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홍)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예수님의 부활, 사회정의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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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7 ㅣ No.424

예수님의 부활, 사회 정의의 부활

 

 

한국 사회에서 ‘경제 정의’를 논하게 되면, 그리스도인은 그 정확한 의미를 알아듣기 어려울 것 같다. 따라서 ‘경제 정의’를 내포하는 ‘사회 정의’를 논하는 편이 더 쉬울 것이다. 그러나 사회 정의는 ‘교환 정의’, ‘법정 정의’, ‘분배 정의’ 등과 동의어는 아니다. 개인이나 집단의 권리에 속하는 것을 실현하게 해 주는 개인이나 집단의 의무(교환 정의), 전체 사회의 권리에 속하는 것을 실현하게 해 주는 개인과 집단의 의무(법정 정의) 그리고 개인과 집단의 권리에 속하는 것을 실현하게 해 주는 전체 사회, 곧 국가의 의무(분배 정의)를 말할 수 있겠지만, ‘사회 정의’는 그것들이 모두 실현됨으로써 실현될 수 있는 정의이다.

 

‘사회 정의’는 ‘공동선’과 직결되어 있다. 그래서 회칙 「사십주년」에서는 본격적으로 사회 정의를 논하기 시작하였으며 실제로는 교환 정의, 법정 정의 그리고 분배 정의의 부족한 차원을 경제 사회적으로 보충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공동선은 정치적 관점에서뿐 아니라 특별히 경제적 관점에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시되는 것은 불의한 사회의 사회학적 분석만도 아니고, 의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의지만도 아니며, 불의한 사회를 변혁해야 할 윤리적 의무만도 아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필요한 복음 정신이 더 중요하게 보인다. 원시적 성격을 띠던 예수님 시대의 사회는 아니지만, 복잡한 우리 사회에서도 예수님의 ‘사회 정의’에 대한 가르침은 실현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의 부활로 사회 정의도 부활해야 한다.

 

 

1. 불의한 사회에서 개별적으로 이룩할 수 있는 사회 정의

 

복음서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루가 10,25-37)는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사회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지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는데, 강도가 하라는 대로 안 했기 때문에 강도는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마구 두들겨서 반쯤 죽여 놓고 갔다.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불의한 사회의 일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의식을 잃고 길가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지나쳐 버린 사람들도 있다.

 

불의한 현실의 분석에서 출발해서 의롭게 행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으로 주체 개인의 ‘가정’(假定)에서 출발해서 거기에 맞는 ‘율법적 행동 규정’을 찾는 것이 잘못된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의롭게 행하는 것도 아니다. 두 번째로 지나간 레위 사람도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다. 그러나 세 번째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는데, 가까이 가서 확인한 결과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었기에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었다.” 이것은 불의한 사회에 희생이 된 사람을 의롭게 대하는 구체적인 방법의 첫 번째 단계라고 볼 수 있다. 내 것이냐 또는 네 것이냐를 따지는 것도, 책임 추궁만을 하는 것도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아니다. 쓰러져 있는 사람이 가장 먼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 응급조치와 후속 조치가 아니겠는가?

 

사마리아인은 부상당한 사람을 자기 자신과 같이 생각해서 우선 치료하는 데 시간을 내주었으니 자기 ‘시간’을 나누었고, 자기 나귀에 태웠으니 자기 ‘공간’을 나누었고, 잘 치료해 달라고 여관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지불했으니 자기 ‘관심’뿐 아니라 자기 ‘것’(재산)을 나누었다. 결국 그는 짧게나마 자기 ‘삶’을 나눈 셈이다. 이것이 개인에 의해 실현될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실현되어야 할 사회 정의가 아니겠는가? 사회 정의에 입각한 그러한 봉사가 불의한 사회 구조나 제도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2. 불의한 사회에서 사회적으로 이룩할 수 있는 사회 정의

 

예수님께서는 사회 정의론을 내세우는 대신 사회 불의를 나타내는 현상들을 지적해 주셨다. 이러한 비판은 그 당시 ‘열성당원들’의 관심사이기도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관점에서 사회 정의를 강조하셨다. . “부요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라는 말로 사회적 불의를 고발하시면서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라고 선언하셨다. 사회 정의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언이 아닌가? 여기에는 ‘종말론적’ 희망도 담겨 있다.

 

하느님 나라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람들 사이에 빈부 차이가 그렇게 심한 것은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다는,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불의하다는 메시지가 들어 있다. 사회 구조가 어떠하기에, 사회 제도가 어떻게 되어 있기에 그렇게 빈부의 차이가 나는가?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루가 16,19-31)도 사회 불의 현상을 풍자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루가 12,13-21)도 사회 불의 현상을 지적하면서 부자를 우스꽝스럽게 만들고 있다. ‘부자 청년’ 이야기(마르 10,17-27)도 여기에 잘 맞는다. 혹시 예수님께서 너무 가혹한 요청을 하신 것은 아닌가? 아니다. 그러한 인상은 ‘사회 정의’를 강조하는 데서 오는 것 같다.

