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홍)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가톨릭 교회의 노동 문제에 따른 재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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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7 ㅣ No.413

가톨릭교회와 노동문제에 따른 재인식

 

 

I. 머리말

 

선교 200주년을 맞이했던 한국 가톨릭교회는 눈부신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 왔다. 특히 1960년대 이후의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보여 준 가톨릭교회의 정치, 경제, 사회 등 제반에 걸쳐 인간 기본권에 대한 계몽과 그 획득을 위한 사회 현실 참여는 한국 가톨릭교회 발전에 새로운 이정표를 설정했다. 그리고 그 현실적 사회 구조가 배태한 모순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동안 겪은 엄청난 희생과 고난의 길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1960년대 산업화 이후 경제 제일주의라고 통칭할 수 있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한 사회의 불평등한 개발과 인간 존엄성의 훼손은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이 철저히 파괴 되고, 경제 사회의 발전은 그 파행성을 야기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지역 간, 업종 간, 계층 간의 불평등한 경제 사회 개발 전략은 경제 문제 이전의 사회 문제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적 갈등을 야기 했다. 이러한 과정 하에서도 자본과 임노동이라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일반화된 생산 관계를 확연히 보여 주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나타나는 사회 구조 모순을 극복키 위한 급진 변혁 이데올로기가 자생적으로 발전하고, 사회 제반에서 보여 준 소외와 불평등한 교환 관계에 따라 억눌린 자들의 변화 요구와 변혁을 추구하려는 강한 사회적 충동이 나타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한국 사회 변동의 형태와 아울러서 한국 가톨릭교회는 universalism의 기치 아래 교회와 사회의 통합과 일치를 추구해 왔고, 산업화 과정 이후에는 사회와 교회 그리고 사회 속의 한 부분으로 교회의 모습을 구상해 보기도 하는 등 토착화와 민족 복음화에 대한 중대한 과정에 처해 있음을 잘 인식해 왔다. 제3세계 사회 변동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갈등, 첨예한 사회 문제로서 노동 문제는 심각한 불만의 표상이 되고 있다. 노동 문제가 분배 문제와 직결해서 생각할 때는 사회 구조적 모순의 척결이라는 제도 개혁이 우선해야 하는 사회 정책(Sozialpolitik)이 요망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 현실에서는 자본가 입장이나 노동자 입장 모두가 서로 상호간의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즉 서로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고, 한국 사회 변동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상황 하에서 의식화의 정도가 아직도 철저하지 못하는 데 큰 문제가 내재해 있다.

 

가톨릭교회 또한 '보조성의 원리’(SubsidiaSre Prinzip)에 입각해서 여러 노동 환경을 제공하고 있는 실정이다. 교회가 거느리고 있는 노동 환경에서 조차 사회 일반에서 야기되고 있는 바와 같은 노동 문제가 그동안 상당히 진행되어 왔다. 이 때문에 다시 한 번 이 글을 통해서 노동이 무엇인가를 재확인해 보고 우리 가톨릭교회 입장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II. 노동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입장

 

지상의 땅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일이 인간의 의무라는 성서의 말씀이 노동에 대한 객관적 의미라고 한다면 우리는 주관적 의미의 노동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인간은 땅을 정복하고 다스려야 한다, 즉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하나의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천부적으로 이성적 존재이고 이성적으로 행동 할 수 있으며, 또 자기완성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주체적 존재이다.1) 인간은 하나의 인격체로서 일을 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활동을 수행한다. 다스림이란 말은 노동의 객관적인 면만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노동의 주관적인 면을 강조하는 뜻이기도 하다. 인간이 땅을 다스리는 과정으로 이해되는 노동은 그 과정을 통하여 인간이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을 "다스리는 유일한 자”로 확신해야 할 때 비로소 성서의 근본 개념과 부합된다.

 

이 때문에 다스림은 객관적 의미보다는 주관적 의미가 더욱 강조되는 것이며 이러한 차원은 노동의 “윤리적 본질 자체”를 규정하는 것이다. 인간 노동이 고유한 윤리적 가치를 가진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2) 윤리적 가치를 성취하는 것이 인격체이며, 의식적이고 자유로운 주체가 바로 인간인 것이다. 여기에서 마침내 자본에 대한 노동의 우위성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3) 서적 해석에 따른 노동은 인간 삶의 표현이며 노동을 하는 데서 인간은 발전하며 자기 자신을 형성해 간다.4) 또한 노동은 공동으로 서로를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다. 노동은 이웃에 대한 봉사이고 가정과 국민에 대한 봉사이다. 이 때문에 노동은 회개하고 이웃과 화해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5) 노동은 하느님이 위탁한 것이며 하느님의 창조 역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노동은 구원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6)

