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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생명] 생명윤리 안전법안의 윤리신학적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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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7 ㅣ No.379

생명윤리 · 안전법안의 윤리신학적 문제

 

 

지난 9월 23일 보건복지부가 입법 예고한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안에 대한 천주교의 입장은 이미 지난 달 14일 (2002년 10월) 복지부에 전달한 바 있다. 본고에서는 인간 생명의 존엄함을 깨우치고자 회칙 생명의 복음(1995년)을 중심으로 법률안에 나타난 문제점들을 조명하고자 한다.

 

 

들어가기 전에

 

시작하기 전에 먼저 지적해야 할 점은 윤리를 과연 법으로 규제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특히 생명공학 분야는 고도의 전문적인 기술이 관련된 영역으로 연구자들이 밀폐된 연구실에서 하는 연구 행위들이므로 이런 행위에 대한 법적인 규제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또 최근에 발달한 생명공학이므로 거기에 따르는 문제들에 대한 윤리 교육을 받은 기회도 많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생명공학 분야는 연구자들의 자율적인 규율과 윤리적 양심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분야인 것이다. 윤리적 문제에 대한 반성과 사회적 합의에 대한 숙고를 먼저 하거나 적어도 병행하여야 할 것이나 이러한 연구보고는 전혀 없는 실태이며 정부 법안도 이에 대한 독려나 언급은 없는 실정이다. 오히려 인문과학자들이 그 연구의 윤리성을 따지기 위하여 생명공학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공부하고 있는 현실이다.

 

 

1. 소유냐 존재냐

 

수 세기 동안 인간은 우주의 중심으로 자부해왔다. 그러나 학문의 발달로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그저 다른 생물이나 무생물과는 조금 다른 존재일 뿐이라는 인식이 부각되었다. 모더니즘이 물러가고 이성에 대한 확신이 희미해지면서 인간중심적 우주관에서 해방된 인간은 우주에 우연히 존재하며 주위 환경의 변화와 요구에 따라 진화하는 하나의 단순한 존재로 전락했다. 단순히 생물학적 존재로 전락한 인간은 그가 가진 문화 또한 자연에 동화시키면서 윤리, 종교, 예술과 자신의 정신적 가치마저도 진화론적 사고로 해석하게 되었다. 생태학, 행동학과 사회생물학, 유전 공학 등은 인간학을 밀어낸 자리에 들어서서 오늘을 대표하는 생명윤리학이 되고 말았다. 순전히 물질적인 이러한 사고방식은 인간의 초월성을 무시하고 거룩한 소명으로 창조된 인간성을 깡그리 부정하는 시각을 갖게 만들었다. 이는 이미 인간을 물질로, 인간의 존재가치를 노동력으로만 계산했던 K. Marx에 의해 주창된 바 있다. 생물학적 기능만을 강조하는 이 사고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은 정신으로 정신은 다시 신경조직의 모임으로 이해되어 인간은 신경정신인이 되고 만다. 이런 식의 사고로는 인간과 동물의 근본적인 차이가 없어지고 그저 등급이나 양적인 차이만 날 뿐이다. 따라서 수정란은 하나의 인간이 아니고 인간으로 발전해갈 뿐이므로 초기 배아에 대한 파괴나 어떤 행위도 윤리적 잘못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 논리에 의하면 인간생명의 가치는 그 자체로 존엄하다는 신성성은 부정되고 그 삶의 개인적 능력과 사회적 역할에 따라 결정되므로 발생 초기부터 장애나 이상이 보이는 태아는 잘 발전시켜 출생시킬 이유가 없어진다. 여기서 우생학적 이유로 낙태나 태아살해는 정당화되기를 넘어 의무적으로 강요되며 인간은 그 생명의 존엄성에 있어서 똑같은 권리를 갖지 않는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물질적인 가치가 영적인 가치를 압도하는 전도된 문화 속에서 우리는 찬미와 감사를 잊고 헷갈리기 시작한다.

 

이러한 기술문명사회는 영성과 도덕의 문제는 도외시하고 가치의 기준을 정신적인 것이나 영원한 것에 두지 않고 물질적인 것에 두게 한다. 기술의 개발이나 소유가 곧 경제적 부를 창출한다는 기술만능의 물질주의적 사고는 물질과 기술의 소유에 대한 욕구를 팽창시켜서, 인간이 누구이며 어떠한 존재이어야 하는가 보다는 무엇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를 묻게 되었다. 인간들의 세상은 인간의 개발이나 윤리 생활의 향상이나 영원한 행복을 위한 노력보다는 물질을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한 투쟁을 일삼고 있으며 생명공학의 발달근거는 바로 이러한 사회에서 경제적 주도권을 잡기 위한 국제경쟁의 일환일 뿐이다. 이런 사회는 자연히 윤리 대해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다. 기술 개발에 비하여 인간 개발이 미흡한 사회는 책임의식이 희박해지며 윤리의식이 감퇴된다.

