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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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생명] 현대사회의 생명과 문화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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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7 ㅣ No.369

현대사회의 생명과 문화윤리

 

 

I. 서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의 『새로운 복음화』에서 교회 복음화 활동의 일차적 목표는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실현되는 "사랑의 문화문명"의 건설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천명하셨다. 여기서 교회의 복음화 활동이란 복음 진리의 생활화를 통한 교회와 인류 그리고 이 세계의 내적 쇄신 내지 변형을 목표로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가톨릭 교회는 현대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죽음의 문화'에 대치되는 '생명의 문화'를 재건하기 위하여 가일층 분발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한국 교회도 인간의 존엄성이 경시되는 역사상 미증유의 한국의 '죽음의 문화'의 위기로부터 '생명과 사랑의 문화'를 재건해야 할 과업을 부여받고 있다. 이에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산하 생명윤리연구회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오늘처럼 일련의 생명윤리의 연구발표회를 갖는 것은 한편으론 생명존중 및 수호에 관한 이론적 근거를 한국학계와 한국사회에 적극 홍보하고 다른 한편으론 교회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각종 생명운동에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 발표에서 먼저 현대사회에서, 특히 한국의 반생명적인 문화상황의 실태와 배경을 살펴보고 이어서 이렇게 된 원인을 규명해보고, 그 다음 문화윤리의 의의를 논하고, 끝으로 어떻게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재건할 수 있는가를 성찰해 보려고 한다.

 

 

II. 반생명적인 문화의 실태와 배경


1. 폭력의 난무와 생명경시

 

우리 나라에서는 도처에서 온갖 종류의 폭력이 난무하고 있다. 학교폭력, 가정폭력, 전문적인 직업화된 조직폭력, 국가기관에 의한 제도적 폭력 등은 선량한 국민을 공포에 떨게 하고 인권을 유린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시키고 있다.

 

폭력을 과시하거나 심지어 미화(美化)시키기까지 하는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인터넷 등은 도처에 범람하고 있고, 많은 청소년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폭력을 조장하고 있다. 사람의 목숨을 파리목숨처럼 취급하는 미국의 수입영화가 우리 나라 영화계를 지배하다가 최근에는 우리 나라에서도 폭력을 미화하는 영화, "친구", "조폭마누라" 등이 흥행에 성공하고, 청소년뿐만 아니라 성인사회에서조차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을 정도이다. 돈만 벌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기업가들에게 만연되고 있으나 정부는 이를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美名)아래 아무런 규제도 하지 않고 있다. 우리 나라의 공연윤리는 현재 업자의 자율에 맡길 수 있을 정도로 높지 않다는 엄연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관계당국은 영화산업육성 등을 이유로 업자들의 횡포를 방임하고 있다.

 

<학교폭력> : 학교에서의 학생들 사이에서의 폭력사태로 말미암아 많은 학생들이 사망하거나 육체적·정신적 피해를 입는 일이 속출하고, 학교폭력은 더욱 증가 일로에 있다. 학교폭력은 갈수록 더욱 더 흉폭해지고 조직화되어가고 있으며, 더욱 심각하게 우려되는 것은 점점 더 저연령화 되어가고 있고, 어린 여학생들 사이에서도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청소년의 인권을 유린하는 학교폭력의 발생원인 내지 배경에 대해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학교폭력조직의 발호는 일차적으로 돈벌이에만 급급한 부모의 자녀에 대한 무관심과 청소년의 애정결핍, 경쟁위주의 학교교육에서 생기는 소외감과 강박관념, 건전한 여가선용의 시설미비 및 기회박탈, 돈벌이에만 급급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각종 유해매체의 악영향을 받는 학교주변의 나쁜 환경 등을 우리는 학교폭력의 발생배경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가정폭력> : 욕구불만과 열등의식을 가졌거나 가학증을 앓고 있는 남편이 부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일은 옛날에도 있긴 했으나 오늘날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최근에는 부인이 남편에 가하는 폭력도 빈번해지고 있다. 또 부모의 자식에 대한 폭력도 줄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식이 노부모를 폭행하는 패륜도 적지 않게 발생하고 있다. 시부모의 며느리에 대한 학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최근에는 며느리의 시부모에 대한 박대가 늘어가고 있으며, 자식들의 노부모 괄시가 심해져서 사람다움의 근본인 효도(孝道)가 무너지고 있다. 가정폭력은 결국에 가서는 사회악을 조성시키고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한다.

 

<조직폭력배> : 정치권력의 앞잡이로 시작한 조직폭력배는 대체로 청부폭력이었으나 이제는 주도적으로 온갖 종류의 이권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정경유착되어 막강한 세력을 떨치고 있다. 그들은 정치집회는 물론이고 심지어 종교인들의 주도권 다툼에도 개입하고, 술집, 호텔과 나이트클럽 등의 유흥장을 지배하고 최근에는 사채시장 또는 건축공사 등 각종 입찰과정 등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반사회적인 암적 존재로서 사회의 기강을 문란하게 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시킨다. 조직폭력배들은 최근에는 마약거래, 인신매매 등에도 깊이 관여하여 우리 사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제도적인 폭력> : 국가기관인 정보기관과 군(軍) 및 경찰 등의 수사기관에서의 혐의자에 대한 공공연한 고문과 취조는 인권을 철저히 유린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시켜왔다. 과거 군사정권에서 국민의 생명을 경시했고 천인공노할 고문사 등 혹독한 폭력을 휘둘렀다. 특히 오늘날까지도 시행되고 있는 사형제도는 국가에 의한 제도적 폭력의 전형이다. 사형제도는 자위수단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구금상태에 있는 사람(죄수)을 무참하게 살인하는 것이며 공공연하게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권을 파괴하는 살인제도이다. 사형제도는 법의 이름으로 인간의 기본권인 생명권을 부인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따라서 사형제도는 경우에 따라 복수심에 차있는 사람들의 살인을 정당화할 수 있는 빌미를 마련해 줄 수도 있다. 그러므로 회개와 갱생의 기회를 완전히 박탈하는 비인간적인 사형제도가 조속히 폐지되어야 함은 물론이고 더 나가서 우리는 인간을 황폐화시키는 고문과 온갖 종류의 폭력을 불식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경주하여야 할 것이다.

 

이밖에 성폭력에 의한 인권유린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2. 공해와 생명존중사상의 쇠퇴

 

생명의 존엄성을 위협하는 공해의 원인은 흔히 무분별한 산업개발과 도시의 인구집중 등이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거시적인 원인규명은 선진국가를 중심으로 논의된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공해는 그러한 범세계적인 공해원인도 작용하지만, 특히 오늘날 우리 나라의 특유한 반사회윤리적인 병폐가 더욱 자연을 심각하게 오염시키고 생명존중사상을 더욱 쇠퇴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의 존엄성을 경시하게 만드는 이 한국적 공해원인을 성찰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성장위주의 경제정책.

 

국민총생산지수(GNP)가 높아지면 선진국 대열에 낄 수 있고 고용증대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단순한 고식적인 단견(短見)이 한국에서는, 특히 정치가들에게서 지배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우리 나라 국토 전체에 회복하기 어려운 오염을 야기해 왔다. 수자원 보호를 위해 폐수를 강력히 규제해야 한다는 호소에 대해 목전의 이익만을 최대한 추구하는 기업가와 정부당국은 값싼 상품 생산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이를 묵살하거나 무시해버리며, 땅의 오염을 막기 위해 제초제, 구충제, 화학비료 등의 피해를 따지거나 영농방식을 유기농법으로 대체할 것을 호소하면 농산물 증산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이러한 건의는 묵살되며, 공기오염과 소음공해 등을 규제할 것을 요구하면 정부당국은 예산부족타령을 하기 일쑤다. 그래서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국민의 기본권으로서 환경권 보호는 경제성장위주의 정책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무시되고 있다.

 

둘째, 과시적 국토개발정책의 발호.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후 한국에서는 오히려 지방의 자연보전은 뒷걸음질치고 있다. 지방정부는 중앙정부보다 더 선심정책과 세수증대에만 급급한 나머지 자연파괴를 능사로 하고 있다. 지방정부는 성급한 각종 대규모 토목공사를 수시로 벌이고 이를 위해 중앙정부보다 더 경솔하게 그린벨트를 풀자는 주장을 하고 향토보전을 등한히 한다. 누구를 위해 개발(exploitation, ※ '착취'라는 뜻도 담겨져 있다)을 하여야 하는가를 물어야 할 것인데, 지방정부의 과시적 개발정책을 견제할 세력이 현재로서는 너무나도 미약하다.

 

셋째, 소비위주의 산업화정책.

 

케인즈(Keynes)의 '소비가 미덕'이라는 산업정책은 과소비와 자원의 낭비를 부추기고 가속화시켰다. 아무런 큰 불편을 주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아파트를 리모델링한다든가, 더 오래 사용할 수 있는 자동차, 전자제품, 전화기(핸드폰) 등등, 각종 기계류, 가구와 각종 공산품을 조기에 폐기처분하고 새 모델로 바꾸는 짓거리는 자원낭비를 초래하고 결과적으로 자연을 파괴하는 원인이 된다. 왜냐하면 물자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는 각종 오염물질을 과도하게 배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각종 공산품을 수선하고 가능한 오래 사용하도록 권장해서 자원절약, 즉 자연보호를 꾀하여야 할 것이다. 특히 일회용품의 제작과 판매가 철저하게 규제되어야 할 것이다. 지방정부가 이를 등한히 하고 있다. 지방정부는 업자의 농간에 휘말려서 공해업소의 규제를 철저하게 시행하지 않고 있다.

 

넷째, 공해발생의 은폐와 미봉책.

 

공해는 사실 그대로 정확하게 그리고 신속하게 공개됨으로써 이에 대한 대비책이 철저하게 강구되어 모든 시민의 지혜를 동원할 수 있어야 하고 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관계당국은 시민의 불안과 동요를 염려한 나머지 고의로 공해정도를 축소하거나 은폐하기 일쑤고, 또 기업은 기업대로 기업의 이익만을 우선하여 공해를 은폐하여 시민의 생명권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공해의 은폐나 미봉책은 나중에 더 큰 화를 불러올 수 있다. 예컨대 공해발생을 축소하거나 공지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시민의 생존권과 건강권이 침해를 받은 예가 많이 있었다. 가령 온산, 반월공단과 원진레이온 공장 등의 공해는 당국의 미봉책과 기업의 은폐로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다.

 

다섯째, 한국의 공해의 중대한 원인은 정부의 근시안적인 계획과 무모한 예산집행에서 빚어지고 여기에 시민들의 무지몽매로 큰 것과 화려한 것과 새 것을 선호하는 허영심이 상승작용을 한다. 도무지 분수를 모르는 불요불급한 지방정부청사의 거대하고 화려한 신축과 개축 등은 대표적인 실례이다. 우리 나라 대부분의 국민들은 더 편한 것, 더 쉬운 것, 더 큰 것, 더 화려한 것, 새로운 것에 대해 맹목적으로 추구하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주요한 원인이다. 이러한 관민(官民)의 반생명적인 생각이 우리 나라의 자연환경을 더욱 나쁘게 만들고 복잡하게 만들며 생명경시를 초래한다.

