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홍)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생명] 장기 기증과 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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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6 ㅣ No.326

장기 기증과 이식

 

 

1. 회칙「생명의 복음」

 

86. 이처럼 인간적으로 풍요롭고 사랑에 찬 분위기 속에서 영웅적인 행동 역시 생겨날 수 있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는 이러한 영웅적인 행위들은 생명의 복음에 대한 가장 장엄한 경축입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요한 15,13 참조) 사랑의 가장 높은 단계가 찬란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며, 예수님께서는 그 신비 안에서 모든 사람들의 가치를 보여 주시며. 생명이 진지하게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어떻게 그 충만함을 얻게 되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이러한 특출한 순간들보다 훨씬 위에 매일의 영웅적 행위가 있습니다. 이 영웅적 행위는 크고 작은 나눔의 행위들로 이루어지며, 이러한 행위들이 진정한 생명의 문화를 이룩해 냅니다. 이러한 행위들 중에서 특히 칭찬할 만한 예는 바로 윤리적으로 합당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장기 기증입니다. 이것은 때로는 다른 희망이 전혀 없는 환자에게 건강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 심지어 삶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 행해지는 것입니다.

 

[출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생명의 복음”(1995.3.25.) Origins 24: 42호 (1995.4.6.), 718-719면.]

 

 

2. “혈액과 장기 기증자들”

 

……저는 여러분의 이러한 솔선수범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러한 행동은 이렇게 나아갈 수 있도록 여러분의 마음을 움직인 활력과 용감한 정신을 보여 줍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여러분이 이렇게 한데 모여 하나가 될 수 있게 한 목적, 말하자면 장기를 필요로 하는 형제자매들에게 혈액과 장기를 기증하려는 숭고하고도 칭찬받을 만한 행동을 증진하고 장려하려는 목적을 높게 평가합니다. 그러한 행동은, 여러분이 세속적인 이득이나 목적을 바라서가 아니라, 마음에서 기꺼이 우러나서, 또한 인간적 그리스도교적 연대를 위하여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칭찬받을 만한 것이 됩니다. 그러한 연대는, 복음 메시지의 감동적인 주제이며 실제로 새로운 계명으로 정의되어 온,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혈액과 신체 장기를 기증하면서 여러분도 언제나 이러한 인간적 종교적 관점을 지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이러한 행동이 주님께 바치는 봉헌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질병이나 고속도로에서 일어난 차 사고나 일터에서의 불운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이러한 행동이 고통 받는 주님께 바치는 하나의 선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수난을 통하여 온전히 당신을 내어 주셨으며 인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의 피를 쏟으셨습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초자연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이미 그 자체로 숭고한 여러분의 인도주의적 행위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빛나는 증언으로 변화되어 승화될 것이며, 여러분의 공덕도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

 

[출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혈액과 장기 기증자들”(1984.8.2), The Pope Speaks 30: 1호, 1985년, 1-2면.]

 

 

3. “조직 이식” 시신에 대한 존중

 

우선, 인간의 정신 안에서 형성되지만 흔히 인간의 외적 행위에 영향을 끼치며, 인간의 시신을 동물의 사체나 심지어는 단순한 ‘사물’과 동일한 수준에 놓는, 윤리적 오류가 있는 판단을 단죄할 필요가 있다. 동물의 사체는 거의 모든 부위를 사용할 수 있다. 순전히 유형적인 측면, 다시 말해 그 구성 요소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인간의 시신에 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일부 사람 들은 이러한 태도를 사고의 최종 기준이며 행동의 결정적인 원칙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는 오류가 있는 판단이며, 심리학과 신앙 감각과 윤리 의식을 거부하는 것이다. 인간의 시신은 그와는 전혀 다르게 여겨져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육체는 불멸의 영적인 인간 영혼이 머무는 집으로서, 영혼과 함께 인간의 존엄을 공유하는, 인간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이다. 인간의 시신에도 이러한 존엄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 또한 인간의 육체는 인간의 구성 요소이므로 하느님의 ‘모습을 닮아’ 만들어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지능이 없는 동물이나 전적으로 물질적이고 생명이 없는 피조물에서 볼 수 있는 하느님을 닮은 막연한 흔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1고린6,19)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은 인간의 시신에도 해당된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시신은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누릴 운명에 있지만 동물의 사체는 그렇지 않다. 따라서 시신에 대한 적절한 평가와 처리가 ‘치료적 목적’을 위한 것임을 증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다른 한편으로, 의학과 미래의 의사들을 위한 교육은 인체에 대한 상세한 지식을 필요로 하며, 따라서 인간의 시신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말한 내용이 이러한 연구를 금지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말한 것을 충실히 받아들이면서도 이러한 정당한 목적을 추구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개인은 자기 뜻에 따라, 유용하고 윤리적으로 나무랄 데 없으며 숭고하기까지 한 목적(특히, 아프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소망)을 위하여 자신의 신체를 사용할 수 있다. 개인은 자신의 신체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경의와 존중을 온전히 실현하면서, 또한 사도 바오로가 고린토인들에게 한 말을 충분히 유념하면서, 이러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이러한 결정은 단죄 받아서는 안 되지만, 명백하게 정당화되어야 한다. ……

