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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헌법학과 법철학의 관점에서 본 양심과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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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7 ㅣ No.431

헌법학과 법철학의 관점에서 본 양심과 법

 

 

1

 

'양심'(conscientia, syneidesis)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도덕과 도덕 철학의 중심 개념이다. 그에 비하면 법학에서 양심이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루만(N. Luhmann) 같은 학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세계관적으로 중립성을 표방하고 있는 현대의 법치국가에서 국가적 법이 양심이란 용어의 내용과 개념에 대하여 어떠한 조항도 두고 있지 않은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라, 양심이란 개념 자체가 실정법 조문에서 구성 요건 표지로서 나타날 뿐만 아니라 실제의 법 적용에서 개별적인 법규범의 정당성을 근거 짓기 위하여 널리 논거로서 사용된다는 점이다.

 

법학자들 사이에서도 법과 도덕의 상호 관계를 부정하는 학자들이 있다. 법학에서 보통 법실증주의 학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옐리네크(G. Jellinek)와 같이 '법을 도덕의 최소한'이라 보든, 그와는 정반대로 슈몰러(Schumoller)처럼 '법을 최대한의 도덕'이라 보든, 법은 어떻든 도덕과 관계가 있다. 그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도덕으로부터 법이 진화되어 왔기 때문이며, 사회 일반의 도덕 감정에 배치되는 법은 사실상 사회 생활의 척도로서 기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한에서 도덕과 도덕 철학의 중심 개념인 양심은 법에서도 중요한 기능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 국가의 최고법이자 기본법인 헌법은 두 곳에서 양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헌법 제19조가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하여 양심의 자유를 기본권으로서 보장하고 있는 것이 그 하나이고, 헌법 제103조가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라고 하여 법관의 직무상 독립(물적 독립)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와 관련하여 헌법 제103조는 거의 관련이 없다. 왜냐하면 헌법 제103조의 양심은 법관으로서의 양심, 곧 법의 해석, 재판을 직무로 하는 자의 법조적 양심인 법적 확신을 말하며, 인간적 양심과 법조적 양심이 충돌하는 경우 법관은 법조적 양심을 우선해야 하기 때문이다.

 

 

2

 

1. 앞에서 루만은 현대 법치국가의 세계관적 중립성을 근거로 국가적 법이 양심이란 용어의 내용과 개념에 대하여 어떠한 조항도 두고 있지 않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에서 루만의 이야기는 반절만큼만 옳다고 할 수 있다. 민주국가의 헌법은 세계관에 대해서는 중립적인 태도이다. 달리 말하면 헌법은 특정의 세계관에 봉사하거나 특정의 세계관을 지지하거나 또는 특정의 세계관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그러나 헌법은 가치에 대해서는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지 않다. 헌법은 인간의 존엄이라는 기본적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법이고,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 여러 가지 기본권들을 보장하고 있다. 다른 나라의 헌법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헌법이 양심의 자유를 기본권으로 규정하여 보장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중요한 기본 가치로 생각하고 있는 양심의 자유를 국가 이전의 권리로서 인정하고 그것이 침해되지 않도록 보장하겠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양심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대철학자인 칸트(I. Kant)조차도 저 하늘에 반짝이는 별과 가슴속에서 울려오는 양심의 소리(도덕률)를 신비로 표현하였듯이 양심을 정확하게 개념 정의하기는 어렵다. 그런 만큼 양심에 대한 개념 정의는 수없이 많을 수밖에 없다. 예컨대 하이데거(M. Heidegger)에 따르면 양심은 "죄 상태를 금지하는 환기(喚起)"(또는 호소) (verrufender Aufruf zum Schuldigsein)이며, 이러한 환기(또는 호소)는 '현존재'(Dasein)의 '완전할 수 있는 속성'(eigentliches Ganzseinkonnen)과 관련이 있다. 실존 철학에서처럼 양심을 '나에게서 나와서 나를 통하여 나에게로 가는 부름'으로 이해하는 경우 양심은 신비한 양심의 불꽃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고 그것은 외부와는 절연된 원주(순환) 운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에서 양심의 자유를 언급하고 있는 헌법도 있다. 예컨대 1776년의 펜실베니아주 헌법 제2조는 양심을 '양심의 유일한 주인이며 빛과 영(靈)의 아버지'(Only Lord of Conscience, Father of Lights and Spirits)인 하느님(神)의 속성으로 표현한 바 있다.