 

그러므로 공해를 추방함으로써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야말로 생명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기본조건이다. 생명존중은 그 무엇보다 최우선시 되어야 할 절대가치이며, 생명을 존중하는 문화만이 영속하고 훌륭한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유념해야 할 것이다.

 

3. 생명공학과 생명경시

 

생명공학은 그 개념의 정의를 두고 외포와 내연에 관하여 학자들간에 견해의 차이가 있긴 하나 대체로 생명현상을 이용하여 산업 및 의료 분야에서 경제적 이득을 획득하려는 모든 기술적 고안(考案, innovation)과 그 응용을 의미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0세기를 원자력 기술과 정보 기술의 시대라고 한다면 21세기는 생명공학 기술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시각이 점차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서 생명공학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대체로 유전공학자들의 기대와 과장된 주장들을 여과없이 소개하거나 선전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언론매체는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만을 보고 윤리적인 성찰 없이 단순한 사고를 하는 생명공학자 또는 생명공학 관련업자의 검증되지 않은 꿈같은 주장만을 보도하는 데 주력했고, 생명공학 기술의 역기능이나 부정적 측면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아니했다. 소위 BT(Biotechnology)사업은 김대중 정부의 중점 사업으로 되어 있음을 우리는 유의하지 않을 수 없다.

 

생명공학(bioengineering)이라는 말은 생명에 공학(工學, engineering, technology)이라는 말을 덧붙인 것으로서 이 말 자체가 생명조차도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저의(底意)가 담겨져 있는 오만방자하고 불경(不敬)스러운 말투이다. 생명공학은 인간의 생명을 포함하는 각종 동물과 식물과 미생물의 생명현상을 공업적으로 이용하여 돈을 벌려고 하는데만 주력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전자 재조합기술의 산물인 유전자변형식품과 동물복제는 생태계의 균형파괴와 인간의 건강에 심각한 위험을 초래한다는 우려가 점증되고 있다. 유럽에서는 유전자변형식품과 복제된 동물의 식용은 엄금하고 있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아무런 통제도 받고 있지 않다. 이것은 국민의 건강권과 생명권을 경시하는 무책임한 처사이다.

 

최근의 생명공학의 주요 관심사는 유전자 조작기술과 체세포 복제기술의 개발이다. 예컨대 병충해에 강한 작물, 제초제에 대하여 저항성이 강한 작물, 특정한 영양소를 다량 함유하는 작물 등의 개발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전자조작 작물의 개발은 근본적으로 생태계의 질서, 생태계의 순환과 생물 상호의존성과 생물의 다양성을 파괴한다. 그뿐만 아니라 유전자조작기술 개발은 엄청난 재원이 필요하므로 불과 5개의 다국적 기업들이 이 기술을 독점하고 있으며, 전세계 농산물의 생산과 유통과 소비를 농단하고 있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떤 짓도 할 수 있는 비윤리적인 집단으로 막강한 권력을 자행하고 있으며, 전통적인 자연친화적인 농업을 파탄에 이르게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생명의 존엄성을 철저히 무시한다.

 

최근에는 축산분야와 어업분야에서도 생명공학자들은 생산성이 높은 새로운 가축과 어류(魚類)를 개발하고 있으며, 특정한 영양소나 생체기능 물질을 분비하는 가축을 개발하려고 시도한다. 우리 나라에서도 1998년 수산양식 연구진은 보통 미꾸라지보다 40배나 무거운 슈퍼미꾸라지를 개발했으며, 1999년 세포성장인자(CSF)가 함유된 젖을 분비하는 흑염소 '메디'를 유전자 조작으로 출생시켰다. 또 최근에는 의학분야에서 인간에게 이식 가능한 장기를 생산하는 동물을 만들려는 연구도 활발히 하고 있으며 유전자조작기술을 이용하여 각종 질병의 '모델 동물'이 만들어지고 있다. 동물의 특정 유전자 부위를 파괴하여 인간의 면역세포가 공격하는 부위를 발생하지 않도록 하거나 인간의 유전자를 동물에 이식하여 인간의 면역계와 합치하도록 함으로써 이중장기이식에서 생기는 거부반응을 최소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그러한 개발을 하려는 이유라고 한다. 약학계에서도 동물을 사용하여 생체약물을 생산해낸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들은 동물학대일 뿐만 아니라 동물의 생존권을 경시한다는 비난이 동물보호단체들에 의해 비등하고 있다. 스스로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 없기 때문에 보호받을 수 없다는 것은 비윤리적임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동물도 하나의 생명체로서 마땅히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은 함부로 침해될 수 없는 존귀함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종(異種)간 교잡행위가 금지되어야 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의학분야에서 유전공학 기술의 응용은 직접적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상관됨으로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소위 '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한마디로 인간의 생명 그 자체를 하나의 정보 현상으로 간주하게 만들었다. 만일 각각의 유전자의 기능과 역할이 완전히 밝혀진다면, 사람들은 인간의 생명 현상을 유전자라는 부호로 다시 보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유전자 진단과 유전 정보가 질병의 예방이나 치료 외에 다른 목적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보험회사나 고용주, 또는 정부의 어떤 기관에서 이를 악용할 수도 있고 종래에는 인간의 차별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선천적 질환이 있다든가, 지능이 낮다든가, 신장이 작다든가 하는 것이 미리 알려질 때 그릇된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부모에 의해 배아가 살해될 위험이 늘어날 것이다.

 

질병을 치료하는 유전자조작기술은 '유전자 치료'라고 불려지고, 질병이라고 할 수 없는 어떤 인간의 속성을 개선하려고 하는 시도는 '유전자 개량'이라고 불려지는데, 문제는 '질병'과 '질병 아닌 것'의 구별이 사람에 따라 모호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사 유전자 치료가 법적으로 인정된다고 할지라도 유전자 치료는 남용될 위험성을 배태하고 있다. 아무튼 우생학적으로 유전자를 개량한다는 것은 비윤리적이다.

 

지금의 시점에서 생명공학에서 가장 심각하게 문제되는 것은 복제(cloning) 문제이다. 인간의 개체복제는 기술적으로 가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인간 개체복제는 인간존엄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윤리적 이유로 모든 나라에서 금지되고 있으나 인간의 배아복제는 환자의 치료에 유용할 것이라는 기대에서 많은 생명공학자들이 연구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조건적이긴 하지만 인간배아복제에 대한 연구를 허용하고 있고 일본에서도 2002년부터 쿄토대학에 한정한다는 조건으로 냉동잔여배아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우리 나라의 생명윤리자문위원회의 생명윤리기본법의 시안 속에도 '한시적으로 냉동잔여배아에 대한 연구를 허용하자'는 조항이 담겨 있고, 미국에서는 금년 7월 하원에서 인간배아가 인간임을 천명하고 인간배아복제를 금지할 것을 가결했으나 생명공학산업을 주도하려는 야심을 가진 부시 대통령이 교묘한 타협책으로 금년 8월 파괴된 냉동잔여배아로부터 추출된 64개의 줄기세포주(stem cell lines)만을 연방정부의 기금으로 연구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체외수정 및 인공수정은 윤리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예컨대 부부 아닌 사람의 난자와 정자의 사용문제, 대리모 등. 이밖에 기술적으로 가능하면 인간은 어떤 짓도 실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모든 생명공학 관련 기술들에 대해 윤리적으로 타당한 것인가, 생명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것인가에 대해 항상 예의 주시해야 할 것이다.

 

4. 사이비 예술의 비인간화의 작태

 

현대의 예술가들 중에는 특이한 것과 기상천외한 것을 추구하는 나머지 일체의 윤리적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자기의 느낌과 욕정을 자의적으로 표현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처음에는 시대에 앞서가면서 인간의 소외와 기계화, 사물화(事物化) 등 비인간적인 작태를 고발하거나 경고하기도 했으나 나중에는 비인간적인 병적 작태를 자학적으로 즐기고 있다. 우리는 오늘날 거의 모든 예술의 장르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비인간적인 작태를 우리는 대중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영화와 만화 및 애니메이션, 산업미술 등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도대체 현대 예술에서는 인간의 고귀함과 고결함, 순결한 사랑, 아름다운 이별, 품위 등을 찬미하는 작품을 찾아보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 되었다. 인간의 권위를 짓밟는 것은 흔한 일이고 인간의 목숨을 파리목숨처럼 다루거나 인간을 단순한 기계나 상품으로 다루는 온갖 사이비 예술작품을 대중매체 등을 통해서 우리는 항다반사처럼 자주 접하게 된다. 엽기적 살인, 근친살인, 마약중독, 음란행위, 이유없는 불특정 다수의 집단살인, 그리고 가학성과 자학성을 극대화하는 잔인한 폭력 등의 상세한 묘사는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려는 정신병적 복합감정의 발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현대 예술은 상업성과 결탁하여 인간의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흥분시키거나 인간을 비하시키는 것을 능사로 삼고 있다. 한 마디로 현대 예술가들 대부분은 인간성을 상실한 비도덕적인 사람들이라는 지탄을 면하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일찍이 공자님도 한 나라가 망할 때 난세지음(亂世之音, 세상을 어지럽히는 詩, 歌, 舞)과 망국지음(亡國之音, 나라를 망하게 하는 詩, 歌, 舞)이 횡행한다고 경고했는데, 이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 해당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예술가들이 앞장서서 비인간화 현상을 고취하고 있느냐 아니면 예술가들이 이미 비인간화되어 있는 현상을 나중에 묘사하느냐는 논란이 있으나 필자는 비윤리적인 예술가들이 '죽음의 문화'를 만들어내는데 누구보다 더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5. 놀이문화의 비인간화

 

논다는 것은 인간의 어떤 단순한 의식보다도 더 원초적이며 근원적이다. 인간은 생명을 부여받는 순간부터 모태(母胎) 속에서 이미 꿈틀거리며 논다. 놀이(유희) 속에는 생명을 주창하려는 직접적인 충동만으로는 다 설명될 수 없으면서도 살고있다는 것을 표시하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 '어린이는 놀면서 자란다'고 한다. 그런데 이 놀이는 항상 다른 사람을 배려하게끔 되어 있고 따라서 질서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제대로 놀려고 하면 반드시 다른 사람과 함께 놀 수밖에 없고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지 않고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기쁘게 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공정하고 깨끗한 놀이 즉 파인 플레이(fine play) 또는 패어 플레이(fair play)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가 깨끗하지 않은 '더러운 놀이'(dirty play)를 하게 되면, 그러한 놀이는 오래 지속될 수 없을 것이며, 그 피해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사회에 널리 퍼지게 된다. 예컨대 우리는 사행심을 조장하는 각종 놀이의 폐해를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며, 특히 우리 나라에서 성행하는 각종 도박은 반사회적이며 종래에는 인간을 황폐화시킨다는 것도 유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스포츠도 놀이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늘날 스포츠는 기업화되고 있고, 순기능뿐만 아니라 역기능도 하고 있다는 것을 준열히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떤 스포츠는 선수를 혹사하고 인권을 유린하고 상품으로 간주한다. 고도의 기술의 연마는 때로는 선수의 안전을 소홀히 하기도 하고 선수를 대중의 꼭두각시로 전락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일부의 극소수의 운동선수들은 치부를 하나 건강을 상실하기 일쑤이고 그밖에 대부분의 운동선수들의 말로는 비참하다. 대부분의 스포츠는 도박화 되어가고 있다. 도박이 인간을 황폐화시킨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집단체조, 특히 카드섹션 등은 인간을 기계처럼, 기계 부속품처럼 취급한다. 놀이의 본질은 휴식, 연대의식함양, 긴장이완과 재창조(recreation)이나, 오늘날의 스포츠는 오히려 저열한 경쟁심리를 부축이고 긴장을 유발시키며 집단이기주의를 선동하고 연대의식을 파괴하기도 하고 인간성을 상실하게 만든다. 예컨대 소위 훌리건의 행패와 선수들의 음주벽과 마약상습은 우연한 작태가 아니다. 베르그송이 말한 대로 문화의 본질은 인간의 경쟁심을 완화시키는 것인데, 오히려 오늘날의 놀이문화는 대체로 추악한 것으로 전락되고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고 있다.

