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홍)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생명] 안락사의 구분과 윤리적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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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7 ㅣ No.393

안락사의 구분과 윤리적 한계

 

 

I. 머리말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치 중에서 생명의 가치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간 생명의 가치와 존엄성에 대해서 가르치고 이를 재천명하고는 한다. 그런데 물질 문명의 발달, 의술의 발달과 더불어 인간의 생명을 보다 존중하고 보호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반대가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인공 유산과 안락사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에서는 1974년, '인공 유산 반대 선언문'을 발표하였고, 1980년에는 '안락사에 관한 선언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본고에서는 신앙인들에게 안락사의 정확한 의미와 구분, 책임의 한계 등에 대해서 교회의 가르침을 제시하고자 한다.

 

 

II. 안락사의 역사

 

안락사 문제는 오늘날에 와서 새롭게 제기된 문제는 아니다. 사회를 짐스럽게 만드는 자들을 제거하거나 유기 하는 풍습이 고대 몇몇 부족들에게 이미 존재했다. 이와 같이 어떤 유목민 부족들은 적과 싸울 수 없거나 먼 거리를 여행할 수 없는 노약자들을 내다 버리는 풍습을 갖고 있었다. 스파르타에서는 기형아를 유기 했고 고대 로마에서도 기형아를 출생 후 즉시 살해할 수 있도록 법으로 허용했었다. 고대 철학자들도 이 같은 풍습을 힐책하지 않고 오히려 긍정적으로 생각하였다. 플라톤 자신도 국가 자체에 국민의 절대적 예속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그 결과 신체적인 병이나 불구로 인하여 봉사할 수 없을 때에는 죽도록 허용하였다.1)

 

후대에 와서도 안락사를 주장할 뿐 아니라, 니체의 철학적 원칙의 영향을 받아 히틀러 정권 하에서는 사회에 짐이 되는 불구자들을 대량 학살하였다.2)

 

오늘날에는 교회 밖에서 환자에 대한 동정적인 동기에서 안락사를 보다 광범위하게 주장하고 있다. 즉 불치병자의 죽음을 적극적 방편을 통해서 - 예를 들어 마취제 같은 것으로 살해한다든지 하여 - 극도로 고통스럽거나 감당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생명이 연장되지 않도록 하는 정당성을 요구한다. 다시 말해서 이와 같은 불치병자는 자기 생명을 종결지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의사나 국가의 당국자는 이러한 병자들을 일정한 조건 하에 편안하게 죽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국과 미국에는 '안락사 협회'가 존재하며 이 협회의 목적은 안락사를 시킬 수 있는 법을 제정하는 데 있다. 그리하여 환자의 동의와 전문의의 증언을 얻어 불치병 환자에게 자비의 살해를 허용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목적의 입법이 미합중국 의회와 영국 상원에 제출되었지만 모두 기각되었다.3)

 

또한 이들 나라에서는 기형아나 정상적 삶을 가질 수 없는 어른의 생명을 파괴할 수 있는 권한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영국의 저명한 의사인 굿디노(Goodenough) 박사는 산모가 임신 중 복용한 진정제에 감염된 기형아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정상인처럼 성장할 희망이 없다고 의사가 판단할 때 의사에 의해서 평안하게 죽게 하도록 하자고 제의하였다.4)

 

 

III.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인간 생명은 모든 선의 근본이고, 모든 인간 활동과 모든 사회의 필연적인 근원이고 필요 조건이다."5)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윤리는 항상 인간이 신의 모상이라는 계시에서 출발한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사고 능력이나 잠재 가능성의 보유 능력을 하느님에 빗대어 일컫는 말이 아니고, 오히려 인간에게 주어진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즉 하느님은 당신에게 상응한 방법으로 응답하는 존재를 원하시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므로 인간은 필연적으로 신에게 상응하도록 창조된 것이다. 바로 여기에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품위가 있는 것이다.