 

또한 노동 가치를 부여하는 일차적인 근거는 노동의 주체인 인간 자신이라는 것이다. 비록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소명 (Beruf)을 받았다 해도 노동 자체가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이 "노동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7) 여기에서 무엇보다도 노동의 주체, 즉 인격체의 중요성에 따라 각각의 노동이 평가되어야 한다. 어떤 노동이든 인간이 하는 것이라면 비록 그것이 사회 통념상으로 단지 봉사(Dienst)로서의 가치밖에 없거나 대단히 단조로워서 소외된 노동으로서의 가치밖에 없다 하더라도 노동의 목적은 항상 인간 그 자체인 것이다.8) 여기에 노동은 자연권으로서 본능적 육체의 존속과 깊은 관련이 있다.

 

노동은 인간의 천부적인 권리이며 소명이기도한 '가정 생활'을 이루는 기본이다. 즉 노동은 가정을 이루고 유지하기 위한 조건이 되는데 그것은 가정이 노동을 통해서 인간이 정상적으로 얻는 생활 유지의 수단이라는 뜻이다. 가정은 인간 노동에 대한 윤리적 질서를 형성하고 확립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교회의 가르침은 항상 여기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왔다. 가정은 노동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는 공동체인 동시에 누구에게나 노동을 배우는 최초의 장소이기도 하다.9) 이리하여 노동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한 천부적 권리이면서 가정을 이루어 땅을 정복하라는 지상 명령의 제일 중요한 요소라 아니할 수 없다. 앞서 말한 대로 노동 없이는 기초 공동체인 가정이 절대로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 때문에 노동을 우리 가톨릭교회에서는 중요시 여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실업 상태는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요소이고 인간의 소중한 인권과 고귀함을 짓밟는 것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또한 노동 조건 자체가 실질적으로 가정을 지탱하고 화목하게 해야 한다. 노동 조건이 합리적이고 자연적인 결합으로서 가정을 화목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 가정생활이 행복해지고 한층 더 생활의 성전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 다. 이러할 때 가정을 통해 하느님의 세계를 인식하고 배우게 되며 그리스도적 의무를 충실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무의 수행은 마음의 평화와 만족을 가져다주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충실히 지킬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창조 사업을 완성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10) 이러한 모든 의미에서 노동은 하나의 책임이고 의무이며 노동자 편에서 볼 때 권리의 원천이기도 하다.

 

노동은 그 주체적인 면에서 볼 때,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행위이다. 가톨릭교회의 입장에서 노동의 인간적 가치와 도덕적 질서를 중요시한다. 동시에 가톨릭교회는 노동의 영성 형성을11) 중요한 의무로 생각한다. 이러한 가톨릭교회의 노동 개념은 모든 인간들이 노동을 통해 하느님을 인식하고 인간과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참여하게 된다는 뜻이다.

 

 

III. 노동조합의 정당성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은 노동자에게 가장 중요한 소득의 원천이 되고 기업에는 비용으로 생산 원가에 영향을 주며 국민 경제 절반에는 유효 수요, 물가 수준 그리고 분배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이다. 임금은 인적 자원의 효율적인 배분과 이용을 촉진시킨다. 노동자는 언제나 임금이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이동하기 마련이다. 임금 기준이 생산성을 반영한다면 이것은 노동자가 생산성이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이동해 가는 것을 의미하고 따라서 임금은 인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여 국민 소득을 상승시킨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노동자는 보다 높은 임금을 받기 위해 숙련 기술과 능력을 습득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임금은 인적 자원의 형성을 촉진시킨다. 임금은 구매력을 촉진시키고 유효 수요에 영향을 미치므로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력이 노동 시장에 의한 상품으로 간주되므로 노동의 대가인 임금은 노동력의 시장 가격을 형성한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임금의 결정이라는 것은 노동자의 생존을 유지할 만한 선을 최하위로 삼아 정한 점에서 노동자와 자본가 쌍방 간의 합의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이와 같은 노·사간의 협상, 자유 경쟁 자체가 오늘날의 많은 임금 노동에 대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가톨릭교회의 입장은 분명하게 노동력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인간성의 실현이고 발로이기 때문에 오로지 경제주의적 결정론에 입각해 노동력을 상품으로서 간주하면서 노동 시장의 기능에 따라 임금이 결정된다고 보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노동 자체가 소명임과 동시에 하느님의 창조 사업을 계속해 나가는 한 과정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노동력을 임금으로 평가하면서 그 인간의 존재 양식과 의미를 규정짓게 한다. 노동력이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되기 전에 휴머니즘에 입각하여 다른 생산 요소인 자본에 의해 뒷받침되고 육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12)

