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홍)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생명] 의료기술의 발전과 생의윤리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6 ㅣ No.357

의료기술의 발전과 生醫倫理

 

 

I. 머리말

 

현대의학의 의료기술의 발달은 매우 괄목할만 하다. 특히 현대의학의 위생분야와 각종 전염병의 퇴치의 공로를 아무도 과소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의학기술은 몰가치론을 내세우는 이른바 과학주의에 경도하면서 특히 윤리학과 단절되면서부터 오히려 인간을 소외시키고 인간의 존엄성에 타격을 가하는 부작용을 초래하기 시작했다. 필자는 이 발표에서 이러한 비윤리적인 사태의 근본원인을 현대의학의 基調에서 찾아보고 이어서 의학의 실천성과 윤리성의 의의를 모색하고 끝으로 최근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생의학적 문제들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II. 현대 의학의 基調

 

현대 의학은 의료기술적인 면에서 눈부신 발전을 했다. 그러나 과학적 세계관이 급진적으로 인간의 삶을 지배하게 되면서 전통적인 종교적·윤리적 인생관은 멸시받게 되고 종래에는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로 건강문제에서 배제되었다. 오히려 삶에 대한 과학적 지식이 準종교적 성격을 띄우게 되었고 의사의 지위는 준종교적 차원에 이르게 되었다. 사람을 치료할 능력을 가진 자는 또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히포크라테스의 가르침에 의하면 의사는 어떤 환경에서도 지위, 연령, 지식에 관계없이 예컨대, 노예, 황제, 이방인 및 결성아동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전적으로 헌신하기로 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사회는 항상 의사로 하여금 살인자로 만들려고 해 왔다. 예컨대 의사로 하여금 결성아동을 출생시에 살해하게 한다던가 암환자의 침대 곁에 다량의 수면제를 놓아두게 한다던가 이것에 대하여 미드(Margaret Meed)나 카메론(Nigel Cameron)은 의사를 그러한 요구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사회의 의무라고 갈파했다. 헨리( C. F. H. Henry)는 그의 책 '위대한 문명의 황혼'에서 "야만들이 몰려 오고있다"고 부르짖으면서 "현대의학은 히포크라테스 이전의 의학의 야만상태로 시계 바늘을 되돌려 놓고 있다"고 한탄했다. 그렇다면 현대의학의 기조는 도대체 어떤 것인가?

 

서양의 현대의학의 기본구조는 19세기에 수립되었는데, 요컨대 현대의 자연과학의 지식과 15세기 이래로 수집된 人體에 관한 지식과 개념들이 새로운 개념적·방법론적 접근방식에 의해 통합된 것이다. 우리는 현대의학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

 

1. 현대의학의 설명 전략은 還元主義, 二元論, 決定論이다. 여기서 이원론이란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인간관을 가리킨다. 그는 육체와 영혼뿐만 아니라 인간존재와 자연 및 사회적 환경을 엄격히 구별하였다. 베라우(Belau)는 데카르트의 이러한 이원론이 현대의학의 이론의 기조를 이루고 있으며 현대의학에 개체주의적 성격을 부여했으며 현대의학을 소위 "修膳業"으로 전락시키는 단초가 되게 했으며 이러한 접근방식은 질병을 조장할 수도 있고 또한 저지할 수도 있는 자연적 · 사회적 요소를 현대의학이 무시하도록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현대 서양의학은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야 心身(psycho-somatic) 의학과 總體的(holistic) 의학이 家庭의학에 등장하면서 기계론적·기능주의적 의학의 흐름을 다소 누그러뜨리고 있으나 아직도 의학교육과 병원의 시술에서는 唯物論的 · 物質還元論的 · 機械的 決定論的 성격이 지배하고 있다고 하겠다.

 

2. 물리학, 생화학, 分子生物學과 같은 자연과학은 현대의학의 이론적 기초로 고려된다. 예컨대, 해부학, 생리학, 병리학 등이 그러하다. 인간의 기능과 질은 가능한한 數量으로 표현되는 측정가능한 생화학적 · 生物理學적 과정으로 환원된다. 이것은 현대의학의 시술이 과학적 추상성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과학적 추상성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3. 현대의학에서는 질병은 존재론적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며, 질병은 의사와 환자로부터 별도로 분리되어 있다. 따라서 질병은 환자 안에서 구조물로 또는 과정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다시 말해서 질병은 '정상한' 가치와 측정으로부터 일종의 이탈이라는 것이다.

