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홍)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생명] 생명 유지 치료 중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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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6 ㅣ No.329

생명 유지 치료 중단에 대하여

 

 

1. 회칙 “생명의 복음”

 

65. 안락사는 이른바 ‘과도한 의학적 치료’를 그만두는 것과는 반드시 구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상되는 어떠한 결과에도 부적절하거나 또는 환자나 가족에게 지나친 부담을 주는 것들이기 때문에 더 이상 환자가 처한 실제적인 상황에 맞지 않는 의학적 치료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분명히 죽음이 임박하고 피할 수 없을 때, 사람은 양심 안에서 “비슷한 경우의 환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정상적인 간호를 중단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결과가 불확실하고 큰 부담이 되는 생명의 연장밖에 보장하지 못하는 종류의 치료 행위들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돌보아야 하고, 자신을 남들이 돌보도록 허락해야 할 도덕적인 의무가 존재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이 의무는 반드시 궤적인 상황을 고려해야만 합니다. 사용 가능한 치료 방법들이, 호전될 가망성을 위해서 객관적으로 적절한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하거나 또는 부적절한 수단들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자살이나 안락사와 다릅니다. 그것은 오히려 죽음 앞에서 인간의 조건을 받아들인다는 표현입니다.

 

[출처: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생명의 복음”(1995.3.25.), Origins 24: 42호(1995.4.6.), 712면.]

 

 

2. “생명 연장”

 

세 가지 질문

 

그러므로 현대의 소생술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질문으로 공식화할 수 있다.

 

첫째, 모든 경우에, 심지어는 의사가 전혀 가망이 없다고 판단할 때에도, 현대적인 인공 호흡 장치들을 사용할 권리가 있거나 그럴 의무가 있는가?

 

둘째, 며칠이 지나도 깊은 혼수 상태에서 깨어나지 않으며, 지금 인공 호흡 장치들을 제거한다면 혈액 순환이 몇 초 내에 정지될 경우, 인공 호흡 장치들을 떼어 낼 권리가 있거나 그럴 의무가 있는가? 이런 경우 이미 임종을 위한 성사들을 받은 환자의 가족들이 의사에게 인공 호흡기를 떼어 내 달라고 요청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때에도 병자 성사는 여전히 유효한가?

 

셋째, 중추 마비로 혼수 상태에 빠졌지만 인공 호흡을 통하여 생명, 말하자면 혈액 순환이 아직 지속되고 있으며, 며칠이 지나도 상태가 호전되지 않는 환자는 사실상 사망한 것으로 또는 법률상 사망한 것으로 간주하여야 하는가?

 

기본 원칙들

 

우리는 기꺼이 이 세 가지 질문에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 질문들을 검토하기 전에, 대답을 위한 원칙들을 세우고자 한다.

 

자연 이성과 그리스도인 윤리에 따르면, 사람(그리고 다른 사람을 돌볼 임무가 있는 모든 사람)은 중병의 경우 생명과 건강을 지키기 위하여 필요한 치료에 대한 권리와 의무가 있다. 자기 자신과 하느님, 인간 공동체, 그리고 대체로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 대해서 지고 있는 이러한 의무는 사랑과 창조주께 대한 복종, 사회 정의와 엄격한 정의, 가정에 대한 헌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개는 개인, 장소, 시대, 문화의 상황에 따라 통상적인 치료법만을 사용하도록 요구된다. 말하자면,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지나친 부담을 주지 않는 치료법만을 사용하는 것이다. 더욱 엄격한 의무를 부과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 큰 부담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더 가치 있고 중요한 선익을 얻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더욱 중요한 의무도 감당할 수 있다면 생명과 건강을 지키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필요한 치료법 이상을 사용하는 것도 금지되지 않는다.

 

사망 사실

 

사망 사실의 문제, 그리고 사망 사실 그 자체나(사실상) 그 법적 확실성을(법률상) 확인하는 문제는 그 중대성 때문에 윤리와 종교 영역에서도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성사를 유효하게 받는 데에 전제가 되는 필수 요소들에 관한 내용들이 이를 잘 보여 준다. 그러나 이 문제의 중요성은 상속, 혼인과 혼인 절차, 성직록(성직록의 결여)의 문제 그리고 개인 생활과 사회 생활에 관련된 다른 많은 문제들에도 영향을 미친다.

