 가톨릭 교회는 전국 차원에서의 입법 반대 서명운동을 벌여 106만명의 반대서명을 국회에 전달한 바 있었다. 가톨릭 교회가 이렇게 강한 반대를 표명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물론 인간생명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보호되어야 한다는 기본입장에서였다. 곧 많은 사람들이 국가의 법으로 허용되는 것이라면 양심적 및 윤리적으로도 허용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인간생명의 질적 구분을 허용하는 법의 입법을 막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국가의 기능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일차적으로 윤리의식의 기본일 것이다. 한 국가가, 사회 안에 만연되어 있는 중대한 윤리적 오류에 대해 방관하거나 혹은 오히려 더 조장하는 역할을 담당한다면 그것은 국가의 존립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국가의 공권력이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면 그 국가의 존립이유를 과연 무엇이라고 대변할 수 있겠는가? 모든 개인의 생명은 천부적인 것으로 신성하기 때문에 결코 침해될 수 없는 권리를 갖는다. 따라서 인간생명은 결코 질적으로 구분되어 폭력의 희생이 되어서는 안된다. 

 

실상 공권력은 법과 도덕률간의 상호 관계를 잘 조정할 수 있는 합리적 원칙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법의 기능은 기본권의 인식과 보호, 그리고 평화와 공중도덕의 증진을 통해서 사람들의 공동선을 보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개개 시민의 권리, 특히 더 힘이 없는 사람들의 권리를 더 이상 보호해 주지 않을 경우 법에 근거를 둔 국가의 존재는 불확실해질 수밖에 없다. 출생전의 아기라 하더라도 모든 인간은 임신되는 순간부터 법적 보호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태아의 생명권을 의도적으로 박탁한다면 법 앞에서의 인간 평등은 전혀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오늘날 많은 국가에서 낙태를 합법화하고 미혼자들의 동거를 법적으로 묵인해 줌으로써 인간생명의 존엄성 앙양을 어렵게 만들고 있는 상황에서, 누구보다도 특별히 생명의학 분야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민권 문제를 다루는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부당한 법을 고치고 부당한 기술 사용을 못하게 하는 일에 앞장 설 결심을 해야 할 것이다. 

 

이제 법의 분야에서 고려되어야 할 점이 또 하나 있다면 그것은 예방 차원에서의 입법으로서 이는 분명 인간생명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현행 의료법에서는 태아의 성감별 행위에 대한 처벌 규정을 1994년부터 두고 있다. 그러한 행위가 낙태가 거의 용인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도 여아 낙태의 원인이 된다고해서 과거보다는 더욱 엄격하게 벌금형 및 징역형을 부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법의 적용은 건전한 생명문화를 위해 근본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과거보다는 현격하게 여아 낙태를 감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것만은 사실이며, 이는 일종의 법의 예방적 차원에서의 효과이다. 입법 차원에서의 이러한 노력이 생명문화를 지키는데 일조를 한다면, 이제 인간생명을 대상으로하는 행위들이 단순히 의료윤리 차원에만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점이 명확해진다. 인간생명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법의 노력은 이제 사건의 결과에만 매달리기 보다는 예방 차원에서의 규범적인 노력으로 나타나야할 것이다. 오늘날 생명공학의 영역에서 시도, 실험되고 있는 인간 배아를 동물 자궁에 착상시키는 일이라든가 복제 인간의 가능성을 현실화시킬 수도 있는 수정란의 인위적 증식 등의 방법이 인류의 미래에 미치게될 엄청난 파장을 미리 생각해볼 때 수정란 보호법이 입법된다면 그것도 역시 인간생명의 보호를 위한 예방 차원에서의 입법일 것이다.

