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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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낙태와 그리스도 신자들의 책임감(북유럽 주교들의 성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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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5 ㅣ No.284

낙태와 그리스도 신자들의 책임감


북유럽 주교들의 성명서

 

 

서언

 

1. 인간이면 누구나가 품고 있는 소망, 스스로를 꽃 피우고, 또 고뇌와 절망에서 벗어나려는 이 소망은 인간이 투지와 심혈을 기울여 온 가장 근본적인 영역의 하나이다. 오늘날과 같은 시대, 이 철저한 격동의 무대, 자연과 자기 고유한 실존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이 끊임없이 전진하는 무대 위에서는 우리가 생과 그 의미, 그 가치, 그 법칙들에 대해 생각하고 믿는 바가 곧 특이한 명목으로 우리의 운명을 좌우한다.

 

인간 생명, 그것이 생긴 순간부터 그 모든 단계의 인간 생명에 대해 우리의 가치 판단은 곧장 작용하게 된다. 이러한 판단의 작용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가지는 관념에 심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우리가 나아가고 있는 장래의 향방까지 결정한다는 것은 의심 없는 사실이다. 우리 국가들 안에서, 고의적인 임신중절(姙娠中絶, abortus provocatus)에 관한 사고방식의 변화와 임신중절 입법화의 진화는 앞으로 장기간에 걸쳐 나타날 결과들을 이미 야기시키고 있다.

 

우리는 가톨릭의 주교들이라는 자격으로서,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풀어 나간다. 우선 멀리 혹은 가까이에서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교 신앙을 공유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例)의 문제성을 제기한다. 그러나 우리가 동조(同調)를 사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신자들만은 아니다. 우리가 말을 건네는 범위는, 오늘날 이 지상의 공통적 진화과정과 우리 운명의 공동체에 대하여 책임감을 느끼는 선의의 모든 사람들까지다.

 

 

제1부 문제의 현실성


오늘의 시대가 우리에게 이 문제를 제기한다.

 

2. 우리는 다만 성명서를 통해서 낙태 문제를 다루는 데에 따르는 몇몇 난점들을 잘 알고 있다. 실상 이 소재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양심 깊이에서 고뇌를 겪는 장소, 선택 여하에 따라 중대한 여러 가지 결과들이 산출되는 복잡한 그 장소에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

 

북유럽, 그리고 세계 도처에서 많은 여인들이 명시적으로는 원치 않으면서도, 그들의 생계 및 사활이 걸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바람직하지 못한 고의적인 임신중절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숫제 그 아무도 외면할 수 없는 하나의 현실이다. 그들이 처한 상황들이 자주 임신중절에 의한 해결을 암시하고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가 법을 빙자하여서까지 그러한 해결책을 채택해버릴 가능성을 얼마든지 제공한다. 벌써 얼마 전부터 여론 형성을 주도하는 단체들이 온갖 영향력을 행사하고 나섰다. 그들은 오늘날 우리 이웃들과 그리고 여인들에게 낙태에의 자유로운 접근을 완전한 인간적 자유의 조건일뿐더러, 또한 행복하게 살아도 된다는-그러한 권리를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이라고 단언해 주고 있다.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볼 때, 북유럽의 국가들은 중도적인 입장을 취해서 낙태를 입법화했다고 할 수 있다; 낙태를 절대적으로 금지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자유로운 접근을 허용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북유럽 국가들의 법률은 몇몇 이유들의 정당성을 선언하고 있다. 어떤 국가들에 있어서는, 그 이유들이 종횡으로 너무 광범위하거나 자유스럽게 해석되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들이 아니고서는 낙태는 불법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매우 일반적인 용어들로써 밖에 우리의 소신을 설명할 수 없다. 북유럽 국가들이 이 점에 관해서 법률의 형태와 윤곽은 동일할지라도 공통 입법화에는 도달하지 못한 까닭이다. 공통 입법화를 저지하는 난점은, 그 백성들 자신들이 이 문제에 관하여 동일한 태도를 취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그 법률들은 과거의 금법(禁法)들로부터 점진적으로, 그리고 계속해서 벗어난 결실이다. 그렇지만 입법은 그것을 추진한 사람들이 바라던 기대들을 다 채워주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 견해로서는 그 법률들이 가혹한 시련을 겪고 있는 여인들에게 그들의 문제들을 참으로 만족할 만큼 해결해 주지 못한 것으로 인식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이미 정해진 법령들과 이 법률들의 위임권자들이 내린 결정들도 북유럽의 몇몇 국가들에서는 자의적이라 해서 비난까지 받고 있다. 결국 오늘날 이 법률들의 개정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아졌는가 하면, 또한 그들은 흔히들 근본적인 자유화를 상정해 보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교회들은 이처럼 중대한 문제들을 좌시하고만 있을 수 없다. 교회는 그 태어나기 이전의 무수한 인간들, 그들의 생사가 걸려 있는 실천들과 법률들에 전혀 무관할 수가 없다. 특히 가톨릭 교회는 항상 신중을 기해서 자기의 책임을 다해 오지 않았던가. 물론 이러한 역할은 가톨릭 교회 역사의 첫머리에서부터 지녀온 것이다. 기독교는 추상적인 사랑만을 설교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 생명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려는 사랑의 실천력을 구사한다. 그래서 인간 생명에 대한 너무 협소한 시계를 벗어나, 거기에서부터 새로이 전개되는 차원을 제공하려는 사랑의 힘으로 자기가 설파한 바를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적인 체험 가운데에서 인간 생명에 대한 존중이 항시 위협받고 있음을 감지한다. 그리고 이 인간 생명에의 존중은 특히 우리 각자의 생과 사가 충돌하는 마당에 있어, 어떠한 이기심도 희생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유지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공동책임

 

3. 현대 사회의 진화는 애매하기 짝이 없다. 어떤 관점들에 있어서, 그 진화는 인격의 존엄성에 대한 이해를 더할 수 없이 증진시킨다. 그러나 또 다른 관점들에 있어서는, 인격의 독자성과 불가침성에 대한 온갖 존중심을 위협하고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낙태에 관해서 보여주는 관용이 곧 현대 사회에서 생명에의 존중심을 위협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그 외에도 맹목적인 국수주의, 폭력에 맛들이기, 인종적 편견, 절제할 줄 모르는 이윤 추구 등 숱한 위험들을 보여주고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도 자주 낙태를 권장하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사태는 인간사에 있어 가장 앞장선 발전단계에 서 있는 인간 생명에 대한 일반화된 경멸을 역력히 노출시키는 셈이다.