 

교황 요한 23세는 회칙 [어머니와 교사]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인간 생명은 신성한 것이다. 거기에는 처음부터 신의 창조 행위가 직접으로 작용한다. 신의 법을 위반하면 신의 권한이 손상되고 개인들 자신과 인간성이 몰락하며 또한 그들로 구성된 사회 자체가 쇠약해진다."6) 더욱이 신은 인간의 생명을 선물로 주신 데다가 덧붙여서 자연을 지배하는 권한을 주었다. 신이 자연을 지배하라고 한 것은 파괴적인 목적이나 이기적인 독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생명에 봉사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의 전통은 인간 생명은 모든 성장 과정에서와 똑같이 출발에서부터 보호받고 사랑 받아야 한다고 가르쳐 왔다. 또한 교회 초창기 때부터 그리스·로마 세계의 윤리관에 맞서 그들의 윤리와 그리스도인 윤리와의 차이점을 명백히 했다. 오늘날 보다 심각하게 대두되는 문제들은 인간 생명의 성성(聖性) 즉 하느님의 모상을 왜곡하는 풍조와 이와 유사한 행위들이다. 이와 같은 행위들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것이므로 심각한 죄악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누구나 남녀 노소, 인종, 사회적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하느님의 크나큰 사랑에 감싸여 있다는 사실과 인간 상호간에는 어떠한 지배 관계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 그리고 아무리 보잘것없는 생명이라도 그가 지니고 있는 불가침적인 가치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금세기 교회 최고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인간에 대한 존중'을 강조하면서 "각 사람은 이웃을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또 하나의 나 자신'이라고 생각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이웃의 생명과 그 생활을 인간답게 영위하기에 필요한 수단을 고려해야 할 것이니"7)라고 하였다.

 

인간 생명이 신성 불가침의 것이라는 사실은 비단 그리스도인만의 진리는 아니다. 인간의 이성은 그의 본성에 의해 생명의 존중을 요구한다. 더욱이 인간은 공동체 안에서 태어나고 그 안에서 살고 성장함으로써 자기 보존 뿐 아니라 피조물들을 소유할 권리를 갖는다. 인간은 또한 여타의 귀중한 것들도 가지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귀중한 것은 바로 생명의 권리이다. 그러므로 생명은 다른 모든 것보다도 우선적으로 보호되어야 한다. 이 생명의 권리는 사회집단의 구성원의 결정에 의해 허용되는 성격의 것이 될 수 없다. 이 권리는 개인에게 고유하고 배타적으로 부여되는 천부적인 권리이다. 따라서 생명의 여러 단계에 따른 차별도 다른 차별과 마찬가지로 결코 박탈당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이 생명의 권리는 방금 태어난 어린이에게도 성인 못지 않게 똑같이 존중된다.8)

 

 

IV. 신앙인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태도

 

병과 노년기에서 오는 고뇌는 고통과 죽음의 문제를 보다 깊이 생각하게 하는 체험으로 인간을 인도해 준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인간이 세상과 특히 그들의 종교에 대해서 갖는 신념에 달려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 신앙은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가신 그리스도와 인간을 일치시키는 방편을 고통에서 발견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2고린 4,10)라고 하였다. 또한 인간의 나약함을 너그럽고 영웅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게 성숙하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인의 성숙은 하느님의 온 백성을 위해서 은총의 샘이 된다. 인간은 그의 나약성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고로 1,24)라고 한 사도 바오로의 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병든 인간은 그리스도의 모상이고 표지인 만큼 환자에게 봉사하는 것은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 된다. "병들었을 때 나를 돌보아 주었다."(마태 25,36 참조)고 주님께서 심판날에 말씀하실 것이다.

 

병자의 성사는 고통과 죽음의 고뇌 속에서 신음하는 그리스도인을 강하게 해 줄 것이다. 그런데 병자의 성사를 오로지 죽음을 위한 준비로만 고찰하는 것은 부족한 처사이다. 사도 야고보의 편지에서 거룩한 도유는 병든 몸을 낫게 해 주는 성사로 더 많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야고 5,14). 따라서 병원에서 환자 사목을 맡은 원목 사제는 임종자를 단순히 위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기도와 성사 집전 같은 보다 능동적인 자세로 그들에게 살고자 하는 의욕과 용기를 심어 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심각한 병 중에 있는 환자에게 병자성사를 받을 의무가 있음을 반드시 알릴 의무는 없다. 그는 참회의 성사와 영성체로써 그의 영신 생명에 필요한 것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는 병 중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도유의 성사로써 그에게 주어지는 은총을 소홀히 하지 말 것과 주위 사람들이 특히 사제를 청하여 환자를 도와주도록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인간의 죽음은 고뇌로 가득 차 있다. 이는 아담의 죄의 결과이다. 그리스도의 고통과 참담한 죽음의 결과로서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천상 희망과 불멸과 부활의 희망, 그리스도와의 결정적인 일치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신 당신의 성령을 시켜 여러분의 죽을 몸까지도 살려 주실 것입니다."(로마 8,11)라고 한 사도 바오로의 말이 이것을 증명해 준다. 현재의 지상 조건은 주님으로부터의 유배이다. 따라서 죽음은 주님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육체를 떠나 주님과 함께 살기를 원한다"(2고린 5,8; 필립 1,23) 끝으로 의료인이나 병원에 종사하는 원목 사제와 수도자들은 환자들이 주님 안에서 평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야 할 것이다.

