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홍)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교회가 부르는 희망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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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7 ㅣ No.410

교회가 부르는 희망의 노래

 

 

I. 잃어버린 길, 열어야 할 길 

 

어떤 억압 속에서도 그 어떤 절망 속에서도 활기를 잃지 않던 우리 국민이 유례없는 무기력과 허탈감, 그리고 환멸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바로 오늘 교회가 서있는 자리이다. 감원, 해고, 파산이 생활의 기본 수식어가 되었고 그 결과 개인과 가정이 무너지면서 자살과 범죄가 폭증하는 현상은 복음이 선포될 여건이다. 개인의 일상부터 국가 시스템까지, 모든 부문에서 그리고 모든 계층에서 전면적인 붕괴 예보를 듣는 사람들이 복음의 청중이다. 근대 역사 내내 조금도 해소되지 않고 꾸준히 증폭되어 온 사회의 모순이 결국 폭발해 버린 대재앙의 세기말이 희망의 복음이 선포될 시점이다.

 

희망찬 얼굴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대안이 없다, 크나큰 위기다. 전망이 안 보인다 

모두들 길을 잃고 모두들 힘 빠지고 모두들 춥고 쓸쓸한 날들입니다 

우리,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 박노해, ‘몸 하나의 희망’의 일부

 

하지만 아담이 지은 죄마저 “오 복된 탓이여!” 라고 노래할 만큼 역설의 지혜를 갖춘 교회는 절망 한가운데서 축복의 징표를 읽을 줄 알고 있다. 환멸이라는 요괴가 우리 사회 곳곳을 나돌고 있지만 교회는 새로운 천년기를 준비하며 희년의 전망을 내놓는다. 참된 예언자는 사람들이 절망의 늪에 빠져있을 때 오히려 희망을 노래한다. 우리가 겪고 있는 절망의 본질을 우리보다 앞서 꿰뚫어 보고 고통스러워했던 한 시인은 우리에게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 박노해, ‘다시’

 

갇힌 몸이 오히려 담장 밖의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으니 그는 예사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절망할 때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희망을 찾아야 하는 교회는 마땅히 절망의 현실을 복음의 눈으로 분석할 줄 알아야겠다. 오늘의 사태를 긴 안목에서 볼 때 이는 건국기의 진통에 다름 아니라는 혜안은 일단 우리를 진정시킨다.1)  곧 고려와 조선의 건국에 이르는 긴 고투의 과정을 상기해 보면 구체제의 부분적 혁신에 그친 왕조의 개창에도 엄청난 진통과 시행착오를 거쳤다. 하물며 주변 4강의 이해가 교착하는 세계사적 모순의 결절인 한반도, 그것도 분단이라는 열악한 조건에서 남북을 아울러 창조적인 새 나라를 건설해야 할 역사적인 국면에서 보자면 오늘의 모순과 불안은 우리가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할 역사적인 과제인 것이다. 교회는 이런 건국기나 세기말의 역사적 과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 것인가.

 

 

II. 세기말의 한국사회 

 

1. 교회에 세워진 저항과 보호의 천막 

 

