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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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생명] 통증 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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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6 ㅣ No.340

통증 완화

 

 

문헌 1

요한 바오로 2세, 「생명의 복음」(Evangelium Vitae), 1995.9.25., 65항.

 

65. (…) 현대 의학에서는 '통증 완화 치료법'이라고 부르는 방법에 점차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 방법은 병의 말기 단계 고통을 더 견딜 만하게 만들고, 환자의 마지막 순간에 확실하게 도움을 주고 함께해 주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문제들 가운데는, 환자의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한 여러 종류의 진통제나 진정제들이 생명을 단축시킬 위험을 가지고 있는 경우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이 합법적인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완전히 맑은 의식을 유지하려고, 그리고 신자라면 의식적으로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려고 진통제의 도움을 받는 치료를 그만둠으로써 자발적으로 고통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마땅히 칭찬해야 할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웅적인' 행동을 모든 사람의 의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교황 비오 12세께서는 "다른 방법이 없고, 주어진 상황에서 다른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의무들을 수행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비록 의식이 흐려지고 생명이 단축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해도 마약류를 사용해서 고통을 없애는 것은 합법적인 것이라고 인정하셨습니다. 이런 경우에 사람이 합당한 동기들 때문에 죽음의 위험을 무릅쓸지라도 죽음을 의도하거나 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단지 의사가 제공하는 진통제를 사용해서 효과적으로 고통을 감소시키고자 하는 바람밖에는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대한 이유 없이, 죽어가는 사람의 의식을 박탈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죽음에 다가서는 순간에 도덕적인 의무와 가족에 대한 의무를 이행할 수 있는 상태여야 하며, 무엇보다도, 완전히 맑은 의식 상태에서 하느님과 가질 결정적인 만남을 준비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문헌 2

교황청 신앙교리성, "안락사에 관한 선언" (Iura et Bona), 1980.5.5.: 「사목」 71호, 1980.9., 129면.

 

습관성 현상은 그 약효를 유지하기 위하여 일반적으로 투약량의 증가를 필요하게 하므로 과도한 진통제의 사용은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이 점에서 온전한 효력을 견지하고 있는 교황 비오 12세의 답변을 상기하는 것이 적합하겠다. "(마취제 사용이 생명을 단축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예견하거나 심지어 죽음에 가까이 이른다 하더라도), 종교와 윤리는 마취제를 이용한 고통과 의식의 폐지를 의사와 환자에게 허용하는가?"라는 일단의 의사들이 제기한 질문에 답하면서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 "다른 방법이 없고 주어진 상황에서 다른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의무들을 수행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허용한다." 물론 이러한 경우, 합리적으로 사망의 위험이 동반된다 하더라도, 결코 사망을 의도하거나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의도는 단순히 고통을 효과적으로 경감시키기 위하여, 바로 그러한 목적으로 가료(加療)에 유용한 진통제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식불명을 야기하는 진통제는 특별한 고려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온전한 의식 속에서 자신의 윤리적 의무와 가정에 대한 책임을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하고 또한 온전한 의식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채비를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황 비오 12세는 이렇게 경고한다. "중대한 이유 없이, 임종자에게서 의식을 박탈할 권리는 없다."

 

 

문헌 3

교황청 사회복지평의회, 「중환자와 임종자에 관한 윤리 문제」(Questions of Ethics Regarding the Fatally Ill and the Dying), 바티칸 출판사, 1981년, 1-13면.

 

 

4. 한계 상황에서 진통제 사용

 

1) 고통을 경감하는 다양한 방법 

 

중추신경계에 영향을 주는 진통제의 사용은 여러 가지 부수적인 효과를 낳을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호흡 기능에 영향을 줄 수도 있고, 의식 상태를 변화시킬 수도 있고, 습관성을 유발할 수도 있으며 약효가 줄어들면서 점점 더 많은 용량이 필요해질 수도 있다. 언제나 될 수 있으면 진통제는 사용하지 말고 다른 방법으로 환자를 고통에서 건져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후자에 속하는 방법은 적지 않게 여러 가지가 있다. 아스피린과 같은 치료제의 사용, 신체의 특정 부위의 고정, 각종 방사선 요법, 심지어 외과 수술, 그리고 특별히 중요한 것으로, 단순히 다른 사람이 함께 있어줌으로써 환자의 고독과 불안을 없애주는 일 등이다. 또한 환자가 자기 자신의 신체에 대하여 어떤 통제력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방법들이 개척되고 있기도 하다.

