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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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물질적 재화와 그리스도교 사회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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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7 ㅣ No.407

물질적 재화와 그리스도교 사회윤리

 

 

머릿글 

 

본고에서는 '물질적 재화'와 그 정당한 분배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사회 윤리적 측면을 고찰해 보려고 한다. 세계의 경제 질서가 극단적인 자본주의적 경향에 의해 주도되면서 물질적 재화에 의해 인간이 조정 당하고 급기야는 노예화 되기까지 하는, 현대인의 인간성 상실이라는 위기 속에서 물질적 재화가 지니는 본질적 가치를 재확인하고, 재화는 만인에게 평등하게 맡겨져 있다는 그리스도교적 시각을 재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실상 전통적인 경제 질서 안에서의 '재화의 분배'라는 주제는 '재화의 공유'라는 주제에 포함되어 다루어지는 주제로서, 이는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 잘 드러나 있다. 특히 이 주제는 성 토마스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대 교황들의 사회 문헌 안에서 '사유재산권'이라는 주제로 자주 다루어지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교회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소위 말하는 예루살렘의 초대교회에서의 '공산주의'(사도 2,42, 44-45; 4,33-35) 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 그리스도교 공동체 및 교부들이 '사유재산'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극히 부정적이었다는 사실도 우리가 다루려고 하는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현대의 경제 질서 안에서 사유재산과 그 분배와 관련되어 나타나는 사회 문제는 극히 한정되고, 또한 추상적으로 단순하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은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개인적 자유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물질적 재화에 대한 사유재산권에 대해서는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는가? 다시 말해서 오늘날 기타의 여러 요인들과 관련되어 있는 개인의 자유라고 말할 때, 즉 기술적 능력, 문화적 수준, 그리고 노동의 구체적 가능성 등의 직업적인 요소들과 연결되어 있는 사유재산권은 어떻게 설명되어져야 하는가?의 문제도 심도깊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소유권에 대한 문제는 농업경제나 초기 산업화 경제와 관련되는 것도 아니고, 마찬가지로 사유재산권에 반대하여 마르크스로부터 주창된 생산수단의 사회화에 관한 마르크스적 문제 제기도 어떤 탁월한 형태 안에서의 사회-경제적 맥락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사유재산과 재화의 사용에 관한 교회의 공식적 가르침은 이미 성 토마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자연법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또한 재화와 그 공정한 분배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을 떠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성서의 텍스트를 놓고 볼 때 그것이 반드시 사회-경제적인 관점에서 다루어진 것만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따라서 먼저 재화와 그 소유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는 성서 텍스트가 말해주고 있는 의미를 살펴본 다음, 그 안에서 물질적 재화와 그 분배에 관한 실천적 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재조명하고, 그 다음으로는 역대 교황들의 회칙에서 언급되고 있는 사유재산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을 살펴볼 것이다. 

 

 

1. 물질적 재화에 대한 구약성서적 시각 

 

재화에 관한 성서 텍스트가 전해주는 의미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보여지고 있는 사회-경제적 상황을 파악하면서 접근하는 것이 우선이다. 사회-경제적 관점에서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크게 다음의 세 가지 시기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가) 가나안 정착 이전 시기 : 유목민 생활 (기원전 14-11세기). 이 시기는 주로 사막을 떠돌아 다니면서 공동체를 이루던 유목민 생활이었으며 따라서 유목 및 농업이 공동체 생활의 주를 이루고 있었던 시기로서, 사막의 생활 경험이라는 관점에서 공동체가 물질적 재화에 대해서는 자유로왔던 시기라고 평가된다. 따라서 재화와 그 분배라는 측면에서는 이상적인 사회로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이 시기에 있어서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몇 가지 법적인 규정은 계약의 법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출애 21-23장; 신명 14,1-11; 24,10-15; 신명 17-22장 참조). 토지는 약한 사람들에게든지 고아나 과부, 혹은 외국인들과 같이 공동체에서 소수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든지 모든 사람에게 속하던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나) 왕정시대 : 가나안 정착 시기 (기원전 10-7세기). 연약한 사람들, 혹은 종이나 외국인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과 같이 자기 방어 능력이 없는 사람 등 백성들 간에 계층이 생겨 나면서 사회-경제적 차이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던 시기이다. 여기서 '가난한 사람'의 성서적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서에서 말하는 가난한 사람이란 경제적으로 궁핍한 사람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물질적인 재화의 결핍으로 인해 사회적 빈곤을 겪는 사람까지도 의미한다. 즉 힘이 없는 사람이나 자기 자신을 스스로 방어할 능력이 없는 사람까지도 성서가 말하는 '가난한 사람'의 범주에 속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구약성서가 말하는 '가난한 사람'의 보다 정확한 히브리적 의미는 억눌린 사람, 복종을 강요당하는 사람, 다른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받는 사람, 그리고 약한 사람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기원전 8세기에 들어서면서 왕정 체제를 견고히 하려는 움직임과 주변 국가와의 상업, 나아가 도시화의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일종의 사회적 위기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이러한 현상들은 대지주 제도를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 백성들에게는 조세의 부담을 더욱 가중시킴으로써 약한 자들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가난한 사람, 육체 노동자, 노예들은 점점 더 증가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서의 예언 사상은 약한 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사회 불의에 대항하지만 예언자들의 선포는 결코 단순한 박애심이나 선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고, 계약의 백성을 위한 참된 자유 위에 기초한 성서적 신앙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다. 공동체의 구성원에 대한 억압이나 그 구성원들이 느껴야만 하는 좌절은 모든 이를 위한 하느님의 선물로서의 토지의 자유를 보장하는 계약 조문을 명백히 거부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시각을 통해서 볼 때 예언자들의 강력한 어조의 선포는 불의한 공물이나 조세(아모 5,11-12; 이사 3,14-24), 그리고 대지주의 착취 등(이사 5,8-12; 미가 2,1-3)에 대항하는 선포로서 이해된다. 예언자들은 또한 작은 노력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도록 하는, 근본적으로 불의하다고 할 수 있는 제도들을 고발하고 있으며(아모 5,12; 이사 10,1-2 참조), 권력가들의 폭력에 대한 고발까지도 서슴지 않는다(1 열왕 21장 참조).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특히 북이스라엘) 이 시기를 관찰한다면 물질적 번영을 이루었던 시기였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이 번영이란 극히 소수의 손에 집중되었던 불균형적인 번영이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아모 3,12. 15; 4,1; 5,11; 6,4-7; 호세 7,5; 8,14; 10,1; 12,9 참조). 이러한 역사적 상황은 기원전 721년의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이스라엘의 바빌론 유배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가난한 자들만이 남아 있게 되었던 것이다(2 열왕 24,14). 