 

4. 현대의학의 시술은 질병의 존재론적 개념에 기반을 둔 의학지식의 배열(ordering)에 의거한 것으로 특징 지워진다 ; 예컨대, 疾病記述學(nosography), 분류학(taxonomy), 決疑論(casuitry). 따라서 현대의학의 시술은 어떤 특정한 방법론적 방식에서 진행된다. 예컨대 환자와 의사의 '주체성'을 최소화하는 방식에서 환자의 신체를 검사한다. 다시 말해서 현대 의학의 시술은 기계가 人體를 이끌고 간다는 접근방식의 지배를 점점 더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의학의 이와 같은 개별과학적 해석은 의학의 기술 발전의 중요한 배경을 형성한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인체의 기능을 검사하고 또 많은 질병의 원인을 본질적 수준에서 찾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 보면 매우 성공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치료와 진통의 부면에서 여러 가지 가능성을 가져다 주었으며 많은 사람에게 혜택을 준 점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현대의학의 자연과학적 성격은 건강의 지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인간성과 실재에 미친 자연과학적·기술적 영향은 과학과 기술 분야에 한정되지 않았다. 과학이론들은 단순하게 어떤 현상에 대한 기술이나 설명을 위한 모델이 아니라 실재의 재생산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과학이론과 모델은 세계관을 형성했고 과학적 지식은 삶과 사회를 기술적으로 조종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래서 "과학기술이 의학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큰 것이어서 기술은 오늘날 현대 의학의 형태를 구성하는 요소가 되어버렸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같은 서양의 현대의학의 지배적 견해는 결과적으로 '지금 여기서' 우리가 실재로 경험한 것이 세계와 인생의 전부가 되고 초월적 실재를 부인하게 되고 만다. 야스퍼스(K. Jaspers)는 "현대의학에서의 초월적 실재의 상실은 지상의 행복추구를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었다"고 개탄했고, 롤리(J. Rolies)는 "우리의 문화(서양문화)에서 육체는 神聖한 것으로 되고 육체의 구원이 영혼의 구원을 대신하게 되었고 하느님의 역할을 육체가 하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생명의 조종은 생명에다가 과학기술을 강화시키는 것을 함축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현대의학에 의하면 건강은 만들 수 있는 것이 되고 병원은 건강을 창조하는 기관이며 죽음을 지배하는 힘을 추구하는 기관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과학과 기술은 인간의 실존을 조종하고 인간의 물체를 해결하는 도구로 간주되고 생명은 과학기술의 專有物이 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아무도 아무것에 의해서도 통제될 수 없게 되고 종래에는 의학기술은 전횡을 하기에 이르렀다. 인간의 사고와 생명에 대한 과학기술의 독점적 지위는 서양에서는 전통적인 종교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파하니안은 "현대에서는 마술이 과학에 의해 대치되었으며 신화는 기술에 의해 대치되었다. 이제 종교문제는 기술문제로 바뀌게 되었다"고 말했으며, 일리히(I. Illich)는 "프랑스 혁명은 두 개의 신화를 만들어 냈는데 그 첫째는 의사가 성직자를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이쯔첵커도 "과학에 대한 신앙은 우리 시대에서 지배적 종교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갈파하였다.

 

