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홍)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가톨릭 교회의 노동 및 직업 이해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7 ㅣ No.406

가톨릭 교회의 노동 및 직업 이해

 

 

현대 산업 사회 안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직업을 통해서 경제적 삶을 영위하고 있으며, 직업을 통해 얻은 수입은 의식주의 해결 및 교육 등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주요 수단이 된다. 또한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사회적 동물로서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직업을 잃는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경제적 삶을 위한 수단 및 능력을 빼앗기는 것이며, 나아가 사회에 대한 경제적 참여로부터의 소외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가톨릭 교회의 사회교리는 사회에서 활동함으로써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충족시키고 자신의 인격적 삶을 성취시킬 수 있는 주요 수단으로서의 노동 문제에 끊임없는 관심을 보여온 것이고, 그러한 관심은 교황 레오 13세의 {새로운 사태}, 비오 11세의 {사십주년} 등 현 교황의 {노동하는 인간}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주제로 등장하고 있다. 

 

가톨릭 교회가 노동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기초는 인간 노동이 특별히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실마리가 된다는 데에 있다. 노동한다는 것, 즉 직업 활동을 한다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이며, 모든 이가 사회의 경제 생활에 참여할 수 있는 자유를 보호하는 권리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언급하듯이 노동이란 그 성격이나 환경이 어떻든간에 인간성 자체로 인하여 그리고 본성으로 타고나 인간이 사회 안에서 할 수 있는 수많은 행위들 가운데 노동으로 인식될 수 있고 또 인식되어야하는 인간의 어떤 활동을 뜻하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의 사회교리를 구성하는 교황들의 회칙들과 사회문헌들은 기본적으로 윤리에 관한 문헌들이지 경제학에 관한 논문들은 아니다. 그 모든 문헌들은 직접적으로 인간 존재의 삶을 직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인간 존재의 삶과 관련하면서 다양한 사회 정책이라든가 제도를 이끌어 나가기는 했지만 결국 주된 관심은 사회적 연대 하에서의 인간 존엄성에 대한 관심이며, 이는 자연스럽게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 되어온 것이다. 노동의 문제 역시 인간 존엄성을 기초로하는 윤리 문제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파생적 주제들은 역시 윤리적인 것이 핵심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차원에서 노동의 주제에 접근할 것이다. 우선적으로 가톨릭 교회가 노동을 역사 안에서 어떻게 이해해 왔는가를 개괄적으로 살펴본 다음 인간 노동의 이해를 위한 윤리적 및 사목적 접근과 함께 최근 100여년간의 가톨릭 사회 문헌들을 통해 제시되는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1. 가톨릭 교회의 전통 안에서의 노동 이해 

 