 

다) 유배 후 시기(기원전 6-1세기): 유배지에서의 귀환은 배고픈 시기를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하깨서 1,6-9, 자카리아 예언서 8,10, 그리고 특별히 네헤미아 5,1-5의 실상처럼 백성들의 궁핍한 생활 그 자체를 말해주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유배지로부터의 귀환과 맞물려 나타나는 어려운 생활은 헬레니즘 문화 및 정치의 번영의 시기로 곧 바로 이어지게 되지만, 그 번영은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의 엄청난 땀을 요구하는 제도적 장치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물질적 재화를 구원의 걸림돌이라고 가르쳤던 나자렛 예수의 활동과 이어서, 그러한 예수의 가르침을 철저히 따르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실천적 삶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2. 예수 시대의 사회-경제적 상황과 물질적 재화 

 

예수 시기의 팔레스타인의 사회-경제적 상황은 로마제국의 권력이 주도하던 상황이었고, 이 시기에는 로마제국의 권력 하에서 예외없이 세금이 징수되던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통치가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아마도 국고나 황실의 살림을 위해 각 지역으로부터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일이었을 것이다". 부유한 계층이 생겨날 수 있게 했던 노동자 계급에 대한 세금 주변에는 또한 성전과 사제 계급을 위한 종교세가 늘 함께 붙어 다녔던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팔레스타인이라는 특수한 기후 조건과 연결되어 있는 농업 경제와 맞물리면서 극소수의 부유층과 지주 계층을 형성시켜가는 동시에 거대한 집단의 가난한 사람들, 노예와도 같은 빈곤 계층을 낳게 되었고 국민들 사이에서의 이러한 두가지 계층의 중간 계층으로서 또한 장인(匠人)이나 소상인(小商人) 등과 같은 계층이 생겨난다. 

 

나자렛 예수는 목수의 일을 했다는 점에서 볼 때 일종의 자영업자로 분류될 수 있겠다(마태 13,55; 마르 6,3 참조). 가르침과 순례의 공생활동안 예수는 열심한 사람들로부터 공경과 환대를 받았던(루가 8,3: 10,38 참조) 율법교사라는 사회적 지위를 지니고 있었으며, 예수의 주변에서 그의 말을 경청하던 계층도 역시 어부, 마태오와 같은 세리, 그리고 그런 직업들과 비슷한 중간 계층의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질적 재화에 대한 예수의 판단은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야만 할 것이다. 즉 예수는 당시의 종교적 전통과 연관을 지으면서 어떠한 필요로부터도 자유로운 사람에 대해서 언급한다. 예수의 물질적 재화에 대한 사상을 다음의 두가지 사상으로 요약하여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가) 지혜문학의 전승에서 말하는 물질적 재화: 지혜문학에서의 물질적 재화와 그 사용은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추상적이다. 재화는 인간의 건강과 장수와도 같이 하느님의 선물로 이해되지만 그것은 마치 하루살이와 같아서 거짓된 안전만을 제공할 뿐이며, 단지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때에만 물질적 재화가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지혜문학은 또한 물질적 재화에 대한 집착과 남용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분명히 한다. 