도오이에웨드(H. Doayeweerd)는 피조물을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면 그 결과는 사고와 인생에서 해결할 수 없는 긴장, 즉 이율배반에 빠진다. 그에 의하면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 서양 철학을 지배해온 현대 서양의 사고방식에서 가장 근본적인 이율배반은 과학적 이상과 인격의 이상의 모순이다. '과학의 이상'은 合理性을 바탕으로하여 기계적 인과론으로 실재를 설명하려는 시도를 의미하는 것이며, '인격의 이상'은 실재의 전체를 지배하려는 인간의 인격의 자주적 자유의 이상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과학의 이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사상과 자유를 합리적·수학적 사고에 종속시키고 기계적 인과론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 결과로 인간의 자유는 환상으로 단정되고 만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과학의 이상에 대항하여 인격의 이상을 세우려고 한다면, 과학의 이상은 근본적으로 제약을 받지 아니하며 안될 것이다. 현대의학의 모델은 과학의 이상을 表明하는 것이다. 의학자들은 가능한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다시 말해서 제약의 이상을 거부하려고 한다. 이것은 인격과 환자의 唯一性을 무시하는 기계를 모델로 하는 기반에서 환자를 고려하고 취급한 결과라고 하겠다. 따라서 이와 같은 환자의 대접은 일종의 폭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현대의학이 과학기술의 도움으로 예방학, 진단학, 치료 및 진통(완화)분야에서 많은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많은 질병, 특히 전염병의 치유에 성공적임을 경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동시에 자연과학적 사고가 의학을 조종의 기구로 취급하고 의학을 사이비 종교의 차원으로 끌고갔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이것은 상당한 醫原病(iatrogenic, 의사의 부주의로 생기는 병)적 손상을 초래했고 保健에 불필요한 과다지출을 하게끔 압력을 가하는 윈인이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하게 하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방지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문제 해결의 청사진을 간단히 내놓을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이 문제 해결의 접근방식을 모색해 볼 수 는 있을 것이다.

 

 

III. 의학의 실천성과 윤리성

 

이제 우리는 의학을 단순히 하나의 응용과학이나 技術學으로 이 이상 더 방치해서는 안된다. 의학은 실천적인 과학으로 성격이 부각되어야 한다. 여기서 실천(praxis)이란 志向이나 의무의 실현을 의미한다. 따라서 실천적인 과학은 이론과 응용과학의 지식을 수단으로 하여 개별적 상황들에서 올바른 시술을 할 수 있는데 주안점을 두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과학이란 일반적으로 定義에 의하여, 즉 보편타당성을 갖는 규정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활동으로 이해된다고 한다면, 실천적 과학이라는 말은 자기 모순에 빠질 위험이 있다. 그래서 요켐센(H. Jochemsen)은 의학을 실천적 과학이라고 부르는 대신에 專門的 實習(實踐)(professional practice)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했다. 그에 의하면 실습이라는 말은 이론적 지식과 경험적 지식을 개별적 상황에 알맞도록 시행하는 것을 의미하며, 전문성이라는 말은 과학적 지식과 이와 관련된 기술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응용과학과 이론적 과학을 특징짓는 추상적 관념들은 의학과 같은 전문적 실습에서는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의학의 전문적 실습은 개별적인 케이스에서 어떤 규정을 적용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판별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판별력은 일반화할 수 있는 지식이 아니라 오로지 실습에 의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

 

전문적 실습으로서 의학은 우선적으로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의학은 항상 윤리학적 가치의 실현을 목표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의사는 기계적·의학적 모델에 따라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 넓은 視野를 가져야 하며, 病原 뿐만 아니라 심리학적, 사회학적, 정신적 요소들을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질병은 육체적 결함 그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질병이란 바로 身體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人間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의사는 환자를 치료할 때 健全한 全人(whole person)을 향해서 일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사에게 制限(limitation)을 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제한은 의사는 모름지기 사람다운 삶과 건강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과 그들의 전문적 활동을 인간에 대한 올바른 展望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의학과 의사의 근본적 과제를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관점에서 윤리적으로 제한을 두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첫째의 제한은, 의학의 시술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준수하는 것이다. 설사 의사의 의도가 환자의 고통을 제거하거나 예방하려는 것일지라도 생명은 결코 하나의 商品으로 취급되어서는 안된다. 만일 의사가 환자의 고통을 예방하거나 제거하는 책임을 져야한다면 의사는 성직자에 준하는 역할을 감당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낙태와 안락사와 같은 인간의 삶과 죽음을 다룰 때 의사는 법적으로 허용된 활동으로부터 벗어나 윤리적으로 인정받는 적극적인 활동을 해야 할 것이다. 모든 문화권에서 생명을 신성한 질서에 의해서만 처리될 수 있는 신성한 선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므로 생명을 다루는 의사가 한 때 종교의 사제의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낙태와 안락사는 처음에는 대체로 고통을 예방하거나 제거하기 위해서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들은 오늘날 공리적인 관점에서 기술문제로 다루어지고 있다. 고통을 잊기 위하여 인간의 생명을 끊어버린다는 것은 의학의 전문적 실습의 범위와 의사의 능력을 벗어나는 행위이다. 도대체 의사가 인간의 고통을 야기시키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책임을 지게 할 수는 없다.