 

윤리의 근본은 하느님과의 관계이며 인간생명의 존엄성은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자녀요 모상(창세 1,26)이라는 신적 기원을 근거로 한다. 종교도 윤리도 없는 현실주의자들에게는 물질만이 최고다. 어떤 사람인가 보다는 무엇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인간을 평가하는 소유가 존재를 선행하는 부조리 속에 가치의 전도현상으로 인간은 그 풍부한 물질적 가능성 속에서도 정신적 공허를 느끼며 방황하고 있다. 인간의 초월성을 무시한 이러한 유물론적 사고는 자연훼손 이전에 인간의 존엄성 훼손하며 정신적 자양분의 공급보다 육신을 살찌우기에 급급하여 생각이 없는 기능인만을 양산하고 있어 악순환은 계속되고 만다.

 

이에 대해 회칙 생명의 복음은 시의적절한 지적을 하고 있다. “소유 가치가 존재 가치의 자리를 차지해 버렸습니다. 유일하게 중요한 목표는 자기 자신의 물질적 안락뿐입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경제적 효율성이나 육체적 아름다움과 쾌락이 중시되어 인간 상호간의 영적, 종교적 차원과 같은 실존의 더 심오한 차원들은 무시됩니다” (회칙 23항)

 

 

2. 인간의 윤리적 조건

 

이미 플라톤이 프로타고라에서 강조했듯이, 아무런 공격 무기도 갖지 못하고 자연 조건도 나쁘게 태어난 인간은 이 결핍을 극복하기 위해 그 자신이 가진 기술을 개발하는데 이는 또한 자신이 모든 피조물에 뛰어난 존재임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류 최초의 기술이랄 수 있는 불의 발견이래 인간은 기술의 진보를 이루고 있으며 이 기술은 자연의 예속에서 벗어나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넓히는 것이기도 하다. 아놀드 겔렌은 기술이란 인간의 생물학적 결핍을 보충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 한다.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환경에 자연적으로, 본능적인 면에서 뒤처지는 존재다. 인간은 생물학적 본성상 자신 앞에 놓인 세상을 자신의 필요와 계획에 따라 만들어가는 기술을 가진 존재이다. 인간의 이러한 탄력성은 본능적으로 부족한 인간이 자신 앞에 놓인 세상을 개척하며 열어가게 만드는 것이다.

 

반복되는 자연 속에 반복되지 않는 개체로 존재하는 생물학적 존재인 인간은 육체를 매개로 성장, 발전한다. 따라서 육체는 생물학적으론 주어진 것이며, 세상에 살며 타인과 통교하는 歷史性을 가진 소여이다.

 

이런 관점에서 생물학적 소여는 인간의 윤리적 조건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생물학적 소여는 개성을 확실히 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내외적 자연의 전제 조건들을 하나 둘 제거하며 인위적으로 자연을 벗어나 개체의 충만한 실현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생물학적 소여를 거스르는 인공, 불일치이다. 그러므로 자연질서 과정에 개입하는 모든 행위는 인간의 정체성과 개체성의 불가침의 영역에로의 침입이 될 수 있으며 자연지배가 아닌 사람지배가 되고 만다.

 

다른 한편, 인간의 육체가 살아있는 육체라면, 그리고 자연이 자신을 생명의 지평에서 열어보인다면, 인간의 육체는 탄력성을 가지고 열려있는 육체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탄력성은 인간의 전체성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의 육체상의 유연성은 무제한한 어떤 것이 아니다. 조작은 자연적 소여가 아니므로 영육으로 된 인간의 전체성에 비추어 그 윤리성을 판단해보아야 한다.

 

 

3. 생명의 위기

 

생명에 대한 외경은 예로부터 윤리의식의 중심을 이루어왔다. 생명의 신성성을 잃고 난 우리의 육체는 그 의미를 잃어버린 한낱 도구에 불과할 뿐이므로 인간은 이제 그 육체를 이용하여 자기 마음대로 기술을 연마할 수 있게 되었다. 하느님이 부여하신 창조질서 속에서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는 윤리가 아닌 생명과 자연에 대한 인간적 개입을 무한대로 허용하여 인간의 뜻대로 자연을 개조하는 기술이 판을 치고 있다. 생명의 존엄성과 신성성이 무시된다면 미구에 우리는 인간 생명을 마음대로 조작하여 우리가 원하는 모습대로(창세기 1,26) 만들 수 있게 될 것이다.

