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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생명] 체외수정(In Vitro Fertil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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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6 ㅣ No.324

체외 수정(In Vitro Fertilization)

 

 

1. “인간 생명의 기원과 출산의 존엄성에 관한 훈령”

 

제2부. 인간 출산에 관한 개입

 

여기서 ‘인공 출산’ 또는 ‘인공 수정’이란 말은 남녀의 성적 결합이 아닌 다른 수단에 의해서 사람을 잉태하는 기술적 조작으로 이해된다. 이 훈령에서는 시험관 안에서 난자를 수정시키는 것(체외 수정)과 미리 받아 놓은 정자를 여자의 생식기에 넣어 줌으로써 인공적으로 수태시키는 것에 관해서 다루고자 한다.

 

이런 기술적 조작들에 대한 도덕적 평가에 앞서 한 가지 지적해야 할 일은 이들 기술 조작들이 인간 배아에 대한 존엄성의 문제에 관하여 환경과 그 결과에 관한 고려이다. 체외 수정을 시도하는 데 있어서는 수도 없이 많은 수정 과정과 인간 배아의 파괴가 따르게 마련이다. 오늘날에도 이 기술은 우선 여자의 활발한 배란이 전제되며 여기서 많은 난자를 채취하여 수정시킨 다음에는 또 며칠 동안 이것을 체외에서 배양해야만 한다. 통상 모든 배아가 다 여자의 생식기 내에 옮겨 심어지는 것이 아니며 더러 남게 되는 이른바 ‘잔여 배아’는 파괴되거나 냉동시켜 보관하게 된다. 때때로 자궁에 착상시킨 어떤 배아는 여러 가지 우생학적, 경제적 또는 심리적 이유로 도중에 희생되기도 한다. 이런 고의적 인간 배아의 파괴나 다른 목적에의 사용은 이들 생명과 주체성에 피해를 줌으로써 결국 인공 유산과 같이 교리에 어긋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체외 수정과 인간 배아의 자발적 파괴 사이의 관계는 매우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분명히 교리에 위배되는 목적으로 이런 조작들이 행해지는 것은 인간의 삶과 죽음이 사람의 결정 여하에 놓이게 함으로써 인간이 스스로 생명을 주기도 하고 죽음을 내리기도 하는 자의 위치로 자신을 끌어올리는 일을 저지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술의 횡포나 월권은 사람들이 그 기술을 자기들 스스로의 이익만을 위해서 사용하고 있으며 또 그렇게 계속 사용하기를 원하고 있는 한 잘 드러나지는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체외 수정과 배아의 자궁 내 이전(embryo transfer)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하는 데 있어서는 여러 사실적 증거와 그런 사실과 관련된 냉정한 논리 전개의 고려가 필요하다. 그것은 이런 기술적 조작들을 가능하게 만든 낙태 심리(abortion mentality)가 결국, 그 기술 사용자인 연구자로 하여금 그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같은 인간인 태아의 삶과 죽음을 지배할 수 있게 만들며, 나아가서는 다른 모든 우생학적 조작 행위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공적인 인간 출산 기술들에 대한 더욱 진지한 윤리적 연구가 필요하며 이것은 바로 체외에서 얻는 인간 배아의 파괴 문제를 최대한으로 없애는 일이기도 하다.

 

이 훈령은 따라서 부부 외 인공 수정(heterologous artificial fertilization)1)에 의해서 야기되는 문제들을 우선적으로 다루고 이어서 부부의 이른바 부부간 인공 수정(homologous artificial fertilization)2)과 관련된 문제를 다루기로 한다.

 

한편, 이들 조작들에 관한 윤리적 판단을 내리기 전에 이들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결정짓는 원리와 가치 기준들에 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B. 부부간 인공 수정

 

부부 외 인공 수정이 도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히 밝혀졌기 때문에 그러면 부부간 인공 수정, 곧 남편과 아내 사이의 체외 수정이나 배아의 자궁 내 이전, 그리고 남편의 정자를 기계적으로 주입해서 수태시키는 일 등에 관해서는 도덕적으로 어떤 평가를 해야 하느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우선 원리상의 의문부터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

 

4. 도덕적 견해로 볼 때 출산과 부부 행위 사이에는 어떤 관련이 요구되는가?

