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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그리스도교는 자연과 화해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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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0 ㅣ No.462

그리스도교는 자연과 화해할 수 있는가

 

 

몇 해 전에 대구에서 천주교, 개신교, 불교, 원불교, 천도교, 유교 등 6개 종단이 모여서 각 종단의 자연관에 대해 발표하고 토론하는 모임에 참가한 것이 있었다. 이 자리에 모였던 각 종단의 발표자들이 하나같이 모두 ‘자연 환경을 보호해야 하는 것이 자신이 소속된 종교의 교리’라고 말하여 분위기가 화기애애했을 뿐 아니라 목사님의 길고 길었던 기도 소리도 듣기 좋았고, 원불교의 목탁소리도 자장가처럼 감미롭게 들렸던 기억이 새롭다. 이러한 추억이 있기에 필자에게는 「사목」에서 특집으로 마련한 본 난의 “그리스도교는 자연과 화해할 수 있는가?”라는 주제가 조금은 이상한 감으로 다가온다. 이 주제에 대하여 필자는 “그리스도교는 자연과 친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라고 되묻고 싶은 심정이다.

 

하여간 환경 문제 극복을 위한 전인류의 꾸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져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기술 문명이 가져온 문제들을 극복하는 방법도 그 기술의 영역 안에서 찾아 나가야 하겠지만, 이제 우리는 삶의 방법과 삶에 대한 자세를 근본적으로 고찰해 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때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그야말로 삶에 대한 새로운 영성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존재와 섭리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앞날에 희망을 줄 참된 새로운 영성을 발굴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피조물에 대한 성서 안의 가르침, 초 · 중세기의 가르침,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그 이후의 교황들의 가르침을 지면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간략히 살펴보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요소들 중에 원리적인 것을 몇 가지 언급하도록 하겠다.

 

 

I. 구약의 세계 안에서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는 창세기 1장 28절의 구절이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의 창조물에 대한 태도에 많은 영향을 주어 온 것은 사실이다. 이 구절에 의하면 성서가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계를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지배할 것을 강력히 요청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오늘날 우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환경의 위기가 “창세기 1장과 정통 그리스도인들의 자연에 대한 오만에서 기인한다.”고 비난을 던지는 사람과 문화권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 구절은, 당시 척박한 땅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자연과의 힘겨운 투쟁 속에 생존을 위해 몸부림쳐야만 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환경을 염두에 두어야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 막강한 힘을 가진 자연 앞에 연약한 존재로 놓인 인간의 첫 번째 과제는 그 자연을 잘 다스려 자신의 생존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었다. 히브리어로 “땅을 정복하여라.”는 카바스(Kabas)와 “모든 짐승을 부려라”는 라다(radaj)는 당시 근동지방의 왕이 자신의 영토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과 짐승들의 안녕을 위한 책임의식 아래 지배하고 통치했던 것처럼 정복과 지배의 대상을 보호해야 하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지 짓밟아 파괴하고 죽여 없애버리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었다. 짓밟아 파괴하고 죽여 없애버리고 나면 지배할 대상조차 없어지고 말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 28절에 대한 해석이 구약성서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시편 8장에 의하면 인간은 모든 창조물들이 자신의 발 아래에 놓여있는 것을 앎으로써 자신도 하느님의 지배 아래 놓여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창세기 3장의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서 설정해 주신 경계를 넘어서서 잘못을 저지르는 이야기는 창조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이 무제한적일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제 인간은 자신을 강한 자기 훈련과 절제, 논리적 사고 아래에 두어야 하며, 창조물에 대해서 윤리적 책임감을 가져야 하였다. 인간은 자신의 생존 유지를 위하여 집을 지어 마을을 이룬다든지, 농사와 목축을 하는 등 개발 가능한 범위 안에서만 피조물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게 되었다(창세 3,17-23 참조).

