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홍)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생명] 임종과 안락사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7 ㅣ No.394

임종과 안락사

 

 

임종과 병상통고

 

의사가 가장 진지하게 인간의 본질에 관하여 심한 고뇌에 빠질 때가 바로 임종이 가까워 오고 있는 환자를 대할 때이다. 특히 암 같은 불치병에 걸려 있는 환자에게 "당신은 불원간 이 세상을 하직하고 저 세상으로 간다"라는 최후의 선고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1976년 11월 12일부터 14일까지 교황청 인간계발위원회(Cor Unum)는 중환자와 임종자에 관한 윤리문제를 검토하기 위하여 신학자, 의사, 수도회원(병자를 헌신적으로 돌보는 회), 간호사(특히 전문 교육을 받은), 병원 원목 신부 등 약 15명으로 구성하는 연구회를 발족시켰으며, 여기서 생명, 죽음, 고통 등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기본 개념이 토의되었다. 성서의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이다"(로마 14,8)라는 말은 즉 우리의 생명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이 하사하신 선물이지 자기 자신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나타낸다. 물론 타인에 의하여 처분되어서도 안되며, 다만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자기 자신의 완성을 지향하는 것이 인간생명의 목적인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중환자 또는 불치병(암 등)에 걸려서 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환자에게 의사, 간호사, 기타 주위 사람들은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환자에게 그 진상을 통지해 주어야 하는가? 이 문제는 종교적 혹은 법적 문제 이전에 의사의 윤리적 문제로 중대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꼭 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주치의가 환자에게 직접 알려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의사와 환자 간에 충분한 인간관계가 성숙되기 전에는 여러 가지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우선 직계가족에게 이 사실을 먼저 알리고, 그 가족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환자에게 알리는 방법이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되어 있다. 기타 신자인 경우는 신부, 수녀를 통하여 알리거나 혹은 간호사, 환자의 친구를 통하여 알리는 방법도 있다.

 

환자와 의사와의 인간관계란 환자가 의사를 충심(衷心)으로 신뢰하고 있는 관계를 말한다. 즉 환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의사는 인격이 고매하고 의학적으로도 충분히 신뢰할 수 있으며, 특별히 자신에게 친절히 대해준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비로소 안심하고 의사의 말을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치병 환자의 주치의는 항시 자애로운 마음가짐으로써 대화하여야 하며 하루 한 번만이 아니라 두세 번씩 병실을 방문하여 할 말이 없으면 손만 한 번 잡아주어도 환자에게는 큰 위안이 된다는 것으로 고려해야 한다. 암 같은 불치병 환자는 의사에게 자기 병이 암이 아니냐고 정면으로 물어올 수가 간혹 있다. 이럴 때 의사는 절대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법적으로 문제가 됨은 물론이요, 환자가 의사를 불신하게 되기 때문이다. 환자의 심리상태가 암이라고 솔직하게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판단했을 때는, "암이다, 또는 절대로 암은 아니다" 식의 대답을 피해야 한다. 그 대신에 다만 "종양의 일종이다. 그러나 악성인지 양성인지는 두고 보아야겠다."는 정도로 말해주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화제를 바꾸어서 종교적 또는 철학적인 대화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컨대 인간의 생명은 오직 하느님만이 지배하는 것이지 사람이(의사를 포함해서) 좌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라고 말해준다. 천년, 만년은 고사하고 겨우 백살도 못살고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는 엄연한 사실을 평화로운 심정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 의사의 실수 또는 고의로 불치병인 환자에게 그 병명을 미리 알려주지 않아서 받게 될 환자의 피해는 막대하다고 할 수 있다. 정신적으로는 꼭 남겨야 할 유언이라든가 재산상의 막대한 손실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로 환자 가족들로부터 의사가 법원에 고소당하는 일도 외국에서는 종종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경솔하게 의사와 환자 간에 충분한 인간관계가 성립되기도 전에 성급하게 불치의 병이라고 통지해 주면 환자는 초조와 불안과 절망으로 자살을 기도하거나 의사의 적절한 치료조차 거부하는 사례를 볼 수가 있다. 환자의 인격과 성품이 상당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일지라도 종말이 박두하였다는 선고를 받기 꺼려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의사가 이러한 환자의 심정을 미리 알게 되면 임종의 예고를 간접적으로 또는 암시적으로 알리는 방법이 더 좋은 방법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하한 경우일지라도 환자의 직계가족에게는 명확한 진단명과 그 예후를 빠른 시일 내에 통지해 주어야 한다. 환자가 의사인 경우 자기의 병이 불치의 암이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가족에 대한 사후문제 등의 유언을 하고 나서도 주치의로부터 불치병인 암이라고 최후의 선언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일례로 일본 동경 내과 모 교수가 위암에 걸려 사경에 처했을 때 그 주치의가 우연히도 환자의 일기장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나는 25년 간이나 위암에 대한 강의를 학생들에게 해왔다. 내 병이 틀림없이 여기에 해당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고 가족들이나 제자들에게 남길 유언도 벌써 다 썼다. 다만 나의 주치의가 '선생님 병명은 위암입니다'라고 말해주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안락사