 

의식 불명 상태에서 죽은 환자의 ‘사망’과 ‘사망 시간’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의사, 그 가운데에도 특히 마취과 의사가 할 일이다. 사망은 영혼과 육체의 완전한 최종 분리라는 일반적인 개념도 틀리지는 않지만, 실제로 적용할 때에는 ‘육체’와 ‘분리’라는 용어의 정확성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고려하여야 한다. 인공 호흡기를 떼면 혈액 순환이 멈추어 몇 분 안에 죽게 되므로, 사람이 살아 있는 채 묻힐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의심을 지울 수 없을 경우에는, 법적 사실적 추정들을 사용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 문제는 창조주께 받은 근본적인 권리의 문제인 만큼 생명이 아직 유지되고 있다고 추정하여야 하며, 사망의 증명은 확실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의사의 권리와 의무

 

1. 마취과 의사는 환자가 깊은 혼수 상태에 있을 때, 심지어 담당 의사의 소견으로는 가망이 전혀 없을 때에도, 가족들의 뜻을 거스르면서 현대적인 인공 호흡 장치들을 사용할 권리가 있거나 또는 그렇게 할 의무가 있는가?

 

보통의 경우, 마취과 의사들은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질 수 있지만, 이것이 다른 도덕적 의무를 다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닌 이상 그럴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의사들의 권리와 의무는 환자들의 권리와 의무와 상관 관계에 있다. 사실, 의사는 환자와 관련하여 별개의 독립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의사는 환자가 명시적으로 또는 암시적으로, 직접으로든 간접으로든 의사에게 허락하였을 때에만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우리가 여기서 다루고 있는 소생술은 그 자체로 어떤 비도덕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므로 환자는 자신이 직접 결정을 내릴 수 있다면 합법적으로 이를 사용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의사에게 이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러한 형태의 치료는 일반적으로 감당해야 할 능력을 벗어나는 것이므로, 이를 사용할 의무나 의사에게 이를 사용하도록 허락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가족들의 권리와 의무는, 의식 불명 상태인 환자가 성년이며 법률적인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라면, 환자의 뜻이라고 추정되는 뜻에 따른다. 합당하고 독립적인 의무와 관련하여 가족들은 대개는 통상적인 치료법을 사용할 의무만 가진다.

 

따라서 환자에 대한 소생 노력이 실제로 분명히 가족들에게 강요할 수 없을 정도의 큰 부담을 지우고 있다면, 가족들이 의사에게 이러한 시도를 중지하도록 주장하는 것은 합법적이며, 의사가 이에 따르는 것도 합법적이다. 이 문제는 어떤 식으로도, 절대 합법화될 수 없는 안락사나 환자 생명의 직접적인 처분과 관련되지 않는다. 소생 시도를 중단함으로써 혈액 순환이 정지된다고 하더라도 이는 사망의 간접적 원인에 지나지 않으며, 이 경우에는 이중 효과의 원칙과 그 사안에 대한 자유 의사 또는 의사의 윤리적 도덕적 양심적 판단`-`의사들의 결정에 유보(voluntarium in causa)의 원칙을 적용하여야 한다.

 

[출처:교황 비오 12세, “생명 연장”(1957.11.24.), The Pope Speaks 4: 4호, 1958년, 395-398면.]

 

 

3. “안락사에 관한 선언”

 

치료제 사용에 있어서의 적정 균형(適正均衡)

 

오늘날 남용될 위험을 안고 있는 기술 위주의 태도에서, 임종의 순간에 그리스도교적 삶의 개념과 인간의 존엄성 모두를 수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죽을 권리’를 말하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의 손에 의하여 또는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서 죽을 수 있는 권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그리고 그리스도교적인 존엄성을 지니고 평화롭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치료 수단의 사용은 가끔 어려운 문제를 제기한다.

 

여러 경우에, 상황의 복합성은 윤리적 원칙을 적용할 방도에 대하여 회의를 일으키게 할 수 있다. 결국, 병증(病症)의 여러 국면과 윤리적 책임에 비추어 결정하는 것은 병자 또는 병자를 대변할 자격이 있는 사람 또는 의사의 양심에 속하는 문제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의 건강을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고 다른 사람의 간호를 요구할 의무가 있다. 병자를 돌볼 임무를 지닌 사람들은 양심적으로 간호해야 하며 필요하고 유용한 의약을 투여해야만 한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가능한 모든 의약을 사용할 필요가 있겠는가?

 

과거에, 윤리학자들은 누구든 결코 ‘예외적인’ 수단을 사용하도록 강제될 수 없다고 답변했다. 하나의 원칙으로는 여전히 유효한 답변이지만, 용어의 모호성과 질병 치료의 급격한 발전으로, 오늘날에 와서는 좀 분명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균형’ 또는 ‘불균형’의 수단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어떠한 경우도, 사용될 치료법의 유형(類型), 그 복합성과 위험의 정도, 그 사용 가능성과 비용을 검토하고, 이러한 요소들을 기대할 수 있는 결과와 비교하고, 병자의 상태와 병자의 육체적 윤리적 자력(資力)을 참작하여, 그 수단들에 관하여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일반 원칙의 적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다음의 설명을 추가한다.

