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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민주주의와 가톨릭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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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7 ㅣ No.425

민주주의와 가톨릭 교회

 

 

우리는 여러 정치 이념 중에서 민주주의를 기본적으로 지지한다. 그것은 분단된 한반도에서 대한민국이 자유 민주주의, 북한이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를 표방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북한의 나라 이름도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으로서 민주주의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그렇지만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인 자유와 평등이 실질적으로 보장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북한의 민주주의는 껍질에 불과하다. 우리가 지지하는 민주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자유와 평등이 실질적으로 보장되는 정치 이념이다. 

 

남한의 민주주의는 프랑스, 영국, 미국이 이식한 민주주의이며, 50년 남짓한 역사를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50년 속에서도 12년간의 이승만 시대는 반공이라는 국시(國是)가 국내 정치에 이용됨으로서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실질적으로 보장되지 못하는 국부(國父) 권위주의 시기였으며, 24년간의 박정희-전두환 시대는 군부(軍部) 권위주의 시기로서 정치 이념은 실질적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4·19 학생 혁명과 1987년 민주화 대투쟁에서 폭발적으로 보여 준 우리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절대적 사랑은 이런 36년간의 권위주의 시대에 숙성되어 온 씨앗이었다. 

 

1987년 이후에 우리는 민주주의를 단단히 하는 작업(민주주의의 공고화: 민주화)을 해 오고 있다. 정치 영역에서는 자유가, 경제 영역에서는 자율이라는 가치가 과거보다 확대되어서 사회는 다원화되고, 문화는 다양화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민주주의라는 목표는 멀고, 민주화에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맞는 정치 이념인지, 우리는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민족인지 의심을 할 때도 있다. 여기서 우리가 때로는 권위주의를 그리워할 수도 있고(박정희 신드롬, 주체 사상), 정치에 아예 무관심할 수도 있다. 또 서양의 민주주의를 생각하면서 고대 그리스를 떠올리고, 2천 년이 넘는 민주주의의 찬란한 역사를 부러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서양의 민주주의에서도 자유와 평등이 실질적으로, 제도적으로 보장된 것은 19세기 중후반 이후 최근의 100년 남짓에 불과하다는 점, 그들의 민주주의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많은 문제들을 계속해서 고쳐 나가는 과정에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 민주주의의 부족함에 대해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우리나라에서 당장 생각할 수 있는 정치 이념의 대안은 민주주의 이외에 다른 것은 없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한다면, 이러한 위안을 바탕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의지를 다질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의지는 가톨릭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을 통해 더욱 굳어진다. 가톨릭 교회는 정치 이념에 대해 ‘보편된 교회’로서의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다.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로서가 아니라 ‘하나’인 교회로서 인류가 지향해야 할 바를 가르친다. 민주주의도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기본 입장에만 찬성할 뿐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비판과 개선의 촉구는 끊임없이 하고 있다.

 

한편,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을 기본 가치로 삼고 있지만 이 두 가치는 서로 배타적이며, 양립할 수 없다. 따라서 이 둘의 조화는 모든 정치 체제의 숙제로 남아 있다. 또한 이 자유와 평등은 기본적으로 정치와 경제 영역에서 민주주의를 규정하는 기본 축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정치 영역에서 자유주의(개인 자유주의)의 모습으로 나타나면서 사회주의(공산주의, 독재 정치)를 거부하며, 경제 영역에서 자본주의의 모습으로 나타나면서 사회주의를 거부한다. 가톨릭 교회는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의 기본 정신을 존중하면서 부정적인 측면의 개선을 촉구하지만, 자유주의를 위한 사회주의 입장에 의한 개선책은 반대한다. 가톨릭 교회는 경제적으로 자본주의의 기본 정신을 존중하면서 부정적인 측면의 개선을 촉구하지만 사회주의 입장에 의한 개선책은 반대한다. 민주주의는 19세기 초중반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발달로 자신을 형성해 갔지만, 정치적 억압과 극단적인 빈부의 차이라는 부정적인 측면을 드러내었다. 이에 대해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는 비판을 가하고 혁명이라는 방법으로 개선책을 제시하였다. 가톨릭의 ‘사회적 가르침’은 이러한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질타로 제시되기 시작하였다.

