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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생명] 안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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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6 ㅣ No.323

안락사

 

 

1. “생명의 복음”

 

64. 인생 여정의 다른 한 쪽 끝에서 사람들은 죽음의 신비와 마주치게 됩니다. 오늘날 의학 발달의 결과로, 그리고 흔히 초월성에 대해 닫혀 있는 문화적 상황 속에서, 죽음의 체험은 새로운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삶의 가치를 오로지 쾌락과 안락을 가져다주는 한도 내에서만 평가하는 경향이 만연한 이 때에 고통은 참을 수 없는 좌절처럼 보이며,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벗어나야만 할 것처럼 보입니다. 아직도 새롭고 흥미로운 경험을 향해 열려 있는 삶에 갑자기 개입하는 죽음은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일단 삶이 고통에 찬 것이 되고, 앞으로 더 큰 고통을 당해야 하기 때문에 삶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여기게 되면 죽음은 ‘당연한 해방’이 됩니다.

 

…… 오늘날 과학과 의술은 고도로 발달된 첨단 장비와 체계를 이용함으로써 전에는 치료가 불가능했다고 생각했던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게 되고, 또 고통을 감소시키거나 없앨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지극히 허약한 상태에서도 생명을 유지하고 연장할 수 있게 되었으며, 기초적인 생물학적 기능들이 갑자기 무너진 환자들을 인공적으로 소생시킬 수도 있게 되었고, 신체 기관들을 이식에 쓸 수 있도록 만드는 특별한 과정들을 이용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안락사에 의지하려는 유혹이 점차 커지고 있습니다. 안락사란 죽음을 조절하여, 정해진 시간 이전으로 앞당기는 것이며, 자신의 생명이나 타인의 생명을 ‘편안하게’ 끝맺게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논리적이고 인간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안락사를 잘 살펴보면 무의미하고 비인간적인 행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죽음의 문화’가 지니고 있는 더욱 위급한 증상 중의 하나와 부딪치게 됩니다. 이 문화는 무엇보다도 부유한 사회 안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효율성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태도를 지니고 있고, 노인과 장애인들의 수가 늘어나는 것을 참을 수 없고 또 지나치게 짐스러운 일로 여깁니다.

 

65. 안락사에 대해서 올바른 도덕적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먼저 명확한 정의를 내리는 일이 필요합니다. 엄밀한 의미의 안락사란 모든 고통을 제거하려는 목적으로, 그 자체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죽음을 야기하는 작위 또는 부작위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안락사’를 판별하는 기준은 의향과 사용된 방법에서 찾아야 합니다.”

 

안락사는 이른바 “과도한 의학적 치료”를 그만두는 것과는 반드시 구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상되는 어떠한 결과에도 부적절하거나 또는 환자나 가족에게 지나친 부담을 주는 것들이기 때문에 더 이상 환자가 처한 실제적인 상황에 맞지 않는 의학적 치료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분명히 죽음이 임박하고 피할 수 없을 때, 사람은 양심 안에서 “비슷한 경우의 환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정상적인 간호를 중단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결과가 불확실하고 큰 부담이 되는 생명의 연장밖에 보장하지 못하는 종류의 치료 행위들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돌보아야 하고, 자신을 남들이 돌보도록 허락해야 할 도덕적인 의무가 존재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이 의무는 반드시 구체적인 상황을 고려해야만 합니다. 사용 가능한 치료 방법들이, 호전될 가망성을 위해서 객관적으로 적절한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하거나 또는 부적절한 수단들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자살이나 안락사와 다릅니다. 그것은 오히려 죽음 앞에서 인간의 조건을 받아들인다는 표현입니다.

 

[출처: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생명의 복음”(1995.3.25.), Origins 24: 42호(1995.4.6.), 712면.]

 

 

2. “안락사에 관한 선언”

 

인간 생명의 가치

 

인간 생명은 모든 선의 근본이고, 모든 인간 활동과 모든 사회의 필연적인 근원이고 필요 조건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생명을 신성한 그 무엇으로 존중하여 아무도 생명을 마음내키는 대로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신앙인들은 생명 안에서 더욱 위대한 그 무엇, 곧 이를 보전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부름 받은 하느님 사랑의 선물로 본다. 이러한 고찰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1) 무고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예외 없이, 그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고 근본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또한 극도의 중죄를 짓는 것이다.

 

2)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자기 생명을 이끌어 가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 생명은, 오직 영원한 생명 안에서 온전한 완성을 찾는 것이지만 이미 이 곳 지상에서 열매를 맺어야 할 선으로서 개인에게 맡겨진 것이다.