 

이리하여 노동력이 정당하고 균형적 분배와 교환을 이룰 때 하느님 교회의 기초 공동체인 가정생활이 평화롭게 유지되며 사회와 국가 간의 안정적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 노동자의 임금에 대해서 가톨릭교회는 의무적이고, 도덕적인 면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적정선의 임금, 즉 적당한 보수 관계의 유지는 노동자와 사용자와의 관계를 보장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기도 하면서, 사회 총체적 시각에서는 발전에 기여한다는 입장인 것이다. 또한 체제 관계를 떠나서 생산 수단이 사유화된 사회에서나 공유화된 사회에서나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의 임금 관계는 시장 가격을 초월한 정당한 가격, 즉 인간적 요소로서 임금 노동력이 평가되어야 한다. 어느 사회 체제에서든지 자본과 노동의 근본 관계와 무관하게 임금, 즉 노동에 대한 보수는 인간들로 하여금 소비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수단인 것이다. 이 때문에 적정선의 임금은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구체적 수단이며, 공공선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산업화 과정에서 숙련 노동력이든지 미숙련 노동력이든지, 그의 개별 노동은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그들의 공통된 이익을 얻기에는 항상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다. 이리하여 개별 노동력은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집단 노동력으로의 전환이 요청되었으며 그 조직된 힘으로 나타난 것이 노동조합이다. 노동조합은 이 때문에 개별 노동력에 대한 불리한 노동 조건을 집단 행위를 통해서 그들의 공동 이익을 쟁취하려는 이익 단체이다.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사회의 하나의 구성 요소이며 그 역할 자체가 총자본 차원에서 생산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13) 노동조합의 발전 단계를 볼 때 산업화 초기에는 보통 상부상조 관계를 추구하는 공제적 기능을 가지게 되며, 노동 환경이 어느 정도 열악한 상태를 벗어난 산업화의 중기쯤에는 경제적 기능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경제적 기능의 요구는 노동과 자본이 상호간의 균형 관계를 유지하면서 산업 평화를 추구하는 단계이며, 정치적 기능은 노동이 사회적 책임을 분담하면서 입법 과정이나 이익 단체의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런 경우에 사회적 동반자로서의 노동조합으로 평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노동자들의 조직 중에서 가장 중요한 단체가 노동조합이라고 한다. 노동조합이야말로 다른 여러 단체들이 지니는 기능을 사실상 전부 포함하고 있다.14) 인간은 자신의 힘이 보잘것없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체득하고, 이 부족함을 다른 사람의 협력으로 메우게 된다. 성서에도 "혼자서 애를 쓰는 것보다 둘이서 함께 하는 것이 낫다. 그들의 수고가 좋은 보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넘어 지면 일으켜 줄 사람이 있어서 좋다. 외톨이는 넘어져도 일으켜 줄 사람이 없어 보기에도 딱하다"(전도4,9-12)고 지적하고 있다. 또 “의좋은 형제는 요새와 같다”(잠언 18,19)고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자연적 성향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여러 조직이나 단체를 결성하며 이웃과 어울려 온갖 형태의 사회를 만든다. 물론 규모도 작고 불완전한 형태의 것들도 있기는 하지만 어떻든지 간에 분명히 사회임에는 틀림없다.15) 이와 같은 성서적 배경에서 노동조합은 그의 정당성을 가지게 되고, 노동 과정 하에서 노동의 소외는 집단 노동력의 필요와 정당성을 요청하게 되면서 노동조합은 발전해 왔다. 이리하여 하느님의 모상대로 태어난 인간이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노동이 그 본질로부터 소외가 노동조합을 통해서 극복되고 보상된다는 것이다.

 

가톨릭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은 노동조합들이 단지 사회의 계급 구조를 반영 하는 것이라거나 불가피하게 사회생활을 지배하는 계급투쟁을 대변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의 개별 직업에 따라, 참으로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와 사회 정의를 위한 정당한 노력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현재의 사정으로는 직업으로 결합된 노동자들의 요구와 그 공헌에 상응하는 선(善)을 위한 정당한 노력이어야하며 다른 사람에게 대항하는 투쟁이어서는 안 된다.16)

 