 

오늘날 그리스도 신자들, 특히 우리 국가들의 가톨릭 신자들은 분명히 양립할 수 없는 요구 조건들로 말미암아 심한 내적 갈등과 긴장감을 느끼고 있다. 그들은 낙태가 합법화된 사회 안에서 살고 있지만, 이 낙태의 합법화 역시 모체의 건강을 위한다든지, 혹은 낙태라는 한계성을 벗어나 태어난 어린이들에게 의미가 넘치는 삶을 영위할 수 있게끔 기회를 제공한다는 자못 심각한 동기들을 내세우고 있다. 또 한편으로, 그들은 그리스도교 도덕 윤리들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을 양심으로부터 느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이미 언급한 대로 우선 해이해지는 경향들에 찬동하고 싶어한다. 이러한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비단 임신기간이 바람직하지 못하고 비극적일 수밖에 없는 그런 여인들만이 아니다. 아기들의 아버지, 의사, 사회적 보조자, 간호사 등등의 사람들-상담자, 부모, 친구-역시 마찬가지로 갈등을 겪고 있다.

 

우리의 성명서는 제2부에서 위의 사람들이 소속된 단체들 하나 하나를 지적해가며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수태된 성명과 그 장래를 위한 책임이 사회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으며, 아기의 어머니가 처한 특후한 정황을 훨씬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미리 강조해 두고자 한다. 실은 모든 점에 있어서, 성의 목적과 존엄성에 관한 정상적인 견해들, 성직관계들에 대한 참으로 인간적인 개념을 길러주는 교육, 인격체로서 뿐 아니라 또한 어머니로서의 여인에 대한 존중이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이러한 정황에 처한 많은 사람들이 돌파구를 찾아 그 딱한 처지에서 벗어나야 될 줄 안다. 그러나 딱한 처지를 벗어났다손 치더라도 곧장 내적 갈등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돌파구를 찾는다고 해도 실망과 큰 충격을 받게 마련이다. 우리들로서는 신자들에게 사목적 지침들을 주어(신자들은 이 사목지침을 받아들일 권리가 있다), 우리들 대부분을 동요시키고 있는 이 중대한 문제를 신앙과 이성의 빛에 입각해서 검토하는 일보다 더 시급한 일은 없을 것이다.

 

두 가지 측면 : 윤리적 츨면과 법적 측면

 

4. 문제점을 더욱 뚜렷이 드러내기 위해서, 여기서 연관되어 있지만 서로 다른 두 가지 문제들로 나누어 보는 것이 유인할 것이다.첫째, 우리는 낙태에 대해서 어떠한 도덕적 판단을 내릴 것인가? 이 때 문제시되고 있는 인간적 가치들은 도대체 무엇이며, 그 가치들 중에서 우리에게 의무를 지우는 가치들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야말로 우리가 실제로 태아의 생사가 걸려 있는 경우에 처할 때에 취하게 되는 우리의 판단과 행동을 결정해 줄 것이다.

 

둘째, 민주화되고 다원화된 사회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낙태에 대한 입법조처에 직면하게 되어 취할 태도는 무엇인가? 이 사회는 그리스도교적으로만 생각하고 처신하는 남녀들로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외에도 다양한 관념과 의견을 지닌 남녀들도 늘 한데 살고 있다. 이 둘째 질문은 시민, 선거권자, 정치생활의 책임자들로서의 우리가 가진 의무들과 관련되어 있다.

 

삶의 목적과 그 가치성

 

5. 그리스도교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인격체인 우리 각자는 - 즉 하느님의 눈 앞에 대체할 수 없는 개인으로서 - 하나의 고유한 삶의 목적을 받았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상황과 조건에서 그 목적을 실현하도록 불리웠다. 그 목적이 어떤 위협과 침공을 받을세라 깨어 지켜야 한다. 성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인간'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신자로서 인간을 충만한 개화로 인도하는 길이 생활조건들과 그 가능성들에 대한 기술적, 생물학적, 사회적, 정치적 지배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한다. 오히려 이런 면의 가능성들 밖에 반영하지 않는 태도와 입법은 인간을 배반하게 된다. 물론 우리가 인간 생명을 공유하고 있는 모든 인간 존재들과 통교하는 가운데, 눈 앞의 지상적 임무들에 마음을 다 쓰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임무들이 마치 그 외에는 다른 것이 없는 양 배제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이 생사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확고히 말한다. 인간은 한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함부로 희생시킬 권리가 없다. 신앙은 하느님께서 자주 상당한 고통을 보내시지만, 그 고통을 축복의 샘으로 만드신다고 믿는다. 또한 신앙은 많은 사람들의 눈에 '실패작'으로 비치는 가냘픈 하나의 생명체라도 인류 공동체가 사랑을 자기의 법으로 삼고 있는 한, 그 인류 공동체 안에서 적극적인 기능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 신자는 법이 인정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릇된 처신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객관적으로 떳떳하고 인간적인 것을 실천해야만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교가 인간을 묘사하는 형상이 우리의 가장 심원한 인간적 동경들과 상응한다는 것, 그리고 개인과 사회에 큰 타격을 주지 않고서도 이 현상을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우리는 모두가 타인의 생명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 그리고 이 책임은 여러 가지 면을 갖고 있다. 어떤 종속적 유대들은 더 이상 발전에 창조적이거나 도움을 주지도 못한다. 그런 것들은 오히려 우리 생명의 의미를 위협하기 때문에 과감히 끊어버릴 필요까지 있다. 책임성 있게 행동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의를 위해서 고통을 받는다는 것, 희생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자기포기와 극복을 가리킨다.

 

이것이 일반적인 생활의 철칙이다. 그렇지만 이 일반적인 생활 철칙은 어머니와 그 아기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에 적용될 경우엔, 특수한 현실성과 진리를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한 어머니의 소명은 자기의 분신이면서도 자기 자신이 아닌 한 새로운 인간 생명을 위탁받는 순간에 그 성격이 변한다. 사람들은 한 어머니가 자기 아기를 원하고 갖고 싶어할 때 기울이는 정성과 애정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다. 반대로 한 여인이 어머니로서의 임무를 기꺼이 다 하려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할 경우에 가지게 되는 내적 갈등이 또한 그 어떠한 것인지를 알고 있다.

 

교회는 고의적인 임신중절을 반대하는 입장이다.

 

6. 그리스도교는 인간 생명을 보호하려는 배려로, 그 역사 초세기부터 항시 고의적인 임신중절을 결연히 반대해 왔고 태아의 생존 및 개발의 권리를 보류시킴이 없이 옹호하고 변호해 왔다. 신학자들과 여타의 과학자들이 태아가 어느 순간에 인격체로서의 온전한 자질을 갖추는가에 대해 논란을 한 적은 있지만, 문제의 핵심-즉 태아가 생존할 권리가 있다는 데에는 한 번도 의심을 표명하지 않았다.