 

환경이 강제로 요구하지 않는다면, 관련된 당사자의 자율성과 자발성을 존중하여야 한다. 보통 이러한 행위는 어떠한 의무나 의무적인 자선 행위로 제시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행위를 제시할 때에는 심각한 내적 외적 갈등을 막을 수 있도록 현명한 자세를 유지하여야 한다.

 

또한 흔히 그러하듯이, 원칙상 모든 보상을 거부해야 하는 것인가? 이 문제는 아직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보상이 요구된다면 분명히 심각한 남용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보상에 대한 요구나 그 수용을 비도덕적인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지나칠 수도 있다. 헌혈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기증자 가 보상을 거절한다면 훌륭한 일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반드시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각막의 제거는 그 자체로는 완전히 합법적이지만, 시신을 돌보도록 맡고 있는 제삼자의 권리와 감정이 침해된다면 정당하지 못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제삼자들은 주로 가까운 가족들이지만. 공적 사적 권리에 따라 다른 사람들이 될 수도 있다. 의학과 ‘치료적 목적’의 유익을 위하여 매우 심오한 감정들을 무시하는 것은 비인간적인 일이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의사들은 시신을 돌보도록 맡고 있는 사람들의 허락이 없거나 당사자가 사전에 미리 거부 의사를 표명하였을 때, 시신에 대한 적출이나 다른 수술들을 해서는 안 된다. 부유한 환자들의 시신과는 달리, 공공 진료소나 공립 병원에 있는 가난한 환자들의 시신을 의사들이 쓸 수 있도록 정기적으로 충당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일이다. 이러한 민감한 인간의 감정이 관련된 문제에, 돈과 사회적 지위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시신의 완전성에 심각한 손상을 입히는 일에 명시적으로나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정당한 이유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인이 받아야 할 경의를 모독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현명하고 적절하게 설명하여야 한다. 어떻게 하더라도 이러한 동의에는 가까운 가족들의 슬픔과 희생이 따르게 되지만, 이러한 희생은 고통 받는 형제들에 대한 자비의 사랑의 후광으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공공 권위와, 시신의 사용에 관련된 법은 일반적으로 이러한 윤리적 인간적 성찰을 따라야 한다. 이들은 그 인과 관계나 존엄 면에서 사회보다 선행하는 인간 본성 그 자체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공공 권위는 그 시행을 감독하고, 무엇보다도 죽음이 확실하게 증명될 때까지는 ‘시신’으로 간주되거나 취급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의무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 공공 권위는 의학과 의학 교육의 정당한 유익을 보호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범죄에 따른 사망이 의심되는 경우나 공공의 건강에 위험이 되는 경우에, 시신은 공공 권위에 전달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사망자에 대한 존중과 그 가족의 권리를 충분히 존중하면서 이루어질 수 있으며 또 그러해야 마땅하다. 마지막으로, 공공 권위는 시신에 관련된 규제들의 윤리적 합법성과 필요성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일에 효과적으로 이바지하여야 하며, 이를 통하여 개인과 가정과 사회의 내적 외적 갈등의 소지들을 방지하고 뿌리 뽑아야 한다.

 

[출처:교황 비오 12세, “조직 이식”(1956.5.14.), The Human Body: Papal Teachings, 380-383면.]

