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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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인간에 대한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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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6 ㅣ No.331

인간에 대한 실험

 

 

1. “인간 생명의 기원과 출산의 존엄성에 관한 훈령”

 

서론

 

1) 생명 의학 연구와 교회의 가르침

 

모든 인간은 우선 창조주 하느님 아버지께 받은 생명의 선물이 갖는 무한한 가치에 대해서 감사하고 그에 대한 책임감을 갖도록 요청받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이제 인간 생명의 기원과 출산 과정에 사용되는 인공적 기술들이 갖는 도덕적 문제들을 분명히 하고 또 이에 관한 답을 구하는 데도 가장 중심이 되어야 한다.

 

고맙게도 인간은 그동안 생물학과 의학의 발전에 힘입어 그 어느 때보다 그들의 능력을 효과적인 치료 활동에 기여해 왔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인간들이 인간 생명의 최초 단계에 대해 기술적으로 개입하는 것까지 어느 정도 가능하게 해 줌으로써 이로 인한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개발된 여러 가지 인공적 기술 조작들 가운데는 단지 인간 출산 과정을 돕는 정도의 것도 있으나 어떤 것은 이미 출산 과정을 임의로 유도해서 조작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한 것도 있다. 이런 기술들은 어떻게 보면 이제 인간이 ‘그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도록까지 해 준 셈이 됐지만, 이것은 동시에 ‘인간이 범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도록 유혹하는’ 상태에 이르게까지 한 셈이 됐다. 말하자면 이런 기술들은 사람을 도울 수도 있지만 또한 스스로 해칠 수도 있는 심각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들 인간 출산 과정에 쓰이는 기술들과 연관하여 인간의 참된 가치와 권리가 어떻게 올바르게 보호될 수 있는지에 대해 깊이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문제에 대한 교회의 분명한 해답과 지침은 비단 신자들 뿐 아니라 교회가 ‘사랑의 문화’와 생명의 문화에 봉사하는 사명을 지닌 ‘인간성의 전문가’라고 믿는 모든 이들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교도권이 이 일에 관심을 갖고 이런 지침을 내는 것은 어떤 특정한 실험적 과학 연구 결과를 토대로 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와 관련된 그동안의 연구나 기술적 자료들을 고려하기는 하되 그보다는 복음적 사명과 사도적 의무에 힘입어 인간의 존엄성과 그 온전한 소명에 관한 가르침을 내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지침은 인간 생명과 그 기원에 관한 과학적 연구와 기술의 적용에 대해서 그 도덕적 판단 기준을 올바르게 해석해 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 기준들이란 바로 인간은 누구나 존중되고, 보호받으며 증진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생명은 ‘일차적이고 기본적인 권리’라는 것, 인간은 영혼과 도덕적 책임감을 함께 부여받은 위엄 있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인간은 하느님과의 복된 친교로 부름받은 존재라는 것 등이다.

 

굳이 교회가 이 일에 관심을 갖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에 대한 교회의 사랑과, 사람들이 자신의 존엄성과 권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열망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다. 교회의 이 사랑은 물론 사랑의 샘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교회는 ‘인간의 신비’를 이해하며 인간 구속 사업의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사람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깨닫고 나아가 자기 존재의 진실을 완전히 발견하도록 초대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다시 한번 이 땅에 진실하고 진정한 해방 사업을 성취하기 위한 하느님의 법을 주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삶의 올바른 길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그의 계명을 주시고 또 인간이 이를 지키며 살도록 은총을 주신 것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사람들이 이 올바른 길을 유지하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항상 그의 용서를 베풀고 계시는 것은 하느님께서 참된 선이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또 구세주이시다. 성령께서도 모든 인간들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의 선물에 마음을 열고,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를 바라신다.

 