교부시대. 많은 교부들의 저서들에서 노동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삶과 그들 자신의 세속에서의 직업을 거룩하게 하도록 촉구하는 내용들이 발견되고 있으며, 동시에 인간의 부도덕 내지는 우상을 숭배하려는 경향 때문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어울리지 않는 노동이 언급되기도 한다. 몇몇 희랍 교부들, 특히 니싸의 그레고리오나 막시무스와 같은 교부들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인의 구원에 이바지할 인간 노동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이따금 노동의 우주적 전망에 대해서 언급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교부시대에는 인간 노동에 대한 주제가 커다란 관심을 끈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에는 무엇보다도 삼위일체와 그리스도론이 주요 논제로 등장했던 시기였으며, 특히 서로마 제국에서 일어난 수도원 개혁과 수도자들의 은수 생활의 경향이 인간 노동의 문제를 비켜가게끔 한 원인이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성 베네딕도가 자신의 수도회의 모토를 "기도하고 일하라" (Ora et Labora)로 삼으면서 노동은 수도원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수도원에서 수행된 노동은 비록 그것이 세속의 노동과 거의 비슷하기는 했지만 전혀 다른 의미를 내포한다. 수도원에서 행해진 노동의 주된 기능은 게으름과 싸우는 의미에서의 금욕주의였다. 노동의 금욕주의적 측면은 성 베네딕도와 더불어 서방 수도회의 규칙을 확립하는 데 위대한 공헌을 세운 요한 카시아노의 한 예화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예화에 등장하는 바오로(Paul The Hermit)는 자그마한 땅 한 귀퉁이를 경작하여 스스로를 부양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지만, 땅을 경작하는 것 외에도 바구니를 만드는 일에 전력하기도 한다. 바구니를 만드는 일은 사실 그 자신에게 필요한 일도 아니었고, 매년 마지막 날에는 자신이 만들었던 바구니들을 모두 태워 버리는 것이었다. 이 예화가 의미하는 것은 노동이란 그것으로써 무엇을 얻기 위한 한 수단으로서의 활동이라기 보다는 그 자체로서 의미 있는 것이며, 덕을 닦기 위한 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바체크(E. Vacek)는 교부시대에서 발견되는 노동의 의미를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한다: 1) 노동을 통하여 인간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얻게되고, 따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는다. 2)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게으름과 악의 경향을 피한다. 3)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로를 본받는다. 4)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육욕을 극복한다. 5)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겸손과 성실을 배운다. 6)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충실과 순종을 실천한다. 7)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충분한 재화를 얻는다. 8)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자신을 수양한다. 9)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회개한다. 10)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평등을 체험한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이 시대는 노동을 정의와 자비를 실천하고 덕을 닦는 수단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노동이 지니고 있는 더 심오한 신학적 연구의 노력은 계속되지 않는다. 

 

중세에서 근대까지. 중세 시대의 사회학과 신학의 발전은 노동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평가가 제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는 하였지만 불행히도 이 기회는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고 만다. 중세는 사회학적으로 길드 조직이 나타나고 군대 제도가 발전하면서 그러한 조직들은 간혹 스스로를 보호하는 프로그램을 가지기는 하지만 인간 노동의 실제와 노동이 인간 삶에서 갖게되는 중요성은 전혀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신학적으로는 정의와 공동선에 대한 폭넓은 관심이 나타난다. 신학자들,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신학자는 인간은 전적으로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통치에 참여하도록 불리웠다고 평가한다. 토마스는 인간 지성이 경험되는 주요 질서들 중의 하나는 인간 문명의 질서이며, 그 질서는 노동에 의해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그는 사물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인간에게 제공하는 덕을 기술(ars)의 덕으로 보고 있으며 이는 노동의 주요 형태들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따라서 토마스에게 있어서 더욱 포괄적인 노동신학을 위한 기초는 현재가 된다. 그러나 세속에서의 삶과 현세의 노동은 그리스도인들의 영성생활에 기여하지 못할 뿐더러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당시까지의 수도회 전통은 토마스의 이러한 새로운 신학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노동에 대한 더욱 부정적인 모습은 르네상스 직전에 씌여졌던, 당시만해도 매우 대중적이었던 '준주성범'(Imitation of Christ)에 그대로 드러난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인간은 먹고 마시며, 잠자고 또 깨어나고, 일하고 쉬어야 하는데 이러한 인간의 본성적인 욕구들은 인간 자신 안에 내재해 있으며, 이 욕구들은 경건한 영혼을 오히려 비참하고 괴롭게까지 느끼게 만든다. 왜 인간은 이러한 모든 욕구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죄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가?". 이처럼 이 시기는 아직 노동에 관한 신학이 충분히 발전되지 않았던 시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르네상스 동안에 토마스 모어나 에라스무스 같은 학자들은 노동을 포함한 세속에서의 행위들에 대해 좀더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하였지만 체계적으로 노동의 의미가 논해진 시기는 아니었다. 루터와 캘빈은 인간의 노동을 하느님의 창조활동의 지속이라는 측면과 인간에 대한 봉사의 측면에서 보았지만 하느님의 시각에서는 노동 자체를 가치있는 것이라고 평가하지는 않았다. 

