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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의학적 생명연구의 득과 실: 인간 존엄성의 수호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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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6 ㅣ No.355

의학적 생명연구의 득과 실 - 인간 존엄성의 수호를 위하여

 

 

1. 머리말

 

어휘적으로 볼 때 "존엄하다"는 말은 "너무 높아서 함부로 범할 수가 없는 것"이란 뜻을 갖는다. 그러므로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 누구나가 높고 귀한 면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도 함부로 범할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이 된다. 이런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서, 철학과 신학은 인간이 이성적이며 주체적 자유를 가진 존재라든지 신의 모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라든지 하는 높은 인격적 가치에 그 근거를 두고 설명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의학에서는 이것을 인간이 가진 생명 그 자체의 존엄성 때문으로 해석해 왔다. 말하자면 의학적으로 인간이 존엄한 까닭은 그 사람의 사회적 기능이나 인격적, 도덕적 수준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그 사람이 기왕에 갖고 태어난 생명이 한없이 고귀한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이것은 물론 인간 생명이 갖고 있는 거의 절대적 신비감 때문이다. 즉 인간의 생명 탄생과 그 대부분의 생명 현상들이 인간의 생각과 능력으로는 결코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인식과 이런 인식에서 비롯한 신비감이 인간을 한없이 존엄한 존재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같은 사실은 이 세상의 인위적인 어떤 물건에 대해서도 우리가 존엄하다는 말을 붙여 부르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더 확실해지는 일이다. 그러나 이렇듯 신비스럽고 존엄한 존재로 인식되어 오던 인간, 그리고 그 인간 생명이 요즘은 의학적으로도 점차 그 신비로움과 존엄한 힘을 잃어가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힘입은 생명의 기계론적 인식이 크게 머리를 든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 현상까지도 물리나 화학적 법칙에 따라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기계론적 과학사상은 급기야 생명을 구조적으로 밝혀낸다는 분자생물학을 출현시켰으며, 고도의 유전공학 기술에 의해서 이미 생명체 합성이 어느 정도 가능해졌다고 믿는 단계에 와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로써 생명에 대한 신비의 베일을 과학이 얼마만큼 벗겼다고 생각하는 상태에 이른 것이고, 이것은 결국 인간 생명을 더 이상 범할 수 없는 신비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오늘날 사회풍조의 배경과도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 의학을 포함한 생명과학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는 줄기찬 이런 생명 연구와 갖가지 생명조작적 기술들, 예컨대 인공유산이나 불임수술 그리고 인공수정이나 생체실험, 안락사와 같은 기술들도 전통적 교회 윤리학에서는 결국 인간 생명에 대한 존엄성의 상실과정에서 빚어지는 일들로 보고, 그 개발과 보급상태에 깊은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생명체를 합성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분자생물학과 유전공학의 기술, 그리고 다분히 반생명적 활용의 가능성을 내포한 갖가지 생명조작적 기술들의 내용은 과연 무엇이며 이들이 갖는 인간 존엄성의 문제는 어떠한가?

 

 

2. 생명체 합성 및 조작적 연구의 문제

 

모든 생물로 하여금 각기 그 특유의 형상과 기능을 가지게 하는 유전단위가 세포핵 내의 염색체선상에 배열되어 있다는 것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미국의 유전학자 모건이다. 그는 이 연구로 1933년도 노벨상을 받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단지 유전물질의 위치를 알아낸 것일 뿐 그 정체까지 알아낼 수 있다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많은 학자들이 이 유전물질에 관한 연구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고, 1944년 영국의 에브리가 이 물질이 DNA라는 사실을 밝혀냈으며 1953년에는 미국의 왓슨과 크릭이 이 DNA 구조가 산소, 수소, 탄소, 인산 등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이중나선 모양이라는 것을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 연구로 1962년 노벨상을 공동 수상한 이들의 DNA 구조 규명은 과학사상 다윈의 '종의 기원'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와도 버금가는 대발견으로 꼽힐 정도다.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이 발견이 생명 현상을 분자 수준의 과학적 연구 대상으로 만들어놓은 획기적인 계기가 된 까닭이다.