 

현재의 사고방식들과 법의 진화는 가톨릭 교회를 동요시킬 만큼 성공하지도 못했다. 교회의 교도권에서 나온 최근의 문헌들은 예전에 나온 문헌들보다 더 한층 강경한 태도를 보인다. 우리 시대의 생물학적 탐구의 결과도 재론할 여지 없이 수태의 순간을 태아의 생명이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출발점으로 생각하는 데로 기울어진다. 태아가 공급받는 영양은 그 어머니의 육체에서 나오지만 그렇다고 태아가 어머니의 유기체의 일부분은 아니다. 태아가 개체화된 인간 생명임은 의심할 여지조차 없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인격의 존엄성을 확인하면서, 그리고 '온갖 종류의 살인, 집단 학살, 낙태, 안락사, 고의적인 자살과 같은 생명 자체를 거역하는 모든 행위를 배격하면서'(사목헌장 27항) 취한 입장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 외의 다른 동기를 뒤적인다는 것은 실로 무익할 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공의회는 부부애와 인간 생명에 대한 존중심을 다루는 항목에서 이렇게 말한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는 생명유지라는 숭고한 임무를 인간에게 맡기시어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 품위에 맞갖은 방법으로 이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생명은 그 수태되는 순간부터 성심껏 보호해야 한다. 낙태와 유아 살해는 가증할 죄악이다." 따라서 교회의 입장은 수태되는 그 순간부터 고유한 의미로 인간 생명인 태아의 생존권을 존중하는 데에 있다.

 

생명을 보호하고 기르는 데 만전을 기하기 위해

 

7. 이같은 교회의 입장은 교회가 지닌 사상의 견고성에 의하여, 또한 교회가 지닌 생성 도중에 있는 인간 생명 전체에 대한 존중성에 의하여 그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북유럽 국가들의 주교들이라는 자격으로서, 우리가 사목상 책임을 느끼는 몇 가지 구체적인 상황들에 접근한다. 더불어 예의 상황들과 관련 있는 몇몇 문제점들에 관심을 환기시키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믿는다. 이러한 문제성을 가진 면들은 태아의 생명유지권을 옹호하는 가톨릭 교회의 투쟁을 호감과 이해심을 갖고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바로 그러한 면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흔히 자기네가 교회의 가르침과 무관하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ㄱ) 우리는 태아를 보호받을 권리가 있는 하나의 생명으로서 존중하도록 호소한다. 이는 곧 믿는 자에게 그만큼의 의무를 지우는 우리 그리스도교 양심의 표명이다. 동시에 그리스도교 양심은 믿는 자로 하여금 개인적으로 혹은 그가 속해 있는 제도들을 통하여 임신한 여인이 자기 태아를 자기 자신은 물론 자기 가정에 큰 손실이 없이 낳을 수 있게끔 효과적인 도움을 제공해야 하는 의무를 지워준다. 그리스도교 설교가 그 의무를 강조함이 없이 양심만을 역설한다면 이 또한 오류를 사는 것이리라. 이 같은 의무는 또 다른 하나의 의무를 초래한다. 자기 이웃을 돕기 위해 필요한 희생을 치룰 각오가 되어 있지 않는 사람은, 엄격한 도덕을 변호할 자격 또한 지닐 수가 없다.

 

(ㄴ) 그 밖에도 우리의 문제는 일반적으로 성과 그에 관련된 교육이라는 시사적인 문맥에서 고립될 수도 없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이 우리 시대의 양심 안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알고 있으며, 또한 그 문제들이 그리스도 교회에게 어떠한 도전을 감행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 특히 일정한 역사의 시점에서나 규정된 상황들 안에서, 그 사회의 윤리와 관습은 성생활의 조화된 발전을 장려한다기보다 오히려 억제해온 편이다. 이에 오늘날 교회의 목소리가 보다 많은 청중의 호응과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교 교육자들이 좀더 청명한 시력으로 회복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불행히도 어떤 규칙과 금법을 만드는 것이 자유와 책임감을 잘 행사하도록 교육시키는 것보다 훨씬 더 수월한 셈이다. 그렇지만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수세기 동안 그리스도 교회들이 성교육에 기여한 적극적인 공헌까지도 자주 저질의 것으로 평가한다. 이러한 평가는 오히려 그들이 인간적이고 적극적인 요소들을 홀시하고 망각하는 그릇된 정신과 학설들을 따랐다는 데에 기인하는 것이다. 낙태라는 문제에 대한 이성과 신앙의 목소리를 더욱 뚜렷하게 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인들은 진정 인간적인 이해와 성생활 교육을 증진시켜야 한다.

 

(ㄷ) 우리는 어떤 기독교 신자들이(그들이 평신도이건 성직자이건) 우리 시대에 있어서 생명의 거룩한 특성을 반대하는 위험들-예로서, 전쟁의 공포와 사형제도 같은 부끄러운 일-에 대해서 매우 놀랍도록 겁 많고 불확실한 태도를 보이기 때문에 아직 성숙하지도 못하고 인간 사회 안에 자리를 잡지도 못한 생명을 강경하게 보호하지도 못한다는 질책을 받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보건대, 낙태가 야기시키는 불행들에 대항하여 감연히 투쟁을 전개했던 시대도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폭력과 타협하고 만 시대도 있었다. 밀밭에서 가라지를 뽑아내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다. 각 시대가 과오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든 우리는 인간 생명을 보호하려는 것을 알고 있다.

 

(ㄹ) 우리는 오늘날의 여성들이 정당한 인격체로서 이해되고 그 결과 여성 스스로가 자기네의 진로와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 또한 그와 같은 자유의 성취와 더불어 앞으로도 보다 높이 평가될 진보의 작업을 간과할 수는 더욱 없다. 이러한 요인들은 적극적인 요인들이고, 인간생명의 존엄성, 나아가 건강에 대한 존중심으로도 그 이해력의 범위를 넓히는 것이 된다. 인간의 생명 및 건강에 대한 존중심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의미의 개화와 자율과 행복까지를 포함하고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제2부 책임성 안에서의 자유


유일한 문제는 다각도의 책임감이다.

 

8. 낙태의 문제가 비등하고 있는 사회 및 문화적인 풍조 안에서, 교회는 자기 신자들에게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그 도움이란 우리들의 일상생활 가운데에서 보다 바르게 판단하고 바르게 행동할 수 있는 지침을 제시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판단과 행동 규범은 무엇보다도 인간을 위한 바르고 적절한 금법인 신법과 일치함으로써 확고하게 전개될 것이다.

 

한 인간 존재가 어떤 곤혹이나 복잡한 상황에 놓였을 때, 그는 스스로의 최종적인 결단을 내리게 된다. 이러한 경우, 그 최종 결단은 자각적인 양심과 충분한 반성에 따른 개인적인 선택에 전적으로 맡겨져야 한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천부적인 자유, 말하자면 이미 자유와 함께 주어진 인간 생명의 절대적인 권리이다. 그런데 이 자유는 선을 행할 수도 있고 반대로 악을 저지를 수도 있는 양면적인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로 우리는 진정한 인간성에 합치되는 결단을 내릴 수도 있고 그 인간성과 상치되는 결단을 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의 권리를 정당하게 발견하려면, 다른 사람도 우리와 같은 그들 고유한 생명과 운명에 대한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것이 곧 상호 이해 아래서 촉진되는 모든 권리의 가능성이다.