 

17세기는 세속과의 단절을 요구하는 그리스도교 영성의 흐름과 '준주성범'과 같은 노동에 대한 부정적 영향을 탈피하면서 그리스도교 영성은 이 세상과, 그리고 인간의 노동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일깨워준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 가정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노력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세상에 살면서 노동하는 평범한 삶이, 이 세상에 사는 삶이면서도 영적인 삶에로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프란치스코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동의 의미에 대한 깊은 연구는 발전되지 않는다. 많은 신학자들이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위해 저술을 하는 등 많은 노력을 하지만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영성 생활이 이 세상 안에서의 평범한 삶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진리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보통 시민의 생활 방식에 대해 언급하고, 노동자들의 삶을 이러한 범주에 포함시키기는 했어도 이 세상은 영성 생활의 중심에서 배제되었던 것이다. 

 

현대. 19세기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인간 생활의 구조에 몇 가지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노동 자체의 구조가 변화되고, 노동 분야에서 과학적, 기술적 진보가 이루어지면서 노동은 인간 실존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이러한 변화에 상응하여 신학자들도 노동을 포함한 이 세상의 일들에 대해 진지한 태도 변화를 보이게 된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영성을 위한 다양한 운동들은 그들의 요구와 관련하여 신학자들로 하여금 평신도들의 생활 안에서 노동이 가지는 참된 의미를 더욱 진지하게 탐구하도록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곧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평범한 것들 그리고 매일의 노동을 통해서 성화될 수 있고 또 성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신학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쉐뉘(M.-D. Chenu)는 인간 노동을 하느님의 창조 활동에 인간이 참여하는 것이라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즉 인간은 자신의 탐구, 이성, 힘 그리고 자연과 인간 자신이 이룩한 업적 등을 통해 이 세상을 다스림으로써 스스로를 충족시키는 데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피조물들을 다스리도록 인간에게 통치권을 위임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쉐뉘는 노동이란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전제 아래 인간 자신의 고유한 활동, 본래적인 조건이 되며, 인간 존재 자체를 구체화시키는 도구가 된다고 설명한다. 곧 노동을 통해서 인간은 세상을 자신의 집으로 만들며, 세상과 조화하면서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 노동을 이렇게 이해할 때, 우리는 인간의 노동이 인간 자신을 발전시키고, 하느님의 창조활동을 완성시키는 도구가 된다는 노동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된다. 

 

하느님의 창조활동에 참여하는 것, 그리고 인간 인격의 완성으로 이해되는 노동은 "인간에게 유익한 세상을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그럼으로써 자연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며,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 자신이 될 수 있는 자유와 지배권을 부여한다". 

 

이러한 노동관은 창조와 육화의 신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곧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며, 사물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주인으로 묘사하고 있는 창세기의 내용이 그 기초가 된다. 여기서 노동은 일차적으로 어떤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손과 정신의 노동으로 정의된다. 그러므로 쉐뉘는 노동을 이렇게 정의한다: "노동이란 무엇보다도 어떤 생산물을 만드는 일인데, 이 노동을 통해 노동자는 자기 자신을 한 사람의 인간으로 완성시켜 나간다. 즉 어떤 생산품을 창출하고 그 생산품이 인간에게 도움을 주고, 그리고 그 생산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어서 규정이나 법을 준수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인간이 자신의 노동을 통해 자연을 명령하고 새로운 세상을 건설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손과 정신의 노동을 통해 인간은 이 세상과 조화를 이루며, 이 세상을 자신의 가정으로 만들어간다. 인간은 노동함으로써 스스로를 충만케 만들어갈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적 활동에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인간 노동은 분명히 창조적이며 생산적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창조 신학을 바탕으로 하는 노동관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현대의 과학-기술의 거대한 진보로 인해 야기되는 인간 노동의 잠재적인 비인간화의 측면이다. 인간 노동의 생산적인 측면이 다분히 우상 숭배의 가능성까지도 내포하고 있음이 간과되고 있는 것이다. 현시대의 노동 현장은 다양화되고 세분화되어 있으며 그런 가운데 인간은 스스로를 창조주의 위치로 끌어올림으로써 인간에 대한 봉사로서의 노동의 의미가 퇴색되어가는 시기로 접어든 것이다. 