 

- 여타의 충분한 치료법이 없다면, 그러한 수단이 아직 실험 단계에 있고 어떤 위험이 없지 않다 하더라도, 가장 진보된 의학 기술에 의하여 제공된 수단들을, 환자의 동의 아래 사용하는 것은 허용된다. 그 수단들을 받아들일 때, 환자는 인간성에 대한 봉사 안에서 아량까지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 또한 그 결과가 기대에 너무 미치지 못할 때, 환자의 동의 하에 그러한 수단들을 중단하는 것은 허용된다. 그러나 그러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그 방면에 특히 유능한 의사들의 조언은 물론 환자와 가족들의 온당한 소망을 참작해야 할 것이다. 특별히 전문 의사들은 설비 및 인적 투자가 예상되는 결과에 비해 균형을 잃느냐는 문제를 판단할 수 있고, 적용되는 기술이 그러한 시술에서 환자가 얻을 수 있는 이해에 균형되지 않는 고통이나 도로(徒勞)를 환자에게 강요하느냐는 것을 판단할 수 있다.

 

- 또한 의학이 제공할 수 있는 정상적인 수단으로 대용하는 것을 허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위험을 수반하는 난사(難事)일 뿐인 기용(旣用)의 기술에 의지해야 할 의무를 어느 누구에게도 강요할 수 없다. 그러한 거부는 자살과 같지 않다. 그와는 반대로, 인간 조건의 수용으로서 간주되어야 하며, 기대할 수 있는 결과와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의학적 치료를 회피하려는 원의나 가족 또는 공동체에 과도한 부담을 강요하지 않으려는 원망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 사용되는 수단에도 회피할 수 없는 죽음이 임박할 때, 불확실하고 고통스러운 생명의 연장을 보호해 줄 뿐인 치료법을 거부할 수 있는 결정은 양심 안에서 허용된다. 단, 유사한 병증의 환자에게 요구되는 정상적인 간호는 중단되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상황 안에서, 위험 중에 있는 사람을 돕지 못한 일로 의사가 자책할 이유는 없다.

 

결론

 

본 선언에 내포된 규범들은 창조주의 계획에 따라 사람들에게 봉사하고자 하는 깊은 열망으로 고무된 것이다. 생명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한편, 죽음은 회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코 죽음의 시간을 재촉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온전한 책임과 존엄성을 지니고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 죽음이 우리 지상 실존의 결말의 획을 긋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죽음은 불멸의 생명으로 문을 연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인간 가치의 빛 안에서 이 사건에 대한 채비를 스스로 갖추어야 한다. 나아가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빛 안에서 그러해야 한다. 

 

의료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병자와 임종자들에게 유효한 모든 기술을 강구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병자와 임종자들에게 끝없는 친절과 정성어린 사랑의 위안을 주는 일이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가를 기억해야만 한다. 사람들에 대한 그러한 봉사는 또한 주님 그리스도께 대한 봉사다. 그분은 말씀하셨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출처: 신앙교리성, “안락사에 관한 선언”(1980.5.5.), Vatican Council II, 제2권, 514-516면.]

 

 

4. “생명 유지 치료에 관한 입법 지침”

 

도덕적 원칙들

 

유다`-`그리스도교 유산은 생명을 사랑의 하느님의 선물로 경축하며, 인간은 모두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으므로 모든 인간의 생명을 존중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았으며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나누는 데 동참하도록 부름 받고 있음을 기뻐한다. 이러한 뿌리를 바탕으로 로마 가톨릭 전통은 인간 생명을 돌보고 유지하기 위한 독특한 접근법을 발전시켜 왔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무고한 생명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단죄할 뿐만 아니라, 생명을 거룩한 위탁물로 간주하는 생명관을 증진시킨다. 곧 인간은 생명에 대한 관리권을 주장할 수는 있으나 생명을 완전히 지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생명의 성실한 관리인으로서 우리는 생명을 보호할 의무가 있으나, 최근 안락사에 관한 교황청의 선언에서 강조하였듯이 그러한 의무에는 어떠한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여야 한다. 이 선언과 또 다른 문서들은 ‘생명의 관리직’ 윤리를 규정하는 다음과 같은 도덕 원칙들을 세웠다.