2) 인간에 봉사하기 위한 과학과 기술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하셨다. 특히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창세 1,27), 그들에게 “세상 만물을 지배하는 권한”(창세 1,28 참조)을 주셨다. 기초 과학 연구나 응용 연구들이야말로 모든 창조물들에 대해서 인간이 갖는 이런 권한의 한 가지 단적인 표현인 것이다. 그러나 과학과 기술은 그것이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며 나아가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고 온전한 인간으로의 발전을 도모할 때 참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그 존재 의미나 인간 발전적 의미를 나타내지 못하게 된다. 과학과 기술은 그것을 만들어 내고 발전시킨 인간들에 의해서 그 올바른 목적과 한계성이 드러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과학적 연구나 응용이 그 자체 도덕적으로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아니라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고 또 이들 과학적 연구나 응용의 도덕적 기준은 그 과학 기술의 효용성이라든지 당대의 사회 관념에 따라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과학과 기술은 무엇보다 인간에게 봉사해야 하며, 하느님의 의지와 계획에 따른 인간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와 참되고 온전한 선에 봉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 급격히 발전하고 있는 기술적 발견들이야말로 바로 이런 기준에 대한 존중의 필요성을 그 어느 때보다 긴급하게 요구하고 있다. 양심이 결여된 과학은 인간을 멸망으로 이끌 뿐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발명하는 온갖 새로운 것들을 더욱더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현대는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도 이런 예지를 요구하고 있다. 더 높은 예지를 갖춘 사람들이 출현하지 않는다면 세계의 미래 운명은 위험을 면치 못할 것이다.”

 

3) 인류학과 생명 의학 분야의 기술 조작

 

오늘날 생명 의학 분야에 제기된 문제의 해답을 분명히 밝혀 내기 위해서 과연 어떤 도덕적 기준들이 적용되어야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육체적 차원에서의 인간 본성에 대한 적절한 견해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이 육체와 영혼의 “일치된 전체성”으로만 자기 실현이 가능하다는 진실된 본성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영혼과의 본질적인 결합 때문에도 사람의 육체는 세포 조직의 집합체나 신체 기관들, 또는 그 기능으로만 고려되어서는 안 되며 동물의 몸처럼 평가되어서도 안 된다. 곧 사람의 몸은 그것을 통해서 드러내 보이게 되는 총체적 인간의 한 부분일 뿐인 것이다.

 

자연적 도덕률은 인간의 육체적이고 영적인 본성에 기초를 둔 목적과 권리, 그리고 의무를 규정하고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법은 단지 생물학적 수준의 규범들을 한 묶음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 이 법은 인간이 그의 삶과 행동, 특히 자신의 육체를 이용하는 행위를 집행하고 이를 조정하는 데 올바르도록 창조주께 받은 합리적 명령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원리들에서 끌어낼 수 있는 첫 번째 중요한 결론은 인간 육체에 대한 개입이 단지 조직이나 기관, 그리고 그 기능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수준으로 인간 그 자체에 관여하게 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것은 암시적이면서도 실제적인 면에서 도덕적 의미와 책임성에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세계 의학 총회에서 이를 강력하게 천명하였다. “모든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진 절대적이고도 특이한 개별적 존재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람을 다룬다는 것은 몸 내부에서, 그리고 그 몸을 통해서 아주 구체적인 실체로서의 인간 그 자체를 만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높인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밝힌 대로 ‘육체와 영혼으로 단일체를 이루는’(사목 헌장, 14항)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보호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직접적으로 치료 목적이 아닌 경우, 예컨대, 단지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을 증진시키기 위한 조작들을 하는 데 있어서 그 실시 여부를 결정하는 데 필요한 도덕적 기준을 발견하는 일은 바로 이런 인류학적 견지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응용 생물학이나 의학은 병들거나 불구가 된 사람들을 돕는 경우라든지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그 존엄성을 높이고자 할 때, 인간 생명의 완전선(integral good)을 위하여 함께 일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어떤 생물학자나 의사도 그의 과학적 확신만으로 인간 생명의 기원과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고 그럴듯하게 주장할 수는 없다. 이 개념은 인간의 성과 출산에 관한 분야에서 특별한 방법으로 다루어져야 하는데 이것은 곧 남자와 여자가 사랑과 생명의 기본 가치를 실현하는 일인 것이다.

 

사랑과 생명 자체이신 하느님께서는 남자와 여자에게 특별한 방법으로 그의 개인적 사귐의 신비와 창조주이며 아버지로서의 그의 사업에 관한 직무를 서로 나누도록 명하셨다. 이런 이유로 해서 인간의 결혼은 하등 생물체와는 전혀 다른 결합과 출산 형태 속에 특별한 선과 가치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가치와 의미야말로 개인적 행위의 기본이며 도덕적 견지에서 볼 때 출산과 인간 생명의 기원에 대한 인위적 개입의 의미와 한계를 결정짓게 하는 일인 것이다. 이런 개입들은 그들이 단지 인공적이란 점을 이유로 해서 거부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 자체로는 학문으로서의 의학적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다만 이런 개입들에 대해서는 하느님께 생명과 사랑의 선물에 대한 올바른 사명감을 깨닫도록 부름받은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해서 도덕적 평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I. 인간 배아에 대한 존중

 

4) 인간 배아와 태아에 대한 연구나 실험에 대한 도덕적 평가는 어떻게 내릴 것인가?