 

나) 신약성서가 보여주고 있는 예언서적 전승에서는 구체적인 현실에서의 재화의 분배를 강조한다. 예언서적 전승에서의 부(富)란 불법적이고 불의한 재물을 의미한다 (루가 16,9 참조). 몇몇 예언서들과 시편에서는 부자들을 이러한 맥락에서 비판하고 있으며, 마태오 복음 6장에서도 그러한 언급을 찾아볼 수 있다: "불행하여라, 그대들, 부유한 사람들아!" (마태 6,24). 이렇듯이 예언서적 전승에서는 그 어느 곳에서도 부에 대한 추상적인 언급을 찾아볼 수가 없고 다만 구체적인 현실이 있을 뿐이다. 부자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계층으로 드러나고 있으며,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더 가난하게 만들면서 그들 자신의 부를 쌓아가는 악덕한 사람들로서 고발되고 있다. 여기서 부(富)란 단순히 종교적인 어리석음과 비유될 수 있는 자기 만족이 아니라 불의(不義)의 죄를 야기시키는 표지가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볼 때, 예수가 요구하는 것은 집중되어 있는 재화에 대한 고발이나 그러한 재물로부터 단순히 멀어지는 것만이 아니고, 한 곳에 집중되어 있는 재화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공정하게 분배되는 것이다(마태 19,21; 루가 12,33: 16,9: 19,8 참조). 성서에서 자비를 의미하는 히브리어의 sedequa는 원래 정의(正義)를 뜻하는 개념으로서 도움을 필요로하는 어떤 사람에게 남아도는 것으로서 도움을 주는 일종의 애덕적 활동이나 의견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구원을 위해 필요한 조건 내지는 의무로서 알아들어야 한다. 사도행전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을 보여주고 있으며 야고버 사도도 마찬가지로 부자들에게 위협조의 저주를 퍼붓고 있는 것이다(야고 5,1-6 참조). 바로 이렇듯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재물의 분배와 나눔의 정신을 담고 있는 신약성서의 텍스트들이 복음적 이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예언서와 시편 전승이 의도하는 핵심이다. 결국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사도 4,34)라는 텍스트가 말해주는 바와 같이 이러한 복음적 이상은 메시아 시대의 도래를 위한 하느님의 약속의 실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사유재산 : 저개발과 현대적 가난 

 

위에서 살펴본 성서적 전망을 통해서 과연 어떻게 현대 세계 안에서 재화의 분배에 대해 언급할 수 있겠는가? 사유재산에 대해서, 그리고 힘의 상실로서의 성서적 가난과 저개발적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재화의 공정한 분배에 대해서 올바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위에서 살펴본대로 이에 대한 공통적인 분모를 찾아야 할 것이다. 재화란 분명 인간에게 맡겨진 일종의 기능이며, 인간의 필요에 따라 인간을 만족시킬 수 있는 기능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성서적 전망, 즉 예언서적 전승이나 복음적 전승에서처럼 기능으로서의 재화를 사용하는데 있어서는 지혜가 요구되며, 여기서의 지혜란 단순히 물질적인 필요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무능력한 상태와 사회적 종속 내지는 노예의 상태에서부터의 해방을 이미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재화의 정당한 분배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한 기준은 그 어떤 것보다도 책임성 있고 자율적인 인격체로서의 인간의 자유와 발전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사유재산'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교 전통이 지향하는 목표이다. 여기서 우리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이 말하고 있는 사유재산에 관한 해설을 보기로 하자: "재산 소유와 외적 재화에 대한 사유권의 기타 형태들은 인격 표현에 이바지할 뿐 아니라 인간에게 사회와 경제 분야에서 맡은 바 책임을 다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므로 개인이나 단체가 외적 재화에 대하여 일정한 지배권을 취득하도록 장려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사유재산이나 외적 재화에 대한 일정한 지배권은 개인과 가정의 자립을 위해 절대로 필요한 생활권을 제공하는 것이며 인간 자유의 연장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또한 의무와 책임을 실천케하는 자극제이므로 시민적 자유의 한 가지 조건도 된다". 

 

이는 또한 마르크스(K. Marx)가 그의 자본론에서 시도하고 있는 노동자의 자유로운 특성에 분석이 도달하는 최종적인 목표라고도 말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재화의 원천적인 착복에 관한 역사적 분석을 통해서 다음의 세 가지를 말하고 있다: 

 

첫째로, 인간의 고유한 노동 위에 기초하고 있는 사유재산에 대해서이다. 마르크스는 그의 자본론 제 1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노동자 자신이 자기가 생산한 물건에 대해 갖는 사유재산권은 노동자 자신이 갖는 작은 사업의 기초이다. 즉 작은 사업이란 사회적 생산과 노동자 자신의 자유로운 특성의 발전을 위해서는 필수적이인 것이다... 노동자는 자기 자신이 취급하고 있는 노동의 고유한 조건에 대해 자유로운 사적 소유자가 된다. 예를 들어 땅을 경작하는 농민이라든가 숙련된 기술로 도구를 사용하는 장인(匠人) 등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노동의 자유로운 사적 소유자가 된다". 