 

6. 현대의학과 비인간화

 

인간관에 초점을 두고 서양 현대의학의 특징을 살펴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개관해 볼 수 있다.1)

 

현대의학의 설명 전략은 물질적 환원주의와 심신이원론과 기계적 결정론과 개체주의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현대의학을 소위 '수선업(修繕業)'으로 전락시키는 단초를 만들었다.2)

 

물리학, 생화학, 분자생물학, 공학과 같은 자연과학은 현대의학의 이론적 기조를 이루고 있다. 가령 해부학, 생리학, 병리학, 약리학 등은 전적으로 자연과학의 이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인간의 기능과 질(質)은 가능한 한 수량(數量)으로 표현되고 측정 가능한 생화학적·생물리학적 과정으로 환원된다.3)  따라서 현대의학의 시술은 과학적 추상성에 기반을 두고 인간을 사물화(事物化)한다.

 

현대의학은 질병의 존재론적 개념에 기반을 둔 의학지식의 배열, 즉 질병기술학(nosography), 분류학(taxonomy), 결의론(決疑論, casuitry)에 의거하고 있다. 환자와 의사의 '주체성'을 의도적으로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환자의 신체적 상태만을 검사한다. 다시 말해서 현대의학의 시술은 기계가 인간의 신체를 이끌고 가는 방식을 취한다. 이와 같은 현대의학의 기조는 결과적으로 우리가 실재로 측정할 수 있는 것만이 인생의 전부가 되고 초월적 실재를 부인하게 만들고, 종래에는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하게 만드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현대의학은 급기야 모든 질병을 유전적 소인에 의해 결정된다는 유전자결정론까지 내세우면서 인간의 유전자를 해독하고 유전자를 조작·변형하고 생명을 복제할 수 있는 데까지 이르렀다. 현대의학은 기능주의적으로 발전할수록 인간의 존엄성에 깊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었다.

 

최첨단 의료기구에 둘러싸인 의사들은 환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었고 의사와 환자의 대화는 단절되었고 의사와 환자간의 신뢰는 무너지고 있다. 더욱 무서운 것은 돈에 눈먼 비양심적인 의사들의 과잉검사와 과잉진료가 만연되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의료계 종사자들이 그들 스스로를 단순한 기술자나 상인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받으려면, 그들은 인간존중과 생명존중에 대한 충실한 교육을 받아야 하고 환자와의 긴밀한 대화를 나누어야 할 것이다.

 

 

7. 의 · 식 · 주의 비인간화

 

인간은 옷을 입게끔 되어 있다. 인간의 피부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추위와 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옷을 입는다. 그러나 그와 같은 실용적인 목적 외에도 아름답게 보이기 위하여 체면을 차리기 위하여, 신분을 과시하기 위하여 옷을 입기도 한다. 그리고 옷은 문화이념의 중요한 기본요소인 전통성과 사회성과 윤리성을 개진하기도 하는 중요한 인간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어떤 시대에, 어떤 곳에 사는 사람들이 어떤 옷을 즐겨 입느냐 하는 것은 문화를 평가하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그런데 최근에 모델이라는 직업이 돈을 많이 벌 수 있기 때문에 인기가 높다고 한다. 이제는 상점의 진열장에 옷을 걸어두는 마네킹이 거의 필요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나무나 석고나 합성수지 등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모형인 마네킹 대신에 직접 인간이 사용되기 때문이다. 소위 '모델'이라는 살아 있는 사람이 진열대에서 옷을 걸치고 막대기나 기계처럼 서 있거나 무대에서 걸어 다닌다. 소위 '패션쇼'에서는 모델이 단 몇 분만에 옷을 갈아입고 벗고 연출자의 지시에 따라 몸짓을 한다. 그러므로 돈에 팔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제정신으로 그 짓을 감당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들은 중인환시리에 뻔뻔스럽다 못해 후안무치한 짓을 하게 된다. 그들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옷은 제2피부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옷은 한계를 가진 인간의 피부, 즉 신체의 부분을 연장하고 보완하는 것이다. 그래서 옷이 날개라는 말도 생겨났을 것이다. 옷은 실용적 목적 외에 사람의 내면적 세계의 일부를 밖으로 드러내며 그 사람의 인품을 드러내기도 한다. 아이는 아이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노인은 노인답게, 성직자는 성직자답게, 군인은 군인답게 옷을 입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사람답게 살기 위해 자기 분수에 맞게 입어야 한다. 그런데 만일 여자가 남자 옷을 입거나 남자가 여자 옷을 입는다면 그것은 성도착증세를 나타내는 것이며, 군인 아닌 사람이 군복을 입는다면 그것은 범법행위로 제재를 받아야 할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모름지기 가려야 할 치부를 드러내고 다닌다면 그 사람은 노출증에 걸린 정신병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니룩크(unilook)라고 불리는 옷, 선정적이다 못해 거의 벌거벗는 옷이 유행한다면 이것은 바로 문화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치한 옷을 입거나 정신나간 사람이나 입는 옷을 입고도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그런 사람은 이미 사람답게 사는 것을, 문화인의 긍지를 망각한, 즉 인간성을 상실한 사람이다. 아무튼 전통을 무시한 급변하는 옷차림은 인간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인간을 병들게 만든다.

 

음식문화가 인간성 상실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살펴보자. 음식은 생존을 위해서 필수적이지만, 비단 생물학적·의학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예술적 측면, 종교적 측면에서도 의미를 천착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음식은 문화윤리 측면에서 특히 인간의 품위와도 직결된다. 왜냐하면 밥은 알맞게, 즉 정도(正道)에 맞게 먹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에서 식사예절은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거의 무시되고 있다. 대도시는 물론이고 전국 방방곡곡이 온통 음식점으로 넘쳐 있다. 외식(집밖에서 사먹는 음식)이 식사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가 하면, 길거리의 음식점은 물론이고 가정에서조차도 인스턴트식품이 판을 치고 있다. 자랑스러운 고향의 맛이라든가, 풍미(風味)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전통음식은 명맥을 이어가기 어렵게 되어있다.

 

밥(음식)은 인간의 행동방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전통문화의 유지와 인간의 자긍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뿌리가 없는 뜨내기 음식, 즉 햄버거나 피자, 프라이드 치킨, 핫도그 같은 인스턴트식품과 외래음식은 전통문화를 고사(枯死)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을 황폐화시킨다. 무엇을 어떻게 언제 먹느냐 하는 것은 인간의 정신과 가치판단과 성격에 영향을 끼친다.

 

사랑하는 가족과 손님을 위해 밥을 짓는다는 것, 즉 요리(料理)를 한다는 것은 기쁨이며 참으로 사람다운 일이다. 요리를 할 때의 노동은 살려고 하는 인간의 의지와 연대감을 상징한다. 그래서 누가 요리하기를 기피한다면 그는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인간은 밥을 통하여 곡식을 제공해주는 흙에 뿌리를 박으며 동시에 흙을 자신의 속으로 합일시킨다. 그래서 인간은 밥을 통해서 흙(우주)과 하나가 된다. 그러므로 밥을 낭비하거나 함부로 버리는 것, 가령 우리 나라에서 매년 8조원 어치의 음식물을 버리는 짓은 큰 죄가 된다. 왜냐하면 음식 속에 들어있는 가치들, 인간의 생명을 구(救)하는 힘과 하느님의 축복과 인간의 노동을 얕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수 천만명의 영양실종자와 수십만 명의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인류의 연대성을 망각하고 음식물을 버린다는 것은 비인간적이다.

 

우리 나라의 대표적 음식인 떡은 원래부터 함께 만들어서 자연(하늘)과 이웃과 함께 먹도록 되어 있는 자랑스러운 음식이다. 예컨대 잔치떡, 생일떡, 제사떡 등. 그러나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이 인스턴트식품을 선호하고 떡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과 뿌리를 알 수 없는 퓨젼 떡이나 다랍기 짝이 없는 혼자서 한 입에 먹게 만든 토막낸 떡이 유행하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즈음에 누구나 불량식품의 범람에 공포를 느낀다. 음식물을 가지고 큰돈을 벌려는 사람들의 횡포에 국민전체가 전율을 느끼며 산다. 음식 원료에서부터 가공식품에 이르기까지, 각종 농약, 보존제, 방부제, 착색제, 세제, 항생제 등에 의하여 오염되어 있다. 사람은 먹어야 사는데, 먹을 때마다 음식물의 성분을 의심한다면, 어떻게 안심하고 살 수 있겠는가? 밥을 안심하고 먹을 수 없는 환경에서 산다는 것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의 위기이다. 사람들은 바이오식품을 찾는다. 이 바이오식품은 생명공학의 산물이 아닌 자연식품이다. 인간은 원래 제고장에서 제철에 자연스럽게 나오는 식품을 알맞게 요리해서 먹도록 되어 있다.

 

건축문화가 인간성 상실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살펴보자. 사람이 산다는 것은 집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 없는 사람은 버림받은 사람이다. 왜 남녀가 서로 사랑하면 그들만이 살 수 있는 오붓하고 아늑한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싶어하는가? 신혼부부뿐만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자기 집에서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남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평화롭게 살기를 원한다.

 

쌩떼쥬-베리(Saint-Exupery)는 "인간이 산다(居住한다)는 것(due les hommes habitent)과 인간을 위한 사물의 의미가 그 인간의 집의 의미에 따라서 변화한다는 위대한 진리를 나는 발견했다"고 그의 "사막의 도시"4)에서 기술했다. 이 말은 "집은 사람을 만든다"는 격언과 같은 맥락으로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바슈라아드(Bachelard)는 "집은 하늘과 삶의 폭풍우 속에서도 인간을 꿋꿋하게 지탱시켜 준다"5)고 말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나라의 집은 어떤가? 건축이 각 시대의 사회를 반영한다는 말은 긴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오늘날 건축은 시멘트와 철조, 합성수지, 유리 등으로 만든 긴 상자를 일직선으로 나열하거나 수직으로 높이 쌓아 올린 것으로 아파트와 빌딩은 강제수용소와 포로수용소를 연상시킨다. 고층 건물은 고도의 기술의 산물이지만 그 얼어붙은 것 같은 차가움과 살벌함은 금방 사람의 목을 조를 것만 같은 악몽에 시달리는 사람의 기분을 자아낸다. 현대 도시의 위기는 건축의 위기이며 건축의 위기는 주택의 위기이다. 이것은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의 원인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건축의 단말마(斷末魔)의 비인간화를 살펴보자.6)

 

① 건물의 대형화는 중앙집권과 권력집중을 상징하는 것이다. 부자연스러운 직각(直角)의 과용은 위압적이다.

