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홍)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사회적 죽음에 이르는 실직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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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3 ㅣ No.242

사회적 죽음에 이르는 실직 사태

 

 

불현듯 엄습하는 죽음의 그림자에서 삶의 고뇌를 감지한다는 실존론적인 입장을 떠나서라도,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인류가 지구상에 생존하기 시작한 이래 시대나 장소를 불문하고 지속적으로 잔존해 왔다. 생존 본능에 좌우되는 대부분의 생명체들도 자신이나 종족의 보존을 위해 진력한다. 더구나 사고하는 존재(homo sapiens)로서 죽음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인간에게 죽음은 인생의 가장 큰 고통과 비극의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생명이 다해 한줌 흙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을 자연적 죽음이라는 개념으로 통괄한다면, 우리는 그와 구별되는 또 다른 의미의 죽음, 곧 육신은 살아있되 마음이 멸한 상태로의 '사회적 죽음'을 별도의 범주로 제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다."는 자탄에서 엿볼 수 있듯, IMF 경제 위기에 즈음한 대량 실업 사태를 계기로 정신적 사망 증후가 최근 우리 사회에 널리 확산되어가고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1. 직업의 사회적 의미

 

생산 중심의 사회가 소비 중심으로 전환됨에 따라, 직업 활동이 생활 만족도에 미치는 효과가 약화되어 가고 있다는 견해가 최근 들어 유력시되고 있다. 또한 탈물질주의 가치관의 확산으로 금전적 보상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격하되면서 직업 생활보다 여가 생활에서 생의 보람을 탐닉하려는 새로운 경향이 젊은 세대를 주축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가정 생활, 사교 생활, 여가 생활 등 어떠한 류의 근로외적 활동이든 소정의 물질적 기반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극소수 불로 소득 계층을 제외한 대다수 사람들의 경우 생활의 물질적 기초는 근로 활동을 통해 조달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직업적 지위나 역할은 여전히 총체적 삶의 질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로 군림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직업 활동은 돈, 권력, 명예 등의 외적 가치 이외에도 일 자체의 보람과 기쁨을 증진시키는 내적 기능을 동반함으로써 높낮이를 불문하고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개인의 자의식이나 정체성을 부여하는 결정적 요건으로 작용한다. 때문에 도산이나 정리 해고 등으로 하루아침에 직장을 떠나게 된 실직자나 강제 퇴직자들은 실업에 따른 경제적 압박이나 심리적 무력감으로 극심한 사회적 죽음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2. 실직의 라이프 사이클

 

1997년 12월 4일부로 IMF 체제로 돌입한 한국 사회는 1998년 9월 말 현재 실업률 7.2%, 실직자 총수는 약 150여만 명에 육박하고 있는데, 금년 말에는 실업률 10%, 실직자 2백만 명을 헤아릴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러한 대량 실업 사태는 직업 생활의 파행은 물론 국민들의 생활고를 가중시키는 크나큰 원인의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 

 

실업자 가정의 경우, 초기에는 불황에 이어지는 임금 삭감과 구조 조정으로 가정 내의 소비 규모가 대폭 축소되고, 실직을 계기로 생활비를 최소화하게 되며, 실업 기간이 장기화되면서는 개인 파산이 속출하는 등 경제적인 자립 능력이 상실되게 된다. 또 그 같은 생활 조건의 변화에 따라 실직자들의 경제적 압박감은 실업 기간의 확장과 함께 지속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반면, 실업에 대한 정신적 스트레스의 정도는 '나는 무사하겠지.'라는 회피 의식을 주조로 하는 1차 폴리아나 단계, 불안, 공포로 특정되는 상승 단계를 거쳐 실직 시점에는 극도의 배신감과 분노로 비롯한 스트레스의 클라이맥스 단계에 이른 후, 실직 후 잠정적 안정기인 2차 폴리아나 단계를 거쳐, 실업이 장기화되면서 스트레스는 급상승한다. 

