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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생명] 의학과 철학의 내면적 상관성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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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6 ㅣ No.358

醫學과 哲學의 內面的 相關性에 關한 硏究

 

 

I. 序論

 

醫學은 醫師나 의료종사원 만의 專有物은 아니다. 의학은 본래 다른 학문에 대해서 폐쇄적이거나 배타적일 수 없는 것이다. 의학은 이제 治療醫學으로만 국한될 수 없다. 오늘날 豫防醫學은 의학의 중심이 되어가고 있다. 예방의학은 보다 적극적으로 인간의 건강증진을 위하여 自然保全, 社會安定, 世界平和問題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의학은 사회의 전반적인 분야와 깊은 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철학, 특히 인간학과 윤리학과 相關이 깊다. 왜냐하면 인간은 적절한 心身의 節制와 활동과 휴식없이는 건강을 유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특히 질병을 치료할 수 없으며, 또한 心身健康 유지의 필수조건이 되는 공해방지나 자연보전은 좁은 의미의 치료의학의 범위를 벗어나 넓은 의미의 생의학적 윤리의 문제이자 사회윤리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대의학은 자연과학 뿐만 아니라 정신과학 까지도 망라한 종합과학이 될 수 밖에 없다. 의학이 종합과학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의학적 철학이 정립되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현대 서양의학의 문제점을 살펴보기로 하자.

 

西洋醫學은 근세이후 오늘날까지도 합리적인 實證主義에 기초하고 있다. 서양의학은 고도로 발달한 分析實驗에 의거해서 치료면에서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왔으나, 반면에 실증주의에 따르는 부작용도 무시할 수 없다. 서양의학은 자연과학에 대한 盲信 때문에 의학이 인간실존의 문제를 다루는 人間學에서부터 이탈되어갔다. 주지하다시피 인간학(anthropologia)이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하고 퍼뜨린 사람들은 16세기말 옷토 카스만(Otto Casmann, 1562-1607)을 비롯하여, 도방똥(Daubenton, 1716-1860), 블루멘바흐(J.F.Blumenbach, 1752-1840), 죔메링(Sommering, 1755-1830) 등의 의사들이었다. 의학이 仁術이며 인간학이라는 전통은 서양에서도 멀리 희랍의 히포크라테스에게까지 소급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의학의 관심과 대상은 근대화과정에서 고통받고 신음하고 앓고 있는 사람을 무시하고 질병 자체만의 연구에로 옮겨갔다. 그래서 지금도 서양의학은 대체로 여러가지로 고통받고 있는 인간의 실존적 상황을 무시하고 있다. 가령 여러가지 기계검사는 병의 치료보다는 병의 진단을 위해, 심지어는 의사의 지적 호기심을 위해 행해지는 경우가 많다.

 

현대의학은 물질적. 기술적 문제에만 쏠려있기 때문에, 의학은 마치 藥物療法이나 外科的 手術이 그 전부인 것처럼 오해되고 있다. 醫療器機의 무리한 增設과 新藥開發의 과도한 투자는 의료비를 가속도로 증가시키고 있는데 의료비의 증가는 많은 부담을 주며 새로운 고통의 원인이 되고 있다.

 

현대 서양의학은 임상분야를 지나치게 細分하고 있다. 이러한 임상전문분야의 세분화된 환자의 치유 보다는 전문적인 기술진단에 편중되고 있다. 그래서 의하들은 全人的 치료를 소홀히하고 있다. 이러한 결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家庭醫學과 心身醫學 등이 대두되고 있으나 아직도 크게 호응을 받지 못하고 있다.

 

현대사회에 만연되고 있는 不信風潮는 의학의 진로에도 엄청난 피해를 주고 있다. 상당수의 의사들은 환자의 약점을 이용하여 돈을 갈취하는 지능적인 고등범죄인으로 의심받기도 한다. 아뭏든 의료분규가 잇달아 발생하며, 환자 및 그 보호자들의 의사에 대한 불신은 진료업무에도 큰 지장을 주고 있다. 그래서 의사 및 看護師(간호원)들은 그들 자신의 自救策으로 그들 스스로 만든 윤리강령 및 윤리헌장 등을 제창하고 있고 의학윤리교육의 중요성을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그 힘은 아직 매우 미약한 실정이다.

 

상술한 현대의학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의학과 철학의 대화는 요청된다. 철학과 의학은 본래 내면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철학과 의학은 본래 내면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철학과 의학간의 내면적 결합의 필요성은 최근에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특히 1970년부터 매년 개최되고 있는 "철학과 의학"을 주제로 한 국제학술대회라든가, 철학과 의학간의 대화에 전념하는 몇개의 독립된 전문잡지, 예컨대 "The Journal of Medicine and Philosophy", "The Journal of Medical Ethics", "Ethics in Science and Man" 등은 이 문제의 중요성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의학자인 엔겔하르트(H. T. Engelhardt)와 스피커 (S. F. Spicker)가 共編한 '철학과 의학 총서' 20권, 철학자인 가다머(H. G. Gadamer)와 의사인 포글러(P. Vogler)가 공편한 "새로운 人間學(전7권)"도 철학과 의학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약 1백년 전만 하더라도 의학교육은 철학시험 (Philosophicum)을 필수과목으로 했으나, 그후 의술을 한갖 "생물학의 기술"로 만들기 위해서 철학시험을 물리시험 (Physicum)으로 대체시켰다. 그러나 의사들에게도 出産, 死亡, 成長, 危機, 疾病, 困難, 도움과 치료에 대한 근본적 물음에 대한 해명이 요구되고 있다. 반면에 한때 "지혜의 교사"로 불리웠던 철학자들도 인식론, 논리학, 언어문제에 대해서만 주로 관심을 표할 뿐이고 삶의 실제문제와의 관련을 잃어버리고 위기에 빠졌으나, 철학자들에게도 삶, 죽음, 죄책감, 고통, 염려, 위기, 구원, 건강에 대한 물음에 대하여 원칙적인 답변을 할 것이 요구되고 있다. 그러므로 건강, 병, 염려, 도움, 평형의 상실, 치유와 치료에 대한 실존적 근본문제는 의학 뿐만 아니라 철학에서도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老衰現像과 결핍, 곤란, 삶의 위기, 죽는 것과 죽음은 철학자로 하여금 묻게 만들고 의사로 하여금 관심을 쏟게 만든다.

 

"철학적으로 교육을 받은 의사는 신을 닮는다"는 히포크라테스의 교단에서 흘러나온 이 말은 사실상 원칙적으로 현상학적 실존해명과 또 근본적인 세계지배에 대한 의학의 요청을 잘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종교, 교육, 산업, 정치 등 문화사의 거의 모든 분야가 의사의 사고, 지식과 행동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히포크라테스의 가르침 속에 담겨있는 진의가 근세 이후 거의 잊혀져가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호니크만(Honigmann)은 이렇게 말했다: "철학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 의사들에게서 최고로 완성된 것으로 인정받았던 히포크라테스의 선서의 의의에 대한 느낌은 지난 세기의 의학자에게서는 거의 완전히 잊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니체가 철학자들이 '진리'라는 말을 앞세우고 공리공론만을 논할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철학의 근본과제인 건강, 미래, 힘과 삶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한 것을 비롯하여 의학과 철학의 상호관계의 중요성을 知悉하고 있었던 많은 철학자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딜타이, 베르그송, 훗설, 하이데커, 쉘러, 플레스너, 야스퍼스, 바이힝거, 쿤(T. Kuhn) 등. 그들에게서는 심신성(Psychosomatik), 심리치료, 의학적 심리학의 근본문제, 육체와 심리의 관계, 신체와 사회의 관계들의 문제들이 "살아있는 의학"의 중심문제들이 되어있다. 우리는 여기서 논리학과 방법론의 문제, 병원학, 병인론(Pathogenese), 진단학의 인식론적 근본구조, 규범과 윤리학의 문제들이 토론의 중심점이 된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그래서 엔겔하르트(D. V. Engelhardt)는 이러한 사실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 불과 10여년전인 1960년대 전후에 사회학자들간에 방법론에 관한 논쟁이 제일 중요한 문제가 됐던 것처럼, 한때 스콜라 철학에서 보편론자와 唯名論者간의 논쟁에 필적할만한 방법론적 논쟁이 의학에서도 제기될 것이 기대된다."

