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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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생명] 인공유산과 피임의 윤리적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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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6 ㅣ No.316

인공유산과 피임의 윤리적 문제

 

 

이 글은 인공유산과 피임의 윤리에 관한 것입니다. 윤리는 구분방법에 따라 객관적인 윤리와 주관적인 윤리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객관적인 윤리는 실체와 부합하는 것이며 그 기준은 하느님의 자연법칙이고 윤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관적인 윤리는 우리의 양심에 결부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로 인하여 우리의 행동을 우리 자신에게 돌릴 수 있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물론 양심도 실체를 따르는 것이 원칙이지만 무지와 무의식과 격정에 의해서 양심이 그릇될 수도 있습니다. 바른 양심을 형성하기 위하여 우리는 실체를 연구해야 하고 그리스도께서는 양심이 그릇되지 않도록 우리에게 교도권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이 세우신 자연 혹은 실체를 이성과 교도권의 빛으로 고찰함으로써 인공유산과 피임에 관한 윤리를 찾아내도록 합시다.

 

 

(1) 인공유산 : 모체 안에 있는 태아일지라도 영혼과 육신, 즉 인간생명을 지니는 개별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그 태아를 고의적으로 죽이는 것은 살인죄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느 순간에 영혼을 불어넣어 주시는지를 우리가 직접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징조는 일찍부터 알 수 있습니다. 태어날 때와 마찬가지로 태어나기 몇 달 전부터도 태아가 개별적인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나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과학의 발전으로 인하여, 태아의 심장 고동은 잉태된 지 18일만에 들을 수 있고 20일 후에는 그 신경계를 깨달을 수 있으며 42일째부터 신체가 완전히 형성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부터 여러 지체가 움직이고 여러 기관이 작용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생명이 언제부터 시작하는지 모른다는 이야기는 옛날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아담의 시대부터 인간 생명이 시작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 생명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자의 정자도 인간생명이고 여자의 난자도 인간생명입니다. 그러나 정자나 난자는 사람은 아닙니다. 내가 잉태되기 전에도 내 아버지의 정자는 인간생명이었으나 내 인간생명이 아니었고 내 아버지의 생명이었습니다. 난자도 내 생명이 아니었고 내 어머니의 생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생명이 언제 시작하는지가 아니고 이 생명이 언제부터 내 자신의 생명이 되었는지 또는 내가 언제 시작되었는지가 문제입니다. 개별적인 새 사람이 언제부터 시작하는지가 바로 문제입니다. 개별적인 새 사람은 생명을 전달받을 때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부터 시작되지 않으면 그 후에도 절대로 시작되지 못합니다. 그 순간부터 완전한 인간이고 자라나면서 어른이 됩니다. 그러므로 잉태되는 순간부터 그 인간을 고의적으로 죽이면 살인이 되는 것입니다. 잉태된 태아를 죽일 수 있다면 이미 태어난 아기를 죽이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인구가 너무 많다고 해서 태아를 죽일 수 있다면 같은 이유로 병든 사람들과 노인들을 다 죽일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인권은 바로 생명에 대한 권리입니다. 개인의 이익이나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것일지라도 이 인권을 빼앗아서는 안 됩니다. 국가의 최고 사명이 국민의 생명권을 보장하는 일일진대, 자기 자신을 보호하지 못하는 태아의 생명은 그 누구보다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국가에서 인구조절로 부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인구조절은 자연법에 부합하는 방법으로나 자원개발, 이민정책 또는 다른 건전한 방법으로 추진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방법이 아무리 어렵고 또 더 큰 희생을 요구한다 하더라도 태아의 생명을 빼앗으면서까지 인구조절을 도모해서는 안됩니다.

 

마찬가지로 부부의 이익이나 가정의 이익 혹은 어머니의 생명이나 건강을 위해서 이미 태어난 아기를 살해하지 못하듯이 이와 같은 이유로 해서 잉태된 태아를 고의적으로 죽여서는 안됩니다. 임신과 관련되지 않은 병이나 또는 자궁 외 임신으로 인하여 위독한 어머니가 자기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치료나 수술로 태아의 희생을 묵인할 수밖에 없는 긴급한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이러한 경우일지라도 태아를 고의로 죽인다면 언제든지 살인죄가 됩니다. 아기가 죽는 것을 묵인하는 것과 아기를 일부러 죽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루프를 사용하는 것도 피임행위가 아니라 이미 잉태된 태아를 자궁 속에서 살지 못하게 하는 행위이므로 살인죄가 됩니다. 시판되고 있는 피임약도 그 첫째의 작용은 피임이지만 뜻밖에 임신되면 유산시키는 작용을 지니고 있습니다. 피임약의 여러 가지 종류 모두다 이와 같은 부작용이 있습니다.