가톨릭교회는 노동조합이 조합원들의 정당한 권리를 추구하기 위해 사용하는 최후 수단인 파업이 올바른 조건이나 정당한 한도 내에서는 합법적인 것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파업이 합법적 수단이기는 하나 남용되어서는 안 되며,특히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남용되어서는 안 된다. 파업의 남용은 사회 경제 생활을 마비시킬 수 있으며 이는 노동 자체의 사회적 공동선을 위배하는 것이다.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에서 노동과 자본의 대립은 극복되어야 하며 그 기본원리는 노동의 본질적이고 실제적인 우위성, 인간의 노동에 대한 주체성, 노동자가 수행하는 노동의 성격에 관계없는 전 생산 과정에 대한 효과적인 참여의 원리이다. 노동과 자본의 관계는 종속 관계가 아닌 동등한 균형 관계이다. 인간을 단순 히 영리의 수단으로 취급하거나 육체적 또는 물리적 힘의 도구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사용자는 감당할 수 없는 작업을 노동자에게 강요해서는 안 되며 노동자의 연령이나 성별에 부적합한 업무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노동은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의 책임이고 의무이다. 이는 노동자 편에서 볼 때는 권리의 원천이 된다. 노동으로부터 나오는 인권은 인간 기본권의 광범위 맥락의 한 부분이다. 인간 노동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지상 명령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를 위해, 자신의 국가를 위해 그리고 자신이 한 구성원으로 있는 전 인류 가족을 위해 일해야 한다.

 

 

IV. 노동자와 사용자와의 관계

 

상품으로서 노동력을 가진 노동자들은 그들의 생계와 육체적 보존을 위해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다. 임금은 항상 적정선으로 유지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불평등이 존재하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많은 사회 문제가 바로 임금 문제이기도 하다. 사용자측에서는 생산비에 속하는 임금을 최대한 절감해서 초과 이윤을 획득하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논리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 과도한 초과 이윤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생산성아 저하된다든지 노동자들로 하여금 갈등과 불만의 요인이 되면 자본주의 사회가 지탱되기 어렵게 된다. 노동자들의 임금은 시장 법칙에 전적으로 종속되거나 제멋대로의 결정에 의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와 공평의 원칙에 의해 결정되어져야 한다. 이 원칙은 노동자가 진정으로 인간적인 생활을 할 수 있고, 그들의 가족에 대한 책임을 윤리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임금을 받아야 한다. 이 때문에 노동자도 고용주와 마찬가지로 국민 경제의 주체이며 그 객체가 아니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고용 계약에 의해서 인간은 자기 노동력에 대해 정당한 보수를 제공받는 것은 조금도 그리스도교적 인간상에 모순되지 않는다.17) 정당한 임금을 받기 위하여 노동자와 사용자 간에는 고용 계약을 맺게 된다. 개별 노동력이 사용자들의 기득권에 대해 불리하기 때문에 그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그들로 하여금 단체 협약을 추진하게 하는 것이다. 항상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의 문제는 노동 현장에서 먼저 이 고용 계약으로부터 시작된다. 노동 현장에 의하면 노동자와 사용자가 자유로이 근로 계약을 체결하고 특히 임금에 관해서 양자가 합의한 경우라고 하더라도 자연법의 정의가 항상 그러한 계약의 기본요소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어느 계약보다도 더 오래되고 더 엄격한 자연법의 정신은 임금 노동자에게 최저생활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정도의 임금이 지급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만일 노동자가 절박한 상황에 몰려서 또는 협박에 못 이겨 불리한 조건을 받아들였다면 이는 사용자가 그와 같은 사정을 악용하여 불리한 조건을 강요함으로써 노동자의 자유의사에 어긋나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것이며 노동자들은 불의와 협박의 희생물이 된 것이 분명하다.18)

 