 

그리스도 신자인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자유를 받아 누리고 있지만 이 자유는 생활하는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계획에 들어맞는 것(즉 생각 및 행위)을 선택하기 위한 자유이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가운데 야기되는 문제점들과 시련들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빛과 힘을 발견하기 위해서 인간의 자유는 신앙의 원천들을 찾아주는 구실을 한다. 인간의 자유가 신앙 안에서 재출발 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교 지혜의 인도를 받아 인격적이고 책임성 있는 결단들을 내릴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오늘날 모든 생활인들 각자가 처해 있는 구체적 상황들 속에서 그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처방은 내리지 않겠다. 우리는 이 성명서라는 양식을 빌어서, 이를 읽는 사람들이 그러한 구체적인 상황에 적절히 적용할 수 있는 원리들을 제공하고자 한다. 이러한 우리들의 노력은 적어도 여하한 상황에 대처할 원리를 인정하게끔 돕는다는 데에도 그 의의를 갖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범주의 사람들을 괄목상대하는 입장을 지켜가면서 그들도 이러저러한 동기나 과정으로 고의적인 임신중절을 초래할 위험성에 얽매여 있음을 상기시킬 것이다.

 

아기를 수태한 여인들에게

 

9. 낙태는 무엇보다도 먼저 아기를 수태한 여인들과 관련되는 문제이다. 우리가 맨 먼저 여인들에게 언급하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여인들은 어려운 상황에 처하는 수가 많다. 그들은 어떠한 상황 아래서라도 인간 생명을 한껏 보호하는 행위의 가치를 정당하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위에서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 이 점을 역설하였다. 우리는 여인들에게 마지못해 법에 짓눌린 자들로서 행동하지 말고, 사랑에 넘친 의식적인 태도로써 행동할 것을 권고한다. 이러한 행동의 진정한 증거는 바로 그리스도 신자인 여인들에 의해 드러나야 하며, 또한 그들이 증거자로서 필요한 온갖 희생들을 자유의사에 따라 흔연히 감수해야 한다. 그들은 자기의 증거가 미약할까 조바심을 칠 때도 더러 있다. 그들이 개인적으로 용감하게 증거자적인 결단을 했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이미 지배적인 사고방식의 진화를 바로 잡을 수까지는 없기 때문에 어떤 결단 뒤에도 역시 일말의 의아심은 남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문제점을 다시 새겨보건대, 개인으로서 대의명분을 앞세워 항거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지 않는가! 여인들이 흔히들 낙태를 자행하려드는 것은 어떠한 동기에서일까? 장차 낳을 아기의 장래를 너무 걱정한 나머지 그럴 수도 있다. 아기가 생리적 혹은 심리적 장애에 부딪칠 위험성을 미리 예감함으로써 그럴 수도 있고 또 어린이가 행복한 존재로 자신을 개화시킬 수 있는 환경이 결여되어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어서 그만 낙태를 자행할 수도 있다. 여인들이 제시하는 문제들이란 대충 이러한 것들이다.

 

그리고 모성이란 얼마나 막중한 책임을 가리키고 있는 말인가? 모든 인간 존재가 자기의 존엄성을 사회로부터가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다는 어머니의 확신, 이 확신이야말로 한 아기가 행복하게 되고 개화되기 위한 최대의 결정적인 요인이지 않겠는가? 그러면 한 병든 아기에게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필요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우리 신자들의 눈에는 모든 인간 생명은 더 할 수 없는 의미로 전개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처음에 당황해 할 수밖에 없는 사건들의 의미와 가치를 마침내는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라도 그러한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될 가능성을 결코 저버릴 수 없다. 우리가 끊임없이 겪는 나날의 투쟁도 이러한 양상을 고려할 때엔 벌써 인간적인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여인들이 보다 개인적인 이유들로 해서 낙태를 자행하는 수도 있다. 말하자면 아기를 낳는다고 생각할 때, 사전에 예견되는 난관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난관들에는 자주 위에서 지적한 문제점들이 겹치기 마련이다. 예로서 모체의 탈진, 거처할 집이 없음, 유전적인 알콜 중독 같은 것들도 유력한 문제점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인들이 아기를 낳게 될 경우 겪게 되는 어려움들을 결코 외면하고자 하진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또 그러한 어머니들에게 불가사의한 어떤 기적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자는 것도 우리의 역할이나 의향이 아니다. 동시에 오늘날 풍부한 사회가 마땅히 갖추고 있어야 할 사회적 도움의 면에서도 공적 내지 사적 준비태세가 아직 매우 미약하다는 것을 자백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막중한 문제점들을 안고 있는 여인들에게 - 우리는 그 문제점들을 양심적으로 잘 측정해서 말하려 한다 - 교회가 그 가르침으로 품고 있는 관용과 신뢰에의 호소 및 영신적 차원을 가지고 자기들(여인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예의 검토하도록 권유한다. 실로 한 어머니의 생명과 '동일하지 않은 하나의 인간 생명'이 그 발전 도중에 있지 않는가. 이 생명은 그 어머니의 돌봄과 자모적인 사랑에 맡겨져 있다.

 

여기서 또 다시 우리는 진정 인간다운 존재들이 되기 위하여 우리들에게 던져진 많은 규범들을 뛰어넘고 마침내는 우리 자신까지도 초월하는 그 무엇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즉 하느님께서 우리의 진정한 운명으로서 나타내 보이신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스도 신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들 생애의 의미는 바로 사심 없이 우리 자신을 잊어버리고서 그리스도의 생애를 이어가는 데에 있다. 또한 그러한 동기로써 우리 이웃의 생명과 구원을 위해 자신들을 봉헌하는 데 있다고도 하겠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애 안에서 나타난 바를 하나의 의무로 재창조하여 우리 자신에게 적용한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의 생명을 기꺼이 바친다; 그에 따라서 우리가 받은 생명의 가장 깊은 의미를 실현하게 된다. 그리스도교의 지혜는 인간 생명에 대하여, 그 생의 지상법에 대하여 위와 같이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확신이다.

 

우리가 이미 강조한대로 해결책이 완전히 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태어날 모든 생명들을 구하기 위해선 온갖 가능성을 모색하고 동원해야 한다. 아기를 원하는 가정이 그 아기를 입양한다는 것도 하나의 해결책일 수도 있으나 이것이 얼마나 적합한 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구구하다. 물론 입양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러나 거기서 하나 하나의 특수 상황에 접근해서 검토해 볼 수가 있다.

 

책임성이 있는 결단을 내릴 수 없는 극단의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여인 자신이 스스로 인격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중요한 점은, 그러한 선택 뒤의 책임은 또한 여인들 자신이 진다는 것이다. 특히 그 여인이 자기가 처한 모든 상황들을 잘 파악한 후 자기의 양심을 자유로이 행사했다면, 스스로의 결정에 뒤따르는 난관들을 보다 쉽게 극복해 나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선택과 책임의 상관성에 대한 이유이다.

 

아기의 아버지에게

 

10. 수태된 아기의 아버지는 어머니의 권리와 의무에 상응하는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다. 수태부터 출생까지의 기간에 어머니가 아기의 운명에 가장 가까이 결부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아기의 생명은 또한 그 아버지에게서도 유래한다. 아기는 자기의 자연적 성향과 유전적 가능성을 어머니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에게서도 받는다; 아기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합되어 살기를 원한 결실인 것이다. 태아가 수태되는 순간부터 아버지는 자기의 개인성을 초월하는 정황 안에 놓이게 된다. 즉 그의 책임은 확실히 확대되는 것이다.