 

그러나 법은 나와 너 그리고 제3자, 곧 사회 전체를 규율하는 것이며, 나의 내부에 있는 사항에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양심의 불꽃을 외부와는 절연된 원주(순환) 운동에서 해방시켜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해방을 위한 시도는 17세기에 '영역 이론'(Spharentheorie)으로 나타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이러한 양심의 불꽃이 비행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는 것이며, 그것은 나중에 양심에는 '내부 영역'(forum internum)과 '외부 영역'(forum externum)이 있다는 생각으로 발전한다. 여기에서 비로소 양심은 오늘날의 일반적인 개념 정의, 곧 자기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윤리적으로 판단하는 인간의 능력이라는 의미를 얻게 된다. 이러한 개념 정의에 기초하면서도 그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헌법학에서는 양심을 "인간의 내면에 원래부터 존재하는 옳고 그름에 대한 확신과 이로부터 나오는 의무 부과, 곧 특정의 행동을 하거나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 곧 가치와 비가치에 대한 주관적 의식"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한에서 양심은 윤리적 확신을 필수적 요소로 하면서도 윤리적인 면에 한정될 필요는 없게 된다.

 

2. 양심은 '양심 행위'(Gewissensakt)에서 표현된다. 곧 양심은 실천 이성의 구체적 판단에서 표현된다. 그리고 헌법에서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는 것은 실천 이성의 구체적 판단을 국가적 침해와 사인의 침해로부터 보호한다는 것이다. 헌법학에서는 양심의 자유에 따라 보호되는 부분을 양심의 자유의 내용이라고 한다. 양심의 자유의 보호 법익과 그 핵심은 양심 불가침의 보장에 있으며, 그 보장은 양심의 존재와 양심의 기능을 침해받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전제하에서 양심의 자유는 양심 형성(양심 결정)의 자유, 양심 유지의 자유를 그 내용으로 하며, 양심 유지의 자유는 양심을 언어(침묵의 자유)나 행동(양심 추지의 금지)으로 표명하도록 강제당하지 않을 자유 및 양심에 반하는 행동을 강제당하지 않을 자유를 포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양심 형성의 자유는 개인의 내면에서 행해지는 자유이기 때문에 국가나 국가 아닌 누구라 하더라도 방해해서는 안 되며 따라서 이를 절대적 자유라고 부른다. 그에 반하여 양심 유지의 자유는 사회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속성상 침해될 소지가 있는 자유이다. 이를테면, 형성된 양심을 언어로 외부에 표명되도록 강제되지 아니하는 침묵의 자유나, 그리스도교인인가 아닌가를 판단하기 위하여 십자가 밟기를 강요하는 것을 금하는 양심 추지의 금지는 과거사에서 여러 차례 침해된 바 있다는 것이다. 우리 헌법이 양심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침해가 다시금 행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이들은 비교적 잘 지켜지고 있다.

 

3. (1) 그러나 오늘날 양심의 자유와 관련하여 가장 커다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양심의 자유에 양심 실현의 자유(양심 활동의 적극적 자유)가 포함되고 있는가 여부의 문제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헌법학자들 사이에서 부정설, 긍정설, 절충설 등 견해의 대립이 있다. 부정설은 양심의 자유의 내용을 인간의 내면적 자유에 국한시켜 양심의 결정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을 제외한다. 긍정설은 양심 실현의 자유가 양심의 자유에서 제외된다면 양심의 자유를 헌법상 보장하는 의의가 축소된다는 것을 이유로, 또는 양심의 자유가 내심의 영역만을 보호하려고 한다면 양심의 자유를 꼭 헌법이 규정해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 라는 것을 이유로 널리 양심 실현의 자유를 포함시킨다. 절충설은 양심의 자유에 적극적 행동의 자유까지 포함되는 것은 아니지만 부작위(不作爲)에 따른 양심의 실현은 포함된다고 본다. 이러한 여러 가지 견해 중에서 양심의 자유를 인간의 내면적 자유에 한정함으로써 양심상의 결정을 실현하거나 구체적인 행동을 할 자유를 양심의 자유에서 제외시키는 부정설이 학계에서는 다수설로 되어 있다. 그러나 헌법의 최종적 유권 해석 기관인 헌법재판소는 긍정설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2) 필자는 양심의 자유에는 양심 실현의 자유가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로 간추릴 수 있다. 우선, 우리 헌법은 양심을 실현하는 여러 가지 기본권을 별도로 규정하고 있으며, 이러한 기본권들에 의하여 보호받지 못하는 양심의 표현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양심이라 할 때 주로 양심은 종교적 양심, 예술적 양심, 학문적 양심 등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러한 양심들은 종교의 자유, 예술의 자유, 학문의 자유로 보장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본권들로 보호되지 않는 나머지 양심은 순 주관적 양심일 것이며, 전혀 객관화될 수 없는 것은 법이 보호할 수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다음으로, 양심 실현의 자유를 인정하여 서로 다른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제각기 양심상의 결정을 적극적으로 표명하고 실현하는 경우 다른 법익과 충돌할 수 있고 타인의 권리를 침해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철학이나 신학에서는 완전한 양심, 곧 성숙한 양심과 불완전한 양심, 곧 성숙하지 못한 양심을 구별하기도 하나, 법학에서 이러한 구별을 실제의 사건에 대입하기란 대단히 힘든 일이다). 그러한 일이 극단으로 치닫는 경우 초개인적인 객관적 질서 대신에 우리 헌법의 인간상과 그에 기초한 인격주의에 반하며 우리 헌법이 추구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주관주의(主觀主義)가 원칙으로 되고 유아주의(唯我主義)와 무정부 상태가 나타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양심 실현의 자유는 본래의 취지대로 보장될 수 없을 것이고, 양심의 자유를 빈틈없이 보호하기 위해서 양심 실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과는 반대로 오히려 양심 결정의 자유와 양심 유지의 자유마저도 위태로워질 수 있다.