 

② 현대 건축술의 공업화는 단조롭고 획일적이고 기능주의적이다. 이것은 한 마디로 비인간적이다.

 

③ 현대 건축은 투기업자들의 전횡과 만행으로 녹지대를 최소화하고 자동차도로와 주차장, 건물이용도의 극대화에 주력하고 소음이 심하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 어렵게 되어 있고 좁은 공간에서 아이들은 극성스럽게 되고 집밖에 나와서 놀 수 없게 되어 있다.

 

④ 고층건물, 특히 고층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항상 단전, 단수, 청소부나 관리인의 파업, 연쇄방화 등에 대한 잠재적인 불안을 가지고 산다.

 

⑤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익명(匿名)인 채로 산다. 그들은 이웃에 대해 무관심하며 이기적이며, 무간섭을 좋은 것으로 착각한다. 가령 폭설이 내려도 눈을 쓸 생각을 하지 않고 자기 집에만 당장 위협이 안되면 남의 집에서 화재가 나건 도둑이 들건 상관 않는다. 그들은 자기 집 값 상승에만 관심이 있고 자기 집을 영혼의 안식처가 아니라 돈벌이를 위한 투기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래서 집을 사기도 전에 집을 팔아먹을 생각을 먼저 한다. 아파트나 연립주택이나 다세대주택은 '잠을 자는 동네'로 변모해 버렸다.

 

⑥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소위 각종 '도시병'으로 신음한다. 그들은 집에서 안식을 취할 수 없음으로 거리를 헤매고 다니든가 알콜과 담배, TV, 음란비디오 등에 자기를 내맡기고 집안에서도 엄청난 양의 진통제와 진정제 등을 복용하게 되고 각종 신경계통의 병과 천식, 습진, 알레르기, 심장병, 심근경색 등을 앓게 된다. 도시인들은 과밀한 사람들 속에서 살면서 고독하게 비인간적으로 산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파괴와 도시의 황폐화 속에서 우리의 보금자리를 되찾아야 한다. 집은 인간성의 요람이며 안식처이므로 투기꾼이나 투기꾼에 놀아나는 건축기술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안식을 염원하는 모든 사람이 참여의식을 가지고 모든 건축행사에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⑦ 우리 나라에서는 이밖에도 직접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죽음의 문화가 많이 있다. 예컨대 매춘과 음란물의 제작과 홍포에서 여성을 성적 노리개로 삼고 여성의 인권을 무시하는 것, 인신매매(장기매매), 노동시장에서의 착취와 수탈, 각종 위험한 작업장에서의 안전시설미비, 향정신성 물질의 구입 용이와 범람으로 수백만 명이 약물중독으로 인간성이 상실되어 가고 있는 것, 불로소득과 일확천금을 노리면서 백만 명 이상이 도박벽으로 인간성을 상실하는 것, 알콜중독자의 속출, 그밖에 돈만 벌 수 있다면 무슨 짓도 마다하지 않고 하겠다는 풍조, 가령 유괴, 납치범,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사이비 종교의 수탈과 각종 인권유린, 청소년의 인간성을 파괴하는 대학입시 교육제도, 남을 배려하지 않는 교통문화, 그리고 정보화 사회에서 컴퓨터와 뉴미디어에 의하여 주체성을 상실한 인간의 사물화(事物化)와 소외현상과 인간성상실은 더욱더 가속화 되어가고 있다는 것 등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죽음의 문화의 양상이 우리 사회에 암영을 던지고 인간성을 상실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우리는 다음 장에서 이러한 죽음의 문화가 형성된 원인을 규명해 보자.

 

 

III. 문화윤리의 과제

 

고전적인 문화 이해는 보편적이고 영속적인 하나의 통일된 문화만 있다는 생각에 익숙해 있었다. 그래서 고전적인 문화이념은 규범적이고 가치론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전적인 문화이념은 근세이후 경험적이고 과학적인 문화연구에 의해 설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경험적인 문화이념은 문화상대주의에 빠지고 종래에는 문화의 탈가치론을 주장하기도 하고 심지어 반윤리적인 문화의 자유방임주의로 전락하게 되었다. 아무런 규범도 거부하고 있는 현대문화는 몰락의 비운을 맞게 되었다.

 

현대의 문화이념은 대체로 경험적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문화인류학자들, 크뢰버(Kroeber)와 클룩혼(Kluckhohn)에 의하면 "문화는 살고있는 존재의 활동의 어떤 특수한 양태이며 그들의 집단 생활의 조직의 어떤 특수한 양태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 의하면 보편적이고 가치론적인 문화는 부인되며, 문화이념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7)

 

그 결과 문화의 본질의 이해는 보편성을 문제삼는 철학자들의 관심에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근대이후 학문의 세분화 경향은 철학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되어 철학자들까지도 전문적인 영역의 기술을 다루는 것에 집착하고 철학자들은 총체적인 인간이해에 필수적인 세계관과 문화이념을 위한 노력을 등한히 하게 되었다. 실제로 문화를 만들고 문화적 활동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철학을 외면하고 있으며 심지어 철학 없이도 문화의 성립과 보전과 발전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슈바이처(Schweitzer)가 통탄하는 것처럼 19세기 중엽이후 철학은 문화에 대하여 거의 철학적 사고를 하지 않았으며 문화에 대하여 반성을 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종래에는 오늘날 문화위기 또는 문화몰락을 촉진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8)

 

1차 세계대전 후 이러한 문화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일부의 철학자들이 문명비판과 문화에 대한 반성을 시도하는 문화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철학적 인간학이 대두하면서 문화의 본질이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기 시작했다. "문화이념은 철학적 인간학의 중심문제이다" 9) 발표자는 이 장에서 먼저 문화이해를 위해 철학적 인간학의 관점에서 문화이념의 지평의 구성요소를 검토해 보고 그 다음 문화비판의 준거와 문화재건의 기초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1. 문화이해의 기본요소

 

인간은 자연상태에서 주어진 그대로 자기생존을 유지하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상태에 있다. 그래서 겔렌(A. Gehlen)은 인간을 생물학적인 기능면에서 "결핍존재"(Mangelwesen)라고 표현했다. 인간은 자기의 결핍을 극복하기 위해서 자기를 의식하고 반성하다보니, 그 보상으로 모방과 자유로운 선택과 고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모방과 선택능력과 고안은 바로 인간 정신의 작용이다. 이 인간정신의 발로가 곧 문화이다.10)

 

그러므로 문화란 미완성된 상태로 태어난 인간이 자기생존을 위해서 스스로 생각해 낸 자기의식과 자기반성의 결과의 집적이다. 따라서 문화는 자기반성의 산물이므로 본질적으로 윤리적일 수밖에 없으며 윤리적이어야만 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문화존재(Kulturwesen)이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의 문화의 창조성과 피조성을 돌이켜 봄으로써 인간에게 숨겨져 있는 인간본질의 해명이 가능할 것이라고 기대를 가질 수 있다. 그래서 로타커(Erich Rothacker)를 비롯하여 란트만, 캇시러(E. Cassirer), 플레쓰너(H. Plessner)등은 인간은 오로지 문화존재로서만 이해되어질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문화인간학(Kulturanthropologie; 영어의 cultural anthropology 즉 문화인류학과는 구별된다. 문화인류학은 독일어에서는 Volkerkunde로 표기된다)은 철학적 인간학의 어떤 하나의 분과의 내용이 아니라 문화이해를 통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철학적 인간학의 전체가 된다.

 

란트만에 의하면 문화적-철학적 인간학은 5가지 차원으로 해명된다. 즉 창조성, 순치성(Kulturlaritat), 사회성, 역사성. 전통성.11)  필자는 란트만의 이러한 5가지 기본요소 외에 문화의 윤리성을 덧붙여 문화이해의 기본요소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문화이해를 위한 이러한 6가지 기본요소가 바로 문화철학의 기본요소이며 동시에 철학적 인간학에서 본 문화이념의 기본요소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1) 창조성

 

인간은 본질적으로 비전문화(Unspezialisiertheit)되어 있다는 것은 철학적 인간학에서의 인간이해의 출발점이다.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본능(Instinktvitat)에 따라 이미 결정된 삶을 사는 것, 즉 전문화가 아니라 가지결정을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잇다. 이 자유는 미리 주어진 가능성의 선택뿐만 아니라 자기의 행동 방식 자체를 새롭게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소극적으로 '…로부터의 자유', 즉 본능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자유와 적극적으로 '…을 하는 자유', 즉 창조적으로 자기결정을 하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자기의 행동방식을 자유롭게 결정하는 창조적인 행위가 바로 문화이다.12)

 

현대문화의 대중화현상의 역작용 즉 기계화, 자동화, 주조화가 유발하는 획일성과 아노미현상은 인간의 개성상실과 행위에 대한 무책임을 초래하게 했고 종래에는 창의성을 빈약하게 만들었다. 문화의 발전은 창조성을 발휘하는 개성의 힘과 의지가 중요한 관건이다. 창의성의 근원은 자아의 주체적 사고력이다. 그러므로 미래 문화에서는 개인과 개성에 최고의 가치가 부여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은 개성을 자유롭게 발휘할 때에 삶의 보람과 의미를 느끼고 의욕적으로 창조활동을 한다. 이 개성존중과 발휘는 반사회적인 이기주의를 말하는 것이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문화는 모든 개인이 방종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살게 해주는 자연과 인간의 개성을 최대한 누리면서 인류 공존공영이라는 문화보편성과 개성의 조화를 도모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자기완성은 문자 그대로 바로 완전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자기에게 높게도 하고 또는 낮게도 하고, 풍부하게도 하고 또는 빈약하게도 하는 형식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문화창조도 그가 결정하기에 달렸음으로 여기에는 위험이 따른다. 문화창조에는 오류와 죄악의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인간은 자기형성의 능력과 자유를 다른 동물이 하는 것보다 더욱 동물적으로, 더 추한 것으로 행할 수도 있고, 이와는 정반대로 천사처럼 행할 수도 있다. 문화창조는 개성을 가지나, 이 개성이 극도로 강조되면 반사회성을 띨 수도 있고 도리어 문화를 파괴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문화창조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따라서 인간의 문화창조는 동시에 인간의 윤리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2) 순치성

 

인간은 문화를 창조하기도 하지만, 그가 만든 문화에 의하여 순치되기도 한다. 인간은 문화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자이다. 인간은 학습존재(Erziehungswesen, homo educantum)이다. 그 학습의 내용이 문화임은 물론이다. 모든 사람은 문화학습에 의하여 인간으로 된다. 그래서 인간은 문화에 의하여 주조(鑄造)된다고 말할 수도 있고 문화를 주조하는 자라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는 혼자서 만들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다. 한 개인이 그의 짧은 생애에서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은 비교적 적은 것이며, 혼자서 만들 수 있는 것도 극히 적은 것이지만, 어떤 집단이, 어떤 민족 전체가, 아니 인류가 오랜 세월동안 발명해 놓은 것은 대단히 풍부한 것이다. 모든 개인도 초개인적인, 자기 자신을 넘어서 모든 집단과 사회에 공통하는 문화의 매개물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그 자신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그가 속한 문화의 구속을 받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은 문화존재이다. 문화는 그 문화를 완성시키는 인간 없이 존재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문화 없이 존재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문화를 통하여 그 문화를 만든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

 

(3) 사회성

 

인간의 사회성이 인간의 본성이냐 아니냐는 문제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으나, 철학적 인간학자는 자연법 지지자들처럼 사회존재론(Sozialontologie)을 지지한다. 인간의 사회성이 본성필연적(naturnotwendig)이라고 한다면, 사회성은 이미 어떤 문화영역을 형성한다. 문화는 사회적인 것의 표현이다.