 

이 책임성은 또한 어머니가 처한 상황 및 낙태의 위험과도 관련이 있다. 어머니의 상황은 그 남편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판이한 양상을 띤다. 아버지의 책임은 위의 두 경우 - 아버지와 남편된 구실 - 에서 다같이 막중하게 된다. 아버지는 이제 곧 어머니가 될 여자를 존경하고 사랑하면서 구체적인 표현을 해야 한다. 그에게는 생명을 옹호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그리고 도덕적인 요청에 앞서서, 출산이 어머니와 아기에게 가져다 줄 결과를 추론하는 것도 아버지의 일이다. 따라서 그는 여자의 인격적인 자유를 존중하는 가운데 항시 조언을 아끼지 않아야 하고 또 어머니가 한 여인으로서의 스스로의 운명에 방치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

 

영신적 상담자에게

 

11. 사제 혹은 영신적 상담자들도 그러한 상황에서 중요한 책임을 질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사제가 상담자로서 봉사하도록 불리운 역할을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필요한 조언을 받을 권리를 갖고 있듯이 또 바람직한 의견을 나누는 데 합당한 태도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제의 첫 의무는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인간적이고 책임성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의 가능성을 말해주는 일이다. 사제는 이러한 구실을 다함으로써 생명을 위한 봉사에 중대한 역할을 하게 된다. 사제는 위에서 말한 바 있는 사회적 및 문화적 연대감을 십분 의식하면서 자기의 신학적 권위와 이웃에 대한 사랑을 구현해야 한다. 그는 보다 현명한 해결책을 찾을 희망으로, 어쩌면 주위 사람들이 스스로의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여 인간적인 결단 앞에서 주저하고 있을 때, 그들의 의지를 확고히 다져주는 희망으로, 우리의 여인들을 위해 자기의 권위와 사랑을 활용해야 한다.

 

사제는 일반적으로 소홀히 할 위험이 많은 몇 가지 생각들을 되살려 주는 수가 많다. 그는 본질적인 것과 유동적인 것을 구분하도록 여인들을 도와줄 수 있고 또 그 여인이 생각하지 못했던 종교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여 용기를 북돋아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그 여자에게 신앙을 심화하고 진정한 그리스도 신자다운 생활을 하리라는 결심을 굳혀줄 수 있다. 그는 임신한 여인에게, 앞으로 곧 겪게 될 사회적·심리적인 압력을 미리 말해줌으로써 그 여자의 자유를 보호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또 사회적 보조자에게 선처·소개해 줄 수도 있다.

 

사제는 여인이 부당한 모든 압박에서 자유롭게 되도록 전념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이 그러한 압박의 요인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사제가 우직하게 교회의 권위를 자기의 것인양 말한다든가 도덕의 추상적 원리들을 함부로 내세워 그것이 권위를 가진 것처럼 제시하여 자기 자신의 설득력에만 의지하려들 때엔 스스로가 그러한 압박의 요인이 되고 말 것이다. 낙태의 문제에 있어 가톨릭 교의는 충분하게 명료한 태도를 비췄다. 사제들은 사실상 신중히 다루어야 할 많은 면들을 지닌 상황을 너무 단순하게 처리해 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사제는 여인에게 자기의 의견을 제시한 다음에라도 상황이 진전하는 데 따라 계속 보조해 나가야 한다. 그 여인은 아기를 낳은 다음에도 날마다 커다란 난관에 봉착하게 되고 자기가 내린 결단의 결과들을 감당하기 위한 가능한 모든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된다.

 

아기를 낳기로 결심했다가 다시금 마음을 돌려 낙태의 길을 택해버린 여인들에 대해서도 같은 것을 말할 수 있다; 이 때에도 여인은 낙태를 빚은 자기선택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사제는 이러한 여인에게도 도움을 주고 또 이해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짐을 져줌으로써 그리스도의 법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갈라 6,2)

 

의사들에게

 

12. 의사는 사제보다 더 직접적으로 낙태의 문제와 관련된다. 그는 스스로 낙태의 문제에 개입하도록 권고와 부탁을 받는 수가 가끔 있다. 그는 또한 여러 곳의 현행 입법 상태에서 당로자(當路者)들로부터 어떤 정책상의 의결을 위해 미리 작성된 서류에 서명하도록 청탁을 받는 수도 있다. 그리고 그는 낙태가 법에 규정된 조건들에 부합하는지 그렇지 못한지를 결정하기 위해 표결권을 행사하는 수도 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 신자 의사는 온갖 섬세한 문제들에 부닥치게 되는 것이다.

 

가톨릭적인 의사로서 자기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하려고 할 경우, 그 의사는 고의적인 임신중절을 시켜줄 수도 없을뿐더러 임신중절을 권유할 수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태아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치료한다는 다른 목적 때문에 수술을 할 수도 있게 되는데, 실은 이 수술로 말미암아 임신중절이 되는 수가 있다('인간의 생명' 15항)

 

몇몇 나라들의 입법은 의사들이 양심상 용납할 수가 없다고 느낄 경우엔 낙태 수술을 거절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명시적으로 인정한다. 한 성명서 - '국제의사연맹 회의'에서 1970년 8월 22일 채택한 '오슬로'의 성명서 - 는 낙태를 권하지 않을 수 있는 권리와 양심이 금하는 수술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의사에게 있음을 인정했었다. 이렇듯이 중대한 문제성에의 입장의 동의한다면 설령 그것이 국가의 입법권이라도 의사들에게 자기네 확신을 저버리고서 행동하도록 강요할 권리가 없다고 본다. 우리는 자기네 입장을 고수한다는 가톨릭 의사로서 몇몇 사람들이 어떻게 법에 따라 예견된 조건들을 묵묵히 받아들여 낙태를 입법화하는 위원회의 구성원까지 될 수 있는지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러한 행위는 곧 일련의 낙태에 응하는 셈이 되고 또한 사회가 그에게 베풀어준 신뢰감마저도 남용하는 셈이 된다. 가톨릭 의사로서의 그는 법이 정한 범위 안에서 낙태의 요구를 당국자들에게 맡기는 것이 도덕적으로 가합한지 어떤지를재고해 볼 수도 있다. 사제가 그러하듯이 그리스도 신자 의사도 그에 못지 않게 문제성에 대한 의견을 구하러 오는 상담자들에게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지 않도록 스스로 주의해야 한다. 물론 그는 자기의 입장을 분명히 설명할 수도 있고 현행상 낙태 수술이 합법화되어 있다해도 자기는 그 수술을 왜 거절하지 않을 수 없는지 그 이유를 밝힐 수도 있다. 그리고 국가의 법이 제공하는 가능성을 솔직하고도 성실하게 재고해 보는 것도 실상 가톨릭 의사의 윤리에 그렇게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오슬로'의 성명서에 입각해서 그는 그 방면에 뛰어난 자질을 갖춘 다른 의사에게 상담자를 소개해 줄 수가 있다. 또한 현행 법률을 양심적으로 해석하는 데에 정평이 있는 동료 의사를 상담자에게 선처해 줄 수도 있다.

