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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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선거도 복음의 실천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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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7 ㅣ No.427

선거도 복음의 실천 행위다

 

 

"이 음식이 어디에서 왔는고?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

 

밥상 앞에서 수저를 들기 전에 한 그릇의 밥과 음식이 되어 오기까지 수고한 농부의 땀과 눈물을 생각함은 밥 먹는 자의 당연한 의무다. 그것을 모르고서야 '식사 전 기도'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사제로 살아가면서 밥상을 대할 때, 본당 직원들의 급료와 시설 비용을 지불할 때, 차량에 기름을 넣을 때, 종종 "이 돈은 어떤 수고와 노동을 통해 얻어졌을까?"를 습관처럼 관조한다. 교회 운영에 쓰이는 모든 재정은 신자들이 선한 마음으로 봉헌한 헌금과 예물들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그만두고 싶은 자존심을 죽이고 분노를 삭이면서 일할 것이고 또 아침이면 가족들을 생각하며 고단한 몸을 일으켜 출근하는 가장의 노동과 수고를 관조한다. 설거지도 미룬 채 거울 앞에 앉아 급하게 화장을 하고 나서는 맞벌이 아내들의 얼굴도 생각한다.

 

세상 속에 살아가는 신자들의 번뇌와 고난, 기쁨과 보람, 슬픔과 좌절, 그 모든 역사에서 흘러내리는 피와 땀방울을 감로수처럼 받아먹으며 교회가 건축되고 운영된다. 그러므로 신자들의 세속 생활을 지배하는 모든 사회적 현실에 대하여 교회의 눈은 당연히 빛나고 있어야 할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영성을 말할 자격이 없을 것이다. 삶을 지배하는 가장 큰 현실은 무엇일까? 아마도 시장의 경기(景氣)와 문화, 그리고 그것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치가 아닐까? 투표율 저조를 보면서 정치적 무관심의 시대라고도 말하지만, 누가 대통령직을 맡느냐에 따라서 국민의 삶과 국가 미래의 상당 부분, 어쩌면 결정적인 부분을 지배하는 관건이 되는 것임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니 사목자로서 비록 즐거운 주제는 못 되지만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된다.

 

 

선거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철새들이 도시의 거리를 가르며 헤매는 것만 보아도 대선이 다가왔음을 알려 준다. 정치 철새들이 이합집산하고 급조된 정당과 후보의 깃발이 나부끼는 현상들은 우리에게 이미 낯익은 대선 정국의 표정들이기 때문이다. 대권 후보들의 텔레비전 출연과 후보 지지도 여론 조사가 발표되고 술자리 안주감이 되는 것에서 선거일이 부쩍 가까워졌음을 느낀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요, 국민들의 축제" 라고 말한다. 민주주의와 선거는 떼어 놓을 수 없는 짝이라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실상 대통령에서 국회 의원, 시장, 군수, 지방 의회 의원에 이르기까지 선거를 보면 민주주의를 백성이 주인인 제도라고 확신적으로 볼 이유가 없다. 대의 민주주의를 하는 현대 시민 국가에서 선거는 형식과 겉치레일 뿐 과거의 군주나 지방 제후들에게 합법적인 권력을 안겨 주는 일 이상은 아닌 것이다. 이 반골적인 통찰의 이유는 무엇인가.

 