 

 

(2) 비자연적인 피임 : 20세기 동안 교회의 교도권에서 비자연적 피임을 계속 반대해 왔고 초기 교회의 교부들과 20세기의 유명한 신학자들 중에도 비자연적 피임을 찬성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Dr. Nasman이란 교수가 이에 대해서 교회의 가르침을 바꿀 수 있다는 주장으로 20세기의 교도권과 고부들과 교회의 박사들이 교회의 가르침을 세밀하게 조사했지만 교회에서 비자연적 피임에 관해 찬성하는 근거는 하나도 찾지 못했습니다. 물론 현대의 많은 신학자들은 현대주의(Mordernism)와 실존주의(Existentialism)에 따르는 상황윤리(Situation Ethics)에 근거하여 피임을 찬성하지만 교회의 20세기의 교도권과 전통과 이성의 빛은 우선권을 가져야 합니다.

 

인간적 피임을 위하여 여러 가지 비자연적 방법 중에 하나라도 사용하는 것은 자연의 주재자이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가 된다는 것을 여러 교황님들께서 누누이 교회의 교의로서 선포하셨으니 이것은 우리 모두가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교의입니다.

 

교황 비오 11세께서는 회칙 Casti Connubii에서 "부부행위를 함에 있어서 생명을 번식하는 자연적인 기능을 어떠한 인공적인 방법으로라도 훼손시킨다면, 이는 하느님과 자연을 거스르는 행위가 된다. 그리고 이와 같이 행하는 사람들은 중대한 범죄의 낙인을 면할 수 없다"고 온 교회의 최고 지도자로써 명백히 선포하셨습니다.

 

비오 12세께서는 "부부들이 부부행위를 행할 때 그 행위 자체를 거부하거나 인간생명이 자연적인 방법으로 번식됨을 막는 것은 죄악이 된다. 또한 어떤 주장이나 필요성도 본질상 부도덕한 행위를 도덕적이나 합법적인 것으로 바꾸지는 못하는 것이다. 이 법칙은 과거에도 그러했고 현재도 유효하며 앞으로도 언제나 한결같이 유효한 것이니 그것은 인정법에 도합(都合)되는 법칙이 아니라 자연법과 신정법(神定法)에 기원을 둔 법칙이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회칙 [인간 생명](Humanae Vitae) 14항에서 "이미 시작된 번식 과정을 직접적으로 중단해서는 안된다. 특히 직접적인 낙태는 비록 치료의 이유라 할지라도 절대로 배격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교도권이 여러번 가르친 바와 같이,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영구적이거나 일시적이거나 간에 직접 단종시키는 것은 단죄해야 한다. 또한 부부행위에 선행하거나 동반하거나 그 필연적인 결과로서 피임을 목적하거나 방법을 강구하는 모든 행위를 배격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세계 주교 대위원회의 주교들은 사도적 권고 [가정공동체](Familiaris Consortio) 29항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습니다. "신앙의 일치 안에서 베드로의 후계자와 함께 모인 이 신성한 회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회칙 [인간 생명]에서 선포된 것을 즉 남편과 아내의 사랑은 전적으로 인간적이고 배타적이며, 새로운 생명에 대하여 개방적이어야 한다는 점을 굳게 지지한다." 그러나 교도권에서 항상 가르쳤듯이 자녀를 낳지 말아야 할 타당한 사유가 있을 때 주기법에 따라 한동안 부부의 성생활을 중단하는 것은 하느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는 부부행위 그 자체를 손상시키는 것도 아니고 인공적으로 그 자연적인 과정이나 결과를 미리 방지하거나 막아내는 것도 아닙니다. 수태하지 못하는 기간에 부부행위를 하는 것도 죄가 아니며 잉태될 수 있는 기간에 성행위를 하지 않는 것도 죄가 아닙니다. 이와 같이 하는 것은 자연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연을 지키는 것입니다.