 

(1) 결혼과 출산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은 이렇게 천명하고 있다. “부부 행위의 두 가지 의미, 곧 일치적 의미와 출산의 의미 사이는 하느님께서 원하셨고 이것을 사람이 임의로 바꿀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진실로 부부 행위는 부부가 가장 가까운 본질적 형태로 합치됨으로써 부부로 하여금 남자와 여자에게 명령된 법에 따라 새로운 생명을 전수하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결혼의 본성과 결혼의 신성성과의 본질적 관련성에 바탕을 둔 이 원리는 책임 있는 부성과 모성의 수준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것이다. “부부 행위는 일치와 출산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를 보호 증진함으로써 부부 상호 간의 진실한 사랑의 감정을 충만하게 해 주며, 사랑으로 하여금 부모가 되는 높은 사명감을 하나의 계율로 느끼게 해 준다.”

 

부부 행위의 의미와 결혼의 결실인 출산 사이의 관련에 관한 교리는 결국 부부간 인공 수정의 도덕적 문제에 해답을 제시해 준다. “그것은 출산 의지나 부부 관계 어느 것도 이를 별도로 취급하여 그 둘을 갈라놓는 일이 결코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피임은 의도적으로 부부 행위에서 출산 의지를 제외시키는 일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결혼의 진정한 목적을 거스르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구체적 부부 행위의 열매로서가 아닌 출산을 목적으로 한 부부간 인공 수정은 객관적으로 결혼의 신성성과 그 의미 사이의 유사한 분리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수정은 “자연 본성에 의해 명령받은 대로 부부가 결혼을 통해서 자녀를 전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부부가 한 몸이 되는 부부의 성적 결합”의 결과일 때 타당하게 요구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도덕적 견지에서 볼 때 출산이 부부의 합일에 의한 성적 결합의 결과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그 완전함을 상실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2) 결혼의 결실과 부부 행위의 의미 사이에 존재하는 긴밀한 관계의 도덕적 가치는 육체와 영혼의 결합을 동반한 인간적 일치에 그 근거가 있다. 부부는 “육체의 언어”를 통해 그들의 인격적 사랑을 서로 표현하는 것인데 그 속에는 분명히 서로가 부부라는 의미와 부모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부부 서로 그들의 자기 봉헌을 표현하는 부부 행위는 동시에 생명의 선물에 대한 환영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육체와 정신으로 분리될 수 없는 행위인 것이다. 부부가 그들의 결혼을 성취시키고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가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들의 몸 안에서, 그리고 그 몸을 통해서인 것이다. 그들의 육체적 언어와 천성적 관대함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부부의 성적 일치가 출산에 대한 존경심과 함께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한 인간의 출산은 결혼한 상태에서의 사랑의 열매이며 그 결과이어야 한다. 따라서 인간의 기원은 “결혼을 통해서 하나가 된 부부의 생물학적 및 영적 결합과 관련된” 생식에서부터 비롯된다. 이런 사실 때문에도 부부의 몸 밖에서 이루어진 수정은 부부 사이의 육체적 언어와 인격의 결합으로 표현되는 인간 생명의 참된 의미의 가치를 상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3) 부부 행위의 참뜻과 인간의 유일성에 대한 존경심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과 일치된 출산을 가능하게 한다.

 

아이가 태어나는 그 유일하고도 다시 반복될 수 없는 기원을 생각할 때 그 아이는 그에게 생명을 준 어른들에 대한 인격적 존엄성과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 부부의 성적 일치와 사랑 속에 인격적인 인간 탄생이 수용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아이의 탄생은 그렇듯 부부가 사랑이신 창조주의 사업에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봉사자로서 서로 협력하는 자세를 가지고 상대방에게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의 행위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인격적인 인간의 기원은 주는 행위의 결과이다. 임신된 아이는 그 부모 사이에 존재하는 참된 사랑의 결과여야 한다. 어떤 아이도 의학적 또는 생물학적 기술 조작의 산물로 계획되고, 실제 그렇게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과학 기술은 인간을 한낱 과학 기술적 대상으로 가치를 전락시킨다. 

 

아무도 세상에 태어나는 아이를 통제와 지배력의 기준에 따라 평가받도록 되어 있는 기술적 효용성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다.

 

부부 행위의 참뜻과 결혼의 신성성, 그리고 인간의 유일성과 그 기원의 존엄성 등에 대한 도덕적 원칙은 인간의 출산이 두 사람 사이의 진정한 사랑이 담긴 부부 행위의 열매이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부 행위와 출산 사이의 관계는 인류학이나 도덕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이 점에서 부부간 인공 수정에 대한 교도권의 입장을 잘 밝혀 주고 있는 것이다.