국민에게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다. 누구든지 출마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정말 누구나 출마하고 선출되는 일을 본 적이 있는가? 가난한 사람, 못 배운 사람, 사회적 하층민들이 국회 의원 되고 대통령에 선출된 적이 있는가 말이다. 없다. 결국 분명한 것은 유명한 사람, 돈 많은 사람, 사회에서 그 이름을 알 만한 사람들, 곧 시민 사회의 엘리트나 상류층 중에서, 옛날로 말하자면 귀족 양반이나 지배 계층 중에서 출마하고 당선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백성이 주인이 되는 제도가 아니라 신하가 군주를 뽑고 백성이 지배 귀족을 선발하는 것으로, 세습 제도가 선출 제도로 바뀐 것일 뿐이라는 말이다.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들이 정치적 무력감을 느끼는 원인이 바로 그런 이유라고 '더글러스 러미스'라는 재일 미국인 정치학자는 말하고 있다(좀더 자세한 내용은 [녹색평론] 66호 "무력감을 느끼면 민주주의는 아니다"를 읽어 보면 좋겠다). 문제는 시민의 무력감과는 무관하게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선출된 대통령의 권력 행사와 영향력은 국민 개인의 삶과 국가의 미래 운명까지 구체적이고 세부적으로 미친다는 점이다. 대통령의 정책과 결정권에 따라서 내 자식들이 합법적인 전쟁터에 동원될 수도 있는가 하면 평화 공존 분위기 속에서 이산 가족이 상봉할 수도 있으며, 안정된 직장과 풍요로운 호황을 누릴 수도 있고, IMF 노숙자로 살아갈 수도 있다는 말이다. 교회가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 발전시키기 위해서 수백 번 노력해도 이루지 못한 일을 대통령의 의지와 권한 한 번만으로도 이룰 수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래서 비록 '민주주의 어쩌고 ......' 하는 거창한 슬로건이 아니라도 대통령을 선출하는 일은 삶의 중요한 부분을 결정하는 일이다. 민주주의란 결코 백성이 주인이 될 수 있는 제도가 아니며, 대선이란 결국 귀족 재벌 가운데 임기직 국왕(군주)을 뽑는 형식일 뿐이라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에 수긍할지라도 그 선택권이 나에게 주어진 이상 좀 더 좋은 군주를 뽑을 이유가 되고 그래서 선거는 참으로 중요한 참정권의 행사이다.

 

 

그래도 선거는 중요하다

 

교회는 진리를 추구한다. 진리는 고독한 소수(少數)일지라도 진리이다. 그래서 진리란 다수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선거의 결과가 절대 진리의 문제는 아니라는 말이다. 선거는 다수결 방식으로 좀 더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는 사람을 선임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중요한 직책일수록 더 많은 지지가 필요할 것이다. 많은 국가가 대통령 선거를 결선 투표까지 끌고 가서 더욱더 확실한 합법성을 마련하는 선출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대통령 책임제의 헌법으로 대통령에게 막강한 권한(대권?)을 위임하는 우리나라의 대선(大選)이 결선 투표 없이 40% 남짓한 지지로 선출되는 것은 개선의 여지를 가진다고 지적할 수 있다.

 

다수결이 반드시 진리가 아니라고 말한 이유는 사목자가 신자들에게 참정권의 행사를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좀 더 나아가서 이런 후보를 지지하자고 그 이유를 말할 때, 그것은 상대적인 평가를 전제하는 것이지 그 후보를 선출하면 절대 확실하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후보자가 선출된 이후, 그 자신의 변신이나 배신까지 책임져야 하는 문제는 아니다. 물론 선택에서 밀려난 후보의 평가 역시 그렇다. 다만 현재 관찰된 객관성을 말하는 것뿐임을 전제하는 것이다. 또한 공명정대한 선거가 이루어지도록 감시하고 참정권을 행사하자는 말 역시 다수결이 비록 진리는 아닐지라도 올바른 다수(多數) 의사(意思)가 제대로 반영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냥 다수 의사'가 아니라 '올바른 다수 의사' 말이다.

 

우리나라는 해방 후 자유당 이승만 정부를 비롯하여 오랜 동안 폭압적이고 권위적인 독재 정권의 지배를 받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권력 확보의 조건인 선거라는 절차를 매우 싫어했고, 그래서 온갖 방법으로 부정한 선거를 주도했으며 심지어는 체육관 선거에서 99%의 찬성으로 당선되었다고 합법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래서 '선거' 하면 '공직자의 압력', '고무신', '무더기표', '대리 투표'를 연상시키던 시대도 있었다. 관권·금권을 동원한 부정 선거, 선거 부정은 민주주의가 겉치레 형식이라는 정치 비평가의 지적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민주주의 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불공정 선거 운동은 우리 정치 사회의 고질적인 질환이었다.