 

1980년 5월 5일 Roma에 있는 신앙교리성성에서 안락사에 관한 선언이 있었다 : "어원으로 말하자면 고대에 안락사(euthanasia)라 함은 심한 고통이 없이 죽어가는 '편안한 죽음'을 뜻한다. 오늘날에 와서는 그 말의 본래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의 고통이나 단말마의 고통을 없애기 위한 어떤 의학적 개입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또한 가끔 일찍이 생명을 서둘러 폐지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 결국 극도의 고통을 종식시키기 위한 '안락살해' 또는 가족과 사회에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울 수 있는 정신질환 및 불치병에 걸려 비정상아를 여러 해 동안 계속되는 비참한 생명에서 구제하기 위한 안락살해를 뜻하는 보다 특수한 의미의 '안락사'로 사용하게 되고 있다…무구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예외 없이 그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고 근본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또한 극도의 중죄를 범하는 것이다…어느 누구도 그 무엇도 무구한 인간존재, 갓 잉태된 태아든 좀 자란 태아든, 어린이든 어른이든 노인이든, 불치병에 고통받는 사람이든 죽어 가는 사람이든 결코 인간의 살해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고히 천명한다." 이상과 같은 선언문의 요지는 안락사에 대한 교황청의 확고부동한 태도를 재삼 확인해준 것이다.

 

현재도 의사들은 격심한 동통(疼痛)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에게 진통제나 마취제를 사용하는 처치는 당연한 것이며 의사의 의무라고 인정되어 왔다. 그러나 여기에 반하여 의사의 잘못된 동정심으로 말미암아, 환자의 고통에 종지부를 찍기 위하여 극량을 넘는 다량의 마취제를 사용하여 그 환자의 생명을 단축시킨다면 그 순간부터 용서받지 못할 치료행위를 한 것이 된다. Hippokrates 서문에도 "나는 죽음을 인도할 수 있는 독물(毒物)은 누구에게나 투여하지 않으며 가령 이것을 희망하여도 주지 않을 것이다. 또 이러한 배척해야 할 행위에는 가담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숭고한 예지(叡智)는 역사적으로는 기독교적 사상으로 더욱 강화되었고 보편화되게 되었다. 안락사를 적극적 방법과 소극적 방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적극적 방법은 치사량의 약물을 환자에게 투여하여 생명을 단축시키는 것이고 소극적 방법이라 함은 예를 들면 자살기도자를 원하는 대로 죽게 하기 위하여 치료를 안하고 방치하는 방법이다.

 

"마취제 사용이 생명을 단축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예견하거나 심지어 죽음에까지 이른다 하더라도" 종교와 윤리는 마취제를 사용하여 고통과 의식의 폐지를 의사와 환자에게 허용하는가라는 일단의 의사들이 제기한 질문에 답하면서 교황 비오 12세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방법이 없다면 그리고 주어진 여건 안에서 그것(마취제 사용)이 여타의 종교적 윤리적 의무를 이행할 수 없게 만들지 않는다면 허용한다." 물론 이러한 경우 합리적으로 사망의 위험이 동반된다 하더라도 결코 사망을 의도하거나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의도는 단순히 고통을 효과적으로 경감시키기 위하여 사용된 것이다. 그러나 의식불명을 야기하는 진통제는 특별한 고려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온전한 의식 속에서 자신의 윤리적 의무와 가정에 대한 책임을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하고, 또한 온전한 의식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채비를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황 비오 12세는 이렇게 경고한다 : "중대한 이유 없이, 임종자에게서 의식을 박탈할 권리는 없다."

