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일 (수)
(홍)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윤리신학ㅣ사회윤리

[환경] 환경과 신학의 문제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0 ㅣ No.459

환경과 신학의 문제

 

 

환경운동은 지난 1990년 이래로 양적 질적으로 발전했지만 지금의 환경문제는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외면 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왜 그럴까? 환경문제가 마치 유행처럼 퍼지고 있고 시민 모두가 당연히 공감하고 있지만 실제적인 우리의 생활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TV나 신문에서도 끊임없이 환경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무슨 샛강 살리기라든가 농촌 살리기라든가 그런 스카우트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리고 세계 환경의 날(6월 5일) 행사, 쓰레기 줍기, 쓰레기 종량제처럼, 이것만으로 환경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환경 개량주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조사에 의하면 어린이로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가장 중요한 이슈는 환경문제라고들 사지만 환경운동은 아직도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고 전문성도 결여되어있으며 예산도 거의 없는 실정이다. 우리 나라의 시민운동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문제 해결은 관(官)을 통해서 하려는 것도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또한 시민들은 돈을 더 벌고 싶고, 더 나아가서 쾌적한 환경도 누리고 싶은 모순성에 빠져있는 상태가 현실이다. 산업적 생활양식은 포기하지 않으면서 어떻게라도 환경문제를 해결해보려는 이 모순과 틈을 누가 메꿀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파생된다. 환경을 파괴하면서 편리한 생활을 누리고 싶다는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느냐는 물음이다.

 

여기에서 이 문제를 기술 공학적인 측면에서는 해결할 수가 없다. 이 문제는 깨달음의 문제, 가치관의 문제, 영성의 문제 즉 신학의 문제로 들어서게 된다. 예를 들면 쓰레기, 자동차, 오존층의 파괴, 농약, 생명공학 등의 문제는 이른바 지속 가능한 개발 논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물건과 환경에 대한 윤리적 태도, 즉 영성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종교가 과연 환경윤리를 향한 노력에 도움을 줄 수 있단 말인가? 린 화이트 교수는 이미 1969년의 유명한 논문1)에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인간과 환경을 명확하게 구별하는 이원론적 윤리 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 말은 그리스도교가 환경의 파괴하는 사상적인 틀을 제공했다는 뜻이다. 환경주의에 대한 성서적 근거가 있다 하더라도 지난 2천년 동안 그리스도교의 전통은 인간을 중심으로 해석했고 오히려 노예제도의 옹호자들이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괴롭히고 자신이 속한 부류만의 이익을 정당화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자연의 파괴를 정당화하는 데 성서를 이용하였다. 문제의 요체는 그리스도교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종교 중에 가장 인간 중심적인 종교라는 것이다.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이나 공통적으로 모든 창조물은 오로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믿어왔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과 자기 영혼의 구원만을 생각한다. 개인 영혼 구령관, 이것이 문제이다.

 

그리고 린 화이트 교수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환경문제의 근원은 종교에 있으므로 그 치유도 종교적이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성 프란치스코의 ‘우주적 평등주의’를 그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필자는 5년 동안의 환경운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이 문제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무슨 운동을 소개하려는 것이 아니고 운동에 대한 신학적인 틀을 제시하고 반성하고자 한다.

 

 

I. 종교의 녹화(greening), 아직 멀었다

 

어느 종파이든 그들의 영성이나 사상이 어떠하든 아직은 환경에 대한 윤리적 태도가 정립되어있지 않은 것 같다. 반핵과 반원전 문제만 하더라도 그들의 입장은 근본주의적이거나 경제적, 가치적이거나 지속 가능한 개발의 논리이다. 샴푸 덜 쓰기, 쓰레기 줄이기, 남기지 않기, 재활용학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환경을 환경으로만 보는 범주를 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환경에서 생명으로, 생명에서 생명윤리로, 생명윤리에서 영성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우리 교회는 수년에 걸쳐 생태계의 문제에 대해서 한마디 언급도 없이 지내왔다. 길고 긴 교황의 대 사회적 문헌들 어디에도 지구나 지구의 생명 유지체계들을 그리스도교 공통체의 도덕적 관심의 장으로 여기는 언급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있다 하더라도 애매모호하게 서술되어 있을 따름이다. 이를테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사회적 관심」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대부분의 인간의 평화와 정의 문제에 편중된 대 사회교리라는 인간 중심주의 입장이 커다란 덩어리 속에서 맛배기로 곁들여 한마디 언급되었던 것이 고작이다.