 

그 부자 청년이 사는 사회는, 일부 사람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부유하게 살지만 대다수는 필요한 것조차 갖지 못하고 사는 사회로 보인다. 하느님께서 직접 그 사회의 재화를 그렇게 빈부 차이가 심하도록 분배하신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는 사람들이 그렇게 불공평한 분배가 이루어지도록 한 것이 아닌가? 그 사회의 재화가 공평하게 모든 이에게 돌아가지 않았다면, 어떤 사람은 권리가 있는데도 필요한 것도 갖지 못하고 사는 반면에,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것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돌아갈 몫까지도 가로채 가지고 산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을 부당하게 소유하고 있다면,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적절한 방법으로 돌려주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부자 청년이 바로 그러한 경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 간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가 ‘불의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사회의 현 구조가 불의하다고 판단을 내리시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그렇게 불의한 사회는 변혁되어야 할 사회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 사회 질서를 전복하라는 ‘혁명적’ 호소로만 알아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1) 불의한 사회에서 노동 임금으로써 이룩할 수 있는 사회 정의

 

예수님께서는 이른바 ‘영적인 것’만 중요시하시거나 거기에만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신다. 물질적인 면에서도 최소한의 것이 없으면 인간은 인간답게 살지 못한다. 인간답게 살 수 없으면 하느님의 자녀로도 발전하기 어렵다. 그리스도인에게 ‘인간’과 ‘하느님의 자녀’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시지만, 이것은 불가분 ‘인간’과 ‘하느님의 아들’을 전제하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가 아닌가?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사회 정의를 논할 때에도 구체적 인간의 권리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으며, 구체적 인간의 권리를 논할 때에도 의식주 문제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회에 대한 예수님의 비판은 ‘영적’ 수준에 머무르지 않는다. ‘포도원 일꾼과 품삯’의 비유(마태 20,1-16)에서 예수님께서는 노동 개념뿐 아니라 임금 제도에 대해서도 사회적으로 비판하신다. 일꾼이 일하는 시간만으로 품삯(임금)을 결정하는 것이 겉으로는 공평한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꾼들이 시간에 따라 일하지 않기 때문에 생산량에 차질을 가져오지 않을까 우려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임금은 노동자 개인의 노동 시간을 계산해서 지불하는 ‘노동의 대가’가 아니다. 임금은 모두가 사회적으로 생산해서 모두에게 사회적 기준에 따라 분배되는 각자의 생계와 생활에 필요한 것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현대 사회에서도 기업체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임금 책정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물론 예수님의 사회적 가르침은 원시적 사회를 전제로 하지만 오늘의 사회에도 의미심장한 내용을 전해 준다. ‘포도밭 일꾼과 품삯’의 비유를 들어보면, 무엇이 사회적으로 공정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모든 일꾼들이 한 데나리온씩 받기로 하고 포도밭에 일하러 갔다고 한다. 그런데 모두가 이른 시간에 갈 수 없었다. 그들이 고용주를 제 시간에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일꾼들은 이른 아침에, 어떤 일꾼들은 아홉 시쯤에, 어떤 일꾼들은 열두 시에, 어떤 일꾼들은 오후 세 시쯤에, 어떤 일꾼들은 오후 다섯 시쯤에 포도밭으로 갔다. 오후 다섯 시쯤에 온 일꾼이 이른 아침에 온 일꾼이 하는 일만큼 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것이다.

 

모두가 이른 아침부터 일거리를 찾고 있었으며, 일거리를 얻지 못한 일꾼들은 초조하게 자신들을 데려갈 고용주를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주인은 일찍 온 사람이나 늦게 온 사람이나 다 한 데나리온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한 데나리온씩 약속을 하지 않았는가? 날이 저물자 주인은 품삯을 치르라고 했다.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그런데 맨 처음부터 일한 일꾼들은 품삯을 더 많이 받으려니 했지만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밖에 받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오는 항의는 전형적인 현세적, 현대 사회적 사고방식, 하느님 나라 실현에 방해가 되는 사고방식이다.

 

그래서 고용주는 단호하게 선언했다.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들에게 준 만큼의 삯을 주기로 한 것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사회적으로 무엇이 의로운 것인지를 보여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여기에서는 ‘교환 정의’만 따지지 말고 ‘분배 정의’, 특히 ‘사회 정의’도 논해야 할 것이다.