 

3) 고의로 자기 자신의 죽음을 초래하거나 자살하는 것은 살인과 마찬가지로 부당한 일이다. 인간의 편에서 이러한 행위를 하는 것은 하느님의 주권과 사랑의 계획에 대한 거절로 간주된다. 더 나아가서 자살은 또한 자기 사랑의 거부이고 생존 본능의 부정이며, 이웃과 여러 공동체 또는 전 사회에 대한 정의와 사랑의 의무를 회피하는 것이다. 비록 그러한 책임이 경감되거나 완전히 면제될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나는,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심리적인 요인들이 종종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다.

 

그러나 더욱 숭고한 목적을 위하여, 곧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의 구원 또는 형제에 대한 봉사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치거나 위험 앞에 자기를 내놓는 자기 생명의 희생(요한 15,13 참조)과 자살은 명확하게 구별하여야 한다.

 

안락사

 

안락사의 문제를 적절히 다룰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그 용어를 정의할 필요가 있다. 어원으로 말하자면 고대에 안락사란 말은 심한 고통이 없는 ‘편안한 죽음’을 뜻했다. 오늘날에 와서는 그 말의 본래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의 고통이나 단말마의 고통을 없애려는 어떤 의학적 개입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또한 가끔 일찍 생명을 서둘러 폐지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 결국 극도의 고통을 종식시키기 위한 ‘안락 살해’ 또는 가족과 사회에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울 수도 있는 정신 질환과 불치병에 걸린 비정상아를 여러 해 동안 계속되는 비참한 생명의 연장에서 구제하기 위한 ‘안락 살해’를 뜻하는 더욱 특수한 의미로 ‘안락사’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 문서에 사용되는 용어가 뜻하는 바를 분명하게 언급할 필요가 있다.

 

안락사는 모든 고통을 제거하기 위하여, 저절로 또는 고의로 죽음을 초래하는 행위 또는 부작위(不作爲)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안락사의 관계 조건은 사용된 방법과 지향 의지에서 인지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 무엇도 무후한 인간 존재, 갓 잉태된 태아든 좀 자란 태아든, 어린이든 어른이든 노인이든 불치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이든, 죽어가는 사람이든 결코 인간의 살해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고히 천명한다.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든 아니면 자기가 돌보는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든, 어느 누구도 이러한 살인 행위를 요청할 수 없고, 또 남자든 여자든 명시적으로나 함축적으로 거기에 동의할 수 없다. 어떠한 권위라도 그러한 행위를 합법적으로 권고하거나 용인할 수 없다. 그것은 하느님의 법을 침해하는 문제이고 인간 존엄성에 대한 모욕이며 생명을 거스르는 범죄요 인간성에 대한 공격이기 때문이다.

 

오래 지속되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 때문에, 극히 개인적인 또는 기타의 이유 때문에 죽음을 요청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죽음을 얻어낼 수 있다고 사람들이 믿게 되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러한 경우에 개인의 죄의식이 감소되거나 완전히 없어진다 하더라도, 비록 선의에서일지라도 양심이 저지른 판단의 오류가 결코 그러한 살인 행위의 본질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 행위 자체는 언제나 거부되어야 할 것이다. 흔히 죽여달라고 하는 중환자들의 간청이 안락사에 대한 진정한 원의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사실 그것은 거의 언제나 도움과 사랑을 구하는 고뇌에 찬 간원의 경우다. 의학적인 간호 외에 병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 부모, 자녀, 의사, 간호사 등 가까운 모든 사람이 병자를 에워쌀 수 있고 또 감싸 주어야 하는 인간적이고도 초자연적인 온정이 필요한 것이다.

 

[출처:교황청 신앙교리성, “안락사에 관한 선언”(1980.5.5.), Vatican Council II, 제2권, 510-516면.]

 

 

3. “생명과 죽음의 신비”

 

…… 과학자들과 의사들은 그들의 능력과 열정을 생명을 위한 봉사에 쏟도록 부름받습니다. 그들은 어떤 경우에도, 어떤 이유로도 생명을 억압해서는 안 됩니다. 신자든 비신자든, 인간의 지고한 가치에 대한 의식이 있는 모든 사람은, 안락사는 누구도 어떤 식으로도 협력하거나 동의해서도 안 되는 범죄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자들과 의사들은 자신을 생명의 주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생명을 다루는 기술을 가진 봉사자로 여겨야 합니다. 인간을 창조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으며 부활의 선물로 인간 육신을 구원하신 하느님만이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4. 환자들이 병을 회복하는 것을 돕고 그들이 존엄을 잃지 않으면서 고통을 견뎌낼 수 있도록 치료를 하는 것은 의사와 의료 종사자들의 임무입니다. 환자의 병이 나을 수 없는 경우에도 치료를 멈추어서는 안 되며, 환자들의 상태가 어떠하든 적절한 간호를 해 주어야 합니다.

