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홍)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생명] 인간의 성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6 ㅣ No.321

인간의 성(性)

 

 

1. “인간의 성 그 참모습과 참뜻”

 

오늘날 갖가지 사회적 정황에도 부모들이 마주치는 많은 어려움 가운데 두드러지는 한 가지는 자녀들에게 성인 생활을 위한 적절한 준비, 특히 성의 참뜻에 대한 교육을 시키는 일입니다. 성교육의 어려움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이유들이 모두 낯선 것들만은 아닙니다.

 

과거에는 가정에서 구체적인 성교육을 따로 하지 않았어도 문화 전반에 근본 가치들에 대한 존중이 스며 있었고 그 가치들이 지켜지고 보호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선진국에서든 개발도상국에서든 사회 여러 부문에 걸친 전통 양식의 쇠퇴로 자녀들은 실질적이고 일관성 있는 성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반면 부모들은 성교육에 대한 적절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관찰한 바로는 이러한 새로운 상황은 인간에 대한 진지의 퇴색,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성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로 더욱 악화되고 있습니다. 사회와 대중매체는 대부분의 경우 성에 대해 비인격적이고 쾌락적이며 흔히 부정적인 지식을 제공합니다. 더욱이 이러한 지식은 어린이와 젊은이들의 다양한 형성 과정과 발달 단계를 고려하지 않고 있는데다가, 생명과 사랑, 가정이라는 기본 가치들이 결여된 환경에서 자유에 대한 개인주의적이고 왜곡된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 저희 가정평의회는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에 대한 교육과 올바른 성생활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또한 신자 공동체의 독특한 “인간 체험”을 의식하면서, 주님의 말씀에서 오는 지혜와 교회의 가르침을 밝혀 주는 가치들을 바탕으로 사목 지침을 펴내고자 합니다.

 

…… 이 분야에서 교회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몇 가지 확신을 통해 힘을 얻었으며, 그 확신들은 이 문헌을 준비하는 데에 길잡이가 되어 주었습니다.

 

사랑은 남자와 여자의 만남을 통하여 성장하고 표현되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그들을 인격체로 성숙해 가도록 하는 긍정적인 힘입니다. 각자의 소명을 드러내 주는 삶의 계획에서 사랑은 자기 증여의 귀중한 원천으로서, 모든 남녀는 자아 실현과 행복을 위하여 자기 증여에 초대받고 있습니다. 사실 인간은 육화된 영으로서, 곧 영혼과 육신이 결합된 인격체로서 사랑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사랑에는 육체가 포함되며, 육체는 또한 정신적 사랑을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성은 순전히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깊은 핵심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육체를 내어주는 성행위는 남자와 여자가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주는 자기 증여의 표현일 때 그 참모습을 지니게 되며 온전한 의미에 도달하게 됩니다. 

 

인간이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사랑은 원죄 때문에 쉽게 유혹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유혹은 오늘날 매우 부정적이며 때로는 충격적이고 상식에서 벗어난 영향들 아래 놓여 있는 사회`-`문화 환경에서 체험되고 있습니다. 혼인 성소(혼인 전, 혼인 준비 기간, 혼인 후, 혼인 생활 동안)를 받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봉헌 생활을 하도록 특별한 부르심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에게도 기쁨의 동기가 되었습니다.

 

구원과 청소년 교육의 견지에서 볼 때, 정결의 덕은 세례의 은총으로 드높여지고 풍요로워지는 사추덕의 하나인 절덕(節德)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결을 절제의 태도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정결은 순결로 이해되어야 하며, 각 인간의 특정한 소명 안에서 실현되는 자기 증여의 관점에서, 귀중하고 풍요로운 사랑의 선물을 임시 관리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정결은 “이기심과 공격성의 위험에서 사랑을 보호하고, 사랑의 완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영신적인 힘”입니다.

 

……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젊은이들은 부부애의 존엄성과 그 기능과 실천에 대해서, 특히 가정의 품 속에서 적기에 적절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 특히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인간 생명의 신비에 대하여 가르쳐 줄 의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정은 “점진적인 성생활 교육의 의무를 완수하기에 가장 좋은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은 지극히 복잡 미묘한 현실들을 충격 없이 받아들이게 하고 그 현실들을 균형 잡히고 풍요로운 인격 안에 조화롭게 통합시켜 줄 수 있는 정서적 품위를 지니고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가정의 이러한 일차적 임무에는 성교육과 관련하여 자녀들이 학교에서 부모의 종교적 도덕적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 교육을 강요받지 않도록 보장할 부모의 권리도 포함됩니다. 학교의 임무는 가정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일을 도와주고 보충하며,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성을 완전한 인간, 곧 하느님의 모상대로 남자 또는 여자로 창조된 인간(全人)의 가치요 과제로 평가하도록 교육시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가정 공동체」에 나오는 교황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게 됩니다. “교회는 도덕 원리에 어긋나는 성 지식을 널리 보급하는 것에 강력히 반대합니다. 도덕 원리에서 벗어나는 성 지식은 때묻지 않은 시기에 악의 길을 열어 줌으로써 마음의 평온을 잃게 하는 쾌락과 충동을 체험하게 할 따름입니다.”