 

둘째의 제한은, 질병과 신체적 부조화를 회복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을 뿐, 기술의 발달에 따라 새로운 질서를 구축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의학은 病理를 다루어야 하지만, 결코 生理를 변화시켜서는 안된다. 다시 말해서 의학은 우리가 正常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부터의 이탈을 방지하거나 고쳐보려고 해야할 것이다. 여기서 정상이란 말의 定義와 역사적 이해가 다양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정상은 무제한적으로 확대 해석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제 의학의 과업에 대한 실제적 제약이 명백히 제시되어야 한다. 환자를 다루는 의사는 그 환자의 실존의 많은 관계와 차원들을 가지고 있는 인격을 다루는 것이다. 의사는 生理的 수준에서 또는 심리적 수준에서 질병의 회복과 예방만을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질병은 物理化學的 수준을 넘어서 사회적, 정신적 문제와도 상관되기 때문에 의사는 환자와 접촉에서 이런 문제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는 것은 의사의 능력 밖의 일이므로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는 전문적인 식견을 가지고 있는 전문가(윤리학자, 신학자 등)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여기서 전문가들이란, 의학의 전문성을 이해하면서 특수한 전문적인 지식을 발전시켜 온 특수한 훈련과 교육을 받은 사람, 또 윤리적인 한계 내에서 공공의 이익을 지지할 수 있는 능력과 지식을 겸비한 개인이나 집단, 召命의식을 가진 사람을 가리킬 수 있다.

 

우리는 의학의 전문성의 윤리적 성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해 볼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은 아무리 의학기술이 발달하고 변하더라도 최소한 지켜져야 할 그러한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첫째, 환자의 건강을 위한 의사의 증진은 윤리적인 제한 아래에서 제일 가치가 되어야 한다. 의사의 전문적 시술은 정치·경제적인 이유로 좌우되지 않는다는 제삼자의 이해관계에 의해 좌우되어서는 안된다는 의미에서 자유로울 필요가 있으나 전문성의 자율은 제한을 가지며, 이 제한은 물론 자의적이어서는 안된다. 의사는 환자를 다룰 때 의사는 그의 개인적 이해관계로 행동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의사가 의료처치를 하는 대가로 지불되는 재정과 관련된 제도는 윤리적으로 고려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재정제도는 의사로 하여금 고장난 기계를 수선하는 기계공처럼 인간을 기계의 모델로 삼게 하고 환자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보다는 그 자신의 수입에 더 연연하게 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오늘날 의료기관의 과잉조치와 과도한 설치를 초래하기도 했다.

 

둘째로, 의학적 전문성의 특징은 전문성의 구성원이 무엇이 적절한 의학적 실습(시술)인가를 결정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것은 환자의 동의가 의사의 처치에 필요조건일 수 있지만, 전문가가 오직 환자의 요구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사는 환자의 소원을 단순히 집행하는 자가 아니다. 의학적 전문성은 두가지 과제를 가지고 있는데, 첫째 과제는 어떤 의학적 조치에 대해 적절한 지침을 가능한한 가장 예리하게 형성했는가를 지속적으로 반성하는 것이며, 두 번째 과제는 의학적 전문성의 모든 구성원의 실습의 질을 감독하고 증진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질병을 치료하고 예방하는 데에 의학에 제한을 두는 것을 수용할 때에만 비로소 윤리적으로 건강보존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인간의 생명을 의료기술에만 맡겨둔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할뿐더러 종래에는 가능한 일도 아니다.

 

이제 우리에게 무엇보다 부진한 것은 기술의 전횡을 막는 것이다. 의료기술은 나날이 엄청나게 발전하고 있다. 과학자의 탐구욕과 호기심은 그칠 줄 모른다.

