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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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생명] 인간의 생명에 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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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6 ㅣ No.352

인간의 생명에 관한 고찰

 

 

I. 문제제기

 

현대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다양하다. 그 중 인구문제도 결코 소홀히 취급할 수 없는 문제로 등장한 지 이미 오래이다. 인구의 증가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 또한 심각하다. 이러한 인구의 증가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로서 산아제한(조절)이라는 방법이 등장했고, 인구증가를 억제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산아제한은 여러 가지 예견치 못한 부작용을 초래했음도 주지의 사실이다. 인구증가의 억제라는 목적 달성에만 집착한 결과 그 목적의 달성에 이용되는 방법에 대해서는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그 결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용인된다는 풍조도 만연하게 되었다.

 

인간의 생명 경시 풍조도 산아제한이 야기시킨 하나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면, 인간의 생명에 대한 재고찰이 어느 때보다도 시급하다고 볼 수 있다. 산아제한 또는 산아조절이라는 원칙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으나 그러나 원칙을 적용시키는 방법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이 있다. 서로 상이한 방법은 근본적으로 인간생명의 기원을 어느 시점에 확정지우는가 하는 문제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II. 인간 생명의 기원에 대한 견해

 

산아제한의 등장으로 인해 야기되는 피임, 낙태 등의 문제와 관련하여 인간 생명의 기원에 대한 문제가 현실적으로 시급하게 대두되었다. 즉 인간의 성장과정에서 어느 시점부터 생명에 대한 권리를 인정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인간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는 상이한 견해가 있다. 이 견해들을 간략하게 고찰하고자 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정자세포와 난자세포의 결합 순간에 영혼이 주입되고1) 인간적이고 인격적인 존재의 생명이 시작한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는 오늘날 가장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다.

 

이상의 견해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2) 인간의 영혼 주입시기를 정자세포와 난자세포의 결합 순간보다 약간 늦은 시점으로 주장한다. 이 주장은 수태(수정) 후 2주일이 되는 시점부터 일란성 태아 또는 이란성 태아의 생성이 최종적으로 결정된다는 데 근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수태 후 2주일 이전에는 인간의 영혼 주입은 발생하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영혼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고, 만일 수정 후 이란성 태아가 생성되는 경우 제 2의 영혼이 추가되어야만 하는데 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 생명의 기원을 '대뇌의 형성'과 연결시키고자 하는 견해도 있다. '대뇌의 형성'과 더불어 인간의 인격을 위한 결정적인 가능조건이 발생하며, 그 결과 영혼의 주입이 발생한다는 것이다.3) 동시에 대뇌의 형성은 인간 생명의 기원을 확정지우는 데 있어서 뿐 아니라, 인간의 죽음의 시점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기준을 제공한다고 한다. 대뇌의 기능이 중지되면 인간을 더 이상 인간존재로 볼 수 없듯이 이 대뇌의 형성 이전에도 인간을 인간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신 능력이 존재하지 않고, 그에 따른 구조와 기능이 결여되어 있는 한 성장과정에 있는 인간의 생명현상은 다른 생명체와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4) 즉 대뇌는 인간의 의식과 자유의 완성을 위해 결정적인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 생명의 기원에 대한 또 다른 견해는 고유한 모성이 시작되는 곳에 인간의 생명이 시작한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모체에 수태된 난세포가 정착하는 시점을 의미한다. 이 견해는 수정된 난세포의 많은 부분이 모체에 정착하지 아니하고 그 전에 소멸된다는 사실에 착안하고 있다. 즉 수정된 모든 난세포의 구조를 위해 온갖 노력을 해야 할 만큼 이것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생명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 생명의 기원에 대한 이상의 견해들을 주목하면서 결론을 내려보고자 한다. 인간의 성세포(性細胞)는 여러 분할을 통해 새로운 인간존재를 발생시키는 성향을 소유하고 있다. 이 성향은 전형적으로 인간적인 것이다. 이 성세포는 하나의 생명체를 출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이 생명체는 전형적이고 특수한 인간적인 요소들 - 직립이동, 언어, 도구사용 등 - 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성세포는 본질적으로 동·식물의 성세포로부터 구별된다. 인간의 성세포는 정신적 행위(의식과 자유)를 그 본질로 하는 한 생명체의 출현을 향하여 질서지워져 있다. 물론 개별적인 성세포는 하나의 성숙한 인간의 형성을 초래하는 발육을 촉진시키는 상태에 있지 않다. 이것을 위해서는 정자세포와 난자세포와의 결합이 결정적이다. 이 두 세포가 결합되는 곳에 비로소 인간의 생명이 시작된다. 이런 의미에서 생명은 하나의 '시간 - 형태'를 지니고 있다. 하나의 생명체는 자신의 고유성을 개별적인 순간 안에가 아니라 성장과정의 사건 안에 드러낸다. 이 때 성장과정의 여러 단계가 나타난다.