 

이후로 약 10여 년 간 유전자의 유전적 조절기구와 유전암호 해독을 위한 많은 연구와 실제적인 유전자 조작 기술들이 발달했고, 드디어 1973년 미국 스탠포드 대학의 코헨과 보이어가 조작적인 특정 DNA를 가진 대장균을 증식시켜 냄으로써 생명체조작의 막을 올렸던 것이다. 물론 그 후로 지금까지의 유전자 조작 기술도 복잡한 DNA 구조상의 극히 일부분을 바꿔 끼우는 정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이 일로 전혀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현재로서는 이처럼 생명 현상을 분자 수준에서 설명해 보자는 생각을 학문적 체계로 발전시켜 온 대부분의 분자 생물학자들 자신도 그들의 기술이 생명에 관한 신의 영역까지를 침범할 수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예컨대 지금까지 생각으로는 인간의 동물적인 면이 유전자의 작용에 의해서 결정되고 있는 게 사실이며 이 유전자가 DNA라는 화학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긴 하나, 이것으로 각기 다른 동물들이 갖고 있는 행동적 특성-즉 동물이 각각 그 특유의 동물일 수 있는 성격-까지를 설명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말하자면 모든 생물에는 그 바닥에 DNA라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어서 여러 가지 현상을 환원적으로 설명하게도 되지만 한편 이런 공통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쥐는 쥐, 고양이는 고양이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단지 분자적으로 또는 화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는 일이다. 생물을 미시적 차원에서 보려는 분자생물학에 대항해서 이를 거시적으로 이해하고 연구해야 한다는 동물행동학(ethology)이 등장한 것은 바로 이런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은 결국 분자생물학자들의 생명 연구가 앞으로 더욱더 활발해질 것이며, 또 생명체를 그 발생단계에서 마음대로 조작하는 유전공학적 기술이 더욱 발전해 갈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됐을 경우 장차 인류가 겪게 될지도 모를 무서운 생물학적 재해의 위험 가능성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예컨대 지금까지 비병원성(非病原性)이던 세균이 유전자 조작 실험에 쓰이는 도중 무서운 병원성을 띄고 공기 중에 퍼질 위험성이라든지, 특정 산물 생산능력을 가진 합성세균이 몸속에 서식하며 해당물질을 마구 생산해 낼 가능성, 그리고 연구용 발암성 유전자를 가진 세균이 실험실 밖으로 확산될 가능성 등등 그 잠재적 위험성은 여간 큰 게 아니다. 더구나 이런 생명체 조작 기술이 일부 악한 사람들에 의해 무섭게 남용될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유전공학 기술은 그것이 올바른 사람들에 의해서 잘만 사용된다면 현재 우리 인류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 예컨대 식량이나 자원의 대량생산과 공해문제 그리고 많은 질병까지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기술이다. 그러나 이것이 잘못 쓰이게 되면 우리 인간에게 무서운 재해를 가져다줄 뿐 아니라 생명의 신비를 부정하고 이를 단지 물리화학적 특수 현상으로 인식함으로써 결국 인간의 존엄성을 해칠 소지 또한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도 1982년 그를 방문한 세계 의학총회 대표들에게 인간의 유전자 조작 기술의 위험성에 대해서 깊은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그는 설사 의학 분야의 기술이 인간의 유전자까지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게 된다 해도, 유전병 환자를 직접적으로 치료해 주는 일 외의 어떤 시도, 예를 들어 지능지수를 높인다든지 하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다는 교회의 태도를 밝힌 적이 있다. 생명 현상의 기본적 표현인 유전자에 대한 연구와 그 조작 기술의 미래는 결국 과학자들의 양심과 실험적 연구의 안정성 대책에 대한 각 국 정부의 책임 있는 관여 여하에 달려 있는 일인데 장차 이 모든 일이 얼마나 가능한 일일지 지금은 누구도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다.

 

 

3. 산아제한과 관련된 의학적 기술들의 문제

 

인구증가의 문제를 오늘날 이 지구상 인류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로 꼽는 일에 대해서는 별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 그동안 세계 여러 나라의 출생률이 계속해서 높았던 탓도 있으나 특히 20세기 이후 환경위생과 의학기술의 발달에 의한 사망률의 급격한 감소가 인구의 자연증가율을 크게 높임으로써 인구의 절대수 증가를 가져왔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인구의 증가는 경제력이 낮은 후진국일수록 심한 형편이고 따라서 이런 나라들의 경우 식량이나 주택, 그리고 자원이 더욱 부족한 형편에 놓이게 됨으로써 인구억제를 국가 개발정책의 중요한 한 가지 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1961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는 과정에서부터 강력한 인구정책을 펴기로 하고 오늘날까지 각종 피임사업을 통한 출산 억제 정책을 강력하게 펴온 것이다. 인구의 과잉 때문에 사람이 가난하게 살게 된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인간다운 생활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고 따라서 인구 과잉이 곧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일이라는 것이 국민적 출산억제의 중요한 이유이다.