 

5. 부부간 체외 수정은 도덕적으로 합당한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바로 앞서 언급한 원리에 의존해서 말할 수가 있다. 누구도 분명히 아이를 못 갖는 부부들의 정당한 희망을 무시할 수는 없다. 실제로 어떤 경우에는 부부간 체외 수정이나 배아의 자궁 내 이전에 의존하는 일만이 아이를 갖고자 하는 그들의 진지한 희망을 성취시키는 길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때, 그런 상황에서의 일치된 부부 생활이 과연 인간 출산에 부여된 존엄성을 충분히 보장해 주지 못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체외 수정이나 배아의 자궁 내 이전이 성적 관계를 대신해 줄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 일을 통해서 아이에게 해를 줄 위험이 있다든지 그 조작 자체가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로 봐서도 그 일이 부부 사이의 성적 결합보다 좋을 수가 없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역시 불임으로 인한 고통을 극복할 다른 좋은 방법이 없는 상태에서 시행되는 이 부부간 체외 수정이 도덕적으로도 받아들여질 만한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자녀를 갖고 싶은 마음, 그리고 적어도 생명을 다음 세대에 전하고 싶은 마음은 확실히 의덕적 견지에서 보더라도 책임 있는 인간 출산의 필요 조건이다. 그러나 이런 좋은 의향이 반드시 부부 사이의 체외 수정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긍정적으로 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부부간 체외 수정이나 그 배아의 자궁 내 이전 과정은 그것 자체 안에서 도덕적 평가를 받아야 하며 전체적인 부부 생활이라든지 그 부부 생활에 따르는 성적 관계의 도덕성에 따라 판단해서는 안 된다.

 

통상 실시되고 있는 상태의 체외 수정이나 배아의 자궁 내 이전은 그것이 태아를 파괴하는 일에 관여됨으로써 앞서 언급한 인공 유산의 부당성에서와 같이 교리에 위배된다는 것은 이미 거론이 된 일이다. 물론 인간 배아가 파괴되어 죽게 되는 일이 없도록 온갖 노력을 다 하는 경우라 해도 이 부부간 체외 수정이나 배아의 자궁 내 이전은 임신을 위한 부부 행위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부부간 체외 수정이나 배아의 자궁 내 이전 기술은 그것이 직접 인공 유산을 하는 경우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갖는 이런 본질적인 문제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부간 체외 수정이나 배아의 자궁 내 이전은 이 기술을 사용하는 제3자의 기술적 확신과 실제적인 기술 능력만을 믿고 부부의 몸 밖에서 시행되는 일이다. 이런 기술은 의사나 생물학자에게 배아의 생명과 주체성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게 함으로써 기술이 인격적 인간의 기원과 운명을 지배하게 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생명에 대한 이런 기술의 지배야말로 부모나 자녀에게 공통적이어야 할 존엄성과 평등의 원칙을 위배하는 일인 것이다.

 

체외에서의 수태는 인위적으로도 수정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적 소산이다. 그러나 이런 수정은 사실상 성취되지도 않으며 부부 일치를 통한 성적 관계의 결실이나 그런 긍정적 희망의 표현도 아니다. 그러므로 부부간 체외 수정과 배아의 자궁 내 이전에 있어서는 아무리 그것이 사실상 불임 부부의 성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해도 “새로운 인간 생명 탄생을 위한 하느님의 협조자”로 활동한다는 면에서의 부부 관계로부터 태어나는 생명이 갖는 완전성을 결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이야말로 왜 부부의 사랑이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인간 출산의 가치 있는 유일한 조건인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배아를 죽여 유산시킨다거나 수음 행위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이른바 아주 단순하고 기술적으로 완벽한 부부간 체외 수정이나 배아의 자궁 내 이전 기술까지도 도덕적으로 부당하다고 보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 인간 출산이 갖는 타당하고 고유한 이런 존엄성을 해치기 때문인 것이다. 물론 부부 사이에서의 체외 수정이나 배아의 자궁 내 이전에는 부부 이외에서의 출산에 해당하는 그 모든 윤리적 부당성이 다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아이를 낳고 기르는 모든 일이 가정과 실제적 결혼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혼의 신성성이나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교회의 전통적 교리와 일치해서 볼 때 도덕적으로 교회는 부부간 체외 수정을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런 수정은 아무리 이 과정에서 인간 배아가 죽지 않도록 온갖 조심을 다한다 해도 그것은 그 자체로 부당하며 출산과 부부 일치의 존엄성에 반대된다.