 

둘째로, 개인 생산수단의 변화를 가져온, 소지주들에 대한 폭력적인 토지 몰수로 인해 자본주의적 형태의 사유재산이 생겨난다고 마르크스는 밝히고 있다. 이러한 과정은 실상 산업화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역행할 수 없는 사회적 과정이기는 하지만 이는 역사의 변증법을 통해 결국 다음에서 보게될 사회적 소유의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곧 세번째로는 사회적 소유의 형태이다. 이는 노동자들 편에 귀속되어 있는 재화의 소유로부터 시작된다. 즉 토지와 노동으로부터 생산된 생산 수단의 집산적 소유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이를 마르크스는 집산적 소유와 협력 위에 기초한 "개별 소유"라고 말하고 있다. 

 

공산당 선언을 통해 제시된 방법도 집산적 소유의 최종 의미에 대해서 강조한다. 즉 공산당 선언 90항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된다: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이루게 하는 유기적 연결로서의 어떤 사회를 만든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가로디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말하기를 "각자의 자유로운 성숙이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는 모든 이의 자유로운 성숙을 위한 하나의 조건이 다". 

 

이론적으로 볼 때 실상 틀린 것이 없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재화의 올바른 분배란 인간의 자유로운 발전을 실현시키기 위한 한 방법이 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마르크스는 그 방법에 있어서 소수의 자본가가 소유하고 있는 거대한 재화의 폭력적인 징수를 말하고 있지만 그리스도교의 전통에서는 재화의 분배를 정당한 방법으로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 윤리적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는다. 사목헌장 69항에서는 "빈곤의 극을 겪고 있는 사람은 필요한 것을 타인의 재화에서 취득할 권리를 가진다"고 밝히고 있으며 이에 따른 해설에서 윤리적 원칙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4. 사유재산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만일 20세기를 역사적으로 세계 양대(兩大) 전쟁의 시대로 기억한다면, 19세기는 특별히 유럽 내에서는 민중 개혁의 시대의 특징을 가진 시대로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시대에 대한 이러한 사회-정치적 및 역사적 해석은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이 발생한지 거의 100년이 지난 1891년 교황 레오 13세로부터 반포된 사회회칙 "Rerum novarum" (새로운 사태)의 첫번째 문장에서 아주 분명하게 지적되고 있다. 즉 교황 레오 13세는 지적하기를 "오랫동안 세계 각국의 사회를 휩쓸던 혁명적 변화의 소용돌이는 이제 정치적 한계를 벗어나 경제적 영역에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사실 새로운 산업의 출현, 새로운 기술의 발전, 노사관계의 변화, 극소수의 엄청난 재산소유와 대다수의 빈곤, 노동자들의 자신감과 그들 사이의 보다 밀접한 유대관계,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일반 윤리의식의 타락 등이 갈등을 빚어내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La Civilta Cattolica'의 편집자 마태오 리베라토레(Matteo Liberatore) 신부에 의해 준비된 이 회칙의 초안은 노동자 계급의 비참한 현실 때문에 기인된 '지난 세기 말에 일어난 혁명'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하면서 시작된다. 사실 그 당시 서구 사회의 여러 나라에서의 대부분의 시민들은 노동자 계급으로서 비참한 현실을 살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은 노동자 계급의 혁명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시민계급의 혁명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이 혁명이 비록 자유, 평등, 형제애에 대한 강한 열망에서 부터 비롯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는 무엇보다도 수도원과 귀족, 그리고 고위 성직자의 권력에서부터 중산층 - 기업가, 기술자, 은행가, 그리고 전문직업인 등 - 의 해방을 위해 일어났던 혁명이었던 것이며, 이 혁명의 성격이 사상적 혹은 정치적이이라고 하더라도, 그 이면에는 분명히 경제적 열망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혁명의 정치적 열망은 사실상 다양한 근거를 지니면서 다가왔다고 말할 수 있다. 특별이 여러 철학자들이 이와 관련이 되며, 그중에서도 몽테뉴라든가 쟝 자끄 루소 등의 철학자들은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몽테뉴는 훌륭한 정치에 대한 보장과 자유의 충만한 표현을 위해 권력이 분산되어야 할 필요성을 누구보다도 절감했었고, 특별히 루소는 당시 중산층의 의식구조를 변화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루소는 인간 노동이 변질되어가는 시대적 상황을 비판하면서 인간 이성의 역할을 강조하는 '보편 의지'를 주장하는데 루소의 주장은 그것이 비록 반계몽주의적 낭만주의였다 할지라도, 집산적 절대주의의 상황에 사회주의의 기초에 강력한 확신을 주었던 것이다. 결국 그의 사상은 사유재산의 거부,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강요, 그리고 자본주의 제도의 축출 등의 사상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함께 프랑스와 유럽에서는 산업혁명의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노동자 계급의 비참한 현실은 이제 새로운 힘을 얻게 된다. 중세기의 노예 제도는 이미 폐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산업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의 횡포로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었던 현실이었다. 노동자들은 자유를 쟁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산업 사회 안에서 겪는 고통은 실업의 위협이라든가, 노동 시간의 연장, 그리고 여성들과 어린이들까지도 공장 안에서 시달리는 일 등, 그들 모두는 비인간적인 상황에 지배 당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들은 노동자들의 협회가 탄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협회는 중세의 장인(匠人)제도와는 다른 조직으로서 보통으로는 자본주의 제도와 자본가 계급의 사용자들에 대등하게 맞서기 위해 생겨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의 반대는 예들 들어, 마키아벨리, 베이콘, 록크, 그리고 홉즈와 같은 사상가들이 구상했던 자유와 평등, 정의, 발전, 합리적 정부를 의미하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이념적 반대였다.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의 반대는 이제 하나의 새로운 질서를 지닌 사회를 요구하는 사회주의적 형태의 경제 질서를 요구하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19세기 말의 경제적 상황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새로운 경제 질서를 요구하는 사회주의라는 두 가지 거대한 흐름이 충돌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고만 것이다. 