 

또 스트레스의 유형은 '모면 심리 - 불안, 공포 - 분노, 배신감 - 해방감, 이완감 - 절망, 자포 자기'의 단계를 거치는데 이 같은 일련의 과정을 나누어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불황기

 

대량 실업이 전망되는 불황기에는 '우리 회사는 괜찮겠지', '설마 내가 실직 대상이 되지는 않겠지'라고 안일하게 생각하는 모면 의식을 바탕으로 한 폴리아나 심리가 강하다. 폴리아나 현상이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닥쳤을 경우 적극적으로 대처하기보다는 우선 어떻게 되겠지 하고 바라는 안주 심리를 지칭한다. 이 시기에는 앞으로 닥쳐올 해고, 감원 대상에 오르지 않기 위해서 상사의 눈치를 보고, 출퇴근 시간이나 대인 관계에도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과잉 적응 증후군도 동반된다.

 

2) 조정기

 

경영 악화로 회사가 임금 삭감을 넘어 구조 조정을 단행하게 되면 언제든 자신이 감원 대상이 될지 모른다는 예기적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게 되면서 스트레스가 급상승한다. 이때는 불안 해소를 위해 과음, 과다 흡연을 하게 되나, 겉으로는 정상적인 대인 관계를 유지하려 하면서 불안 심리를 안으로 되삭이는 가면 우울 증세가 커지게 된다. 

 

3) 실직

 

불안, 공포기를 지나 실직을 당하게 되면 선정 결과나 해고 기준에 대한 불만으로 배신감과 분노를 주조로 하는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게 된다. 이때 실직은 자신의 책임이라기보다는 국가, 재벌, 기업인, 고용주 등의 책임(他者歸責)이라고 비난하게 되며 이러한 생각은 배신감을 더해 주는 요소로 작용한다. 또 이 시기에는 많은 실직자들이 소화장애나 불면증 등 신체적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한다. 

 

4) 실직 직후

 

실직 후에는 빠른 체념을 통해 적극적으로 실직 상황을 수용하면서 망중한(忙中閑)을 취하며 재취업을 시도하는 2차 폴리아나 단계로 전환된다. 

 

5) 실직 장기화

 

재취업의 실패가 반복되면서 초조, 불안해지고 자신감이 저하되면서 2차 좌절을 겪게 되어 스트레스는 급상승하게 된다. 2차 좌절은 1차 좌절과는 달리 재기 불능에 대한 책임을 오히려 내부적으로 전환하게 되면서(自我歸責) 절망, 자포 자기에 빠지게 되며 모든 일에 냉소적이고 신경질적인 행동을 보인다. 이때, 순조로운 재취업이 이루어지면 스트레스는 꺾이게 되지만, 용케 재취업이 되었더라도 그것이 임시직, 대체직이라면 스트레스는 완만한 상승세를 나타낸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경우는 선진 서구 사회와는 달리 현재 외환 위기 상황의 악조건에 있고 고용 창출 정책, 취업 정보 제공, 재취업 교육 등이 미흡하여 발전적 재취업의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이같이 낮은 직업 이동성과 취약한 실업 급여 등으로 실직자들의 다수가 2차 좌절에 돌입할 가능성이 크다. 이렇듯 실업이 장기화할 경우 폭력, 자살 등의 공격적 행동, 음주, 마약 등 은둔적 행위, 가족 해체나 개인 파산에 따른 홈리스족의 증가 등 다양한 사회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3. 실직에 따른 생활상의 변화

 

가장의 실직은 당사자뿐 아니라 가족 생활 전반에 치명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실직으로 초래되는 생활의 변화를 크게 가정 경제, 가족 관계, 사회 관계 등 3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가계 경제의 위축 

 

불황기에 접어들면 사람들은 사회적 분위기를 의식하여 소비 행위를 자제하게 된다. 가장 즉각적으로 변화를 보이는 행동은 가정 내 에너지 절약 운동이다. 그 후 회사에 부도가 나거나 구조 조정 등으로 임금이나 상여금이 삭감되면 소비 구조를 본격적으로 재편하게 된다. 적금이나 보험을 축소하거나 해약해서라도 소정의 수입을 유지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외식비 지출 등을 위시한 개인 용돈의 규모를 축소시키는 등의 변화를 보이기도 한다. 또 자가용 이용을 절제하여 차량 유지비의 절약을 도모하고, 신용 카드 사용을 절제하거나 아예 없애 버리기도 한다. 생활 계획의 측면에서 보면, 향후의 수입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내 집 마련이나 주거 규모 확장 등의 계획을 연기하거나 취소하고, 나아가 부모님 회갑이나 칠순, 또는 자녀 돌잔치 등의 가족 행사도 대폭 축소하게 된다. 