 

 

V. 안락사의 개념과 구분

 

여기서 안락사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안락사에 대한 정확한 개념과 그 의미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우리말의 안락사라는 단어는 그리스어의 에우타나시아(Euthanasia)라는 말을 번역한 것으로 편안한 죽음, 고통이 없는 죽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안락사라는 말의 첫째 뜻은 죽음을 유도하거나 죽음으로 고의적으로 인도한다는 뜻이 전혀 없다. 다만 환자의 고통을 감소시켜 주고 가볍게 해 준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상의 의미로 볼 때 에우타나시아 즉 안락사는 신법이나 자연법에 어떤 모양으로든 반대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 에우타나시아라는 말의 그 본래의 의미를 벗어나서 소위 자비의 살해라는 명목으로 또는 환자의 품위 있는 죽을 권리를 빙자하여 인간의 적극적인 어떤 행위나 약물의 투여로 생존 가능성이 없는 환자를 고통 없이 평안하게 죽게 한다는 왜곡된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간단하게 말해서 오늘날 폭 넓게 사용하는 안락사라는 말은 생존이 무의미하고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사회에 짐이 되는 사람들을 없애기 위한 체계적이고 계획적인 살해이다. 1980년 교황청에서 발표한 안락사에 관한 선언문에서 "안락사는 모든 고통을 제거하기 위하여 저절로 혹은 고의로 죽음을 초래케 하는 행위 또는 부작위로 이해된다."9)고 정의하였다.

 

 

VI. 안락사에 대한 윤리적 평가

 

오늘날 일명 자비의 살해(Mercy Killing)라고도 하는 안락사는 불치병 환자에 대한 직접적 살해로서 이는 본인의 요구나 본인이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경우(연소자나 정신 결함자, 의식 불명자의 경우) 합법적인 대리인의 요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안락사는 또한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는 자나 불치병의 소유자 또는 사회에 부담이 된다고 생각되는 모든 사람에 대한 공적으로 계획된 집단적 살해를 의미할 때 극도에 달하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극단적인 일은 예외적인 것이므로 본고에서는 논하지 않는다.

 

위에서 논한 적극적인 의미로서의 치명적인 행동이나 수단에 의한 살해로서의 안락사는 어느 경우든 불법이며 살인 행위이다. 따라서 이를 정당화할 어떤 이유도 존재하지 않으며 교회에서는 이를 처음부터 명백히 단죄하였다. 즉 "갓 잉태된 태아든 좀 자란 태아든, 어린이든, 어른이든, 노인이든, 불치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이든, 죽어 가는 사람이든 결코 인간의 살해를 용납할 수 없다."10)고 천명하였다. 안락사에 관한 선언문에서는 또한 이 안락사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권한이 없으며 어떤 권위라도 비록 그것이 국가 당국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행위는 합법적으로 권고하거나 용인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것은 하느님의 계명을 침범하는 행위이고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근래에 와서는 불치병 환자의 경우를 들어 안락사를 정당화하기보다는, 생명의 파괴가 무의미한 고통과 생명의 연장에 비해 낫다는 데에서 안락사를 주장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발견한다. 그런데 이 같은 논증은 의학적인 사실에 의해서 이미 설득력이 없어졌다. 그 이유로서 오늘날의 의술은 그 같은 고통까지도 가볍게 할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교회에서 이미 명백히 단죄한 어떠한 이유에서도 허용되지 않는 적극적인 의미로서의 안락사에 대해서보다는 심각한 고통 중에 고통을 감소시키기 위해서, 예상외로 죽음을 앞당길 수도 있는 그 같은 진통제를 사용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와 희망이 없는 환자에게 예외적인 특수한 치료(산소 호흡기의 제거)를 중단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논하기로 한다.