 

교도권의 가르침의 내부적 이유에 대해서는 길게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 이유들은 교도권에서 이미 충분히 설명했으니 교도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내 설명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상 객관적인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진리가 주관적이라는 현대주의자들 혹은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 실존주의자들, 혹은 윤리 원칙을 거절하는 상황윤리주의자들에게는 제가 아무런 말씀도 드릴 수 없습니다. 그들이 이미 지적 자살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혼인생활을 허락하시고 강복하신 가장 중요한 목적은 자녀를 낳고 기르고 보호하며 양육시키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혼인생활의 또 하나의 중대한 목적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을 조장하며 성취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높은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부부들에게 한몸과 같이 일치하라고 하셨으니 이 일치하는 부부행위와 이에 따르는 쾌락도 가장 신성한 것이기 때문에 신성하게 향유할 것입니다. 성의 쾌락은 별다른 목적이기보다 위의 두 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부들이 쾌락을 위해서 성행위를 하는 것을 죄라고 할 수 없으나 하느님의 목적 즉 자녀의 출생과 부부의 사랑 중에 하나라도 거절하면서 성행위를 하면 이는 하느님의 뜻을 어기는 일인 만큼 죄라고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미워하면서 서로에 대한 미움 때문에 사랑의 행위를 오용할 것 같으면-예컨대 남편이 부인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강간한다면-누구나 이 행위가 모순된 일이고 추한 일이라고 판단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녀를 번식하기 위한 성행위를 자녀가 태어나지 못하도록 일부러 헛되게 하는 것은 자연을 어기는 행위입니다. 즉 첫째, 콘돔을 쓰는 것과 질외 사정을 하는 것은 부부행위 자체를 훼손시키는 행위입니다. 사실상 이는 부부행위가 아닙니다. 둘째, 불임수술이나 불임약은 부부행위의 자연적 결과를 미리 막아버리는 일입니다. 셋째, 부부행위를 한 다음에 그에 따르는 그 필연적 결과를 막는 일도 자연을 어기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도권의 가르침에 따라 이 모든 비자연적 방법을 배격해야 합니다. 교황님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준수할 의무에 대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아래와 같이 가르칩니다.

 

"로마 교황의 유권적 교도권에 대해서는 특별한 이유로 비록 교좌에서 말하는 경우가 아닐지라도 의지와 이성의 이 성실한 존경심을 표시해야 한다. 즉 교황의 최상 교도권을 존경으로 인정하고, 교황께서 내리신 판단을 거기에 표현된 생각과 의향대로 성실히 받아들여야 한다"(교회헌장 25항).

 

그러므로 사목자들인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 일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배우고 이해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분야에 있어서는 자연법의 법칙 자체가 불분명하거나 쉽게 확인 또는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공식적인 권위의 가르침이 필요한 것은 명백한 일입니다. 교회는 무류지권(無謬之權)의 보은을 제외하고도 권위를 가지고 가르칠 수 있는 권리를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받았으며 이 위임의 범위는 진리를 천명하는데 있어 계시된 진리 이외의 범위까지도 포함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사실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진리의 교사이며, 그 임무는 진리인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정확히 가르치고 동시에 인간성에 기인한 도덕적 질서의 원리를 권위로써 선언하고 확증하는 데 있는 것이다."(종교 자유선언 14항)라고 선언합니다.

 