 

 

4. “여러 윤리적, 법적, 사회적 문제들이 더욱 깊이 있게 검토되어야 합니다”

 

현대 의학의 눈에 띄는 여러 업적들 가운데에서, 면역학과 외과 수술 기술의 발전은 장기와 조직 이식이 치료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최근까지만 해도 단지 죽을 일만 남아 있거나 고통스럽고 제한된 삶만이 기다리고 있던 많은 환자들이 이제는 건강한 장기를 기증받아 병든 장기를 대체함으로써 어느 정도까지 완전하게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것은 분명히 기쁜 일입니다. 우리는 생명에 봉사하는 의학이, 다름 아닌 인간의 근본적인 선을 보호함으로써 장기 기증을 통하여 인류 가족에게 봉사할 새로운 방식을 찾은 것을 기쁘게 생각하여야 합니다.

 

1. 이러한 빛나는 발전에도 물론 어두운 면이 없지 않습니다. 아직도 연구와 임상 경험을 통하여 알아내야 할 것이 많이 남아있으며, 여러 가지 윤리적 법적 사회적 문제들이 더욱 깊고 광범위하게 연구되어야 합니다. 의료 협회나 기증자 단체 쪽에서, 특히 권위 있는 입법 기구에서 단호한 조치를 내려야 할 수치스러운 남용 사례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에도, 우리는 4세기 교회 박사인 성 바실리오의 말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의술과 관련하여, 일부 사람들이 악용한다는 이유만으로 하느님의 은총(곧 의학)을 거부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다. 그보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이 그릇되게 사용한 점을 밝혀야 할 것이다”(“Great Rules”, 55:3, MIGNE, 「그리스 교부 총서」31:1048참조).

 

혈액 수혈에서 시작된 장기 이식의 등장과 함께 인간은 다른 이들이 계속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자기 자신. 곧 자신의 혈액과 신체를 기증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과학 덕분에, 또한 의사들과, 흔히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와 같은 복잡한 수술에 없어서는 안 되는 협력을 제공하는 의료 종사자들의 전문적인 훈련과 헌신 덕분에, 새롭고 놀라운 도전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 이웃들을 사랑하도록 도전 받고 있습니다. 복음의 용어로 말하자면, “더욱 극진히”(요한 13,1) 사랑하도록 요구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에도, 인간의 본성 그 자체에서 비롯하는 넘어서는 안 될 어떠한 한계가 분명히 있습니다.

 

2. 무엇보다도, 이리한 형태의 치료는 기증이라는 인간 행위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사실, 이식에는 기증자나 일반적으로 그의 가장 가까운 친인척이 되는 기증자의 합법적 대리인의 명시적이고 자유로우며 의식적인 결정이 선행될 것을 전제로 합니다. 장기 기증은 아무 대가 없이 자신의 신체 일부를 다른 사람의 건강과 행복을 위하여 주려는 결정인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증자의 행동은 이식이라는 의료 행위를 통하여, 사랑과 친교에 대한 우리의 본질적인 소명을 표현하며 자신을 성실히 내어 주는 자기 증여의 행동이 됩니다.

 

사랑과 친교, 연대, 인간 존엄에 대한 절대적 존중만이 장기 이식의 합법적 배경이 됩니다. 개인이, 인간의 존엄을 보장하고 이를 완성하는 윤리적 규범들을 준수하면서,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일부를, 자기 몸의 일부를 내어 주려는 자유롭고 의식적인 결정을 할 때 관련되는 윤리적 영적 가치들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3. 사실상, 신체는 언제나 개인의 몸, 인간의 몸입니다. 신체는 단순한 육체적 생물학적 존재로 다루어질 수 없으며, 그 장기나 조직이 판매나 교환의 대상의 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한 단순한 물질주의적 사고는 신체를, 곧 인간을 단순한 수단으로 사용되도록 전락시킬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는 장기 이식과 조직 이식이 더 이상 기증 행위에 부합하지 못할 것이며 단지 신체의 강탈에 해당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개인은, 정당하고 적절한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이나 인격적 완전성에 심각한 위험이나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없이도 살아갈 수 없는 부분만을 기증할 수 있습니다. 생명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장기는 사후에만 기증할 수 있다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그러나 살아서 신체의 일부를 기증하는 것, 곧 사후에 자신의 장기가 사용될 수 있도록 미리 기증하는 것은, 이미 여러 경우에 생명을 남에게 내어 주는 위대한 사랑의 행위가 되어 왔습니다. 이렇게 하여 사람들은 생명 의학의 발전 덕분에 죽은 다음에까지 자신의 사랑의 소명을 확장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와 비슷하게, 죽어 가는 과정에서 죽음이 어느 모로 극복되고 생명이 회복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님의 자기 봉헌은 장기 기증 의사의 바탕에 깔린 사랑의 영감이며 본질적인 준거점이 됩니다. 이는 헌신적인 연대의 표현으로서, 과도한 실용주의가 만연하고 이타적인 증여에 둔감해져 가는 이러한 사회에서는 더더욱 돋보입니다.