 

 

VII. 진통제 사용의 한계와 특수한 치료의 중단

 

인간에게 있어서 고통은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엄연한 현실이다. 그리스도 신자에게 있어서 죽음의 순간에 겪는 고통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고통은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영웅적인 행위를 모든 이에게 강요할 수 없다.11) 따라서 진통제가 부차적인 효과로 의식을 감퇴시키고 반의식(半意識)을 초래한다 할지라도, 또한 예상외로 죽음을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온다 하여도 고통을 제거하거나 가볍게 할 수 있는 약품의 사용을 제안하고 있다. 교황 비오 12세는 과도한 진통제의 사용으로 인하여 제기되는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서 특히 마취제 사용으로 인한 생명의 단축 문제에 대해서 "다른 방법이 없다면, 그리고 주어진 여건 안에서 그것이(마취제 사용) 여타의 종교적 윤리적 의무를 이행할 수 없게 만들지 않는다면 허용한다."12)고 하였다. 그러나 환자에게 의식불명의 상태를 가져오는 진통제의 사용은 특별한 고려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 이유로서 인간은 온전한 의식 속에서 자신의 윤리적 의무와 가정에 대한 책임을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하고 또한 온전한 의식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채비를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교황 비오 12세는 "중대한 이유 없이 임종자에게서 의식을 박탈할 권리는 없다."13)라고 경고하였다.

 

통상적 및 특수한 치료의 문제는 생명이 종말 상태에 와 있는 환자에게 있어서 특히 예민한 문제이다. 의학 분야에 널리 알려진 원칙으로 의사나 간호사의 의무에는 치료하고 고통을 가볍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서 생명을 연장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고통을 가볍게 하고 생명을 보존하는 일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때도 있다. 때로는 식물적인 생명만이 온갖 종류의 약물, 외과상의 방법과 기계 장치로 유지되는 때도 있다. 이때 식물적인 인간의 생명 연장이 인간 생명의 봉사에 의학적 치료로써 정당화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다. 인간의 생명은 단순한 식물학적 생명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의료인의 사명과 최종 목표는 죽음을 정복하는 데 있지 않고 가능한 한도 내에서 효과적으로 하느님과 인간이 그분의 계획에 봉사하고 또한 그들의 영원한 계획에 봉사하도록 인간을 도와주는 데 있다. 그리하여 지상에서 인간의 임무가 하느님의 뜻에 의해서 종결될 때 의사의 임무도 동시에 종결되는 것이다.

 

또한 의사의 양심은 치료를 제 때에 시작하는 것뿐만 아니라, 치료를 제 때에 중단하는 방법도 올바로 배워야 할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의 생명이 이미 절망적이어서 약물이나 의료 기구의 수단으로 회복시킬 수 없을 때 특히 식물 인간의 상태이거나 인간적인 반응의 표지가 전혀 없는 경우에는 생명을 무한정 연장시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같은 경우 모든 특수한 수단을 생략하고 자연적 과정이 그의 진로를 가도록 허락해야 할 것이다. 또한 뇌의 사망 후에는 이 같은 수단의 포기가 의무적이라고 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 윤리 신학자들의 거의 일치된 견해이다. "뇌의 사망 후에는 의사는 인공 호흡 장치에 의해 생명을 연장하는 모든 인공적인 방법을 중지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14)

 

이 원칙은 불치의 고통스러운 환자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비록 의사가 불치병 환자에게 통상적인 방법으로 치료에 전념한다 할지라도 특별한 노력과 특수한 방법으로 생명을 연장시킬 의무는 없는 것이다. 가정에서 불치의 암 환자에게 정맥 내의 음식 공급과 같은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완전한 그리스도인적 태도가 아니라고 비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방법에 의해 모든 환자들이 헌신적인 간호를 받고, 가능한 한 고통이 가벼워지고, 죽음을 위한 타당한 준비의 도움을 받는다면 이는 가장 그리스도인적인 간호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상의 규범들은 생명의 연장이 단순히 고통의 연장만을 의미하는, 희망이 없는 불치의 환자의 경우에는 동일하게 적용된다.