 

 

변절의 시대를 성찰하며

 

그럼에도 선거의 경험이 쌓여가고 경제적으로 먹고 살만해지고 사회 민주화가 성장함에 따라 공정 선거를 위한 법제들이 마련되고 참정 주권도 강화되어 가고 있다. 선거 공영제로 국회 원내 다수당에만도 900억에 이르는 정치 자금을 세금으로 지출하고 있다. 선거법도 강화되고 감시 고발 매체와 운동이 다양화되니 금권, 관권 선거가 위력을 잃어 가는 좋은 징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또 다른 악령이 나타났다. 이른바 지역 감정과 북풍이었다. 지역 감정이라는 악령에 따라 국민들은 3당 합당을 합리화시켜 주고 변절 부도덕 철새 정치인을 여전히 당선시켜 주고 마침내 오늘과 같은 추악하고 천박한 정치 문화를 잉태하게 한 것이다. 금권, 관권 선거가 유권자의 올바른 투표 행사를 가로막는 것이었다면, 지역 감정과 '북풍' 선거는 일종의 이념성 협박의 악성 선동으로 유권자의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키는 것으로서 공정한 선거가 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시대적 의미를 갖게 되는데 선거 부정의 책임이 권력자와 후보자에게 있었던 시대에서 이제 유권자 자신에게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는 시대로 변화되었다는 점이다. 곧 '공명선거'의 개념이 이른바 금권·관권 선거라는 외부적 요인에서 유권자 의식의 혼돈이라는 내부적 요인으로 초점이 바뀌고 있음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디지털 영상 시대의 이미지와 감성은 이데올로기와 지역 감정 등 흠집 내고 덧칠하는 타격전들을 검증 없이 유권자의 여론에 시시각각 반영되고 결과를 바꾸어 놓는다.

 

부정한 선택의 시대적 흐름을 살펴보고 있으니 '그렇다면 오늘날의 선거 부정은 무엇이 주도하는가?'의 질문에 대하여 사려 깊은 독자라면 그 해답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언론 권력이다.

 

 

언론, 공정 감시 대상 1호

 

얼마 전 개구리 소년들의 유골이 발견되어 모든 부모들에게 충격과 슬픔을 주었다. 아직도 그 죽음의 원인을 밝혀 내지 못하고 있다. 한 소년의 부모는 "차라리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북한에 살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라도 가지고 살아갈텐데 ......" 하고 넋두리하였다. 웬 느닷없이 북한에 살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인가? 실종 당시 모 신문사가 발행하는 주간지가 소년들은 이미 북한에 납치되었을 것이라며 상상력을 발휘하여 구구절절 납치 심증 기사를 써댔기 때문이다. 이 언론사의 역사적 궤적에 대하여는 재론할 지면이 부족하다. 이 신문의 극우 이념 성향은 편집증 내지는 자폐증 같은 모습으로 민족 대결 공세를 집요하게 주도하며 독자들을 현혹시키며 안보 상업주의를 언론 마케팅의 중심으로 삼고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朝中東'이라 부르는 이른바 국내 메이저 신문들이 대선 주자들에 대하여 어떠한 편파적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다. 밤의 대통령이라 스스로 공언할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된 이후로 자신들을 킹 메이커로 자임하고 있다. 1997년 대선 실패 이후 절치부심하며 '이번만은 ......!' 하는 듯한 결의로 대통령 만들기에 혼신의 몸부림을 치고 있음을 충분히 읽어낼 수 있다. 미디어 비평가들뿐 아니라 필자 본인도 그렇게 느끼고 있다. 특정 후보를 지지하고 상처 입히는 노골적인 편파성을 위장하면서 중립적이고 공정한 판관인 양 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미국 유수 언론처럼 언론사의 지지 후보를 밝히는 것이 솔직하고 언론사의 용기라고 생각한다. 과거 관권, 금권 선거의 감시와 고발자였던 언론이 이제 스스로 불공정 선거 운동의 주역이 되었으니 이것이 시대 변화의 징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 도래의 표징으로 치유와 구마(악령 추방)의 기적을 보여 주셨다. 악령이란 보이지 않는 힘이 인간의 의식을 노예처럼 지배하고 조종하는 실체다. 국민들의 의식과 여론을 지배하고 조종하며 지역 감정과 이념의 노예로 삼는 이런 언론 권력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악령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해방 후 최고의 언론 자유를 구가하며 - 자유가 아니라 '언론 방종'이란 표현이 좋겠다 - 유권자의 의식을 호도하는 메이저 신문들은 이번 대선의 공정 감시 대상 제1호로 여겨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유권자 의식을 호도하는 메이저 신문들

 

