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홍)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한국의 정치와 정치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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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7 ㅣ No.417

한국의 정치와 정치 윤리

 

 

1. 시작하는 말

 

정치 상황은 역사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굳어진 바탕으로서 그 위에서 오늘의 정치가 펼쳐지며, 한층 더 바람직한 내일을 만들기 위한 노력도, 그 위에서 출발한다. 그렇기 때문에 바람직한 내일을 향한 노력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는 오늘의 정치 상황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정치 현실은 거의 모든 국민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걱정거리가 되어 있다. 심지어는 이렇게 계속되다가는 한국 사회가 희망이 없는 나락으로 빠져들지는 않을까 하는 실망과 좌절이 점점 번지고 있는 것이 오늘의 우리 모습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정치의 속 모습을 찬찬히 되돌아보고 우리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어떤 자세가 필요한지를 독자들과 함께 생각해 보려 한다. 정치와 관련된 올바른 자세는 마음과 행동으로 이루어지며 그것은 곧 올바른 정치 윤리를 지키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정치뿐만이 아니라 모든 영역의 사회 생활과 관련되는 올바른 생활 자세는 곧 신앙의 문제이다. 신앙은 사회 생활이라는 차원을 넘어서는 초월적 내용을 포함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실천의 마당은 정치를 포함한 사회 생활이다. 왜냐하면 구원은 역사를 통하여 완성되는 것이며 역사는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 받은 인간의 고귀한 소명은 창조 사업의 완성에 참여하는 것 곧 인간 해방과 구원사의 완결을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의 창조적 참여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있다. 창조 사업의 완성을 위한 인간의 참여는 여러 분야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그 중에서도 정치 생활이라는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원리를 우리는 정치 윤리라 한다.

 

이 글에서는 먼저 정치 윤리의 근본적 원리를 살펴보고, 이와 관련된 한국 정치 현실의 근본적 문제점을 다루어 보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자세를 모색해 보려 한다. 

 

 

2. 정치란 신앙인에게는 혐오스러운 것인가?

 

이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예를 들 필요가 없을 정도로 정치와 관련된 매일 매일의 보도들은 부정적인 내용으로 넘쳐흐르고 있다. 한편 바른 마음을 가지고 올바른 자세로 살아가려는 많은 사람들은 정치를 혐오하는 경향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추세는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심지어는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타락했거나 때묻은 사람이 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는 신자들도 많다. 그리고 정치는 세상의 쓸데없는 짓이며 진실한 신앙인은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천상의 하느님을 찬양하고 계율을 지키고 선행을 실천하는 데에 몸과 마음을 다 바쳐야 한다고 가르치는 성직자와 수도자도 적지 않다.

 

비록 정치의 현실적 모습이 더할 수 없이 추잡하고 또 그것을 보는 국민들의 시각이 얼음같이 싸늘하지만 바로 그러한 정치가 우리의 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교 신앙과 정치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신앙은 우주의 출발 곧 창조의 시발점에서 마지막 심판 곧 역사의 종결점까지, 모든 삶의 원리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따라서 정치 또한 신앙의 차원에서 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창조의 역사 또는 구원의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정치가 가지는 의미를 분명히 이해하면 정치에 대한 신앙인의 자세 곧 신앙에 기초를 둔 정치 윤리 또한 뚜렷하고 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앙인들은 창세기에서 우리에게 계시된 바와 같이 하느님께서 낙원과 인간을 만드셨으며, 인간들이 하느님의 뜻 곧 낙원의 질서를 어겨 낙원에서 추방되었으며, 하느님께서 인간들을 낙원에서 추방하시면서 남자는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땀을 흘려야 하고 여자는 자손을 가지기 위하여 산고를 치러야 하며 가족을 입히기 위해서는 땀흘려 천을 짜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인간들이 낙원에서 추방되는 순간에 현실의 역사가 시작되었으며,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는 이 시점에서 낙원을 떠나 길고도 험난한 구원의 역사에 들어서는 시초의 신혼 부부에게 주신 하느님의 이 말씀은 그 후 전개될 인류 사회와 역사의 근본 성격을 예언하고 있다.