 

이렇듯 부부 사이의 체외 수정이나 배아의 자궁 내 이전으로 이루어지는 임신 또한 옳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든지 세상에 일단 태어난 아이는 그를 전능하신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여 사랑으로 키워야만 한다.

 

[출처:교황청 신앙교리성, “인간 생명의 기원과 출산의 존엄성에 관한 훈령”(1987.2.22.), Origins 16: 40호(1987.3.19.), 704-707면.]

 

 

2. “가임과 불임”

 

교회는 또한 출산에서 생물학적 행위와 부부의 인격적 관계를 분리시키려는 그 반대의 태도도 거부합니다. 자녀는 부부 결합이 유기적 기능과 결합된 감각적 정서, 또한 그러한 결합을 불러일으키는 정신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을 실현함으로써 온전히 표현될 때 맺을 수 있는 열매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일치의 인간 행위 안에서 출산의 생물학적 조건들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출산의 의의나 부부 관계를 제외시키고 이러한 다양한 측면들을 분리하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그 자녀와 결합시켜 주는 관계는 유기적 사실에서 그 뿌리를 찾습니다. 또한 그러한 뿌리는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 주고 그러한 의지가 꽃을 피워 그들이 세상에 탄생시키는 존재를 통하여 참된 성취를 이루는 부부의 신중한 행위 안에서 더더욱 잘 드러납니다.

 

또한 헌신에서 비롯되며 그러한 행위에 수반되는 책임을 알고 받아들임으로써 어렵게 실현되는 이러한 자기 봉헌만이, 요구되는 모든 관심과 용기와 인내로써 자녀 교육의 임무를 추구할 수 있도록 보장하여 줍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임 능력은 육체적인 요소들을 초월하여 본질적으로 윤리적인 측면을 지니며, 이러한 윤리적 측면들은 이 주제가 의학적 관점에서 다루어지는 경우에도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학자나 의사가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어떤 문제에 접근할 때 엄격하게 과학적인 요소들에만 관심을 집중시켜 그러한 자료만을 토대로 해서 문제를 해결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실제로 적용할 때에는 제시된 방법이 한 개인과 그의 운명에 미치는 반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 행위의 위대함은 그 행위가 놓인 순간을 넘어서 생명의 전체적인 방향을 고려하고 절대자와 관계를 맺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일상 활동에 대해서도 그러한데, 부부의 상호 사랑으로 그들의 미래와 자손의 미래에 관련된 행위에는 얼마나 더욱 그러하겠습니까?

 

저는 또한 여러분이 인공 수정 방법을 고려할 때 이러한 관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새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한 수단은 그것이 지향하는 목적과 분리될 수 없는 인간적인 본질적 의미를 가지며, 이러한 수단이 존재의 본질에 새겨진 규범과 실재에 적합하지 않다면 그 목적 자체에 해를 끼치기 쉽습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도 지침을 펴내도록 요청받아 왔습니다. ‘체외’ 인공 수정 실험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그러한 방법들이 비윤리적이며 절대 정당하지 못한 것으로 거부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지키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인공적 정자 주입’(artificial insemination) 또는 일상적인 의미로 이른바 인공 수정이 제기하는 다양한 윤리적 문제들에 관련해서는 이미 1949년 9월 29일 의사들에게 한 연설에서 제 생각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첫째, 그때 말씀드린 것과 관련하여 여기서는 그때 내렸던 결론을 다시 말씀드리는 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 “인공적 정자 주입의 경우, 매우 신중하게 유보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배제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자연 행위를 도와주거나 자연 행위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그 고유한 목적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인공 수단들의 사용까지 반드시 금지하여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둘째, 인공 수정이 점점 더 널리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또한 지금까지의 가르침에 관하여 퍼지고 있는 잘못된 견해들을 바로잡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덧붙입니다.

 

인공 수정은 배우자들이 혼인 계약으로 획득한 권리, 말하자면 자연스러운 부부 행위를 통하여 그들의 자연스러운 성적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권리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혼인 계약은 그들에게 인공 수정의 권리까지 주지는 않습니다. 인공 수정의 권리는 어떤 식으로도 자연스러운 부부 행위에 대한 권리로서 표현될 수 없으며 그러한 권리에서 이끌어 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인공 수정의 권리를 혼인의 주된 ‘목적’인 ‘자녀’에 대한 권리에서 이끌어 낼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혼인 계약은 이러한 권리를 주지 않습니다. 혼인 계약은 ‘자녀’가 아니라, 새 생명을 낳을 수 있으며 이러한 목적을 지향하고 있는 ‘자연스러운 행위’를 그 목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공 수정은 자연법에 어긋나며 정의와 도덕성에 위배된다는 것도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출처:교황 비오 12세, “가임과 불임”(1956.5.19.), The Human Body:Papal Teachings, 387-390면.]