 

실직을 당하게 되면 심각한 경제적 압박을 실감하게 되지만, 그간의 저축과 퇴직금, 그리고 3개월 지급되는 실업 급여 등으로 당장은 큰 곤란 없이 그런대로 생활에 임해 나간다. 경우에 따라서는 주택 융자금 상환 등으로 고통을 겪을 경우 퇴직금으로 일시 상환함으로써 가계에 여유를 찾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그 동안 지원해 왔던 부모 부양비를 축소하거나 중단하며, 식료품비를 줄이는 등 문화비 외에 필수 생활비를 가급적 축소함으로써 실직 사태에 좀더 적극적으로 대처하려 한다. 

 

퇴직 후 1개월 정도가 지나면서는 본가나 처가의 지원을 받기도 하면서 생활비 규모를 최소화시켜 나가게 되는데, 이때에는 그간 주저해 왔던 자녀의 사교육 중단이라는 한국 부모의 입장에서는 실로 뼈아픈 결단을 내리기도 한다. 주택 규모를 축소시키면서까지 금전 확보에 전력 투구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소득 충당에 대한 근본적인 대처 방안이 없이 실업 장기화로 돌입할 경우 개인 파산이 격증하게 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2) 사회 관계의 단절

 

불황기에는 모든 사교 모임이 재조정된다. 따라서 가족이 함께 있는 시간은 상대적으로 증가하는 현상을 보인다. 회사가 부도나거나 구조 조정이 시작되면 특히 경제적 지출이 뒤따르는 경조사 모임에 참가하는 빈도가 크게 감소하게 된다. 그러나 비슷한 상황에 있는 친구들을 만나 회사 위기와 관련된 정보를 얻거나 상황을 탐색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적극적인 대인 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나아가 실직 사태에 대비하여 여러 다른 진로에 대한 가능성을 타진해 보게 되므로 전화 통화가 부쩍 증가하기도 한다. 이때의 만남에서는 과거 단란 주점에서 만나던 것과는 달리 포장 마차에서 만나거나, 식사와 함께 간단히 한잔하거나, 1차 모임으로 끝내는 등 경제적인 측면을 상당히 고려하게 된다.

 

권고 사직 등을 이유로 실직하게 된 직후에는 오히려 휴가 기분을 맛보면서 며칠은 집안에서 휴식한다. 그러나 이것도 잠깐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은 갑작스럽게 얻게 된 많은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고 생활 리듬을 잃게 된다. 따라서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 집밖을 떠돈다. 등산을 하거나 직업 알선 센터를 전전하며 비슷한 입장에 있는 불특정인들과의 대화로 현재의 상황에 대한 공감대도 형성하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또 때때로 재취업의 가능성 타진이나 새로운 사업 구상을 위해 평소 알고 지내던 여러 사람들을 만나보기도 하면서 방랑하거나 배회하게 된다. 

 

그러나 실업을 타개할 수 있는 방안으로 인적 자원을 활용하는 데는 엄연한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 되면서 대인 관계에 적극성을 잃게 된다. 또 만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과 능력을 잘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따라서 오히려 사람들과 만나 심적 부담을 끼치고 싶지도 않거니와 그 지출도 만만치 않다고 생각하면서 점진적으로 집 밖 외출을 꺼리게 된다. 