 

 

2. 가톨릭 사회교리의 노동 이해 

 

교황 레오 13세부터 바오로 6세까지의 사회교리에 나타나는 노동의 의미는 무엇보다도 인간 존엄성을 기초로 하고 있다. 곧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1) 인격의 발전과 완성을 이루어나가며 2)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 세계를 지배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참여하고 3) 인간 자신의 필요에 대해 준비하며 4) 하느님과 이웃에게 봉사하며 5) 하느님의 영광과 주님의 다시오심을 준비하며 6) 죄를 보속하는 수단으로 삼는다는 것이 노동에 대한 사회교리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교황들은 과학-기술의 발전 그리고 과학-기술주의적 사고방식의 팽배로 말미암아 인간 존엄성을 해치고, 노동을 맹신하는 등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음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인간 노동(물론 육체 노동을 포함한다)에 관한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으로서의 노동과 노동자의 인간으로서의 품위이며, 그러한 관심은 노동자의 권리, 특별히 노동자 자신과 그 가족들의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임금을 보장하고, 개별 국가 뿐만 아니라 전체 인류의 공동선을 위한 사랑을 모두에게 가르치고, 이 세상의 모든 물질적 재화는 모든 사람들, 특히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정의에 입각하여 분배되어야 한다는 점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가르침은 그 이전까지의 교황들이 노동의 의미와 그 신학적 반성에 대한 발전과 풍성한 종합을 보여주고 있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은 노동의 창조-구원적 및 종말론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노동은... 직접 인격에서 나오는 것이며 인격은 자연물에 자기 모습을 새기며 자연물을 자기 뜻에 굴복시킨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자기 노동을 통하여 자신과 가족들의 생계를 유지하고, 형제들과 결합되고, 형제들에게 봉사하며 또한 노동을 통하여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창조 사업을 완성하기 위하여 협조한다. 그뿐 아니라 노동을 하느님께 바침으로써 인간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에 참여한다". 이처럼 {사목헌장}은 명백하게 하느님의 창조 사업과 구속 사업에의 참여로서의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사목헌장}은 "인간의 존엄성과 형제적 친교와 자유와 같은 인간의 본성과 노력으로 얻어진 훌륭한 결실을 전부 다 주님의 성령 안에서 주님의 계명에 따라 지상에 전파한 후에, 모든 때를 씻어 버리고 광채 찬란하게 변모된 그것들을 다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언급하면서 노동의 종말론적 의미에 대해서도 강조한다. 

 