희망은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구성하는 중대한 요소이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당면한 이 심각한 혼란 앞에서도 어떻게 희망하는 인간으로 자처할 수 있을까? 이런 비슷한 질문에 대해 누군가 ‘성령을 믿기 때문’이라고 짧게 답한 적이 있다. 옳은 말이다. 교회가 스스로 희망을 간직하고 우리 사회에 희망을 제시할 수 있는 근거는 성령께서 교회 안에서 또 세상 안에서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역사의 영이심을 믿는 단순한 논리에서 나온다. 하지만 교회가 희망을 노래한다고 해서 세상이 그 노래를 듣겠는가? 최근 새로운 세기, 새로운 천년기를 시작하기 전에 지나온 자기 역사를 공적으로 반성하고 있는 세상은2)  한국 천주교회의 부끄러운 행적3)  또한 소상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지난 해 정초 안기부법과 노동법 날치기에 저항하던 민주노총 지도부가 서울의 명동성당과 청주 내덕동성당 등 대개 각 교구의 주교좌 성당에 들어와 저항과 보호의 천막을 친 일은 우리 교회의 대 사회적인 발언권과 신뢰도를 가늠하게 해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노동자들은 전국민에게 지지를 받는 자신들의 저항을 보호해 줄 자리로서 하나같이 천주교회의 성소를 선택하였다. 오만방자한 공권력도 아무런 물리적 보호장치를 갖추지 못한 성당을 감히 침탈하지 못했다. 그리고 시민들은 그 결과를 예의 주시하며 국민적 총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노동자, 공권력, 시민들의 교회에 대한 반응은 일맥상통한다. 이는 우리 교회가 한국사회 안에서 발휘하는 도덕적인 힘과 신뢰도의 정확한 반영인 것이다. 여전히 우리 교회는 시민과 정치가들의 양심에 발언할 호소력을 갖고 있으며 한국사회 안에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일과 협조해야 할 분야는 꾸준히 확대되고 있다. 문제는 교회가 이제 겨레의 운명과 함께하기 위해 그렇지 못했던 자신의 과오를 겸손히 고백하고 과거 청산이라는 통과의례를 의연히 받아들이느냐에 달려있다. 

 

2. 한국사회의 정신적 공황 

 

1) 우리가 모아야 할 것 

 

구체적으로 우리 교회는 세기말의 절망적 현상을 겪는 우리 사회에 어떤 전망을 제시하고 어떤 희망을 이끌어야 할까? 무엇보다도 교회는 온 국민이 합의하고 공유하는 보편 가치를 만드는 일에 자기 에너지를 집중하도록 해야겠다. 독일 국민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폭격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서 그래도 쓸만한 벽돌을 골라 교회를 재건한 것이었다. 사회가 고난에 빠져있다는 것은 혼란에 빠져있음이다. 혼란 중에 필요한 것은 사회 구성원이 서야 할 좌표를 찍어주는 일이다. 모든 것이 무너진 자리에 먼저 교회를 재건한 독일 국민의 처신에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경탄할 만한 뜻이 담겨있다. 

 

삶의 규범이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극단적인 상황에 몰리면 동물처럼 변하게 되어있다. 일시적인 고난 앞에서도 서로 물고 뜯는 적이 될 수 있다. 전쟁을 치른 것도 아닌데 하루아침에 가계 소득이 반으로 줄어든 현 국면은 참으로 극단적인 상황이다. 삶의 질을 따지던 어제는 그래도 느긋한 편이었다. 오늘 우리는 삶의 질이 아니라 생존 자체를 위협받고 있다. 국채를 보상하고 경제를 살리자는 애틋한 노력으로 금 모으기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금 모으기’식의 일회성 캠페인으로 대응할 때가 아니다. 금 모으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은 국민들이 공유할 건전한 가치를 모으는 일이다. 멀리 내다보고 깊게 생각해 보는 대응이 없었기에 번번이 막대한 손해를 본 것이 우리 역사였다. 장기적으로는 올바른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지만 마땅히 생략되어야 할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국민들이 불필요한 고통을 당해 온 것이 오늘까지의 근대 역사였다. 더 이상 잘못된 그림 위에 덧칠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근본적인 것을 새롭게 세워야 한다. 교회는 국민들이 스스로 의식의 개선과 발전에 대해 장기적이고도 근본적으로 고민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물질이 넉넉해지면 더 가치있는 삶을 살아야 마땅한데도 우리는 왜 향락과 분수에 넘치는 소비에 탐닉하여 더 비참해졌는지 질문하게 만들어야 한다. 