 

 

4. 종교단체에서의 꾸준한 교육 및 노력 

 

{생명에 대한 사회의식조사}에서는 생명존중 의식의 고취를 위해 현재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분야로서 단연 종교계를 꼽고 있다. 종교인들에게 있어서 인간생명은 신앙의 영역에 속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성스러운 영역인 인간생명이 경시된다고 할 때 이는 분명 신에 대한 도전이요, 인간 자신의 영역을 넘어선 침해로서 간주되는 것이다. 곧 인간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의식 고취는 신앙의 실천이며, 성스러운 분야를 보호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이를 위한 종교계의 노력은 자신의 신원에 대한 재확인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음의 몇 가지 측면에서 종교계가 담당해야할 노력을 보도록 하자. 

 

1)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교육 : 무엇보다도 인간이 물질적 가치로 평가될 수 없다는 올바른 가치관 형성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현실을 눈에 보이는 것, 경험 가능한 것에로 국한 시키는 자연과학의 발달로 인해 인간까지도 더 이상 인간을 존재로 여기기보다는 현상, 사실로 인간을 국한시키는 가치전도의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가치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가치의 근원이 자리한다는 의식 고취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의식의 전환은 인간을 수단이나 방법으로서가 아닌 그 자체로 목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느님을 버린 인간이 자신과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다시 찾아야 한다. 

 

2) 인간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꾸준한 교육 : 이미 언급했듯이 인간생명은 인간 자신에게 속한 영역이 아니라 하느님께 속해 있는 성스러운 영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생명은 성스러운 것이며, 이에 어느 인간도 이 영역에 대한 권한은 없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있게하신 하느님께 순응하는 것이 인간의 몫이다. 인간은 단지 자신에게 맡겨진 생명을 잘 보호하고 가꾸어나가는 생명의 관리자일 뿐이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맡기신 인간생명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질적인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정신적 능력의 차이 때문에, 장애의 정도 차이 때문에 결코 인간 존재의 질적 구분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힘이 없고, 약하고, 자신의 힘 만으로는 이 세상을 헤쳐나갈 수 없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살아있는 사람들의 예술이 절대적으로 요구될 뿐이다. 

 

3) 성교육 : 책임있는 성교육이 절실히 요구된다.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성교육을 학교 교육에만 맡길 수는 없다. 현실과 결과만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이 자칫 올바른 성교육이 아니라 피임교육으로만 흐를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을 자칫 감각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하는 쾌락주의나 경제적,사회적 이유 때문에 언제든지 낙태시킬 수 있다는 실용주의, 개인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서 성의 올바른 의미를 교육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지라도 어릴 때부터의 건전하고도 책임감 있는 성교육이 매우 필요한 현실이다. 생명의 신비를 비롯해서 성과 사랑의 의미, 혼인, 책임감을 요구하는 성에 대한 교육들이 각 교회의 초등부 학생들에게부터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4) 교회는 생명을 존중하는 모범을 이 사회에 보여주어야 한다. 오늘날 사회가 개방되었고, 성에 대한 풍속도 과거에 비해 엄청난 변화를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이 사회가 미혼모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있는가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이다. 실상 미혼모의 경우, 그 처지는 매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처녀로서 임신했다는 사실이 주위로부터 손가락질당하게 만들고, 직장이나 가정에서 많은 불이익이 따르게 된다. 여러가지 사회적, 정신적 불이익이 그녀로 하여금 쉽게 낙태의 결정을 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미혼모가 처녀로서 아기를 가졌다는 것을 비난하는 사회이기 보다는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아기를 낳아 기르고 있다는 용기와 결단, 생명에 대한 사랑을 높이 평가해주는 사회였으면 한다. 물론 사회의 이러한 의식 전환을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교회의 모범이 필요하다. 아기를 낳아 기르고 있는 미혼모라 할지라도 교회라든가 종교 단체의 직원으로서 아무런 장애없이 받아들여져 일할 수 있는 교회 자체의 의식 전환도 함께 필요한 것이 아닐까?

 

[사목연구 제4집(1996년, 가톨릭대학교 사목연구소), 이동익(가톨릭대학교 교수, 신부, 윤리신학) / 이동익 신부님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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