 

이러한 여러 단계는 해당 종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도 출생 전 시기로부터 유아기, 청년기, 장년기 끝으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한다. 인간존재의 시작은 그러므로 인간 생명의 전체 성장과정이 시작되는 때이고, 그것은 바로 정자세포와 난자세포의 결합의 순간이다. 인간 생명의 시작을 정자세포와 난자세포의 결합 순간보다 더 늦은 시기로 잡는 견해들은 대부분 전통적인 육(肉)과 영(靈)의 이원론(二元論)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들은 육과 영을 두 개의 별개의 본체로 이해한다. 육과 영의 이원론은 인간의 생성에 있어서 두 개의 본체가 따로따로 존재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이원론은 오늘날 점점 배척당하고 있다.

 

인간 생명의 기원에 대한 학문적 논쟁은 의학의 진보로 인해서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철학과 신학도 이 문제에 대한 새로운 고찰의 필요성을 요구하고 있으며, 서로 상이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 영혼, 영혼의 주입 등의 개념들은 그 자체 매우 사변적인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사변적인 문제점들에 대해 의학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 생명의 기원(영혼주입)에 대한 신학적 또는 철학적 고찰을 시도함으로써 이 복잡한 문제의 이해에 어느 정도 접근하고자 한다.

 

 

III. 영혼의 존재에 대한 기준(표지)

 

평범하고 일상적인 언어, 어풍은 '인간은 영과 육으로 결합된 자'라고 말한다. 이에 의하면 인간의 생명은 영과 육이 공존하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영과 육의 공존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제기되고 이 공존을 확인할 수 있다면 문제는 간단하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인간의 육체적인 성분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인간의 육체성은 수정된 난세포 안에서 시작되며, 태아로 성장, 발육하고, 출생 이후 모체로부터 독립한다.

 

문제는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확증지을 수 있는가 하는 데 있다. 영혼의 확증에 대한 인식은 두 가지 방법으로 시도되어져 왔다. 첫째, 인간의 생물학적 - 육체적 소여성(所與性)을 영혼의 존재 기준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둘째, 정신적인 기능으로부터 영혼의 존재 확인에 대한 출발점을 잡는 것이다. 첫째 방법은 별다른 근거 없이 영혼의 주입은 정자세포와 난자세포의 결합에 의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즉 순수한 생물학적 기준이 영혼의 존재를 확정지우는 데 기여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은 불충분한 것이라는 것을 재삼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과 육을 완전히 동일화하지 않고는 생물학적 소여 그 자체로부터 영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지하게 학문을 연구하는 자라면 아무도 이런 논증을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즉 생물학적 발달의 시점 - 난자세포와 정자세포의 결합, 또는 수정된 난세포의 모체착상, 또는 대뇌의 형성 등 - 중에서 어느 한 시점을 선택하여 거기에 인간적이고, 인격적 존재의 형성을 위한 결정적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그 선택한 시점을 영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기준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로써 영혼의 존재를 위한 기준은 더 이상 생물학적인 요인이 제공하지 않고 오히려 한 인간은 방해받지 아니하는 발달과정을 통해 의식과 자유와 더불어 생성한다는 사실이 영혼의 존재에 대한 기준을 제공하게 된다.

 

이로써 영혼의 존재를 인식하기 위한 두 번째 방법에 들어섰다. 두 번째 방법의 경우 영혼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생물학적 소여가 그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완성을 향한 목적론이 그 기준이 된다. 우리는 이 두 번째 방법의 특성을 정확하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 이 방법은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태아로부터 확인하거나 또는 인정할 수 없는 의식과 자유의 현재 행위로부터 영혼의 존재를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5) 언젠가 어느 시기에 인격적 행위를 가능케 만드는 생물학적 발달로부터 영혼의 존재를 추론하고자 한다.