 

2) 망가진 심성과 공동체 문화의 상실 

 

오늘 한국사회의 정신적 공황은 근대의 가치체계가 형성되는 과정의 혼란에서 비롯한다. 성리학적, 양반계급 중심적인 조선왕조의 지배체제가 무너져가던 때에 한반도를 침략한 서양 자본주의 문명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 낯선 문명과의 만남을 주체적으로 이끌지 못한 것이 결국에는 한국사회의 정신적 공황의 먼 원인이 되었다. 서양문명의 충돌을 흡수하는 방식은 대체로 네 가지였다. 하나는 서양 근대문명의 수용을 반대하고 부르주아적인 개혁 일체를 거부한 척사위정론(斥邪衛正論). 둘은 성리학적 인식체계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적극적으로 자본주의 문명을 도입하며 전제군주체제를 약화시키고 국민주권주의를 확대하려던 개화론(開化論). 셋은 동양적인 세계관과 전통적인 가치체계의 바탕 위에 근대적 기술문명을 수용하려던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 넷은 민중이 주인 되는 새 세상을 건설하려는 동학중심의 변혁론(變革論). 만일 이 네 경향이 역사의 힘겨루기를 통해서라도 최소한의 대화 과정을 가졌더라면 근대의 가치체계가 서는 데 큰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일본의 경우 1868년 명치유신을 통해서 사회발전 방향을 서구화 쪽으로 정하되 일본이라는 주체적인 기준을 갖고 있었다. 곧 일본 전통과 서양의 가치를 자기 나름대로 정리하여 합리적인 대응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조선은 서양과의 접촉을 주체적으로 소화하여 새로운 근대사회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민주주의적 가치 훈련을 받을 기회를 철저히 봉쇄당했다. 더욱이 좌우 이념의 비이성적인 대치로 새로운 신념체계의 확립은 더욱 어려워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해방은 곧 분단으로 이어져 남북은 각각 미국과 소련이라는 새로운 외부 충격을 감당하느라 근대 한국에 맞는 가치체계를 선별할 기회를 마련하지 못했다. 

 

한국전쟁이 끝나면서 온 국민이 가난과 싸워야 했다. 기나긴 군사정권의 개발 독재는 국민들의 가치관을 결정적으로 오염시켜 버렸다. 쿠데타 주동세력들이 서구의 ‘근대화’를 모방하면서도 서구의 근대화가 민주주의 혁명을 포함한 공업화라는 점을 미처 깨닫지 못한 탓이었다. 특히 “하면 된다.”는 구호는 무엇이나 하기만 하면 된다는 가치관으로 변질되어 절차나 과정에서 발생하는 윤리문제는 깡그리 무시되었다. 정돈되지 않은 물질중심의 가치체계 위에 일단 이윤만 발생하면 과정에서 발생한 비윤리는 문제될 것이 없다는 천민자본의식이 장려된 것이다. 그리고 국민 모두가 평생 분단교육에 시달리면서 자기 동족에 대한 극도의 미움을 키워온 것도 엄청난 불행이다. 이기적인 이윤과 비이성적 미움을 권장하는 사회에서 당연히 우리 심성은 망가졌고 공동체 문화는 상실되었다. 공동체의 기본 원리는 나눔과 섬김인데, 이윤이 나눔의 복음적 가치를 폐기시켰고 미움이 섬김의 의미를 원천적으로 부정하였다. 야만적인 경제물신주의와 반이성적인 적대주의로 공동체는 붕괴하였으며 교회는 이런 거대한 흐름에 무력하게 빠져 들어갔으며 이렇다 할 저항도 보이지 못했다. 

 

한마디로 사회 구성원이 정신적 의식적 가치를 확립하는 과정을 갖지 못했으므로 저마다 법이고 저마다 기준이라고 주장하는 정신적 공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합의가 도출될 수 있는 공동체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날을 멀리 내다보면서 보편적이고 세계와 나눌 수 있는 삶의 의식의 방향과 기준을 설정해야 하는 일이 우선의 과제이다. 교회는 바로 이런 한국사회의 정신적 공황 상태를 주목해야 한다. 새로운 세기에 교회가 제시할 전망과 희망도 여기에 있다. 그 동안 사회가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교회가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잡아나갔던 현대사의 경험과 정신적 자산은 바로 지금 활용되어야 한다. 