 

유용하고 합법적인 형태의 치료 가운데에는 진통제도 들 수 있습니다. 일부 환자들은 진통제 없이도 고통을 견딜 수 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경우 고통은 정신적 의지를 떨어뜨립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진통제 사용을 고려할 경우에는 1980년 6월 26일에 발표된 신앙교리성의 선언에 담긴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의식 불명 상태에 빠지게 하는 진통제 사용에는 특별한 주의가 요구됩니다. 환자는 자신의 도덕적 의무와 가족의 의무를 다해야 할 뿐 아니라, 맑은 의식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만날 준비도 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출처: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생명과 죽음의 신비”(1985.10.19-21.), Origins 15:25호, (1985.12.5.),  416면.]

 

 

4. “안락사 반대”

 

이러한 가르침에 비추어 신자들은 모든 무고한 생명의 무형성을 더욱 깊이 깨닫고, 안락사를 합법화하려는 모든 시도에 맞서고 낙태에 지속적으로 반대함으로써 만연해 있는 문화적 환경의 억압과 유혹들에 맞서 확고한 증언을 하여야 합니다.

 

비인간적인 안락사 지지자들

 

그러나 사회적으로 점점 더 안락사를 수용하는 분위기 속에서 언제나 우리는 주변에서 실제적인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낙태의 경우에 대해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그리스도교의 메시지와 올바르게 이해된 인간 존엄과 대립되는 생명관에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안락사에 대한 윤리적 비난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이를 이해시킬 수도 없습니다. 

 

흔히 볼 수 있는 문화의 수많은 부정적인 특징 가운데 일부만 살펴보아도 이를 충분히 증명할 수 있습니다.

 

- 인간 생명을 그 근원에서 저버리는 경향.

- 개인의 생명을 풍요로움과 즐거움을 주는 것 정도로만 여기는 경향.

- 물질적 행복과 즐거움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고통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해야 하는 절대 악으로 보는 시각.

- 죽음은 더 이상 삶의 행복을 누릴 수 없는 생명의 부조리한 끝, 또는 더 많은 고통을 안겨 줄 뿐인 ‘의미 없는’ 생명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여기는 태도.

 

하느님을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은 자기 자신과 제멋대로 세워진 사회의 법들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니게 됩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태도가 사람들 사이나 사회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곳에서는, 삶이 고통이나 심각한 장애만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자신의 또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품위 있게’ 끝내는 것이 논리적이고 ‘인간적’인 것처럼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불합리하며 비인간적인 일입니다.

 

그러한 사회 문화적 환경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은 단순히 안락사를 비난하거나 안락사가 확산되고 합법화되는 것을 저지하는 단순한 노력에 그치지 말고 그 이상의 투신을 하여야 합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들이 우리 문화의 일부 양상들의 비인간적인 면을 똑바로 보고 그 때문에 가려진 가장 소중한 가치들을 재발견할 수 있도록 어떻게 도울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수단으로서 낙태에 이은 안락사의 등장은,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미래를 향한 우리 사회의 여정에서 올바른 문화를 선택하라는, 모든 믿는 이와 선의의 사람을 향한 간절한 호소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사회의 방향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결정들이 이루어지는 국가 또는 국제 차원의 모든 기관에서 가톨릭 신자들의 존재와 결단력 있는 활동이 특히 중요합니다.

 

또한 여론 형성에 매우 중요한 사회 커뮤니케이션 매체 분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생활 방식만으로도 그리스도교적 생명의 개념을 강화할 수 있으며 이에 상반된 개념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인식을 널리 알리는 것 또한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자신의 손길이 닿는 모든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도움을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 향락주의나 소비주의, 또한 어떤 생활 방식의 근저에 있는 다른 개념들을 무비판적이고 실제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때때로 나타나는 신앙과 생명 사이의 이분법을 인식하도록 합니다.

 

- 그리스도교에서 바라보는 생명과 고통과 죽음에 관한 참된 의미와 각 개인이 하느님께 책임을 가지는 소명이자 사명인 생명의 참된 가치를 발견하도록 합니다.

 

- 그리스도인의 굳센 의지로써 시류에 맞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이러한 개념들에 대하여 각자가 개인으로서, 가정의 구성원으로서, 직업인으로서 존재성을 다시 확인하도록 합니다.