 

만일 '행위는 존재에 따른다'(Agere sequitur esse)는 공리에 따라, 인간 영혼의 존재를 위한 기준으로 분명한 정신적 행위가(의식과 자유행위) 요구된다면, 정신적 행위의 발생시점을 상당히 늦은 시기에 잡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새로 태어난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아직 의식과 자유행위를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해서 A. Rosmini는6) 영혼의 주입 시기를 어린 아이의 첫 지적 행위가 발생하는 시점과 동일시하였다. 그는 영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지적 행위를 통해 구성된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Rosmini의 이러한 견해는 교회로부터 거부되었다.7) 동시에 태아의 출생시 영혼이 발생한다는 J.Caramuel의 견해도 교회로부터 거부되었다.8) 이미 출생 전 그리고 출생 이후의 성장의 연속성이 이러한 견해를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영혼의 존재를 위한 기준으로써 '생물학적 소여'로 만족하고자 한다는 것은 그렇게 무리한 시도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 그러므로 하나의 어려움이 발생한다. 즉 한편으로 영혼의 주입시기는 순수한 생물학적 소여성 그 자체로부터 추론할 수 없다는 것과 다른 편으로 인간이 분명한 정신적 행위를 일으킬 처지에 있는 그곳에 영혼이 출현하지 않는다는 데 어려움이 있다. 이 어려움은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완전히 별개의 실체로 포착하지 않을 때 해결될 수 있다. 만일 육체가 '영혼의 실재상징'(Realsymbol)이라면, 인간 육체의 형성은 이미 단순한 동물적 생명보다 더 높은 차원에 있는 사건이 아닐 수 없으며, 그 결과 이미 영혼을 향하여 질서지워져 있다. 다른 편으로 영혼의 완전한 실현은, 영혼의 의식과 자유의 성취 안에 자신을 드러내는 곳에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만일 그 이전에 영혼의 완전한 실현을 인정한다면 의식과 자유는 단순한 우연에 불과하게 되고, 그 결과 영혼과 인간존재에 있어서 본질적인 구성요인이 될 수 없게 된다. 이 사실은 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신학은 인간을 하느님의 동반자로 이해하기 때문이다.9) 인간은 자신의 의식과 자유를 통해서, 즉 자기 정신의 초월성을 통해서 하느님의 동반자가 된다. 이 초월성이 아직 실현되지 않은 곳에, 즉 인간이 믿음과 사랑 안에서 하느님에 대한 태도를 표명할 수 있는 능력을 아직 지니고 있지 않은 곳에서 인간은 아직 하느님의 동반자로 여겨질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과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우연적인 실재로 이해한다는 것은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용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영혼의 완전한 실현은 의식과 자유행위 안에 자신을 드러낼 때 성취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외에 다른 가능성은 없다. 이것은 그러나 난세포의 성장으로부터 의식의 출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안에 어떤 정신적 원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정신적 원리는 태아의 성장과정 안에 - 자유와 의식의 성취 안에 자신의 완전한 실현을 나타내기까지 - 점차적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 그러므로 태아의 성장 초기에 활동하는 정신적 원리와 인격적 행위 안에 의식되는 영혼 사이에 하나의 연속성 그리고 동일성이 존재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바로 여기에 가능태로부터 행위에로의 전이가 존재하고 있다.

 

만일 영혼의 주입에 대한 이러한 점진적(진행적)인 이해를 거부하고, 영혼은 단 한번에 완전하게 실현되어져야 한다거나, 아니면 영혼은 도대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한다면, 영혼의 주입시점을 인간의 성장과정 중 어느 일정한 시점으로 잡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그러나 생물학적인 성장 과정은 수정된 난세포로부터 인간 의식의 출현에 이르기까지의 계속적인 연속성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영혼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기준으로써 어느 일정한 시점을 선정한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정자세포와 난자세포의 융합도 시간적인 연장의 한 과정이며10) 더구나 수정된 난세포의 모체착상, 그리고 대뇌의 형성도 시간적 연장의 과정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발달 과정 안에서의 영혼의 주입을 정신적 가능태의 점진적 실현이라기보다 진행적인 것으로 이해하거나, 아니면 영혼의 주입을 태아의 자아초월로 이해하지 않는 대신 하나의 초월적 원인을 전제로 하여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초월적 원인은 절대적인 순간의 개입으로 하나의 영혼을 창조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의 논리적 귀결은 완전한 육과 영의 이원론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러한 이원론은 오늘날 더 이상 용인되지 않고 있다.11)

 

 