 

다른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보다 한 걸음 더 앞서서 의사들은 낙태의 실천에 따라야기되는 온갖 문제들을 연구하고 더욱 믿을 수 있는 모든 자료들을 참고삼아 심사숙고한 후에 자신의 견해를 굳혀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윤리신학의 진보가 구체적 실재의 핵심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체험과 그들이 비춰주는 견해에 크게 힘입고 있음을 인정한다. 이러한 점을 충분히 감안한 우리는 의사들이 항상 생사가 걸린 문제들에 있어서 실재적인 체험자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그리스도교 윤리의 형상화에 적극 참여하도록 장려하는 바이다. 더욱이 신학자들은 그들의 전문적인 협조를 필요로 한다.

 

또한 의사들은 생명의 존엄성을 표명하는 자기들의 태도가 모든 인간의 양심 형성에 있어 얼마나 큰 무게로 작용하는가를 잘 알고 있다. 이것은 참으로 그 역할과 권위가 한데 어울릴 만큼의 중량인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신자 의사는 자기의 굳건한 태도에 의해서 낙태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해결을 힘차게 증언하고 도와야 할 것이다. 만일 의사가 그 문제에 대해 명확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들의 상담자나 부모들은 그만큼 더 자의적이고 용납될 수 없을 정도로 비인간적인 판단을 내리게 되는 결과를 빚고 만다. 이는 또 그리스도교적 관점에 지대한 불신을 초래하는 한 원인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 어떠한 의사라도 낙태를 생명의 문제들에 대한 정당한 해결로 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그는 이 문제에 대한 실천적인 방도들을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방도들이 전혀 없는 곳에서는 더욱 더 그 길들을 개척해 나가는 데 공헌해야 한다.

 

사회적 보조의 책임자들에게

 

13.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의 대부분은 사회적 영역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에게도 적용된다. 그들에게도 역시 그리스도교 도덕의 형성에 좀더 공헌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그들은 어떤 일정한 여인들로 하여금 낙태를 개인적 난경(難境)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로 여기게 하는 그런 구체적인 어려운 문제성의 본질을 느르 지켜보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당국자들에게 성급한 낙태보다도 더 낫고 더 인간적인 해결책을 권장하는 데에 확실히 유일한 입장에 서 있다.

 

현행 법률들에 관한 그들의 책임은 특히 크다. 그들의 본질적 임무의 하나가 생활조건의 개선을 위해 사회가 제공하는 가능성들을 깨우쳐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주 단체를 이루어 함께 일하게 된다. 사람들은 특히 물리적, 심리적, 또 경제적인 생존의 조건들을 해결해 줄 것을 그들에게도 기대한다.

 

그들이라고 해서 주관도 없고 자신의 입장도 세우지 않을 순 없다. 이 생애와 인생의 문제를 앞에 한 그 방향 정립과 관점에 있어서 그들 또한 자신을 그저 사회의 맹목적 도구들처럼 간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의 직업윤리에서 자신을 출발시키고 또 스스로의 양심에 입각해서 직업상 그들이 직면하는 각 상황에 대하여 법의 목적을 판단해야만 한다. 그들의 이런 사고작용 및 역할은 낙태를 작정하고 있는 여인에게 낙태가 아닌 다른 길을 가능케 해 줄 수도 있다. 따라서 그 아무도 법을 지킨다는 미명 아래 낙태를 권유할 수는 없다.

 

법의 허용을 이용할지 안할지를 결정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임신한 여인 자신이다. 그렇다고 해도 사회적 보조자의 역할을 담당한 그들은 그 여인에게 보다 바람직한 결단의 가능성을 말해 주는 동시에 태아의 생명을 존중하도록 도와주는 일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사회적 보조자인 그들에게 역시 사제나 의사들에게 부탁했듯이 낙태의 문제를 상담해온 사람이 어떤 태도를 취했든 계속 접촉하고 도와주는 역할을 기꺼이 수행할 것을 강조하는 바이다. 임신한 여인들은 자기들이 취한 태도나 결정의 결과들을 감당하기 위해 항상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도움의 필요성이 없어지지 않는한 우리는 모든 정의와 사랑에의 역할을 중단하지 말고 어떤 인생문제의 기로에 선 이들을 계속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간호사에게

 

14. 간호사는 의사나 사회적 보조자들처럼 상담의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모든 환자는 자기의 병인(病因)이 어떤 것이든 필요한 간호를 받을 권리가 있으며 이에 간호사는 그러한 권리에 크게 봉사하게 된다. 여기서는 다만 간호사가 환자의 임신중절에 적극 참여하도록 권고를 받는다고 할 때, 문제가 제시되지 않을 수 없다. 만약의 경우 간호사가 무작정 낙태를 시켜주는 수술실에서 일하게 되면 그는 본의 아니게도 낙태에 협력하게 되고 만다. 낙태에 협력하고 싶지 않은 간호사는 언제나 그런 장소를 피해야 할 것이다. 고용 계약을 할 때에 자기는 낙태가 합법적으로 실시될 경우라도 양심상 낙태 수술에 협력할 수 없음을 고용자에게 미리 밝혀두는 것이 좋겠다.

 

남녀를 막론하고 간호사는 낙태 수술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일단 의사의 처신에 맡겨야 한다. 그러나 의사가 바르게 행동하지 못했다고 판단될 때에는 수술에 들어가기 전에 아주 불가피했을 경우엔 수술이 끝난 다음에라도 문제를 제시해서 인간의 생명과 이해가 무시되지 않았나 그 상황을 검토할 수 있어야 한다.

 

부모, 이웃, 친지들에게

 

15. 낙태를 생각하고 있는 여인은 자주 이웃, 친구, 특히 부모에게 자기 생각을 털어놓게 된다. 이 때 그런 말을 듣는 친구나 부모는 위에서 우리가 지적한 내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그 여인이 자기 스스로 판단을 내릴만한 능력과 자유를 잃고 있는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낙태 여부의 결단은 그 여자 자신이 내려야 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임신한 여인의 특수한 사정이나 상황을 본인으로부터 직접 듣는 사람은 그에 대해 소극성이나 무관심을 드러내서는 안된다.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은밀하고 중대한 문제를 말하게 될 때에는 문제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줌으로써 보다 나은 조언과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여겼기 때문이고 또 그만큼 기대도 하고 있는 것이다. 확신을 가진 그리스도 신자는 바로 여기에서 그 여인이 소홀히 하거나 무시하기 쉬운 면들을 강조해서 그들의 친지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이를테면 태아가 지닌 생명의 권리를 가장 먼저 강조함으로써 그 여인이 보다 정당한 결단을 내리는 데 적극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가장 좋은 충고는 자격 있는 의사, 사회적 보조자, 혹은 사제에게 그 여인을 인도해 주는 일이다. 이 경우엔 어느 분에게 상담을 신청할 것인가에 대해 좀더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종류의 충고는 항상 상당한 요령과 동정을 필수적으로 지닌다. 왜냐하면 그 여인을 어디로 인도하는가 하는 결단에 따라 또 다른 결과들이 나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교육의 중대성

 

16. 교육은 인간 존재가 낙태의 문제에 부닥치는 상황에 처하기 이전에도 실로 온갖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교육자와 부모들의 교육이 누릴만한 영향력과 공헌은 바로 낙태의 문제가 현실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날, 그들에게 교육을 받은 사람들(낙태에 관련될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어떤 결단을 내리는가에 판가름이 날 수도 있다.