 

따라서 실직 1개월 정도가 지나면, 가정 내에서 TV를 보거나, 책을 읽는 등 시간 소비적 활동이 증가하고 상대적으로 대인 관계는 급격하게 감소하게 된다. 물론 그 중에는 아르바이트나 재취업을 위한 자기 개발 활동 등을 하면서 나름대로 효율적 시간 관리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또 꼭 어떤 정해진 활동을 하지 않더라도 규칙적인 시간 사용 패턴으로 강요된 여가 시간에 적응해 감으로써 변화된 시간량에 익숙해 가는 사례도 있다. 

 

그러나 사회 관계의 측면에서 볼 때, 실직이 장기화할 경우 가장 우려되는 것은 만성적 대인 관계 기피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실직자의 사회적 고립은 약물 의존이나 자해 등 심각한 사회 문제로 이어질 개연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사회의 적극적 대처 노력이 요망된다. 

 

3) 가족 관계의 와해

 

불황은 어떤 측면에서는 가족 결속에 도움을 줄 수도 있다. 가족 관계에서 파생되는 가족원 각자의 문제들은 경제적 불황이라는 외적 요인으로 이차적인 것으로 밀려나게 되고, 가족들은 외적 위협 요소에 대해 공동으로 대처하려는 자세를 갖게 된다. 따라서 불황 초기에 이혼을 준비하던 부부들이 비용 문제로 이혼도 자제하고, 별거하던 사람들도 경제적 극복이라는 공통 목표 달성을 위해 힘을 합치는 경우도 있다. 

 

회사가 부도나거나 구조 조정이 시작되면 가족들은 극도의 불안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불안도 잠시, 가족들은 주어진 상황에 대해 빠른 이해와 적응을 하게 된다. 이를테면 생활 규모를 축소시킨다든지, 전업 주부가 적극적으로 취업 전선에 나서기도 한다. 실업 위기가 가중되면서 가족들은 본격적인 내부적?외부적 구조 조정을 감행하기도 한다. 가령 부인의 취업 및 부업으로 양육의 책임을 처가에 떠맡기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가 보는 주말 가족을 형성하기도 하고, 지금까지 주말 부부 형태를 취해 왔던 부부들은 일을 위해 월말 부부마저 불사한다. 

 

남편이 실직을 당하게 되면, 가족원들은 일단은 실직의 아픔을 공유하며 가장을 위로하고 배려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인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다. 자녀들은 아버지가 집에 머물러 있는 상황에 익숙지 않아 아버지를 기피하게 되고, 주부 역시 온종일 남편이 집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또 남편의 입장에서는 가족 부양의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격지심으로 가족 관계에도 매우 소극적 태도를 취한다. 집이 있어도 노숙을 마다 않는 떠돌이 가장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바로 생계는 가장이 책임져야 한다는 한국적 가부장 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가족원들은 다른 한편 주어진 환경에 적응해 나가기 위해 기존의 생활 환경에 대한 적응을 도모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퇴직한 남편이 저녁 식사 준비를 하고, 자녀들이 가사에 참여함으로써 가족 역할의 재구조화를 시도하게 되는 일인데, 이는 가족 체제의 유지를 위한 가족들의 자구적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직은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차원에서의 가족 구조상의 변화를 야기한다. 

 

첫째는 가족 내적 구조의 변화이다. 전업 주부가 새롭게 경제 주체로서 부상되면서 전통적 성역할이 직접적으로 도전받게 된다. 남편은 일, 부인은 가정이라는 전통적 성역할을 신봉해 온 부부의 경우, 어쩔 수 없이 부인을 돈벌이 시키게 한 남편의 실업 상황은 부부 모두에게 크나큰 스트레스의 원천이 아닐 수 없다. 

 

둘째는 가족 외적 구조상의 변화이다. 결혼을 연기하거나 출산을 유보하는 등 실업은 가족 주기의 이행에 걸림돌로 작용한다. 또 가족들은 노부모에게의 육아 전가, 원거리 취업 등으로 일시적 가족 해체를 선택하거나, 부모 또는 형제 가족들과의 합가를 계획하거나 나아가 생활 계획을 대폭적으로 수정하는 등 나름대로 상황 적응을 위해 노력하지만, 이러한 가족의 재구조화 방안은 궁극적으로 가족 생활의 불안정성을 가중시키게 된다. 이러한 노력들이 상황 극복으로 이어지지 않을 때에는 부인 또는 남편의 가출, 유아 유기, 이혼 등 가족의 영구 해체로 이어질 수도 있다. 