 

4. 이러한 놀라운 형태의 인간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의사와 그를 돕는 이 들에 대한 생각을 포함하여 좀 더 말씀 드리겠습니다. 간단한 수혈까지를 포함한 이식 수술은 다른 수술과는 다릅니다. 이러한 수술은 기증자의 자기 증여의 행위, 곧 생명을 내어 주는 사랑과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의사는 언제나 이러한 일의 독특한 숭고성을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의사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이 살 수 있도록 - 사후에라도 - 자신을 내어 주는 매우 의미 있는 일의 중개자가 되는 것입니다. 의사는 수술의 어려움, 신속한 행동의 필요성, 그 일에 완전히 몰두할 필요성 등 때문에 자신이 하고 있는 일과 관련된 사랑의 신비에 대한 생각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장기 이식의 수혜자는 그들이 누군가에게 매우 특별한 선물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선물은 바로, 분명히 참된 형태의 인간적 그리스도교적 연대로 여겨져야 하는, 기증자의 자기 증여입니다. 위대한 역사적 약속의 시기이지만 다른 한편 낙태와 안락사 등 생명에 대한위협이 그 어느 때보다 거세고 위험한 시기인 제삼 천년기를 맞으면서 사회는 이러한 구체적인 연대와 자기 증여의 사랑의 몸짓을 필요로 합니다.

 

5. 마지막으로, 복음서 저자이며 의사인 루가가 들려주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기억해 봅시다. “남에게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말에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서 너희에게 안겨 주실 것이다”(루가6,38) 우리는 우리가 이웃에게 보여준 참되고 실제적인 사랑에 따라 하느님께 훌륭한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계시는 주님께서 과학이 가능하게 해 준 놀라운 방법을 통하여 생명을 지키고 생명에 봉사하려고 노력하는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사랑하는 이들에게 평화와 기쁨의 복을 내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여러 윤리적, 법적, 사회적 문제들이 더욱 깊이 있게 검토되어 야합니다.” (1991.6.20), Dolentium Hominum 3호, 바티칸 출판사, 1992년, 12-13면.]

 

 

정리

 

우리나라에서의 장기 이식 수술은 1960년대 후반 처음 시작되어 점차 증가 하여 최근에는 연간 1,000여 명 이상이 다른 사람에게 장기를 이식 받고 있다. 앞으로도 장기 이식 수술을 희망하는 사람은 점차 많아질 것이다. 이제 장기 이식 수술은 더 이상 특수한 어떤 시험적인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치료의 개념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고 하겠다. 장기 이식 수술 방법 또한 날로 발전하여 거의 모든 장기와 조직의 이식이 성공하고 있어 불치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을 구제받게 되는 커다란 희망이 되고 있다.

 

그러나 수술을 희망하는 사람은 많은 반면 공여자가 적기 때문에 기다리다가 사망하는 사람의 수도 적지 않다. 비공식 집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병원마다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장기 이식 수술은 대기하고 있는 사람의 십 분의 일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미국의 경우 1996년 장기 이식 수술을 원하여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50,047명이었으나 1996년 1월부터 12월 사이에 장기 이식 수술을 받은 사람은 19,410명에 불과하였다. 간이나 심장을 이식 받으려고 기다리다가 사망하는 사람은 30% 정도이다. 따라서 병원이나 장기 이식 담당 기관에서는 더 많은 장기를 확보하기 위하여 다양한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장기 공여 카드(donor card)만 있으면 가족의 동의 여부와 무관하게 장기를 적출하는 안(案), 생전에 장기 공여에 동의한 카드나 증빙 서류가 없어도 당사자가 장기 공여에 반대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다면 추정 동의만으로도 뇌사 상태에서 장기를 적출하는 안(案), 또는 생체 이식의 범위를 확대하여 가족 이외의 사람도 장기를 공여할 수 있게 하거나 신장 외에도 간이나 폐도 생체 이식을 시도하는 안(案) 등 장기를 가능한 많이 확보 하려는 여러 가지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 존중의 차원에서 장기 공여는 어디까지나 이타주의적 동기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당사자의 자율적인 결정에 근거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장기 확보를 위한 상기와 같은 전략들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모든 장기 이식 수술은 자유로이 수여를 결정하는 공여자와 사랑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수령자 모두에게 선(善)의 견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때 의사는 그가 부딪히게 될 위험, 곧 수술 중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위험과 수술 후의 모든 부작용의 가능성에 대해 알려 줄 의무가 있으며, 현명한 결정을 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장기 이식을 위한 중요한 기준은 인간 자유의 진전과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존경을 지닌 외과 의사의 가능한 결론에 관계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정체성은 생명 연장이나 이식에서 야기되는 가능한 위험들을 능가하며 증진된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장기 이식의 형태는 일반적으로 크게 네 가지로 구분되는데, 자가 이식(autograft)과 동종 이식(allograft), 그리고 동인자형 이식(isograft)과 이종 이식(xenograft)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자가 이식 : 동일한 사람에게서 장기의 적출과 이식을 하는 것으로서, 신체 조직의 전체적인 선을 위해서 일부를 희생시킬 수 있다는 전체성의 원리에 입각해서 정당화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화상을 입었을 경우 허벅지나 엉덩이의 살을 상처 입은 부위로 이식하는 경우를 말한다.