 

 

III. 교회가 보여줄 전망 

 

1. 교회가 대적해야 할 악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 구성체와 그 토대가 바뀌면서 정치 사회적 불의의 현상이 과거에는 경제적 빈곤과 독재정치, 인권탄압이 중심을 이뤘지만 이제는 기득권 수호 집단의 카르텔, 다수 중산층의 보수화, 윤리적 퇴폐 등 민간부문으로 넘어오고 있다. 그래서 운동 방향도 ‘해방의 문제’에서 ‘생활의 문제’로 바뀌고 있다.4) 

 

세기말의 암울한 공간에서 부흥하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신흥종교들이 있다. 이른바 뉴에이지의 범주에 드는 여러 가지 현상과 천존회 등 350종에 이르는 근래의 신흥종교들은5)   이전과는 달리 평등이나 인권과 같은 인류의 보편 가치를 무시하거나 배제하면서 철저히 탈역사적, 개인주의적 성향을 보이고 있다. 이런 변화는 삶의 질을 공동체보다 개인적 차원에서만 고려하는 경향에 편승하거나 그런 기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에 맞서 교회가 대항해야 할 악은 먼저 안락을 추구하는 개인주의, 그리고 자기 계층을 우선시하는 이기주의, 편리함을 추구하는 소비주의, 무위도식주의 성향이다. 이러한 경향은 일정한 경제력을 가진 계층을 보수화로 이끌고, 반면에 빈부의 격차로 생긴 소외계층을 소수의 사회적 탈락자로 남게 할 것이 분명하다.6) 그리하여 사회정의에 대한 무감각을 구조화하고 삶의 진실에 대한 뿌리깊은 냉소주의가 활개를 치며, 사회적 약자와 인간생존의 근원적 토대인 자연 생태계를 끊임없이 파괴하는 우리 사회 경제 현실의 기본 문법이 강화될 것이다. 또 공동체의식, 민족, 통일문제과 같은 진보적 관심은 주변으로 물러나게 된다. 삶의 질을 이처럼 왜곡된 방향으로 이끌다 보면 오늘의 절망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가 당면한 분단, 지역 패권주의, 계층 갈등, 소비주의 등을 해결하기 위해 이런 경향을 거슬러 교회가 제시해야 할 전망은 공동체 삶이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이기적 개인주의에 대항하여 복음이 요구하는 삶의 양식은 공동체이다. 오로지 이윤과 발전 그리고 소비의 논리만을 인정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 신앙에 함의된 나눔과 공존 그리고 청빈의 논리를 삶의 전망으로 제시해야 한다. 

 

2. 희망을 준비하는 두 가지 무기 

 

준비없는 희망이 있습니다 

처절한 정진으로 자기를 갈고 닦아 

저 거대한 세력을 기어코 뛰어넘을 

진정한 자기 실력을 준비하지 않는 자에게 미래가 없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 박노해, ‘준비없는 희망’의 일부

 

그렇다. 준비없는 희망에는 미래가 없다. 이스라엘은 주님의 계약궤가 백전백승의 묘약인 줄 착각하였다(1사무 4,3), 불레셋도 그 효험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계약의 궤가 승리를 담보해 주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유일한 무기는 주님께 충실하는 것이다. 그 밖에 다른 전략 무기는 없다. 오늘날 교회가 준비할 무기도 새로운 것이 아니다. 복음이 권하는 기본 덕목과 세례의 근본 정신에 충실하면 된다. ‘삶’이 없는 일곱 가지 성사는 효험없는 ‘빈 궤짝’이 되고 만다. 