 

 

IV. 생의학적 문제

 

1. 유전자조작 및 재조합의 문제

 

우리 나라 보건 복지부는 97년 1월 23일 생명공학분야 연구 및 산업화과정에서 빚어질 수 있는 각종 위험과 윤리적 문제의 예방을 위해 유전자재조합 실험지침안을 입안예고하고 이것의 시행을 7월 1일부터 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유전자재조합은 생물체의 유전자를 조작, 새로운 미생물이나 동물과 식물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의약품, 농업, 공업, 환경분야에서 이용된다. 이것은 한 편으론 식량문제와 질병치료를 해결해 줄 것으로 기대되나, 다른 한 편으론 돌연변이 생물체의 발생 등 환경 및 생태학적 재앙을 야기시키는 윤리적 문제를 수반하기도 한다. 따라서 선진국들은 이에 대한 연구를 경쟁적으로 펼치면서도 동시에 이러한 연구에 대하여 엄격한 규제제도를 두고 있다.

 

우리는 유전자조작 및 재조합의 기술을 다루는 유전공학 및 생명공학을 몰가치론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과학자에게만 내맡길 수 없으며 생명공학에 적절한 제동을 걸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생명공학의 逆機能과 부작용은 근본적으로 生命질서에 위기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유전자재조합은 우선적으로 돌연변이 생물체의 전파와 확산 등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자연에 가져올 수 있으므로 엄격한 감시와 예방책의 강구가 先決되어야 한다. 유전자재조합의 연구자는 '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해 본다'는 무책임한 태도를 갖지 말고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존엄성과 모든 生命體의 正體性의 문제를 고려해야 할 것이며, 무엇보다도 安全性확보를 우선시 해야 할 것이다.

 

2. 人造染色體 合成의 문제

 

윌라드(Willard)등은 최근 인조염색체를 합성시키는데 성공했다.

 

인조염색체는 人間複製와 더불어 인간 造作의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복제(cloning)가 똑같은 개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인조염색체는 造物主의 권한인 人體設計圖까지 인간 마음대로 바꿀 수 있음을 의미한다.

 

염색체는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을 모두 담고 있는 유전자 그릇으로 父系와 母系로부터 각각 23개씩 물려받아 모두 46개로 구성되어 있다. 예컨대 키가 작은 부모로부터 키가 작은 자녀가 태어나는 것은 인간의 유전형질은 부모로부터 수동적으로 물려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윌라드(Willard)는 염색체의 원료물질에 해당하는 유전물질 DNA와 염색체의 본체를 서로 연결시켜 주는 중심체를 人工合成한 뒤 이를 결합해서 정상적인 기능을 갖는 염색체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이것들은 정상보다 5분지 1의 정도 크기에 불과한 미니염색체지만 이중 2개가 이제까지 지구상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는 인조염색체로 단백질합성과 염색체 분열 등 정상적인 염색체와 똑같은 기능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인조염색체의 합성은 인간의 존엄성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인조염색체는 2005년경에는 인체게놈사업의 응용에 직접적으로 실용될 것으로 학계에서는 전망하고 있다. 이 인체게놈사업으로 인체설계도는 낱낱이 밝혀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인조염색체를 이용하여 원하지 않는 유전자 대신 원하는 유전자를 담은 염색체를 삽입하고 신개념 유전자용법이 가능해진다.

 

유전자요법은 바로 유전병치료에 응용될 수 있다. 특히 염색체의 분열 및 합성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중심체의 기능의 異常으로 21번째 염색체가 하나 더 추가해서 발생하는 소위 다운증후군의 예방과 치료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複製羊 돌리의 출현과 마찬가지로 인조염색체 역시 생명현상의 조작이라는 측면에서 우리는 윤리적으로 고려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인체게놈사업으로 지능과 성격이 우량한 유전자만을 모두 찾아내서 이러한 유전자들만으로 구성된 인간을 임의로 만들어내는 것도 이론상으로 가능해진다. 또 질병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모두 찾아냄으로써 질병을 미리 예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갖게 해 줄 수 있다. 염색체 분리 異常으로 생기는 모든 질병(예컨대 老化현상, 암 등)을 미리 예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이렇게 된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많은 문제들이 생겨날 수 있다. 가령 어떤 기관(이해관계가 있는 보험회사 등)이나 개인이 특정한 사람의 유전자 데이터를 보여달라고 요구할 수 있을 것이며 낙태, 영아살해, 안락사, 優生學 등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3. 생식과 관련된 신기술의 문제

