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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환경운동연합의 환경운동 성과와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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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0 ㅣ No.467

환경운동연합의 환경 운동 성과와 과제

 

 

1. 들어가는 말:한국 환경 문제의 발생과 환경 운동의 시작

 

1960년대 이후 우리나라는 국가 안보 상황과 더불어 경제 성장이 국가 최대의 과제였으며. 공단의 입지는 국가 부의 상징이었고, 공장에서 뿜어 나오는 검은 연기는 그 부를 쌓아 가기 위한 차표로 인식되었다. 하천이 공장 폐수로 인해 검게 변해도 그것은 참고 견디어야 하는 것으로 알았으며, 우리의 생명을 갉아먹는 재앙이라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곪으면 터지듯이 자연은 자정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신호를 보냈으며, 그 신호는 인간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 다가왔다. 1960년대 후반 부산 감천 화력 발전소 인근 삼산 평야 주민들은 주변에서 날아오는 오염된 공기로 삶의 근간이 되는 농작물이 말라 죽게 되자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피해 보상 소송을 청구하게 되었다. 1970년대 바닷가를 중심으로 대규모로 조성된 중화학 공업 단지는 울산, 남해, 광양 등에 중점적으로 들어서게 되었고, 청정 지역이었던 인근 지역이 점차 생명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병들어 갔다. 공장에서 뿜어 나오는 매연은 농작물을 말라 죽게 했고, 쉴새없이 토해 내는 공장 폐수는 인근 바닷가 양식장의 패류와 양식어를 모두 폐사시켜 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 산발적으로 일어났던 주민들의 피해 보상에 대한 문제 제기는 당시 안보 상황의 국가적 분위기에 억눌려 더 이상 사회적인 문제로 확산되지 못했으며, 국민들도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온산 지역에 들어선 공단에서 나오는 오염 물질로 인근 지역의 주민들에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집단 괴질이 발생하였다. 전신 신경통 증세, 부스럼과 같은 피부병, 심한 경우에는 수족 마비, 전신 마비 등이 생기는 이 괴질 환자수는 공단 폐수가 흘러나오는 하천을 중심으로 매년 늘어났다. 1984년 당시 공해 문제를 심각한 사회 문제로 인식하고, 그 원인을 조사, 해결해 가기 위해 설립된 최초의 민간 환경 전문 단체인 '공해 문제 연구소'는 온산 지역의 집단 괴질 발병 조사를 통하여 일본의 대표적인 공해병인 '이타이이타이병'과 유사한 공해병이 우리나라에서도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려 나갔다. '온산병'이라고 일컬어진 이 집단 괴질로 급기야 12세의 어린 소년이 사망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사실은 언론을 통해 사회적 문제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공해 문제에 대한 정부의 무성의한 태도, 여론의 한시적 특성 등으로 국민들의 관심이 지속적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렇지만 온산병 사건을 통해서 지역 주민들은 공단이 더 이상 잘사는 부의 상징이 아니라 공해 산업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이러한 공단은 환경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파괴하고, 개인까지도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환경 운동은 이제까지 전개해 왔던 단순한 피해 보상 요구가 아니라, 생존권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이라는 인식을 확대해 나갔다. 또한 초기 환경 운동은 온산병과 공단 공해 문제에 대한 공해 문제 연구소의 활동으로 공해 문제를 사회 문제화하고 국민의 인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보게 되었다.

 

 

2. 한국 환경 단체의 등장:전문적인 환경 운동 단체인 공해추방운동연합의 등장

 