IV. 가능태의 개념

 

만일 인간의 영혼이 정신적 활동의 출현 때 비로소 완전하게 실현된다면 그 전에 작용하는 정신적 원리를 영혼에 대한 하나의 능동적 가능태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가능태는 태아 안에서 정신적 생명을 위한 육체적 가능조건이 형성되는 데 따라서 완전한 실현에로 접근한다. 이때 물론 가능태의 발달은 그 연속성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으로 동일한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난자세포와 정자세포의 결합, 모체에의 착상, 대뇌의 형성처럼 여러 특별한 단계를 거치면서 이루어진다. 물론 아직 수정되지 않은 난세포와 정자세포도 어떤 정신적 가능태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생물학적 연구는 원칙적으로 미수정된 난세포로부터 인간의 출현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한 바 있다.12) 이러한 제시는 물론 정신적 활동원리, 즉 가능태로서의 인간 영혼의 존재는 아직 엄밀한 의미의 인간적 존재로 결정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수정되지 아니한 난세포 안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가능태라는 개념이 무언가 분명한 이해를 제공해 줄 것이다.

 

가능태라는 개념은 다양한 의미로 이해되어 질 수 있다.13) 가능태는 객관적 가능태와 수동적 가능태로 구별되어 진다. 객관적 가능태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실 수 있는 어떤 것이며, 수동적 가능태는 하나의 행위를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인간의 태아는 처음부터 능동적 가능태와 수동적 가능태를 결합시키고 있다. 인간의 태아는 스스로 작용을 야기시킬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으며, 또한 다른 원인에 의해 주어지는 새로운 결정들을 지속적으로 받아들일 능력도 소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수정되지 아니한 난세포는 스스로 자신을 생명력을 지닌 인간으로 성장시킬 상태에 있지 않다. 정사세포와의 결합을 필요로 한다. 뿐만 아니라 수정된 세포라 할지라도 모체의 기관에 착상하지 않거나, 또는 영양분을 공급받지 아니하고서는 스스로 자신을 성장시킬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수정된 난세포 그 자 체는 살아있는 아기의 출생을 위한 충분한 능동적 가능태가 아직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 대신 다른 원인, 즉 다른 능동적 가능태와의 협력을 필요로 한다.

 

만일 한 인간이 자유와 그리고 의식과 더불어 생성되어야 한다면, 필연적으로 또 다른 원인을 필요로 한다. 즉 어린 아이는 타인격과의 만남을 필요로 한다. 부모 그리고 타인과의 응답관계안에서만이 어린 아이의 자유와 의식은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응답관계를 위해서도 태아는 아무런 능동적 가능태를 소유하지 못하고 있다. 그 대신 태아는 다만 자신이 수용한 영향에 부합하게 정신적 행위에로 도달할 수 있는 능력만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수정된 난세포를 인간의 생성을 위한 유일하게 결정적인 능동적 가능태로 간주한다는 것은 부당할 것이다. 인간의 생성에 있어서 공동작용을 일으키는 다양한 원인들이 모두 동일한 위계에 속한다고는 할 수 없다. 모체로부터 제공되는 영양분은 태아의 형성을 위해서는 유전인자를 내포하고 있는 염색체보다는 덜 중요함이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성이 덜한 원인들도 태아의 생명과 성장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가능조건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수정된 난세포가 모체에 착상할 시점에 이르기까지 약 30%∼40%정도 소멸하고 만다.14) 이 소멸되는 세포들은 다양한 요인들과의 공동협력에 있어서 장애물의 등장으로 인해 생명력을 상실한 것이다.

 

태아와 모체기관 사이의 관계는 완전히 성숙한 인간과 그가 취하는 영양분 사이의 관계처럼 그렇게 동일하게 취급되어져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후자의 경우 이미 완전하게 실현된 인간이 전제되어 있으나, 전자의 경우에는 태아와 다른 원인을 통해 점차적으로 구성되어져야 할 인간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완성된 인간이 자신의 주위세계와 가지는 관계도 너무 피상적인 것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주위세계는 인간 육체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이 자존하는 정도에 따라 주위세계로부터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다. 이 자존이 아직 불가능한 곳에는 자신의 주위세계로부터 구별되는 개체의 분명한 한계를 그을 수 없게 된다.