 

생식과 관련된 신기술의 발달은 자연스러운 방법으로는 아이를 잉태 또는 임신할 수 없는 여인들로 하여금 실제로 임신을 할 수 있게 하여 주며 또 異性 배우자 없이도 임신할 수 있게 하여 준다. 예컨대 人工受精으로 인체 또는 시험관에 의한 아기출산. 그러면 이것은 단순히 새로운 생명기술의 이용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여 주고 새로운 여러 가지 문제들을 초래하기도 하지만, 애당초 비정상적인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아기를 갖기를 원하고 또 새로운 기술을 연구하고 이를 이행하려는 집단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人工受精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공수정은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아기를 갖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1985년 서울대 병원에서 국내에서 첫 시험관 아기가 태어나면서부터 우리 나라에서 인공수정시대가 시작되었다. 의료계의 일반적인 윤리적 불감증과 불성실로 인하여 정자제공자의 AIDS 및 성병 등 악성 질환의 감염을 검사하지 않고 동일한 사람의 정자를 수많은 여인들에게 수정시키고 정자를 돈을 주고 사는 비윤리적 작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우리 나라의 대부분의 종합병원에서는 '불임클리닉', '불임시술센타'가 있으며 倫理不在의 무분별한 인공수정시술이 행해지고 있다. 부부이외의 비배우자간의 인공수정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태를 의료기술을 통한 "기계적 간통"이라고 단정하고 혼인의 본질을 부정하는 비인간적인 행위라고 규탄한다. 이것은 분명히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행위라고 하지 아니 할 수 없다. 자녀의 출생은 원래 부모와 자녀 모두의 인격적 존엄성에 원칙을 두고 혼인 안에서 부부의 성관계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정자 기증자는 정자 판매자인 동시에 수많은 아기들의 익명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되며 심지어는 동일한 정자 판매자의 직계 후손들간에 혼인할 수 있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만일 법적 아버지가 자기 아닌 다른 남자와의 인공수정을 동의했다고 하더라도 정자 판매자에 의해 생겨난 아기의 어머니와 법적 아버지 사이에 나타나게 되는 관계는 人倫을 파괴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첨단의료기술의 발달은 인공수정 뿐만 아니라 體外수정(시험관 아기), 代理母에 의한 출산(예컨대 부인 아닌 다른 여인을 씨받이로 출산하는 경우) 등을 점차 확산시켜가고 있다. 자연의 섭리에 따른 임신과 출산이 아닌 인공적 기술에 의한 수태와 출산에는 인간의 방자함과 그릇된 욕구가 작용할 위험이 너무나 많고 크다. 따라서 우리는 시술하는 의사와 인공수정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윤리의식을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 1993년 1월 31일 경희의료원을 비롯한 전국 40여개 병원에서 자행된 무분별한 인공수정시술을 하면서 심지어 정자제공자의 각종 질병의 유무도 검사하지 않고 수태시술을 했다는 신문기사는 단순한 우발적인 사건들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경희의료원의 자체 조사에서도 650여건의 시술을 하면서 정자를 몇몇 한정된 사람으로 1건당 15만원씩 돈을 주고 매수했고 전혀 아무런 검사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한국의 천박한 의사들의 그릇된 인간관과 윤리수준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긴 하나 이런 사태가 발생할 수 있는 배경은 근본적으로 현대 서양 의학의 基調에서 파생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지엽적인 인공수정의 시술과정 보다는 근본적으로 인공수정 자체에 대하여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인공수정은 근본적으로 자연법을 거스르고 있음을 문제삼아야 한다. 인공수정은 정상적인 부부간의 성행위에 의해 남편의 정자가 아내의 자궁안에 주입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인공수정은 엄연히 혼인행위의 본질에 위배된다. 혼인행위는 사랑의 촉진, 자녀출산, 성적 욕구의 충족 등을 성취할 목적을 가지며 이러한 목적 중에서 어느 한가지라도 떼어내려 한다면 이것은 혼인의 숭고한 목적과 사람다움의 본질을 파괴하는 것이 되며 비윤리적임은 물론이다.