 

역대 교황의 사회 회칙과는 관계없이 한국교회는 트리엔트공의회 수준의 교리로 살고 있는 듯하다. 여전히 우리 의식 속에서는 성속 이원론(聖俗 二元論)이 지배하고 있다. 이 구원관이 수정되지 않는 한 환경문제는 여전히 특수사목의 한 분야로 혹은 구원의 들러리로 보게 될 것이다. 인간 중심주의 구원관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제는 슈바이처의 생명 경외 사상이 필요한 때이다. 각 교구나 본당, 주일 학교, 수도원과 수녀원, 신심단체에서 창조론적 영성에 입각하여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 인간과 물건과의 관계, 우주 속의 인간의 위치에 대하여 다급하게 말해주어야 하는 데 대신(對神), 대인(對人) 관계에만 치중하고 있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관계를 정립하지 않는 한 무슨 제도적 장치, 기술적 처방, 운동적 전략, 과학적 대안이 나올 리가 없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물질 즉 땅, 나무, 숲, 공기, 물을 생명으로 보지 않는 한 우리는 여전히 물질을 박해할 것이다.

 

우리가 만약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생태계 문제에 관한 대안을 교부들 안에서 찾는다면 베네딕도 성인의 찬미, 겸손, 관리, 육체 노동, 공동체의 영성과 프란치스코의 가난과 우주적 평등주의 영성이 우리가 찾는 답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물건을 하나의 고립된 개체로서의 물건으로 보는 한 쓰레기 문제는 해결할 길이 없으며 모든 물질들, 심지어 티끌까지도 창조주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다고 믿었던 프란치스코의 믿음이 없는 한 모든 물건을 쓰고 버릴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물활론이다. 그리스도교 물활론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은 도덕적 고려 사항을 넓히는 것이다. 윤리적인 표현은 하느님, 천사, 성인 그리고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은 그 나름대로 거룩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마틴 부버가 사용하는 전문 용어에 따르면 ‘거룩하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생각은 다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개인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으로 보게 된다. 물활론(애니미즘)과 더불어 인간과 환경과의 상호 작용을 ‘나-너’의 관계로 특징지운다. 그러나 범신론은 아니다. 범신론자들은 자연의 대상과 자연 과정에서 신을 인식하였다. 바다의 신 - 그리이스의 포세이돈, 로마의 냅튠 - 은 다양한 신들 중의 하나로 잘 알려져 있다. 역사상 유럽의 교회가 초월 신앙 때문에 서민들이 믿고 있던 자연 종교를 억압한 것도 사실이다. 우리 한국의 민간 신앙도 그 예에 속한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성인은 인간 외의 존재도 ‘형제’와 ‘자매’라고 하였다. 소위 사람을 잡아먹는 늑대까지도 그리스도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 생각하면서 달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프란치스코 성인은 땅을 표현하는데 ‘어머니’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이전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서 찾아볼 수 없다. 우주적 평등주의 영성은 최근 현대 물리학에 있어서 이 우주 속에 모든 만물이 하나로 연결되어있다는 유기체 학설과 꼭같지 않는가! 내 생각에는 오늘날 우리 종교가 창조 영성을 기초신학의 새로운 틀로 잡지 않는 한 새로운 생태 시대의 비전을 주지 못할지도 모른다.

 

 

II.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평화, 창조물과 평화

 

1990년 1월 1일 세게 평화의 날 행사 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드디어 생태 윤리에 관한 첫 번째 체계적인 메시지를 발표하였다. 교황님은 이미 1979년 프란치스코를 생태학의 주보 성인으로 선택하였다. 이 메시지에서 교황님은 생태학적 문제와 종교적인 측면을 아주 신중하게 결부시키면서 보다 더 심오한 차원인 도덕적, 종교적 위기를 감지하고 있다. 생태학적 위기를 도덕적인 문제로 다룬다는 것이다.