 

살아 있는 배아에 대한 의학적 연구는 그 일이 태아나 어머니의 생명과 온전성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는 도덕적 확신이 없는 한, 그리고 그 연구에 대한 부모의 자유스럽고 충분히 이해된 상태의 동의가 없는 한 실시되는 것을 중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연구는, 그것이 아무리 인간 배아를 관찰하는 정도의 간단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 방법이나 그에 따른 영향 때문에 배아의 생명이나 형태에 해를 준다면 부당한 것이 된다. 실험이라든지, 그 실험의 목적이 치료적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구분하는 데는 또 한 가지 그 실험이 살아 있는 배아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죽은 것에 대한 것인지를 구분하는 일도 중요하다. 만일 배아가 살아 있는 경우라면 그것의 생존 능력 여하를 불문하고 다른 인격체와 마찬가지로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하자면 직접적인 치료 목적이 아닌 배아에 대한 실험은 부당한 일이다.

 

어떤 목적도 그것이 아무리 과학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사회에 이익이 아주 확실한, 훌륭한 것이라 해도 살아 있는 배아에 대한 실험은 그 생존 가능성이나 자궁 안팎 어디에서건 관계없이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 어른들에 대한 임상 실험에서 통상적으로 요구되는 고지된 동의도 태아의 생명과 온전성을 자유로이 관리할 수 없는 부모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인정될 수는 없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일은 배아나 태아에 대한 실험은 항상 위험을 동반하게 마련이며 실제로 대부분 그들의 육체적 형태에 일정한 피해가 예상되고 때로는 그로 인해서 배아나 태아가 사망하게 되는 일도 있다. 

 

교황 성하께서 반포하신 “가정 권리 헌장”에서도 “인간 존엄성의 존중은 태아에 대한 여하한 실험 조작이나 이용을 배제한다.”는 점을 확실히 하고 있다. 실험이나 상업적 목적으로 살아 있는 인간 배아를 생체 내(in vivo)나 체외(in vitro)에 보관하는 일 또한 전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에 위배되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실험적 형태의 치료라 하더라도 그것이 배아의 생명을 구하는 마지막 시도로서 그에게 이익이 되는 실험인 경우거나, 다른 믿을 만한 치료 방법이 없을 때 아직 충분히 그 효과가 밝혀지지 않은 약이나 치료 조작을 하는 것은 타당할 수 있다.

 

인간 배아나 태아의 형체는 그것이 고의로 유산된 것이건 아니건 다른 인간과 같이 존중되어야 한다. 특히 이들의 죽음이 확인되지 않고, 또 부모의 동의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는 절대로 훼손이나 부검(autopsy)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죽은 배아나 태아를 다룰 경우 고의적인 유산에 동조했다거나 이들 태아에게 해를 끼쳤다는 오해가 없도록 철저히 보호될 도덕적 요구가 필요하다. 한편 죽은 태아에 대해서도 어른들 시체에 대해서와 같이 일체의 상업적 거래는 부당하며 따라서 이런 일이 없도록 금지되어야 한다.

 

5) 체외 수정(in vitro fertilization)으로 얻은 배아를 연구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도덕적 평가는 어떻게 하나?

 

체외에서 얻은 인간 배아도 어디까지나 인간이며 따라서 그들의 생명권과 존엄성은 그 존재의 시작에서부터 존중되어야 한다. 한 번 쓰고 버리는(disposable) ‘생물학적 재료’로 인간 배아를 만들어 내는 일은 부도덕하다.

 

통상 체외 수정으로 배아를 만드는 경우, 이들 배아가 모두 어머니 자궁 속에 착상되는 것이 아니고 더러는 파괴되고 만다. 인공 유산에 대해서 교회가 비난하듯 인간 배아에 대한 이런 행위들에 대해서도 교회는 이를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인공적 정자 주입(artificial insemination)이나 ‘분체 생식’(twin fission)에 따라 순전히 연구를 목적으로 실험실적으로 얻은 인간 배아를 의도적으로 파괴하는 중대한 잘못에 대해서 이를 비난하는 것은 우리의 마땅한 의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행동함으로써 연구자는 하느님의 자리를 빼앗게 되는 것이며, 설사 그 자신이 이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는 멋대로 어떤 사람은 살리고 또 어떤 힘없는 사람은 죽여 버리는 등 결국 다른 사람의 운명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하는 주인 행세를 하게 되는 것이다.