 

환자는 특수한 치료를 거절한 권리를 갖는다. 그 거절의 주요한 동기 중의 하나가 그의 가정이 경제적으로 과도한 부담을 받게 되거나, 막중한 부채를 피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의 원의는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이 동기는 그의 부양 가족들을 위한 단순히 어떤 물질적 이익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판단한 책임 있는 인격적 판단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희망이 없는 상태이고 절망적인 때에는 환자의 원의가 더욱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환자 자신이 자신의 병을 인지하고 있을 때 치료의 노력을 중지하는 것은 의사에게 있어서 공동선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다. 이 같은 원칙은 만일 환자가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어린이거나 의식 불명의 상태일 때 환자의 대리인의 원의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미 절망적인 상태나 뇌사 후에 하는 고가(高價)의 치료는 환자의 가족들에게 큰 불이익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가끔 의사 자신의 명예 때문에 환자의 가족들이 무거운 경제적 부담을 치르게 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경우에 만일 의사들이 고통 중에 있는 생명을 불필요하게 연장하거나 뇌 기능이 이미 정지된 환자의 식물적인 생명을 지속한다면 환자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모든 환자들의 참된 행복을 거스르는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공동선을 위배하는 것이 된다.

 

 

VIII. 맺음말

 

지금까지 안락사의 개념과 구분, 적극적인 의미로서의 안락사의 죄악성 그리고 심각한 고통 중에 있는 환자의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진통제 사용, 절망적인 환자에 대한 특수한 치료의 중단, 그에 따른 윤리적 문제를 다루었다.

 

만일 안락사가 국가 당국이나 책임 있는 당국자에 의해서 공적으로 인정되거나 허용될 때에는 심각한 문제들이 대두할 것이다. 특히 환자의 동의 없이 안락사를 시행할 때, 의사와 병원 당국에 대한 신뢰가 사라질 것이다. 설사 환자의 동의를 얻는다고 하여도 부당하게 혹은 위장된 동의의 위험은 환자나 그 가족들의 의사에 대한 공포심과 불신임을 가져올 것이다. 이와 같은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서 당국은 책임 있는 충분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안락사를 지지하는 배후에는 오늘날의 공리주의적, 내세적, 현세주의적 경향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만일 인생의 의미가 현세적 행복과 발전 그리고 자신의 인격의 성숙만으로 끝이 나고 이 세상 저편에 도달할 차원을 갖고 있지 않다면 치료되거나 개선될 수 없는 고통과 불행은 아무 의미나 가치가 없을 것이다.

 

이 같은 사상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인간의 존재를 그리스도의 생명과 그분의 고통과 죽음, 부활로써 설명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가장 초라한 환자일지라도 구원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그의 특별한 역할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말이 고통과 투쟁하는 환자 자신이나 의사들의 노력이 덜 긴급한 것으로 고찰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의료인은 어느 때든 항상 상처받은 인간을 치료하고 아픈 곳을 낫게 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인간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데까지 모든 형태의 불행과 고통에 대항해서 투쟁할 것을 요구한다. 나아가서는 환자의 고통을 감소시키고 가볍게 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생명이 이미 절망적 상태일 때 예외적인 노력이나 특수한 수단에 의해서 생명을 더 이상 연장시킬 의무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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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laton, Liber 3 Reipubicae.

2) Niedermayer, Handbuch der Spezialen Pastoralmedizin, p.43.

3) A. Bonnar, The Catholic Doctor.

4) People, 1962, p.10.

5) "안락사에 관한 선언문", [사목] 71호(1980.9), 126면.

6) [어머니와 교사] 194항, 1961.

7) 사목 헌장 27항.

8) "인공 유산 반대 선언문" 12항, 1974.

9) "안락사에 관한 선언문", [사목] 71호(1980.9). 127면.

10) 상동.

11) 상동 128면.

12) 비오 12세, 이탈리아 마취학회 제9차 총회 참석자들에게 행한 연설, 1957, AAS 40(1957), p.147.

13) 상동 145.

14) L. A. Brewer, De Humanitate-The American Journal of Surgery, 118(1969), 136; quoted by B. Haring, Medical Ethics, 1973. p.133.

 

[유봉준 신부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생명윤리연구회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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