 

사회, 즉 가족, 민족, 국가 등의 집단은 그 자체가 하나의 문화영역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문화 전체의 보지자이며 전승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문화적 존재일 수 있기 위해서는 동시에 사회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

 

문화참여의 길은 사회적인 것의 관여를 전제로 한다. 우리에게 문화를 전달해주는 것은 사회이다. 따라서 문화는 인간정신의 사회적 표현이다. 우리가 우리의 문화를 존중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도 그것이 우리 자신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민족의 문화를 통하여 그 민족을 평가하고 그 사회를 평가한다.

 

그러나 사회성도 가르치고 배우는 데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문화를 통해서 사회적으로 되고 사회를 통해서 문화적으로 되지만, 사회성만으로 문화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문화는 비사회적인 것에 참여함으로써 발생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화에 대한 윤리적 성찰이 반드시 요구된다.

 

(4) 역사성

 

인간은 '열려져 있는 존재'(Offenheitswesen)이다. 인간은 그의 내면적인 비고정성으로 말미암아 그 자신에게 형상을 부여할 수 있다. 이 형상은 역사가 경과함에 따라 다른 모습을 띤다. 그러므로 인간의 문화는 인간의 역사성을 내포한다.

 

우리는 문화일반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항상 역사적으로 제한된 문화를 만들 수밖에 없다. 역사성은 단지 외적 영역에서만 작용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자발적인 기도와 사랑의 행위는 역사성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근거, 즉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서나 통용될 수 있는 근거를 우리는 결코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신앙도 열려져 있어야 하고 역사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종교의 토착화가 요청된다.

 

그러면 인간과 문화가 가변성에만 있다면 인간의 본질과 정체성은 없다는 말인가? 인간이 자기에게 주는 모든 역사적인 모습들은 물론 사라지는 것일 수도 있고 바뀔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은 어떤 궁극적인 무정형(Amorpheit)으로부터 항상 반복해서 자기의 모습을 부여할 수도 있고 또 부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과 조소성(彫塑性)과 자기형성의 요청이 서로 뒤섞여 있다는 것은 모든 변화를 이겨내는 다년생초목과 같은 인간의 특성을 준다고 할 수 있다.13)  플레스너(H. Plessner)에 의하면 "인간화된 인간"(homo hominatus)은 역사적이지만, "인간이 되는 인간"(homo hominans)의 창조적 배태(胚胎)는 영원한 것이다.14)  바로 이 점에 인간의 본성이 존재한다. 인간에게는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우리는 인간의 자기형성의 역사적 과정인 문화를 통해서 열려져 있는 인간의 본질을 일시적으로만 밝힐 수 있을 뿐이다.

 

(5) 전통성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문화형식들은 유전될 수는 없으나, 그렇지만 보존되기도 한다. 이 보존이라는 형식이 바로 전통이다. 전통에 의해서 지식들과 예능이 대를 이어 전승된다. 보존되어야 할 것은 전통 속에 자리를 잡는다. 과거는 전통에 의하여 현재에서 재현되고 반복된다.15)

 

전통은 배우고 가르치면서 지켜진다. 배우는 것이 전통을 구성하는 것의 절반이라고 한다면, 전통을 구성하는 다른 절반은 가르치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오랜 과정을 거쳐 전통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은 문화를 만든 후, 교육을 통해서 문화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염려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을 학습존재라고 하는 것은 인간은 전통적인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인간은 예전에 만들어진 것들에 의지하고 살면서 그의 독자적인 창조성을 조금 보여준다. 문화의 창조란 기실 무로부터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것의 수정과 변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하늘 아래에는 새로운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격언이 생겨났을 것이다.

 

전통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융통성을 가지고 있다. 전통은 그때그때 새로운 해석을 허용한다. 그래서 전통은 유전과 구별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제로 전통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전통에 대해 거리를 두고 산다. 우리는 전통을 수용할 수도 있지만 거부할 수도 있다. 전통이 우리의 느낌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 우리는 전통으로부터 떠날 수 있으며 때로는 그 전통에 항거할 수도 있다. 전통은 보존의 원칙을 형성하지만, 또 변할 수도 있고, 새로운 창조에 힘입어 더욱 풍부해질 수도 있다. 전통은 옛날에 한번만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개별적으로 이루어진 수많은 것들이 비판과 반성을 거쳐 전통 안에 집적된다. 이 집적의 과정은 오늘날에도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창조의 재능은 전통주의가 고수될 때도 발휘하기 어렵지만, 문화창조의 자유가 과도해질 때도 제대로 발휘되기 어렵고 오히려 쇠퇴하게 된다. 란트만은 이를 두고 "창조적인 능력이 어떤 시대에는 탕진될 수 있다"16)고 말했다. 그 시대가 바로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이다. 이러한 이율배반은 때로는 갈등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인간에게 끊임없는 문화에 대한 반성을 하게 해준다. 전통의 경직성에서부터 벗어나면서도 아직 개인주의의 방종이 절정에 이르지 못한 과도기에 문화는 발전한다.

 

하이데거는 "전통의 참뜻은 그것과 만남으로써 각자의 실존가능성을 재획득하는 것이며 전통의 반복은 표명된 전승, 즉 이전에 있었던 현존재의 가능성으로 되돌아가는 것"17)이라고 말했다. 전통의 반복은 단지 과거의 재연만도 아니며 현재를 과거에 되돌려 결부시키는 것만도 아니며 오히려 전승된 것을 초월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능적인 전통과의 만남에서 도덕적인 자아를 새로이 파악하고 문화의 윤리성을 형성하려고 노력하는 데서 다양한 전통의 역사적·사회적인 상대성을 극복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문화는 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문화는 변화하지 않는 것이 있다. 이것을 전통은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전통문화를 보전해야 한다. 문화의 생명은 전통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6) 윤리성 : 문화윤리의 과제

 

문화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술과 도덕의 상관성에 관한 문제는 참으로 오랫동안 논란되어 온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다.18)

 

가치상대주의가 19세기 이후 팽배해지면서 철학자들까지도 문화일반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소홀히 하였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후 문화위기라는 말이 인구(人口)에 회자되면서 문화철학이 배태되고 문화윤리학이 등장하게 되었다. 인간은 그가 이룩한 문화에 대해 반성과 비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문화판단의 근거를 그 문화의 윤리성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윤리의 근본원리를 인간의 삶을 보전하고 삶을 촉진하고 발전할 수 있게 해주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선(善)은 생명을 긍정하고 보전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되고, 악(惡)은 삶을 부정하고 해롭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윤리의 근본원리를 인간의 구체적 삶에서 구현시켜야 하는 것이 바로 참된 문화의 근본목적이며 문화윤리의 과제이다.

 

어떤 시대, 어떤 사회의 문화를 판단하고 비판하는 기준을 찾는 것은 철학자의 과업이다. 어떤 문화가 인간의 정신적 삶을 촉진시키는가 아니면 방해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훌륭하다든가 또는 그 문화가 나쁘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래서 몬딘(B. Mondin)은 "문화들과 문화의 기획을 판단하는 절대적이며 보편타당한 기준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진정한 철학적 인간학의 과업이다"19)라고 말할 수 있었다.

 

슈바이처(A. Schweitzer)는 "인간의 창조능력의 발휘와 지식의 증대가 문화의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고 그것들은 다만 문화활동에 부수되는 비본질적인 요건에 불과하다. 문화창조 활동이 진정한 윤리적인 태도 위에 근거할 때라야 제대로 온전한 결과를 거둘 수 있게 될 것이다…… 사람이 인간으로서 진정한 가치를 발휘하려면 윤리적인 근본정신 위에 확립되어야 한다. 윤리적인 근거를 상실하면 아무리 훌륭한 창조력과 지력을 가지고서도 결국 문화 속에 위기를 배태시키고 만다."20)고 문화의 윤리성을 갈파했다. 그는 현대의 비윤리적인 문화의 모습을 한마디로 "문화의 몰락"이라고 말했다. 문화에 대한 대부분의 평가는 여러 가지 능력이 예술, 경제, 산업 등의 영역에 관하여 온 과정과 과학적·기술적, 예술적 성과를 계산하는 데에만 급급했다. 사람들은 문화가 가지고 있어야 할 윤리성을 간과했다. 문화에 대한 윤리적 반성을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으로 보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그들은 그들이 실현해야 할 문화의 전체적인 목적을 상실한 채, 계획도 근본도 없이 자신의 미래를 혼돈 속에 내맡기고 있다.21)그래서 오늘날 천박한 사이비 예술인, 황금의 노예가 되어버린 지식인, 문화인을 자처하는 협잡꾼들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다. 그래서 치졸한 익살꾼들이 표현과 창작의 자유를 내걸고 판을 차리게 되면, 심지어 오랫동안 전승되어온 제도적 기구나 규율화된 문화단체들까지도 그들 본래의 목적과 사명을 유연하게 만들어 저들에게 아부하고 저들과 타협한다. 문화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술은 상업주의에 놀아나면서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피상적인 외양만 바꾸어 가면서 인간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것을 능사로 삼는다. 그 결과 대부분의 이성적인 사람들은 이성적 사고와 반성을 포기하고 있는 현대 예술 일반을 백안시한다.

 

오늘날 정상적인 사고를 할 줄 아는 사람은 누구나 문화의 몰락이 진행되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문화란 인간이 자기 생존을 위해 자기 반성을 한 결과의 집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대 문화의 몰락의 근본적인 원인은 인간이 자기반성을 하지 않은 데 있다. 무수한 생명이 죽어가고 인간이 비인간화되고 사물화되어 가는 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속수무책이다. 죽음의 문화 속에서 허덕이면서도 문화와 예술의 탈가치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현대 사회에는 너무나 많이 있다.

 

윤리성은 문화의 본질 요소이다. 따라서 윤리적인 힘이 우리들의 신념 속에서 자유롭게 작동할 수 있기만 한다면 문화는 몰락으로부터 재생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22)

 

슈바이처는 "문화의 발전은 개개인이 전체의 진보를 목적으로 삼는 이성적 이상을 생각하고 그 이상을 가지고 현실과 관계하여 그 이상이 그 사회상태에 가장 효과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형태를 취하도록 하는데 있다"고 말했다. 문화의 창조자와 피조자로서의 인간의 능력은 바로 인간이 항상 반성하는 사람이며 도덕적인 존재하는 데에 기인한다. 경제가 발전하고 기술이 진보하고 생활이 윤택해져도 진정한 문화는 오히려 퇴보하고 몰락에 이르게 된 것은 바로 인간이 문화의 주체로서 자기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삶의 주체로서 문화를 생생하게 하는 윤리적인 이성적 이상을 품고 자유롭고 계획적인 목적의식을 가지고 문화를 창조하고 학습해야 할 것이다.