또한 공의회는 평신도들은 그들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라는 특성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을 이 세상 안에서 계속 수행해 나가야 한다는 그들만의 특수하고도 고유한 역할에 대해 초점을 맞춤으로써 인간 노동은 성화될 수 있고 또 성화되어야만 하는 하나의 현실일 뿐만 아니라 바로 이 노동을 통해서 인간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거룩함 안에서 성장되어야 한다는 점을 명백히 지적하고 있다. {교의헌장}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주께서는 당신 왕국을 또한 평신도들을 통해서도 확장시키고자 하신다... 그러므로 평신도들은 피조물 전체의 깊은 본질과 그 가치와 하느님의 찬미를 위한 그 목적을 인정하고 세속 활동을 통해서도 보다 성스러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서로 도와 주어야 한다. 그로써 세상은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젖을 것이며 정의와 사랑과 평화를 누리며 스스로의 목적을 보다 효과적으로 성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창조주의 섭리와 그 말씀의 비추심을 따라, 인간의 노동과 기술과 문명으로써,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지상 재화를 개발하여 보다 적절하게 모든 사람에게 분배하며, 인간적이며 그리스도교적인 자유에 있어서 그들 나름으로 전체적 진보를 도모하기 위하여 평신도들은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아 내적으로 승격된 세속 지식과 활동으로 효과적인 기여를 해야 할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노동하는 인간}에서 노동에 대한 선임 교황들의 가르침을 계승하면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언급하고 있는 노동과 관련된 많은 주제들을 발전시키고 심화시킨다. 교황은 노동의 결과들 곧 생산물로서 대변되는 노동의 객관적 의미와 인간의 인간성을 구현시키고 그 인간성 때문에 인간에게만 고유한 인격체로서의 소명을 완수하는 활동으로서의 주관적 의미를 구분하면서 특히 주관적 의미 안에서의 노동의 본질적 가치를 강조한다. 곧 육체 노동까지를 포함하는 인간 노동은 천부적인 존엄성을 지니는데 그 이유는 "노동의 가치를 부여하는 일차적인 근거는 인간 자신이며... 노동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이 노동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다.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있어서 노동이 중요하다는 의미는 그것이 인간에게 유용하다는 의미 뿐만 아니라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자연을 변화시키며, 보다 중요하게는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표현할 수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노동하는 인간}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노동의 영성'에 대해 강조한다. 이 부분에서 교황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노동의 창조론적, 구원론적 및 종말론적 의미에 대해 관심을 집중시키며, 노동의 충만한 의미에 대한 이해는 오직 십자가의 빛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교황은 노동이 때때로 고통스럽고 부담스러운 것이라는 것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노동의 수고로움을 견디어 냄으로써 인간은 인류 구원을 위해 하느님의 아들과 협력하게 된다"고 언급함으로써 노동의 구원론적 의미를 강조한다. 또한 교황은 회칙의 마지막 부분에서 인간 노동을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봄으로서 노동의 종말론적 의미를 강조한다. 곧 회칙은 인간과 세계가 노동의 수고를 통하여 새 하늘과 새 땅에 명백하게 참여할 수 있음을 단언한다: "새로운 선(善)은 노동의 깊은 의미와 그 모든 국면 안에서 이해되고 노동을 떠나서는 결코 이해될 수 없는 노동에서 솟아나온다". 

 

 

3. 소명으로서의 인간 노동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인간의 노동은 하나의 소명이라고 단언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인간 노동이 소명으로서 지향하고 있는 몇 가지 중요한 측면들을 살펴 보도록 한다. 

 

3.1. 노동과 세상 건설 

 

여기서는 창조가 주제의 중심이며 그 출발점은 창세기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에 도덕적 가치와 존엄성을 지니며, 세상 만물 중에서 전적으로 특별한 존재이다. 인간은 진리를 인식할 수 있고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자신의 삶을 결정해 나갈 수 있는 근본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 뿐만 아니라 세상 전체를 돌보는 사명을 위탁하셨기 때문에 인간은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참여하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 지성과 관련되는 네 가지 질서들을 구별한다. 즉 1) 발견할 수는 있지만 고안해 낼 수 없는 질서: 자연과학과 사변 철학에 의해 탐구된 자연질서 2) 인간 지성이 자신의 행위들과 그 결과들에 부여하는 질서: 논리학과 수학의 질서 3) 인간의 선택과 행동에 부여하는 질서: 도덕성과 윤리학의 질서 4) 인간의 계획을 통해 발생하는 질서: 인간 노동과 관련되는 문화 질서이다. 노동을 통해 인간은 이러한 질서를 자신의 삶에 부여하고 이를 통해 이 세상과의 조화에 기여하는 것이다. 사실 노동의 세계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온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은 자연 법칙의 발견과, 인간의 노력으로 세계를 건설하고자 하는 데에서 이러한 법칙들과 협력하여 노동 세계를 체계적으로 조직화함으로써 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노동자로서의 인간은 자기 자신이 전적으로 창조자가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들은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피조물이다. 창조된 세계가 그들에게 맡겨졌고 따라서 인간은 그 세계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는 것이다. 이런 인식에 대한 망각이 오늘날 세계가 안고 있는 환경 오염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세상을 건설하고 이를 통해 하느님의 창조적이고 섭리적인 계획에 참여하는 사명을 올바로 이행하기 위해 인간은 자신의 노동을, 창조된 모든 것에 대한 하느님의 주권을 존중하고 창조된 것들의 본래적 목적을 존중함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행위로 이해해야 한다. 