 

2) 중추신경계에 작용하는 진통제의 사용

 

그러나 적어도 현 단계의 의학 지식과 기술에서는 흔히 참으로 견뎌낼 수 없는 고통 때문에 중추신경계에 작용하는 진통제(예컨대 아편이나 그 밖의 마취제)를 사용할 필요가 있는 경우도 많이 있다.

 

분별 있게 사용한다면, 곧 적절한 용량으로 정확하게 결정된 시간 간격을 지켜서 사용한다면 특별히 그 부작용을 크게 감소시킬 수 있을 때에는 그런 약물을 사용한다고 해서 거부할 이유는 없다. 환자를 될 수 있는 대로 의식을 유지해 나가게 하면서 통증을 다스리는 약물을 사용하려면 그 투약 방법과 부수적 효과와 부작용에 관한 주의사항 등, 이런 약품의 모든 점에 관하여 완전한 지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런 약품에 관하여 결정을 내리게 될 때에는 전문 약사와 상담하는 것이, 또 실제로 환자와 함께 결정을 내리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3) 다른 사람이 곁에 있을 필요성

 

마약류를 두고 언급하면서 우리는 그런 약품이 고통을 충분히 구제해 줄 수 있는 것처럼 과신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고통은 중병과 임박한 죽음이 불러올 미지의 현실에 직면했을 때에는 매우 흔히 불안과 공포라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약품이 불안을 경감시켜 줄 수도 있으나, 완전히 경감시켜 주기에는 무리한 경우가 매우 많다. 모름지기 사려 깊고 조심성 있는 다른 사람이 함께 있을 때에만 환자에게 자기 생각을 표현할 수 있게 해주고 인간적이며 영성적인 위안을 줌으로써 참으로 필요 불가결한 안도감을 조성해 줄 수 있다.

 

4) 환자를 무의식 상태에 빠뜨려도 되는가

 

이제 우리는 죽음이 매우 가까워졌을 때 마취제를 사용하여 환자를 무의식 상태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를 다루어볼 수 있다. 특정한 경우에 대해서는 이런 목적으로 이런 약품을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여, 교황 비오 12세는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정당하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약물을 하나의 일반적인 관례로 삼아서 사용하고 싶어하는 유혹이 크게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물론 때로는 측은한 마음에서 사용하기도 하나 흔히는 다소간에 고의로 의사, 간호사, 가족, 그 밖의 환자의 주변 사람들이 죽음에 임박한 환자와 함께 있으면서 느끼는 탈진감에서 벗어날 목적으로 사용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은 환자의 이익이 추구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오히려 완전히 건강하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고 무슨 수단을 써서든 죽음을 도피하려는 그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러나 신경계에 작용하는 마약은 임종자에게서 '자기의 죽음을 살아서 맞이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 평온한 마음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고 평화의 상태에 이를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다. 또 어쩌면 그처럼 최후의 인간적 역경에 처하게 된 인간과 이런 역경 속에서 그를 특별히 잘 알게 된 다른 인간 사이에 최후의 긴밀한 인간관계가 이루어질 기회를 박탈하게 될지도 모른다. 또 만일 임종자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가 자기 죽음을 그리스도와 이루는 일치 속에서 체험할 기회를 박탈하게 된다.

 

그러므로 중환자를 무의식 상태에 빠뜨리는 어떠한 신경치료도 강력하게 반대하고 역으로 치료하고 간호하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귀를 기울여줄 줄 알도록 요구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들은 죽어가는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조성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한 인간관계 덕분에 그들은 임종자와 함께 여러 밤낮을 지내면서 견디어내게 되는 것이며, 가족들이 자기들의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그의 삶의 마지막 단계를 지내도록 도와주는 힘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문헌 4

교황 비오 12세, "그리스도교 원칙들과 의료직무"(1944.11.12.), The Human Body : Papal Teachings, 56-58면.