 

2. 문화비판과 문화재건의 기초

 

(1) 문화비판의 준거

 

철학자는 인간이 이룩한 모든 작품과 행위에 대해 비판하는 작업을 짊어진 자이다. 현대 문화의 타락과 몰락은 문화담당자의 철학의 빈곤과 철학자들의 문화의 본질에 대한 몰이해와 문화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의 포기에 기인한다.

 

우리는 앞에서 문화이해를 위한 문화이해의 구성요소를 6가지로 나누어 검토해 보았다. 우리는 이 문화이해의 6가지 구성요소를 준거로 삼아 어떤 특정한 문화의 상태를 이해하고 진단하고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작품의 평가의 첫째 근거는 그 문화작품이 얼마만큼 창의성을 드러내고 있는가 하는 점을 찾아내는 데 있다. 문화의 발전은 창조성을 발휘하는 개인과 집단의 능력과 의지가 관건이 된다. 개성이 자유롭게 발휘될 수 있을 때, 사람들은 삶의 보람과 의미를 느끼고 의욕적으로 창조활동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창의성은 규범을 완전히 무시하는 반사회적인 이기주의나 자유방임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따라서 우리는 방종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개성이 최대한 발휘되고 모든 것을 살게 해 주는 자연과 인류의 공존공영이라는 문화의 보편적인 창의성을 문화비판의 척도로 삼을 수 있다.

 

둘째로, 우리는 문화의 순치성, 즉 문화에 의해 어떻게 인간이 길들여지는가 하는 점을 고려하면서 인간의 피조성을 살펴보고 어떤 문화의 상태를 평가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문화학습의 자세, 즉 문화규범을 어떻게 익히고 있는가를 살펴봄으로 그 문화를 이해하고 진단할 수 있다.

 

셋째로, 문화작품에 담겨 있는 사회성을 가지고 그 문화작품의 특수성을 진단할 수 있다. 특히 공생(共生)을 장려하는 점을 문화평가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넷째로, 우리는 어떤 문화작품의 역사성을 통해서, 즉 그 작품의 역사적 성립과정과 변천과정을 통해서 그 작품을 풍부하게 이해하고 진단할 수 있다.

 

다섯째, 우리는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문화재들이 어떻게 전승되어 왔는가를 살펴봄으로써 그 문화재를 이해하고 진단할 수 있다. 오랜 세월동안 절차탁마되어 오고 뿌리를 제대로 내리고 있는 문화의 전통성을 통해서 우리는 문화를 평가할 수 있다.

 

여섯째로 우리는 인간의 생명을 보전하고 발전시키는 문화의 윤리성을 또한 문화비판의 근본요소로 볼 수 있다. 어떤 문화재가 인간의 삶을 보존시키고 인간의 품위와 존엄성을 얼마만큼 고양시키고 있는가에 따라 그 문화재를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작품은 도덕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비도덕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일 수 있다. 이런 경우 우리는 그런 작품은 앞에서 검토해 본 다른 요소를 준거로 삼아 평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모든 작품이 한결같이 문화이념 일반의 기본요소를 다 갖추고 있거나 다 갖추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이념의 6가지 기본요소는 각각 어디까지나 어떤 문화의 상태를 우리가 이해하고 진단하는 하나의 필요조건일 뿐이다. 따라서 문화작품에 따라 비판의 준거가 똑같을 수 없다는 것은 물론이며, 문화비판의 준거는 어디까지나 문화이해를 위한 방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문화재건의 기초

 

많은 현대인들은 윤리성이 문화의 결정적인 구성요소이며 문화의 근본임을 망각하거나 고의로 부정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현대 문화는 대체로 전반적으로 하강 또는 몰락 중에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 문화의 몰락의 원인은 현대 철학이 인도(人道)와 문화에 대하여 본질적인 사고를 하지 않게 되면서 이상적인 인간관과 세계관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철학은 대중의 사고력을 도와주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시들어 버리고 말았으며, 모든 사람에게 문화적 이상을 가질 수 있도록 주도해주지 못했다. 그러므로 철학은 이제 문화의 존립근거가 될 수 있는 윤리적인 이상을 위하여 싸워야 한다고 한다.23) 한 마디로 철학의 궁극적 사명은 일반이성의 지도자로서, 또한 문화의 목자로서 활동하는 것이다.

 

"현대인은 윤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수단과 목적의 도착을 일으키고 있으며, 인도를 무시하고 전체적인 사회조직에 예속되어 자아를 상실하고 비인도적인 독존과 배타의 길을 걷고 있으며 서로 무관심하고 서로 분열하고 허무감에 빠져 있고 심지어 인간성에 대하여 증오를 느끼고 있기도 하다. 이것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불안을 빚어내고 문화의 위기를 자아내는 원인으로 되었다."24)고 슈바이처는 그의 "문화의 몰락과 재건"에서 통탄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현대문화 진단은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타당하다고 보여지며, 그때보다 더 심한 위기에 우리는 처해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소외, 인간성상실, 비인간화, 인간의 무사려증(無思廬症)은 갈수록 더욱 가속화되고 있고, 비윤리적인 문화현상은 우리에게 혐오감을 준다. 이제는 문화부정론과 문화무용론과 같은 반문화현상이 속출하고 있다.

 

현대의 문화담당자들은 이미 이성적인 사고와 인간성을 상실하여 버렸기 때문에 냉철하게 자기반성을 하거나 문화현상에 대해 올바르게 비판할 줄 모른다. 그들은 그때 그때의 사실이 그들에게 가져다주는 즉흥적이고 찰나적인 생각과 감정의 지배를 받거나 상업주의와 매우 근시안적인 이해타산으로 하나의 사실로부터 다음의 사실을 무비판적으로 이끌어 낼뿐이다. 그들은 그들이 이렇게 실현해야 할 전체적인 목적을 명확히 의식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계획도 없고 합리적인 목표도 없이 자신의 미래를 혼돈 속에 방기하고 있다.

 

제들마이어(Hans Sedlmayr)는 그의 책 "중심의 상실"에서 19세기와 20세기의 예술의 특징은 중심(Mitte)을 상실했다고 말했다. 그는 현대 예술의 경향을 '순수'영역의 고립, 양극화현상, 무기물에로 쏠려 있음, 뿌리의 상실, 고의적인 하강화, 인간성의 배제, 상하의 구분의 지양이라고 했다.25)  제들마이어는 또 그의 "예술의 진리"에서 현대 예술의 특징을 4가지로 보았다; 첫째,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둘째, 패러독스(변증법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셋째, 아이러니(미학적 허무주의), 넷째, 악마적인 모습(das diabolisches Bild).26)  우리는 이러한 현대예술의 경향을 한 마디로 죽음의 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죽음의 문화로부터 어떻게 사람을 살게 하는 문화로 되돌아 갈 수 있겠는가? 그것은 우리가 윤리적인 힘이 우리들의 의지 속에서 자유롭게 작용할 수 있기만 하다면 문화는 몰락으로부터 재건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 데서 가능하다. "문화의 본질은 우리의 생명에의 의지(살려는 의지) 속에서 가치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생명에 대한 외경이 개개의 인간과 인류의 내면에 자리를 잡으려고 하는 데서 존속한다. 이 생명에의 의지는 모든 생명체를 위하여 삶의 외경을 확인하고 생명에 대한 외경이라는 인간의 정신 속에서 완성을 기한다. 이것이 바로 문화이며 그 밖의 것은 진정한 문화의 모습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지구의 파멸을 목전에 두고 있을 정도로 심각한 생명의 위기와 자아의 위기 속에서 허덕이고 있다. 인간은 모든 생명체를 보호하고 자연을 지키는 파수꾼의 사명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보존을 위해서 생명과 문화의 터전인 자연을 온전하게 보존하는 '살리는 문화'를 이룩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두 가지 문화재건의 요건을 고려해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생존경쟁을 해소시킬 수 있어야 한다.

 

생존경쟁은 이중으로 이루어진다: 밖으로 안으로. 밖으로 자연 가운데서 자연에 대하여 경쟁하게 되고 안으로 인간들 사이에서 인간에 대하여 경쟁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생존경쟁이 감소되려면 인간의 이성이 밖으로 자연을 조종하고 안으로 인간의 본성을 지배하는 정도가 최대한 정신화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정신화가 참된 문화를 창조한다. 그러므로 참된 문화는 자연에 대한 이상적 이성의 돌봄 즉 자신의 돌봄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정신의 돌봄으로써 완성된다.

 

사람들은 문화성립은 단순히 자연력에 대한 이성의 지배로 이루어진다고 간주한다. 그러나 자연력에 대한 이성의 지배만으로 문화의 본질적인 진보를 보장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성의 자연지배는 생존경쟁을 격화시킬 뿐만 아니라 자연을 파괴하고 인간의 삶을 위태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대 사회의 경제활동의 역작용에서 이러한 면모를 뚜렷하게 찾아볼 수 있다. 이성이 자연을 지배하고 물질이 아무리 풍부해도 인간의 생존경쟁은 약화되지 않는다. 생존경쟁이 해소되지 않는 한 인간은 안정된 삶을 살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의 삶을 위한 문화는 우선적으로 인간의 생존경쟁을 해소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참된 문화는 생존경쟁을 해소시킬 수 있어야 한다.

 

다산(茶山) 정약용은 일찍이 "사람과 더불어 경쟁하는 마음이 없으면 항상 평화롭다"(與入不競心常靜)고 하지 않았던가? 지구의 자연자원의 고갈의 근본원인은 불필요한 경쟁심에서 초래된 것이다. 사치와 자원의 낭비는 인간의 허영심을 부추기는 경쟁에서 나온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가 자연과 인류의 공생(Symbioses)을 위해 절제와 검소한 문화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이다. 문화는 인간과 자연을 상생(相生)하게 하는 역할을 보여주는 것이어야 한다. 아놀드 겔렌은 1952년 스위스의 상트 갈렌대학에서의 '현대의 인간학에서 본 인간상'이라는 강연에서 미국의 실용주의자 윌리암 제임스(W. James)가 한 말을 이렇게 인용한 적이 있다. "내 생각으로는 전쟁도 압도할 만한 우리가 추구하는 도덕적인 것을, 다소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같이 보일는지 몰라도, 옛날 수도자들이 누려온 청빈사상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새삼스럽게 가난을 위한 찬송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모든 일마다 성급하게 달라붙거나 혹은 돈을 탐내서 허둥지둥대거나 하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생각이 모자란다고 하거나 명예욕이 없다고 비난을 하지만, 나로서는 우리 모두가 이 문제를 새삼스럽게 진지하게 숙고하도록 권장하고 싶다. 참으로 교양있는 사람들까지도 맹목적으로 가난을 두려워하다는 것은 현대인이 시달리는 최악의 도덕적 병폐이다.27)

 

만민이 자유롭게 평화 안에서 누려야 할 바가 문화가 지향해야 할 목표이고 문화가 본질적으로 윤리적일 수밖에 없다면 우리는 절제와 검소한 문화생활에서, 즉 우리의 선조들이 노래불렀던 문화재건의 단초를 찾지 않을 수 없다.