 

이 메시지 중심 부분에는 생태학적 위기가 초래된 이유를 무분별한 과학과 기술학적 진보의 적응, 생명에 대한 존중심의 결여, 무분별한 유전학적인 조작으로 인한 생물학적 불균형이 초래될 가능성, 탐욕과 이기심으로 분석하고 있다. 메시지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도덕적 대안을 모색하고 있는 데 다음 6가지이다. 그 하나로 개발 도상 국가와 고도로 산업화된 선진국들 간의 연대의식을 제시하고 있지만 WTO 체제 속에모든 시장이 종속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특히 제3세계가 받을 내적인 상처는 크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경우 미국의 선통관 후검사는 아예 국민의 주권조차도 무시하고 있다. 이 산업주의 세계간에는 무역 전쟁이 불을 뿜을 뿐이지 연대의식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미국과 일본의 상호 목조르기 싸움은 이른바 WTO 체제가 강대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이한 합법적인 기구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두 번째 구조적인 형태의 빈곤을 중점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점이다. 피해야만 할 전쟁, 현대의 소비주의적 생활양식의 변화, 대중에게 생태학적 책임감의 교육, 명상을 통한 창조의 아름다움의 성찰이다. 앞의 3가지는 계층 구조적인 문제로서 사회유리이고 뒤의 3가지 요소는 검소, 절제, 규율의 개인 윤리이다. 교황은 사회윤리와 개인윤리를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

 

사실 오늘날의 생태학적 위기는 단순히 개인적인 죄나 회개의 문제만은 아니다. 부의 축적 문제, 핵 쓰레기 문제, 오존층의 고갈, 자원 고갈의 문제, 생산과 유통의 문제, 세계 경제와 국가 경제, 다국적 기업의 문제, 수입 농산물의 문제, 대재벌의 소비 산업 문제는 개인적이 결정과 행동의 일회적인 소산이 아니라 기업이나 재벌 등의 집단적인 의사 결정의 결과인 것이다. 그린벨트 안에 초호화판 빌라를 짓는 것은 개인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권력이 개입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림벨트를 파 먹는 자는 다름아닌 정부와 가진 자이다. 환경의 보호자이어야 할 정부가 러브 호텔, 골프장, 별장, 정부 시설물등의 마구잡이 건설을 허용하여 그린벨트를 흔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삼릉 골프장의 경우도 그 예에 속한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지나치게 개인윤리만 강조한다는 것이다. 문제의 구조적인 뿌리를 캐들어가기를 회피하면서 개인의 회개만으로 생태학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겠느냐는 물음이 나온다. 정부와 매스컴도 덩달아 개인의 도덕적이 의지만을 떠든다는 점이다. 문제를 개인화시킴으로써 본질을 은폐시키려는 음모가 아닌가. TV 광고나 신문 광고를 보면 한 쪽에서는 환경문제를 떠들어대면서 다른 한 편에서는 환경을 파괴하는 상품을 대문짝만하게 선전하도 뒷돈을 기업이 대는 식이다. 조선일보, 동아일보를 보라. 즉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교회는 좀더 섬세하게 그리고 아주 시급하게 사회교리를 통하여 윤리적 성찰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작업과 전략, 도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각 교구, 본당, 지역 협의체 본당들 간에 연대하면서 문제의 사안에 따라 시민운동 공동체와 연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고령 골프장 건설을 반대하는 모임에도 함께하고, 교회가 나서서 미국의 선통관 후검사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시민 단체들을 끌어당기는 작업도 동시에 해야 한다. 지역 협의체 안에 교회도 참가하여 생활의 정치화, 정치의 생활화에 함께해야 한다고 본다.