 

인간의 태아는 그 자체 인간의 생명을 생성시키는 데 있어서 아직 아무런 능동적 가능태를 제시하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인 의미의 개체성을 태아에게 인정할 수 없다. 태아는 어떤 단계에서부터 자신의 유전인자에 의해 결정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생물학적 요인들은 아직 인간 인격의 완전한 개체성을 결정해 주지 않는다. 인격적 개체성에는 부모 그리고 기타 타인에 대한 관계와 아울러 자신의 자유를 바탕으로 한 점진적인 태도가 속한다. 이렇게 유전인자와 주위세계의 영향은 하나의 생명체가 개체화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원리가 된다.15) 오로지 유전인자 하나만을 통해 인간 인격의 개체성을 규정지으려고 시도하는 것은 생물학적 오해를 야기시킬 것이다. 인간은 단지 유전인자와 주위세계의 산물일 뿐 아니라, 자신의 자유스러운 결단의 산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의 태아를 완전한 인간 인격 실현의 생성에 대한 능동적 가능태로 여긴다면, 이 태아는 출생 이전 성장과정의 어느 한 순간부터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지 또는 없는지라는 물음을 제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태아는 인간 인격의 완전한 실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한 인간이 아니고, 그렇다고 인간 이하의 존재도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 이하의 존재는 그 자체 인간의 정신인격 생성을 위한 능동적 가능태를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태아가 한 인간이 될지 또는 안될지라고 묻는 것이 올바른 물음의 제기가 될 것이다. 오로지 이 표현방법만이 능동적 가능태에 적합한 것이다. 이 표현을 통해 한 존재는 아직 완전한 실현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실현에 이르는 도상에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태아가 인간이 된다는 사실은 태아를 그의 미래에 의해 규정지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비로소 태아를 인간존재로 인정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영혼의 주입시기를 수정 이후의 늦은 시기로 주장하는 일부 학자들이 태아를 영혼의 주입시기 이전에 임의로 살해할 수 있다고 견해를 표명하는 것은 불합리하게 보인다. 인간의 태아는 아직 영혼을 주입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되는 과정에 있다.16) 그러므로 이 태아의 존엄성은 미래로부터 결정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고는 태아의 전체 성장과정에도 적용시켜야 하며, 특히 정신적 - 인격적 완성의 출현과정 이전 상태에 있는 유아에게도 적용시켜야 한다.

 

미래로부터의 본질규정(존재규정)은 영혼의 주입시기를 일정한 시점으로 - 예를 들어 대뇌의 형성 시점 - 잡을 때에도 가능하다. 왜냐하면 이 기관(대뇌)은 그 존재의 첫 시초부터 자아의식과 자유의지 행위를 위해 충분한 가능조건으로 나타날 만큼 그렇게 발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기관은 자아의식과 자유의지 행위를 표현할 수 있기 위해 스스로를 아직 성장시켜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 기관(대뇌)은 그 첫 성장단계에서 한편으로 인격적 성취를 가능케 하기 위한 충분한 능력을 아직 소유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다른 편으로 태아는 이 성장단계 이전에 이미 대뇌를 생성시킬 수 있는 능동적 가능태를 소유하고 있다. 만일 영혼의 주입시점을 대뇌의 형성시점으로 잡는다면 - 이 대뇌는 정신적 생명의 중요한 조건을 제공한다 - 이와 유사한 근거를 바탕으로 해서 태아가 대뇌를 발달시킬 상태에 있는 시점도 영혼의 주입시점으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생명은 대뇌가 해부학적으로 구별되는 곳에만 시작하고, 이미 생리학적으로 미리 계획되어져 있는 곳에는 시작되지 않는다는 주장은 서로 모순에 부딪치고 만다. 즉 가능성으로서의 대뇌와 이미 발생한 대뇌 사이에는 본질적인 구별은 없는 것이다.

 

 

V. 인간 영혼의 단일성

 

인간 영혼의 주입시기(생명의 기원)문제와 관련해서, 정자세포와 난자세포의 결합 순간을 영혼의 주입시기로 인정하려는 시도에 대해 반대 이견이 있다는 것을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반대 이유는 정자세포와 난자세포의 결합 순간에 수정된 난세포로부터 일란성 태아 또는 이란성 태아 중 어느 태아가 생성될지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7)

 

이러한 이견의 배후에는 인간의 영혼은 분리될 수 없는 불가분의 실체라는 사상이 자리잡고 있다. 만일 이란성 태아가 생성된다면 그에 따른 새로운 영혼이 출현해야 하거나 아니면 하느님에 의해 새 영혼이 창조되어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미리 태아의 분할을 예견해서 태아 안에 사전에 여러 개의 영혼을 부여해 놓았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상의 논증은 처음부터 영혼의 존재에 대한 능동적 가능태를 전제로 하고 있지 않고, 완전하게 완성된 영혼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다. 아니면 이러한 능동적 가능태는 - 완성된 영혼의 전단계이다 - 단일적이고, 불가분한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첫 번째의 전제는 이미 가능태의 개념을 통해 어느 정도 해명한 바 있다. 그러므로 두 번째의 전제에 대해 간략하게 고찰하고자 한다.