1980년대 중반까지 전개된 환경 운동은 공해 지역의 주민들의 생존권을 위한 투쟁과 공해를 야기하는 기업과 독점 재벌에 대항하기 위한 공해 추방 운동이었으며, 독재 권력에 맞서는 일종의 민주화 운동이기도 하였다.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이라는 역사적 지각 변동을 겪으면서 한국 사회에서 넓어진 정치적 활동 영역으로, 공해 추방 운동은 더욱 전문화되고, 활동 영역을 넓혀 가게 되었다. 1988년 '공해 문제 연구소'와 더불어 활동을 해 온 '공해추방운동청년협의회'와 '공해반대시민운동협의회'가 합쳐져 공해추방운동연합(이하 공추련)이 발족되었다. 환경 운동의 가장 핵심은 현장에 근거한, 현장에서의 운동이라는 것을 강조한 공추련이 발족하던 해, '검은 민들레'로 불리는 박길래 씨 사건은 당시 환경 운동이 사회적 약자의 생존권을 보호하고, 기업과 독점 재벌에 대항하는 공해 추방 운동이라는 정체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상봉동 연탄 공장 인근에 살았던 주민인 박길래 씨는 연탄 공장에서 날아온 탄가루로 인해 진폐증에 걸리고 말았다. 공해 문제를 담 넘어 남의 일로 여긴 사회적 인식에 경종을 울린 사례로서, 오염된 환경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자신도 모르게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공추련은 박길래 씨를 중심으로 사회에 오염된 환경의 위험성을 알려 나갔으며, 또한 변호사 단체의 도움을 받아 연탄 공장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 지난한 과정을 거쳐 개인의 환경권이 보호받게 되는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렇지만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자신도 모르게 얻은 검은 민들레 박길래 씨는 오랜 병고 끝에 1999년 사망하였다.

 

1978년 고리 핵 발전소 가동을 시작으로 월성, 울진, 영광 등에 핵 발전소가 들어섰다. 핵 발전을 위해서는 많은 냉각수가 필요하기 때문에 위치 조건이 바닷가여야만 하는 핵 발전소는 인근 바닷가에 주변보다 약 7℃가 높은 물을 배출하며 해양 생태계를 변화시키고 있다. 공추련이 발족하던 당시에는 고리 핵 발전소에서 10년 간 근무했던 박신우 씨가 임파선암으로 사망하고, 같은 발전소 노동자 방윤동 씨가 위암으로 사망하였다. 이어 영광 핵 발전소에서는 일용 노동자 김익성 씨가 무뇌아를 사산하였고, 김동필 씨가 기형아를 출산하였다. 뿐만 아니라 고리 핵 발전소 인근 효암리에서 1년 간 사망한 주민 8명의 사인이 모두 암으로 밝혀지는 등 핵 발전소로 인한 피해가 분명하게 나타났지만, 정부는 계속해서 핵 발전소를 추가로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핵 발전소 가동 이후 발생한 핵 폐기물을 모두 처리할 수 있는 핵 폐기장 건설 또한 당시 공추련의 주요한 운동 과제였다. 1990년 안면도에서는 정부가 서해안 안면도 일대에 핵 폐기물을 영구 보존하기 위한 시설을 건설한다는 보도를 접하고 지역 주민들을 중심으로 이른바 '안면도 항쟁'을 전개하였다. 공추련은 지역 주민의 핵 폐기장 건설 반대 운동을 지원하였으며, 정부는 결국 안면도에 핵 폐기장을 건설하려했던 계획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안면도 핵 폐기장 건설 계획의 철회로 인해 공추련은 전국적으로 핵의 위험을 알렸으며, 지역 주민이 반대하면 정부의 정책도 막을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 나갔다.

 

1970년대 가죽, 염색 산업이 발달하였고, 10년이 지나서도 한국 기업들은 환경 문제는 여전히 등한시하고 있었다. 한국 기업들은 각종 가공 단계에서 배출되는 오염 물질을 외부에 그대로 배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나라 국민들의 환경 인식에 일대 획을 긋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바로 '낙동강 페놀 오염'사건이었다. 1990년대 초는 수돗물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극도로 심해지고, 먹는 샘물 시판을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1991년 3월, 대구 시내 수돗물에서 심한 악취가 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정부는 두산 전자가 페놀 원액 30톤을 그대로 흘려 보냈고, 흘러 나간 페놀 원액은 정수장의 염소와 결합하여 클로로페놀이라는 발암 물질로 변해 수돗물에서 악취가 심하게 났다고 발표했다. 두산 전자가 이미 1990년 11월부터 325톤의 페놀을 몰래 방류해왔다는 사실 또한 밝혀지면서 국민들은 환경 오염 문제가 더 이상 남의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자신의 문제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공추련을 비롯하여 지역 환경 단체, 그리고 우리나라 사회 단체들이 결합하여 두산 제품, OB 맥주 불매 운동 등을 전개하였으며 이는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다. 두산 그룹과 정부는 이 사태를 서둘러 진화하기 위해 두산 그룹 회장이 200억 기부 의사를 발표하였으며, 정부는 두산 그룹의 행위를 맹렬히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발표 이후 4월, 2차 페놀 유출 사고가 또 다시 발생하였는데, 두산 전자의 조업 개시 10여 일 만에 일어난 사건으로 당시 환경처 장관과 차관이 경질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의 최대의 피해자는 바로 지역 임산부들이었다. 발암 물질을 먹은 임산부들이 유산, 기형아 출산 등에 대한 정신적 피해를 호소하고, 두산 그룹과 대구시를 상대로 법정 싸움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환경 단체 뿐만 아니라 시민 단체들도 환경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우리의 문제'로 인식하게 되면서 환경 운동은 또 다른 국면으로 전개되었다.