 

4.1. 레오 13세의 '새로운 사태' 

 

교황 레오 13세는 한 마디로 그 시대의 예언자로서의 임무를 띤 교황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는 누구보다도 그 당시 시대 상황이 말해주고 있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각각의 위험성을 직시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사회주의가 표방하고 있는 허울을 벗기는데 커다란 공헌을 한다. 레오 13세는 노동헌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의 대(大)회칙 '새로운 사태' 첫 부분에서 집산적 사회주의 이론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이같은 사회악을 제거하기 위해 부유한 자에 대한 가난한 자의 불만을 조장시킴으로써 사유재산제도 자체를 파괴하고, 그대신 개인재산을 모든 사람의 공동재산으로 만든 뒤 그 관리는 국가나 공공단체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재산의 공유화(公有化)는 국민에게 부의 공평한 분배를 가능하게 하므로 사회악을 근절시킬 수 있다는 논리에서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문제해결과는 너무나 근본적인 차이가 있으므로 그들의 제안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노동자 자신들이야말로 제일 먼저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자들이 제시하고 있는 해결책은 합법적인 재산소유권을 박탈하고, 자기 본연의 역할을 벗어난 영역에까지 국가 기능을 확장시키고, 철저하게 사회를 혼란시킬 뿐이므로 매우 위험하고 부당하다". 

 

회칙은 계속하여 언급한다: "인간이 일을 하는 근본적 동기이며 동시에 궁극적인 목적은 재산을 마련하여 이를 자신의 소유로 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노동자가 자신의 체력이나 기술을 다른 사람에게 제공하는 것은 자신의 생활에 필요한 것을 그 대가로 얻기 위해서이다. 노동자는 노동을 제공한 대가로 임금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임금을 자기 뜻대로 사용할 수 있는 진정하고도 완전한 권리의 보장도 아울러 요구한다. 그러므로 노동자가 지출을 줄여 절약하고 여기서 생긴 저축을 보다 안전한 토지 매입에 투자할 경우, 이 토지는 임금이 다른 모습으로 단순히 변형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을 제공한 대가인 임금을 노동자가 제 뜻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 처럼, 이렇게 얻어진 재산인 부동산도 노동자가 온전히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즉 동산이건 부동산이건 재산의 소유권에는 결국 임의사용권이 포함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사회주의자들은 개인재산을 공유함으로써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침해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임금의 임의사용권을 박탈함으로써 노동자들이 자신의 재산을 늘리고 생활상태를 개선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과 희망을 송두리째 빼앗아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치명적인 결점은 사회주의자들이 제시하고 있는 해결책이 명백하게 정의에 어긋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모든 인간의 재산소유권은 천부적 권리로서 자연권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영원법과 우주의 섭리 아래 놓여 있는 인간은, 현재 뿐만 아니라 미래까지도 감싸고 있는 인간 인식의 무한함을 통해서, 그리고 인간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자유를 통해서, 그 자체로 하느님의 섭리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삶을 유지하고 꾸려 나갈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방법을 선택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단순히 지나가는 순간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삶을 위한 선택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토지가 인간에게 제공하는 산물 뿐만 아니라 토지 자체가 인간에게 속해 있으며, 바로 거기에서부터 인간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것까지도 풍요롭게 주어져야만 한다. 말하자면 인간이 지니고 있는 필요성은 끊이지 않고 계속 반복 순환되는 것이기 때문에 오늘의 만족을 함께 제공하면서 내일을 위해 다시 새로운 생기를 인간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은 인간에게 영원하고도 변하지 않는 재화에 관한 권리를 제공해야만 하며, 인간이 필요로 하는 항구적인 도움을 반드시 제공해야만 한다. 또한 토지만이 인간에게 제공할 수 있는 재화 역시 끊임없는 풍요로움으로써 인간에게 주어져야만 할 것이다. 