 

노동과 고통 없이 인간이 필요로 하는 식량과 옷과 자손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은 항상 이른바 수요가 공급을 넘어가는, 곧 공급 부족 상태에서 개인과 공동체가 살아가야 한다는 구조적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노동과 고통은 공급과 수요 사이의 차이 곧 부족한 공급을 메우기 위한 인간의 몫이다. 그러나 공급과 수요의 틈새는 역사가 끝날 때까지 완벽하게 메워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조건 위에서 여러 사람들이 모여 여러 모양으로 서로 얽혀 살아가는 것이 인간들의 공동체이다. 공급이 수요에 미치지 못한 가운데 여러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을 얻기 위한 경쟁이 있을 수밖에 없다. "가치 있는 것" 이란 토지, 재화, 자본, 교육의 기회, 권력, 명예, 건강 등 사람이면 누구나 갖고 싶어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가치를 둘러싸고 사람마다 끝없이 경쟁 - 이른바 무한 경쟁 - 을 한다면 거기에는 진리도 사랑도 질서도 없는 싸움터만 남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생 결단한 싸움은 개인과 공동체의 파괴를 가져올 뿐이다. 따라서 어떤 가치를 얼마만큼 누구에게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옳은가 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 문제에 대하여 사람들이 옳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해답을 찾아야 한다. 이 해답을 찾는 일은 역사가 진행되는 한 계속되어야 하며 그것이 정치이다. 따라서 정치는 구원의 역사가 출발하는 시점에서 시작하여 구원의 역사가 완성되는 날까지 계속되어야 할 구원사의 한 중요한 요소이다. 정치는 구원사적 숙명이며 원죄의 사회적 노출 형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는 신앙의 눈으로 볼 때에도 혐오스러운 것이 아니다. 신앙이 추구하는 인간 구원은 전인적(全人的) 구원이기 때문에 인간 생활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는 정치는 신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곧 신앙은 정치 문제를 도외시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앙의 핵심적 내용은 신앙 고백을 통하여 표현되고 있다. 신앙의 종착점은 인간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구원의 역사가 끝나고 영혼만이 아니라 육신을 가진 인간의 부활과 영생에 있다. 따라서 구원은 전인적(全人的) 구원을 말하는 것이며 마음이나 정신이나 영혼만의 건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회적 현상 중에서 거의 모든 생활 영역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는 것이 정치이다. 정치 권력은 경제, 문화, 사회, 윤리 등 그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이 거의 없으며 또한 모든 국민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따라서 정치적 정당성 곧 정치 윤리의 실천은 구원의 사회적 전제 조건이며 신앙과 정치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3. 국민 주권과 신앙 

 

오늘날 민주주의는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정치 제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민주주의의 가장 기초적 바탕은 국민 주권에 있다. 그러나 막상 "왜, 어떤 근거에서 국민 각자가 주권을 가지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그렇게 쉽지 않다. 더욱이 국민 주권이 신앙이나 교리와는 어떤 관계에 있느냐는 문제는 흔히 제기되지 않고 있는 듯하다.

 

성서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창조의 마지막 날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심으로써 창조의 첫 막을 끝내셨다.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기에 인간은 귀한 존재라고 우리는 믿는다.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은 신의 절대성과 유사한 속성을 인간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곧 인간의 인격적 주체성과 독립성을 의미한다.

 

사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지배할 수 없는 자기만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사상과 양심이 그것이다. 아무리 무서운 총칼로 위협하더라도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을 돌려놓을 수는 없다. 다만 그 표현이나 사상에 따른 행동을 못하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을 인간의 절대적 인격 주체성이라 한다.

 

이러한 주체성을 가진 인간은 동시에 사회적이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은 자신의 주체적 판단으로 자기 생활을 꾸며 갈 수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실천되는 현장은 사회이다. 곧 인간은 개인으로서 절대적인 인격적 주체성을 가지는 동시에 사회적 속성을 가지고 있는 이중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사회적 속성은 성서에서는 "하느님께서 (나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에 따라 사람을 짓자."라는 말로 표현(계시)되고 있다.