 

우리는 비배우자 간의 인공수정을 다음과 같은 이유로 금지시켜야 한다. 첫째, 부부가 혼인계약 안에서 성교할 수 있는 권리는 그 두 사람만의 독점적 권리이다. 이 권리는 오직 자녀를 낳아야만 하는 권리가 아니라 오히려 자녀를 출산하게 되는 자연적 행위에 있다. 이 권리는 제3자에게 양도될 수 없는 것이므로 제3자에 의한 자녀출산은 일종의 간음행위가 될 것이며 혼인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둘째, 인간의 성기능은 해부학적으로 보나 생리학적으로 보나 분명히 성교를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녀의 출생이 부부의 성교행위에 의한 것임은 자연법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성교가 아닌 어떤 인공적인 수단방법에 의해 출산하려는 것은 자연법을 거스르는 것이며, 비윤리적이다.

 

셋째, 실제로 비배우자간의 인공수정은 실행하는 과정에서 부조리를 가져오게 된다. 우선 수태를 위해 제3자의 정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부부간에 맺어진 혼인계약의 신성불가침적 관계를 침범하는 것이 된다. 또 이러한 방법으로 태어난 자녀에게 그러한 비밀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느냐는 의문과 만일 이 비밀이 알려질 때 그 자녀가 충격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생기며, 또 부부간에 부모와 자식간에 생길 심리적 갈등을 어떻게 해소시킬 수 있겠느냐는 난문이 생긴다.

 

4. 胎內진단기술의 우생학적 사용의 문제

 

양수 검사, 융모막 융모샘플링(CVS : chorionic villus sampling), 수정관치료법 등 태내진단기술은 더 이상 무간섭상태로 방치될 수 없다. 이러한 기술은 처음부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모두를 위한 인도적인 목적으로 의도된 것이 아니라 무분별한 의사들의 지적 호기심 충족과 남아선호사상 등 여성에 대한 편견을 가진 부유한 사람들을 위하여 개발되었다.

 

태내에서의 유전관련 검사와 신진대사 검사가 제한없이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양수 및 양막 검사는 자궁을 통하여 임신한 여성의 복부 내벽에 바늘을 꽂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 과정에서 산모와 태아는 병균에 감염되기 쉽고 특히 태아의 생명을 위태롭게 한다. 특히 양막검사는 유산되는 확률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는 교묘하게 무지한 임신여인에게 테스트를 받도록 압력을 가한다. 문제는 태내진단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누가 어떤 방식으로 '선택'하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임신여인이 실제로 태내진단과 위험한 수정란치료에 대하여, 자발적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하며, 또, 의사가 윤리적인 책임의식을 가지고 이에 임하여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우리나라에서 요즈음 불필요한 제왕절개 시술이 병원당국의 경제적 이윤추구와 비윤리적인 의사와 무지한 임신여인의 공모에 의해서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는 것에 대해 유념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태내진단에 있어서 태아의 권리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각종 검사에서 태아는 생존권과 침해받지 않을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임신부는 수태를 하였으면 유산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며 하나의 생명을 가능한 한 최상의 건강한 상태로 이 세상에 태어나도록 하는 의무를 지닌다. 따라서 母體는 태아에 危害를 초래할 행동이나 태만한 행동을 하지 아니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

 

5. 장기이식과 관련된 윤리문제

 

1991년 6월 17일자 Time誌의 「윤리」난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16살된 딸(아니싸)이 만성 골수백혈병(chronic myelogenous leukemia)으로 죽게 되었는데, 그 부모가 이 딸을 살리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다른 딸을 낳아 이 딸(마리싸)이 14개월이 되었을 때 척수를 뽑아 언니에게 이식시켜 큰 딸을 살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골수이식성공률은 같은 자매끼리는 약 70%이고, 이것의 타당성 조사는 찬성 47%, 반대 37%였다고 한다. 문제는 부모가 자녀들 중 한 자녀의 생명을 구하는 데 필요한 기관이나 조직을 얻기 위하여 새로운 자녀를 의도적으로 낳는 것이 도덕적으로 수용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최근에 자식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합법을 가장하여 入養을 하고 입양한 아이의 장기를 떼어내서 장기이식을 하는 경우가 많이 생기고 있다. 동의를 제대로 구하기 어려운 미성년자의 장기이식은 부도덕한 짓이 아닌가? 부모가 자식의 장기를 임의로 제3자에게 떼어 줄 권리가 있는가? 아기, 즉 사람이 생물학적인 조직을 공급하기 위한 수단으로 취급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리싸와 아리싸의 부모는 부도덕한 짓을 한 것이 된다.