 

창세기에 의하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설정해 주신 경계선을 넘은 인간의 범죄는 그 뒤에도 이어져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창세 4.1-16참조), 마침내 “하느님께서는 세상이 사람의 죄악으로 가득 차고 사람마다 못된 생각만 하는 것을 보시고 왜 사람을 만들었던가 싶으시어 마음이 아프셨다.”(창세 6.5-6)는 상황까지 도달하였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홍수로 땅을 휩쓸어 인간들을 벌하시고 만다(창세 6.7-8.13 참조). 인간의 범죄와 생태계의 재앙이 결부되는 이 같은 상황은 창세기에 이어서 성서 전반에 걸쳐 무수히 재등장한다(레위 18.25: 신명29.22-25: 아모 4.7: 묵시 8.10-11 참조).

 

모세 율법의 시각은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창조물에 대한 인간의 청지기 직분과 동물에 대한 존중심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이스라엘이 땅을 하느님에게서 선물로 받았다는 사실이 이러한 생각의 기본 바탕을 이루고 있다. 출애굽기 23장 10정부터 12절을 살펴보면 땅을 돌보는 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 야생동물과 가축의 필요를 감지하는 섬세한 배려 등이 있다.

 

이러한 하느님의 명령에 사람이 순종해야 땅에서 안녕과 풍요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설정해 주신 경계선을 인간이 넘어서면 심각한 결과가 따른다는 것을 모세 율법은 경과하고 있다.

 

"너희는 하느님 두려운 줄을 알아야 한다. 나 야훼가 너희의 하느님이다. 너희는 내가 정해 주는 규정을 실천하고 내가 세워주는 법을 지켜 그대로 해야 한다. 그러면 그 땅에서 안심하고 살 수 있으리라"(레위 25.17ㄴ-18).

 

모세 율법은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 것을 명하고 있다(신명 25.4 참조). 이 사려 깊고 조심스러운 태도는 가축의 범위를 넘어서서 모든 야생 동물들에게까지 확대되고 있다.

 

"길을 가다가 나무 위나 땅 바닥에서 새끼나 알이 들어있는 새 집을 보았을 때 어미가 새끼나 알을 품고 있거든 어미째 새끼를 잡지 말라. 어미를 날려보내고 나서 새끼를 잡을 수는 있다. 그래야 너희가 잘되고 오래 살 것이다"(신명 22.6-7).

 

이것은 모세 오경의 저자가 자연세계의 창조력을 훼손시킬 때의 결과를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개인과 공동체를 위하여 식량을 제공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식량을 마련을 위해 동물의 번식력과 씨곡을 해쳐서는 안되는 것이다. 만일 그런 짓을 할 경우에는 다음에 오는 세대들이 고통을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여 엄청난 사치와 소비생활을 일삼는 자들이 땅을 파괴하고, 파괴된 땅을 그들을 응징하리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아모 4.1-12 오엘 1.16-18: 이사 5.8-10 참조).

 

 

II. 신약의 세계 안에서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환경 문제의 배경이 되는 지상 재물에 대한 집착과 과소비에 빠져들지 않도록 자주 경각심을 불러일으키신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시오. 지팡이도 자루도 빵도 은전도 가져가지 말고 속옷도 두벌씩은 지니고 가지 마시오”(루가 9.3).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시므로 우리는 재산을 좀더 많이 모으려고 노심초사할 필요가 없고, 더구나 호화로운 생활과 과소비로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탕진해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세계에 대하여 준중과 관조의 자세를 유지하셨다.

 

“그런즉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 목숨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또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시오. 사실 목숨은 양식보다 더 소중하고 몸은 옷보다 더 소중합니다”(루가 12.22-23).