 

앞에서 잠깐 말한 바와 같이 우리 삶의 내용을 꾸며 가는 데에 가장 폭 넓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 정치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인간이 능동적이며 창조적인 역할을 사회적 차원 곧 공동체 차원에서 실현할 수 있는 정치적 권리를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개인의 이와 같은 지위를 국민의 주권이라고 한다.

 

국민 주권에 관한 여러 가지 학술적 설명과 이론이 있으나 그 내용은 사실 참으로 모호하며 이러한 약점은 거의 모든 정치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을 닮은 인간의 근본 모습에 대한 신앙은 그 어떤 정치학의 이론보다 국민 주권의 숭고한 가치를 확실히 뒷받침해 주고 있다.

 

따라서 국민 각자가 정치적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고 넓히는 것이 신앙이 요구하는 정치 윤리이다. 밀실에서의 야합, 지구당 당원들의 의사와 무관한 지역구 출마자의 위로부터의 지명(공천), 보스나 중간 보스를 중심으로 하는 상의 하달식의 권위주의적 정당 운영 등은 정치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 주권이라는 대원칙을 어기는 반그리스도교적이며 신앙에도 반대되는 행태이다.

 

 

4. 정치 조직과 권력의 행사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 

 

가톨릭 교회는 모든 조직체의 의미와 조직체가 있는 곳에는 언제 어디서나 있기 마련인 힘의 원리에 대하여 매우 독특한 입장을 갖고 있다. 그것은 교회의 공식적 교도권을 기초로 하는 사회 교리의 기본적 방향을 결정한다. 그 내용은 교황의 공식적 사회 문헌인 사회 회칙에 나타나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보조성의 원리라고 말할 수 있다. 보조성의 원리란 조직체의 목적과 조직체를 기반으로 하는 곧 모든 종류의 권력의 행사에 관한 원리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직체의 목적은 조직체를 유지하고 조직체가 가지고 있는 권위와 권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체를 구성하고 있는 개인의 윤리적 자아 완성에 도움이 되는 도구라는 데에 있다. 곧 인간은 출생과 동시에 자립할 수 없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부모나 기타 성인의 도움이 절대로 필요하며 이 필요성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 가정이다. 따라서 가정은 가족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며 가족이 가정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가톨릭 사회 교리는 유교적 씨족 원리와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가정도 그 자체로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가정의 능력을 넘어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부족이나 지역 사회라는 한 단계 위의 공동체를 필요로 하는 것이며, 지역 사회 역시 자체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조직체를 필요로 하게 되며 그것이 곧 국가 조직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 사회는 지역 사회를 위해서 존재하며, 지역 사회는 가정을 위해서 존재하고, 그것은 또한 개인을 위해서 존재한다. 따라서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정치 윤리의 뿌리이다. 한마디로 국가의 근본 과제는 개인의 생존과 자아의 윤리적 실현을 지원하는 데에 있다.

 

다음은 권력의 작동 원리로서 보조성의 원리를 살펴보기로 한다. 권력의 작동 원리로서 보조성의 원리는 조직체의 보조성의 원리에서 나오는 당연한 귀결이다. 모든 상위 조직은 하위 조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며 종국적으로 모든 조직은 개인의 목적 곧 개인의 생존과 윤리적 자기 완성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상위 조직이 가지는 힘인 권력과 권위는 하위 조직과 종국적으로는 개인의 선을 실현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행사되어야 한다는 윤리적 요청이 도출된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국가 조직이 가지는 힘과 권위 곧 국가 권력은 지방 자치 단체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지방 자치 단체의 권력은 지역 사회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그리고 끝내는 모든 권력은 개인의 생존과 윤리적 자아 완성에 도움이 되도록 행사되어야 한다. 곧 중앙의 국가 권력은 지방 자치 단체를 위하고 지방 정부의 권력은 지역 사회의 가정을 위하여 행사되어야 하며 모든 공권력은 궁극적으로는 개인을 섬기고 봉사하는 데에 사용되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개인이 사회에 매몰되어서는 아니 된다.