이러한 모든 요인들이 적정 임금을 결정하고 규정하는 데 어려움을 가져오므로 고용 계약이야말로 노동자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적정 임금의 기준을 정해보면 제일 먼저 임금은 노동자와 그의 가족의 생계를 보장하는 것이어야 한 다. 적어도 임금은 저축을 통해서 재산 형성이 가능하도록 추진되어야 한다. 사회 정의는 바로 이와 같이 노동자가 적정 임금으로 자기와 가족의 생존을 보장 할 수 있고 사회 보장을 통해서 질병, 노령과 실업으로부터의 불안이 제거될 때 그 실현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임금은 기업의 상태와 경제적 여건이 동시에 고려되어야 한다. 이것은「노동헌장」에서 이마 이야기했듯이 자본 없이 노동이 존재할 수 없고, 노동 없이 자본이 존재할 수 없다는 논리와 같은 것이다.19) 기업가는 무엇보다도 기업 경영의 합리화를 추진해서 경제 외적 강제나 소비로 말미암아 노동자들이 불편부당하게 되어지는 것을 항상 예방해야 한다. 또한 기업 자체가 존속하기 어렵게 과대한 임금을 요구하는 것도 자제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노동자들은 기업이 번영하고 크게 육성되도록 적극 참여해야 한다. 노동자와 고용주 모두의 견해가 일치되도록 기업 내 민주화가 이룩되어야 하며 그 여력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20) 노동자나 고용주간의 어떤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이해 관심에 의해서 기업 경영이 불합리하게 이루어져서는 안 되며 총자본의 입장 에서 경제 구조의 변질이 이루어져 실업이 발생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노동력의 질적 상태에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적정한 고용 상태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에 반해서 실업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죄악이며, 실업이 어느 수준에 이르면 실제로 사회악이 될 수 있다, 특히 실업이 교육적이고 기술적인 준비와 여타 모든 준비를 갖추고도 존재한다면 젊은이들에게 악영향을 미치며, 공동체의 경제적 사회적 발전에 책임 있게 참여하겠다는 젊은이들의 각오와 일을 하려는 그 진지한 소망이 비참하게 좌절되는 것을 보는 것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실업 수당을 제공해야 할 책임, 즉 실업자와 그 가족들의 생계유지를 위해 불가피하게 적절한 지원을 마련해야 하는 것은 이 분야의 도덕 질서에 대한 근본 원리, 즉 재화의 공동 사용 원리 또는 생명과 생존의 천부적 권리로부터 나오는 것이다.21) 또한 고용 기회는 임금 수준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데, 임금이 적정선에 머무르면 고용 기회는 늘어나고 그 적정선을 넘어서면 그 기회는 감소하게 된다. 지나치게 낮은 임금 수준이나 과도하게 높은 임금 수준은 둘 다 마찬가지로 실업을 야기한다는 점은 누구나 아는 바이다. 실업은 노동자에게 불행과 좌절을 유발하고 사회의 번영을 파괴하며 전 세계 인류의 공공질서와 평화 및 안녕을 위태롭게 한다. 공동선을 고려하지 않고 사리사욕을 위해 부당하게 임금을 낮추거나 올리는 것은 사회 정의에 위배된다. 한편으로 사회 정의로 가능한 많은 이들에게 고용기회를 제공하고 그들에게 적당한 생계 수단을 보장하도록 임금이 결정되는 것을 요구한다.22)

 

이와 같이 적정선의 임금이 지급됨으로 해서 산업 평화와 사회 정의가 이루어지게 된다. 사용자의 의무 가운데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은 노동자가 정당하게 받아야 할 몫을 제대로 줌으로써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다. 부자 및 기업인은 하느님의 법이든지 인간이 만든 어느 법률에 따라서든지 간에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억누르며, 다른 사람의 곤궁한 처지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실들을 명심해야 한다.23) 우선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에 화합을 이루어야 하며 이것은 그리스도 사랑의 실천으로 이루어야 한다. 종교적 가르침과 실천을 주관하고 수호하는 곳이 교회이다. 분배 정의의 실현을 요청하는 가톨릭교회의 입장은 항상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 누구든지 가난한 사람에게 친절을 베푼 것은 하느님에게 베푼 것과 같으며, 친절을 거절하는 것은 곧 하느님에게 거절한 것으로 판단하는 뜻이다.

 

 