 

자연은 예수님의 생애에서 불가분의 요소였다. 그분은 공생활 직전에 성령의 인도로 광야로 나가셨으며(마르 1.13 참조), 하느님의 뜻을 알고 수용하기 이해 자주 무리와 떨어져 산에 오르셨다.(마태 14.23: 17.1 :마르 6. 46 참조). 또한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기적을 베푸셨으며(마태 13.1-52: 마르 4.35-41 : 요한 21.1-4참조),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태 13.4-9.18-23 : 마르 4.3-9.13-20 : 루가 8.5-8.11-15 참조), 포도나무의 비유(요한 15.1-17 : 마르 12.1-12 참조), 양치는 목자의 비유(요한 10.1-18 참조) 등에서와 같이 자주 자연세계를 동원하여 당신의 복음 말씀을 전개하셨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자연세계를 친숙함과 애정으로 대했으며, 이 자연세계의 생명을 존중하고 편들었다. 이런 입장 때문에 부득이하게 요구된 것이 당신의 고통과 죽음이었다. 예수께서는 생명을 증진시키고자 자신을 비우고 종의 모습을 취하셨고9 필립 2.7 참조), 생명을 거스르는 죄를 없애고자 당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시기까지 한 것이다(히브 9.12 참조).

 

 

III. 초 · 중세기의 교회 안에서 

 

유스티노, 안치오키아의 테오필루스, 타치아누스 등과 같은 초대 교회 교부들은 물질계를 사악한 것으로 규정한 그노시스 이단의 이원론을 반박하여 창조물 전체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으로 선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전체는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교부시대의 중요한 특징 중의하나인 수도자와 은수자들은 도시생활의 번뇌와 소란을 피해 자연과 좀더 가까운 상태에서 자신을 정화하고 하느님과 일치하고자 즐겨 광야를 찾아 나갔다.

 

그리스와 로마의 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육체 노동을 천한 일로 여겨 멸시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누르시아의 베네딕토는 노동을 기도와 결합시킴으로써 모든 종류의 육체 노동을 고귀한 것으로 만들었다. 베네딕토회 수도자들은 따을 소중히 가꾸면서 땅이 주는 유익한 것들에 감사하고, 땅이 인간에게 지속적으로 결실을 맺어 줄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자연의 예측할 수 없는 변덕과 횡포로부터 인간응 보호하도록 자연을 길들이고 인간의 통제 하에 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프란치스코와 그를 따르는 형제들은 자연세계를 인간에게 식량과 의복과 거처를 마련해 주는 존재라는 실용주의적인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고 경이와 찬미, 감사와 기쁨의 대상으로 보았다.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이 현존을 비추는 거울이고 하느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계단이었다. 프란치스코가 시작하였고 그의 정신적 영향 아래에 제자들이 완성한 “태양의 찬가”는 창조계 전체와 깊은 가족적 유대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IV. 현대의 교회 안에서

 

제1 · 2차 세계대전 이후, 상황과 의식이 많이 변화한 일반 세계와 진지한 대화를 모색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네 개의 헌장과 아홉 개의 교령 그리고 세 개의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모두 열여섯 종류의 문헌 전체 안에 현대세계에 대한 진단과 대화를 위한 노력이 보이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현대세계의 사목헌장”(Gaudium et Spes)은 현대 문명의 복합적인 면모들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여 있다. 공의회 교부들은 인간들이 매우 커진 자신의 힘을 긍정적인 측면으로 활용하도록 조절하는 능력을 스스로 잘 갖추고 있지 못함을 염려한다. 인류는 자신의 내부 안에 이중적인 분열과 갈등의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여러 가지 어려운 현상들이 사회 안에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서론에서 (4-10항)교부들은 교황 요한 23세의 회칙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바와같이 ‘시대의 표징’에 대해서 사회학적인 입장으로 분석해 들어간다. 이들은 인류가 급진적인 전환기에 서있음에 인식하고 있는데 이 전환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자체 안에 내포하고 있다. 균형있는 성장을 이루어 나가야 하는데 정신적인 영역의 발전이 기술 문명의 발전과 보조를 함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질서의 균형이 파괴되어 가고 있는 심층에는 인간의 내부 균형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제1부 3장에서 공의회 교부들은 인간의 모든 행위가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로써 정화되고 완성되어야 함을 주지시키고 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972년 6월 5일 스톡홀롬에서 유엔이 개최한 자연환경보호를 위한 국제 회의에 특사를 보내 ‘자연 환경 헌장’이라고 할 수 있는 글을 발표하여 환경에 대한 교회의 관심을 표명하였다. 이 글에서 교황은 삶과 세상에 대한 사고를 근본적으로 재고찰하여 지금까지의 사고 습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각을 계발하는 것이 시급히 필요하게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은 생명체의 생존에 필요한 질서들과 재생 능력을 존중해야 한다. 이 회의에서는 특히 화학자들이 자연 환경을 다시 건강하게 회복시키는 일에 앞장서 줄 것을 요청하였다. 교황 바오로 6세는 기술 문명이 더 이상 포기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 그 이용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정신이 좀더 깨어서 기술문명이 자연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 인간과 모든 생물의 생존을 위협하지 않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0년 1월 1일 세계 평화의 날을 기해 “창조주 하느님과 함께 하는 평화, 모든 피조물과 함께 하는 평화”란 친서를 발표하여 창조질서 보호의 시급성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교황은 점점 확산되는 자연환경의 심각한 오염 상태에 대면하여, 이제는 더 이상 지금같이 지구의 자원을 소모해서는 안됨이 분명해졌다고 강한 어조로 말하고 있다.