 

체외에서 얻은 배아를 해치거나 그들에게 중대하고도 부당한 위험을 주는 관찰이나 실험 방법들도 같은 이유에서 도덕적으로 부당한 것이다. 모든 인간은 그 자신 스스로를 위해서 존경받아야 하며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 단순한 도구가 됨으로써 그 가치가 떨어뜨려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체외에서 얻은 인간 배아를 의도적으로 죽도록 내버려둔다는 것은 결코 도덕률과 일치하지 않는다. 단지 체외에서 실험실적으로 얻어진 것들이라는 이유로 해서 저들 어머니 자궁 속에 심어지지 못한 이른바 ‘잔여(spare) 배아’들은 당연히 생존을 위한 안전 수단이 제공되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 불합리한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출처:교황청 신앙교리성, “인간 생명의 기원과 출산의 존엄성에 관한 훈령”(1987.2.22.), Origins 16: 40호(1998.3.19.), 697-711면.]

 

 

2. “인간 생명에 봉사하는 의학”

 

…… 현대의 과학 지식 수준에서, 새로운 의약품들의 특성과 특질을 매우 정확하게 예측하기란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약품들은 치료에 사용되기 전에 우선 실험실 동물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해 보아야 합니다. …… 그 다음 단계에서는 상용화하기에 앞서 환자나 때로는 건강한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을 해 보아야 합니다. 임상 실험은 그러한 실험을 규제하고 최대한으로 보장하기 위한 엄격한 법과 규범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의약품 관련 실험 분야에서 위험과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을 충분히 줄일 수 있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인간이 단순한 실험 대상이 되지 않도록 막고,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의 생명과 온전한 정신과 몸의 균형과 건강에 미칠 위험을 막기 위하여 최대한 신중해야 합니다. ……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가운데에는 저개발 국가들의 상황과 관련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보건 혜택을 받을 권리는 기본적인 권리로 인정받고 있지만, 아직도 인류의 상당 수가 가장 기본적인 치료조차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비록 개인의 노력이 그 자체로 소중하고 무엇과도 대신할 수 없기는 하지만, 아직도 그러한 노력들이 불충분하게 이루어지는 분야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금으로서는 우리가 함께 협력하고 국제적인 차원에서 원조 정책과 구체적인 활동들을 조정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

 

선진국들은 그들의 경험과 기술과 경제적 자원의 일부를 저개발국들을 위하여 사용할 의무가 있습니다. ……

 

이러한 배경에서, 우리는 아직도 일부 의약품들이 순전히 상업적인 이유들 때문에 진지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연구와 과학적 진보의 혜택에서 소외되어 있다는 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의약품들은 흔히 일부 희귀한 질병의 치료뿐만 아니라 가난한 열대 지방의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질병의 치료를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이런 면에서, 목표와 우선 순위를 먼저 생각하고, 그 다음에 그러한 의약품의 연구와 개발과 생산을 가로막는 경제적 정치적 장벽들을 극복할 방법을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출처: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인간 생명에 봉사하는 의학”(1986.10.24.), Health Progress, 1987년 4월, 84.93면.]

 

 

3. “생물학적 실험”

 

인간 존중

 

…… 따라서 저는 여러분처럼 인간에 대한 깊은 존중감을 지닌 학자들이 하는 생물학 실험들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실험들은 인간의 전체적인 행복에 이바지할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 배아의 실험적 조작은 명확하고 분명하게 단죄합니다. 인간은 수정되는 순간부터 사망에 이를 때까지 어떠한 목적으로도 이용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가르치고 있듯이, 인간은 “하느님께서 바라신 유일한 피조물”(사목 헌장, 24항)입니다. 

 

여러분은 조직 배양과 같은 인공 모형들과 유전학적으로 선택된 몇몇 동물 종들에 대한 실험을 통하여 생명의 가장 본질적인 구조에 대한 지식을 증진하는 실험에 관하여 논의하였습니다. 또한 여러분은 일부 실험들은 동물 배아에서 시행함으로써 세포상의 차이가 어떻게 하여 생기는지에 관한 지식을 증대할 수 있다고 제시하였습니다. 

 

세포와 조직 배양과 같은 새로운 기술들은 생물학에서 매우 중요한 진보를 가져온 주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었으며 동물에 대한 실험을 보완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여야 합니다. 