 

우리는 철학과 의학간의 긴밀한 관계에 대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순수한 대화를 시도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철학적 인간학에서 의사들의 사고와 행동의 기본이 되는 요소들을 재발견할 수 있다. 텔렌바흐(H. Tellenbach)는 "의학의 철학에로의 복귀"를 주장하고 있다. 야스퍼스는 그의 "一般精神病理學"(Allgemeine Psychopathologie, 1913)에서 이미 심리적 이상성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방법론의 조항으로 삼았다. 그는 당시의 정신과의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현상학적 근본발단을 방법론적으로 문제삼았다. 쉬나이더(K. Schneider)는 "야스퍼스의 일반정신병리학의 발간 25주년을 즈음한 회고"라는 논문에서 이 책에 대해서 이렇게 평했다: "깔끔한 방법론적 사고와 개념사용은 의학자에게는 매우 드문 일이다. 그는 철학이 없었더라면 어떤 과학도 있을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철학을 논했다."

 

철학자가 육체, 고통, 염려, 죽음과 도움과 같은 근본현상 (Grundphanomenen)에 대해서 숙지할 것을 우리가 철학자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 처럼, 우리는 과학자들도 그러한 근본현상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말해줄 것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의학자인 비르(A. Bier)는 "원자, 질료, 에너지, 살기위한 투쟁, 선택, 자기보존, 삶, 병, 죽음, 이성과 같은 본질개념(Naturbegriff)을 이해하려는 자는 - 어떤 의학자도 이를 기피할 수 없지만 - 인식론적 태도를 취하기 마련이다"고 말하고나서 그는 의사들의 차원과의 생생한 교제를 철학자들에게 권유하면서, "나에게는 도대체 의학연구가 철학자들의 육성에도 아주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의사출신의 4명의 철학교수들, 분트(Wundt), 퀼페(Kulpe), 찌헨(Ziehen), 야스퍼스(Jaspers)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권고했다.

 

비르는 "의학에 관한 의사의 사고"라는 그의 논문에서 의사로서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와 경험을 다음과 같이 3가지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1. 경험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의사는 점점 사고의 결함을 깨닫게 된다. 이것은 의사로 하여금 적어도 철학의 입문과 논리학개론을 공부하게 만든다.

 

2. 세상일에 관심을 가지는 의학자는 자연히 교양있는 철학자와 교제를 하게 되며, 이때 특히 철학자들의 "예리한 형식적 사고"와 철학자들이 밝히는 세계관에 대해서 경의를 표현하게 되며, 이러한 만남으로부터 敎化된다.

 

3. 교양있는 의사는 哲學史에 정통하게 된다. 그런 의사는 플라톤, 칸트, 쇼펜하우어의 서적을 읽으며 현대의 生哲學에 친숙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비르는 임상의사로서 철학에 종사한다는 것은 연령과 관계됨을 자인하고, 의사가 실제로 시술하면서 이를 행하기 어려움을 자인한다. 그렇지만 비르는 19세기에 들어와서 철학이 王冠을 빼앗겼지만, 20세기에 들어와서 거의 모든 분야가 "철학에로의 귀환"을 확정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모든 과학은 철학에 뿌리를 가진다"고 말하면서 "만일 어떤 과학이 철학이라는 뿌리로부터 벗어나면, 그 과학은 枯死하고 만다"(Friedrich Paulsen의 격언)고 말했다.

 

우리는 이제 이로써 철학과 의학이 서로 내면적으로 관련되고 있다는 우리의 과제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의학을 철학적 인간학에서 그리고 철학을 의학적 인간학에서 탐구하는 것을 우리의 연구과제로 삼아볼 수 있을 것이다.

 

 

II. 醫學과 哲學의 內面的 相關性에 관한 史的 考察

 

오늘날 철학은 어떤 사람들에게서는 과학의 前段階에 불과한 것이라고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과학도 "전제없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자율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파이어아벤트(Feyerabend)는 이렇게 말했다: "과학은 과학철학 보다는 훨씬 더 神話에 가깝다. 과학은 인간이 발전시킨 많은 형태의 사고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무조건적으로 최우수한 것도 아니다. 과학은 어떤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위해서 이미 결정을 내린 사람들이거나 그 과학의 장단점을 검토해보지 않고서 함부로 수용한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만 우수한 것이다. 그러한 이데올로기를 인정하거나 배척하는 것은 개인에게 맡겨진 것이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와 과학의 분리를 우리가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아직까지 한번도 완전하게 실현시켜보지 못한 인류가 도달해야 할 유일한 기회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가 철학과 의학의 관계의 역사적 배경을 먼저 살펴보는 것은 적절한 일이라고 하겠다.

 

1. 西洋古代와 中世의 醫學哲學

 

히포크라테스(460 - 375)의 문헌에 나오는 "의사이면서 동시에 철학자인 사람은 신에 버금간다"는 말은 그 깊은 뜻을 잘 알지 못하면서도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올려졌는데, 이말은 아폴로 신이 의사로서 삶의 질서의 모범이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그래서 희랍사람들은 의술을 철학에, 또 철학적 지식을 실천적 의학에 도입할 수 있었다.

 

지그문트(G. Siegmund)는 "병의 본질에 대한 이론은 히포크라테스 이후 더 발전된 것이 없다. 히포크라테스는 건강의 본질에 대해서 근본적인 통찰을 할 수 있었는데, 그의 통찰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해주며 가장 효과적이다"라고 말하였다. 아무튼 히포크라테스의 연구가들인 무흐(H. Much), 비르(A. Bier), 뷔휘너(F. Buchner) 등은 철학은 의학의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의 모범을 히포크라테스라고 본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들의 저술에서 의학에 대한 철학적 관심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건강, 병, 의사의 활동, 실천문제로서의 의학에 관한 것들을 그들의 윤리학과 정치학의 근본과제로 論究했다.