 

국가의 정치 구조와 권력이 이와 같은 보조성의 원리에 따라 조직되고 행사될 때 비로소 정치와 권력과 국가는 구원사에 창조적으로 참여하게 되며 그 본래의 기능을 다하게 된다. 이와 같은 시각에서 볼 때 우리 나라는 가톨릭 사회 교리에 따른 정치 윤리라는 기준에는 아직도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1948년 건국 직전에 제주도 주민의 20%에 해당하는 도민을 우리의 경찰과 군인들이 학살하였으며 6?25를 전후하여 공산주의자들에게 협조적이었다는 이유로 아무런 재판 절차도 없이 거창 양민들을 살해하였으며 그리고 좌익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수십만 명의 국민을 학살했을 뿐 아니라(보도 연맹 사건) 1980년에는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광주 시민들을 대규모 학살한 것이 우리 나라의 공권력이었다.

 

어떤 정파의 정치 권력을 지키기 위하여 헌법을 고치고, 정부 조직을 바꾸고, 정당을 개편하고 심지어는 투표와 개표 과정을 조작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한다면서 국민을 향하여 총질을 하고 수갑을 채워 온 것이 우리의 공권력이었다.

 

이렇게 되돌아보면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에서 노태우 정권 말기까지의 우리 나라 정치와 공권력은 가톨릭 사회 교리와 그 정치 윤리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회적 악의 덩어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90년대 초까지 한국 정치 권력의 이와 같은 비윤리적 성격을 누구보다도 명확하게 인식하였던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정치 권력에 저항하였던 것이다.

 

국가는 지방을 위하여, 지방 정부는 지역 사회와 가정을 위하여 그리고 가정은 가족이라는 개인을 위하여 있으며 또 그렇게 봉사하여야 한다는 조직과 권력의 근본적 원리인 보조성의 원리는 가톨릭 사회 교리와 정치 윤리가 유교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특징이다. 성서에서 그 근거를 구한다면 아흔 아홉 마리의 양(조직된 양)을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개체화된 양)을 먼저 찾아야 한다는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보조성의 원리를 실천 원리로 받아들이기는 그리 쉽지 않다. 날이면 날마다 국민 총생산이 몇 퍼센트 올라갔으며 수출 총량이 얼마나 늘었느냐에 마음을 빼앗긴 가운데 학생은 학교를 위하여, 가족은 가정을 위하여, 근로자는 직장과 기업을 위하여, 신자들은 종교의 조직체를 위하여 국민은 국가를 위하여 봉사하고 희생하는 것이 훌륭한 덕목이라는 것을 배우면서 살아 온 우리로서는 개인을 모든 사회적 가치의 중심에 두는 조직과 권력의 보조성을 내심으로 깊이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많은 반성과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 문제이다. 이것이 곧 진정한 사고의 전환 곧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보조성의 원리를 내면화하고 실천하지 않는 한 국가가 한 사람 한 사람의 국민에게 봉사하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천은 기대할 수 없다. 보조성의 원리가 실천되지 않는 한 정치와 사회의 복음화는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5. 정치의 목적은 공동선:개별적 선의 한계 

 

앞에서 간단히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은 독립된 절대적 인격 주체인 동시에 인격의 윤리적 실현이 사회라는 현장에서만 가능하다는 사회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이 이중적 측면 때문에 인간에게 좋은 것을 의미하는 선에도 인격적 주체인 개인으로서의 인간에게 좋은 개별적 선과 개인들의 유기적 모임인 공동체에게 좋은 공동선이 있다. 그리고 이 두 종류의 선은 본질적으로 보완하는 관계에 있다. 이 두 가지 선의 관계는 흔히 생각하듯이 공동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이해와 관심을 희생해야 하는 충돌적이며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올바른 개인적 선은 공동체를 위해서도 유익한 것이어야 한다.

 

이 두 가지 차원의 선이 서로 연결될 때 곧 나에게 유익한 것이 동시에 공동체를 위해서도 유익한 것일 때, '나에게 유익한 일'을 통하여 나와 모든 다른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창조적이며 윤리적인 관계가 된다. 가톨릭 신앙의 정수를 정리해 놓은 공식적 신앙 고백인 사도 신경의 '성인의 통공함'이란 바로 이와 같은 선을 매개로 하는 개체들 사이의 공동체적 결속을 의미한다.