 

 

4. 대처 방안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실업이 장기화할 경우 경제적 압박감이나 심리적 스트레스가 급성장함은 물론, 가족 관계나 사회 관계도 급속도로 악화되게 된다. 이를 위한 가정, 사회, 기업 차원의 적절한 대응 방안들로는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개별 가정의 측면에서 살펴보자면, 가족 부양의 책임은 전적으로 가장에게 있다는 전통적 가부장 이데올로기로 고실업 시대의 모든 가족 성원들이 괴로움에 처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남자의 역할과 여자의 역할을 구분해 놓는 이분법적 역할 이데올로기는 직업 상황이 안정적이지 못한 고실업 사회에서는 더 이상 그 유효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 남편은 가족 부양의 무거운 심리적 책임에서 벗어나야 하고, 부인은 남편의 실직에 대해 단순한 위로 차원을 벗어나서 직접 근로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양성 공유 사회로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이 같은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한국의 가족들은 남편의 실업으로 발생하는 가족 역할 갈등이라는 심리적 고통에서 원천적으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공공 정책적 측면에서는 실직자에게 심적 스트레스와 생활고를 극복하기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재취업인 만큼 그를 위한 제도적인 노력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일차적으로 대형 공공 사업의 조기 착수, 신규 대체 직종의 개발, 법정 근로 시간의 단축 등을 통한 고용 창출 정책이 필요하다. 또 공공 차원에서의 직업 알선 능력을 강화하고, 공공 정보 네트워킹을 확충하는 등 신뢰성 있고 체계적인 취업 정보 제공에도 힘써야 할 것이다. 또한 일정 기간의 실업 급여도 중요하지만 그 기간을 다소 늘리는 것보다는 전문 기술 교육을 강화시키는 등 재취업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 제공함으로써 직종 전환을 통한 재취업의 기회를 부여하는 데 적극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대인 관계를 기피하거나 가족간 상호 작용을 회피하는 등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되어 있는 실직자들에게는 접근 용이한 심리 상담 전문 채널을 제공해 줌으로써 그들의 극단적 행동을 방지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한편, 기업 차원에서는 부득이한 인원 조정이 필요한 경우, 대상 선정에서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을 마련하여 대상자 본인이 극도의 배신감과 분노를 느끼지 않고 실직 상황을 심리적으로 수용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할 것이다. 또 갑작스런 해고 통보보다는 퇴직을 사전에 예고하여 재취업을 위한 유예 기간을 부여하고 각종 취업 정보를 제공해 주거나 재취업을 위한 프로그램을 제공해 줌으로써 정신적 충격을 완화시키려는 세심한 노력도 병행해야 할 것으로 본다. 

 

 

5. 맺음말

 

이렇듯 최근의 극심한 실직난, 취업난은 실직자들로 하여금 직장, 동료 및 가족과의 단절을 초래함으로써 육신은 온전하되 본연의 사회 경제적 역할 수행을 박탈당한 사회적 사망 상태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대량 실업 사태에서 실직은 더 이상 실직자 개개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상시적 현상의 하나인 바, 누구든 실직에 봉착할 수 있다는 공감적 입장에서 실직자들과 물질적, 정신적 고통을 공유함으로써 그들이 근로 역군으로 부활할 수 있도록 공동체적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으로 본다.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고 슬픔은 나눌수록 적어진다."는 말대로, 협애한 가족주의나 연고주의를 초극하여 천만 실업자 가족들과 고락을 함께 함으로써 나눔의 신비를 발휘하는 것이 오늘날과 같은 어려운 시기를 살아가는 국민의 책무며 신앙인의 기본 자세가 아닌가 한다.

 

[사목, 1998년 11월호, 김문조(고려 대학교 교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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