 

가톨릭의 사회적 가르침의 처음 문헌은 「새로운 사태」1)(Rerum Novarum)이다. 「새로운 사태」는 마르크스가 사망하고 8년 뒤인 1891년에 교황 레오 13세 회칙으로 선포되었다. 마르크스주의만큼의 역사를 가진 「새로운 사태」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며 사회주의적 발상의 거부이다. 「새로운 사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진화에 따라 더욱 구체적으로 해석되면서 자본주의의 수정과 사회주의 체제의 비판에 이바지해 왔다. 「새로운 사태」 반포 40주년 회칙인 비오 11세의 「사십주년」(Quadragesimo Anno; 1931년), 50주년을 기념하는 비오 12세의 라디오 메시지, 70주년의 「어머니요 스승」(Mater et Magistra; 1961년, 요한 23세), 「팔십주년」(Octogesima Adveniens; 1971년, 바오로 6세), 90주년의 「노동하는 인간」(Laborem Exercens; 1981년, 요한 바오로 2세), 그리고 「백주년」(Centesimus Annus; 1991년, 요한 바오로 2세) 등이 그것이다. 또한 사회에 관한 문서로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가운데 “사목 헌장”(Gaudium et Spes), 1967년 바오로 6세의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 1987년 요한 바오로 2세의 「사회적 관심」(Sollicitudo Rei Socialis) 등도 이와 관련된 문헌들이다.

 

 

1. 가톨릭과 민주주의-자유주의 : 정치적 자유의 지지-사회주의에 대한 반대

 

우리 교회는 민주주의를 지지한다. 이기적인 개인주의에 반대하며, 양심의 의무와 사회 참여를 촉구한다(사목 헌장, 30. 31항 참조). 사회 참여는 공권력의 남용에 항거하여 자연법과 복음이 보여 주는 한계 내에서 자신과 동포의 이익을 옹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사목 헌장, 74항 참조). 그러나 권력 위주의 전체주의적인, 독재적인 민주주의는 거부하며, 현대 생활에 맞는 민주 체제를 발견하는 것이 필요하다(「팔십주년」, 37. 47항 참조).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인간 본성에 위배되는 체제로서 정의와 평등을 구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강하게 비판된다(「사십주년」, 45. 46항; 「하느님이신 구세주」 참조.)

 

개인, 사회, 국가의 관계에 대해 가톨릭은 개인 자유주의, 사회주의, 과도한 국가 권력을 거부하며, 공동선을 중심으로 한 구성 주체들의 조화를 주장한다. 자연법에 기초를 둔 민주주의를 선호한다. 공동선에 대해 개인 자유주의는 책임성을 결여하고, 사회주의는 공동선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개인 자유를 침해한다. 과도한 국가주의 역시 사회주의와 마찬가지이다. 자유주의는 사회에 대한 국가의 효과적인 개입을 반대하지만, 국가는 공동선을 위한 활동 영역을 갖고 있다(「사십주년」, 12. 21항 참조). 국가는 개인과 사회에 대해 ‘보조성의 원리’에 입각하여 행동해야 한다. 곧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사회 영역을 축소시켜서는 안 되며, 개인과 사회의 유효한 보호를 통하여 기본권 보장에 노력해야 한다(「사십주년」, 21항; 「어머니요 스승」, 53항 참조). 따라서 책임 있는 개인들의 자유 의사에 입각한, 윤리적인 사회, 정치 권력을 갖춘 민주주의 국가에서 공동선은 적절하게 실현될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시민 사회 또는 비정부 기구의 자율적인 연대, 국내적-국제적 연대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 밖에도 민주주의에 대한 분명한 태도는 「백주년」에 나타난다.

 

“교회는 민주주의를 높이 평가하는데, 이 체제는 확실히 시민들에게 정치적 결정에 참여할 중요한 권한을 부여하며, 피지배자들에게는 지배자들을 선택하거나 통제하거나 필요한 경우에는 평화적으로 대치할 가능성을 보장해 준다. …… 진정한 민주주의는 법치 국가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올바른 인간관의 기초 위에 성립한다. …… 원칙 없는 민주주의는 역사가 증명하듯이 쉽게 공개된 또는 위장된 전체주의로 변한다. …… 인권을 인정하면서 민주주의의 진정하고 견고한 기초를 세울 필요가 있다. 그 권리 중에는 생명이 잉태된 후부터 모체 내에서 발육할 수 있는 권리가 밀접하게 연결되는, 생명에 대한 제일 중요한 권리, 일치된 가정에서 그리고 인격의 발전에 적합한 장소에서 살 권리, 진리 추구와 인식에서 자신의 지성과 자유를 발전시킬 권리, 그 외에 지상의 물질적 재화를 올바르게 취득하여 자신과 식구들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노동할 권리, 끝으로 자유롭게 가정을 이루고 책임 있는 성생활을 함으로써 자녀를 낳고 기를 권리가 있다”(46.47항).