 

 

3. 시민 운동으로서 환경 운동의 발자취와 시민 사회의 변화:환경 운동의 전국적 연대, 환경운동연합 창립

 

1992년 브라질 리우에서 개최된 '유엔 환경 개발 회의'에 참가한 공추련은 지구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절감하면서 이제까지 전개된 공해 추방 운동의 환경 운동에서 지역 환경 문제까지 아우를 수 있는 환경 운동으로 전환하게 된다. 1993년 4월 5개의 지역 환경 단체와 서울 공추련은 '환경운동연합'으로 새롭게 태어나면서 이제까지의 공해 추방 운동을 계승 발전시키며, 지구촌 시대에 맞는 새로운 패러다임(환경은 생명이다)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이는 크게 반핵 운동의 계승 발전과 대안 에너지 운동, 대규모 국가 개발 사업에 파괴되는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 지역 환경 문제에 대한 접근과 해결 노력, 그리고 지구 환경 문제에 대한 인식을 통해 환경 문제를 해결하려는 국제 연대 활동의 강화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1) 반핵 운동의 흐름

 

체르노빌 핵 발전소 폭발 이후 더욱 활발해진 반핵 운동은 안면도 핵 폐기장 건설 반대 운동이 1993년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지게 하였으며, 이에 정부의 핵 폐기장 건설 계획은 더 이상 추진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수세에 몰려 있던 정부는 핵 폐기장 건설을 계속 추진하였으며, 새로운 후보지를 물색하였다. 그러던 중 정부는 연말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1994년 12월 서해 앞 바다 작은 섬 굴업도에 핵 폐기물 처리장을 지을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이러한 발표를 접한 환경운동연합은 활동가를 굴업도에 급파하여 굴업도 핵 폐기장 건설 반대를 위하여 주민들에게 핵 폐기장의 위험성을 알려 나갔다. 후보지 발표에 따른 환경 단체의 발 빠른 대응과 덕적도 주민들의 서울과 인천을 오가는 상경 투쟁은 시위에 참가하던 할머니의 죽음, 폭력 진압으로 인한 시위 주민의 부상 사태, 활동가가 구속되는 상황 속에서 어렵게 진행되었다. 1995년 지자체 선거에 덕적면 반대 투쟁 위원회 사무국장이 군 의원 후보로 출마해 핵 폐기장 건설 반대를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특히 인천환경운동연합을 중심으로 한 환경운동연합은 굴업도가 이미 1991년 정부의 지질 조사 후 부적격지로 건설 검토가 전면 백지화된 점을 들어 강력한 문제 제기를 하였고, 이에 정부는 굴업도에 대해 다시 지질 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지질 조사 결과 굴업도에 활성 단층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로 인해 굴업도 핵 폐기장 건설 계획은 10여 개월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안면도 투쟁에 이은 성공한 대표적 반핵 운동 사례로 기록된 굴업도 핵 폐기장 반대 운동은 지역 주민들의 적극적 반대와 환경운동연합의 조직적 지원이 이루어 낸 성과였다. 특히 덕적도 지역 주민의 치열한 반핵 의지에 인천 지역 학생 운동 진영뿐만 아니라 인천연합 등 지역 사회 운동 조직들이 가세함으로써 1980년대 후반부터 이어져온 반핵 운동의 흐름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 반핵 운동에 있어서 이러한 성공적 흐름은 계속 이어져 1997년 대만 핵 폐기물 북한 이송을 막는 데까지 이어졌다. 반핵 운동은 어떠한 핵 폐기물의 국제 이동도 반대한다. 대만 당국이 핵 폐기물을 북한으로 이송하려는 계획에 항의하기 위하여 국내 환경 활동가들이 직접 대만에 입국하여 강력한 반대 의사를 밝혔다. 또한 국제 환경 단체인 그린피스와 공동으로 핵 폐기물 국제 이동을 저지하기 위한 해상 훈련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국내에서는 전 국민이 핵 폐기물 북한 반입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여 결국에는 그 계획을 좌절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정부는 지금도 핵 발전소와 핵 폐기장 건설을 추진하고 있지만 이를 찬성하는 지역 주민은 없다. 이 때문에 정부는 현재 부지 선정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 이르렀다. 이는 그동안 환경연합을 비롯한 환경 단체들이 끊임없이 벌여온 반핵 운동의 결과이며 사회에 끼친 중요한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이상 핵 발전을 통한 에너지 수급은 지속 가능한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고, 이를 대체할 새로운 에너지 대안 체계에 대한 논의를 환경연합 부설 '에너지 대안 센터'를 중심으로 전개해 나가고 있다.