 

'마음대로 허용되는 풍요'(permissive cornucopia)에 사로잡혀 있는 소위 경제 선진국들이 절대 빈곤에서 허덕이는 나라들과 하나의 지구적 공동체의 연대성의 추구를 위하여 물질소비의 무제약적 탐욕과 향락을 자제하고 가난한 나라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최소한의 사람다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물질적 탐욕과 경쟁으로 말미암아 정신적으로 황폐한 현대문화의 몰락은 재건될 수 없을 것이다.

 

문화의 물질적 측면과 정신적 측면이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항상 절제와 검소의 생활이 요청된다.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면서 인간의 삶의 실존적 차원의 유지와 풍성화와 지구적 공동체의 물질적 불평등의 극복, 지구의 생태계의 보존은 문화재건의 과제이다. 올바른 문화는 인간의 경쟁의식을 약화시키며 갈등을 최소화하고 온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문화의 최후의 보루를 지키고 있는 수도자들이 말씀에 순명하고 가난 속에서 평화를 누리고 금욕생활에서 정결을 칭송해마지 않는 것을 본받고 따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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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교훈, 『의학적 인간학』, (서울 : 서울대학교출판부, 2001년 출판예정), pp.28∼30. 참조.

2) L. Foss, "The Challenge to Medicine," Journal of Medicine and Philosophy, Vol.14., 1989, pp.165∼191. 참조.

3) D. M. Levin &G. F. Solomon, "The discursive formation of the body in the history of medicine," Journal of Medicine and Philsophy, Vol.25, 1995, p.533f.

4) A. de Saint-Exupery, Citadelle, Paris : Gallimard, 1948.

5) G. Bachelard, The Poets of Space, trans, Marie Jolas, New York : Orion, 1964, Ch.1. 참조.

6) 진교훈, "집의 철학적 의미와 그 위기" 空間, 1989년 8월호. pp.99∼101. 참조.

7) Alfred L. Kroeber and Clyde Kluckhohn, Culture; A Critical Review of Concepts and Definitions, Harvard University Peabody Museum of American Archeology and Ethnology Papers, Vol. 47. No.1 (Cambridge, Mass.: The Museum, 1952), p.181.

8) A. Schweitzer, Verfall und Wiederaufbau der Kultur, Kulturphilosophie, Munchen 1923, S.1∼2.

9) Mark D. Morelli, Philosophy's Place in Culture, London, New York, Lanham : University Press of America, 1984, p.2.

10) A. Gehlen, Der Mensch, Berlin, 1940. S.16. 참고.

11) Michael Landmann, Fudnamental-Anthropologie, Bonn, 1979, S.77∼91. 참고. 및 같은 사람, Philosophische Anthropologie, Berlin 1969. 진교훈 역, 『철학적 인간학』, 경문사, 1977, 206∼240쪽 참고.

12) 란트만, 진교훈 옮김, 『철학적 인간학』, 206∼207쪽 참고.

13) Landmann, 진교훈 옮김, 『철학적 인간학』, 233쪽 참고.

14) H. Plessner, Zwischen Philosophie und Gesellschaft, Berlin 1953, S.11∼13 참고. M. Landmann, 진교훈 옮김, 『철학적 인간학』, pp.233∼234.

15) Landmann, Fundamental-Anthropologie, S.88∼92.

16) Landmann, Das Ende des Individiums, Stuttgart, 1971, S.17.

17) M. Heidegger, Sein und Zeit, Tubingen, 1960, S.386.

18) M. Rader and B. Jessup, Art and Human Values, New Jersey, Prentice Hall, 1976, pp.212∼234 참고. 김광명 역, 『예술과 인간가치』, 서울 : 이론과 실천사, 1987, 283∼312쪽 참고.

19) Battista Mondin, Philosophical Anthropology, Rome, Urbaniana University Press, 1985, p.189. 및 Morelli의 앞의 책, p.2. 참고.

20) A. Schweitzer, Verfall und Wiederaufbau der Kultur, Munchen, 1923, 서문.

21) M. Heidegger, Vortrage und Aufsatze, Pfullingen, 1954, S.89.

22) 진교훈, 『철학적 인간학 연구(Ⅰ)』, 서울 : 경문사, pp.157∼159 참고.

23) Schweitzer, 앞의 책, S.1∼3, S.5∼7. 참고.

24) 위의 책, S.6.

25) Hans Sedlmayr, Verlust der Mitte, Frankfurt a.M./Wien, 1977, S.114∼118. 참고.

26) 같은 사람, Kunst und Wahrheit, Munchen, 1978, S.153∼156. 참고.

27) W. James, The Experience of Religion, 1907. p.346f; A. Gehlen, Anthropologische Forschung, Reinbeck, 1965, S.59.

 

[진교훈(서울대 교수, 윤리학)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생명윤리연구회 홈페이지에서]

 

 

'현대사회의 생명과 문화윤리' 논평

 

 

진교훈 교수는 "사랑의 문화문명"을 건설하라는 교황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현대사회의 생명과 문화윤리>의 문제를 풀어가고 있다. 그것은 문화론적 측면에서 말하자면 결국 현대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대치하고, 그에 기반한 문화를 재건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이 유지되는 문화이며, 궁극적으로 생명 일반이 존중되는 '생명과 사랑의 문화'이다. 필자는 먼저 현대 한국 사회의 문화 전반에 넘쳐나는 반생명적 현상을 분석하고, 그 원인을 규명함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두 번째로 문화윤리의 의의를 논한 뒤, 결론적으로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재건할 가능성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먼저 필자는 II.장에서 한국 사회의 "반생명적인 문화 실태와 배경"을 다루고 있다. 그 논지의 핵심은 폭력을 조장하고 미화시키기까지 하는 현대 문화에 대한 비판과 고발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문화는 근본적으로 폭력과 생명경시의 풍조에 빠져있다. 그러한 폭력 문화를 크게 네 가지 현상, 즉 "학교폭력, 가정폭력, 조직폭력, 제도적 폭력"으로 세분화해서 살펴 볼 수 있다.

 

생명을 위협하는 죽음의 문화는 환경 오염, 특히 공해와 그 원인이자 결과이기도 한 생명존중사상의 쇠퇴 때문이다. "생명의 존엄성을 위협하는 공해의 원인"을 필자는 "우리 나라의 특유한 반사회윤리적인 병폐"에서 그리고 그것이 결국 "생명존중사상을 더욱 쇠퇴하게 만"들고 있다고 고발한다. 그 원인은 성장위주의 경제정책에 근거한 정부의 근시안적인 계획과 무모한 예산집행은 물론 그런 주장의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시민들의 무지몽매함과 허영심"에서 찾고 있다. 이러한 위험한 현상에서 벗어나는 것은 오직 "생명을 존중하는 문화"에서 만이 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문화는 생명을 기술공학적으로 다루는 생명경시의 문화일 뿐이다. 그것이 근본적인 현대 사회의 생명문제에 담긴 위기의 본질이다. 예를 들어 언필청 오늘날 생명에 대해 자연과학적으로 접근하면서 수많은 성과를 내고 있다는 "생명공학"의 근본 관심은 "인간의 생명을 포함하는 각종 생명현상을 공업적으로 이용하여 돈을 벌려고 하는 데" 있다. 생명공학의 현재 관심사는 "유전자 조작기술과 체세포 복제기술의 개발"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생태계의 질서, 생태계의 순환과 생물 상호의존성과 생물의 다양성을 파괴"한다. 또한 문제는 이러한 기술이 거대 자본과 결합함으로써 빗어지는 결과이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떤 짓도 할 수 있는 비윤리적인 집단"으로 "인간과 생명의 존엄성을 철저히 무시"한다.

 

또한 인간 생명을 그 자체로 정보 현상으로 간주하는 '인간 게놈 프로젝트'에서는 인간의 자유와 내적 세계, 초월적인 영역과 영성의 측면은 무시될 뿐이다. 이는 유전자 결정론에 따른 것이다. 그것이 빗어내는 문제는 1)거대자본의 논리에 따른 유전자 결정론 예를 들어 보험회사나 고용주, 정부 기관이나 권력 집단에서의 악용과, 2)유전자 개량 내지 더 나은 종으로의 도약이란 허구에서 빗어지는 우생학적 관심에 따른 것이다. 역사 이래 우리는 우생학적 관점에 따라 저질러진 추악한 죄악상을 기억한다.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벌어진 죄악, 일본제국의 생체실험, 소련의 굴락, 현대의 열등한 민족에 대한 "인종청소"와 단종의 시도는 고사하고라도, 우수한 인간의 정자를 매매하여 인공수정하려는 행위 등은 이러한 관점을 단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우생학적으로 유전자를 개량한다는 것은 비윤리적"인 측면을 넘어 생명을 단순한 사물로 가치하락시키는 반인간적 범죄이다.

 

필자는 "지금의 시점에서 생명공학에서 가장 심각하게 문제되는 것은 복제(cloning)"라고 말한다. 사실 기술적으로 인간을 포함한 고등생물의 복제에는 별반 어려움이 없다. 개체 복제의 문제는 나와 똑같은 인간이 탄생하리란 우려와는 달리, 일란성 쌍생아의 경우에서 보듯이 유전적으로 동일한 한 개체가 새롭게 태어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윤리적인 문제와 인간의 자아 정체성 문제를 제외하고서 고찰한다면, 그것이 생명권 자체에서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문제는 유전자 조작에 의한 것이다. 유전자의 발현은 결정론적으로 마치 컴퓨터의 정보가 실행되듯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유전자는 환경과 상호작용함으로써 비로소 현실적인 생명으로 구현된다. 여기서 환경이란, 생명체의 외적인 환경은 물론, 내부적인 환경, 심지어 의식과 사고에 따른 환경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이다. 또한 환경에 의해 발현된 유전자의 명령체계는 또다시 다른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동일한 유전자를 지녔을지라도 실제적으로 한 생명체가 어떻게 성장하고 자라날지는 전혀 예측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손오공의 변신술처럼 그렇게 이루어지는 생명개체 복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전자 조작의 경우는 매우 심각하다. 먼저 유전자의 다양성을 해침으로써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많은 유전 정보를 상실하게 만든다. 둘째는 한번 조작된 유전자의 정보는 계속 대를 이어 복제된다. 그것을 매번의 필요에 따라 조작한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는 인간이 다른 생명체의 현실태와 가능태 모두를 장악하고 자신의 원의, 또는 악의, 욕망에 따라 조작한다는 윤리적, 존재론적 죄악은 물론이고, 생명학적으로도 엄청난 결과를 낳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 결과는 생명체 전체의 파멸까지도 고려해야할 만큼 심각한 것이다. 더욱이 유전자 조작 기술이 한 종 내에서의 조작은 물론, 종과 종 간의 유전자 교환, 예를 들어 돼지의 유전자풀에 인간 게놈을 섞는 이종간의 유전자 교환 내지 결합은 파멸적이기까지 하다. 이종(異種)간 교잡행위는 분자유전학 자체에서도 "악마의 기술"로 지칭될 정도이다.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낳을지 과학자체에서도 검증하지 못하며, 그에 대해 어떠한 예단조차 할 수없는 실정이다. 여기서 생명체 일반이 그 자체로 존중받을 생명권은 차치하고라도, 맹목적으로 진보의 허구에 사로잡힌 기술의 결과는 궁극적으로 생태계와 생명계 전체의 파멸을 야기할 뿐이다. 이에 대해 정확히 지적하는 진교수의 글은 그 논의의 엄격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가 반드시 경청해야할 사상이다. 그의 논의는 이러한 생명에 반하는 문화에 대해 검증, 비판하고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생명을 살리는 문화로 이끌어 가야할 지성의 과제를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는 측면에서 가치가 있다 하겠다.