 

 

2. 가톨릭과 민주주의-자본주의:경제적 자유의 지지-사회주의에 대한 반대

 

먼저 「새로운 사태」의 내용을 살펴보면,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지적되고 있다.

 

노동자는 인정머리 없는 사용자와 탐욕스럽고 무절제한 경쟁 속에서 더욱 고립된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 생산 수단의 거의 모두가 몇몇 사람에게 집중되어 이들 소수 부유층은 근로 계약이란 허울을 쓰고 수많은 노동자에게 노예와 비슷한 굴종을 강요하고 있다(6항).

 

그러나 사유 재산 제도의 원칙은 인간 본성에 가장 적합하며, 인간 생활의 안정과 평화에 다시없이 잘 부합된다. …… 사유 재산은 가장이 자녀 보호와 정당한 자유를 위해 필요하다(17항).라고 지적하면서 자본주의의 사유 재산 제도의 정당성은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제거하기 위한 해결책은 분명히 제시된다.

 

자유롭게 체결한 사용자와의 모든 정당한 계약은 정직하고 완전하게 수행되어야 한다. 사용자의 재산은 침해하거나 사용자의 인격을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 …… 종업원은 노예가 아니라 인격의 존엄성을 존중받아야 한다. …… 사용자는 힘에 벅차서 감당할 수 없는 작업을 종업원에게 강요해서는 안 되며, 노동자의 연령이나 성별에 부적합한 업무를 노동자에게 맡겨서도 안 된다(30항).

 

…… 노동자가 정당하게 받아야 할 몫을 제대로 줌으로써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다. …… 부자는 힘으로, 속임수로 또는 고리 대금의 방법으로 노동자의 소득을 가로채서는 안 된다(32항).

 

노동자의 근로 조건을 개선시키는 일은 국가 통치자의 당연한 본분이다. …… 노동자는 어느 사회에서나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국민의 어느 일부를 무시하고 다른 일부를 지나치게 두둔하는 것은 잘못이다. …… 가난하고 약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대책이 거의 없으므로 국가의 보호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 누구든지 다른 사람의 소유물을 차지하거나 또는 사회주의라는 그릇된 평등 사상을 구실 삼아 다른 사람의 재산을 가로채는 것은 정의에도 위배되며 공동선에도 위배된다(48항).

 

또한 국가 권력이 가정의 내부 문제에 마음대로 개입, 간섭할 수 있다는 사상은 지극히 해롭고 잘못된 것이다. …… 시민의 권리를 박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민의 정당한 권리를 적절하게 보장하고 시민의 권리를 강화하기 위해서 국가가 개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권력의 개입은 이 정도에서 그쳐야 하며 더 이상 개입해서는 안 된다. 자연법은 더 이상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21항).라고 지적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의 기능도 보조성의 원칙으로 제시된다. 결국 「새로운 사태」는 자본주의를 비판하지만 개선을 동시에 촉구하고 있으며, 자본주의 문제를 사회주의로 해결하려는 것에 대해서 분명한 반대 입장을 표시한다.

 

사회주의자들은 이 같은 사회악을 제거하기 위해 부유한 자에 대한 가난한 자의 불만을 조장시킴으로써 사유 재산 제도 자체를 파괴하고 그 대신 개인 재산을 공동 재산으로 만든 뒤 그 관리는 국가나 공공 단체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7항).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문제 해결과는 너무나 근본적인 차이가 있으므로, 그들의 제안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노동자 자신들이야말로 제일 먼저 피해를 입게 될 사람들일 것이다(8항).

 

또한 사회주의 국가의 기능에도 반대한다.

 

재산 소유권은 인간과 다른 생물을 구분할 수 있는 근본적 차이점이다. …… 인간은 영혼과 이성을 가지고 있으며 …… 자연법과 하느님의 섭리 속에서 자신을 다스린다. …… 사유 재산 제도는 자연법에 합치되며, 국가보다 인간이 먼저 존재했기 때문에 개인의 재산을 국가의 관리에 맡겨야 할 이유가 없다(11항).