 

레오 13세는 더 나아가서 토지와 인간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국가에 토지의 관리를 맡겨야 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국가보다 먼저 인간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국가가 형성되기 이전부터 자기 육체와 생명을 보존할 권리를 태어나면서 부여받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적 이론은 이외에도 토지는 각 개인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공동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져 있는 것으로서 집이나 음식 등의 준비를 통해서 각 개인의 필요성에 봉사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만일 각 개인의 사이가 분리되어 있다면 모든 지주는 다른 사람들이 기아로 죽어가는 것은 그대로 방치하면서 자기 자신의 필요성의 만족만을 추구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토지는 집단의 소유 형태를 통해서 보존되고 유지될 수 있도록 국가의 권한에로 옮겨져야만 한다는 주장이다. 

 

한편 사회학자 J.B. Say는 사유재산권은 원천적으로 국가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하며, 다른 사회학자들은 이 권리는 유용성과 같이 순수하게 경제적 이익 위에 자리 잡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 어떤 학자들은 인간의 노동을 이 권리를 위한 하나의 원천으로서 소개하기도 한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노고의 고유한 결실을 고려할 권리를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있어서 어떠한 안전된 소유재산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즉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과 가족들의 삶을 위해 생산적 활동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전혀 배제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산된 재화의 획득은 인간의 자연법적인 권리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 토마스는 그러한 재화의 획득이라는 자연법은 또한 그 재화를 소유할 권리까지도 포함한다는 명백한 결론을 끄집어 낸다. 이러한 권리는 미래의 위험까지도 방지하기 위하여 전혀 흔들림이 없는 확고한 인간의 권리이어야만 한다. 인간 노동의 역할은 땅에서 결실을 맺고 그 결실을 수확하는데 있다. 인간의 본성적 요청으로서의 사유재산권을 이해하는 이러한 방법은 국가가 결코 이러한 인간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되는 사유재산권을 정의하고 정당화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4.2 비오 11세의 '사십주년' 

 

교황 비오 11세는 1931년 반포한 회칙 '사십주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유권이 원래 주인이 없는 물건의 점유나 산업 및 노동, 또는 이른바 분업에 의해 획득된다는 것은 모든 시대의 전통일 뿐만 아니라 본인의 선임자인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이는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고 아무도 권리 주장을 하지 않는 재화의 점유는 사실상 어떠한 권리 주장을 하지 않는 재화의 점유는 사실상 어떠한 사람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이름으로 기업을 경영하여 새로운 형태의 노동을 창출하고 가치 증대를 추구할 때, 그 결실은 노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공정하게 분배되어야 한다". 

 

소유권은 이중적인 양상을 지닌다: 즉 그 소유권이 각 개인들이게 해당되면서 또한 공동선과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성과 사회성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사유재산권은 자연적으로, 혹은 창조주로부터 직접 인간에게 부여된 인간의 기본권인데, 그 이유는 각 개인은 자기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유지할 책임이 있다는 점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목적에 부합되기 위하여 사유재산권은 인간 사회 안에서 하나의 불변적이면서도 결정적인 법칙으로 유지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국가의 역할 역시 이런 점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야만 하고 그 권한을 보장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집단주의에 비해서 개인주의를 너무 강조하는 것은 사유재산권의 성격을 거부하는 것이거나 혹은 그 의미를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며, 또한 사유재산권의 공적인 의미를 축소시킴으로써 윤리적, 사회적 및 법적 질서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게 한다. 

 

따라서 교황 비오 11세는 소유권의 의무에 대해서 말하면서 이미 선임자인 레오 13세가 언급했던 소유권의 기본적 원리를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이다. 즉 소유권은 그 재화의 사용과는 명백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환정의는 다른 사람의 소유권을 보호하며 또한 존중한다. 그러나 자신의 소유 재화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소유자는 반드시 공동선도 고려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소유권은 결코 절대적이 아니고 공동의 번영을 위해 제한, 축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만약 필요성이 생길 때에, 그리고 자연법이 어떤 직접적인 제한을 하지 않을 때 국가의 필요성을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4.3. 바오로 6세의 '팔십주년' 

 