 

가난한 나라에 인구가 많아지고 생활이 어려운 부부들이 불필요하게 자녀를 많이 낳는 일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교회도 대체로 의견을 달리 하지는 않는다. 물론 이런 출산억제 정책이 부부들의 지나친 이기심에 의한 극도의 피임사고를 유발시키고 있다든지 잘사는 나라와 못사는 나라들 사이에 더욱더 필요해진 분배와 협력의 정신이 없어지게 되는 점들에 대해서만은 교회가 늘 우려를 표명해 왔다. 사실 적절한 이유가 있을 때 부부가 출산을 조절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출산조절의 방법이다. 정부나 가족계획 단체들이 그동안 출산 억제 방법으로 실시해 온 인공유산이나 불임수술 그리고 조기 유산방법의 하나에 속하는 월경조절법은 물론이지만, 기타 자궁내 장치라든지 경구피임약 그리고 각종 살정제(殺精劑)나 콘돔까지도 교회에서는 그 사용을 반대해 왔던 것이다. 이들 인공적 피임 기술들의 사용을 교회가 반대해 온 이유는 매우 분명하다. 그것은 이들 모든 기술이 부부간의 사랑에는 물론이지만 인체에 해를 주며, 특히 그 작용원리상 이들이 모두 반생명적이기 때문이다.

 

임신된 태아의 생명을 임의적으로 빼앗는 인공유산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자궁내 장치 또한 수정된 난(卵)의 자궁내 착상을 막음으로써 그 자체가 사실상 유산기술에 속하는 것이다. 월경조절법 또한 남녀 성행위 뒤 다음 월경이 있기 전, 미리 월경을 유도하는 기술이라고는 하나 실상은 착상되었을지도 모를 작은 수정란을 기계적으로 제거하는 방법이고, 원리상 배란을 억제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피임약도 자궁내막에 변화를 일으켜 수정란의 착상을 막는 일이 적지 않다. 임신이 가능한 시기에 사용하는 살정제나 콘돔 또한 이미 배란된 난자와의 만남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 반생명적으로 보는 것이다. 한편 남녀에게 모두 적용되는 영구불임술은 남자의 경우 정관을, 여자의 경우는 난관을 결찰 또는 절단하는 수술로서 역시 생명 창조의 기능을 기계적으로 없애버리는 반생명적 일이며 교회 윤리로 볼 때 소위 '전체의 원리'(principle of totality)에 위배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부부가 서로 임신을 원하지 않을 때에는 가임기(可姙期)를 인내와 사랑으로 피하는 주기적 금욕생활이 오히려 생명을 존중하는 유일한 출산조절 행위이며 따라서 교회에서도 이 자연적인 가족계획 방법만을 올바른 출산조절 방법으로 권하고 있는 것이다.

 


4. 인공적 생식기술과 태아 성감별의 문제

 

자녀가 없는 부부들에게 자녀를 갖도록 해주는 기술로 개발된 인공수정이나 체외수정을 통한 시험관 아기 탄생 같은 생식의학 기술은 언뜻 인간 생명에 대한 긍정적 기술로 여겨진다. 그러나 실제로 그 기술이 사용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생기는 남녀 생명 세포에 대한 조작적 행위와, 특히 체외수정 과정에서 생기는 많은 수정란의 파괴는 엄연한 반생명적 행위인 것이다. 이런 기술이 잘못 사용되었을 때의 위험이 큰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지만 고의적이 아닌 경우에도 이 일이 초래할 수 있는 사회적, 법적, 윤리적 문제 또한 매우 클 것이다. 그러나 인공수정의 이유가 되는 남자의 무정자증이라든지 체외수정을 해야 하는 여자의 난관이상 같은 것은 이를 근본적으로 치료하는 기술의 개발이야말로 진정 생명에 봉사하는 일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1981년 호주 멜버른 시의 프랭크 리틀 대주교의 교서 가운데 체외수정에 의한 시험관 아기에 대한 다음과 같은 내용은 이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태도를 잘 반영해 주고 있다. 즉 "인간은 어떤 목적을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일을 정당화할 수 없다. 시험관에서 생산되는 인간 생명은 정말로 완전하고 적절하며 또 올바르게 인간 생명으로써 보호를 받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의 인간과학 발전의 산물이고 연구 대상물인가? 인간 생명의 전수와 자녀의 출산이 결혼이라는 사랑의 결합에서가 아닌 과학적 조작에 의해서 생기는 일이 과연 하느님의 뜻에 맞는 일인가?" 하는 점이다.