 

인간이 하느님의 계획으로부터 벗어나서 행동할 때 무질서를 유발하게 되고 이것은 다른 피조물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 현 교황은 만약 인간이 하느님과 평화를 유지하지 못한다면 세상 전체도 평화를 누릴 수 없다고 말한다. 현재 존재하는 생태계 위기의 여러 요소들은 윤리적 문제에 원인을 두고 있다. 몇 가지 피해들은 이미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에 놓여있어, 개인과 국가 나아가 국제사회 모두가 책임의식을 심각하게 느끼는 것이 필요하다. 교황은 생태계 위기가 인간의 윤리성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가장 뚜렷한 표시로 생명에 대한 경시를 들고 있다. 또한 그는 자연 환경 문제의 여러 요소들이 국가적 차원을 넘어서고 있으므로 그 해결책도 국제적 차원에서 공동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세계 내에 존재하는 구조적 빈곤을 해결하지 않고는 생태계의 진정한 균형도 가질 수 없다고 덧붙여 말한다.

 

그러므로 환경 보호를 위한 교육이 시급히 요청되고 있고,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의식, 이웃과 자연 환경에 대한 책임의식을 키워 나가야 한다. 이 교육에 대한 의무는 교회를 비롯해서 모든 종교들과 국가 그리고 사회의 이웃과 자연을 사랑하도록 가르치는 첫 번째 의무를 지고 있음을 교황은 강조하고 있다. 끝으로 그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자연에 대한 태도와 영성을 언급하면서 하느님께 의해 창조된 모든 좋고 아름다운 것들과 형제적 사랑을 나누는 정신을 가질 것을 권유하고 있다.

 

 

V. 우리의 자연 환경을 지켜 나가기 위한 방안들

 

앞에서 소개한 내용들 안에 우리가 해 나가야 할 사항들이 다각도로 제시되고 있다. 필자는 이것을 종합하여 다음과 같이 세 개의 항으로 정리해 보았다.

 

1. 환경과 생태계의 상황과 원리에 관한 교육 강화

 