 

이시도르 세빌라(Isidor Sevilla, 560 - 630)는 의학을 人文科學의 領域 안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았다. 그는 그의 "語源學(Etymologiae)"에서 의학을 두 영역으로 나누어 보았다; 健康保護(tuitio corporis)와 疾病治療(resturatio salutis). 의술의 대상은 내면적 病과 外傷인데, 의학은 中庸이라는 이름을 가진다. 의학은 모든 종류의 병에서 알맞음(a modo)을 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의사는 질병치료에서처럼 人生살이에서도 전문적인 조정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의학은 "제2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갈렌(Galen, 129 - 199)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健康保存에 관하여"(De Sanitate tuenda)라는 책에서 포괄적인 건강론을 펼쳤는데, 이 내용은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중세기말에 이르러서 파라셀수스(Parcelsus, 原名 Theophrastus von Hohenheim, 1493 - 1541)는 의학에 자연철학적 개념을 도입했다. 그는 인간학적 전제를 가지고서 의사를 인간의 전문적 해석자로 보았다. 그는 인간의 육체를 실마리로 해서 인간을 "小宇宙"로 보는 유기체의 인식에 이르렀다. 그는 의사가 되려면 철학, 천문학, 물리학, 연금술을 공부해야 하며, 철학은 모든 원리와 기술의 전제가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와서 의학이론을 가르치는 학교에서 고전적 平衡槪念이 醫術의 실용적 기술적 개념에 부딪혀 밀려나기 시작했다. 베살(Vesal, 1543), 윌리암 하베이(William Harvey,1628)의 글에서 자연철학적 혁신이라는 표현이 발견된다.

 

아무튼 서양의 古中世醫學은 자연철학의 내용(Kontext)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었다.

 

2. 西洋의 近世 以後의 哲學과 醫學의 關係

 

계몽주의 시대의 인간학적 의학의 배경에는 라이프니쯔(Leibniz, 1646-1746)가 보편론자로서 이룩해놓은 人間論(Menschenkunde)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라이프니쯔의 人間學은 精神史의 變革이 歷史的 思考가 되도록 천천히 예비해 놓은 潛在的 低流라고 볼 수 있다"고 뮐만(Muhlmann)은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자연주의자로서 행세했던 탐구가들, 특히 라이프니쯔와 친교를 맺고 지속적으로 학문적 교류를 나누었던 의사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그 시대의 體系家이며 綜合論者들로 다음과 같은 사람들을 꼽아볼 수 있다. 영국의 히포크라테스라고 불리우는 시든햄(Thomas Sydenham, 1624-1689), 임상교육의 창시자라고 불리우는 뵈르하브(Hermann Boerhaave, 1668-1738), "合理的 體系로서의 醫學"(I-IX, 1718-1740)과 "참된 醫學理論"을 쓴 쉬탈(G. E. Stahl, 1660-1734), 현대의 생물학 연구의 기초를 놓은 할레르(A. von Haller, 1708-1777) 등.

 

18세기의 과학적 生理學과 病理學의 體系的 試圖의 배후에는 칸트의 영향이 작용했다. 칸트는 주지하다시피 모든 철학하는 것을 인간학의 근본문제로 환원시켰다. 칸트에게서 인간은 그 자신의 최종목적임으로 가장 중요한 대상은 인간의 세계 속에 놓여있다. 인간에 대한 지식의 체계적 학문과 인간학은 병리학적인 인간에 관한 지식(자연이 인간으로부터 만든 것에 대한 탐구)과 실용적인 인간에 대한 지식(인간이 자기자신을 만들거나 만들 수 있거나 만들어야 하는 것에 대한 탐구)으로 나뉘어진다. 인간에 관한 지식에는 동물의 세계, 식물 및 광물의 세계도 속하지만, 무엇보담도 철학이 소속된다. 철학 없이는 모든 지식은 의문 투성이에 불과하며 어떤 과학도 될 수 없다.

 

낭만주의 시대에서는 철학과 의학과의 관계는 매우 밀접했다. 특히 셀링(F. W. Schelling, 1775-1854)는 자연과 정신의 일치라는 체계 안에서 그의 자연철학을 가지고서 병과 건강, 치료와 죽음을 다루는 의학에 대해서 관심을 표명했다. 수많은 의사들이 셀링과 관계를 맺었다. 예컨대 폰 에센마이에르(von Eschenmeyer), 트록쓸리(Troxler), 셀페르(Schelver) 등. 兩極化, 은유, 유추, 退行 등은 그들이 신봉하는 중요한 개념과 원칙이었다. 自然의 歷史, 人類의 歷史, 人間學, 道德性, 美學, 信仰은 그 말들의 연결 속에서 파악되고 예상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의학에 대한 反動은 나중에 도리어 자연과학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만들었다. 근세의 자연과학적 의학은 철학을 떼어놓았다. 19세기의 新칸트학파에서는 의학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다.

 

19세기에 들어와서 철학의 원리들과 급성장하는 경험적 인식의 결합을 시도한 臨床醫가 있다. 낫세 (Christian F. Nasse)는 "본래적 인간학"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모든 인간학적 탐구는 육체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 인간학은 보편적 심리학으로부터 생겨날 수는 없는 것이며, 인간본성에 대한 "심리-생리학은 동물권의 그것과 잘 결합되어 있지만, 가능한 광범위한 심리학적-생리학적 고찰의 대상은 복합적 多元性 속에 있는 全人間이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우리가 자연과 역사를 넘어서서 그리고 모든 "靈的 삶"을 통해서 인간을 그의 사회와의 연관성에서 발견할 때 비로소 인간을 체험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社會化의 중요도구는 낫세에 의하면 노동이 아니라 言語이다. 이 언어는 생산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정신에서 나온다. 그러나 언어는 중대한 사회학적 기본모형일 뿐만 아니라 또한 심리학적 媒體이기도 한 것이다. 또 이 심리학적 매체는 의사에게 해당되며, 따라서 全病理學과 生理學을 전제로 한다.

 

철학의 시대로부터 자연과학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의학과 계몽철학과의 최종적인 만남은 19세기의 위대한 病理學者로서 과학적 세계관에 대한 극렬한 투쟁가였던 비르효(Rudolf Virchow, 1891-1902)에서 이루어진다. 비르효는 "세포"를 모든 차원에서 모델이 된다고 보았다. 이 세포는 하나의 살아있는 有機體로서 끊임없이 스스로 발전하고 再生하는 세포국가와 같은 것이다. 그는 의학에 근거하면서 전체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는 경험과학을 "인간학"으로 이해했다. 그는 실제적인 것을 다루는 과학으로서의 철학도 자연과학의 길을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인간학의 중심점은 자연이며, 이 자연은 엄격한 분석과 結定化의 지배를 받는다. 인간정신도 구조법칙성을 보여준다. 인간정신은 인간성을 더욱더 완성시키어 사회의 종착상태에 이르도록 발전적 질서의 정돈된 과정의 무대 위에서 세계사적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의학과 철학의 관계는 19세기에서는 축소되었으며, 베이콘, 록크, 콘디약, 꽁트, 밀(Mill) 등의 경험적·실증주의적 의학이론에 의하여 정체되었다. 그래서 의학에서의 이론적 문제의 獨自性이 인정되지 않았다. 따라서 의학의 위치는 자연과학에 비하여 뒤쳐졌으며, 철학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것과 병행하여 의학과 철학간의 내면적 연관도 무시되었다. 그리고 19세기의 철학의 흐름도 이러한 경향에 대해서도 무관심하였다.

 

"생물학의 기술"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의학도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새로운 인간학의 원리에 스스로 定向하기를 시도했다.