 

한편 임신된 태아의 이상 유무를 알아내기 위해서 개발한 각종 태아 진단 기술이 태아의 선별 유산을 목적으로 적지 않게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 의학기술이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일에 악용되는 가장 두드러진 예 중의 하나이다.

 

 

5. 생사에 관한 의학적 판단기술의 문제

 

오래 살고 싶어하는 인간 누구나의 욕망 충족을 위해 부단히 발전을 거듭해 온 의학기술이 이룩한 공적은 크다. 20세기 초만 해도 불과 30년 안팎의 평균 수명을 누리던 많은 나라의 남녀가 지금 모두 70세 안팎의 평균 수명을 누리게 된 것이 바로 그 좋은 증거다. 그러나 이렇게 늘어난 수명이 모두 건강한 삶이 아닌 것에 우리는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고도의 의학기술이 아니면 이미 죽었을 환자들이 때로는 엄청난 고통을 겪으면서도 겨우 생명만을 유지하고 있어야 하는 일이 그 한가지다. 여기서 생겨난 문제가 바로 안락사 또는 존엄사의 문제다. 환자가 죽기를 원할 때 의사가 그를 죽여도 좋으냐 하는 문제와 회복이 불가능한 무의식 상태의 환자에 대해서 치료를 중단함으로써 그를 죽게 내버려두느냐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무의식 상태의 환자에 대한 존엄사는 몇 가지 조건에 합당할 때 교회도 이를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있기는 하나 안락사에 대해서만은 역시 이를 반생명적 행위로 규정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일로 판단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신앙교리성성(信仰敎理聖省)에서 발표한 안락사에 관한 선언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 즉, "어느 누구도 그 무엇도 무후한 인간존재, 갓 태어난 아기든, 어린이든, 노인이든, 불치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이든, 죽어 가는 사람이든 결코 인간의 살해는 용납할 수 없는 일임을 다시 한번 확고히 천명한다.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든 아니면 자기가 돌보는 사람을 위한 것이든 어는 누구도 이러한 살인행위를 요청할 수 없고 또 누구도 거기에 함축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 그것은 하느님의 법을 침범하는 문제이고 인간 존엄성에 대한 모욕이며 생명을 거스르는 범죄요 인간성에 대한 공격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한편 최근 급속히 발전해 온 장기이식 수술은 특히 죽은 시체로부터 필요한 장기를 떼어낼 때, 의사는 죽음의 올바른 판단 여부에 관한 중대한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그것은 장기이식에 주로 쓰이는 심장이나 간 그리고 신장 등이 제대로 이식되기 위해서는 그들의 기능이 비가역적(非可逆的)인 상태에 있지 않아야 하는데, 통상 호흡과 뇌기능의 정지로 판단되는 죽음을 과연 완전한 죽음으로 봐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호흡정지나 뇌사만으로 의사에 의해서 사망이 확실하다고 진단된 사람들이 얼마 뒤에 생명을 회복했던 예가 없지도 않은 것을 보면, 의사들의 이런 사망 판단이 때때로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가를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들은 결국 인간이 다른 별개 인간의 태어남과 죽음에 관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따라서 이런 일에 직업적으로 관여하는 의사들의 윤리의식이 얼마나 높아야 하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6. 인체실험과 과잉과소 진료의 문제

 

질병과 사망은 건강과 생명의 반대 개념이다. 따라서 건강과 생명을 보전하고 그 가치를 높이는 일은 곧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현양(顯揚)하는 일이므로 질병치료를 위한 의학적 행위는 참으로 좋은 일인 것이다. 생명에 봉사하기 위한 일체의 의학적 연구와 실험이 윤리적으로 정당화되는 것도 바로 이런 까닭에서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는 이런 의학적 연구나 실험이 오히려 인간 생명을 파괴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떨어뜨리는 일로 자행된 경우를 종종 본다. 사람을 의학적 연구나 실험의 대상으로 했던 나찌 수용소에서의 일들이 그 좋은 예이다.