 

4. 양심의 자유가 어떠한 경우에 어느 정도로 보장되는가 라는 문제와 관련해서도 헌법학에서는 내재적 한계설, 절대적 보장설, 내면적 무한계설 등 세 가지 견해가 대립되고 있다. 내재적 한계설은 양심이 외부에 표명되지 아니하고 내심의 작용으로 머물러 있는 경우에도 일정한 제한이 따른다고 한다. 절대적 보장설은 양심이 내심의 작용으로 머물러 있는 경우는 물론 외부에 표명되는 경우에도 제한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내면적 무한계설은 외부에 표명되면 일정한 제한을 받지만, 내심의 작용으로 머물러 있는 이상 제한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법은 행위의 결과만을 규율할 뿐 내심 작용까지 문제삼지는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한 한에서 내재적 한계설은 따를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양심이 외부에 표명되는 경우에도 전혀 제한을 받지 않는다고 하는 절대적 보장설도 따를 수가 없다. 그 결과는 앞에서 보았듯이 양심 결정의 자유와 양심 유지의 자유마저도 위태롭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학에서는 내면적 무한계설이 다수의 입장이 되어 있다.

 

 

3

 

1. 그러나 내면적 무한계설을 취하여 양심이 내심의 작용으로 머물러 있는 한 그것이 보장된다고 하더라도 양심은 양심 행동으로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에 양심이 내적 행위 영역을 넘어 외부 영역으로 표출되는 경우에는 국가적 간섭이 따를 수밖에 없다. 곧 양심상 병역 거부라든가 그린피스의 활동이라든가 그리고 많은 경우에 수많은 시민 단체의 운동들은 실정법에 따라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실정법 질서에 반하는 양심 또는 체제에 반하는 양심을 '귀찮은 양심' 또는 '부담을 주는 양심'(das lastige Gewissen)으로 표시한다. 이러한 귀찮은 양심은 어떤 시대와 어떤 장소 그리고 어떤 문화를 막론하고 존재하여 왔다. 그 대표적인 예는 소크라테스에게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귀찮은 양심을 제도적으로 보장한 경우도 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의 경우가 그 예에 속한다. 그리고 이러한 귀찮은 양심을 명시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그저 모른 척하고 묵인한 경우도 있다. 정확한 예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옛적에 우리 선조들이 즐겼던 광대 놀이도 그 한 예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라드브루흐(G. Radbruch)는 '양심 규범'(Gewissensnorm)과 '연대적인 집단 규범'(kollektive Gruppennorm)을 혼동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라드브루흐의 경고는 명심할 만하다. 그러나 우리는 (실정)법은 사회 내의 다수의 집단 규범이 제도화된 것이기 때문에 법을 반드시 양심 규범과 동일시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실정법에 반하는 양심 행위 자체가 소우주에 비견되는 '인격'(Person)의 개인 윤리적 결정과 관계 있거나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 생각이 다른 이들에 대한 배려와 관용이 요구되는 이유가 있다.

 

2. 법질서를 포함하여 사회 질서는 양심의 개인적 기능을 침해하지 않고 양심 명령의 결과와 조화를 이루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조화는 과거에는 내부 영역과 외부 영역을 구분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범주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루만의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루만은 양심이 외부로 표현되는 결과 생겨나는 장애를 줄이는 일이 - 기능상 체제 내에서 감독하는 것으로 이해된 양심의 자유를 근거로 대안(代案)을 만들어 냄으로써, 행위 형식을 제도화함으로써 그리고 '양심의 자유'(Gewissenfreiheit)가 아닌 '양심의 자유'(Freiheit des Gewissens)로 불리는 기본권을 보장함으로써 - 가능하여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루만은 이를 정체성 확보로서의 양심, 양심의 전제로서의 자살 가능성, '양심의 자유'(Gewissenfreiheit) 대 '양심의 자유'(Freiheit des Gewissens)라는 세 가지 하위 명제를 주장한다. 이 세 가지 하위 명제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양심은 정체성(正體性)을 보장하는 기능을 하며 그럼으로써 통제 심급(統制審級)이다. 통제 심급은 자아(自我)가 (개인적) 인격의 경계를 넘지 않도록 감시하여야 한다. 인간은 스스로를 객관화할 수 있고, 자신의 행위 내에서 타인과 교류하기 때문에, 이러한 통제 기능은 가능하다. 그와 함께 양심의 기능에만 한정되지 않는 인격의 기능은 자아의 무수한 잠재성을 응집력 있는 개인적 자기 표현으로 환원함으로써 구체화된다.