 

동물은 인간에게 도움이 되어야 하며 따라서 실험의 대상으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동물은 인간의 선에 이바지하여야 하지만 인간이 남용해서는 안 되는 하느님의 창조물로 대접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점점 그 필요성이 줄어들고 있는 동물에 대한 실험을 줄이는 것은 모든 창조물의 행복과 창조의 계획에 부응하는 것입니다. ……

 

‘체외’(in vitro) 실험

 

…… 또한 여러분의 활동과 관련하여, 특별한 유전자 염색체 질병의 경우에 새로운 유전 정보 수정 기술들은 그러한 질병을 앓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동기가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또한, 유전자 전이를 통하여, 여러 나라에서 특정한 민족 기원을 가진 사람들을 괴롭히는 겸상(鎌狀) 적혈구성 빈혈(sickle-cell anemia: 흑인의 유전병)과 같은 질병들이 치료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생물학적 실험의 발전을 통하여 일부 유전병들도 막을 수 있다는 것도 지적하여야 합니다.

 

현대 생물학 연구는 유전자 전이와 유전자 변이가 염색체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상태를 개선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줍니다. 또한 이렇게 함으로써, 가장 작고 연약한 인간인 태아도 태중에서나 출산 직후에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

 

[출처: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생물학적 실험”(1982.10.23.), The Pope Speaks 28: 1호, 1983년, 75-76면.]

 

 

4. “환자도 인간입니다”

 

실험

 

…… 이번에는, 요즘 많이 논의되고 있는 주제인 실험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도, 인간의 존엄과 그러한 존엄을 바탕으로 하는 윤리 규범을 인정하고, 과학 연구를 고무하는 뛰어난 가치로 받아들이는 것은 윤리적 의무의 차원에서 매우 구체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약리학적 임상 연구는 그러한 개입이 무해함을 확신시킬 수 있는 모든 예방 조치를 다 취한 다음에야 비로소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연구의 준비 단계에서는 그 약품이 가질 수 있는 중독 효과에 대하여 최대한 광범위한 증거를 제시하여야 합니다. 

 

또한 환자에게 실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과 실험의 목적과 위험 가능성들에 대하여 알려서, 환자가 충분히 알고 자기 의사로 동의하거나 거부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의사는 환자가 인정한 부분에 대해서만 그런 권한과 권리를 가집니다.

 

실험의 본질적인 한계

 

또한 환자의 동의도 그 범위가 무한한 것은 아닙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환자가 실험에 협조하는 근본적인 목적은 자신의 건강을 증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한 실험은 집단이 아니라 개인의 유익에 이바지함으로써 실험을 정당화할 주된 근거를 찾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환자의 본질적인 완전성이 보존되는 경우, 환자가 의학의 발전과 공동선에 몸소 이바지하는 한 방식으로서 위험을 합법적으로 감수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의학은 인간에게 장애가 되는 질병들과 인간을 억누르는 심리적 육체적 나약함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힘으로서 공동체에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도덕률의 제한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러한 자기 증여는 가치 있는 사랑의 뛰어난 증거가 되며 본질적이지 않은 육체적 손실의 위험 가능성을 상쇄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영적 성장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의학의 인간화

 

약품 연구와 치료에 대한 이러한 성찰은 의학의 다른 분야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환자들을 돕는 행동 자체에서 사실상의 폭력을 가함으로써 정신적 육체적 완전성에 대한 환자의 인권을 침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복잡하고 정신적 충격을 주는 절차를 사용하는 문진(問診), 심하게 인체를 해부했다가 재건하는 과정을 포함하는 현대 의학의 수술 치료, 장기 이식, 응용 의학 연구, 그리고 병원이라는 조직 자체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출처: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환자도 인간입니다”(A Patient Is a Person)(1980.10.27.), The Pope Speaks 26: 1호, 1981년, 3-4면.]

 

 

5. “인간의 불가해성”

 

의학

 

과학 지식은 물리학, 화학, 우주론, 심리학 등 다른 학문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의학 분야에서도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결코 그 중요성을 축소할 수 없는 이러한 가치는, 습득한 지식의 유용성이나 쓰임새와는 별개로 부여됩니다. 또한 그러한 지식을 비롯하여, 모든 진리에 관한 완전한 지식은 어떠한 도덕적 반대도 불러일으키지 않습니다. 같은 원칙에 따라,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한 진리 습득과 연구, 그리고 그러한 진리에 대한 새롭고 더욱 광범위하며 더욱 심오한 이해는 그 자체로 도덕 질서와 조화를 이룹니다.