 

성교육은 그것이 학교에서 행하여졌든 학교 밖에서 이루어졌든지를 막론하고 사랑과 생명의 전수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는 데에 크게 기여한다. 오늘날 공공기관들이 제공하는 성에 관한 보도가 점점 더 그리스도교의 기본적인 가치들과 멀어진다는 데에서 난점들도 증가한다. 우리로서는 그리스도교의 요구와 현대 교육학의 요구를 한데 충족시켜줄 수 있는 성교육을 확보하기 이전에 미리 닦아놓아야 할 많은 길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신자 교육자들에게 이런 문제들을 신중하게 또 선입견 없이 다루도록 권유하는 바이다. 어린이들에게 행하는 성교육은 생태적이고 기술적인 지식만을 가르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어린이에게 인격의 존엄성을 깨닫게 하고 생명에 대한 존중심을 포함한 존재의 근본적인 가치들을 알아듣도록 해주어야 한다. 어린이들에게 행하는 성교육에서는 인간 전체를 다루어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 그리스도교 신앙과 현대 교육학은 합치된다. 그 까닭은 양자가 모두 다른 사람에게 대한 책임을 성의 본질적 구성요소의 하나로 간주한다는 데 있다.

 

실은 그리스도교 가정의 부모들은 성교육에서 제기될만한 문제들 때문에 약간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리고 아무도 그들에게 만족한 해결책을 가져다 줄 수도 없다. 그러나 용기를 잃어서는 안된다. 우리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기하여 현대세계와의 관계를 재정비할 뜻을 세웠고 그에 따른 계획을 실현해 나가고자 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시대의 요청에 불리운 의식적인 그리스도 신자들로서 또 우리의 신앙에 충실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도 충실한 그리스도 신자들로서 전진할 수 있는 길이 그만큼 더 희망적으로 열릴 것이다.

 

낙태와 피임

 

17. 자주, 게다가 변하기 쉬운 세태에 있어 피임의 문제는 낙태의 그것과 관련되어 제기되고 있다. 교육자와 학생들 사이에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이 교환될 수도 있다. 또 한편 의사나 사회적 보조자, 사제들에게도 자주 이 문제에 대한 질문이 들어오고 있음을 본다. 어려운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낙태로써 해결짓기를 반대하는 가톨릭 신자들은 또 다른 한 방법으로 피임에 관한 자기들의 의사를 표명하고자 할 때가 많다. 우리는 여기에서 1968년 10월 사목교서('Humanae Vitae'에 관한 것)에서 다룬 바 있는 문제들을 모두 다시 들먹일 생각은 없다. 다만 낙태와 피임 사이의 관계들에 대해서 몇 마디 언급하고 싶을 따름이다.

 

사회적 수준에서 본다면, 피임이란 낙태의 숫자를 죽이는 데 효과 있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 수단이다. 피임을 효과적으로 실시함으로써 임신중절의 수효가 약간 줄어지고 따라서 낙태될 경우의 수효가 약간 줄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떤 형태의 피임 방법을 채택하든지 거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에서 나오는 실제적인 불안정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일관성 있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거의 우발적으로 피임의 방법들을 이용한다. 또 피임을 한 어떤 여인들은 그 뒤에 자기가 임신한 것을 발견하게 되면, 그만 실망한 나머지 낙태하려 들기도 한다. 그런 여인들은 일단 피임으로 실패한 사실을 인정하지도 않고 또 인정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간접적인 양상으로도 피임은 피임하지 않았더라면 없었을 낙태들을 조장할 수 있다. 그리고 낙태를 훨씬 자유롭게 할 수 있거나 접근을 가능하게 해 준다면, 효과적인 낙태를 실천토록 하는 것이 명령적은 아니지만 그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 또한 낙태의 수효를 증가시킨다고 예견하지 않을 수 없다.

 

도덕적인 관점으로 볼 때, 낙태와 피임은 전적으로 다르다. 낙태는 이미 시작된 생명체를 죽이는 것이고 피임은 - 그것의 여러 가지 형태의 경우가 있긴 하지만 - 대체로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낙태와 피임은 서로가 영향을 주고받는다. 따라서 낙태에 의존할 필요성을 없앤다는 명목으로 피임을 사회 안에 대중적으로 실시하면 그만이라고 믿어버리는 일은 너무 단순한 생각이다.

 

 

제3부 입법과 정치


법과 인격의 존엄성

 

18. 이제까지 우리는 낙태를 도덕적인 문제로 다루어 왔다. 또 고의적인 임신중절이라는 구체적인 문제에 봉착될 기회가 많은 이들을 대상으로 잡아 차례로 언급해 보았다. 이제는 낙태에 대한 입법을 취급하고 특히 몇몇 국가에서 진행되고 있는 '자유화'의 과정에 대하여 언급하려고 한다. 국가의 입법에 대해서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일도 교회가 지닌 책임성의 일단이다; "인간의 기본권들과 영혼의 구원이 요구될 때……."<사목헌장 74항>

 

지도적 원리들

 

19. 우리는 우리 국가들이 결의한 낙태에 대한 입법을 존중하면서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원칙들을 감안하는 바이다.

 

(ㄱ) "정치 공동체는 공동선을 위해서 존재하고 공동선 안에서 정당화되고 그 의의를 발견할 수 있으므로 공동선에서 비로소 고유의 권리를 얻게 된다. 공동선은 개인과 가정과 단체가 보다 완전하게 보다 쉽게 자기 완성에 도달할 수 있는 사회생활의 모든 조건들의 총체를 내포한다"<사목헌장 74항>.

 

(ㄴ) "공동선은 개인의 권리와 의무가 존중될 것을 요청한다"<'종교의 자유에 관한 선언' 6항 참조>. 인간의 기본권들은 인간 자신 안에 소재(所在)하고 투표나 정치적 다수결 원칙에 의하여 정해지지 않는다.