 

1) 가난이 준 선물 

 

한겨울 삭풍 속에 봄이 들어있다. 삶의 터전이 무너지면서 새로운 가치가 싹틀 기운이 보이고 있다. 힘센 자만이 살아남게 되어있는 정글의 법칙이 이른바 IMF 체제 아래서 폐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런 미약하나마 의미있는 변화는 복음적인 회개에서 촉발된 것이 아니라 정글 법칙의 구성 원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곧 맹수가 활개칠 정글 자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움과 경쟁을 토대로 하는 경제 성장 물신주의가 ‘지속 가능한 미래의 발전 모델’일 수 없음을 알아차리기 시작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삶 자체’이지 ‘생활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인식하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은 사회적 약자들에게서 일어났다. 코앞에 닥친 대량 실업사태 앞에서 감원보다는 감봉을 감수하면서라도 동료들과 일을 나누어 갖는 것을 택하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그 동안 이기주의로 이루어진 우리 사회의 관행을 생각할 때 매우 의미있는 변화이다. 여기에는 어려운 시절을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들로서의 본능적인 연민이 다소나마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가냘프나마 우리 사회의 궁극적인 구원을 위해 공동체적인 감각과 서로 감싸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이 들어있는 것이다. 

 

국민정신개혁 운동본부를 차려놓고 도덕재무장을 운운한다고 이런 공동체 감각이 살아나지 않는다. ‘당위’(當爲)니까 따르라고 훈계할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만이 공동의 생존과 참다운 삶을 보장하는 현실적 모델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나누라고 해도 남에게 덜어주면 내 몫이 텅빌까 두려워 나누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섬기라고 해도 남을 받들어주면 자기가 무시당할까봐 두려워 섬기지 못하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여기에다 교회의 무기인 부활의 신비가 개입해서, 나누면 풍성해지고 섬기면 높아지는 것이 복음적 현실임을 선포하려면 역시 교회는 오랫동안 구석에 처박아둔 가난이라는 겸손한 외투를 꺼내 입어야 한다. 교회마저 성장의 논리를 고스란히 받아들여 자기 확장에만 힘쓴 전력을 반성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천년기의 희망을 노래하는 것은 먼길에서 오시는 신랑을 눈앞에 두고야 겨우 남에게 기름을 빌리겠다던 그 미련한 처녀보다 ‘더 미련한 처녀’의 소행일 것이다. 우리 사회를 살리는 희망의 기름은 가난이다. 가난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일자리든 무엇이든 남들과 나누어 갖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런 귀한 깨달음은 차고 넘치는 부가 준 것이 아니라 가난이 준 선물이다. 

 

2) 십자가 위에서 완결되는 세례 

 

‘위로부터’ 형성된 우리 교회의 기존 소공동체는 ‘말씀 나누기’부터 할 것이 아니라 ‘체험 나누기’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체험을 나누고 그 다음에 말씀에 비추어 체험을 반성해야 한다. 말씀만 나누고 한 발자국도 못나가고 멈춰버리니까 말씀이 삶을 교정하거나 독려하는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체험이 없는데 말씀이 응답하실 리가 없다. 자연히 말씀 나누기는 지루하고 형식적이며 어려운 절차로 끝나게 되어있다. 종은 때리는 자의 힘만큼 울려 퍼진다고 했다. 말씀은 체험의 깊이와 넓이만큼 울려 퍼져 나간다. 말씀이 삶을 규정하지 못하는데 부활의 신비가 삶으로 구현될 턱이 없는 것이다. 말씀은 주님의 길을 따르라고 실천을 충동하고, 체험은 말씀의 에너지로 새로운 방향을 잡고 힘차게 나아간다. 이런 순환이 살아야 물질주의 소비주의 자본중심주의 사회에 도전할 발판이 생긴다. 1886년 병자수호조약 이래 교회가 제대로 신앙을 고백해 보지 못한 척박한 땅에 부활 신비의 빗물이 촉촉이 스며들어 비로소 묵은 씨앗이 긴 숨을 내쉬고 싹을 틔울 것이다. 