 

(2) 동종 이식 : 수혜자와 같은 종의 사람으로부터 장기 이식이 되는 것으로서, 인간 존재를 결합시키는 연대성의 원리에 따라서, 그리고 고통 중에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자신을 주는 애덕의 요구에 따라 정당화되는 것이다.

 

(3) 동인자형 이식 : 일란성 쌍생아에서처럼 두 개체가 다르다 해도 유전인자가 동일한 경우, 동종 간의 이식 방법 중 가장 이상적인 이식 형태이다.

 

(4) 이종 이식 : 이종 개체 사이의 장기 이식으로 예를 들면 개나 원숭이의 장기를 사람에게 이식할 경우로 이때에는 반드시 이식 장기의 거부현상이 따른다.

 

자가 이식의 경우에는 적출할 장기가 기증자에게 심각하거나, 회복 불가능할 정도의 손상을 끼치지 않는 것일 때에는 정당하다. 그런데 동종 이식의 경우에는 더 이상 살아 있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시신과 관련된 것이다. 시신은 항상 인간의 사체로서 마땅히 존중 받아야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주체자로서의 존엄성과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의 궁극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다. “사체는 용어의 본래 의미상, 유일한 권리의 주체인 인격성이 제거된 상태이므로 더 이상 권리의 주체가 아니다. 따라서 그것을 유용한 목적으로, 도덕적으로 하자 없고, 고상하게 사용하는 것은 단죄 받을 일이 아니라, 정당화될 수 있는 일이다”(1956년 5월 14일, 교황 비오 12세가 이탈리아 각막 협회와 맹인 연합회 대표들에게 한 훈화 중에서).

 

그러나 장기 적출이 죽음을 유발하거나, 재촉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하려면, 장기 적출 대상이 시신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곧 시신으로부터 장기를 적출하는 것은 기증자의 확실한 죽음이 확인되었을 때에만 합법적이 다. 따라서 장기 기증자가 시신으로 간주되려면, 그 사람이 뇌사 상태, 곧 “모든 뇌의 활동이 회복 불가능한 정지 상태인지를 충분히 확인해야 한다. 완전한 뇌사임을 충분히 확인하면, 필요한 시험을 거친 후에, 장기들을 적출하고 또한 이식을 위해서 그러한 장치들이 살아 있도록 하기 위해 인공적인 장치를 다는 것은 합법적이다”(교황청 과학원, 인공적 생명 연장과 죽음의 정확한 순간의 결정에 관한 선언. 1985. 10. 21.).

 

한 생애 동안 모든 인간의 건강과 생명 자체가 이웃에 대한 봉사를 실행하면서 위험에 처하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죽은 후에라도 생명은 이식된 장기의 형태로서 타인을 위한 봉사에 계속적으로 헌신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죽은 후 자신의 장기를 제공할 수 있는 자유의 존중, 장기의 유용성, 그리고 가족들의 권리와 그와 관련된 법적인 문제들은 해결되어야 하지만. 윤리적인 견해에서 우리 지상 생활의 마지막이 올바르게 끝을 맺어야 한다면 우리의 장기가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데 사용되는 것을 막을 만한 어떠한 장애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사목, 2003년 1월호, 이창영(본지 주간, 주교회의 사무차장, 신부)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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