 

3. 현대의 철학과 의학과의 관계

 

계몽주의시대 이래로 "자연"은 일반적으로 세계이해의 상징이 되었다. 니체는 서양근세의 자연개념의 신화를 깨뜨려 버렸다. 그에 의하면 '만물의 척도'로서의 인간이란 "과학의 사고"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린 것이며, 모든 자연법칙은 르네상스이래 인간이 정교하게 만들어 가지고 노는 것을 베운 "의인관적 관계의 總和"에 불과한 것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만 나타난다. 우리가 끌어낸 것만이 즉 시간, 공간, 연속관계, 數字들만이 우리에게 실제로 알려진다. 거미가 거미줄을 짜내듯이 모든 것은 우리안에서 우리로부터 산출해 낸 것이다. 니체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감각인상의 불명확성과 혼돈을 단순화하고 간략하게 해서 이를 다시 인식할 수 있도록 만들면서 우리는 실제로 자연의 理論化 할 수 있는 성격 자체를 構築하고 있다. 우리는 마침내 혼돈을 論理化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에 대한 현대의 이미지는 어떤 질서체계도 우리에게 가져다 주지못한다. 尺度와 數字, 淘汰와 사이버네틱, 우연과 필연에로 자연개념을 환원시켜버림으로써 현대인들은 실천적인 안티노미와 아포리아를 잔뜩 야기시켰다. 그래서 의술의 원리도 進化論의 因果論을 반영시켰고 淘汰原理가 治療學의 결론을 마련해 주었다. 自然에 관한 實在의 數學的 構造에만 관계한다. 自然主義에로의 타락을 가져온 近代의 과학의 자연개념은 公理的으로 미리 주어진 注文체계에 의존하고 있는 모델로 환원되고 만다. 그러므로 근세 이후의 자연탐구는 이 세계의 한 부분만을 반영시키는 것에 불과했으며, 하나의 世界觀도 매개시켜 줄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실제라고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 또 다른 해석가능성이 있을 수 있지 않느냐고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언제까지 소위 과학적인 자연개념에 놀아나야만 하는가? 괴테는 이를 두고 이렇게 비판한 바 있다. "우리 스스로 만든 자연은 자연이 아니며, 희랍인들이 탐구했던 것과는 전연 다른 것이다."라고. 일종의 應用科學으로서 취급되는 의 方法論的 환원론으로 말미암아 철학적 사고의 분위기는 점점 오그라들어졌다.

 

독일자연연구가 및 의사협회가 환원론으로부터 해방되어 인간과 환경에 관한 오래된 문제를 다시금 학회의 중요한 문제로 삼기까지는 무려 100년이상의 세월이 흘러갔다. 독일의사협회의 150주년기념학술제의 주제는 "과학의 勝戰歌"가 아니라 "進步(自然科學)의 克服"이었다. 이 학술대회에서는 "연구의 우선수위", "방법론에 있어서 진보의 바른 인식", "에너지 保護", "환경오염", "藥과 治療劑의 위험", "유전학연구의 한계", "의사의 활동의 인간적 영향의 범위" 등을 토론과제로 삼았다. 마침내 1976년 쉬르트갈트에서 열린 독일자연연구가협회의 총회의 主題는 "인간과 인간의 생활공간"이 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도 소위 行動科學(behaviorism)을 비롯한 非人間化의 수많은 짓들이 조작되고 남발되고 있다. 행동과학이론에 빠져버리면 인간과 사회는 인간의 품위와 느낌, 문화와 관습, 동기와 이미지를 위해서는 아무런 자리도 마련해주지 않는 기계론으로 되어버린다. 이 기계론은 우리의 모든 소망과 사고와 고귀한 느낌을 비과학적인 것이라고 하여 제거해버린다. 스키너(Skinner)는 이렇게 썼다.

 

"인간이 자유와 권위를 포기할 때에만, 우리는 인간행동의 실제적 원인(즉 量과 운동)을 관찰할 수 있다.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추론하는 인간으로부터 관찰되어진 해답을 적용시킬 수 있으며, 신비스러운 것으로부터 자연적인 것(물질적인 것)에로,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조작할 수 있는 것으로 적용할 수 있다."

 

아무튼 20세기에 들어와서 물리학, 윤리학, 의학, 문학 등은 이러한 비참한 인간의 상황을 비판하기 시작했으며, 소위 순수한 탐구론리학이라든가 순수한 과학이론 따위를 벗어나서 철학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특히 心身醫學과 醫學的 人間學의 영역에서는 철학적 사고를 되살리기 시작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의학자들은 철학적 요소의 평가와 참여에 대한 논의를 활발하게 진행시키고 있다.: "醫學思想", "醫學哲學", "醫學基礎에 대한 精神科學의 參與"는 구체적이며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 코흐(R.Koch)는 의학의 원리적 정신과학의 특징에 대한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어떤 시대에서도 의학안에서 잠재적 철학을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새롭게 定礎될 醫學史야말로 의사의 교육을 위한 "철학이 예비학"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III. 醫學的인 關心과 哲學的인 關心의 內面的 相關性 硏究

 

실증주의로 말미암아 과학과 철학으로부터 무시되었던 병과 치유에 관한 연구는 최근에 들어와서 인간실존의 근본문제로서 철학자들에게서도 중요한 관심사가 되고 있으며, 특히 철학적 인간학의 중요한 연구 과제가 되고 있다: 障害發生, 困難과 疾病에 대한 反應, 치료의 목표, 건강과 병의 개념화, 간섭의 가능성과 한계, 신앙과 지식간의 한계 등.

 

우리가 병과 건강에 대해서 아는 것은 오래된 文化와 이민족들의 證書, 확실한 文獻資料, 記念物, 歷史的 證憑, 그밖에 口傳들로부터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사실 그 자체를 아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문제를 안고 있을 뿐이다. 相異한 원리에 근거하고 있는 과학이론가들은 어떤 역사도 자연의 참된 현상과 일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견해를 피력해왔다. 현대 생물학의 발달사는 그 자체를 역사적 개념으로 이해된 것으로 보고싶어 한다. 그러나 현대 생물학은 그 자신을 하나의 체계적인 통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역사적인 것(記錄物)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때 그때의 상이한 정신사적 근원이 생물학의 기초에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실증주의적 입장은 인간의 모든 현상들을 "그 자체로부터", 순수한 노리적 논증에 의하여, 또 인간의 심리학적 생물학적 기원에 대한 실재적 지식을 가지고 설명할 수 있다는 매우 단순하고 유치한 전제를 가지고 있다. 최근세에 들어와서 훗설(E.Husserl)은 그의 "유럽의 과학에 대한 비판"에서 누구보다도 결정적인 확신을 가진 논증으로 실증주의적 견해에 대하여 반대하고 나섰다. 훗설도 그의 現象學的 洞察로부터 그의 주장을 이끌어냈다. 현대의 과학은 현재에 정초하고 있다고 하지만, 실상은 이러한 요청과 함께 이전에 定礎해 놓은 것에 의존하고 있으며, 현재의 타당성을 전제하며 보편적 타당구조를 지시한다. 그래서 이렇게 함으로써 종래에는 논리적으로 최초에 행한 언표에 의지한다. 과학은 바로 과학자들의 세대가 경과하면서 방법론적으로 그리고 직업적으로 학습되고 훈련된 실천을 하기에 이르게 된다. 과학은 목표를 갖거나 誤導를 하면서 실천적 명증성을 가진다. 그러나 이러한 명증성들은 각기 이미 그 배후에 전문과학자들의 범위 밖에 놓여있는 또 다른 명증성을 이미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과학적 敎習內容 이전에, 방법적 타당체계 이전에 항상 또 다른 것은 이미 전제되어 있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서 첫번째 전제들에 대한 의문과, 경우에 따라 무한한 전제영역들에 대한 의문이 남아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장차 명시되거나 지금까지 역사적 발전에서 드러난 이론의 체계에 대해서도 그 전제들은 물론 자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훗설은 자연을 정신의 구조물(Geistergebilde)로 배열할 수 밖에 없는 "절대적 역사성" 아래에서 모든 존재를 보려고 했다. 그러한 地平에서만 우리는 과학을 하나 하나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과학 전부를 하나에서, 즉 전체결합(Gesamtverband)에서 보게된다. 그러나 자연을 모든 정신적인 것으로부터 단절되지 않은 연속으로 추상하는 것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사람들은 주지하다싶이 자연을 닫혀진 세계처럼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이 자연에 순수한 정신적 관계를 끌어들임으로써 科學史를 다시 피어나게 해야한다."고 훗설도 1935년 빈文化協會에서 力說했다.