앞서 필자는 "다수결은 진리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다수가 진리를 담지할 수 있다면 그 다수결은 진리가 되는 것이다. 진리를 많은 사람들이 담지하도록 하는 일과 노력을 교회의 용어로는 '복음화'라 한다.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은 이상 대선 후보 누구라도 상대 비교적 선택일 뿐 그 선택을 옳고 그름을 가리는 문제로 볼 수 없다. 그러나 복음의 이상 세계에 가까운 것을 선택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을 '선택적 진리'라고 말할 수 있을진데 그러한 선택은 복음적 식별로써 검증되는 것이어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 최선의 선택을 말하는 것이다. 편파적이고 대권 창출의 선봉에 선 언론의 왜곡된 정보와 이미지로부터 자유롭고 민족의 공존과 화해, 활력에 찬 생산과 공평 분배, 인류의 공동선을 향한 국가 미래를 위해 필요한 정책들은 복음적 이상 세계의 지향에 더 가까운 것이며 그런 판단이 선택적 진리이다.

 

복음적 판단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관찰할 것인가? 우선 공명선거를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한다 해도 교회가 후보자들을 검증하는 일은 불필요하게 느껴진다. 경험상 대답 못하는 후보 없고, 나쁜 정책을 내놓는 정당 없다. 모두가 장밋빛 향기로 질식할 만큼 화려하고 정책의 차별이 느껴지지 않는데 무엇으로 검증한다는 것인가? 온갖 집단들이 후보 검증을 앞세워 초대하는 것은 그들 단체의 이벤트일 뿐이다. 후보는 득표에 유익한 이익 집단에게도 언제나 시원스럽게 대답하고 반대편에 가서 또한 그렇게 말한다. 무책임한 흥정이다. 한국 사회 정치인의 검증이란 더 이상 후보를 불러다 앉혀 놓고 말로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의 역사를 통해서 평가되는 것이 유일하다.

 

후보에 대한 바른 평가는 지금 어떻게 말하느냐가 아니라 그가 어떤 정치 노선과 행각으로 살아 왔는가의 궤적을 관찰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 우리는 최근 국무총리 서리를 청문회에 세워 호되게 해부하면서 그가 살아 온 윤리 도덕적 삶이 공인으로서 과연 합당한가를 엄격히 재단했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는 사람에 대하여 그 이상의 도덕성을 추궁해야 함은 지당하고 옳은 일이다. 그 추궁이란 중복되는 청문회가 아니라 그가 살아 온 역사 자체를 목격함으로써 가능하다. 텔레비전의 영상도 이미지다. 말 잘하고 대답 잘하는 것으로 평가의 중심으로 삼는 것은 곤란하다. 감성으로 판단할 일 따로 있고 합리적 이성으로 판단할 일 따로 있는 것이다.

 

정책을 비교할 수 있는 정당 또한 그러하다. 선거철에 따라 조립식 패널처럼 지었다가 부서지고 컨테이너에 실려 옮겨지기도 하는 정당은 일관성도 경험의 축적도 없다. 이합집산의 한국 정당들은 국민들이 어떤 정당의 어떤 정책이 결국 옳았다는 평가를 가질 만한 기간도 기회도 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후보가 살아 온 역사와 소신, 그리고 그의 정당이 국정 활동에서 취해 온 궤적들을 정책의 진실성과 실체를 바라보는 척도로 삼을 수밖에 없음은 명백하다.

 

 

후보가 살아 온 역사를 목격하라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은 자신의 정책 색깔을 확실히 가지고 있다. 민주당이 집권하면 사회 복지 예산이 늘고 세금이 인상된다. 전자 산업이 활성화되고 국제 분쟁에 타협을 강조한다. 공화당이 집권하면 국방 예산이 늘어나고 방위 철강 산업이 탄력을 받고 패권주의를 강화하므로 중동 지역과 제3세계에 대하여 대화보다는 힘의 외교를 펼치게 된다. 이렇게 민주당과 공화당은 이념과 정책에서 구분되는 색깔과 고유한 지지자들을 가지고 있다. 미국 시민들이 그 점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정당이 집권하면 향후 국가 운영이 어떻게 흘러갈 것이라는 방향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정권 교체로써 국가가 균형적으로 발전하도록 만들고 의회는 집권당의 정책을 지지해 준다. 이로써 외교와 내정에서 강약의 리듬을 가지고 정치를 발전시켜 나간다. 얼마나 용의주도하고 무서운 나라인가.