V. 노동 문제 해결을 위한 가톨릭교회의 역할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평신도 사도직에 대한 중요성을 거듭 천명한 후 한국 가톨릭교회에서도 평신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변화가 서서히 나타났는데, 1966년 이후 특히 인천 교구에서 보여 준 JOC 활동은 교회 내외에 커다란 이정표를 설정했다고 보아야 한다. 1967년 전 미카엘 신부에 의해서 지도된 JOC 회원들이 강화도 심도 직물에서 본격적인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노조 활동을 시작했으나 회사와 경찰의 강력한 반대로 많은 희생자가 속출했다, 이는 1960년대 과도한 산업화에 의해 심각한 사회 문제로서 제기된 노동 문제가 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음을 말해주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 후 이 사건에 가담했던 당시의 JOC 회원들은 회사에서 해고당하고, 강화도 소재 21개 직물 회사는 JOC 회원에 대한 감시와 JOC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절대로 고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 사건은 즉시 전 가톨릭교회에 알려지고, 인천교구와 서울대교구가 우선공동으로 대처하게 되었다. 그리고 천주교 전국 주교단은 이 사건에 대해 1967년 6월에 ‘우리의 신조’라는 교서를 발표했을 뿐만 아니라,이 사건을 계기로 주교단이 여러 차례 공동 성명을 발표하면서 전국적인 교회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로써 1968년 강화도 심도 직물 회사에서 발생한 JOC 활동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능동적 대처는 성교회와 사회 간의 새로운 이정표를 설정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60년 후반은 과도한 산업화에 의해 노동 문제가 심각하게 노정되는 시기였고, 이에 김수환 추기경을 중심으로 신 · 구교가 합동으로 ‘노동문제’에 공동 대처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후에 ‘한국교회사회협의회’ 결성의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가톨릭교회 입장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과 사회 회칙 「어머니와 교사」, 「민족들의 발전을 위해서」등은 당시 시대적 징표와 방향을 설정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사회 문제로서 노동 문제를 보는 기본적 시각과 자세가 「노동헌장」(Rerum Novaram)에서부터 「사십주년」 그리고 「노동하는 인간」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가톨릭교회의 방향 설정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사회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지평 하에서 천주교 정의 구현 전국 사제단은 교회 문제와 사회 문제를 구분하지 않고 동시에 같은 맥락에서 인식하려고 하였다. 당시 사제단은 유신 체제의 반민주, 반민중, 반민족적 모순이 확대 심화되어 한국 사회 문제가 야기되었다고 간주하여 사제단의 활동은 마땅히 민주, 민중, 민족을 위하여 현실 사회 한가운데 직접 뛰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톨릭교회의 민중 운동과 관련하여 사제단은 우리 사회의 불평등이 이 사회 체 제와 구조적 모순에서 기인한다고 선언하고 사회 현실에 대해 적극적인 행동을 보여 줌으로써 가톨릭 및 개신교계의 신학자들 사이에 민중 신학의 가능성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명분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가톨릭이나 개신교 측에서의 기층 민중들을 위한 적극적인 운동은 정부 당국으로부터 직접 간접의 탄압을 받게 되었는데 이 중에서도 특히 ‘JOC’와 ‘도시산업선교회’였다. 1970년대 가톨릭교회내의 대표적인 운동으로 평화시장 청계 피복 노조(1977), 동일 방직 노조 오물탄압사건(1978),YH 무역노조 탄압사건(1979)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서 동일 방직 노조 똥물 사건은 JOC 회원들이 중심이 된 노조 건설에 반대한 기업주 측의 비인간적인 만행에서 생긴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124명의 노동자 가 해고되고, 이에 연루된 해고 노동자들은 명동 성당에 찾아와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호소하기에 이른다. 이에 대한 정부의 반응은 JOC와 도시산업선교회는 모두를 용공 단체로 규정하고 탄압과 몰수를 일삼았다.

 

그러나 1970년대 한국 가톨릭교회는 고통 받는 민중 편에 서서 스스로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시대의 징표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당시 천주교 정의 구현 전국 사제단(1974), 천주교 정의 평화 위원회(1975), 가톨릭 노동 청년회(1958) 그리고 가톨릭 농민회(1971)의 조직적인 힘으로 한국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투신해 온 것은 복음화 운동에 대한 새로운 경험과 대안을 제시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 YH 무역 회사의 노동조합 운동은 사실상 한국 사회의 정치 사회 구조에 일대 충격을 불러 일으켜 제4공화국의 유신 체제 정부가 필연적으로 붕괴되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가톨릭교회의 사회 운동의 영역은 당면한 사회 현실 문제를구조적 모순의 극복에서 찾는 정의 평화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나 '박종철 씨 고문치사 사건' ‘부천서 성고문 사건' 등을 폭로, 파헤쳐 국민적 여론과 호응을 담지해왔다, 노동 문제의 구체적 사건 등이 모두가 인권과 정의에 어긋나는 사회 구조에 기인한다는 논리이다. 가톨릭교회가 이러한 사회 정의에 대해서 혼신의 노력을 할 때 이 문제의 논리가 자체의 입장으로 전환되어 오기도 했다. 즉 가톨릭교회가 "보조성의 원리”에 따라 운영되어 왔던 각종 고용 시설에서 노동 문제가 등장했다. 부산 분도 병원, 대구 파티마 병원, 수원 빈센트 병원 등에서 노동 문제의 심각성이 노정되었고, 마침내는 서울 성모 병원과 평화신문 등에서까지 장기간의 아픔과 갈등을 맛보아야만 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국 가톨릭교회가 스스로의 내적 환경에서조차 불평등과 갈등이 노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고,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양자 간의 갈등과 상처는 앞으로의 우리 교회가 발전기 위한 뼈아픈 경험을 하게 되었다. 교회 당국이나 교회가 제공하는 노동 시설에서 일하는 노동자 모두가 깊은 성찰을 한번 해야 하는 좋은 경험을 얻었다고 보아야 한다.