 

영혼의 단일성과 불가분성은 철학적 전통 안에서 정신적 행위의 분석을 통해 증명된 바 있다.18) 이 정신적 행위가 아직 완성될 수 없는 곳에서는 영혼의 단일성과 불가분성이 증명된 것으로 전제될 수 없다. 만일 영혼 또는 태아 안에 인정할 수 있는 정신적 원리가 자아의식 출현 이후의 경우처럼 단일성을 지니고 있다면, '행위는 존재에 따른다'는 공리에 따라 태아는 이미 초기 단계에 자존해야 한다. 즉 자아의식을 소유해야 한다. 만일 이러한 사실을 정신적 행위의 결여를 이유로 해서, 그리고 적어도 태아의 초기 성장과정에 나타나는 육체적 토대가 정신적 행위에 대한 충분한 가능조건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근거로 해서 인정하지 않는다면, 정신적 원리의 단일성 또한 증명할 수 없게 된다. 그 결과 이란성 태아의 형성은 오히려 정신적 원리의 절대적 불가분성에 대한 반대증명으로 평가될 수 있다. 만일 초기단계의 영혼을 육체의 형태로 이해한다면 수정된 난세포에 있어서의 기관의 내적 다원성은 정신적 원리가 여기서도 아직도 정신적이고 인격적인 행위의 중심성(핵심)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이란성 태아의 생성 가능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영혼의 주입시기를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로 잡는 시도와 견해는 영혼의 완전한 단일성을 인정함으로써 오히려 곤경에 부딪치고 만다.

 

 

VI. 윤리적 문제점

 

인간의 개체 발생사에 있어서 영혼의 주입시기(생명의 기원)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윤리적 문제점들은 여기서 상세하게 취급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인간 이하의 생명은 살해가 허용되고, 이와 반대로 인간의 생명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보호되어야 한다는 의견은 문제의 핵심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너무 단순하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그 전통적인 해석에 있어서 두 가지 예외를 인정하고 있다. 첫째 예외는 부당한 공격자를 살해하는 것이 허용되는 경우이고 두 번째 예외는 사형의 적용에 있어서 사람을 죽이는 경우이다. 그러나 언급한 두 가지 예외규정은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이 문제에 대한 상이한 논쟁들을 세부적으로 고찰하는 대신, 단순화시켜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부당한 공격자의 살해허용은 특히 전쟁윤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전통적인 윤리신학의 견해에 의하면19) 하나의 방어전을 수행하고, 부당한 공격자를 살해하는 것은 허용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 방어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어려움을 야기시킨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 전쟁의 원인은 어느 일방의 책임으로 전가시킬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쌍방의 어느 편도 완전히 정당한 방어전을 수행한다고 볼 수 없게 된다. 거기에다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개개 병사는 상황의 사태를 책임 있게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개 병사에게 적병을 살해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특히 현대전의 경우 대부분의 병사는 전투에 임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만일 이상의 사실을 고려한다면, 비록 적군의 정치 지도자들이 전쟁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적군의 대부분은 무죄하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쟁 중 적군을 살해해야 한다는 권리가 오늘날에도 그대로 존속해야 한다면, 이 권리는 개개 적군의 윤리적 책임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생명과 자신의 생명과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데 근거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아군의 커다란 손실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하여 적군을 살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거를 뒷받침하고 있는 형식적 원칙은 '선의 측정원칙'(Guter-abwagungs-prinzip)이다.20)

 

살인금지 규정의 두 번째 예외는 이미 언급한 대로 사형의 적용 경우이다. 이 예외는 오늘날의 시대적 감각에서 볼 때 적군 살해 허용보다 더 복잡한 문제점을 야기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사형을 단지 범죄의 보상으로 정당화시킬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윤리적 책임은 단지 외부로부터 부가되어지는 사형을 통해 보상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형제도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주요논거는 사회의 관심사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21) 이 경우 우리는 단지 범죄의 위협적인 결과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의 규범의식을 위한 이러한 제제조처의 의미를 고려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사형의 정당성에 대한 논거를 두고 시비를 가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단지 사형에 대한 전통적인 주장에서도 '선의 측정원칙'이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만을 확인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형의 경우 생명 대 생명이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대신 범죄자의 생명이 다른 가치로 인해 희생되는 것이다.