 

사회주의의 기본 원리인 재산의 공유화는 철저하게 배척되어야만 한다. …… 사유 재산권은 불가침의 권리로서 신성하게 보호되어야 한다(23항). 

 

인간 사회의 수준을 평등이라는 이유로 획일적으로 어느 수준에 고정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26항).

 

이러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과 자본주의에 대한 개선의 촉구는 결국 노동 조합 등을 통한 노동자 권리 보호의 논리로 이어진다.

......자유롭게 체결한 사용자와의 모든 정당한 계약은 정직하고 완전하게 수행되어야 한다. 사용자의 재산은 침해하거나 사용자의 인격을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 …… 종업원은 노예가 아니라 인격의 존엄성을 존중받아야 한다. …… 사용자는 힘에 벅차서 감당할 수 없는 작업을 종업원에게 강요해서는 안 되며, 노동자의 연령이나 성별에 부적합한 업무를 노동자에게 맡겨서도 안 된다(30항).

 

…… 노동 조합의 결성은 노동자의 기본 권리이며 …… 국가가 국민의 결사권을 금지해서도 안 되고 …… 공동선이란 구실로 부당한 규제를 하지 않도록 온갖 주의를 다 기울여야 한다. …… 노동 조합은 …… 중재로서 분규를 조정해야 하며 …… 노동자에게 충분한 일거리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 노동 조합은 반드시 조합원의 육체적 및 정신적 건강과 풍요를 증진시켜야 하는 자체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가장 적절하고 가장 편리한 수단을 마련할 수 있도록 조직되고 운영되어야 한다(68항).

 

따라서 「새로운 사태」의 최종 입장은 계층 간의 적대감이 자연적이라는 사상은 …… 가장 큰 잘못이다. …… 노동 없는 자본이 있을 수 없고 자본 없는 노동도 있을 수 없다(28항). 두 계급을 화합하도록 만드는 데는 종교적 가르침과 실천보다 더 강력한 것은 없다(29항).라고 지적하면서 계급 적대가 아닌 계급 화합에 대한 호소로 이어지며, 이것을 위한 교회의 역할과 가치를 강조하게 된다.

 

…… 하느님 앞에서는 가난이 수치가 아니며, 노동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결코 부끄럽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37항).

 

그리스도교 윤리가 적절하고 완전하게 실천될 때 물질적 풍요는 저절로 뒤따르게 된다(42항).

 

…… 다른 사람을 위해 언제나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도록 만드는 사랑이야말로 인간의 세속적 교만과 이기심에 대한 확실한 특효약이다(83항).

 

「새로운 사태」는 자본주의 기본 개념의 긍정인 동시에 그 자유주의적 성격의 부정이다. 소유권, 자본, 노동에 대해 사회적 성격을 요구하며 국가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한다. 「새로운 사태」는 사회주의 기본 개념의 부정이며 사회주의적 현실에 대한 비판이다. 소유권, 자본, 노동의 사회적 객관적 성격만을 강조하는 무신론적인 태도의 거부이다. 사회 문제를 위한 대헌장(「사십주년」, 16항)인 「새로운 사태」에 비추어 “자유주의는 사회 문제의 올바른 해결책을 찾는 데에 전적으로 무능함을 보여 주었고, 사회주의는 치료해야 할 해악보다 훨씬 더 큰 불행이 될 개선책을 제시함으로써 더 큰 위험을 맞이하게 할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자유주의는 경제적 국제적 제국주의로 발전되어 갔으며 “이익이 있는 곳에 조국이 있다.”라는 생각을 신조로 삼고 있었다(「사십주년」, 3항;「노동하는 인간」, 13.14항; 「민족들의 발전」, 26항 참조). 한마디로 자유주의는 “방종한 자본주의”(「백주년」, 8항)였다. 경제 문제의 올바른 질서가 거친 자유 경쟁에 맡겨질 수 없으며 인간 사회의 일치가 계급 갈등 위에 세워질 수도 없다(「사십주년」, 37항 참조). 가톨릭의 사회 교리는 자유주의와 마르크스 집단주의 사이에 낀 “제3의 방도”가 아니며 서로 상충적인 해결책들 사이에서 덜 극단적인 차선책은 더욱 아니다. 가톨릭의 정치 사상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며 윤리 신학이다(「사회적 관심」, 41항 참조).