 

유전공학의 발전으로 사상 처음으로 자신의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컨트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단계에 와 있는 인간은 자신의 생명 자체에 대한 끝없는 욕망을 갖게 되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그것을 정당화 시키는 대로 정향 되고 윤리는 그 인간의 욕망과 과학, 의학적 발전을 저지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윤리가 되고 만다. 이러한 생명윤리에서 가능한 것은 윤리적으로 문제없는 것이 되고 나아가 윤리적 의무로까지 발전한다.

 

이러한 사조에 따라 생명공학은 인간 “생명에 대한 배타적인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으며, 자신의 통제와 조작에 완전히 속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 인간은 오직 "행위"에만 관심이 있으며, 모든 종류의 기술을 사용해서 탄생과 죽음을 계획하고 통제하고 지배하기에만 바쁩니다. ... 이제 자연은 모든 종류의 조작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현대 문화에 만연한 일종의 기술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방식은 바로 이러한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회칙 22항)

 

우리가 마주 대하고 있는 생명윤리 법률안은 인간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다는 구실로 질병, 난치병 연구를 위한 인간 배아 연구를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법안 4장, 12조-20조). 그러면 난치병 연구를 위한 배아 연구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가 하는 문제와 삶의 질 향상과 존엄성의 관계규명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법률안 어디에도 존엄성에 대한 규정은 찾아볼 수 없다.

 

법률안은 연구의 자유와 난치병 연구, 퇴치라는 미명하에 인간 배아를 마구 복제할 수 있게 하여 인간 존엄성을 훼손하고 있으며 그 연구의 입법화, 합법화를 통해 존엄성 훼손에 대한 처벌의 면제뿐 아니라 심지어 국가의 공인까지도 요구하면서 나아가 국민의 혈세까지 지원받아가면서 하겠다(법안 42조, 국고지원)고 공공연하게 나서고 있는 것이다.(회칙 4항, 69항 참조).

 

한편 과학과 기술의 무한한 발전은 일부 뜻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특히 그것이 인간의 생명을 다루거나 환경을 파괴하게 될 때 그 적용의 한계와 남용의 가능성 때문에 문제가 제기되었다.

 

기술이 주인이 된 이 사회에서 인간은 그 자신의 존엄성이나 가치보다는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하나의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는 기술을 인간이 과연 제어할 수 있을까를 자문하게 된다. 끝없는 과학과 기술, 의학의 발전은 인간에게 봉사하기보다 인간을 지배하는 비인간적인 것이 된다. 생명윤리는 이런 상황에 대처하여 과학과 의학기술의 인간화를 도모하며 생체실험의 한계를 설정하는 등의 역할을 모색해야 한다. 생명윤리는 인간의 존엄성과 기술의 발전 사이의 한계를 정하고 그 관계를 윤리적으로 규정하며 서로의 독자적 영역의 윤리적 범위를 정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4. 고통의 의미

 

인간 육체성의 한계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고통과 죽음이다. 생명공학적 발전으로 기고만장한 인간은 고통을 통한 성숙과는 거리가 먼, 삶의 가치를 오로지 쾌락과 안락을 중심으로 평가하는 현세주의적 사고에서 고통은 참을 수 없는 좌절이요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벗어나야만 할 것으로 치부한다.(회칙 64항 참조) 이러한 문화는 “무엇보다도 부유한 사회들 안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효율성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태도를 지니고 있고, 노인과 장애인들의 수가 늘어나는 것을 참을 수 없고 또 지나치게 짐스러운 이로 여깁니다”(회칙 64항). 고통의 제거라는 유혹 때문에 안락사를 자행하고 장애제거라는 미명하에 태아진단으로 낙태를 일삼는다면 이는 불행히도 우리가 먼 과거에 묻어두고 왔다고 생각되던 영아살해나 지난세기와 금세기 초에 기세를 떨친 우생학적 사고와 다를 바 없는 상황의 재현이라 할 만하다. 약자와 장애자를 돌보는 일은 인간 존엄의 특별한 명령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망각해서는 안 된다.

 

정신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을 멸시하는 유물론적 사고방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점점 더 쉽고 편하며 유익한 것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키고, 고통의 의미나 정신적 가치에 대한 관심을 말소시켜 나간다.