 

교회는 비폭력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단순히 태아 발배지만 들고 나갈 것이 아니라 인간 중심주의 윤리를 확대하여 반핵, 반원전, 굴업도 계획, 골프장 저지, 지방 자치제, 교육과 육아 문제, 도시락과 반찬 문제, 식품 공해, 수입농산물, 농촌, 농촌 문제 등에 동참하면서 인간 생명에서부터 환경 생명에 이르기까지 비폭력적인 전략을 쨔야 한다. 교황님의 메시지는 이런 위기를 오직 그리스도교 세계관으로 돌리는 비판주의도, 현대세계를 거부하는 반문명적 태도도, 뉴에이지 운동도, 범신론도 모두 거부한다.

 

 

III. 인간 중심주의적인 생태윤리

 

교황님은 자연을 신성시하는 태도도, 범신론도 거부하고 자연을 신성화하는 작업보다도 자연의 복지를 위해 도덕적인 책임 의식의 높이는 일이 시급하다고 진단한다. 이 점이 이른바 뉴에이지운동과 전적으로 다른 점이다. 모든 자연 대한 책임있는 경영윤리, 관리인직의 윤리를 정립하도록 이끈다. 이것은 베넥딕도 수도회의 전통이다. 그리고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창조 영성 즉 자연을 깊이 명상하고 찬미하는 중요한 역할도 덧붙인다. 그렇다면 창조 영성은 무엇이며 구원 영성은 무엇인가? 구원 영성은 오히려 자연에 대해서, 여성에 대해서도 적대적이지 않았는가? 구원을 어디까지 포함시킬 것인가? 나무나 돌도 포함시킬 것인가? 창조주의 자연은 초월적인 실체와의 관계안에서 이루어진다. 하느님만 빼고 다 창조되었는데 창조의 개념을 확장시켜 인간이라는 종을 넘어 다른 살아있는 존재도 포함시켜야 한다. 하느님의 목표는 ‘전우주론적 구원’이다. 왜냐하면 범신론에서 유일신으로의 전환이 자연의 신성화에 대한 박탈을 가져왔으며 그 결과 환경에 대한 무감각이 자연의 파괴를 일삼게 되었다는 비판이 있기 때문이다.

 

 

IV. 환경윤리의 방향

 

윤리의 신학적인 틀을 고찰하기 위한 방법은 ‘창조’, ‘이웃’, ‘정의’, ‘평화’와 같은 몇 가지 용어들을 추적해 들어가는 것이다.

 

1. 창조

 

창조는 신학적 용어이다. 다시 말해 그 의미는 하느님의 실체관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모든 사물의 총화를 나타내는 신학적 용어이다. 히브리인들은 창조를 총체적으로 생각한다. 이를테면 대지, 땅, 가축, 건강, 가족, 도구, 상업, 통치제도, 마을, 도시, 시골, 관계양식과 사회적인 거래, 바위, 나무, 야생동물, 태양, 달, 별, 심지어 원수들까지도, 창조주 하느님을 제외한 모든 사물들이 창조라고……. 더 정확하게 하느님과 관련되어 있는 모든 사물들이 다 창조이다. 엄밀히 말해 창조는 신학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용어이지 구약의 관념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동사형 ‘창조하다’는 성서에서 두루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흔히 어떤 막연한 실체를 언급할 때 쓰는 명사형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창조주는 끊임없이 창조하고 부양한다는 의미를 강조함으로써 사실, 미완성이라는 이 세상의 특징을 역설하고 있는 셈이다. 창조는 하나의 거대한 공공의 집(oikos)으로 묘사된다. 영어의 에코노믹스(economics), 에큐메닉스(ecumenics), 에콜로지(ecology), 오이코노미아 투테우(oikconmia tou Theou)와 같은 용어들은 모두 같은 어근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된 질서는 일원론적인 인식임이 드러난다. 인간 중심주의적 창조관은 지양되어야 한다.