 

각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해와 관심은 대체로 이기적 성향을 띠며 교회의 사회 교리도 이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기적 성향을 가진 개인들의 관심은 충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이해와 관심을 사회의 공동체적 결속에 맞도록 조정할 필요가 있다. 이 조정 작업이 정치이며 따라서 정치의 목적은 국가라는 정치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유익한 공동선을 찾고 그것을 실현하는 데에 있다.

 

수없이 많은 이해와 관심을 조정하기 위해서는 우선 비슷한 이해와 관심을 한곳에 모아야 한다. 그것이 정당이다. 그리고 그것을 대표할 사람을 뽑아(선거) 그들이 한곳에 모여(의회) 공동선(국가 정책)을 찾아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이해와 관심에 귀를 기울이고(관용) 나의 이해와 관심도 발표하고 비교(토론)하여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비로소 '나'나 '너'에게만 유익한 이해와 관심 곧 개인적 선은 너와 나라는 이기적 차원을 넘어, 나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유익한 공동선의 수준으로 승화하게 된다.

 

이 과정은 흔히 말하듯이 '주고받는 거래'(협상)가 아니며 더욱이 '힘 겨루기'(투쟁)는 아니다. 이 과정은 흔히 유식한 사람들이 말하는 '게임의 이론'의 관계 곧 상대방이 얻는 만큼 내가 잃어야 하고 또 상대방이 잃는 만큼 내가 얻는다는 관계가 아니다. 그리고 또 그것은 흔히 언론이나 정치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식의 이른바 '무한 경쟁의 관계'도 아니다.

 

'너' 또는 '나'라는 차원을 넘어 너와 나를 포함하는 '우리' 모두에게 유익한 대안인 공동선을 찾기 위한 과정이 정치이며 따라서 정치는 신앙의 표현을 빌린다면 '성인의 통공'을 실현하기 위한 사회적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절대적 인격 주체인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내 고향을 아끼고 내가 속하는 단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다른 사람과 남의 고향과 상대방 단체를 희생시키는 것은 사회의 공동체적 연대를 파괴하는 것이며 따라서 신앙적으로는 '성인의 통공'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행태의 정치는 반사회적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에도 반하는 죄악이다. 상대방을 누르고 나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하여 때로는 총칼을 때로는 수갑과 곤봉을 때로는 주먹과 거짓말과 고함 소리를 휘두르는 정치는 구원사를 가로막는 죄악의 정치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정치의 정상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조차도 정치는 협상이며,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얼른 생각하면 평화적이며 민주적인 대화의 정치인 듯한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는 두 이기주의의 야합이며 그 본질은 상업적 거래일 뿐이다. 정치는 네 것과 내 것을 넘어(이기주의의 승화) 우리의 것(공동선)을 함께 찾아가야 한다. 

 

 

6. 맺는 말 

 

우리는 이 짧은 글을 통하여 정치는 구원사의 한 가닥이며 그 원리는 개인의 주체성과 모든 구성원들 사이의 공동체적 연대성에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처럼 정치는 신앙과 밀접히 연계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인으로서든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든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구원사에의 참여라는 창조적 소명의 실천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현실 정치가 아무리 바람직하지 못할지라도 실망하고 외면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일상 생활 모습이 신앙이나 계율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바람직하지 못하더라도 신앙 생활을 포기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인간에게 끝까지 구원의 길을 열어 주는 것은 희망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최고의 희망은 '주님의 기도'에 있듯이 "하느님의 뜻이 이 세상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은 여러 가지 형태로 세상 구석구석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정치도 그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국회의원 총선거를 비롯한 모든 정치 행위에서 신앙인들이 '주님의 기도' 정신과 성인의 통공 곧 개인의 주체성과 공동선을 기초로 하는 공동체적 연대성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임할 때 신앙의 실천을 통한 정치의 윤리화와 나아가 사회의 복음화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곧 구원사에 대한 창조적 참여의 한 형태이다.

 

[사목, 2000년 5월호, 김종민(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 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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