 

 

5. 도전에 직면한 자유

 

과학과 기술이 발달한 사회에서는 인간 인격의 고유성이나 윤리성보다는 효용성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인간의 존재가치는 인격보다 기능을 우선시한다. 세상은 기술에 의해 잠식되고 변형되었으며 (자연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은 이방인이 되어가며 개성은 무시되어 平準化화 規格化를 강요 당하고 있다. 양이 질을 삼켜 버렸고 인간 자유의 가치는 경제와 도구의 논리로 대체되었다.

 

인간 존엄성을 말살하는 무분별한 기술만능주의에 따른 기술 발전은 결국에는 기술의 종말을 예고하는 것이 아닌가를 묻게 된다.

 

새로운 자연을 만드는 인간의 기술이 생명현상까지 창조해낼 수 있을까? 테크놀로지는 생리학까지 대신할 수 있을까?

 

생명과 메커니즘 문제 사이엔 언제나 자연과 인공의 논쟁이 자리하고 있다. 생명현상을 물리 화학적 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한 물리 화학 법칙 안에서 움직이는 인간의 기술은 인간 생명을 결코 만들어 낼 수 없다. 생명현상과 비 생명 물질현상 사이의 연속성이 있다면 인간의 기술은 생명을 재창조하는 기적을 이뤄낼 수 있으며 금단의 열매를 따먹었던 생명나무에로 손을 뻗어 생명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현상 자체를 변형시킨다. 생물학, 특히 생명공학 분야에 있어서 인간 기술은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고 있다. 생명공학은 종을 바꾸고 인공수정 기술 등을 통하여 生命을 操作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인간의 自然侵入은 새로운 여러 문제와 특히 윤리 문제를 야기시켰다. 기술의 발달로 그 극에 달한 인간의 자유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있다.

 

 

6. 생명은 선물

 

교회는 생명과 자연의 신성성을 강조하면서 인간 생명에 대한 개입은 하느님의 질서 안에서 창조된 자연을 도우거나 수정하는 차원에서 그칠 것을 주장한다. 인간의 기술은 생명의 한 부분을 건드릴 수 있을 따름이지 그 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진교훈 교수는 병리를 건드리지 생리를 함부로 바꾸지 말라고 한다). 삶의 질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전 인생에 걸친 행복을 고려하기에 자연과 인공 사이의 구분이 모호해져 생명을 위해 인간은 때때로 인간이 원하는 대로 자연을 변형시키기도 하며 윤리를 거기에다 끌어 맞춘다. 이에 대해 회칙 생명의 복음은 생명이 다수의 의견으로 변경할 수 있는 임시적이고 변경 가능한 가치(회칙 70항)가 아니라고 하면서 모든 법은 인간의 마음속에 自然法으로 새겨져 있는 객관적인 도덕률의 승인”하에 정당한 준수 근거를 얻는 것이요 삶의 어느 영역에서도 ... 국법은 양심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거나, 규범들을 강요할 수 없기에” 인권을 무시하거나 침범하는 잘못된 법은 권력의 본질을 훼손시키고 남용을 초래하여 악법이 되거나 폭력이 된다고 지적한다(회칙 71, 72항 참조).

 

피조물에 대한 인간의 주권이 하느님의 주권에 참여하는 것인 이상, 만물에 대하여 가지는 인간의 주권은 한계를 지닌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이 주신 그 자체의 존재 권리와 양식을 갖고 있으므로 인간은 그 피조물에 광포한 행위를 해서도 안 될 것이요, 그 피조물의 본질을 바꿔도 안될 것이다. 인간이 어느 정도 하느님의 주권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은, 인간이 인간 생명 그 자체를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특별한 의무 안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 책임은 남자와 여자가 혼인하여 출산을 통해서 생명을 주시는 것에서 그 절정에 다다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임무는 특히 생명이 가장 약한 상태에 있을 때 이행되어야 합니다(회칙 43항).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생명의 위기는 인간의 잘못된 세상지배 의식에 근거한다. 생명이 그에게 소유가 아니라 선물이라는 것을 망각한 인간은 생명을 학대하며 함부로 조작하고 있다. 인간의 손에 달린 생물학의 발전에서도 이런 딜레마가 많이 있다. 인간은 유전공학적 기술에 의거해서 자연계에 이미 존재하는 종을 바꾸거나 존재하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종을 창조해 낼 수 있을까?