 

만일 '선의 측정원칙'을 인간의 생명에다 적용시킨다면, 인간의 생명은 아무런 절대적 가치를 소유하지 않게 된다. 그렇지 아니할 경우 어떤 가치의 대가로 발생하는 생명의 파괴는 절대적으로 배제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물론 인간의 생명이 다른 가치들처럼 측정되어 질 수 있는 일정한 가치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생명의 권리와 관련된 특별히 중요한 역할은 인간 자신의 고유한 결단이다. 죽음에 이른 불치병의 환자가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래서 엄청난 치료비용의 부담으로 환자의 가족이 채무에 시달리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의사는 이 엄청난 비용이 요구되는 의료행위를 수행해야 할 의무를 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환자가 죽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가능한 한 모든 의료 행위를 요구한다면 적어도 어느 수준에 이르기까지 의사는 환자의 요구를 따라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사형의 근거에 있어서도 대중의 의식이 사형을 정당하다고 여기는지, 또는 여기지 않는지 중대한 구별을 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생명의 권리에 대한 한계는 이렇게 분명하게 결정지울 수 없는 일면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상 언급한 살인금지에 대한 두 가지 예외규정을 단순히 법률조항으로 이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 태아는 부당한 공격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사형의 처벌을 받아야 할 만큼 중죄를 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태아의 생명은 어떠한 경우에도 신성불가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동시에 태아의 직접적 살인은 어떠한 경우에도 허용할 수 없으나, 간접적인 살인은 중대한 이유가 있을 시 허용될 수 있다는 완화조건도 개별적인 경우에 따라서는 불합리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22) 정상적인 상황으로부터 추상화시킨 이러한 근본법칙을 예외 없이 문자 그대로 적용시킨다는 것은 무리이다.

 

인간의 생명은 그 자체 아무런 절대적 가치를 제시하지 않는다. 이것은 성인에게도 그리고 태아에게도 적용된다. 그래서 태아는 아직 자유와 의식을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성인보다 더 적은 존엄성과 권리를 소유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물론 자신의 삶을 못다 살고서 어린 아이가 죽는 것을 매우 애통해하고, 그 대신 더 오래 살아보아야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노인의 죽음은 쉽게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명을 '당위는 존재에 따른다'는 원리에 따라 단순히 현재로부터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이상의 언급을 바탕으로 해서 계속 살아남을 수 있는 충분한 전망을 소유한 태아와 얼마 살지 못한다는 확실한 판정을 받은 태아 사이에는 중대한 구별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후자의 경우 태아는 아무런 인격적 미래를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 즉 이 태아는 영혼이 완전하게 실현되고 의식과 자유를 소유하게 되는 단계에 도달하게 되지 못한다. 이러한 경우 어머니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임신중절이 가능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인간의 생명이 아무런 절대적 가치를 제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원칙적으로 태아의 생명에도 '선의 측정원칙'을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 적용은 그에 상응하는 중대한 이유를 바탕으로 해서 간접적인 태아의 살인을 허용했을 때 교회의 전통도 인정한 바 있다. 왜냐하면 한 가치의 파괴는 인간이 보호하고자 하는 가치보다 더 작은 가치를 소유할 때 허용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이 문제시되는 곳에서는 모든 종류의 경솔과 방일(放逸)은 회피되어야 한다. 만일 '선의 측정원칙'을 적용시킨다면 성장과정에 있는 인간의 생명도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 또한 고려해야 할 것이다.

 

특히 윤리적 판단에 있어서 서로 각축을 일으키는 가치를 정확하게 규정지우는 데 사실상의 어려움이 발생한다. 이러한 경우 의무의 갈등이 야기되고, 그 결과 '선의 측정원칙'의 적용이 요구된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성장 과정에 있는 새로운 생명에 대해 가지는 태도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이것은 특히 폭력에 의한 임신의 경우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경우 임신중절과 낙태의 정당성을 두고 논쟁을 벌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사는 자신의 도움을 전적으로 거부해야 하는지, 아니면 여자의 책임과 결정을 수용하여, 도움을 제공하는 것이 허용되는지 하는 물음은 여전히 남게 된다. 이와 유사한 물음은 건강상 여자가 더 이상 임신을 통한 엄청난 고통을 감수할 수 없을 만큼 허약한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에도 발생한다.