 

그러나 이것은, 과학 연구와 기술로 훌륭하게 고안된 방법이라 하더라도 모든 방법이 다 도덕적으로 인정받는다는 뜻은 아니며, 우리의 지식을 풍부하게 하고 넓혀 준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방법을 다 합법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때로 어떠한 방법들은 다른 이들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절대적인 도덕 가치들을 어기지 않고서는 시행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 지식의 발전이 추구하는 목표가 되어 무조건 좋은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도덕적으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과학은 모든 다른 가치 체계가 - 또는 동등한 가치 체계에서 보자면 모든 개별 가치들이 - 종속되어야 할 최고 가치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과학 자체와 과학 연구와 그 업적은 가치 체계 안에 포함되어야 합니다. 더욱 가치 있는 도덕률들을 어기지 않기 위해서 의학이 넘어서는 안 될 분명한 경계들이 있습니다. 과학에 관련된 가치들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들은, 의사와 환자의 신뢰 관계, 환자의 생명권, 정신적 완전성 안에서 육체적 정신적 건강에 대한 권리입니다. 다음을 보면 이것이 훨씬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

 

환자의 유익

 

…… 환자는, 직접적이든 결과적으로든, 이러한 개입들에 파괴나 절단, 부상 또는 매우 위험한 행동이 따를 때, 의학 실험이나 연구에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완전성이 연루되게 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

 

…… 세 번째 유익은 새로운 실험과 개입, 새로운 방법과 절차의 사용에 있어서 의학이 가지는 권리의 윤리적 정당성을 위하여 제시되는 것으로서, 공동체, 곧 인간 사회의 유익, 철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의 표현에 따르면 공동선(bonum commune)입니다. 

 

그러한 공동선이 존재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공동선에 대한 더욱 깊이 있는 연구가 요구되고 필요하다는 사실에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이미 언급된 학문의 유익과 환자의 유익이라는 두 가지 유익은 일반의 유익인 공동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공동선

 

그러나 세 번째로 질문이 제기됩니다. 공동체의 의학적 유익은 그 내용이나 범위에 어떠한 도덕적 경계의 제한을 받는가? 살아 있는 인간에 대한 모든 위험한 실험을 할 수 있는 ‘전권(全權)’이 존재하는가? 과학이나 개인의 유익에 어떠한 경계가 규정되는가? 또는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공동선을 돌보아야 할 역할을 맡고 있는 공공 권위는, 과학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새로운 방법들과 절차들을 개발하고 시험해 보기 위하여, 그러한 실험들이 자기 마음대로 처신할 수 있는 개인의 권리를 침해할 때에도, 의사에게 개인을 대상으로 실험을 할 권한을 줄 수 있는가? 공공 권위는 참으로, 자신의 육체와 생명, 육체적 정신적 완전성에 대한 개인의 권리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제한하거나 억누를 수 있는가?

 

반대 의견을 예상해 보면, 이것은 중요한 연구의 문제이고 학문 이론과 실천을 증진하려는 정직한 노력의 문제이며, 다른 목적들을 은폐하고 이러한 목적들을 무사히 실현하기 위한 과학적 핑계가 되는 조작이 아니라는 것이 언제나 이해되어 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앞에서 언급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긍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해 왔으며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그들은 개인은 공동체에 종속되어 있으며 개인의 선은 공동체의 선에 양보되어야 하고 희생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또한 과학적 연구와 탐구의 목적을 위한 개인의 희생은 결국 개인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세계 대전 후의 재판들은 ‘공동체의 의학적 유익’을 위한 개인의 희생을 증언하는 엄청나게 많은 문서들을 내놓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서들에서 일부 기관들이 어떻게 공공 권위의 동의 아래, 때로는 공식적인 명령으로, 강제 수용소의 포로들을 의학 실험용으로 정기적으로 공급하도록 요구했는지 보여주는 증언들과 보고서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어떻게 그런 기관들로 데리고 갔는지, 얼마나 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이러한 실험을 위해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 끌려갔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실험의 과정과 그 결과, 여러 다른 단계에서 실험의 대상이 된 사람들에게서 관찰된 객관적 주관적 증상들에 대한 보고서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보고서들을 읽노라면 실험 과정에서 죽은 많은 이들을 포함하여 모든 실험의 희생자에 대하여 깊은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기형적인 인간 정신과 마음 앞에서 움찔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극악무도한 행위의 책임자들은, 앞에서 제기한 질문들에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지 않고 또한 그러한 행위의 실질적인 결과를 보여 주었다면 그러한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래도 개인의 유익이 의학의 공공 유익에 종속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는 건전한 신앙 안에서라고 할지라도 어떠한 이유의 의학 연구를 위해서도 허용될 수 없는 자연법의 가장 근본적인 요구가 무시되는 것을 목격하고 있습니까?