 

종래에 사용되어 온 모든 의학적 방법에도 불구하고 회피할 수 없는 죽음이 임박할 때 불확실하고 고통스러운 생명의 연장을 유지할 뿐인 치료법을 거부할 수 있는 결정은 양심의 범위 내에서 허용된다. 즉 유사한 병증의 환자에게 필요한 정상적인 간호는 중단되어서는 안된다. 의사는 이러한 상황 하에서 위독한 환자를 돕지 못한 일로 인해 자책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동 선언문은 다음과 같은 뜻을 나타낸다.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한편 죽음은 회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코 죽음의 시간을 재촉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온전한 책임과 존엄성을 지니고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 죽음이 우리 지상 실존의 종언을 고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죽음은 불멸의 생명에로 새로운 문을 연다. 모든 인간은 이 위대한 사건에 대한 채비를 스스로 갖추어야 한다. 나아가 그리스도 신자는 신앙의 빛 안에서 그러한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의료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병자와 중환자들에게 유효적절한 모든 의술을 강구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환자 특히 임종이 가까운 환자들에게 끝없는 친절과 정성어린 사랑의 위안을 주는 일이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가를 기억해야만 한다. 사람들에 대한 그러한 봉사는 또한 주님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봉사이기도 하다. 그분은 말씀하셨다 :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수년 전 미국의 적지 않은 수의 의사들은 불치병에 걸린 환자들에게 안락사를 허가할 수 있는 주의 법률 제정을 요구하면서 다음과 같은 조건 하의 환자는 안락사를 인정하도록 촉구하였지만 아직 입법된 주는 한 곳도 없다. (1) 환자가 불치병의 말기에 도달할 경우. (2) 그 고통이 견딜 수 없게 심하며 영속성이고 불치의 경우. (3) 환자의 죽고 싶은 의지가 확실하고 또 명확할 때. (4) 의사는 그 병이 불치라는 진단을 2명 이상의 다른 의사로부터 확인을 받았을 경우. (5) 문제되는 질환의 종류는 법률로써 규정한다(예 : 설암 등…) 이상은 허점과 문제점이 많은 제안이다. 즉 불치의 병이라는 진단 자체가 그리 간단하게 단시일내에 붙는 것이 아니고 가령 병리학적으로 암이라고 확진된 환자 중에 완전히 치유된 예가 허다하니 말이다. 그리고 환자의 의사표시가 어느 정도 확실성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문제 등이다. 또 최근 (1980년도) 일본법학자들간에 만일 안락사 문제로 최고재판소(한국의 대법원에 해당)에서 안락사를 인정할 수 있는 요건을 제시한 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물론 입법은 반대하고 있다.) (1) 불치의 질환으로 사기(死期)가 절박(시간적으로)해 있을 때 (2) 격통(激痛)의 존재(육체적 격통이어야 하고 정신적 고통은 해당되지 않음) (3) 사고완화(死苦緩和)의 목적(친척의 경제적 부담의 제거나 국가의 이익을 위한 것은 불가함) (4) 사자의 진지하고 엄숙한 부탁과 승낙이 꼭 필요함(의사표시 불가능 시에 추정적 동의는 인정 않음) (5) 의사의 처치(원칙적으로 의사에 의하여 시행되어야 함) (6) 방법은 윤리적으로 시인되는 방법으로 할 것(예를 들어 참수(斬首)같은 끔찍한 방법은 불가) (7) 입법은 불가(마지막으로 입법은 반대하였다). 상기(上記) 중 의학적으로 control 할 수 없는 격통의 존재란 생각하기 힘들다. 또 환자의 진지하고도 엄숙한 부탁과 승낙이란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임종이 가까운 환자의 정신상태란 정상적이라기보다는 비정상적인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존엄사(Death of Dignity)

 

일종의 소극적 혹은 간접적 안락사라고도 칭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의식불명으로 인공호흡기로 연명하는 식물인간을 존엄하게 죽게 하기 위하여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는 방법이다. 이런 방법에 관해서도 아직 입법된 나라는 없다. 즉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여기에 반대하는 자연사법이 있어 위와 같은 경우, 인간이란 의식불명 상태일지라도 Living Will(삶에 대한 의지)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인공호흡기를 제거해서는 안된다는 법률이다. 그러나 완전한 사망(뇌사)을 인정할 경우는 친권자의 요청에 의하여 제거하는 일도 허용된다고 한다.

 

이상과 같은 안락사나 존엄사에 관한 법률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종교가 인정되는 한 또 양심을 가진 국가라면 인간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법을 제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김학중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생명윤리연구회 홈페이지에서]



480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