1971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반포된 이 회칙은 교황 레오 13세의 '새로운 사태' 반포 80주년을 기념하는 회칙이다. 이 회칙 안에서 다루어진 사유재산에 관한 문제를 살펴보기 전에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회칙 이전에 역시 동일한 교황에 의해 반포된 회칙 '민족들의 발전'에서도 이미 사유재산에 관한 교회의 입장을 잘 말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교황은 회칙 '민족들의 발전'을 통해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언급을 인용하면서 사유재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과 또한 이 세상이 각 인간과 각 민족의 이익을 위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따라서 모든 인간이 사랑 안에서 정의와 일치를 추구하는 바와 같이 모든 창조된 재화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통해서 사회에 환원되어야만 한다. 교황은 말하기를 인간의 모든 권리들은, 물론 소유권과 자유시장에 관한 권리들을 포함하면서, 바로 그러한 기본적인 원리에 종속되어야만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교황은 부(富)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의 행동을 올바르게 인도하기 위하여 교회의 교부(敎父)들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사유재산권은 그 누구에게 있어서도 하나의 절대적인 권리, 혹은 무조건적인 권리는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필요한 것 이상의 재화까지도 자신을 위해 독점한다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사유재산권이 결코 공동선을 침해하게 하는 권한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몇몇 대지주들의 토지 소유가 일반적인 소유권을 방해한다면, 즉 다시 말해서 그 토지들이 너무 넓거나 혹은 별 쓸모없이 내버려져 있다거나, 혹은 적절하게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혹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다 주기 때문에, 공동선은 그 토지의 징수를 요구한다. 조국의 자원과 국민의 노동으로 막대한 수입을 얻은 시민이 조국에 명백한 손실을 초래한다는 생각은 아랑곳없이 개인의 이익만을 위하여 수익의 대부분을 국외로 반출시켜 축적한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교황 바오로 6세의 이러한 생각은 자본의 도피에 관한 것으로서, 이러한 자본의 유출이 가난하고 채무가 많은 국가에서 극심한 인플레이션 (통화팽창)의 이유로써 정당화될 수도 있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윤리적으로는 의심할 여지없이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분명히 공동선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국인 투자의 이러한 형태는 외국에 빚지고 있는 채무를 갚는데 도움을 줄 수 있으며, 국가의 발전을 위해 새로운 자본을 끌어들일 수 있는 이점이 있다. 

 

회칙 '팔십주년'을 통해서는 사유재산권과 그 실천에 관한 내용이 자세하게 언급되고 있지는 않다. '팔십주년'은 사유재산권에 관한 주제 안에서는 국제적인 지평에서 이 권리를 적용시키면서 단지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만을 되풀이한다. 사회문제는 이미 국제화되고 인류 전체의 문제가 되었고, 인류의 삶안에서의 연대는 일종의 명령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특별히 이러한 현대의 문제들은 생산에 대한 인간 조건들을 주목하게 되었고, 재화의 교환과 부의 분배을 통한 정의를 요구하게 되었다. 또한 더 나아가서는 저개발 국가 안에서의 소비의 증가 요구와 국가 상호간의 책임의 조건을 주목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의 한 해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유재산권의 개념과 한계에 관한 인식이 절대적 중요성을 갖는다. 사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말하는 바와 같이 모든 사회제도의 근원도 주체도 목적도 인간이며, 또 반드시 인간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은 사회 안에서 노동할 권리를 지니며, 또한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의 실천을 통해서 자신의 능력과 인격을 발전시켜 나갈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자기 자신과 그 가족의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도록 정당한 임금을 받을 권리가 있다. 이 권리는 또한 인간으로 하여금 생계 뿐만이 아니라 물질적,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정신적인 면에서 품위있는 생활을 하게끔하는 권리인 것이다. 여기서 사유재산의 개념에 대한 막시즘과 자유주의 사상의 영향, 즉 사회생활과 관련해서 회칙이 다루고 있는 그러한 사상들과 그 결과로서의 그 사용과 실천을 잠시 살펴 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사유재산에 대한 확고한 막시즘적 이념은 계급투쟁과 사유재산은 전혀 허용되지 않는 경제적 및 정치적 권력의 집단적 실행의 능동적인 실천 위에서 주장된다. 또 한편으로 자유주의적 이념은 개인의 활동, 개인의 관심, 그리고 개인 자유의 실천 안에서 개인의 완전한 자율에 맡기고 있으며, 이는 하나의 비극적인 오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과 인간다운 사회의 공동선 실현을 위한 사유재산제도와 개인의 책임감에 관한 막시즘이나 자유주의 그 어느 사상도 교회로부터 받아들여질 수 없음은 너무나 명백하다. 

 

4.4. 요한 바오로 2세의 '노동하는 인간' 

 

레오 13세의 회칙 '새로운 사태' 반포 90년을 기념하면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노동하는 인간'을 반포 하였으며, 이 회칙 안에서 요한 바오로 2세는 오늘날의 기술-경제-정치적 상황 안에서 제기되는 새로운 문제점들을 분석한다. 회칙 '새로운 사태', '사십주년'은 인간의 노동 문제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으며, 그 후의 회칙 '어머니와 교사',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은 사회 계층간의 문제와 '전체 세계'의 문제들에 대해서 토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오늘날 제기되고 있는 여러가지 사회문제의 해결을 위한 열쇠로서 인간 노동의 개념을 선호하였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의 엄청난 과학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요한 바오로 2세는 노동의 기본 주체는 인간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4.5. 요한 바오로 2세의 '백주년' 

 