 

소유권 사유 재산권의 개인(주의)적 성격은 기본적으로 인정되지만 절대적이지는 못하다. 왜냐하면 사용권(사회적 성격)이 올바르지 못하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기 때문이다. 소유권에는 자선, 선행, 관용의 의무가 주어진다(「사십주년」, 20.22항 참조).

 

노동과 자본 노동에도 개인적 성격뿐만 아니라 사회적 성격이 부가된다. 그러나 노동은 경제적인 객관적 성격보다는 도덕적, 종교적, 인격적인 주관적 성격이 더욱 중요하다. 노동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이 노동을 위해 있지는 않다. 노동의 객관적 성격만의 강조는 물질주의 경제주의의 오류다. 노동자의 존엄성과 노동의 존엄성은 동시에 강조되어야 한다(「백주년」, 6항 참조).

 

노동에 대한 자본의 부당한 요구는 착취로서 거부되어야 하며 자본에 대한 노동의 부당한 요구, 곧 투자된 자본을 보상하고 돌려주는 데 필요한 것을 제외하고 생산물과 이윤이 모두 노동자의 권리에 속한다는 생각도 공동선이라는 사회적 몫을 고려하지 못하므로 거부되어야 한다(「사십주년」, 25.26항; 「칠십주년」, 76항 참조). 임금은 정의와 공평의 기준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한다(「칠십주년」, 68-71항 참조). 또한 노동자는 회사에서 자신의 몫을 가지며 또한 경영과 생산 관리에 참여하는 것이 좋다(「칠십주년」, 75항; 「노동하는 인간」, 8항 참조)(여기서 회사의 몫에 참여는 종업원 지주제 정도로 생각해도 될 것 같다). 노동자에게는 노동 계약 당사자인 직접 고용주도 중요하지만, 직접 고용주를 제약하는 사회적 환경, 법 사회 보장 등과 같은 조건들이 간접 고용주로서의 역할을 하므로 국가는 간접고용주에 대한 배려를 할 책임이 있다(「노동하는 인간」, 16.17항 참조).

 

노동 조합 결사권과 집단 내에서의 활동의 자유는 기본권이다(사목 헌장, 68항 참조). 또한 파업 또는 작업 중지권도 보장되어야 한다. 단일 직종의 범위를 넘어서는 단체의 설립에 대해서도 같은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사십주년」, 36항 참조). 그러나 특히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남용되어서는 안 된다(「노동하는 인간」, 20항 참조). 노동 조합이라는 직능 집단에서는 농부, 중산층뿐 아니라 “노동하는 지식 계급”(지식인 노동자)도 포함된다. 지식인 노동자도 사실상의 무산 계급이다. 노동 조합은 “연대성의 원리”에 따라 설립되며 합법적 다원주의에 따라 존재한다(「민족들의 발전」, 39항 참조). 노동 조합은 사회 질서의 재건과 개선에 기여해야지 특수한 정치적 목적에 이용당해서는 안 되므로 어느 정당의 결정에 예속되거나 정당에 너무 밀접하게 유착되어서는 안 된다(「사십주년」, 38항; 「노동하는 인간」, 20항 참조).

 

국가 자유주의는 사회에 대한 국가의 효과적인 개입을 반대하지만, 국가는 공동선을 위한 활동 영역을 갖고 있다(「사십주년」, 12.21항 참조). 국가는 개인과 사회에 대해 ‘보조성의 원리’에 입각하여 행동해야 한다. 곧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사회 영역을 축소시켜서는 안 되며, 개인과 사회의 유효한 보호로써 기본권 보장에 노력해야 한다(「사십주년」 21항; 「어머니요 스승」, 53항 참조).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져야 한다. 모든 가톨릭 신자는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을 알아야 한다. ‘사회적 가르침’은 성서의 뜻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적절하게 풀어 놓은 구체적인 행동 지침이다. 우리 모두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신앙과 행동을 일치시켜야 한다. 남북 통일을 위해서도, 동북아·세계 평화를 위해서도 우리가 당장, 그리고 지속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민주주의밖에 없다.

 

1) 이 글에 인용된 「새로운 사태」의 내용은 ‘성바오로 출판사, 「노동 헌장」, 1982년’을 인용한 것이다. - 편집자 주.

 

[사목, 2002년 12월호, 나정원(강원대학교 교수 · 정치외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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