 

2. 이웃

 

누가 나의 이웃인가? 도덕적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사람뿐인가? 이들의 의미는 당연히 창조에 대한 인식으로 직결된다. 이웃은 우주적인 용어이다. 따라서 모든 존재가 이웃이다. 이웃은 모든 창조물이며 존재에 참여하는 모든 것이다. 이웃은 모든 존재이다. 까치도 산도 나무도 땅도 이웃이며 창조물이다. 이제 환경은 환경이 아니다. 흙과 물과 공긴는 환경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이웃이며 생명이다. 이러한 앎 없는 한 환경은 환경으로만 파괴될 것이다. 인간이 까마귀를 죽이고 산을 파괴하고 물을 오염시키는 것은 이웃을 죽이고 창조주의 창조성을 죽이는 것과 다름없다. 결국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1950년대 미국의 신학자 니이버의 이웃에 대한 글을 한번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우리가 존재에 참여하는 모든 것이 이웃임을 상기해볼 때 우리의 유리신학은 수정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내 몸과 같이 사랑하도록 명받은 나의 이웃 동료는 누구란 말인가? 가까이 있는 자도 멀리 있는 자도 내 이웃이며 시간적, 공간적으로 나와 거리가 먼 자도, 신념이나 신심이 나와 전혀 다른 자도 다 내 이웃이다. 분명 과거, 현재, 미래의 존재들도 다 이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류만이 이웃의 전부라 할 수 없으며 오히려 이웃의 한 작은 마디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웃을 각 공동체들이 이루는 거대한 공동체로 본다면 타당할 것이다. 로마 가톨릭교회라는 공동체의 아우구스티노가 이웃이며, 아테네의 소크라테스가 러시아 민족이, 우리가 지지른 과실의 결과를 감당해야 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들이, 우리가 위탁받은 자연의 부와 그 밖에 귀중한 공동의 선물들을 고스란히 물려주어야 할 미래의 사람들, 이 모두가 이웃이다. 인류가 이웃이기도, 천사가 이웃이기도, 동물이나 무생물의 존재들도, 존재에 참여한 모든 것이 이웃이다.2)

 

3. 평화

 

정의의 개념을 정의(定意)하는 가운데 또다시 ‘연구해’ 보아야 할 개념인 shalom(살롬)에 이르게 된다. 대개는 ‘평화’로 역(譯)되지만, 사실 샬롬은 하느님의 창조에 대해 품으신 모든 희망과 꿈을 압축하는 말이다. 살롬은 모든 영역 구석구석에 건강이 넘치고 풍요가 가득한 상태이다. 복지의 개념이 모든 피조물에게도 확대되어 무엇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두려움으로 소모되지 않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 샬롬이다. 샬롬은 곧 평정이며 평온이다. 더 나아가 샬롬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간직하고도 있다. 샬롬은 빵이며, 또한 춤이기도 하다.

 

샬롬의 반의어는 혼돈과 아노미이다. 보다 더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현재 난무하는 수많은 종류의 폭력들이 다 그의 반의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연, 샬롬은 인간활동의 전 음역을 발전 전개시킨다. 따라서 그림을 그리게 하고, 풍성한 수확을 거두며, 상업이 활발해지고, 어린이들은 씩씩하게 자라나고, 사랑하게 하고, 음악을 지어내게 하고, 희생자들을 돌보게 하고, 생산적이며 인간적인 제도들을 구축하게 하고, 안전과 보호를 창출하며, 신체적으로 보살펴주고, 정신으로 풍요롭게 성장시켜주며, 삶의 각 단계를 밟아 올라 갈 때마다 그 통과의례로 축하해주는 등등 삶은 다채롭고 풍성한 변주음을 울려내게 된다. 창조의 치료와 치유가 스쳐간 곳은 온통 화해와 평화가 감싸이게 된다.

 

그렇다면 샬롬에는 한낱 전쟁이나 피하고 폭력을 제한하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쟁의 문제는 간과할 수 없다. 대규모의 파괴를 일으키는 무기들 특히 핵, 화학, 생물학적 무기들이 우리의 유일한 안식처인 창조가 빚아낸 작품 위에 혼돈이 승리해 전대미문의 대파란을 일으킬 가능성으로 곳곳에 배치되어있다. 이전의 그 어떠한 전쟁도, 아무리 끔찍한 국지전이 벌어졌다 하더라도 미래의 이웃들이 가지게 될 바로 그 가능성에 막을 내리게 할 섬뜩하리만큼 경외로운 능력은 없었다. 이전의 어떠한 전쟁도 실제로 행성 자체를 죽게 하거나, 생명을 키우며 풍성하게 진화해나야 갈 수 없을 정도로 대기를 악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졌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어느 누구도 풍요한 창조가 일군 이 작은 텃밭을 한낱 한줌의 재로 탈바꿈시킬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대량 학살’이 뜻하는 그대로의 의미가 너무나 현실적인 가능성으로 다가오고 있다. 불로써 그 모든 존재는 연소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가장 완벽한 의미의 샬롬은 구석구석 전존재에 흘러넘치는 복지로 정의할 수 있지만, 협소한 의미에서 핵 폭발 및 생화학적 무기에 의한 환경의 파멸을 막는 것도 샬롬이다.