 

1.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안락사 또는 고의적인 자살”(사목 헌장, 27항)을 포함하여 생명에 거스르는 범죄를 단죄한다. 인간의 존엄과 근본 권리에 대한 존중에 바탕을 둔 이러한 가르침을 정치적 다원주의나 종교 자유의 이유로 거부할 수 없다.

 

2. 인간 생명은 모든 다른 인간 선익의 바탕이며 필요 조건이므로, 특별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 살인과 자살은 모두 인간 생명에 위배된다.

 

3. ‘안락사’는 “모든 고통을 제거하기 위하여, 저절로 또는 고의로 죽음을 초래하는 행위 또는 부작위(不作爲)”(신앙교리성, 안락사에 관한 선언)이다. 안락사는 인간 생명에 대한 공격이며, 따라서 어느 누구도 시행 또는 요청할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양심을 흐리는 감정적 요소들이나 고통을 핑계로 개인의 죄책감은 줄이거나 느끼지 않을 수 있지만, 그것이 이러한 행위의 객관적인 악함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또한 겉으로는 죽음을 호소하더라도 실제로는 도움과 사랑을 호소하는 것일 수도 있음을 인정하여야 한다.

 

4. 고통은 인간 생명의 한 실제이며,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의 구원 고통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로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다른 도덕적 종교적 의무를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 주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생명을 단축시킬 위험이 있더라도 죽을 병에 걸린 환자에게 진통제를 사용하는 것은 허용할 수 있다. 단, 죽음을 야기하기보다는 고통을 효과적으로 경감시키려는 데에 그 의도를 두어야 한다.

 

5. 모든 사람은 자신의 건강을 돌보고 필요한 치료를 요청할 의무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경우에 모든 가능한 치료법이 다 사용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예외적인’ 수단, 말하자면 도움이 될 것이라는 충분한 희망을 주지 못하거나 과도한 어려움이 따르는 방법들을 사용하여야 할 의무는 없다. 그러한 결정은 복잡하므로, 가능하다면 언제나 환자가 가족과 의사와 상담한 뒤에 내려야 할 결정이다.

 

이러한 원칙들은 특정한 종교적 전통에서 나왔지만, 어떤 특정한 종교적 입장보다는 일반적인 인간 존엄 존중에 호소력을 지닌다. 우리는 선의의 사람들에게 이 원칙들을 자신 있게 제시하며, 입법자들과 다른 정책 입안자들에게 이 원칙들에 주의를 기울여 주도록 권유한다. 이 원칙들은, 아무리 도덕적 정치적 다원론이 존재하더라도, 모든 인간은 생명에 대한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가진 존재로서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믿음 위에 세워진 사회에 특히 적절하다고 보인다.

 

입법 지침

 

오늘날 이러한 원칙들을 말기 환자들의 치료에 관련한 입법 논의에 적용하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또한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예외적인 치료 수단의 중단 문제를 포함하여 말기 환자들의 치료 문제는 언제나 입법 제약을 받아 왔다. 그러나 1975년부터, 법원 판결과 법률 제정들이 이러한 제약을 해석하고 변경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몇몇 판결과 제정들은 건설적인 것이었지만, 그렇지 못한 것들도 있었다. 의학의 기술적 변화는 너무나 급속하게 이루어지고 있어서 따라잡기 어렵다. 이러한 변화는 의사와 환자의 관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 때문에 환자가 의사와 가족들의 조언과 지원을 받아 자신이 받을 치료를 결정하는 과정은 훨씬 더 어렵게 되었다. 

 

말기 환자들의 치료를 둘러싼 문제들과 혼란들은 더욱 늘고 있지만, 이 주제를 다루는 새로운 법률이 몇몇 주에서 제정되고 있으며 몇몇 주에서는 새로 제안되고 있다. 그러나 말기 환자들의 치료와 관련한 법률은 주마다 큰 격차가 있으며 우리가 승인한 윤리 원칙들을 항상 적절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현재의 논의에 개입하여 지침을 제공할 의무를 통감한다.

 

이러한 관점 아래, 우리는 기존의 또는 새로 제안된 법률들이 이 주제를 충분하게 다루고 있는지에 관한 논쟁이 있을 때마다, 위에서 열거한 윤리 원칙들과 교회의 관심사를 존중할 수 있는 방법들을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그러한 법률들은 다음을 준수하여야 한다.