 

3.2. 노동과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의 참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공통으로 맡겨진 사명은 성스러움과 완전함에로 불리움을 받은 자로서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육체와 생활로써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 세상 구원의 부족함을 채움으로써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참여한다. 또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가르치고 있듯이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구원하기 위한 역할로서의 유일하고도 개별적인 소명을 가진다. 

 

평신도들은 특별히 그들의 세속적인 특성으로 인해 이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를 따른다. 결과적으로 평신도들은 자신들의 특수한 소명으로 인해 "현세적 일에 종사하며 하느님의 뜻대로 관심함으로써 천국을 찾도록 불린 것이다. 그들은 세속에 살고 있다. 세속의 온갖 직무와 일, 가정과 사회의 일상 생활 조건들로써 그들의 존재 자체가 짜여진 것처럼 그 속에 살고 있다. 그 속에서 그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복음의 정신으로 스스로의 임무를 수행하며 마치 누룩과도 같이 내부로부터 세계 성화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평신도들의 이러한 공동 소명은 남녀 평신도들이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봉사를 통해서 그들 자신의 특별한 선물들을 개발함으로써 자신들만의 구체적이고도 개별적인 사명을 찾아낼 수 있을 때에야 충만하게 수행될 수 있을 것이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이같은 언급은 그리스도인의 내적 및 영적 생활은 노동자로서의 자신의 직업 생활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매일의 노동은 그 사람의 전체적인 생활 안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그럼으로써 일상의 노동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위대한 진리와 조화를 이룰 뿐만 아니라 노동자 자신은 그러한 진리에 의해 참된 인격을 형성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3.3. 노동과 종말론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미 우리 안에 와 있는 하느님 나라 및 그 통치와 종말에 실현될 하느님 나라의 충만함 사이에는 실제적인 연속성이 있다고 가르친다. 인간 노동을 올바로 이해한다면 노동이란 돈을 벌기 위해 잔디를 깎는 것과 같이 그 성격상으로 단순한 수단이나 도구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인간 노동은 그 자체로 지금 이순간 변화되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계속될 인간 실존의 귀중한 선(善)이며 열매를 위한 뜻깊은 참여인 것이다. 올바르게 이해된 인간 행위는 파스카 신비 안에서 완성된다. 그러므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과 형제적 친교와 자유와 같은 인간의 본성과 노력으로 얻어진 훌륭한 결실을 전부 다 주님의 성령 안에서 주님의 계명을 따라 널리 지상에 전파한 후에, 모든 때를 씻어 버리고 광채 찬란하게 변모된 그것들을 다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당신 성부께 공번되고 영원한 나라를 돌려 드릴 때이다. 이 나라는 진리와 생명의 나라요,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요,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일 것이다. 이 나라는 이미 현세에 신비롭게 현존하고 있으나 주님이 오실 때에 완성될 것이다". 곧 종말에 나타날 변화는 또 다른 어떤 세계가 아니라 인간의 노동과 노력에 의해 형성되는 세계, 곧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인 것이다. 