 

꽁트의 三段階說이 나온 이래, 모든 세계관적 문제제기의 배제는 의학과 철학의 관계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의학과 철학간의 문제가 되는 근본문제, 예컨대, 삶과 죽음, 인간의 虛弱性, 육체와 영혼과 정신의 관계, 인간에 대한 염려, 삶의 진행과 현존재의 형성에 관한 문제는 科學化하는 과정에서는 거의 조망해 볼 수 없는 것이며 철학적으로 정돈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인간의 근본범주에 속하는 이러한 문제들을 3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인간의 나약함과 노쇠성, 둘째, 염려와 연대성, 셋째, 죽는 것과 죽음. 아뭏든 병의 본질, 고통의 의미, 곤란과 도움, 죽음의 현실의 문제들은 의사와 철학자를 끊임없이 필요로 한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을 먼저 철학적 인간학에서 어떻게 해명하는 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1. 인간의 나약함과 노쇠

 

헤르데르(Herder)와 겔렌(Gehlen)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은 날 때부터 생물학적으로 보면 결핍존재(Mangelwesen)이며, 페트루스 히스파누스(Petus Hispanus, 1210-1277, 교황 요한21세)가 말한 것처럼 유약성과 노쇠성과 무력함의 응고체이며 위태롭고 곤난한 존재이며 언제 죽을런지 모르는 기한부의 나약한 존재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나약하며, 항상 곤란에 처해 있으며, 고통을 느끼며, 발작, 사고재난으로 말미암아 병들게 되어 있으며, 늘 방해받고 心亂하고 또 다른 사람을 방해한다. 그래서 인간은 부담에 짓눌리어 넘어지며, 미친 짓을 하며,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며, 동정해 줄 것을 요구하며, 협동자, 위로자, 구원자, 치료자의 작업을 필요로 하고 또 이를 항상 원하고 있다. 인간은 병든 존재이며, 병은 인간의 삶의 방식이다.

 

太古로부터 많은 종류의 질병이 나타나는 것은 인간을 항상 불안하게 만들었으며, 병에 대하여 너무나도 많은 설명을 만들었다. 그래서 많은 종류의 病因論이 있다.: 惡靈論, 體液論, 特異病因論, 天文學的 疾病論 등, 또 질병의 증세에 대한 人間化된 표현이 아주 많다.: 병에 걸렸다. 병이 나다. 병에 붙들렸다. 병이 쌓였다. 병이 때려 눕힌다. 병이 찢는다. 병이 쫓는다. 병이 죽인다 등, 또 병은 종교적 세계관과 밀접한 연관을 맺어왔다. 그래서 병들고 죽는 것은 신의 벌과 자비의 은총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질병은 신의 작품으로서 개인의 시험기간과 개인의 성숙기간으로도 파악된다.

 

크나프(G. Knapp)에 의하면 질병은 인간의 유한성을 일깨워주는 것이며, 병은 우연히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호출성격" 을 가지고 있다. 병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본래적 존재에로 이르도록 인간을 도와주기도 한다. 병은 현존재의 허용되지 않거나 부족한 점들에 대한 중재의 역할(예컨대, 휴식 및 재정돈)을 하기도 한다.

 

아무튼 병의 철학적 해석은 요청된다. 그리고 이 병의 철학적 해석은 병에 관한 존재의 해명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질병은 유기체의 영역에서 장해인 것처럼, 영적(정신적) 영역에서도 장해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코흐는 "우리는 병의 의미에 대하여 너무나도 적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간호란 환자에게 병의 의의를 설명해 주는데서 성립한다."고 말했다.

 

의사는 질병의 원인에 대한 해명을 넘어서서 치유와 救濟의 근원에 대해서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病原學(Athiologie)과 근본치유는 현재에서도 하나로 연결되어야 한다. 병의 근본에 대한 이해는 치유의 전제가 된다.

 

2. 念慮, 苦痛

 

고대 희랍의 전설에 나오는 "염려"(Cara 女神)의 神話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항상 염려하는 존재였으며 염려하는 존재이며 염려하는 존재일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現存在의 존재는 염려(Sorge)이다."고 말했다. 현존재는 "던져진 것"(geworfenes)으로서 - 결코 製造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 항상 '타락하고 있는 중'(verfallend), 따라서 그 자체가 허약하고 부족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이데거에게서 우리가 "世界內存在(In-der-Welt-Sein)"라는 것은 실상은 결정적으로 염려이다. 이 염려가 비로소 우리를 "共存在"(Mit-sein), "곁에 있는 존재"(Sein-Bei), 연대적 존재, 역사적 현존재로 존재할 수 있는 것, 일시적이고 經過的 存在, 終局으로 가는 路上에 있는 존재와 관계하도록 해주었다. 염려하고 있는 共存在는 바로 우리에게 모든 다가올 것을 정초시켜 준다. 염려하고 있는 인간의 미래에 정초하고 있는 自己企劃이야말로 우리의 실존의 본질성격이다. 이 염려의 의의는 바로 지금 여기 있는 것과 이미 지나간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장차 다가오고 있는 것과 우리가 부딪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히포크라테스의 선서에서 의사들은 낯설은 사람들의 고통으로부터 스스로 그 자신의 염려를 준비하는 고결한 인물로 묘사된다. 이러한 의사의 위치는 근세의학에까지 전승되었으나, 그후 기술적인 일을 하는 사람으로 격하되었다가 다시 현대에 들어와서 새로운 현실문제로 되고 있다. 현대의학은 병든 인간에 대한 염려로부터 이탈해서 전문적 작업으로 전락해버린 것과 옛날 의사들이 염려하던 일에 대해서 반성하고 있다.

 

하이데거에게서 염려의 본래적 의미는 필연적으로 한정된 시간성 속에 놓여 있다. 이 염려는 단순히 시간 속에 나타나거나 시간과 함께 사라지는 어떤 존재자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염려는 바로 "죽음에 이르는 존재"이다. 그러나 염려로서 현존재는 단순히 幕間이며, 날때부터 죽는 것과 죽움에 이르는 존재 사이에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여기서 우리의 존재가 연대적 삶의 관계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에 대응해서 歷史的 共存在로서만 염려 속에서 실존한다고 말한다. 사람이 곤난중에 도움을 부르짓는데, 이 부르는 자는 정보를 일러주는 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문제르 제기하고 답을 구하는 자를 의미한다. 우리를 부르는 자는 실존적으로 良心으로 여기에 있다. 이 양심은 바로 염려가 부르는 것으로 정의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良心은 염려의 부름으로 啓示된다"고 말했다. "그것"이 부른다. 그래서 우리는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부르는 자는 세계의 無 속에 있는 벌거벗은 "dass"로 표현된다. "부름은 염려의 부름이다" 그러므로 이 염려는 평범한 보살핌이라든가, 조력한다, 거들어준다, 청소해준다, 계획한다든가하는 것과는 젼혀 다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염려는 본질적으로 염려인 시간 그 자체 속에 있는 우리의 존재이다. 염려는 衣食住에 대한 걱정같은 것이 아날, 모든 사람을 위해서 뛰어들고 모든 사람을 共人間的으로 동반하고 모든 配慮(Fursorge)에서 연대적 고려와 관용에 의해 안내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현존재는 共存在로서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있다.