 

그리하여 말씀과 체험을 함께 나누는 소공동체들이 그물망(network)을 만들어 본당 단위를 이루고, 본당은 자본주의의 공세에도 의연한 인간형들이 집결하는 거점이 되어야 한다. 그 어느 정당이나 사회단체의 조직보다 훨씬 치밀한 거점을 가지고 세례를 통해 결단한 동일한 신념으로 튼튼하게 짜여진 조직이 바로 가톨릭교회이다. 이 신념을 형성하는 첫 번째 사건이 세례인데 교회는 예수님의 세례가 요르단 강에서 시작하였지만 갈바리아 산의 십자가에서 완성된 뜻을 잘 알고 있다(마르 10,38; 루가 12,50 참조). 교회는 삶 전체가 바로 세례를 완성시키는 과정임을 고백하고 가르쳐왔다. 세례 사건과 십자가 사건이 동일한 부활 체험을 위한, 하나는 시작이요 하나는 완결이라고 고백하였다. 곧 세례 사건은 십자가 사건의 시작이요, 십자가 사건은 세례 사건의 완결편이다. 교회가 자신의 강고한 거점과 토대 위에 세례와 십자가의 정신을 겨자씨 한 알만큼이라도 구현한다면 예수 운동은 부활할 것이며, 이로써 교회는 희망의 실마리가 될 것이다. 

 

 

IV. 계약의 궤를 다시 찾자 

 

올해 우리는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국회와 군대의 창설 50주년을 기념한다. 반세기 동안 건국을 위해 각계각층이 피나는 노력을 해왔지만 건국기의 책임은 해가 바뀌어서 더욱 무겁게 되었다. 시간을 놓치지 말고 잘못된 맨 처음의 설계를 백지로 돌리고 다시 새로운 역사, 새로운 삶의 틀을 짜야 하는 긴박한 고난의 세월이다. 급할수록 근본적인 성찰에 충실해야 한다. ‘넘어뜨려야 할 것’은 넘어뜨리고 ‘새롭게 세울 것’은 일으켜 세워야 하는(루가 2,35 참조) 건국기의 역사적인 작업이 순조로울 리 없다. 빼앗긴 궤약궤를 되찾아 오는 일이 거저 될 일이 아니다. 이웃과 평등해지기 위해 한참 낮아져야 하고, 이웃과 더불어 살기 위해 많은 것을 덜어내야 하는 불레셋 족속의 반발이 여간 지독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주님께서 당대의 반대받는 표적이 되신 것도 그분께서 이런 구조조정 작업의 선봉에 서셨기 때문이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니 마땅히 주님께서 시작하신 일을 이어나가야 한다. 계약의 궤를 되찾아 거룩히 보존하는 것은 마땅히 하느님 백성의 임무이다. 

 

하느님 나라를 향하는 이런 역사적 과업 앞에서 교회가 분단체제 아래 미움과 경쟁을 극대화한 수구 세력을 회개시키고 기존 질서의 오랜 피해자이면서도 또 가해자 역할을 해온 국민들의 마음을 통합하는 희망의 구심점이 되기 위해 교회 스스로 다음과 같은 갱신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최소한의 갱신이야말로 계약궤를 되찾아 주님께 충실하고 백성에게 기쁨을 나누어주는 야훼의 종의 모습이다(2사무 6,12-19). 

 

첫째, 교회가 먼저 ‘낮출 것’은 낮추어야 한다. 교회야말로 삼위일체 신비의 담지자로서 “높고 낮음도 없고, 먼저 계시고 나중 계심도 없어 온전히 같으신” 하느님의 신비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으니 교회의 여러 권위와 역할이 평등과 겸손의 가치를 실현하는 방식이어야겠다. 우리 사회에 권력과 권위가 국민에게 봉사하는 모델이 어느 한 구석이라도 있어야 이를 따를 수 있지 않겠나. 