 

3.4. 노동과 수고 

 

비록 노동을 일차적으로 죄에 대한 보속으로 보는 것이 잘못이긴 하지만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인간은 죄인이며, 그래서 인간 노동, 특별히 육체 노동은 보속의 의미를 포함한다. 이 세상에서의 노동은 사실 수고와 땀, 고통과 어려움을 부과한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은 십자가를 내포한다는 것, 그래서 우리들 각자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참여하는 데 있어서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도록 불리움을 받았다. 인간 노동이 바로 이러한 십자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도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육체를 취하고, 그 육체가 고통을 받으심으로써 인간을 구원 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노동이 인간에게 어울리는 것이며, 노동을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을 건설하고 종말을 준비하게 된다. 우리의 시대를 포함해서 인류의 전 역사는 육체 노동을 본질적으로 천한 것, 노예적인 것으로 여긴 이유 중의 하나는 육체를 그다지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육체는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고, 따라서 인간의 성사(聖事)가 된다고 믿는다. 인간 노동은 죄의 결과로 해서 종종 고통스러운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행위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존엄성을 가지고 충만한 가치를 지닌 것이다. 노동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봉사할 수 있고 또 봉사한다. 육체 노동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통에 동참하며, 그분이 성취하신 구원과 당신의 협조자로서의 우리 인간을 완성에로 이끄시려는 그리스도의 뜻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 노동의 현실적 차원으로서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4. 가톨릭 사회교리에 나타난 노동자의 권리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 노동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 보았다. 가톨릭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르쳐온 인간 노동의 속죄적 의미에서부터 종말론적 희망의 실현이라는 측면까지 시대적 흐름에 따라 인간 노동의 이해를 시도해 보았는데 이러한 이해는 이미 우리가 언급한대로 무엇보다도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정의의 실현을 기초로 한다. 우리가 이해하는 한에서의 노동이란 인간으로서의 완성을 지향하고 있고, 따라서 궁극적으로 인간 완성을 지향하는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노동이란 자신의 삶에 있어서 본성적인 활동이면서 가장 기본적인 권리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톨릭 교회의 지난 100여년간 인간 노동의 주제는 인간 실존이 개인및 사회적으로 어떻게 표현되어 왔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지면서 노동자들의 인간적 품위를 저해해 온 당시 현실에 대한 실존적 상황에 대처하는 가운데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과 관련된 교황들의 가르침은 이론과 현실 사이를 왕래하면서 적절한 적용과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하였으며, 또한 그 시대가 안고 있는 노동 세계에서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해 주기도 하였다. 

 

교황들이 의도하였던 것은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재무장된 보다 인간다운 노동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사회-경제적 및 정치적 활동들이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참된 인간 사회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노동에 대한 가르침은 자연스럽게 노동자의 권리로 귀결되어 나타난다. 레오 13세의 {새로운 사태}에서부터 요한 바오로 2세의 {노동하는 인간}에 이르기까지의 노동에 관한 사회교리의 전체 흐름 역시 노동자의 권리와 맞물려 당시 사회가 안고 있는 특수한 상황에 교회가 관심을 가지고 대응했던 것이고, 그 내용은 처음에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투쟁과 같은 노동 문제로 시작되어 가정과의 관계, 기업의 윤리적 문제, 그리고 국내의 문제에서부터 국제적 차원으로 까지 발전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레오 13세의 {새로운 사태}에서부터 요한 바오로 2세의 {노동하는 인간}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교회의 사회교리를 통해서 언급되고 있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개괄적으로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인간 존엄성이 존중받을 권리 ({새로운 사태} 14항) 

2) 생활의 고유한 지위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 ({새로운 사태} 9항) 

3) 계획성있는 공동선에 관한 권리 ({새로운 사태} 9항) 

4) 사유재산의 권리 ({새로운 사태} 3-8항, 28항: {지상의 평화} 21항) 

6) 휴식 및 여가의 권리, 성별, 나이, 직업의 차이를 인정받을 권리 ({새로운 사태} 30-31항: {노동하는 인간} 19항: {사목헌장} 67항) 

7) 노동의 권리, 곧 시민 사회(정부나 국가)가 시민들에게 생계유지에 필요한 것을 마련할 수 있는 권리를 위한 직업을 찾아줌으로써 도와주어야 한다. ({새로운 사태} 18항: {지상의 평화} 8항: {사목헌장} 67항) 

8) 노동의 인간적 조건에 관한 권리 ({새로운 사태} 31항) 