 

 

VII. 맺음말

 

1891년 「노동헌장」(Rerum Novarum)이 발표되기 전까지만 해도 당시 유럽 사회는 사회 문제로서 노동 문제의 심각성은 오늘날의 우리나라 사회와 비슷했다.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 환경 하에서 철저히 소외된 노동이 강행되면서 자본은 날로 독점화 현상이 뚜렷해졌다. 마침내 독점 자본은 해외 시장을 확보키 위해 서로의 군벌 체제를 강화하면서 세계대전으로까지 확대되면서 노동자들은 다시 한 번 자본의 거대한 희생물이 되었었다. 이러한 사회 상황 하에서 내적으로 사회주의의 물결과 극우적인 국수주의적 보수 물결과의 양대 세력이 폭력을 자아내게 했고 사회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교회는 기층 민중들로부터 서서히 외면당하는 위기에 직면하던 때에「노동헌장」이 반포되면서 사회 한가운데 교회가 위치지어지면서 다시 활기를 찾게 되었다. 「노동헌장」의 반포가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주면서 가톨릭교회는 고난 받고 소외받는 민중들과 같이 있으며 부조리한 제도 개혁에 앞장서겠다는 의지를 보여 줌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던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잊지 못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1960년대 이후 급격한 산업화 과정을 경험하면서 보여 주는 자본과 임노동 관계를 중심으로 사회적 갈등과 불만이 고조되어 왔고, 이 모든 것이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불합리성에 기인하고 있다는 인식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한국 사회가 서구와 같이 단계적이고 정상적인 사회 변동을 경험하지 못하고 봉건제 사회가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타율적으로 해체되면서 식민지, 반(半)봉건 사회를 경험하면서 굴절된 자본국의 사회 수조를 맞이했다.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 세력조차도 우리 힘에 의해서 해체시킨 것이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 경제 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얻어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하게 된 것이다. 이 모든 일련의 파행적인 자본주의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사회 문제로서 노동 문제가 첨예화되었고 갈등이 고조되어 있는 현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자본은 노동 없이 무한대의 초과 이윤을 달성해서 자본 축적이 가능하다고 믿고, 또한 그것이 당연한 정당성을 갖는 것처럼 인식하고 있다. 이에 반해 노동 역시 자본주의는 그 본원적으로 잘못된 것이니 자본을 타도해서 새로운 사회 체제를 형성하는데 그 역할은 노동 계급뿐이라는 견해와 아울러 노동자가 주체가 되는 사회이어야만이 진정한 삶의 질과 평등을 구가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모든 것이 자율적으로 사회 변동을 이룩하지 못하고 타율적인 세계 제국주의적 논리에 의해서 변동된 사회의 굴절된 사회의식이 마침내는 가장 극단적인 경우에까지 이르렀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사회 상황 하에서도 역시 「노동헌장」에서 보여 준 이데올로기나 민족주의와 관계없이 가톨릭교회의 분명한 입장을 다시 한 번 우리는 재음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사유 재산에 대한 견해, 자본과 노동에 대한 견해, 사회주의에 대한 견해, 국가 기능에 대한 견해, 노동조합에 대한 견해, 이 모든 것이 오늘날 우리 교회가 당면한 한국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 지혜를 여기에서 짜낼 수 있어야 하겠다. 우리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노동 환경의 불만족으로 인한 갈등 역시 교회 스스로가 사회적 의식의 수평 이동을 받아들여 사회 일반의 기업가들의 인식 정도와 별 차이가 없이 세속화한 자세에서 내적 불만을 해소하려고 할 때 더욱 더 힘겨운 이중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 동안「노동헌장」이래 많은 사회 문제, 민족 문제에 대한 사회 칙서를 배워 왔다· 이러한 기본적인 입장을 우리 교회가 먼저 스스로 몸소 실천하는 자세이어야 할 것이다.

 

어찌했든 한국 사회가 어두운 터널 속을 헤매던 때에 가톨릭교회는 지금까지 인간 구원과 세상 구원이라는 차원에서 안팎으로 실천해 왔던 경험들을 다시 한 번 재음미하여 선교 3세기를 맞는 한국 교회의 위상 정립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가톨릭교회가 받은 그 동안의 영광과 상처를 반성하면서 더욱 희박한 예언직과 사도직을 다해내야 할 것이며,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사회를 이룩해야 할 것이다. 평화가 넘치는 사회를 맞이하기 위해서 가톨릭교회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깊이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첫째, 제도화된 교회 내의 민주화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교회의 비민주성은 권위주의를 배태시켜 그 발전이 저해되고, 동시에 사회와 교회를 단절시켜 경직화를 유발시키기 때문이다. 교회는 사회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 전반의 정확한 흐름과 정보가 차단된다면 교회의 복음화 전략은 실효를 거둘 수 없게 된다.