 

어떠한 경우를 막론하고 윤리적 판단의 본질은 단순히 몇몇 중요한 관점만을 보편화, 추상화시킬 것이 아니라 문제의 모든 요인들을 고려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윤리신학은 개개의 경우 모든 요인에 대한 해명을 하고 난 후 비로소 학문적으로 완벽하게 논증된 진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VII. 결어

 

지금까지 인간의 생명기원 또는 영혼의 주입시기라는 문제를 고찰해 보았다. 인간 생명의 기원에 대한 상이한 학문적 견해에도 불구하고,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가치는 보장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재삼 강조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행복한 삶이 보장되지 못한 생명이라고 해서 그리고 단지 인구증가를 억제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생명이 보호받지 못한다는 것은 지나친 이기주의의 결과일 것이다. 그리스도교인은 미래에 희망을 두고 사는 자들이다. 그렇다고 현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불확실한 미래이지만 부활의 희망과 하느님으로부터의 영원한 부르심에 시선을 던지고 살기 때문에, 어둡고 답답한 오늘이라는 현실을 극복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신앙한다. 신앙이 단순히 안락한 생활의 부산물이나 정신적 사치품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한 자기 투쟁, 자기 포기, 자아 희생의 결과라면 이기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신앙으로부터 탈피하여 믿음의 연대성에 가담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소명에 대한 믿음이 점점 약화되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세속화의 물결이 지배하는 시대일수록 인간의 생명을 단지 내재적이고 범주적인 차원에서 평가하고자 하는 유혹이 발생한다. 이런 때일수록 신앙인들은 그리스도교적 신앙의 근본진리에 입각한 생명의 그리스도교적 가치평가를 연역해 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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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용어 사용에 있어서 '영혼의 주입시기'와 '생명의 기원'을 동일한 의미로 사용한다.

2) G. Siegmund, Beginn des individuellen menschlichen Lebens: Theologie der Gegenwart 12(1969), S. 165-171; F. Bockle, Um den Beginn des Lebens: Arzt und Chist 14 (1968). S. 65-73; W. Ruff, Individualitat und Personalitat im embryonalen Werden: Theologie und Philosophi 45(1970), S. 24-59.

3) W. Ruff, Ebend, S. 47.

4) W. Ruff, Ebend, S. 52.

5) 영(靈)과 육(肉)의 이원론을 주장하지 않고 그 대신 영을 육의 형태로, 육을 영의 표현으로 이해한다면 정신적인 행위는 이 발달시기에 나타나지 않는다.

6) A. Rosmini, Psicologia, Milano 1887, S. 656.

7) DZ 3220.

8) DZ 2315.

9) K. Rahner, Mansch-theologisch: LTHK. Ⅶ, S. 287.

10) G. Sauser, Mediko-theologische Anmewkungen zum Problem der Humanontogenese, Freiburg 1964, S. 853.

11) J.B. Metz, Der Mensch als Einheit von Leib und Seele: in Mysterium Salutis Ⅱ, Einsiedeln 1967, S. 584-696.

12) 註 1)의 G. Sigmund S. 170 이하를 참조.

13) J.B. Lotz, Akt: im LTHKⅠ, S. 248-251.

14) W. Ruff, Ebend, S. 45-48.

15) Ebend, S. 33.

16) A. Hartmann, Ehrfurcht vor dem Leben; Stimme der Zeit 140(1947), S. 260.

17) 註 1)을 참조.

18) A. Willwoll, Psychologia metaphysica, Freiburg 1952, S. 226-233.

19) K. Hormann, Lexikon der Christlichen Moral, Innsbruck 1969, S. 702-704.

20) B. Schuller, Zur Problematik allgemein verbindlicher ethischer Grundsatze: Theologie und Philosophie 45 (1970), S. 13-18.

21) A. Thomas, ScG Ⅲ, 146, 5.

22) B. Haring, Das Gesetz Christi, Bd. Ⅲ, Freiburg 1967, S. 226.

 

[안명옥 주교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생명윤리연구회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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