 

이어 진교훈 교수는 "사이비 예술의 비인간화의 작태"와 놀이문화, 현대의학, 의식주 문화에 드러나는 비인간화현상을 지적하고 있다. 진교수는 오랫동안 철학적 인간학 연구에 많은 성과를 낸 뛰어난 학자답게 문화 전반에 걸친 문제를 집중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필자는, "오늘날 거의 모든 예술의 장르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비인간적인 작태를 우리는 대중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영화와 만화 및 애니메이션, 산업미술 등"을 거론하고, 더욱이 이러한 예술을 사이비 예술로 치부하여 이들이 단순히 "인간의 목숨을 파리목숨처럼 다루거나 인간을 단순한 기계나 상품으로 다루는 온갖 사이비 예술작품"이며, 여기서 "엽기적 살인, 근친 살인, 마약중독, 음란행위, 이유없는 불특정 다수의 집단살인, 그리고 가학성과 자학성을 극대화하는 잔인한 폭력 등"의 원인을 찾고 있다. 이러한 논지는 고전적 순수예술의 관점에 따라 현대 문화를 일방적으로 평가하는 논의 전개이다. 그러한 예술이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려는 정신병적 복합감정의 발로"이며, "상업성과 결탁하여 인간의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흥분시키거나 인간을 비하시키는 것을 능사"로 삼고 있으며, 그래서 "현대 예술가들 대부분은 인간성을 상실한 비도덕적인 사람"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문화가 현실에 대한 성찰과 그에 대한 인간의 총체적인 반응이란 사실을 무시하고, 도덕적으로 설정한 목표에 따라 현실에 대한 인지와 성찰의 내용 전부를 원인으로 돌리는 일반화의 오류에 빠질 위험이 크다 하겠다.

 

"비윤리적인 예술가들이 '죽음의 문화'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예술을 수용하고 그 안에 담긴 성찰의 내용을 보지못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죽음의 문화를 생산하는 사람일 것이다. 인간의 문화와 가치 세계에서는 포기하거나 변해서는 안되는 근본적인 것이 있다면, 그에 비해 역사의 흐름과 인간의 이해체계, 문화와 문명의 흐름에 따른 변화하고 변화해야할 것이 있다. 그것을 단지 지나간 시대의 기준에 따라 일방적으로 폄하한다면, 우려되지 않는 새로움, 다가오는 문화에 대한 긍정, 현실에 대한 반성과 심미적 반응으로서 예술이 자리할 곳이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필자가 정확히 지적하고 있듯이 문화로서 놀이에는 분명 "생명을 주창하려는 직접적인 충동" 뿐 아니라 살아가고 있음을 드러내는 "중요한 의미"들이 담겨 있다. 놀이는 문화철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인간의 의미구현 행위 가운데 하나이다. 놀면서 인간은 성숙하고, 자신을 성취해 간다. 따라서 놀이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이러한 의미론에 근거한 놀이 개념과 놀이 문화를 설정하는 것은 역사철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며, 인간의 의미론적 행위 및 문화론적 자기 성취와 관련된 중요한 주제이다. 따라서 오늘날 놀이와 스포츠를 "저열한 경쟁심리를 부축이고 긴장을 유발시키며 집단이기주의를 선동하고 연대의식을 파괴하기도 하고 인간성을 상실"하게 만들어, "대체로 추악한 것으로 전락되고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고 있"는 것지, 아니면 변화하는 문화를 반영하는 현상인지를 정확히 읽어내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도덕적 엄숙주의에 빠져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새대와 만나고 나누며, 그로써 그들을 교육하고 이끌어가야 하는 중요한 과제를 일방적인 강요와 훈육으로 이끌어 갈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역사를 통해 우리가 배우는 것은 도덕적 엄격함의 부족보다 나의 도덕성에 입각해 타자를 일면적으로 단정하고, 강요함으로써 그들이 지닌 정당함과 실존적 요구를 무시하는 결과이다. 그것은 불필요한 갈등과 모순, 대립을 초래할 것이다. 강요된 규율과 엄숙함으로 그들의 존재론적 성찰에 따른 의미와 새로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엄숙한 도덕은 다음 세대의 성숙을 가로막고, 새로운 규범 설정의 진지함을 미리 막아버리는 잘못을 저지르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옷은 문화이념의 중요한 기본요소인 전통성과 사회성과 윤리성을 개진하기도 하는 중요한 인간사"이며, "문화를 평가하는 중요한 척도"이다. 그러한 옷이 오늘날 모델과 '패션쇼'에 의해 "중인환시리에 뻔뻔스럽다 못해 후안무치한 짓"이며, "노출증에 걸린 정신병자"이고, 나아가 "문화의 몰락을 의미"하는 지, 또는 "인간성을 상실한 사람"으로 "전통을 무시한 급변하는 옷차림은 인간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인간을 병들게" 만드는지에 대해서는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 일방적인 단정의 예는 음식문화에서도 계속된다. "뿌리가 없는 뜨내기 음식, 즉 햄버거나 피자, 프라이드 치킨, 핫도그 같은 인스턴트식품과 외래음식은 전통문화를 고사(枯死)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을 황폐화시킨다"고 말한다. 더욱이 "누가 요리하기를 기피한다면 그는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란 주장은 너무나 단편적인 평가라 생각된다. 물론 밥을 낭비하고, "매년 8조원 어치의 음식물을 버리는 짓"은 분명 비인간적인 행위이다. 그러나 그러한 단정만으로 문제가 해결되는가. 우리는 여기에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말인가? 도덕적 단정과 비판은 나에게 정신적 위안을 줄 지는 모르나, 위기에서의 탈주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며, 이러한 문제에 빠진 이들에 대한 어떠한 구원의 힘으로도 작용하지 못할 것이다.

 

논평자는 어떤 측면에서는 진교수보다 더 현대 문화의 경박함과 광범위하게 펴져있는 자본의 논리, 성찰적이거나 영성적인 측면을 보지 못하는 문화의 맹점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럼에도,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곳의 우리, 책임있는 지성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그러한 문화가 빗어내는 위기에서의 탈주와 그를 위한 대안적 철학의 사유와 종교적 윤리 규범의 설정일 것이다. 그것은 현재의 문화 전반을 비인간적 내지 죽음의 문화로 단정하고, 그것이 생명을 경시함으로써 죽음의 문화로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면 할수록 더더욱 그러한 현상의 원인과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엄격함이란 우리가 설정한 윤리성에 입각하여 타자를 비판하는 엄격함보다, 비판 대상의 성격과 원리에 대한 엄밀한 분석과 근원을 밝히는 엄격함이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생명의 문화는 생명을 살리는 문화로 작동할 것이다.

 

문화에는 그 문화를 문화이게 하는 본질, 결코 포기해서는 안될 인간의 기본 가치를 거슬리는 측면과, 시대적 변화와 인간이 지닌 이해와 감성의 변화에 따른 문화적 변화에서 비롯되는 낯섬을 구별하는 작업은 철학적 성찰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이 발표문에서는 이러한 구별이 소홀이 다루어지면서, 전반적인 감성적 측면에서 주어지는 현대문화에 대한 거부를 인간 본성과 기본적 윤리 가치에 어긋나는 비윤리, 내지 반윤리적인 것으로 단정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우리가 직시하면서 풀어 나가야할 과제이다. 이것을 일면적 가치관으로 모두를 죄악시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결코 긍정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할 것이다. 문제는 단죄가 아니라 구원이며, 거부가 아니라 근본적 가치에 맞게 수용하는 열린 자세이다. 그것은 변화하는 문화의 추이를 수용하면서 포기할 수 없는 근본적 가치관에 따라 새롭게 변화시키고, 그것에 정당한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은 분명 많은 고뇌와 인내를 요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고뇌와 인내 없이 주어지는 단정적 평가가 위기를 극복하는 데 어떠한 도움을 줄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하겠다. 이 글 곳곳에서 공생과 윤리성에 기반한 생명의 문화를 이야기 한다면, 잘못된 문화에 대한 단정이 아니라,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이고 잘못을 고쳐 새로운 윤리와 생명의 문화로 이끌어 갈 것이지를 밝히는 작업이 절실히 요구될 것이다. 그러한 노력없는 단죄는 심정적 위안과 우리만의 공동의식을 누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참다운 화해와 생명을 살리는 문화로 나아가기에는 부족할 것이다. 생명의 문화란 이러한 수용과 이해라는 원리에 근거하여 생겨나는 살림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과연 오늘날의 문화가 이처럼 죽음의 문화에 빠져 있는지, 아니면 변화된 문화현상에 대한 지나친 단정인지, 아니면 미처 우리가 이러한 변화된 문화 현상에 담긴 시대의 표정을 읽지못하는 성찰함의 치열함을 쉽게 던져버린 것이 아닌지 진지하게 되돌아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이해와 성찰은 길고도 어려운 과정이기 때문이다. 현대 문화에서 "대부분의 이성적인 사람들은 이성적 사고와 반성을 포기하고 있는 현대 예술 일반을 백안시"하여 마침내, "오늘날 정상적인 사고를 할 줄 아는 사람은 누구나 문화의 몰락이 진행되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결론에서 진정 묻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과연 현대 사회의 이러한 어둔 밤의 시대, 궁핍한 시대에 구원은 어디서 주어지는가? 이것은 오늘날 생명과학의 문제와 현대 문화를 문화철학적이며 윤리학적 관점에서 고찰해준 진교훈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그 뒤를 이어 이러한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 소장 학자들, 더 좁은 의미에서는 논평자 자신에게 던지는 반성과 새로운 학문적 과제에 접해 제기하는 다짐의 말이다. 논평자 역시 이러한 문제를 학문적으로 고뇌하면서 '생명철학'이란 미완의 시도를 전개하고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진교수의 글은 평자의 학문적 진로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나아가 이러한 생명철학의 학문적 과제에서 학문하는 사람으로서의 실존적이며 원초적인 결단과 출발점으로 함께 나누고자 하는 의도에서 제기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위기에서의 탈주를 위해 요구되는 진지한 성찰의 작업을 위한 질문이며, 이로써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책임있는 지성의 과제를 진지하게 풀어가려는 논평자 자신의 학문적이며, 실존적인 성찰에서 생기는 문제이다.

 

[신승환(가톨릭대학교)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생명윤리연구회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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