 

현재 의료계에서는 우리가 앞에서 인용한 행동의 저변에 깔린 생각들을 고수하고 옹호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러한 사람의 눈은 현실을 완전히 외면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의학적 시도들과 실험들에 대한 보고서를 조금만 살펴보더라도 사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보고서를 보다 보면 도대체 무엇이 의사들에게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도록 권위를 주었는지, 의사들은 어디서 그러한 권위를 가지게 되었는지 저절로 의문이 들 것입니다. 실험 보고서는 침착하고 객관적인 진술로 실험 과정과 결과를 설명하고 있으며, 실험 결과 사실로 드러난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도덕적 합법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도덕성의 문제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이를 묵과한다고 해도 이러한 문제를 억누를 수는 없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경우에서 개입의 윤리적 정당화는 공공 권위의 명령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이는 공동체에 대한 개인의 종속, 사회의 선에 대한 개인의 선의 종속에서 비롯한 것이므로, 잘못 적용된 원칙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인간이 사회의 유용성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인간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지적하여야 합니다. ……

 

…… 우리의 목적은 살아 있는 인간에게 직접 적용되는 새로운 의학 방법들에 대한 연구와 실험의 경계와 한계를 정하는 의무론의 몇 가지 원칙들을 여러분께 환기시켜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과학 분야에서, 살아 있는 인간에게 새로운 방법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그 전에 시체나 실험실 모형에 대한 연구와 동물에 대한 실험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분명한 규범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러한 절차가 불가능하거나 불충분하거나 실제적으로 실천하기 어려운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의학적 실험은 과학과 환자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직접적인 대상인 살아 있는 인간에게 실험을 시도하게 됩니다. 그러한 실험을 즉시 폐지할 수는 없지만, 앞에서 설명했던 도덕적 경계에서 멈추어야 할 필요는 있습니다.

 

도덕률에 의거하여 새로운 방법을 인정하기 전에 모든 위험과 모험을 완전히 없애도록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인간 본성의 가능성을 넘어서는 것으로서, 모든 과학적 연구를 마비시키고 환자에게도 손해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 위험 요소들을 파악하는 것은 경험 있고 유능한 의사들의 판단에 맡길 일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도덕률이 용납할 수 없는 위험 수준이라는 것은 있습니다. 기존의 방법들이 이미 실패한 의심스러운 경우에, 새롭지만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방법들은 큰 위험 요소와 함께 분명한 성공 가능성을 제시할 수도 있습니다. 환자가 동의를 한다면 그러한 절차의 적용은 합법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 방식은 일반적인 경우의 치료선상에서 제시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전개한 생각들은 연구와 학문 활동에 큰 장애가 된다는 반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한계를 규정한다고 해서 반드시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연구, 실험, 인간 활동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의학 분야에서도 이는 유효합니다. 강력한 도덕 규범은 빠르게 휩쓸려 가는 인간의 사상과 의지의 물결이 잘 다듬어진 산의 물줄기처럼 흘러가도록 합니다. 그러한 규범은 인간 사상과 의지가 더욱 위대하고 효과적으로 쓰일 수 있도록 억제합니다. 규범은 또한 물이 범람하여 때려 부수지 않도록 댐으로 막아서 보존합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이 추구하는 귀중한 선에서 결코 보상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도덕적 요구가 걸림돌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도덕적 요구는 인간이 과학과 개인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성취하는 더욱 훌륭하고 숭고한 업적에 나름대로 이바지합니다. …

 

[출처:교황 비오 12세, “인간의 불가해성”(1952.9.3.), The Human Body: Papal Teachings, 196-197.`199.`201-204.`207-208면.]

 

 

정리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그분의 모상이고, 각인이며, 그분 생명의 숨결을 나누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이 생명의 유일한 주인이시며, 따라서 인간은 이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생명의 복음」, 39항).

 

회칙 「생명의 복음」은 인간 생명의 선성(善性)에 대한 근거로서 인간은 “이 세상에 하느님을 증거하는 존재이고, 그분께서 존재하신다는 표징이며, 그분 영광의 흔적”(창세 1,26-27; 시편 8,6 참조)이기 때문에 다른 피조물들의 생명과는 전혀 다른, 하느님의 영광 그 자체라는 점을 강조한다(34항 참조). 이렇게 인간은 현세적인 존재의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충만한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은 존재이며, 따라서 위대함과 측량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존재이다.