 

우리의 정당 운영은 두목 정치, 패거리 정치라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거기에도 흐르고 있는 맥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노선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차이점이 집권 향후를 예측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가령 남북의 화해와 평화 공존에 대한 태도에서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가 집권할 때와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집권할 때가 같지 않을 것이며 공직 사회와 기업 경영에 요구하는 것도 다를 것이다. 이렇게 후보의 차별성을 구별해 볼 수 있을 터인데 문제는 국민들이 그 작아 보이는 차별성을 제대로 보지 못함으로써 국가와 민족, 국민의 삶에 가져오는 엄청난 차별적 결과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 차별성을 보지 않고 후보 중심으로만 보면서 자신이 어떤 후보를 왜 지지하는지의 명백한 이유를 갖지 않고 가볍고 단순한 지지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앞서 '조중동' 신문의 편파성과 특히 모 일간지의 극우 편집증적 성향을 말했지만, 그들이 특정 후보를 당선시키려 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추구하는 언론 재벌로서의 권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려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미국과 같은 패권주의로 북한을 바라보면서 끊임없는 긴장과 대결로 흡수 통일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패권주의 이념은 교회가 추구하는 평화 공존과 민족 화해와는 전혀 다른 노선이며 따라서 복음적이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런 언론의 권력이 휘두르는 선동에 따라 그것을 자기 논리로 삼고 후보를 지지한다면 그 결과가 바로 자신의 삶마저 지배하는 패권주의 차원으로 나타날 것임은 당연하다. 시민 사회 단체들이 특정 신문 안 보기 운동에 앞장서는 이유가 바로 그런 것임을 신자 일반이 신앙적 차원에서 해석해야 한다.

 

 

공명선거를 위해 교회가 해야 할 일

 

선거에 대한 이러한 혼돈의 태도는 선거 결과에 직접적 영향으로 나타나게 된다. 얼마 전 한 교우의 말이었다. 모 정당의 동네 소집책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는 이웃에게 자원 봉사 참여를 제의받았다고 한다. "찍고 안 찍고는 관계없는 일이고, 선거 때까지 따라다니기만 하면 100여 만 원 정도는 벌어먹을 수 있으니 같이 하자."라는 말이었다고 한다. 필자는 대답했다. "가난하게 사는 것도 억울한데 돈 100만 원에 자존심을 팔아서야 되겠어요? 지지하고 좋아하는 정당의 후보자라면 돈 받지 말고 활동 삼아 참여하세요." 그렇게 말했지만 직장도 없이 어렵게 사는 처지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너무 매정한 말인 것 같아서 답답했다. 신자 일반이 정치적 상황에서 겪는 문제들은 단순하지 않다. 단순하지 않을수록 정치 의식의 혼돈이 무책임한 지지의 득표로 직결될 수 있는 확률이 더 커지는 것이다.

 

신자들의 의식을 혼란시키는 요인은 말할 것도 없이 언론의 선동, 지역 감정, 이데올로기, 즉각적 감성(이미지) 등이다. 유권자는 무의식의 혼돈 상태에서 자신들을 지배하려고 유혹하는 온갖 매체와 정당의 이벤트들에 둘러싸여 공습을 당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런 점에서 공명선거를 위한 중요한 대상이 바로 유권자의 의식성 확보라는 말이다. 불공정 선거의 개념이 이른바 금권·관권의 강제 유혹적 형태에서 유권자 의식의 단순성이라는 자율적 형태로 바뀌고 있다는 점을 상기했으면 좋겠다. 그러므로 유권자 노릇하기도 쉽지 않은 시대이다. 투표를 위해서 공부라도 해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 참정권을 제대로 행사하려면 과거처럼 '여당인가 야당인가'식이 아니라 공부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올바른 의식에서 좋은 결과가 나오고 왜곡된 의식에서 부정한 결과가 나오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가 대선의 시대적 중요성을 감지하고 공명정대한 선거가 되도록 참여하려 한다면 그 대상은 불 보듯 뻔하다. 단순한 투표 행위의 공명선거가 아니라 신자들에게 의식 판단의 공정성을 복음적으로 확보하는 것이어야 하겠다. 신앙인들에게 선거란 신앙과 구별되는 개별적이고 단순한 정치 행위가 아니라 복음적 실천의 행위임을 주지해야 한다.

 

[사목, 2002년 12월호, 박기호(서울대교구 서교동 천주교회 주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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