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홍)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가난의 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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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규 [mugeoul] 쪽지 캡슐

2001-02-14 ㅣ No.203

종교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할 수 없거나

아예 함께 하지 않으려 하고,

가난한 이들이 종교를 떠나거나 그 안에 머물러 있지 않으려 할 때,

그 사회는 지옥이 된다.

그런데 이 ’함께 한다’는 것은 자선의 차원이 아니라,

가난한 곳에 직접 들어가 그들과 함께 살며

그들이 사는 그 자리가 바로 그들의 천국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사회의 근본적인 구원을 꾀해야 한다.

사실 가난한 자들을 경제적인 빈곤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가난의 심성’을 진실하게 밝혀 드러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참행복’의 의미와 가치를

이 사회현실 속에 구체화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사회가 추구하는 경제적인 풍요 속에서도

가난이 주었던 그 심성을 그대로 간직할 수는 없을까."

그 방법을 종교는 진지하게 연구 모색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사회공동체 전체 구원의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모자라면서도 서로 나누는 그 열린 마음,

자기희생을 무릅쓰고라도 공동체를 위하는 그 놀라운 인고력,

그것은 분명 가난만이 줄 수 있는 삶의 신비로운 능력이다.

뿐만 아니라 참혹한 가난 속에서도

부유한 무리들보다 더 진하게 지니고 있는 인간적인 면들

그것은 생명공동체라는 ’바이토피아’(Biotopia)에로의

참된 원동력이요 추진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가난해질수록 인간은 되살아난다.

가난은 상호유대관계를 보다 인간적으로 이끌게 되면서

인간을 존재화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그야말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참 행복한 존재’이다.

그렇게 존재적으로

하느님과 가장 가깝게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는

그들이야말로 하느님 나라를 낳는 옥토이다.

그 속에다

영혼의 각성을 부르는 씨앗을 심어 주는 일이

종교의 사명이다.

더 나아가

종교는 그들의 그 심성을 사회구원적 차원에서 확충시켜야 한다.

이 ’탐욕과 천박이 판을 치는 죽음의 문화’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데

그들이 아직도 지니고 있는

아름다운(낭만적인 것이 아니고 현실적인 표현이다) 심성은

참으로 훌륭한 양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기야 그것을 그들 자신도 모르고

더더욱 사회는 오직 동정의 눈으로만 바라볼 뿐

그들이 얼마나 가치 있는 진주를 지녔는지 모른다.

그것을 밝혀 드러내는 작업을 종교가 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우선 종교 스스로가

그 진주를 지니기 위해 가난해져야 할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 그 진주를 지님으로써

그야말로 ’세상의 빛’이 되어

’가난의 심성’ 그 아름다운 가치를

사회 속에 깊이 있게 그대로 드러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앞으로 종교에 맡겨진 지고의 사명은

아무래도 가난이 지닌 가치와 그 귀중함을

우리 사회에 인식시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여기에 사회구원의 참 길이 오직 있지 않을까 느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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