 

2) 대규모 국책 개발 사업에 의해 파괴되는 생태계를 보전하기 위한 노력들

 

1997년 강원도 영월의 동강은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강에 불과했다. 정부는 이 동강에 대규모 다목적 댐 건설 계획을 고시하였고 이에 대해 지역 주민을 중심으로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환경운동연합을 필두로 많은 환경·사회 단체들이 댐 건설 반대 운동에 동참하였다. 영월 동강의 아름다움과 천연 기념물, 석회암 동굴 등이 방송과 신문을 통해 알려지자 지역 주민과 환경 단체를 중심으로 전개되던 반대 운동은 전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게 된다. 이에 환경운동연합은 동강 현지에서 직접 시민들과 함께 하는 행사 등을 통해 동강의 아름다움과 생태계의 소중함을 알리려고 노력하였다. 동강 댐 백지화 운동은 점차 학계, 종교계, 문화계, 예술계 등으로 확산되었다. 동강을 지키기 위한 온갖 바람이 노란 손수건의 물결, 각계 각층 2,000여 명이 참여한 33일간의 밤샘 농성, 그리고 약 5,000만 원의 국민 성금 등으로 이어졌다. 결국 2000년 6월 5일 환경의 날에 "멸종 위기 동·식물을 보전하기 위해 동강 댐 건설을 백지화하겠다."라는 대통령의 발표로 10여 년 간의 논란이 종결되었다. 경부 고속 철도, 영종도 신공항 등 주요한 국책 사업에 대해 그 동안 환경 단체들은 끊임없는 반대 운동을 벌여 왔지만 단 한번도 사업을 중단시킨 예가 없던 상황에서 동강 댐 백지화 운동은 1990년대 대표적 환경 운동으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국민이 환경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었으며, 시민 사회가 자신의 삶의 기반인 자연과 생태를 스스로 보호해 갈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는 점을 반증해 줌으로써 21세기 환경 운동의 낙관적 미래를 예고하였다. 동강 댐 건설 백지화 발표 이후 동강은 정부의 대책이 미온한 가운데 각종 난개발로 몸살을 앓게 되었다. 지난 10여 년간 진행되어 왔던 동강 댐 백지화 운동 과정에서 지역 공동체가 동강나 버렸고, 그리고 동강은 각종 난개발로 여기저기 상처투성이가 된, 더 이상 비오리, 어름치와 같은 천연 기념물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이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너무 안일하고 늦었으며 동강 댐 건설 반대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강원도 지방 자치 단체는 동강의 난개발을 묵인하고 있었다. 흘러야만 했던 동강은 어디로 흘러야 할지 몰라 표류하고 있던 와중에 환경부가 적극적인 의사를 가지고 2002년 상반기 내에 동강 지역을 자연 생태 보전 지역으로 설정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동강 댐 건설 반대 운동은 국민들에게 생태계 보호라는 막연한 인식에 동강이라는 구체적인 훌륭한 생태계 보존이라는 문제를 제시함으로써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생태계 보호를 위한 국민의 자발적 참여와 의지는 새만금에 이르러 좌절되고 말았다. 새만금 간척 사업은 전북 군산에서 비응도, 야미도, 신시도, 가력도, 부안을 잇는 33km의 방조제를 건설하여 농지를 확보하겠다는 계획으로 1991년 착공되었다. 2000년 12월 현재 총 1조 1,385억 원을 투입하여 방조제 총 33km 중 58%인 19km 정도가 진행되었으나 시화호의 사례를 뼈저리게 경험한 환경운동연합을 비롯하여 많은 환경 단체들은 새만금 간척 사업의 전면 중단을 요구하였다. 간척, 매립으로 인해 생명의 보고인 갯벌이 파괴되고 지역 공동체가 파괴되며, 매립에 필요한 토석을 얻기 위해 주변 지역의 산이 사라지는 등의 사업 진행상의 문제뿐만 아니라 사업 종료 후에도 제2의 시화호가 될 것이라는 지역 주민과 환경 단체의 주장으로 인해 1999년 5월 '새만금 민·관 공동 조사단'이 구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민과 관측이 공동으로 추천하여 구성된 공동 조사단은 현지 조사나 보고서를 제출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를 야기하였다. 찬성과 반대가 엇갈리는 의견은 조율되지 않았으며, 공동 조사단의 단장이 의견을 단독으로 작성하여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환경연합 등 환경 단체들은 강력한 이의를 제기하였다. 지역 주민과 환경 단체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새만금 간척 사업 반대 운동이 종교계, 학계 등의 참여로 생명 평화 운동으로 확대되었고, 새만금 갯벌의 소중함을 체험하고 이를 알리기 위해 생태 기행, 전국 회원 대회 등을 진행하였다. 결국 2001년 정부는 대통령 직속 지속 가능 발전 위원회와 공동으로 '새만금 평가 회의'를 구성하고 그 논의 결과를 따르기로 약속하였다. 결국 평가 회의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수많은 문제가 있기 때문에 대통령이 결단할 문제라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정부는 평가 회의가 대통령이 아닌 정부 차원에서 결정하도록 건의했다고 평가회의 결론 문서를 조작하여 물 관리 정책 민간 위원회의 새만금 반대 결정을 무시하고 물 관리 정책 조정 위원회에서 2001년 5월 강행 결정을 하였다. 새만금 간척 사업 강행 결정은 국민의 반대 여론이 80%정도였음에도 이를 무시한 '국민 없는 국민의 정부'라는 것을 드러낸 것이었다. 환경연합은 이러한 좌절을 통해 정부 정책의 입안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뼈저리게 깨달아야만 했다. 정부측에서도 잘못된 사업임을 인정하면서, 일단 정책이 결정되고, 사업이 진행되었을 때는 아무리 잘못된 사업이라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3) 환경 문제에 대한 지구적 연대 운동의 구축 및 강화