 

둘째, ‘일으켜 세울 것’은 치켜 세워 모두 보게 해야 한다. 교회는 오랫동안 됫박으로 덮어둔 등불을 이젠 등경 위에 올려야 한다. 등경 위에 올려야 할 것은 우리 교회가 2천 년 간직해 온 영적인 보화들이다. 현대교회의 손으로 들어 올린 영적인 전통은 정신적인 삶의 가치를 몰라 불행해진 이 사회가 앞으로 나갈 길을 밝혀주는 조명탄이 되고, 우리는 우리대로 성령이 계시는 곳이 어딘지 예민한 감각으로 알아차리게 해줄 것이다. 

 

셋째, 교회가 가난의 가치를 깨달아야 한다. 가르친다고 깨닫는 것은 아니다. 건물은 시대 정신의 고체화라는 명제를 떠올리면서 오늘날 교회 건축이 반영하는 교회와 사제의 삶이 어떤지 똑바로 보자. 가난의 기쁨을 모르는 교회는 이익 집단으로 몰락하고 사제는 한낱 직업인으로 추락하고 말 것이다. 비둔한 몸집을 버리고 한층 가벼워진 몸으로 임께서 계시는 해방과 자유의 자리, 눌리고 묶인 이들의 자리로 민첩하게 달려가자. 성령께서는 주님의 혼이시니 성령을 모시는 교회는 언제나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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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원식, “건국기의 책임”, [창작과 비평], 96호(1997. 6.), 2-3면 참조. 

 

2) 교황청은 1997년 11월 2일 바티칸에서 폐막된 비공개회의에서 2000년 성년 직전에 전세계를 향하여 천주교회의 대표적인 역사적 과오를 시인하고 용서를 청하는 고백의 초안을 마련하였다(경향신문 1997. 11. 5.). 이 밖에 1997년 9월 30일 “프랑스 주교단의 회개 선언”, 1997년 11월 1일 한국 개신교 교회 지도자 2백여 명이 서명한 “한국교회 참회록”, 1997년 10월 30일 개신교 교회개혁모임의 “교회개혁 실천 연대를 위한 선언” 등은 새로운 2천 년대를 맞이하면서 교회의 역사적 과오를 인정하고 이를 공적으로 시인함으로써 교회 쇄신의 첫발을 내딛고 있다. 이에 대해선 다음 글을 참조할 것. 한상봉, “달마는 동쪽으로 오는가”, [격월간 공동선] 1998년 1,2월호, 16-25면. 

 

3) 기해박해 100주년이던 1939년 9월 8일 ‘조선가톨릭 순교자 현양회 발기인회’ 창립식 성명서, 1939년 12월 15일자 경향잡지 사설 “순교정신을 배우라”, 1932년 신사참배를 허용하던 [天主敎 要理] 2판, 1961년 5월 28일 가톨릭시보에 실린 교회의 박정희 쿠데타 정권 지지, 1961년 12월 4일 “영육의 각 분야에서 신앙을 실천하라!”는 주교단 교서 등은 식민시대와 분단상황 아래 교회가 얼마나 민족의 운명과 함께하기를 주저했는지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위의 글 참조. 

 

4) 한국사회의 변화와 교회가 나가야 할 운동 방향에 대해서 다음 글을 참조하였다. 박기호, “한국화 관점에서 본 가톨릭교회의 정의구현 활동과 이념”, [한국 가톨릭 어디로 가는가], 우리사상연구소편, 서광사, 1997, 469-477면.

 

5) 원광대 부설 ‘종교문제연구소’가 분석한 “한국 신흥종교 실태조사” 결과이다. 한겨레, 1998년 1월 24일자 참조.

 

6) 박기호, 위의 글 참조.

 

[사목, 1998년 3월호, 김인국(청주교구 광혜원천주교회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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