 

지금까지 몇 가지 개념들을 그려보았다. 이러한 격언을 인용하고 싶다. 어떤 사람이 자신은 결코 그 나무 그늘 밑에 앉아볼 수 없음을 잘 알고서도 한 그루 나무를 심을 때 바로 그 땅에 문화가 싹트게 된다. 인간의 창조만이 아니라 인간 이외의 존재들의 권리 및 요구를 고려하는 정의의 개념을 반영하는 정책과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자연도 또한 우리의 이웃이다. 교회의 역할도 달라져야 한다. 모든 행위에 환경적인 결과가 따른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새로운 창조, 새로운 공동체, 이에 따른 윤리 체계를 재구성해야 한다. 어린이와 성인들에게도, 도덕적 감수성, 존재의 이웃들에게 대한 경외, 존경, 감사, 연민을 키워주어야 한다. 창조는 하나이며 유한하므로 소중하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여전히 구원신학의 틀에 안주하고 있다. 사목자들도 그 틀 안에서 배웠기 때문에 개인 영혼 구령에만 매달린다. 가난한 자들에 대해 무관심할 뿐 아니라 생태학적으로 가난한 이웃들을 외면함으로써 파괴되도록 내버려두고 있다. 멸종 위기의 종들, 헐벗긴 산들, 침식된 경작지, 오염된 강, 산성화된 호수, 파괴된 농촌도 우리의 이웃이다. 우리 교회에서 벌이고 있는 갖가지 운동이나 살리기 운동이 아주 교묘하게 사업의 이름으로 변질되어가고 있으며 운동의 도덕성 또한 약화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생각에는 자본주의 사업은 운동을 반드시 실패하게 만들 것이다. 실제 그런 조짐이 보인다.

 

끝으로 환경과 직접적으로 관계있는 자본주의 시장을 어떻게 성화(聖化)할 것이지 대한 전략을 배워야 한다. 자본주의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호주의도 아닌 생태적 합리성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생태 경제를 창출하는 복음적 사회주의로써 나아가야 한다. 이른바 저자거리의 성화이다. 도시 소비자와 농촌 생산자를 함께 묶어서 유기농 직거래 공동체를 만드는 것도 지금의 사고파는 시장질서를 극복하는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모심의 확대이다. 성체를 저자거리 안에 모시도록 하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 고정된 실체로서 성모상, 십자가, 감식, 성당, 성직자와 수도자가 아니라 생명의 흐름을 모시는 영성이 우리시대의 중심과제이다. 사람들은 학교에 가야 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착각하고, 병원에 가야만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성당에 가야 하느님을 만난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고정된 실체로서 상을 모시는 영성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나무, 풀, 흙, 문화, 정치, 시장 등 티끌도 모시는 감성으로서의 영성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신세대에게 도구윤리, 물건윤리를 가르쳐야 한다. 그들은 무수한 물건 속에 사는 데도 물건을 그냥 쓰고 버린다. 물건윤리가 그들에게 필요하다. 그리고 물건윤리가 없다면 지구촌의 물자는 곧 바닥이 날 것이다. 우리 교회에서 생태 경제, 모심 영성, 물건윤리를 이 시대에 맞게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

1) Lynn White, Jr., 1967, "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ologic Crisis", Science Vol. 155.

2) Neibur et al., The purpose of the Church and Its Ministry: Reflection on the Aims of Theological Education, New York, Harper & Row, 1956, 38면.

 

[사목, 1995년 7월호, 정홍규(대구대교구 사목국 차장, 신부)]



315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