 

(1) 장애인, 노인, 말기 환자를 포함한 모든 인간의 근본적인 생명권을 전제로 하여야 한다. 일반적으로 ‘죽을 권리’나 ‘존엄사’와 같은 말로 죽음을 낭만적으로 포장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2) 치료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는 별개의 권리가 아니라, 합리적인 치료를 요청할 수 있는 환자의 권리이자 도덕적 의무의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을 인정하여야 한다. 특히 생명 유지를 위한 치료법을 고려할 때에 법률은 치료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만을 보호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3) 치료를 결정할 수 있는 환자의 권리는 이러한 권리 행사를 제한하는 다른 요소들의 맥락 안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그러한 요소들 가운데에는, 무고한 제삼자를 보호하고, 살인과 자살을 막으며, 의료 종사직의 충분한 윤리 기준을 유지하는 것에 관한 주정부의 관심을 들 수 있다. 환자의 헌법상의 권리(예를 들면 ‘사생활의 권리’)의 관점에서 치료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규정하는 정책은, 그러한 경우에 고려되어야 할 모든 관심사에 대한 신중한 평가를 방해하는 경향이 있다.

 

(4) 환자와 가족과 의사와 의견을 충분히 나눌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생전 유언’(living will; 회복할 가망이 없는 병에 걸렸을 때 인위적인 생명 연장보다는 자연사를 바라는 뜻을 미리 생전에 밝힌 유언)을 인정하는 현재의 법률은 그 반대의 효과, 다시 말해 가족들과 환자를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을 의사 결정 과정에서 제외시키는 경향이 있다. 일반적으로, 어떠한 치료 과정에 관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문서와 법적 절차가 의사와 환자 또는 그 가족과의 직접적인 상담을 대신할 수 없다. 

 

(5) 문서나 대리 의사 결정자에게 환자 대신 치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무한한 권한을 주는 일이 없도록 한다. 누군가를 대신하여 그러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리는 그 자체로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환자가 그러한 상황에서의 치료의 부담과 이점을 평가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떠한 경우에도 전적으로 행사될 수 없다. 정신적으로 무능력한 환자를 대신하여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는 법률에는 그 결정이 환자의 소망과 최대의 유익을 충분히 대변하며 책임 있는 의료 시술에도 합당하도록 보장하는 보호책이 포함되어야 한다.

 

(6) 의사가 모든 법적 책임에서 완전히 면제받지 않도록 의사의 권리와 책임을 분명히 밝힌다. 어떤 의사도 살인이나 의무 태만의 경향이 있는 행동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또한 환자나 대리인의 소망을 따르는 것이 의사의 윤리적 신념이나 직업적 기준을 어기는 것이 될 때, 그러한 소망에 따르지 않은 것에 대한 부가적인 법 처벌을 의사에게 부과할 수 없다. 

 

(7) 살인과 자살 방조에 반대하는 공공 정책을 재확인한다. 의학 치료 관련 법률은 말기 환자들의 불안하고 부담스러운 생명 연장만을 보장할 뿐인 지속적인 치료 절차를 밝힐 수는 있지만, 환자의 죽음을 가져올 수 있는 의도적인 행동이나 부작위를 묵과하거나 인정하여서는 안 된다. 

 

(8) 간호, 수화, 영양 공급 등의 기본적인 방법들은 모든 환자의 인간 존엄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유지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인정한다.

 

(9) 스스로 치료 결정을 내릴 수 없는 무고한 환자들의 이익을 보호하여야 한다. 정신적으로 무능력하거나 지능이 낮은 환자들의 생명 유지 치료를 차별적으로 억제하거나 중단하지 않아야 한다.

 

(10) 치료를 계속하는 것이 태아에게 이로울 경우, 임산부의 생명 유지 치료를 중단하지 않도록 규정한다. 

 

이 지침들은 적절한 입법을 포괄적으로 기술하거나, 말기 환자의 치료에 관한 새로운 입법이 모든 주에 마련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지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지침들은, 인간 생명의 거룩함에 대한 확고한 의무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그러한 치료에 관한 권리와 책임을 밝히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일반적인 접근법을 개괄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출처:미국 주교회의 생명수호위원회, “생명 유지 치료에 관한 입법 지침(1984.11.10.), Origins 14: 32호(1985.1.24.), 526-528면.]

 

 

5. “중환자와 임종자에 관한 윤리 문제”

 

2.1. 생명

 

2.1.1. 생명의 그리스도교적 의미

 

생명은 우리의 창조주에 의하여 인류에게 주어졌다. 그것은 인간이 사명을 다하게 하기 위하여 주어진 선물이다. 그러므로 한 개인의 ‘살 권리’란 최우선의 중요성을 띠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권리는 인간의 권리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께 속하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자기들이 적당하다고 여기는 대로 처분할 수 있는 그런 것으로 생명을 주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은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고 있으며, 이 목적을 스스로 지향하는 것이 인간들의 책임이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자기 자신의 완성을 지향하는 것이 인간 생명의 목적인 것이다. 