 

다음으로, 루만에 따르면 양심과 양심의 자유는 자신을 죽일 수 있는 개인만이 소유할 수 있다. 사람들은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 자유롭게 되며, 사람들은 양심에 반하는 행위를 피하기 위하여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 인간의 자살 잠재성 또는 존재에서 비존재로의 이행 가능성이 자신의 환경과는 무관하게 인간을 비로소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다.

 

끝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양심의 자유'(Freiheit des Gewissens)이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양심의 자유'(Gewissensfreiheit)가 아니다. 이렇게 이해된 양심의 자유는 가치의 차원과 명령에 대한 복종 또는 불복종의 차원을 뛰어넘는 최후의 수단이다. 인간 스스로가 조종하는 체제의 경계는 하이데거의 실존 철학적 의미에서 존재자의 '비유'(非有, 죽음, Nichtsein)에 대한 경계와 같다.

 

그러므로 양심의 자유는 전체 질서의 기능적 안정화에 장애가 된다. 양심의 자유를 행동으로 옮긴 결과는 역할 연관에 장애를 일으키거나 역할 연관을 훼손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루만은 여기에서 '신뢰할 수 없는 전우(戰友)'의 예를 언급한다. 곧 전체 체제 내에서 개별적 역할의 합리성은 다른 특별한 역할 연관에서 분리되어, 그 결과 개별적 기여(寄與)가 역할 계속에서 대체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통하여 전체 질서는 기능적으로 안정화될 수 있다고 한다. 쉽게 표현하면, 전체 역할을 해치는 개인은 배제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3. 이러한 세 가지 하위 명제 중 마지막 두 가지는 처음부터 문제가 있다. 우선, 두 번째 명제에서 루만이 양심의 전제로서 그리고 양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의 전제로서 자살 가능성을 들고 있는 것은 '죽음으로 가는 존재'(Sein zum Tode)로서의 존재에 대한 하이데거의 입장을 잘못 해석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하이데거에 있어서도 양심은 '완전할 수 있는 속성'(eigentliches Ganzseinkonnen)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양심 현상은 이러한 '완전할 수 있는 가능성'(Ganzseinkonnen)을 실현하기 위한 행위 대안에 대한 인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한층 적절할 것이다.

 

다음으로, 세 번째 명제에서 루만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말장난이 아니다. 루만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종교적 양심의 자유가 아닌 윤리적 양심의 자유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보았듯이 오늘날 양심의 자유가 윤리적 양심의 자유를 뜻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기 때문에 용어를 바꾸는 것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루만이 주장하는 명제 중 그나마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첫 번째 명제 하나뿐이다. 오늘날처럼 복잡한 사회에서 정체성을 담보하기 위하여 행위 대안(行爲代案)이 필요하다는 것은 정확한 인식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행위 대안은 한정적으로만 가능하다는 한계가 있다. 곧 행위 대안은 예컨대 국가가 병역 의무를 강제하는 경우 대체 복무를 주장하는 경우에는 가능하다. 그러나 공무원이 양심상의 이유로 근무 시간에 근무를 이탈하여 파업에 참가한 경우와 같이 자유로운 행위가 금지 규범과 관련되는 경우에는 불가능하다. 또한 행위 대안은 무제한적으로 보장될 수 없다는 한계도 가지고 있다. 예컨대 병역 의무 대신 대체 복무를 할 수는 있겠지만 대체 복무까지 거부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대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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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문제된 장소에서 더 이상 손상되지 않는 바윗돌을 가지고 집을 짓는다. 그에 반하여 철학은 방을 치우면서 가끔 물건을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과정의 본질은 혼란에서 시작하여 안개가 사라질 때까지 어둠 속에서 더듬는 것이다"(L. Wittgenstein).

 

법과 양심 또는 실정법에 반하는 양심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하여 많은 학자들이 노력해 왔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안개는 사라지지 않은 듯하다. 이 문제에 대한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더 많이 노력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새 집이 지어지기도 전에 살고 있는 집을 태워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이미 세워진 집의 기둥까지도 완전한 집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도 안 된다. 이미 제시된 해결책은 그것이 해결책임이 입증되고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되는 한 수용하여야 한다. 지금까지 제시된 해결책만 가지고도 실정법과 양심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은 많은 부분에서 조화롭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사목, 2003년 3월호, 홍성방(서강대학교 교수, 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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