 

이 잡지는 천명을 무작위로 뽑아 장기이식과 관련된 설문조사를 한 것을 기재했다.

 

"살아 있는 사람의 하나의 콩팥을 다른 사람에게 떼어주는 것은 도덕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가?" : 찬성 83%, 반대 10%

 

"당신은 콩팥을 필요로 하는 친인척의 장기이식을 위하여 당신의 콩팥을 기증하겠는가?" : 찬성 88%, 반대 5%

 

"질병치료를 위해 태아의 조직을 이용하는 것을 도덕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가?" : 찬성 36%, 반대 47%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사용될 수 있는 기관을 얻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임신을 하고 낙태를 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가?" : 찬성 18%, 반대 71%

 

"태아의 조직이 이식하는데 적합하지 않는 것으로 판정되었을 때 태아를 유산시키는 것은 도덕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가?" : 찬성 11%, 반대 78%

 

"18세 이하인 어린이에게 친척의 장기이식을 위해 콩팥을 줄 것을 청하는 것은 윤리적인가?" : 찬성 45%, 반대 42%

 

"만일 당신 또는 당신의 친척이 장기이식에 의해서만 치유될 수 있는 치명적인 질병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조치 중 어떤 것을 택하겠는가?"

필요한 장기를 돈으로 사겠다 : 56

필요한 장기를 제공할 수 있는 아기를 낳겠다 : 24%

친척에게 장기를 기증해 달라고 읍소하겠다 : 15%

친척에게 장기를 기증해 줄 것을 강요하겠다 : 5%

 

앞의 설문에 대해서 발표자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질병치료를 위해 태아의 조직을 이용하는 것은 비윤리적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태아의 생존권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또 질병치료의 수단으로 임신하고 태아를 유산시키는 것도 비윤리적이다. 또 미성년자에게 장기기증을 요청하는 것도 비윤리적이다. 장기를 돈으로 팔고 사는 것은 비윤리적이다.

 

6. 인간복제의 문제

 

영국 스코틀랜드 로스린 연구소의 윌머트(Willmut)는 羊의 유선세포(체세포)를 가지고 277번의 시도 끝에 羊을 복제하는데 성공했고 이를 돌리라고 명명했다. 이 돌리의 유선세포의 핵치환의 성공은 인간복제의 길을 터 놓은 것이 되었다. 인간복제는 '천부적 인권파괴', '인간의 종말'이라는 인간의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이미 소와 돼지의 복제는 일반화되고 있는데, 인간복제는 왜 그토록 반대가 심한가? 우리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은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인간은 남녀 두 사람의 상호의존에 의하여, 즉 性交에 의하여 출산되는 것인데, 한 사람의 體세포로부터 많은 복제인간이 태어난다면 근본적으로 인간의 상호의존성은 파괴된다. 인간의 상호의존성이 파괴되면 인간사회는 와해되고 만다.

 

둘째, 아기는 父와 母 두 사람으로부터 각기 다른 유전형질을 물려받음으로 父와 母의 유전형질과 다른 유일한 유전형질을 갖게되어 있다. 그러나 복제인간은 인간의 唯一性과 대치 불가능성을 파괴한다. 따라서 복제인간은 상품으로 전락될 수 있다.

 

셋째, 누구를 복제할 것인가는 사람이 그때 그때 임의로 결정할 수 있게되면 인간의 正體性과 未定性과 自發性이 상실되고 만다. 인간복제술은 동일한 인간을 대량으로 복제하여 나쁜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

 

아이로부터 아이가 생기고 남자로부터도 아이가 생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남녀 구별이 없게 된다. 인간복제는 결국에 가서는 결혼제도와 가정제도를 파괴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비윤리적인 극악한 행위가 될 것이다.

 

[진교훈 교수(서울대학교)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생명윤리연구회 홈페이지에서]



321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