 

2) 불의한 사회에서 소유 재산 제도로써 이룩할 수 있는 사회 정의

 

성경에 나오는 ‘약은 청지기’ 이야기(루가 16,1-15) 역시 사회적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것은 어떤 점에서 사유 재산 제도와 관련되어 있다. 어떤 부자가 자기 재산을 청지기에게 맡겼는데, 이 청지기가 자기 주인에게 충실하지 못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청지기의 처사가 ‘불의하다’는 소문이었다. 여기에서 주인의 입장은 하느님의 입장이고, 청지기의 입장은 사회 안에서 사는 개개인의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은 청지기와 함께 그 주인의 재산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관리자이자 사용자인 청지기가 소유주인 양 자기 주인의 재산을 자기 마음대로 남용하거나 악용한다면, 이것은 불의한 처사이다. 그리고 청지기가 자기가 관리하는 사람들과 결탁해서(이기적 집단으로 변해서) 주인의 재산을 남용하거나 악용한다면, 이것도 불의한 처사이다. 객관적으로 청지기는 재산의 ‘소유주’가 아니라 ‘관리자’나 ‘사용자’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에게는 ‘소유권’이 아니라 ‘사용권’만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청지기는 소유주의 뜻에 따라 그의 재산을 관리 또는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직이라는 자신의 직분을 남용 또는 악용해서 사리사욕을 채웠다고 소문이 났다는 말이다. 하느님께서 지상(사회)의 재화를 지상(사회)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주신 것이라면, 그러한 ‘공동 사용 목적’대로 인간은 그것을 사용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느님 외에 어느 누구도 지상(사회) 재화의 주인 행세를 해서는 안 될 것이며, 다른 사람들을 제외하고 몇몇(개인 또는 집단)이 끼리끼리만 그 재화를 사용해도 안 될 것이다. 물론 오늘에 와서는 기업체의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어 있기는 하지만, 원시 형태의 소유권-경영권의 남용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은 것 같다. 그렇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배치될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불의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인권을 짓밟는 것이며 다른 사람들의 몫을 탈취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청지기가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 곧 자기와 같이 주인의 재산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불러다가 그들이 주인의 재산을 사용하여 생산해 낸 것을 자기 소유로 만들려고 흥정하는 것도 ‘불의한 처사’이다. 이렇게 주인의 재산을 다른 사람들과 결탁하여 ‘나누어 먹는’ 것은, 곧 주인이나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에 대한 청지기의 태도는 한 시대의 ‘사회 불의’를 의미하는 것이다. 주인이 그 청지기를 칭찬했다는 말은 그가 사회적으로 ‘의롭게’ 행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불의한 사회에서 불의하게나마 주인의 재산을 남용해서 먹고 살 방도를 마련하려고 했으니 ‘약삭빠르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3) 불의한 사회에서 생산적으로 이룩할 수 있는 사회 정의

 

하느님께서 재화의 주인이시고 인간은 그 사용자라고 한다면, 인간은 주인의 재산을 불충실하게 관리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적극적 의미에서 생각한다면, 남용이나 악용을 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그 재산을 ‘생산적으로’ 운영하여 더 많은 결실을 가져와야 되지 않겠는가? 금은보화를 쌓아 두고 혼자 감상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그것으로 자본을 형성하여 투자하는 방법도 있다. 자본 자체가 죄악이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 성경에 보면, 어떤 사람이 자기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었다. 그렇지만 주인은 그 종들에게 똑같은 액수의 돈을 맡기지 않았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었고, 또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었고 또 다른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들은 “더 벌었다.”라고 보고했다. 주인은 이러한 행위를 “충실하다.”라고 평가하면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라고 하였다. 주인의 뜻대로 ‘생산적으로’ 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더 벌었다.”라고 보고할 수 없었다. 주인은 그를 보고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라고 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한 ‘비생산적’ 소유-사용자는 가지고 있던 것마저 빼앗겼다. “여봐라, 저자에게서 한 달란트마저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주인이 자기 재산을 종들에게 나누어 줄 때는, 각자 그리고 모두가 그것을 생산적으로 운영하여 더 많이 받아 사용할 수 있도록,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은가? 이러한 의미에서 ‘생산적으로 갖고 있다’면 “누구든지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며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물론 정당하게 생산적으로 운영한다는 의미가 전제된다.

 

하느님께서 지상(사회)의 재화를 모두에게 사용하라고 주셨다면, 각자는 소비만 하면 된다는, 또는 사치스럽게 살아도 괜찮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계속해서 사용하고 소비할 수 있도록 ‘생산적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지 않은가? 하느님께서는 재화의 주인이시고 인간은 그 재화의 관리-사용자인 동시에 ‘생산적 운영자’임을 밝혀 둘 필요가 있다. 이것은 사유 재산의 사용권이 어떻게 의롭게 행사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3. 불의한 ‘고리 사채업’의 통제로 이룩되어야 할 사회 정의

 