 

1992년 브라질 리우 환경 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환경연합은 지구 환경 문제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으며, 환경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지구적 연대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린피스(Greenpeace International)와 함께 현대 그룹의 시베리아 산림 파괴 현장에 들어가 실태 조사를 벌였으며, 산림 파괴를 중단시키기 위한 반대 운동도 전개하였다. 일본의 플루토늄 해상 수송 저지를 위해서 국제 협력 활동을 벌였고, 대만 핵 폐기물 북한 반입을 저지하기 위한 범국민 운동, 그리고 동감 댐 건설 백지화 운동을 할 때에도 해외 환경 단체와 같은 종류의 사안에 대해 활발한 국제 연대 활동을 벌였다. 특히 1998년 6월에는 한국 환경 단체로서는 처음으로 '유엔경제사회이사회'(UNECOSOC)의 '특정 분야 협의 자격'을 획득하여 미국에 연락 사무소를 두고 국제 환경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환경연합은 또한 아태 지역 및 해외 환경 단체들과의 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환경 활동가의 현장 경험과 국제 연대의 노하우를 심어 주고 있다. 이밖에도 현재 신자유주의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WTO 대응), 다국적 기업 감시 활동, 환경과 인권 환경과 평화를 위한 연대 활동, 지구의 날(Earth Day) 캠페인, 사회개발정상회담(WSSD), 아시아유럽정상회담(ASEM), 아태지역경제협력개발기구(APEC)의 NGO부문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활동하고 있다. 특히 2000년 이후 더욱 심각해진 황사 발생에 대해 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환경연합은 중국·일본 등과 함께 중국 사막화 방지를 위한 국제 협력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4. 환경 운동의 과제와 전망