 

인간 생명에 대한 이러한 기초에서 인간 생명의 특성으로서의 신성함과 불가침성이 드러나게 된다. 인간 생명의 신성함, 선함 그리고 불가침성이라는 특성은 결국 인간은 그 자체로 목적이지 수단으로 전락되어서는 안 된다는 또 하나의 중요한 원리를 제공하게 된다.

 

한편, 인간 생명의 시작에 관한 문제는 가톨릭 교회가 가르치는 생명 윤리의 중심에 서 있다. 가톨릭 교회는 인간 생명이 탄생하는 최초의 결정적인 순간은 수정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라고 가르친다. 이 순간에 유일하고도 반복되어질 수 없는 유전 인자로서 아버지의 생명, 어머니의 생명과 구별되는 새 생명이 시작되는 것이며, 따라서 수정이 이루어지는 수정란의 시기를 이미 인간 생명이 시작된 시기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신앙교리성, “인공 유산 반대 선언문” 참조). 이렇게 수정란에서부터 이미 인간 생명은 시작되기 때문에 인간은 그 존재의 첫 순간에서부터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중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수정란이나 복제된 배아 모두 하나의 인격적 개체로서 보호받고 존중되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만일 인간 배아에 관한 연구나 실험, 배아에게 가해지는 다양한 의료 조작이 배아가 가지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온전성을 거스르게 된다면 이는 당연히 거부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과학 기술의 발전은 참으로 눈부시고 놀랍다. 이로써 인류의 질적인 삶은 매우 크게 향상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생명 과학 분야에서의 눈부신 발전은 인류의 미래에 큰 희망을 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이처럼 인류의 삶과 직결되어 있으며, 더 직접적으로는 인류의 행복에 기여하는 목표로 발전되어 왔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과 기술은 그것이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며 나아가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발전을 도모할 때 참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그들의 존재 의미나 인간 발전의 의미를 나타내지 못하게 된다”(「생명의 선물」, 121면). 곧 과학 기술의 발전이 참된 가치를 갖기 위해서는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발전이 그 기준이 되는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과학 기술은 올바른 목적을 추구하기 위한 한계가 분명히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의 재능과 창의력이 이룩해 놓은 업적이 때로는 인간 스스로를 지배하고 위협할 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 전체를 회복 불가능한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인간의 구원자」, 19항 참조). 인간의 교만과 통제되지 않는 욕구로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갖가지 과학 기술의 발달이 오히려 인류를 파멸의 위기로 몰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 생명은 그 무엇보다도 고귀한 것이기에 어떠한 경우라도 철저히 보호되어야 하며, 인간 존엄성을 침해하는 어떠한 연구나 실험도 마땅히 거부되어야 한다. 나아가 생명 과학의 모든 기술은 본래의 목적인 ‘인간’을 벗어나지 않도록 하여야 하며, 결코 인간을 위협하는 수단이나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과학적 연구나 그 응용이 그 자체 도덕적으로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아니라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고 또 이들 과학적 연구나 응용의 도덕적 기준은 그 과학 기술의 효용성이라든지 당대의 사회 관념에 따라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과학 기술은 본질적으로 도덕률의 근본 기준을 무조건 준수하도록 되어있다. 곧 그들은 무엇보다 인간에게 봉사해야 하며, 또한 하느님의 의지와 계획에 의한 인간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와 참되고 온전한 선에 봉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생명의 선물」, 121면; 사목 헌장, 35항 참조).

 

‘연구’와 ‘실험’이라는 용어가 흔히 같은 의미로 또는 모호하게 사용되고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그 용어에 부여하는 정확한 의미를 밝혀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① ‘연구’라는 말은 인간적인 영역의 기존 현상에 대한 체계적인 관찰의 추구 또는 이전의 관찰들에서 제기된 가설에 대한 입증을 목적으로 하는 어떠한 연역적 또는 귀납적 과정을 의미한다.

 

② ‘실험’이라는 말은 현재 모르고 있거나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일정한 치료(예컨대 약리학적, 기형 발생학적, 외과적 치료 등)의 효과를 증명하려는 의도에서 인간을 (배아, 태아, 어린이, 성인 등 그 실존의 여러 단계에서) 대상으로 삼는 어떤 연구를 의미한다.

 

[사목, 2003년 3월호, 이창영(본지 주간, 주교회의 사무차장, 신부)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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