성경에 보면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태 18,23-35)가 있다. 일만 달란트나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 왔다. 그에게는 빚을 갚을 길이 없었기 때문에 왕은 호통을 친다. “네 몸과 네 처자와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아라.” 여기에서 그 종은 진심으로 갚으려고 해도 갚을 수 없다는 것이 전제된다. 그 종이 그렇게 애걸하자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 주었다. 여기에서 왕은 ‘고리 사채업자’는 아니다. 여기에서 왕은 그 종에게 준 것을 다 돌려받으려 했던 처음 생각, 곧 교환 정의뿐 아니라 분배 정의도 초월해서 사회 정의를 실현한 셈이다. ‘탕감해 준다’는 말을 자선을 베푼다는 말로 간단히 알아들으면 안 된다. 종은 자기 ‘권리’를 행사했다는 뜻이고 왕은 자기 ‘의무’를 이행했다는 뜻으로까지 알아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일반적으로 빚을 내는 사람은 그렇게 하고 싶어서 빚을 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살아남을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할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빚을 갚지 않으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갚을 수가 없기 때문에 못 갚는다고 할 것이다. 이유는 물론 여러 가지이다. 꾼 돈을 가지고 시작한 사업이 성공하지 못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악랄하고 사회적으로 불의한 것은 ‘고리 사채 이율’이 너무 높아 빚의 독촉으로 아무도 인간답게 살아남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의 고리 사채 ‘연이율’이 60%, 100%, 130% 등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탕감 받은 종은 고리 사채업자가 아니면서도 자기 동료에게는 실제로 ‘고리 사채업자의 행동’을 하였다. 그는 “자기에게 한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며 빚을 갚으라고 호통을 쳤다. 그의 동료는 애걸했다. “꼭 갚을 터이니 조금만 참아 주게.” 여기에서는 그의 동료가 진심으로 갚으려고 해도 갚을 수 없다는 것이 전제된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 그는 ‘교환 정의’만을 주장한 셈이다. 이러한 소식을 전해 들은 왕은 그 종을 불러 꾸짖었다.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여기에서 자비는 자선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교환 정의’를 초월하는 ‘사회 정의’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4. 불의한 산업 사회에서 이룩되어야 할 사회 정의

 

(1) 모든 이들 간에 실현되어야 할 사회 정의:회칙 「사십주년」에 따르면, “사회 경제의 발전으로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는 재화는 ...... 모든 사람을 위한 공동선의 증진을 위해 다수의 개인들과 사회 계급들에게 분배되어야 한다.” 달리 표현하면, 전체 사회의 공동선이 보장되어야 한다. 사회 정의의 이러한 법칙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그 사회의 이윤 분배에서 배제하는 것을 금한다. 그래서 사회 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 달리 표현하면, “각 계급에 귀속되는 것을 부여하는 것이 마땅하며 창조된 재화의 분배는 공동선과 사회 정의의 요청과 부합해야 한다.”

 

(2) 사회 계층들 간에 실현되어야 할 사회 정의:회칙 ?새로운 사태?에 따르면, “고용주와 노동자는 그들에게 좋을 대로 그렇게 계약을 체결해야 하며, 특히 임금 액수에 합의를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자유로운 의지를 초월하는, 그보다 고차적이고 오래된 자연법적 정의가 있다.” 이것은 교환 정의가 아니라 ‘사회 정의’를 의미하는 것이다. 회칙 ?사십주년?에 따르면, “계급 투쟁이 적대 행위와 상호 간의 증오를 포기한다면, 점차적으로 정의의 추구에 기초한 정당한 이해 관계의 토의로 변한다.” 자본과 노동의 상호 관계뿐 아니라 여러 민족들의 제도들은 “모든 인간 관계가 공동선의 요청, 곧 사회 정의의 규범에 합치하도록 해야 한다.”

 

(3) 산업 분야들 간에 실현되어야 할 사회 정의:회칙 ?어머니요 스승?에 따르면, “우리 시대에, 특히 지난번 세계대전 이후 국가 경제가 더욱 급속히 발전해 가는 이 때에,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회 정의의 중대한 원칙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곧 경제 성장에는 언제나 사회 발전이 수반되어야 하는 동시에 함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농민 개인의 소득이 공업이나 서비스 부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소득보다 한층 빈약하기 때문에 “농민들에게 다른 서민 계층보다 못한 사회 보장이나 보험 제도를 부여하는 것은 사회 정의와 형평에 전적으로 어긋난다.”

 

사회 정의는 저절로 이룩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의식적으로 이룩하는 것이다. 제도적으로 그렇게 할 때에도 인간이 그렇게 하기로 결정을 해야 한다. 따라서 인간이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회 정의가 사회적으로 쉽게 실현되는 것이라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예수님께서 우리 사회에 다시 부활하셔야 한다. 그러면 사회 정의도 부활할 것이다.

 

[사목, 2002년 4월호, 김춘호(수원교구 고등동 천주교회 주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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