우리 사제들은 교황 바오로 6세의 회칙 [인간 생명](Humanae Vitae)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사도적 권고 [가정 공동체](Familiaris Consortio)를 재삼 정독하고 올바로 이해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혹시 교황 성하께서 세우신 논증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겸손하게 우리의 정신과 의지를 교회의 교도권에 순종시키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교황 성하께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성무를 수행하며 개인과 가정들의 자문에 응하고 영적 지도를 맡은 친애하는 사제들에게 나는 신뢰를 가지고 말하는 바이다. 특히 윤리신학을 가르치는 사제들의 귀중한 임무는 혼인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온전히 또 명백히 설명하는 그것이다. 그러므로 윤리신학 교수들이 그 직무 수행에 있어서 먼저 교회의 교도권에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바쳐야 할 성실한 순종의 모범을 보여주어야 하겠다.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순종해야 한다기보다는 교회의 사목자들이 진리를 밝히기 위하여 특별히 허락 받은 성령의 빛 때문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바이다. 양심의 평화와 하느님 백성의 일치를 위해서도 신앙교리에 관해서와 마찬가지로 도덕률에 관해서도 교회의 교도권에 순종하고 같은 말을 하는 것이 가장 중대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마음속으로부터 사제들에게 호소하며 위대한 사도 바오로의 걱정스러운 말씀을 되풀이하는 바이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권고하노라. 모두 일치되는 말을 하며 너희 가운데 분열이 없게 하며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으로 굳게 합하기를 바라노라.' 그러나 영혼들에 대한 사랑의 최고 형태를 구성하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가르침을 손상시키지 말 것이다. 오히려 주께서 사람들 사이에서 행하시고 말씀하신 것처럼 인내와 사랑을 가지고 가르쳐야 할 것이다. 세상을 심판하러 오지 않으시고 오직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주는 죄에 대하여 몹시 엄격하셨지만 죄인들에 대해서는 인내와 자비를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어려움 중에 빠져 있는 부부들이 사제의 말과 사제의 가슴 속에서 우리 구세주의 사랑과 그 목소리의 영상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겠다."

 

그러므로 교회의 교리와 혼인생활의 신성성을 옹호하면서 우리는 부부들이 당하는 어려움에 대하여 깊은 동정심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며, 고백소에서는 고백자로 하여금 개심(改心)의 확고한 결의를 갖도록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현재 가족계획의 자연적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 방법은 안전할 뿐만 아니라 배우거나 실행하기에 비교적 용이한 방법으로서 하느님의 뜻에 잘 부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편의가 본당 혹은 그 가까운 데서 효과적으로 이용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신자들로 하여금 자연적 가족계획 방법을 배워서 필요한 경우 실행하도록 권고해야 합니다. 만일 그들이 이러한 방법으로 노력하지 않고 비자연적 피임방법을 계속 고집하려 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화해의 성사인 고백성사를 거절하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적 나약성으로 인하여 반복되는 잘못을 개심의 결의가 부족한 증거라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부부 중 한 편이 그 배우자에 의해 비자연적 행위를 강요당하는 경우에 생길 수 있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범죄의 협조 여부를 가려내는 원칙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즉 첫째, 타인의 범죄에 동의하거나 함께 즐겨서는 안됩니다.

 

둘째, 콘돔을 사용하는 것은 부부 양편에 똑같이 책임이 있는 비자연적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아내 편에서는 수동적으로라도 협조해서는 안되며 처녀가 강간에 반항하듯 항거해야 합니다.

 

셋째, 질외 사정의 경우 아내의 행위는 그 자체로는 위법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내 편에서는 자기의 불쾌감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러나 매번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아내가 혼인생활에서 갖는 권리가 남편의 그 행위로 해서 완전히 박탈되는 것은 아닙니다.

 

넷째, 남편의 편에서는 자기 아내가 루프를 사용하는 것을 동의해서는 안되며 사용하지 않도록 주의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의 권리 역시 아내의 그릇된 행위에 의해 박탈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섯째, 부부 중 한편이 사전동의 없이 단종시켰다고 해서 그것이 상대편의 권리를 박탈한 것은 아닙니다.

 

여섯째, 불임수술을 한 교우가 회복수술을 하여야 되는지에 대해서 교도권은 아무런 언급이 없고 이성적으로 그런 의무가 있다고 확실히 증명하기가 어렵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그런 의무를 지우지 않아도 된다고 봅니다.

 

우리 사제들은 교회의 가르침을 유지하면서 부부들이 당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깊은 이해심을 보여줍니다. 그들로 하여금 신앙을 지키고 또 서로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자세를 갖도록 그들의 신앙과 상호간의 존엄성을 증진시키고 또한 자기의 양심을 위하여 극기하는 생활로 노력하도록 지도하고 격려하며 위로해 줍시다.

 

가정생활 전체를 성화시키기 위하여 교구마다 "행복한 가정운동'이 설립되어 있습니다. 우리 사제들은 이 운동을 적극 권장하며 우리 사도직 중의 가장 중요한 이 분야에 있어 "행복한 가정운동"이 크나큰 도움이 되도록 이를 잘 이용하며 협조해야만 하겠습니다.

 

[박토마 신부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생명윤리 연구회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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