 

이 기본이 되는 생각에서 절로 나오는 첫째 결론인 곧, 자기 자신의 선택에 의하여 생명을 포기한다는 것은 우리가 아닌 하느님께서 설정하신 목적을 지향하는 노력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인류는 자신의 생명을 유용하게 만들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마음대로 생명을 파괴할 수 없다. 자기 육신을, 그 기능들을, 그 기관들을 돌보는 것은 인간의 의무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하느님께 이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 의무는 그 자체로는 좋은 것일 수도 있는 것들을 포기하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이 의무는 때로는 우리가 건강과 생명을 희생하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 곧 우리가 건강과 생명을 돌본다고 해서 그보다 더 높은 가치들의 요청을 거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떻든 훌륭한 건강을 유지하고 생명을 보존하는 일에는 혹시 위기에 있을 수도 있는 더 높은 선익을 고려하는 동시에 인간이 지상에서 자신의 생존을 유지해 나가는 구체적인 조건들도 고려하면서 하나의 적정한 균형이 달성되어야 한다. 

 

2.1.2. 타인의 생명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다.

 

자기 자신의 생명을 마음대로 파괴할 수 없다면, 하물며 다른 사람의 생명도 파괴할 수 없다는 것은 더욱더 진실이다. 하나의 병자를 단순히 결정의 대상으로 삼아, 그 자신이 내리지는 않는 - 또는 그가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그 자신이라면 사실상 승인하지 않을 - 그런 결정을 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떠한 도움을 베풀든지 원칙적으로 자기 생명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개인 각자가 그 도움의 중심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사람들은 그를 도와주기 위한 사람이지 그를 대신하기 위한 사람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의사들이나 가족들이 때로는 환자를 위하여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있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환자가 자신에게 적용될 치료 수단이나 방법에 관하여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가 없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누구보다도 이런 처지에 있는 의사들과 그 밖의 사람들에게야말로 환자의 생명에 대하여 어떤 시도를 감행하는 것은 절대로 금지되어 있다.

 

2.1.3. 개인의 기본권

 

본질적으로 교리적인 이 주제야말로 고찰의 기본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아니거나 지상의 현세 생명 피안에서의 생명에 대한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생명과 죽음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나게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자기들의 지위가 무슨 특별한 지위는 아니라는 것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참으로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은 개인의 기본권이다. 우리는 이 기본권이 문제가 되고 있는 곳에서 흔들림이 있을 수 없다. 이 기본권 문제가 바야흐로 정치와 입법 활동의 전면에 매우 크게 부각되고 있는 만큼 더욱더 그렇다. 죽을 때에 매사가 끝나고 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의 생명과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얼마나 마땅히 존중해야 하는가를 확신시키기 위하여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은 인간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확고한 기준이 결여되어 있는 사회에서 어떠한 결과들이 초래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그런 증거들인 것이다. 

 

2.2. 죽음

 

2.2.1. 죽음의 그리스도교적 의미 

 

인간의 죽음은 육신 생존의 끝이다. 죽음으로 시간의 범위 내에서 인간의 온전한 완성을 추구하는 노력인, 하느님으로부터 온 소명이라는 국면이 끝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의 순간은 최종적으로 영원히 그리스도께 일치되는 순간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이야말로 죽음의 이러한 종교적이며 그리스도론적인 이해를 상기시키는 것은 절실한 당면 과제이다. 그것은 우리의 생명이 우리의 육체와 우연히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과 죽음이 죄인으로서의 우리의 인간 조건과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을 매우 현실적으로 파악하는 일과 병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요 죽어도 주님의 것이다”(로마 14,8). 임종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이 확신에 사무쳐 있어야 하며, 단순히 과학에 의하여 될 수 있는 대로 죽음을 연기하는 노력에만 그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2.2.2. 인간답고 품위 있게 죽을 권리

 

이 문제에 관해서는 연구회의 제3세계 출신 위원들이 강조한 바와 같이 한 인간이 자신의 지상 생애를 끝낼 때에 그 자체에 있어서나 그 주위 세계 특히 가족과의 관계에 있어서나 자신의 인격적 품위를 될 수 있는 대로 온전하고 흠 없이 갖춘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기술적으로 덜 개발되고 야박한 지성에 덜 감염된 곳에서는 가족들이 임종자의 둘레에 모이고 있으며 임종자 자신이 이와 같이 가족들에게 둘러싸일 필요를 - 거의 하나의 필수적인 권리로서 - 느끼고 있다. 어떤 치료를 위하여 요구되는 조건들과 이로 말미암아 환자에게 강요되는 전적인 격리라는 현실을 볼 때, 여기서 한 인간으로서 품위를 가지고 죽을 권리란 이러한 사회적 차원을 요청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 두는 것도 격에 맞지 않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2.3. 고통