 

(…) 육체의 통증은, 어떤 병이 드러나지 않게 생겨서 진행 중이라는 경고를 보내줌으로써 그 치료법을 찾아내도록 하므로 건강에 도움을 주는 순기능도 분명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이러한 학문적 연구를 해 나가는 과정에서 고통과 죽음을 자신의 지성으로는 열 수 없는 굳게 잠긴 문처럼 여기게 됩니다. 의사들은 진료를 하면서 자신의 의술로는 어쩔 수 없고 자신의 연민도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어떠한 법을 신비로운 방식으로 희미하게 깨닫게 됩니다. 의사는 실험과 임상의 원리에 따라 진단을 내리고, 과학의 모든 조건에 따라 치료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인간이자 과학자로서 의사는 자신의 존재 깊숙한 곳에서 그 신비에 대한 설명이 계속 피해가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는 고통스러워합니다. 고통에 지쳐 그는 마침내 신앙에 대답을 구합니다. 이 대답은 아직은 불완전하지만 그래도 영혼의 평화를 가져다줄 수는 있으며, 하느님의 신비로운 계획 안에서 완전해지며 또 그렇게 완전한 것으로 영원히 드러날 것입니다.

 

신앙이 주는 대답은 이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셨을 때, 사람은 다른 모든 생물과 달리 자연법의 지배에서 제외시켜 주심으로써 은총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인간의 운명에 고통과 죽음이 포함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고통과 죽음은 죄 때문에 인간의 삶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당신 손으로 고통과 죽음을 거두시어, 당신과 같은 하느님이시면서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사람이 되신 사랑하는 당신 아들이 몸과 핏줄과 심장으로 몸소 이 고통을 겪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고통과 죽음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는 구원과 성화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인간의 여정은, 언제나 십자가의 징표와 고통과 죽음의 법의 그늘 아래, 영혼을 발전시키고 정화하며 영원한 생명으로 끝없이 행복에 이르게 합니다.

 

고통의 집요한 문제에 직면하여, 의사들이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질병 때문에 무기력해지고 마음속에 고통과 죽음에 대한 헛된 반발심마저 일고 있는 불행한 사람들에게 어떠한 만족스러운 답변을 줄 수 있겠습니까? 깨어있는 깊은 신앙으로 충만한 마음만이,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고통받고 죽어야 한다."는 거룩한 스승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신실함과 깊은 믿음을 전달할 수 있는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의사는 자신의 학문과 기술의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질병과 죽음에 맞서 싸울 것입니다. 그러나 비관론적인 자포자기나 일부 현대 철학이 권장하는 '분개한 결의'로가 아니라, 전지전능하시며 한없이 선하시고 자비하신 주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고통과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의 평화로운 마음으로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정리

 

인간에게 주어지는 '육체적 고통'(통증)은 누구든지 피할 수 없다. 따라서 고통 속에 있는 환자들(환자의 가족을 포함해서)은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의료적 행위(진통제 등 고통을 경감하게 하는 의료적 행위)를 자연스럽게 요구하게 된다. 교회는 진통제가 혹여 부차적인 효과로 의식을 감퇴시킬 수 있다 하더라도, 나아가서는 반의식(半意識)의 상태를 초래한다 하더라도 고통을 경감시킬 수 있는 의약의 투여를 반대하지는 않는다(교황청 신앙교리성, "안락사에 관한 선언" 참조). 그렇지만 이러한 의약을 투여할 때는 의사의 분명한 판단과 함께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교황 비오 12세는 "안락사에 관한 선언"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중대한 이유 없이 임종자에게서 의식을 박탈할 권리는 없다."

 

환자의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한 의료적 행위를 취할 때 또 한 가지 발생할 수 있는 중대한 문제는 혹시 환자의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한 의료적 행위가 자칫 안락사로 인식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환자가 가지고 있는 극도의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환자의 죽음을 촉진시키기 위한 진통제나 그 밖의 의료적 행위는 절대 용납될 수 없다. 그렇지만 환자의 고통을 경감할 수밖에 없는 급박한 상황에서 진통제를 투여할 때 그 부수적 결과로서 이미 확실한 죽음을 조금 앞당기는 일이 예상된다 해도 그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교황 비오 12세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결정을 하는 것은 환자에게 유보되어야 한다."라고 가르친다. 이어서 "죽어가는 환자를 그의 분명한 원의에 반대하여 마취한다는 것은 명백히 허용될 수 없다. 깊은 마취에 동의할 심각한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만일 환자가 생명이 끝나갈 때에 참으로 절실하게 요망되는 모든 의무를 아직 수행하지 않았다면 그런 마취에 대하여 윤리적으로 승복할 수가 없다는 것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덧붙인다.

 

[사목, 2003년 11월호, 이창영(주교회의 사무국장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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