9) 여성과 연소자를 보호할 권리 ({새로운 사태} 31항) 

10) 정당한 임금을 위한 권리 ({새로운 사태} 32항: 사십주년 30-34항: {노동하는 인간} 19항) 

11) 최후 수단으로서의 파업의 권리. 파업에 참여했다고해서 어떠한 개인적인 처벌이나 규제를 받아서는 안된다 ({새로운 사태} 56항: {사목헌장} 68항: {노동하는 인간} 20항) 

12) 저축의 권리 ({새로운 사태} 33항) 

13) 이주와 이민의 자유에 관한 권리 ({새로운 사태} 33항: {지상의 평화} 25항) 

14) 동등한 법적 보호를 받을 권리 ({새로운 사태} 33항) 

15)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생활과 건강을 보장하기 위해 다양한 사회보장을 받을 권리 ({새로운 사태} 34, 40항: {노동하는 인간} 19항) 

16) 집회와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를 보장받을 권리 ({새로운 사태} 34-35, 40항: {지상의 평화} 23항: {사목헌장} 67항: {노동하는 인간} 20항) 

17) 다양한 사상 하에서 자율적인 노동조합 운동을 보장받을 권리 ({노동하는 인간} 39항) 

18) 계급투쟁 밖에서의 협동의 권리 ({새로운 사태} 14, 18-19항) 

19) 실업자와 그 가족들의 생계 유지의 권리 ({노동하는 인간} 18항) 

20) 개인이나 자유 집단, 지역의 노동 단체나 산업 단지의 자율성이 보장되는 차원에서 공권력의 정의롭고도 합리적인 조정에 의해 실업의 위험에 대처할 수 있는 권리 ({노동하는 인간} 18항) 

21) 연금의 권리와 노후 대책 그리고 산업 재해 보험에 대한 권리 ({노동하는 인간} 19항) 

22) 건강과 미풍 양속을 해치지 않고 노동자의 전인적 발전을 해치지 않는 노동 조건을 가질 권리 ({지상의 평화} 18항) 

23) 책임을 질 수 있을 만큼의 경제적 활동을 전개하는 권리 ({지상의 평화} 20항) 

24) 기업 운영과 경제 조직 전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 ({지상의 평화} 91, 97항: {사목헌장} 68항) 

25) 노동을 통하여 자신의 인격과 능력을 발전시켜 나갈 권리 ({사목헌장} 67항) 

26) 정치 참여의 권리 ({지상의 평화} 26-27항) 

27) 노동자의 신체적 건강이나 정신적 건강에 손상을 끼치지 않는 노동 환경과 작업 과정에 대한 권리 ({노동하는 인간} 19항) 

28) 기업의 상황과 국내외적 공동선을 고려해서 노동자와 그 가족들에게 물질적, 사회적, 문화적, 정신적 생활을 품위있게 영위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노동 보상의 권리 ({새로운 사태} 32항: {어머니요 스승}, 78-79항: {사목헌장} 68항: {노동하는 인간} 19항) 

29) 어떠한 불의나 폭력으로도 박탈될 수 없는 종교 자유에 관한 권리 ({지상의 평화} 14항) 

30) 주어진 정치 공동체의 발전 정도에 따라 적절한 기초 교육을 받고, 전문적인 기술을 습득할 권리 ({지상의 평화} 13항) 

31) 가정을 희생시키지 않고 노동할 수 있는 권리 ({노동하는 인간} 19항) 

32) 사회에서 모든이의 평등이라는 명분으로 시민의 창의적 정신을 위축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경제적 창의의 권리 ({사회적 관심} 15항) 

33) 자연환경을 오염시키지 않고 보호할 권리 ({사회적 관심} 29항)

 

[사목연구, 제4집(1996년, 가톨릭대학교 사목연구소), 이동익(가톨릭대학교 교수, 신부, 윤리신학) / 이동익 신부님 홈페이지에서]



362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