 

[출처: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안락사 반대”(1984.9.6.), The Pope Speaks 29, 44호, 1984년, 353-354면.]

 

 

정리

 

안락사(Euthanasia)라는 단어는 본래 희랍어 ‘eu’(아름다운, 기쁜)와 ‘thanatos’(죽음)의 합성어로서 “아름답고 존엄한 죽음” 또는 “고통 없이 빠른 죽음”, “잠자는 것과 같은 평화로운 죽음”, “가벼운 죽음”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어원적으로 풀이해 보면 고대의 안락사(Euthanasia)라는 단어는 심한 고통이 없는 ‘편안한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그 말의 본래의 의미를 잃고 그저 질병의 고통이나 단말마적 고통을 없애려는 어떤 의학적 개입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안락사라는 말은 고통을 없애기 위한 안락 살해(安樂殺害) 또는 오랜 동안의 고통스런 생명의 연장에서 해방시켜 주기 위한 안락 살해(安樂殺害)를 뜻하는 특수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한마디로 오늘날의 안락사라는 말은 생물학적 생명이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서 의식이 없이 인격이 소멸된 경우나 또는 고칠 수 없으며 참을 수 없는 신체적 고통으로 사회 생활이 의미 없고 불가능하게 되어 삶의 의미조차 없는 정신적 존재가 소멸된 경우, 또는 어떤 신체적 결핍 때문에 국가나 주변 사람들에게 상당한 부담을 주게 되어서 공동체적 존재로서의 자격이 상실된 경우에는 죽음을 앞당기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합리주의적 사상이 발상이 되어서 직접 행동으로 실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안락사라는 말은 과거와는 달리 “인간 생명이 불가역적인 죽음의 방향에서 인식되었을 때 합리주의적 발상에 의해 이를 인위적으로 단축시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인간의 행위”라고 정의해 볼 수 있겠다. 이러한 정의를 근거로 오늘날에는 의학적 측면에서 좀 더 안락사를 세분화시켜 물리적 또는 화학적 방법으로 직접 죽음에 이르게 하는 적극적 안락사와 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일반 주지(周知)의 의료 행위를 환자에게 시행하지 않아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소극적 안락사로 구분하고 있다.

 

가톨릭 교회는 인간 생명의 가치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어느 누구도 그 무엇도 무후한 인간 존재로서, 태아이든 유아이든, 어린이든 어른이든 노인이든, 불치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이든 죽어 가는 사람이든 결코 인간의 살해를 용납할 수 없다”(교황청 신앙교리성, “안락사에 관한 선언”(1980. 5.5.) 중에서).

 

따라서 가톨릭 교회는 1) 죽음 직전의 환자에게 사랑으로 베푸는 행위, 곧 수분 공급이나 간호, 보편적인 투약이나 임종자와의 긴밀한 대화 등은 절대로 안락사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2) 또한 환자의 조건으로 보아 이미 필요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특정한 의료 행위를 그만 두는 것(전통적인 표현으로 말하면 ‘예외적 용법을 포기하는 결정’이다)은 환자의 죽음을 방관하는 결정이 아니라 사려와 분별에 근거한 합리적인 과정에 따라 적절하게 기술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가르친다. 나아가 가톨릭 교회는 3) 환자의 생명을 단축시킬 수도 있는 위험이 있지만 환자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하는 행위는 의사의 소명에 속하며, 비단 질병을 치료하거나 생명을 연장하는 것만이 아니라 또한 환자를 돌보아 주고 고통을 덜어 주는 것도 의사의 소명이라 가르친다. 그러므로 위의 세 가지 경우는 안락사가 아니라 품위 있는 인간적 죽음 또는 존엄사(Death of Dignity)로 이해하여야 한다.

 

무엇보다도 가톨릭 교회는 인간 생명의 가치에 대한 절대성과 하느님의 선물로서 주어진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가르치고 일깨워 준다. 그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안락사’라는 말의 엄밀한 개념 정립이 시급히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곧 본래의 참뜻인 ‘평안한 죽음’이 ‘안락 살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남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안락사라는 말이 “특수한 행위에 의하여 환자의 생명을 끝내게 하는 것”으로 사용되어야 하고, 그러한 의미에서 안락사는 그것이 적극적인 의미에서든 소극적인 의미에서든 결코 용인될 수 없는 행위임을 확고히 가르친다.

 

[사목, 2002년 10월호, 이창영(본지 주간 · 주교회의 사무차장 · 신부)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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