 

초창기 공해 피해에 대한 주민들의 생존권 투쟁에서 시작하여 1987년 6월 항쟁과 1992년 리우 회의를 통해 질적, 양적 성장을 한 80-90년대의 환경 운동은 시민 운동으로서 확고하게 자리잡는다. 굴업도 핵 폐기장 반대 운동과 영월 동강 댐 백지화 운동의 성공 사례를 통해서 환경 운동은 사회적, 대중적 지지를 받았으며, 생명 가치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전 국민에게 알려 나갔다. 하지만 항상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동강 댐 백지화 이후 정부와 국민의 무관심 속에 영월 동강 지역은 난개발로 몸살을 앓았고, 수많은 국민들이 지키고자 했던 새만금 갯벌이 파괴되고, 간척 사업은 일부 정치인, 공기업의 정치적 논리에 의해 강행되었다. 지방 자치 실시 이후 재원 확보를 목표로 지방 자치 단체마다 무자비한 개발 경쟁이 한창이고, 아직도 개인의 재산권 행사와 경기 활성화라는 미명 아래 환경 파괴를 일삼는 선심 행정이 이루어지고 있다. 환경 문제는 바로 우리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미래 세대를 위한 가치의 문제이기도 하다. 환경 운동은 국민의 당위적 지지를 받기도 하지만 당장 현실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에 외면을 당하기도 한다. 현재에도 핵 폐기장 건설을 위한 후보지 물색이 진행 중에 있고 새만금에는 방조제를 만들기 위해 대형 덤프 트럭이 바삐 오가고 있으며, 경기도 화성 화옹호에는 물막이 공사를 강행하려고 하고 있다. 아주 가깝게는 서울의 허파 역할을 하고 있는 북한산의 심장을 뚫는 도로 건설이 예정되어 있다. 환경 문제가 단순히 생활 환경을 위한 실천의 문제라면 우리는 많은 것을 이루어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쓰레기 종량제, 일회용 제품 안 쓰기 운동, 쓰레기 분리 수거 운동, 에너지 절약 운동 등을 국민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고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직면한 환경 문제로 크게 지구 온난화, 오존층 파괴 등 당장 손에 잡히지 않는 대규모의 문제가 있으며(가깝게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 변화에 대한 직접적인 피해로는 중국 사막화의 가속화와 국내 황사 발생이 빈번하고 심하게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직까지도 이미 정부에 의해 결정되고 계획된 정책으로 인한 환경 파괴가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지구 환경 문제에 대한 적극적 대응 활동으로서 국제 연대 활동을 강화해 나가고자 한다. 특히 환경운동연합은 아시아 최대의 환경 단체이다. 이는 아시아 내에서의 환경 단체의 역할과 책임이 크다는 것을 또한 나타낸다. 이제 국내 환경 문제뿐만 아니라 환경연합은 아시아 환경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려고 한다. 이제까지 간헐적으로 이루어져 왔던 사안별 활동을 종합하고, 국제 협력을 위하여 정보를 공유하고 활동가들의 교류를 활발히 전개해 나갈 것이다. 또한 올해는 지방 자치 단체 선거, 월드컵 개최, 그리고 대선과 같은 큰 행사가 많이 있는 해이다. 환경연합은 올해 지방 자치 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풀뿌리 환경 운동의 모범을 만들고 녹색 생활 자치를 이루려고 한다. 새만금 간척 사업 반대 운동을 경험하면서 현재 우리나라 행정의 비효율성을 뼈저리게 깨달았으며, 풀뿌리에서부터 환경 문제에 대한 적극적 인식을 바탕으로 주민 참여와 민주적, 자치적 역량을 개발하고, 이에 기반한 시민 사회의 힘으로 생명 가치를 사회적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우리의 환경은 한번 파괴되면 돌이킬 수 없다. 환경 파괴는 우리 생명의 파괴이며 동시에 미래 세대의 미래를 빼앗는 일이다. 우리는 환경 운동이 더 이상 필요 없는 그러한 녹색 세상을 꿈꾼다.

 

[사목, 2002년 6월호, 백명수(환경운동연합 부설 [사]시민환경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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