 

우리가 걱정해주는 配慮속에서 비로소 완전히 해명된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他者와 관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서로서로 공통의 연대성 속에 서있다. 왜냐하면 전체로 볼 때 존재에 대한 염려에서는 이해관계도 지배도 어떠한 방식의 利用도 문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 속에 있는 우리의 삶은 사실상 걱정스럽고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진 삶이다. 시간이 가면 죽음이 온다. 죽음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결정하는 한계와 시간 속에 있는 우리의 존재의 제약을 보여준다.

 

3. 죽는 것과 죽음의 문제

 

우리는 이제 인간학의 세번째 근본범주로서 죽는 것과 죽음에 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야스퍼스는 "죽음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어떤 의사의 치료도 우리를 해방시켜 줄 수 없으며, 단지 철학하는 것만이 이 죽음의 불안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줄 수 있다"고 말했다. 야스퍼스도 이 글에서 의사가 철학하는 것에 대해서 권고하고 있다. 필연적으로 죽음학(Thanatologie)으로 확대되어가기 마련인 病理學은 죽음은 삶의 한계와 종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며, 또 끝장나는 것(finis)도 종착역도 아니라는 사실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죽음은 우리의 삶 속에 이미 들어와 있다. 죽음에 대해서 아는 것은 우리의 유한성을 확신시켜주며, 우리의 고유성을 가르켜준다. 죽음의 현상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우리는 현존재의 최종의 전체를 획득한다. 우리는 죽음을 실존 그 자체의 현상으로 체험하고 인식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죽음이 마치 모든 날에 있지 않는 것처럼, 그리고 죽음이 정상적인 현존재에는 실존하지 않는 것처럼, 또 죽음은 하나의 예외적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죽음에 관한 철학적 관심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비롯하여 스토아학파를 거처서 그리스도교철학에서 그 정점을 이룬다. 그러나 파라셀수스가 죽음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후, 근세에 들어오면서부터 죽음에 대한 연구는 공공연히 타부視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셀러(Max Scheler)가 다시 우리의 삶과 죽음을 스스로 직관과 체험의 문제로 삼을 수 있는 방식에 관해서 관심을 표명했다. 셀러에게서는 죽음의 문제는 형이상학적 의미를 극복하는 아주 확고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셀러는 미래와 과거 사이에 있는 직접적인 현재 속에서의 지속적인 삶의 과정으로부터 죽음의 문제에 대한 근본적 고찰을 한다. "죽음은 살아있는 자가 늙으면서 대적해가는 한계점이 된다. 죽음에 대한 나의 앎은 나 자신의 삶의 내면화로부터 생겨나온다. 그것은 나 자신의 현존재구조의 본질파악의 계기이다. 죽음은 나의 삶에는 자명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본질을 인식하거나 이해하는 尺度가 우리에게 부족하다. 그래서 죽음은 현상학적 이론을 우롱할 뿐만 아니라 또한 어떻게 하기 어려운 말썽꾸러기로 남아 있다.

 

죽음은 모든 우리의 삶속에 아주 생생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하이데거의 철학은 전적으로 죽음으로부터 전보를 얻고 있다. "우리의 현존재는 시간의 지평에서는 도박판에 있는 셈이다. 출범을 한 존재, 종말로 가는 존제, 이미 꺼져가고 있는 존재는 어디로 꺼지는가? 물론 종말에로. 그러므로 불안이 싹튼다. 이 불안은 땅 밑에 있고 앞에 놓여 있는 염려대로 가려져 있다. 인간은 자기의 목표를 이러한 염려로 말미암아 잘못 놓아 두고 있다. 인간은 유일하게 의미있는 것이 될 것 같은 그의 종말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된다.그러나 인간은 그의 종말을 생각해 볼 시간을 갖지 못하고 있다. 모든 개개의 현존재의 활동 속에는 이미 죽음이 깃들어 있다. 죽음은 현존재가 있자 마자 현존재가 위임받은 존재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우리의 全實存과 함께 바로 죽음 속에 자리잡고 있으며, 죽는 것 속으로 들어가 있고, 종말에로 던져져 있다. 우리는 우리의 육체의 사타구니 속에 죽음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죽으러 갈 수도 있으나, 아무도 다른 사람이 죽는 것을 감해줄 수 없다."고 하이데거는 말했다.

 

현대의 죽음학을 집대성한 항가리 출신의 철학자 보로스(Ladislaus Boros)에 의하면,"죽음은 인간의 최종결단의 장소이며, 그의 실존의 최후활동이다. 생물학적 삶의 에네르기는 그것의 폭발적 방식의 전개에 따라 점점 줄어들면서 흐르다가 마침내 쪼라들지만, 인간의 내면에서 그것에 맞서는 현존재의 커브가 상승하고 마침내 죽음의 순간에 인간은 정신화된 존재 중심으로 이끌고 간다. 이로써 죽음은 최후의 모험이 된다. 다시 말해서 죽음은 위대한 약속을 하는 모험이 된다." 죽음의 이와같은 현상의 타당한 설명이 문제될 때에도 철학은 그 모든 지혜를 가지고서도 우리를 끝까지 답답하게 만든다. 죽음이 가장 최종의 것인 것처럼, 죽음에 관해서 말해지는 최후의 것일 것이다. 그래서 죽음은 설명될 수 없다. 그래서 키엘케고르는 이렇게 말했다.: "설명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은 한계이다. 이 언표의 의미는 단지 죽음의 사상에 영향을 미치는 힘을 주는 것이며, 삶 속에서 죽음을 자극(격려)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의 결단으로 그것은 지나가 버리기 때문이며, 또 죽음의 불확실성이 모든 순간을 굽어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순수하게 이론적으로 수수께끼를 알아맞힐 것을 요청하는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니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살아있는 자에게는 오히려 죽음의 진지한 경고로 남는다.

 

우리는 III에서 철학적 인간학의 근본과제이자 동시에 의학적 인간학의 근본 범주가 되는 인간의 나약함과 병, 염려와 연대성, 즉는 것과 죽음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왜냐하면 로트슈(Rotschuh)가 말하는 것처럼, "병에 관한 설명과 해석은 인간학에 근거하고 있으며" 병에 대한 문제는 "'인간이 무엇이냐?' '인간의 삶의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빈스방거(L.Binswanger)는 "대부분의 환자들이 가장 고통스럽게 여기는 것은 환자들이 그들의 현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사실" 이라고 갈파한 바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학자들이 현존재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해석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IV. 醫師와 患者와의 만남에 관한 硏究


1. 醫學的 人間學의 課題: 醫學의 脫人格化 克服

 