 

 

정리

 

거룩한 혼인으로 맺어진 부부는 무엇보다도 그들 행위의 배타성과 일체성 안에서 부부애, 부부애에서 보여지는 일치의 의미, 그리고 출산의 의미를 함께 실현하면서 상호 간의 자기 증여의 삶을 살아간다. 이는 두 개의 의미에서 나오는 하나의 징표인 것이다. 따라서 모든 출산 행위는 혼인 안에서 일어나야 하며 남편과 아내 사이의 정상적인 부부 행위의 결과이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교회는 배우자간이든 비배우자간이든 체외 수정을 일관성 있게 분명히 부정하고 있다.

 

특히 비배우자간 인공 수정은 혼인의 일치와 부부의 권위, 그리고 부모에게 합당한 올바른 사명에 위배됨은 물론 혼인 안에서 임신되고 그 안에서 성장하고 세상에 나오도록 부여받은 태아의 권리에도 명백히 위배되는 행위이다. 이러한 방법은 태아들의 권리, 곧 부모 자식 간의 근본적인 관계를 박탈하는 것이며 결국에는 태아의 인격적인 주체로서의 성숙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또한 교회는 체외 수정과 직접적인 관련성을 갖고 있는 ‘대리모’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대리모는 모성적 사랑의 의무와 부부간의 정절, 그리고 책임 있는 모성으로서의 의무를 객관적으로 다하지 못한 것이 된다. 이러한 행위는 아이들의 권리와 존엄성을 침해하는 것이며 동시에 가정에도 피해를 주어 가족의 구성 단위인 육체적 정신적 도덕적 요소의 분열을 초래한다”(교황청 신앙교리성, “인간 생명의 기원과 출산의 존엄성에 관한 훈령”, 「사목」 112호, 132면).

 

어쨌든 교회가 인공 수정과 체외 수정들의 인공적인 출산 기술에 대해서 깊은 우려를 표명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인간 생활 안에서의 인간성에 대한 인식, 인간 존재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의미, 성적인 인간 조건, 그리고 전·후 세대 간의 관계가 무시될 수 있다는 점이다.

 

교황 바오로 6세는 회칙 「인간 생명」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교회는 어떠한 부부 행위이든지 인간 생명을 출산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교회의 교도권이 가끔 설명해 온 이런 교리는 일치의 의의와 출산의 의의를 결부시키는 불가분의 연관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두 가지 의의는 모두 부부 행위 속에 내포되어 있으며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므로 인간이 고의로 이것을 파괴할 수는 없다”(11-12항 참조).

 

1) 부부 외 인공 수정 또는 출산이라는 용어는, 이 훈령에서 적어도 어느 한 편이 혼인으로 결합된 배우자가 아닌 증여자에게서 채취한 생식 세포를 이용, 인공 수태를 얻기 위하여 사용하는 기술을 의미한다. 이러한 기술은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 부부 외 체외 수정 및 배아 자궁 내 이전:적어도 어느 한 편이 혼인으로 결합된 두 배우자가 아닌 증여자로부터 채취한 생식 세포들을 체외에서 접합시켜 인간을 수태시키는 데에 사용되는 기술.

 

② 부부 외 인공 정자 주입:남편이 아닌 증여자에게서 미리 수집해 놓은 정자를 여자의 생식 경로에 주입하여 인간을 수태시키는 데에 사용하는 기술.

 

2) 부부간 인공 수정 또는 출산이라는 용어는, 이 훈령에서, 혼인으로 결합된 두 배우자의 생식 세포를 이용, 인간을 수태시키는 데에 사용하는 기술을 의미한다. 부부간 인공 수정은 두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① 부부간 체외 수정 및 배아 자궁 내 이전:혼인으로 결합된 두 배우자의 생식 세포들을 체외에서 결합시켜 인간을 수태시키는 데에 사용되는 기술.

 

② 부부간 인공 정자 주입:남편으로부터 미리 수집해 놓은 정자를 부인의 생식 경로에 주입하여 인간을 수태시키는 데에 사용되는 기술.