 

자연을 관리하고 보존할(창세 2,15) 책임을 맡은 인간은 만물을 조성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주권에 임의적으로 개입하여 역동적인 자연질서를 어지럽히거나 인간의 이익을 위하여 그 질서를 변경하는 주인 노릇을 할 권리가 없다.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인간의 도구에 불과했던 기술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면서 윤리적 바탕을 상실하고 있다. 생명공학이나 원자 물리학도 그 어떤 인간의 행위라도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기술이라도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거슬러 이용될 때 그 결과는 비참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은 우리들의 경험이 벌써 웅변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창조주가 설정한 질서 안에서 자기의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고 기술의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기술의 지배자가 되어서 온전한 창조질서를 보존하기에 합당하게 참여할 때에 비로소 달성될 것이다. “창조주 없이 피조물이란 허무로 돌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더욱이 하느님을 잊어버린다면 피조물 자체의 정체성도 어두워지고 만다(2차 바티칸공의회, 현대세계의 사목헌장 36항).

 

 

마치면서

 

하느님의 자유에 參與하여 인간 생명을 管理하는 책임을 가진 인간은 근본적으로 생명의 주인노릇을 할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언제나 망각해서는 안 된다. 생명윤리법안은 이러한 기본 원칙부터 무시하고 있다.

 

변화된 인간관과 우주관은 새로 생겨난 생명 윤리에 윤리적 사고를 새롭게 할 것을 요구한다. 인간 사고의 어느 영역에서도 생명윤리처럼 현실적인 문제를 이처럼 역동적으로 반영하는 학문은 없다. 생명윤리의 명암 모두는 정말로 우리시대의 윤리가 아닐 수 없다. 생명윤리시대인 오늘 우리는 인간 자신에 대한 믿음과 과학 기술의 발전과 그로 인한 자신의 운명에 대한 희망적 믿음에서 기술의 비인간화에 환멸과 공포를 느끼며 미래를 걱정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세속화에 밀려 그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린 그리스도교적 용어인 인격, 본성, 존엄성, 자유 등의 올바른 의미를 찾기 위해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이미 모자보건법의 독소조항이나 인공수정의 시술에서 보고 있듯이 미끄러운 경사길 논리에 의하여 모자보건법은 수많은 생명이 무고하게 낙태되는데 기여했고 인공수정 기술의 발달은 인공수정에 그치지 않고 체세포 복제에 의한 인간 복제의 우려마저 낳고 있는 현실이다. 모자보건법을 윤리적으로 용인할 수 없듯이 교회는 인공수정을 윤리적으로 허용한 적이 없다. 또한 연구목적이든 치료목적이든 인간복제를 허용할 수 없다. 인간은 결코 수단으로 이용될 수 없는 것이다. 회칙 "생명의 복음"은 이를 스스로 품위를 떨어뜨리는 짓이요 도덕적 타락을 불러일으켜 걷잡을 수 없는 사태를 몰고 올 수 있다(회칙 4항)고 경고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도덕 개념을 뿌리째 흔들려는 은폐된 시도를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언급해야 할 것은 대중이 생명공학의 위험요소를 주지하지 못하고 도덕적 타락의 은폐된 시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된 데에는 매스컴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생명공학의 긍정적 측면과 장미빛 희망만을 크게 부각시켜 앞다투어 선정적으로 보도해온 일부 매스컴의 영향으로 생명공학적 지식이 없는 일반 시민들은 현혹되어 그 마음 속에서 생명의 존엄성 훼손에 대한 걱정이나 도덕적 타락보다는 현실적 이익만 생각하게 되어 어느 것이 어떤 유익한 점이 있는지를 먼저 따지는 방법에 매료되어 도덕적 판단이 흐려져 법률안에서 배아복제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에도 무감각해져 가고 있다. 점점 더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하게 되어가고 있는 이러한 때에 진리를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가 필요하며, 편리한 타협이나 자기기만의 유혹에 굴복하지 말 것을(회칙 58항) 회칙은 당부한다. 그 유혹이란 "선과 악을 구별할 줄 아는" (창세 3,5) 하느님처럼 되고 싶은 유혹(회칙 66항)이다.

 

“아, 너희가 비참하게 되리라, 나쁜 것을 좋다, 좋은 것을 나쁘다, 어둠을 빛이라, 빛을 어둠이라 하는 자들아!”(이사 5,20)

 

<참고문헌>

· 정하권, 교회의 쇄신, 대건신학대학 전망편집부, 1977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생명의 복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
· 박은정, 생명공학시대의 법과 윤리,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0.

 

[손성호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생명윤리연구회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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