환자는 의학의 대상이 된다. 환자는 의사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지각되며 그들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환자는 또한 자기이해를 하고 있으며 그 자신은 主體이기도 하다.그러나 의학은 客觀化, 一般化, 物理化 또는 生物化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自我存在(Selbst-sein)로 있는 환자를 거의 파악할 수 없다. 병의 역사에서는 환자의 역사가 가려져 있다. 보편성, 個別化, 法則論(Nomothetik) 表意文字使用(Ideographie)은 醫學史 全般에 있어서 極點들이다.그런데 이것들을 경직된 대등관계에서만 보려는 것은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부분적인 타당성까지고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하는 것은 醫學의 실천과 이론을 위한 그시그시의 필요한 기능까지도 잘못 보게 만드는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인간학적 의학은 현대철학, 특히 현상학의 영향을 받아 세포병리학, 세균학, 유기체설, 特異病理學, 病源論, 目的論, 構成設에 대한 의학적 토론을 계속하면서도 인격의 의미와 환자의 理解를 위한 主體의 의미를 매우 강조하고 있다. 크라우스(F.Kraus)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法則論, 表意文字使用보다는 人格을 더욱 증시하고, 법칙과학보다는 개인의 생각, 즉 事物科學(Ereigniswissenschaft)을 더 중시할 것을 강조했다. 빈스방거는 "삶의 기능과 내면적 삶의 역사"(1927)라는 논문에서 한편으로 자연과학을 추구하고, 다른 한편으론 현상학적 인간학이나 현존재 분석을 추구한다. 그는 自我意識에 주목하고 個別人格(Eizelperson)을 존중했다. 바이쯔젝커(V. v. Weizsacker)는 "醫學의 轉向"을 시도했다. "探究方法에 主觀을 도입하는 것은 基盤의 變位가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이러한 變位(또는 轉移)는 의사에게도 타당한 것이다. 가령 의사의 자아의식, 의사의 자기성찰, 의사자신의 느낌들은 과학적 인식은 물론이고 병자와의 관계에도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병의 발생과 치료의 통일과 의미는 개별화된, 실존화된 주체성의 원칙을 요청한다. 주체와 인격은 기계론과 유물론에 대한 비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마르셀(G. Marcel)도 현대의학의 脫人格化(Entpersonlichung)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환다는 자기의 운명에 의사가 실존적으로 참여해주기를 기대한다. 의사와 환다와의 깊은 유대 속에서만 그들 간의 실질적 공통관계가 실현된다. 기술적 관계란 단지 事物化된 신체와의 관계와만 대응될 뿐이다.그러나 환자는 그 자신의 신체를 도구나 기계부속품 같은 것으로 느낄 수는 없다.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에서 인격적 참여(engagement)와 상호신뢰는 포기될 수 없다. 그러나 환자와 의사의 인격적 관계는 존재 자체가 硬直症에 걸리지 말아야만 실현될 수 있다.

 

2. 醫師와 患者와의 關係

 

겝자텔(V. E. v. Gebsattel)은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3가지 변증법적으로 매개된 단계로 구분해 본다 : 첫번째 단계는 직접적 共感(Sympathie), 두번째 단계는 진단 및 치료조치에서의 疎外段階(Entfremdungsstufe), 마지막 세째 단계는 인격적 결합을 하는 단계로 높이 高揚되는 것이다.

 

환자의 현상학은 느낌, 불안, 희망과 상태를 포괄한다. 그러나 의학은 대체로 환자의 내면상태보다는 實相에 대해서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 물론 질병의 자연과학적 측면은 어느 때고 무시될 수 없다. 질병은 개별적 존재일 뿐만아니라 또한 세계이기도 하다. 질병은 그 자신의 육체성(Leiblichkeit)으로 축소될 수도 있으며, 세계와 환경과의 관계를 단절시킬 정도로까지 한정될 수도 있다. 멀로 뽕띠(Merleau Ponty)가 말하는 것처럼 신체는 실제경험의 매개이다. 인간은 자기의 육체를 떠나서 존재하거나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육체와 결합된 상태에서 존재하고 행동한다.

 

고통 중에 있는 환자는 자기자신과 그 자신의 고통과 그 자신의 질병만을 주로 문제 삼는다. 환자는 이러환 상황 속에 있으면서도 건강한 다른 사람과는 분리되어 있다고 스스로 느낀다. 환자는 자기를 도와줄 의사를 필요로 한다. 그렇지만 그를 치료해주고 도와주는 의사도 또한 본질적으로 앓고있는 사람(homo patiens)이다. 환자 아닌 사람이 도대체 어디에 있겠는가? 의사도 한편으로 의사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환자이다. 환자는 자기의 병을 육체적 · 영혼적 · 정신적 상태로 느낀다. 환자는 질병을 그 질병의 사회적 관계에서 파악한다. 그는 질병으로부터 어떤 의미를 얻어내려고 한다. 그는 왜 병이 발생했는가를 이해하려고 애쓴다. 門外漢의 病原에 대한 생각은 병에 대한 일반적 견해를 반영한다. 그 안에 개인적 해석도, 종내에는 과학적 인식까지도 섞여 들어간다. 문외한들의 병에 대한 해석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많은 종류가 있고, 그 해석들 간에는 엄청난 견해의 차이가 있다 : 미국에서의 리포프스키(Lipowsky)의 조사에 의하면 신체의 요구, 輕減, 虛弱, 罰敵, 損傷, 스페인에서 엔트랄고(Entralgo)의 조사에 의하면, 虛弱, 危脅, 不安靜, 孤獨, 신체소모, 비정상, 도피, 독일에서의 골쯔(Goltz)의 조사에 의하면, 설명될 수 없는 것, 덧붙여진 것, 덧붙여진 것의 운동, 기능장애로. 또 병의 해석은 급성이냐 만성이냐에 따라, 症勢에 따라 많은 해석의 차이가 있다. 아뭏든 비전문가의 판단은 의사의 판단과 일치해야만 할 필요는 없다. 주관적인 건강상태가 객관적인 질병과 뒤섞일 수도 있다. 가령 주관적으로 건강한 상태가 있다고 하는 판단은 의학적 소견과 심한 차이가 날 수 있는 좋은 例는 고혈압과 조울증이다. 의사와 환자의 관계의 심리적 갈등은 문외한의 인상과 관계가 깊다. 여기에는 환자 개인의 동기, 사회적 신분적 차이와 재정형편, 사회구조와 문화수준도 큰 영향을 미친다. 환자의 의사에 대한 감정과 의학의 가능성에 대한 생각은 매우 복잡하다. 그런에 의사는 환자의 인격전부를 주목하려고 하지 않는다. 의사들은 질병을 단지 제한된 장해(고장)로만 취급한다. 그래서 야스퍼스에 의하면 의학의 근본오류는 인격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에 놓여있다. 처음에는 객관화할 수 없는 것을 객관화하려고 하고 나중에는 그 객관화한 것 자체를 새로은 과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반복하는 모순을 의학은 거듭 범하고 있다.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의 이미지들은 유토피아적일 수도 있으며 환자의 주관을 일반화시키는 것이 될 수 있다. 바이쯔젝커(V. Weizsacker)는 플레쓰너와의 토론에서 인격의 철학적 규정에로 이끌고 가는 통일의 논리적 기능과 이해의 인식론적 기능, 個性(Individualitat)의 형이상학적 개념의 규정들을 철학적 樣式이라고 설명하고 이 철학적 樣式들은 의사와 환자와의 행복한 관계에 반드시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그리고 그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의사의 전체행동을 형성하는 것은 인격주의적 철학적 개념에서가 아니라 특정한 '삶의 상황(Lebenslage)'에 처해 있는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에서 나온다는 것이다."라고 부연했다. 실상 삶의 상태의 실재는 철학적 이상주의와는 대립한다. 개념과 實例, 直觀, 實存은 대립한다. 그래서 플레쓰너는 인격개념의 순수한 철학적 분석의 한정된 결과를 고려하면서고 구체적 상황에서는 자연과학적 통찰을 넘어설 수 밖에 없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는 확신을 가지고 이중의 제약을 인정했다. 왜냐하면 病床에 누워있는 인간은 오로지 인간에게만 적합하고 인간하고만 마음 속을 탁 털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환자의 상황과 질병현상은 인간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아 준다. 病理學은 生理學을 연구하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가 건강상태가 어떤 것인가를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손상된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필연적" 이라고 프뤽게는 말했다. 그런데 "生理學과 人間學은 역사 밖에서 설정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병은 의학과 철학의 결합의 중심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며, 한갖된 因果論과 診斷學, 病因論과 의학적 개념 이상의 것이다. 그래서 병과 건강은 근본적으로 의학과 철학을 결합시킨다."고 펠레그리노(Pellegrino)는 말했다.