우리의 삶의 환경이 어려워지면서 환경 보호에 관한 말들이 많이 나오고 있지만 단편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실정이고, 초 · 중 · 고등학교와 같은 일선 교육 현장의 환경 교육도 교육 시간이나 교육자의 전문성이 매우 열악한 상황에 있다. 교회 안에서는 심지어 환경 문제를 언급하는 성직자나 평신도들을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감상주의자로 취급하기까지 했다. 근래에 들어 환경 문제에 관한 의식이 고취되고만 있지만 아직도 전문성과 교육시간이 매우 빈약한 상태이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생명들이 존중받고, 우리 스스로 생명을 존중하기 위해서도 우리의 삶의 현장, 곧 생태계의 원리와 상황에 대해서 충분히 파악하고 교육해 나가야 하겠다. 우리의 삶의 환경이 인구 과잉으로 인해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르고 있어서 다른 생명체들이 생존할 공간을 점점 잃어가 수많은 종(種)들이 지구상에서 매우 빠른 속도로 멸종되고 있고, 영양 공급, 건강, 가난, 실업, 도시화, 빈부 격차, 환경 오염 등 많은 문제들이 발생되고 있다. 사람들 상호간의 생존 경쟁이 점점 더 치열해지면서 대도시의 삶은 하루하루가 사람들 지치게 하여 삶의 질이 낮아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개선해 나갈 수 있는 출발점을 모색하기 위해서도 우리의 환경과 생태계에 대한 교육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겠다.

 

이 환경과 생태계는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삶의 터전으로 만들어주신 것으로 소중한 것이다. 여기서 소중하다는 것은 생명을 펼쳐 나갈 수 있는 가능성만이 아니라, 그 한계선을 인식하는 것도 소중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인간은 그 한계선을 바르게 알아 그 선 안에서 살아가도록 자신을 조절해 나가야 한다. 그것을 인식해 낼 능력이 결핍된 다른 생명체들도 자연이 알아서 조절해 주지만 사람은 스스로 조절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엄청난 종류의 고통들이 야기될 것이고, 그것은 인류에게 너무나 큰 비극이 될 것이다.

 

2. 절제와 소비 절약

 

오늘날의 환경 문제는 인구 과잉과 더불어, 수많은 사람들이 과다한 물질적 소비에서 삶의 행복을 찾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생태계가 부양해 낼 수 있는 수로 인구를 조절하기 위해서도 각자가 강인한 정신력으로 절제의 미덕을 길러 나가야 한다. 오늘날 범람하고 있는 쾌락주의적 분위기를 조성한 것도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고, 이 문화에 의해 고통을 겪고 있는 것도 같은 사람들이다.

 

소비적 삶의 자세는 생필품을 필요로 하는 것을 넘어서서 향락을 추구하고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원자력 문제, 폐기물 문제 등 지구 환경에 커다란 부담이 되고 있다. 우리 각자는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좀더 강하게 인식해야 하겠다. 근검 절약하는 생활이 미래를 보장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인식하면서도 현재 과소비 풍족 만연해 있는 것은 우리의 정신력이 아직도 소비적 형태를 극복할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사실을 지적하기는 쉬워도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실제적인 실천으로 이끄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배움에 왕도가 없듯이 환경 문제의 극복 방안에도 왕도는 없는 것이고, 각자가 강인한 정신적인 무장으로 스스로를 제어하여 환경 친화적인 삶의 길을 걸어 나가야 할 것이다.

 

3. 정신적 역량 증진

 

신자들을 포함해서 일반 사람들이 구체적인 현실 생활에서 접하는 어려움들이 매우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음에도 현존하는 환경 문제의 해결 방안으로 가장 무난하게 권고할 수 있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두가지와 정신적 역량 증진이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정신적인 영역을 지니고 있고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인간이게 하는 요소이다. 타자기만큼 크던 계산기를 아주 작은 수첩만하게 줄였지만 성능은 훨씬 더 뛰어나게 만드는 그 능력으로 물질의 과소비적 삶에서가 아니라 소박한 삶 속에서 풍부한 정신적 삶을 키워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을 앞서 살아갔던 수많은 성인들 중에서 앞에 소개한 프란치스코의 정신과 삶의 자세는 우리에게 큰 시련 될 수 있다. 그는 소박한 물질적인 삶 속에서 풍요한 정신적 삶을 살아간 사람으로서, 풍부한 물질 속에서 빈곤한 정신적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사목, 1997년 10월호, 전헌호(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신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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