 

둘째, 제도화된 교회와 관련하여 활동하고 실천하는 많은 가톨릭 사회 운동 단체들의 새로운 복음화 운동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이다. 실천하는 현장 교회라고 말하는 가톨릭 사회 운동의 조직 활동은 제도화된 교회가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기층 민중들과 호흡하면서 미래의 교회 모습과 자세를 담아내고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아 양자의 입장이 하나로 일치해 가는 것이 바로 가톨릭교회의 새로운 자기반성의 자세이며 활성화의 맹아라고 여겨진다.

 

셋째, 한국 가톨릭교회는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 현실을 좀 더 과학적으로 분석, 인식하여 한국 사회에 맞는 전략 신학을 새로운 대안으로 정립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교회 안팎의 많은 자원을 활용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할 것이다. 교회 내의 기구와 조직에 평신도를 보다 많이 참여시켜 그들이 축적하고 있는 지적 경험적 자원들을 교회 발전으로 이끌어 내야 할 것이다.

 

넷째, 사회 현실 문제와 일반 신자 간에 보이는 괴리 현상은 결코 교회 발전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고통 받고 소외 되어 있는 기층 민중들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그들의 현실을 같이 극복하려는 교회의 자세가 오늘날 우리 현실이 처한 가장 절박한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가톨릭교회는 그동안 커다란 사회 문제로 등장할 때마다 교회의 입장과 방향을 사회 칙서라는 이름으로 제시했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교회의 공식적인 태도 표명의 사회 칙서는 한국 사회의 많은 어려운 문제를 교회가 어떻게 대면하고 해결해야 하는가를 재해석하고 실천하는 데 중요한 가치 기준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가톨릭교회는 사회 질서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시각을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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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한 바오로 2세, 노동하는 인간, 6항. 

2) 상게서, 6항 참조. 

3) 상게서,12항 참조.

4) 노동과 인간화,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1981,55면. 

5) Joseph Hoffner, Christliche Gesellschaftslehre, Koln, 1978, p. 125 : 박도식 역, 그리스도 사회론, 분도출판사, 1985, 129?130면.

6) 노동과 인간화, 62면 참조. 

7) 노동하는 인간, 6항. 

8) 상동· 

9) 노동과 인간화,30면. 

10) 사목 헌장, 67항. 

11) 원죄 이후에 노동이 고통스럽고 힘든 것이란다. 그렇다고 노동 자체가 원죄의 벌이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 노동에 따른 많은 고통이 원죄의 결과라는 것이다. 아담이 원죄를 범하기 이전에는 하나의 쾌락을 추구하듯 자발적으로 노동할 수 있었으나 원죄 이후에는 죄의 벌이 부과된 결과로 노동은 부담스럽고 고통스럽게 되었다는 것이다. 노동에 따른 고통은 저주가 아니라 속죄의 길이고 수단이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 고통을 속죄로 알고 지낸다면 인간은 구원과 반성을 얻을 것이다; 노동하는 인간, 24 항 참조

12) 고전 자본주의의 노동 개념은 노동력이 하나의 상품으로써 노동 시장에서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 노동 가격이 설정된다고 주장해 왔다. 여기에서는 생산 요소로서 노동을 자본의 하부 개념으로 생각해 온 것이다. 노동은 상품으로서 간주될 대상이 아니라 숭고한 인간, 즉 하느님의 모상대로 태어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것으로서 상품 이전의 다른 차원의 생산 요소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뜻이 노동헌장 이후 가톨릭교회의 입장이다, 

13) Alhert Miissigang, Die Soziale Froge in der Historischen Schule der Deutschen National Okonomie, Tubingen 1965. p.162 참조; 윤여덕,'독일 사회주의 노동조합의 사회사적 고찰’, 한국기독교 산업 개발 연구원 엮음, 한국 노동 운동의 이념, 정암사, 1988, 74면.

14) 레오 13세, 노동헌장,69항.

15) 상게서,90항. 

16) 노동하는 인간, 20항. 

17) Joseph Hoffner, 상게서, p. 148.

18) 노동헌장,63항. 

19) 상게서,28항. 

20) 비오11세, 사십주년, 33항. 

21) 노동하는 인간, 18항. 

22) 사십주년,34항. 

23) 노동헌장. 32항.

 

[사목, 1990년 2월호, 윤여덕(서강대학교 교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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