 

2.3.1. 고통의 그리스도교적 의미

 

고통이나 통증 - 이 두 가지는 서로 신중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 은 그 자체가 하나의 목적으로 생각될 수 없다. 과학적으로 말하면 통증이 무엇으로 이루어지느냐에 관해서는 아직 매우 불확실한 점이 많다. 고통에 관해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고통으로 표현될 수 있는 사랑 자체와 고통이 낳을 수 있는 정화 효과를 남달리 고통 속에서 알아보고 있다. 비오 12세께서는 1957년 2월 24일의 훈화에서 지적하시기를, 너무나 강렬한 고통은 정신이 반드시 지녀야 할 자제력을 유지하지 못하게 하기 쉽다고 하셨다. 우리는 그렇다고 해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모든 통증을 참아내어야 한다거나 스토아 사상적으로 통증을 감소시키고 진정시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본 연구회는 독자들에게 비오 12세의 말씀을 참조하라고 권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2.3.2. 고통과 통증의 효과

 

고통을 참을 수 있는 능력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고통과 통증이 환자에게 미치는 영신적 및 심리적 효과가 어떠한지를 측정하고 어떤 특정한 치료가 행해져야 할지 어떨지를 결정하는 것은 의사와 간호사들과 병원 원목 신부이다(이 문제에 관해서 원목 신부가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환자의 고통이 참으로 어떤 성격을 띠고 있는지를 판정하기 위해서 환자가 말하는 것도 신중하게 경청해야 한다. 결국은 환자 자신이야말로 고통의 가장 훌륭한 판단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의사는 환자가 좀더 용기를 낼 수도 있으리라고 또 환자가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는 실상 더 많은 고통을 참아낼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후의 선택은 환자가 할 일이다. 

 

2.4. 치료 방법

 

2.4.1. 정상적 요법과 예외적 요법

 

전문가들은 치료 방법을 이 두 가지로 구분하는 것에 대하여 상당히 오랫동안 생각하였다. 이 용어가 과학적 전문 용어와 의료의 실제에서는 어느 정도 낡은 것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신학에서는 윤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점들의 당부를 고려하는 데에 반드시 필요하다. 왜냐하면 신학자들은 결코 적용할 의무가 존재하지는 않는 그런 방법에다가 ‘예외적’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구별에 의하여 우리는 상당히 복잡한 현실들을 보다 면밀하게 결합시킬 수가 있다. 이 구별은 ‘중명사’(中名辭) 구실을 한다. 시간이라는 범위 내에 있는 생명은 하나의 기본 가치이나 절대 가치는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 생존을 유지할 의무의 한계를 확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통상적’ 요법과 ‘예외적’ 요법의 구별은 이 진리를 표현해 주며 이 한계를 구체적인 경우에 적용시켜 준다. 이에 해당하는 상당어(相當語), 특히 “실제적 필요에 적합한 처치”라는 말을 사용하면 아마도 개념을 더 만족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2.4.2. 구분의 기준

 

정상적 요법과 예외적 요법을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은 매우 여러 가지가 있다. 이 기준들은 각기 구체적인 경우에 따라서 적용되어야 한다. 그 중의 일부는 객관적 기준이다. 예컨대 주어진 요법의 관용이 얼마나 되느냐, 그런 요법을 이용하는 것이 적당하냐, 그런 요법을 이용하는 문제에서 정의의 대안은 무엇이냐 등, 요법의 본성에 관한 것들이다. 그 밖의 기준은 주관적 기준이다. 예컨대 어떤 환자에게는 심리적 충격이나 불안이나 불편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 등이다. 치료 방법을 결정할 때에 어느 정도로까지 그 수단을 사용하고 그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 적정한가를 확정하는 것은 언제나 문제가 된다. 