 

 

“생명 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안”(가칭)에 대한 천주교의 입장

 

 

1) 지난 9월 23일 보건복지부는 “생명 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안”(가칭)을 입법 예고하였다. 최근 몇 년간 생명 과학 분야의 눈부신 발전과 함께 야기된 생명 윤리와 안전에 관한 제문제는 책임 있는 생명 과학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도 관련법이 조속히 제정되어야 할 당위성을 제기하였고, 이에 우리 천주교는 여러 시민 단체와 연대하여 여러 경로를 통해 조속한 생명 윤리와 안전을 보장하는 법 제정을 촉구하여 왔다. 이러한 때에 정부가 늦게나마 입법 의지를 표명한 데에 대해서는 일단 환영하지만, 막상 입법 예고된 법률안(이하 법안)의 내용을 들여다볼 때에 기대보다는 실망과 함께 걱정이 앞선다. 생명을 바라보는 시각과 수준이 지나치게 상업적이고 경제적인 논리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입법 예고된 법안의 명칭은 “생명 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안”(가칭)이지만, 그 내용은 생명 윤리와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2) 법안은 지금까지 생명 윤리와 관련하여 사회 각 분야에서 가장 큰 의견 차이를 보여 왔던 인간 배아 복제와 종간 교잡 행위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지만, 대통령이 이를 허용할 수 있다는 예외 규정을 둠으로써, 사실상 이들 행위를 허용하고 있다는 여지를 남기고 있다. 생명인 인간 배아의 지위에 대한 사회 각 분야의 견해를 모두 수용하려는 고심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지만, 인간의 생명은 그 존재의 첫 순간인 수정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윤리적 진리는 어떠한 인간적인 합의로도 변경될 수 없다는 점에서 예외 규정은 반드시 삭제되어야 한다.

 

3) 이 법안은 인간 생명인 배아를 마치 물건처럼 취급하고 있다. ‘생산’, ‘이용’ 등의 단어를 사용하면서 인간 생명을 생물학적 재료의 수준으로 격하시키고 나아가 하나의 도구라는 측면을 부각시킴으로써 생명 윤리법의 역할보다는 생명 공학의 불건전한 진행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질병 치료나 줄기 세포의 획득을 위해 인간 생명체인 배아까지도 파괴할 수 있다는 논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 따라서 임신의 목적으로 생산되어 그 결과로서 존재하는 잔여 배아의 파괴를 의도하는 연구나 실험이라면 마땅히 금지되어야 한다. 잔여 배아도 당연히 인간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이 법안은 배아도 생명체라는 진리를 옹호하지 못하는 비겁함을 드러내고 있으며, 배아를 이용하여 상업적 이익을 도모하는 사람들의 편을 들어주고 있다. 아울러 이 법안은 대한민국의 미래는 생명 공학 산업의 발전에 달려 있다는 논리에 발목이 잡혀 생명을 경제적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길을 앞장서 열어 놓고 있다. 우리는 결코 질병이나 난치병의 치료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나 질병 또는 난치병을 치료 하는데 하나의 생명을 또 다른 생명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시도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분명한 입장이다.

 

4) 이 법안은 실질적인 내용을 다루는 심의 및 자문 기구로서 국가 생명 윤리 자문 위원회의 구성을 명시하는데 이는 이 법안의 중요성에 비해 그 기능과 역할을 상당히 축소시키는 부분이다. ‘자문’이라는 용어가 지닌 한계성은 말 그대로 자문에 불과할 뿐이다. 이 위원회가 명실공히 제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심의뿐만 아니라 의결권까지 부여되는 국가 생명 윤리 위원회가 되어야 한다.

 

5) 이 법안의 목적은 의심할 여지없이 생명 과학 분야에서 드러나고 있는 무책임한 반생명, 반윤리적 행위들을 경계하면서 책임 있는 윤리 및 안전 의식을 확보하는 데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생명 윤리법은 그 목적에 걸맞게 생명의 존엄성 존중과 보호라는 기본 정신을 펼쳐 보이는 내용들로 구성되어야 한다. 인간의 생명을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로 인식하기보다는 하나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법안이라면, 이는 오히려 생명 윤리를 거스르는 법안과 다름없다. 특히 그 자체로 생명인 인간 배아는 당연히 법을 통해서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확고한 입장이다. 자기 결정권이 없는 약한 생명을 임의로 처리할 수 있다는 사고 방식은 일종의 폭력이며 기득권자의 횡포이다.

 

2002년 9월 25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생명윤리연구회

 

[사목, 2002년 11월호, 이창영(본지 주간·주교회의 사무차장 · 신부)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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