 

물론 진정한 의학 연구와 발전을 위해서는 때때로 사람 자신이 그 연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경우가 없지도 않다. 그래서 실제로 질병의 진단과 치료를 위한 지식과 기술 개발을 위해서 사람을 대상으로 한 인체실험이 이루어져 온 것이 사실이며 앞으로도 어느 정도의 인체실험은 불가피할 것이 확실하다. 나찌 정권이나 일부 악의적인 연구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일들을 경험삼아, 그동안 세계 각 국은 인체실험에 대한 적절한 윤리원칙을 정하고 국제적으로도 '뉴렌베르그 규약'이나 '헬싱키 선언'같은 것을 만들어 인간의 존엄성을 최대로 지킬 것에 대해 약속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들이 지켜지지 않음으로써 생길 수 있는 '위험가능성'(potential harm)이 언제나 존재하고 있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물론 이 위험가능성 때문에 일체의 인체실험이 금지되어야 한다는 데 대해서 모든 윤리신학자들이 의견을 같이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실상 생활에 응용되는 모든 과학기술이 이런 정도의 위험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인체실험에 관한 한, 그 직접적인 대상이 사람이라는 사실에 특히 주목해야 하며 따라서 진실로 그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하는 의학적 조치가 아닌 경우는 반드시 이를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와 근거가 있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현재로서는 실험자와 피실험자 간에 인체 실험에 관한 고지된 동의(informed consent)가 있는 경우는 일단 이를 정당화하고 있으나, 이것 또한 이런 실험에 있어서 인간의 존엄성이 행위적으로 지켜지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못된다.

 

한편 환자의 질병을 진단, 치료하는 일에 있어서 부당하게 그 정도를 더하고 덜하는 의사의 소위 과잉·과소 진료행위가 인간성을 해치는 일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보호에 있어서 다른 의학기술들이 갖는 문제들처럼, 이 일 또한 의사들의 윤리적 감각에 따라 크게 좌우되는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의사들의 이런 행위의 책임이 반드시 의사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불균등한 의료자원의 분배나 개인의 의료비 지불능력의 차이, 그리고 의사-환자 상호간의 인간적 불신에서 오는 의사들의 방어적 진료(defensive medicine) 등 차라리 한 나라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의 사정이 이런 일에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필요한 경우 누구나 적절한 의료혜택을 받도록 하는 일은 누구나의 생명이 다같이 귀하다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일이며, 따라서 불균등한 의료행위와 그런 행위가 가능하도록 하는 사회제도를 개선하는 일이 곧 의학적 입장에서 본 인간의 존엄성 유지와 보전의 지름길이기도 하다.

 

 

7. 맺음말

 

인간성에 바탕을 두지 않은 모든 학문과 기술은 결국 인간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배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의 인류문명의 역사는 인간을 철저히 행복하게 하기보다 차라리 인간의 본래적 존엄성마저 잃게 하는 기술개발에 더 열중해 온 감마저 주게 할 정도다. 다소 생활의 편익을 준 것이 사실인 오늘날의 과학발달은 그 대신 가공할 핵무기의 개발과 각종 공해산업의 증가 그리고 끊임없는 자연파괴를 통해서 인간 생명을 계속해서 위협하고 있으며 인간을 점차 무력한 존재로 만들어버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일은 고도의 의학적 기술이 우리 생활에 응용되어 오는 과정에서 또한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앞에서 살펴보았다.

 

결국 우리가 여기서 얻게 되는 결론은 반생명적인 요소를 지닌 어떤 기술도 인간을 참으로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인간 생명에 대한 기계론적 인식과 이를 바탕으로 한 생명 연구들이 초래할 가공한 피해, 그리고 결국 생명을 해치는 이기적 생활기술들로 나타나는 의학 연구들에 대해서 그 어느 때보다 다시 한번 깊은 통찰을 해야 할 때이기도 하다. 신비로운 모든 것에 대해서 갖는 인간의 과학적 탐구욕이 지금 생명의 신비마저도 벗겨보려는 노력을 마다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하나, 실상 생명의 신비에 관한 한 오늘의 과학은 그 벗겨지는 베일 뒤로 더욱더 무한한 신비를 간직하고 있음을 발견할 뿐이다. 그러므로 생명과학으로서의 의학은 오로지 생명의 신비를 더한층 드러내는 증인이 되어야 하며 이 일을 통해서 인간이 얼마나 존엄한 존재인지를 역설하는 참된 인간성의 과학으로 끝까지 남아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맹광호 교수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생명윤리연구회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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