 

(ㄷ) "현대사회의 다원성은 사회가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다양한 의견들을 가진 단체들과 개인들로 하여금 정치적 결정에 참여케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사목헌장 74항 참조>. 그러한 다원화된 사회 안에서 몇몇 정치적 혹은 종교적 단체의 특정 의견들이라고 해서 그것이 다른 단체들의 확신을 무시하고 규제하는 법률로 발전되는 사례는 있을 없다. 정치적 단체들과 종교적 단체들이 상호 존경하고 또한 소수의 다른 단체도 역시 합법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특정한 단체들만이 그들의 의견을 입법에 크게 반영시킨다고 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데에서 기인한다. 여기에서 그리스도 신자인 우리는, 우리가 취급하는 이 섬세한 문제에 있어서 우리와 의견을 같이 하지 아니하는 많은 사람들-그들 가운데는 입법자들과 의사들과 사회의 상담자들, 기타 사람들이 포함된다-의 책임성 있는 양심 성찰과 인간의 비참함을 앞에 둔 심중하고도 진정한 감성을 외면해도 좋을 그 어떤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ㄹ) 국민들에게 이러저러한 도덕체계를 세부적으로 강요하거나 강요한 정치적 수단을 비난하는 일체의 행위들을 다만 범행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국가의 역할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입법이 도덕과 무관해야 한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모든 사회적 문제는 실상 도덕적 면을 지니고 있다. 입법자라면 누구든지 국가의 법이 국민의 도덕적 판단에 미칠 교육적인 영향까지도 항상 고려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 사회 · 도덕적인 면에 - 있다.

 

(ㅁ) 국가는 분명히 인간 생명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국가는 어떠한 이유로 위협을 받거나 자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생명에 대하여 노인들, 육체적 내지 정신적 결함이 있는 사람, 병자들, 보통 사람보다 무력하고 부족한 사람들의 경우와 태어나기 전의 인간 생명에 대하여 특별한 책임을 지고 있다. 그렇지만 인간 실존의 다양한 형태들이 지닌 상대적인 가치를 규정하는 일까지도 국가의 책임이나 역할에 속해 있다고는 볼 수 없다. 예로서 법이 병자들보다 건장한 사람들에게 더한 생존권을 부여하고 재능이 열등한 사람들보다 우수한 이들에게 더 가치를 두거나 늙은이보다 젊은이에게 더 가치의 역점을 두는 등의 경우를 들 수 있다. 가장 미약한 개인으로 하여금 온전히 인간적으로 살 수 있는 권리를 주고 보호하는 국가만이 인간의 권리를 서로가 잘 존중하는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ㅂ) 일반적으로 법은 형법을 인간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그 형법은 생명을 증진시키는 유일한 수단이 아닐뿐더러 또 가장 좋은 수단도 아닐 것이다. 사회적, 문화적, 또는 교육적 분야에 필요한 적극적인 입법은 이미 발전 도중에 있는 인간 생명을 끊임없이 보호하기 위하여 이용되고 제정되어야 한다.

 

위의 원리들에서 도출되는 귀결점

 

20. 바로 위에서 살펴본 원리들에 비추어서 우리는 낙태의 입법에 관한 다음과 같은 결론들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첫째; 낙태가 어떠한 특정된 경우들에 있어서 도덕적으로 정당한가를 선언하는 일이 법의 권한에 속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사회 안의 그 누구도 법이 형법상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는다는, 그런 이유를 내세워 고의적인 임신중절을 도덕적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하다는 투의 결론까지에 도달할 수는 없다.

 

둘째; 입법자는 태아의 생존권에 대한 증가하는 무관심 - 우리가 이미 일반적인 사고방식 안에서 가려낼 수 있었던 바의 '자유화'에로 가고 있는 경향 내지 추세 - 에 편승하지 말도록, 항상 자기 책임의 소재를 의식해야만 한다.

 

셋째; 우리의 정치공동체 안에 살고 있는 입법자들과 시민들은 입법에 있어 다같이 공동선을 추구하는 입장에 서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교육은 물론 앞으로 태어날 아기의 생존적 상황까지를 포함한 일련의 다른 영역들에 있어서 인간의 권리를 존중할 공동책임을 지고 있다.

 

넷째; 우리는 누구든지(특히 의사 혹은 간호사) 그가 낙태를 실천할 의무가 있다거나 낙태하는 데 도와줄 의무가 있다는 형식으로 정한 모든 법률을 배격한다. 이와 같은 법은 인간의 자유 및 양심의 자유를 거의 무시하는 야만적인 처사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각적인 결단에 의해 고의적인 임신중절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온갖 형태의 차별대우를 배격한다. 특히 직업에 있어서 보다 선의적인 삶의 목적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다른 모든 방법의 차별은 용납될 수 없다.

 

여섯째; 최소한도의 요구조건은 자기 아기를 낳고 싶어하는 모든 여인이 그 소원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구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의사, 사회적인 보조자 내지 상담자, 기타 모든 사람들이 낙태를 하도록 심리적인 압력을 가할 수 없게 해야 한다. 따라서 낙태가 입법화된 사회에 속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여자를 사회적 도움으로부터 멀리하는 사례는 있을 수 없다. 오히려 공권은 어떠한 난관을 무릅쓰고라도 자기 아기를 갖겠다는 모성을 최대한으로 도와줘야 한다. 낙태를 자기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여자도 흔히 자기의 결단적 선택으로 말미암아 당하게 될 희생들 때문에 압력을 받게 된다. 그러한 여자일수록 애초의 소원은 존중되어야 한다. 또한 그 여자는 아기를 낳는 데에 필요한 의료적, 사회적 및 경제적인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다.

 

일곱째; 투표권이 있는 모든 시민은 어느 정도 자기 국가의 입법에 공동책임을 지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정치생활에 투신하고 선거에 참여하도록 권고하고 있다(사목헌장 75항). 가톨릭 신자들은 투표 및 기타 정치활동에 참여할 때, 자기들이 추진하려는 입법이 인간의 생명과 권리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함을 상기해야 한다. 가톨릭 신자가 어느 정당체 투표하든 그는 그 정당이 그리스도 신자로서의 자기 확신을 인정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의무를 진다.

 

 

결론

 

21. 우리가 이 성명서에서 말해온 원리들 중 그 어느 것도 우리가 그 구성원이 되어 살고 있는 이 사회와 무관하지 않다. 그런 원리들을 온전히 견지하려는 사람들이 오직 우리 뿐일지라도 낙태 문제에 관한 우리의 근본 입장들은 우리를 공동책임에서 면제시켜 주지 않는다. 우리 북유럽 국가들의 모든 남녀는 우리 북유럽 문화를 보다 인간적인 것이 되게 할 임무를 띠고 있다. 이에 그리스도 신자들인 우리로서는 그 이상으로 모든 상황들 안에 복음의 가치들을 증진시켜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지침들은 주로 우리의 직접 책임 대상인 가톨릭 신자들을 상대로 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말해온 바의 근거와 기반이 튼튼함을 확신하는 동시에 우리를 이해해줄 다른 사람들과의 협력을 기대한다. 실상 낙태의 문제는 근본적인 인간적 가치들과 결부되어 있다. 낙태의 문제가 사상과 생명에 대해 각양각색의 의견들을 지닌 책임자들 사이에 이해와 협조로 열리는 광장이 되어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김수복 역)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생명윤리연구회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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