 

2.4.3. 생명의 성질이라는 표준 : 그 중요성

 

모든 판단 기준 중에서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되어야 할 것은 치료에 의하여 건져지고 살아나가게 될 생명의 성질이다. 가톨릭 의사 협회의 국제연맹총회에 보낸 빌로 추기경의 서한은 이 문제에 관하여 매우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의사가 사람을 죽이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며 동시에 의사에게는 죽음과 싸우기 위하여 자기 의술의 모든 수단을 다 이용할 의무가 있다는 것은 생명의 신성성에서 연유한다는 것이 강조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의사에게 과학의 끊임없는 창의적 활동에 의하여 주어지고 있는 생명 유지 기술을 하나하나 모두 사용할 의무가 지워져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불치병의 마지막 단계 동안에 식물적 생명을 거듭 되살릴 의무가 부과된다면 그것은 많은 경우에 무용한 하나의 고문이 아니겠습니까?”(Documentation Catholique, 1970년, 963면)

 

그러나 생명의 성질이라는 기준이 고려되어야 할 유일한 기준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주관적인 고려 사항들을 참작해서 무슨 치료를 시행하고 무슨 치료를 시행하지 않을지에 관해서 적절하게 신중히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기본 요점은 가족에게 어떠한 결과가 미치게 될 것인가를 포함하여 여러 가지로 다양한 상황의 모든 측면들을 충분히 고려한 합리적인 근거에 따라서 결정이 내려져야 한다는 데에 있다. 따라야 할 원칙은 그러므로 예외적 요법을 실시할 윤리적 의무가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것, 그리고 의사는 환자가 그런 요법을 거부할 경우에 환자의 소망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2.4.4. 의무적인 최소한의 치료

 

반면에, 어떠한 상황에서라 하더라도 이른바 ‘최소한’이라고 부르는 그런 치료 수단을 적용할 의무는 언제나 엄격히 남아 있다. 곧 생명의 유지를 위하여 정상적이며 관습적으로 사용되는 그런 수단(영양 공급, 수혈, 주사 등)은 언제나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최소한의 처치마저 중단해 버린다는 것은 사실상 환자의 생명이 끝나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7.2. 치료 방법의 선택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신문들이 사람들을 믿게 하고 있는 바와는 달리 의사가 환자를 죽게 할 것이냐 아니냐를 스스로 묻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의사는 특정한 치료 방법에 관하여 결정을 한다. 그 치료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나타나게 될 효과가 무엇이며 반대 효과는 무엇이냐를 판정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하는 데에 의사는 과학적인 지식만이 아니라 윤리적인 원칙도 감안하게 된다. 그래서 의사는 심사숙고하는 동안에 다음과 같은 점들을 고려하는 것이 중대한 의의를 띠게 된다. 무엇을 시도해 보아야 하고 무엇을 시도해서는 안 되는가? 언제 예외적 요법을 사용해야 하며 언제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가? 또 사용해야 한다면 무슨 이유로, 그리고 얼마나 오랫동안, 너무나 자주 의사는 특정한 요법의 계속 여부에 대해서 자문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애당초 그런 치료를 시작한 것부터가 현명한 일이었던가?”를 묻게 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생명을 연장할 윤리적 이유들이 존재한다면, 또한 이른바 “불치병”이라고 불리는 것과 관련하여 죽음을 대항하지 않을 윤리적인 이유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7.3. 집단 치료와 그 치료 대상자의 선택

 

매우 고도로 진보되고 비용이 많이 드는 기구와 기술들을 필요로 하는 “집단 치료”에서 비롯되는 윤리적 문제점들 가운데 하나는 동일한 병명을 가진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는 없는 치료를 적용할 환자들의 선택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도 가장 기초적인 치료조차도 못 받고 있는 터에 단 한 사람의 환자를 위하여 정교한 의료 기술의 자원들을 사용하는 것이 정당한 일일까? 당연히 제기될 만한 질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질문이란 “진보를 역행”하는 질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리스도인들만은 그런 것들을 평가하는 데 그 점을 명심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출처:교황청 사회사목평의회, “중환자와 임종자에 관한 윤리 문제”, 바티칸 출판사, 1981년, 3-7. 21-22면.]

 

 

정리

 

인간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자유로워지려고 한다. 그러나 인간에게 주어지는 고통(비록 죽음이라 할지라도)의 의미를 결코 무가치한 것으로 취급하거나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물론 고통이나 죽음을 스스로 즐기거나 원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할 수 없는 고통이나 죽음을 무조건 손쉬운 방법(안락사)으로만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런 방법은 자신의 삶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결코 고통과 죽음의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그것은 고통과 죽음의 자연적 순리를 역행하는 것이며, 수동적이며 도피적 행위일 따름이다.

 

요즈음 임종 환자의 치료 중단을 두고 ‘존엄사인가?’ 아니면 ‘생명권 침해인가?’라는 문제로 떠들썩하고 있다. 먼저 필자는 묻고 싶다. 누가 과연 인간의 ‘생명권’을 판단할 수 있는가? 환자의 가족들인가? 의료인들인가? 아니면 종교인들인가?

 

[사목, 2003년 2월호, 이창영(주교회의 사무차장 · 본지 주간 · 신부)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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