요한 바오로 2세는 레오 13세의 회칙 '새로운 사태'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반포한 회칙 '백주년'을 통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레오 13세의 놀라운 업적을 찬양하고, '새로운 사태' 이후 역대 교황들의 사회 문헌들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사유재산권에 대한 가르침을 다시 확인하고 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새로운 사태'가 당시의 집산적 형태의 사회주의에 반대하여 제시하는 사유재산권의 자연적 성격을 옹호하고 있으며, 이 권리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교회로부터 옹호되어 왔음을 밝히고 있으며, 또한 재화의 소유란 절대적인 권리가 아니라 인권으로서의 본질 안에서 그 한계를 지닌다는 가르침을 다시 강조한다. 즉 사유재산권이란 자연법에 근거한 어느 누구에게도 침해받을 수 없는 권리이지만 소유한 재화의 사용에 있어서는 개인이나 가정의 자립을 위한 소유물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유익하게 사용되어야 하는 공유물로 여겨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백주년' 81항은 사유재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사회적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가) 교회는 노동자들이 기업경영에 협력하면서, 자신들의 노동과 인간 존엄성을 보장받고 기업생활에 보다 광범위하게 참여하려는 정당한 노력을 옹호한다. 즉 기업체를 '자본의 사회'가 아니라 '인간의 사회'로 만들기 위한 광범위하게 결사된 노동자 운동이 인간의 해방과 전인적 발전을 위해 아직 필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나)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해서도, 그리고 다른 이와 함께 진력한다. 

 

다) 생산수단의 소유가 노동과 사회적 부의 보편적 발전을 위해서 사용되지 않고 억제, 투기, 착취, 노동영역의 연대 관계를 단절시키거나, 다른 이의 노동을 방해하는 수단이 된다면 이런 소유 형태는 부당하며 하느님과 인간에게 범하는 죄악이다. 

 

라) 인간의 노동할 권리, 그것으로써 빵을 얻을 의무가 부정되는, 노동자들의 인간적인 존엄성이 보장되지 못하는 경제 체제는 부당한 것이며, 결코 사회적 평화를 달성할 수 없다. 

 

마) 사유재산은 적절하게 모든 이를 위한 노동과 인간 성장에 기여한다면 정당하다. 

 

 

마치는 글 

 

이상과 같이 물질적 재화와 그 소유에 대해 성서적 의미에서부터 교회가 그 가르침을 어떻게 적용하여 가르치고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본고를 마치면서 결코 간과할 할 수 없는 문제 한가지는 이제 개인의 문제를 떠나서 현대 세계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도의 빈곤 문제라는 것이다. 곧 지구 상의 일부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빈곤과 기아의 상황을 뼈저리게 겪고 있는 소위 말하는 제 삼세계의 '저개발'과 빈곤이다. 여러가지 다른 이유로 인해 저개발 및 빈곤의 상황을 안고 있는 국가가 있는 반면에 부(富)가 집중되어 있는 고도로 발전된 국가도 있다. 이밖에도 미국이나 스위스처럼 고도로 산업화된 나라이면서도 지역마다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는 나라라든가 인도나 가나, 아르헨티나 등과 같이 저개발 국가로서 갈수록 더 저개발이 심화되고 있는 나라도 있다. 민족의 발전과 관련된 자료들을 살펴볼 때 결국 "부자는 계속해서 더 잘 살게 되고, 가난한 사람은 아이들만 낳는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볼 때, 결과적으로 "오늘날에는 부요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의 절대적인 단절 만이 경제적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결국 가난한 국가에 대한 책임이 부유한 국가에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가난한 국가에 있어서의 불의로운 경제 상황에 대한 해결은 이제 국제적인 차원에서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빈곤과 가난의 문제는 이제 결정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권력의 주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소위 말하는 제 일세계에 있어서의 재화에 대한 문제는 재화의 분배에 있지는 않다. 어떠한 방법으로 생산 활동을 하는가? 무엇을 생산하는가? 또한 누구를 위해 생산하는가?에 대한 결정이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일 것이다. 실상 오늘날 소유의 능력은 기술 구조를 장악하는 능력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이것이 바로 현대의 경제 체제를 구축하는 새로운 관건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경제의 존재 이유는 생산되는 상품 안에서, 또 생산을 위해 제공되는 노동 안에서 늘 찾아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망에서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참된 발전이란 획득하고 소비할 수 있는 재화와 관련을 갖는 것이 아니라 노동에 대해서, 그리고 미래를 지향하는 노동의 질적 향상과 지속성에 대해서 어떠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가와 깊은 관련이 있게 된다. 

 

이렇게 될 때, 어떤 경우 재화의 보편적인 목적을 실현하는 방법이기도 했었던, 인간자유의 기초로서의 재화를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은 모든 사람을 위해 자기 자신의 고유한 노동을 결정한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경제 제도 안에서, 성서적 가난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이러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은, 생산의 수단과 목표에 대한 결정에 있어서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참여가 없다면 실제로는 실현될 수 없을 것이다. 

 

정치적 참여는 국제적인 관계 안에서의 재화의 분배 문제도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이고, 실상 저개발 국가에 대한 관심은 복음적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네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하고 명령하는 복음의 메시지는 아직까지 기아와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저개발 국가의 사람들에게도 꼭 같이 해당되는 명령이며, 이는 단순히 필요에서의 해방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종속에서의 해방의 차원에까지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가톨릭 신학과 사상, 제10호(1993년 12월, 가톨릭대학교출판부), 이동익(가톨릭대학교 교수, 신부, 윤리신학) / 이동익 신부님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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