 

환자는 특수한 의학적 치료를 요구하는 특정한 병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병에 상응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으며, 그 세계에 걸맞는 實存感을 가지고 있다. 환자의 주관성이 상이한 차원과 그 차원들의 통합에 의하여 어떻게 규정되는가의 정도에 따라서 현상학적, 사회학적, 심리학적, 의학적 전망이 결합된다. 질병은 존재일 뿐만아니라 또한 자세(Haltung)이기도 하다. 환자는 자기자신에 대해서, 자기의 발병에 대해서, 의사에게 대해서, 병원종사자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취한다. 환자는 그가 취한 태도(자세)에서 채무구류를 거절할 수 있다. 그는 그가 처해있는 상황에 걸맞는 도덕을 가질 수 있다. 병이 든다는 것은 옛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죄의식과 도덕적 거부감으로 점철되어 왔다. 그러므로 의학윤리학은 의사에게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환자에게도 관계된다. 환자에 대한 철학적 인간학적 해석은 환자의 태도에 관한 풍부한 해석을 낳았다. 환자의 윤리학에 대한 思考는 기실 매우 오래된 것이다. 히포크라테스도 "의사는 기술의 심부름꾼이다. 환자가 병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의사를 돕는다는 것이 필수적이다."고 말했다. 쉬프랑거(E. Spranger)는 그의 논문 "건강할 때와 병들었을 때의 윤리적 계기"에서 건강, 병, 윤리성과 비윤리성의 관계를 밝여보면서, "건강유지는 윤리적 과제이지만, 또한 병도 윤리적 요청이다. 이 요청들이란 특히 3분야와 관계된다 : 즉 병의 통찰, 병 속으로의 도피와 병 밖으로의 도피. 환자의 태도와 결단은 의사의 관계와 건강한 사람의 실존과 관여한다. 환자는 병치레를 하면서 인간본성의 윤리적 저장으로부터 보상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환자는 애써서 만든 예술의 생산품으로서의 문화에 관한 생각을 보다 가까이 한다." 고 말했다. 환자의 윤리학은 앞으로 더 주목을 받게될 것이다. 순수한 경제적 이유로 말미암은 개인의 약점과 유혹도 간과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의료보험은 자선의 효과만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고의로 환자가 병을 연장하려고 한다거나 發病에 등한히 하게 하는 부작용도 잇다. 아뭏든 환자의 의지와 협조 없이는 의사의 행위는 불완전한 것이다. 그래서 요레스(Jores)는 이렇게 말했다 : "치료는 질서를 이루겠다는 환자의 실질적 用意, 즉 환자의 능동적 공동작업을 전제한다. 결국 환자자신이 자기를 치료하지 않으면 안된다. 의사는 단지 환자에게 길을 제시할 수 있고, 환자로 하여금 보다 깊게 자기인식을 하도록 거들어줄 수 있을 뿐이다." 펠레그리노는 이러한 요청을 지지하는 논문들을 그의 동료들과 함께 속속 발표하고 있다. 그는 새로운 의학윤리학이 발전되어야 한다고 강변한다. 환자와 병의 상황에서 의학의 기초를 발견하려는 그와같은 의학에서는 그 자체의 가치척도를 가진 여러 종류의 中心體(Zentren)가 맞부딪힌다: 환자, 의사, 기관들, 사회 이들 하나하나는 각기 그들의 가치, 기대, 의무를 상대편에 일방적으로 전달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철학은 對話의 廣場을 마련해주지 않으면 안된다. 펠레그리노에 의하면 환자의 도덕적 자율성은 自己責任이다. "환자는 결과적으로 그 자신의 도덕의 주관자(agent)가 되지 않으면 안되며, 의사는 생명연장과 向精神的 藥物使用, 수술, 낙태 등 임상적 처치에 있어서 자기의 가치관을 피력하기 전에 환자로 하여금 선택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해야 한다."

 

道德의 自律性은 환자의 판단력과 결단력을 전제로 한다. 이것은 진단, 치료 및 각종의 임상조사에 대해서도 해당된다. 아무도 판단력과 결단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병의 철학적 윤리학적 해석도 실재적 제약과 法의 補完을 경헙하지 않을 수 없다. 종내에는 법적 차원과 완전히 독립해서 의사와 환자의 관계에서의 불균형을 없애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의학과 정보의 고도한 발달에도 불구하고 또 의사와 환자의 그 긴밀한 연대성에도 불구하고 의사와 환자의 관계의 비동등성은 극복될 수 없을런지 모른다.

 

 

V. 結言

 

병은 의학만이 독점물은 아니다. 병은 철학에 의해서도 고려되었으며, 철학적 해석은 의학의 사고에도 영향을 미쳤다. 병은 과학적.기술적 분석말고도 비전문가의 해석도 무시 할 수 없다. 보편적으로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병의 개념은 아직도 발견되지 못하고 있다.

 

개별과학들은 그들의 방법론으로 수용할 수 있는 특정한 차원만을 파악한다. 그러므로 어떤 과학도 인간을 다룰 때 인간의 한정된 部面만을 다룰 뿐이지 全人間을 다루지 못한다. 따라서 의학을 경험과학으로 국한시키는 한, 의학은 병과 관련되어 있는 어떤 부면만을 다루게 된다. 그러나 병은 의사나 과학에서만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과 사회와 국가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병은 病原學도 아니요, 病理現象(Nosologie)만도 아니며, 치료(Theraphie)만도 아니며, 또한 환자의 아픔만도 아니다. 의학으로는 병에 대한 보편타당한 정의를 내릴 수 없다. 병은 심리적 사회적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병이라는 말은 일종의 隱喩(Metaphor)라고 보기도 한다. 병은 주관적 느낌일 수도 있고, 주관적 판단일 수도 있으며, 개인적 실존적 상황이기도 하다. 그러나 病은 全人間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병은 全人間(Gesamtperson)을 다루는 철학적 인간학의 근본과제이다.

 

의학은 인간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치유될 것을 필요로 하는 데서 본래적으로 발생했다. 그래서 의학적 인간학은 아픈 사람의 상황과 그 환자의 自己意識에로의 접근을 회복시키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학적 인간학의 시도는 철학의 영향을 깊이 받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現象學, 生哲學, 實存哲學은 인간학적 의학과 정신의학 분야는 물론이고, 현대의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의학은 자연과학적, 기술적 성취를 손상시키지 않고서도 보다 풍부한 인간이해를 위하여 철학적 보완을 요청할 수 있다. 의사와 환자의 진정한 대화가 요청되는 것처럼, 의학과 철학의 대화는 참으로 긴요한 것이다. 대화는 치료의 요소일 뿐만 아니라 인간구원의 요소이다. 왜냐하면 대화는 인간의 실존을 밝혀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교훈 교수(서울대학교)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생명윤리연구회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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