 

따라서 먼저 네 가지 일반 원칙을 소개한 다음, 자녀의 여러 성장 단계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성 지식과 관련한 네 가지 원칙

 

자녀 개개인은 유일하고 복제될 수 없는 인간이므로 개별적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 개개인의 고유한 특성을 알고 이해하며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들의 신체적 정신적 성장에 따라 어느 시기에 어떠한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좋을지를 결정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위치에 있습니다. 세심한 부모가 되지 않고서는 누구도 이러한 식별 능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자녀들이 한 인간으로 성숙하는 과정은 각자 다릅니다. 그러므로 생물학적 측면이든 정서적 측면이든 자녀의 가장 내밀한 면모가 부모와 자식 사이의 인격적 대화를 통하여 전달되어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 개개인과 사랑과 신뢰를 가지고 대화할 때 그들은 그들 자신의 증여에 대한 무엇인가를 자녀들에게 전달합니다. 이를 통하여 부모들은 다른 방법으로는 전할 수 없는 성의 정서적 차원의 측면들을 자녀들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

 

도덕적 차원은 항상 부모의 가르침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혼인이나 동정 또는 독신 생활 안에서 성의 선물을 살아가도록 부름 받고 있다는 것을 부모들은 강조해야 합니다. 부모들은 정결의 긍정적 가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참된 사랑을 낳는 정결의 힘을 강조해야 합니다. 이것이 정결의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도덕적 측면입니다. 정결하게 살 줄 아는 사람만이 혼인 또는 동정 생활에서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될 것입니다.

 

부모들은 자녀가 유아기 때부터 본능적인 성 행동을 보이기 시작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후에 죄가 될 수 있는 그러한 습관들을 부드럽게 고쳐 주며, 자녀가 성장해 감에 따라 필요할 때 절제를 가르치는 것을 억압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 존엄과 정결에 위배되는 일부 태도들을 적절하고 설득력 있는 유효한 근거에 입각하여 이성과 신앙의 차원에서, 곧 인간 존엄이라는 높은 차원의 개념 안에서 윤리적 거부의 견해를 밝혀야 합니다. ……

 

정결 교육과 적절한 시기의 성교육은 사랑의 교육이라는 폭넓은 맥락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객관적인 윤리 원칙과 성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의 영성 생활의 성장을 끊임없이 도와줌으로써,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사랑이 생물학적 성장과 충동을 경험하기 시작하는 자녀들과 언제나 함께하시도록 하며, 인간 개개인과 남녀의 육체의 존엄에 대한 인식을 넓혀갈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부모들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에 비추어 사랑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 소명과 보편적 성화 소명의 맥락에서 인간 성의 긍정적 가치들을 설명해 줄 수 있습니다. ……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성에 대한 교육을 아주 신중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또 알맞은 시기에 제공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들 개개인의 신체적 심리적 성장의 상황에 따라 그리고 문화 생활 환경과 청소년들의 일상 체험을 고려하여 그들을 개별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각 자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를 올바로 판단하기 위해서 부모는 무엇보다도 기도 안에서 주님께 빛을 구하고 자신들의 말이 너무 직설적이거나 애매 모호한 것이 되지 않도록 서로 상의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자녀들에게 성에 대해 너무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찍 가르쳐 주어야 할 성 문제를 뒤로 미루는 것도 신중하지 못한 처사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성에 대해 자연스러운 호기심을 가지며 조만간 스스로에게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너무 많은 것이 심지어는 공공연하게 노출되는 문화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

 

이러한 권고들에 비추어 사랑에 대한 교육은 다음 네 가지 운영 원칙 안에서 구체적인 형태를 띨 수 있습니다.

 

1. 인간의 성은 신성한 신비이며 그것은 원죄의 결과를 항상 기억하는 교회의 교리와 도덕적 가르침에 따라 제시되어야 합니다. 

 

2. 개개인의 성장 단계에 맞는 지식만을 어린이와 젊은이들에게 제공해야 합니다. 

 

3. 에로틱한 성격의 소재는 어린이나 어떤 연령의 젊은이에게도 개인 또는 집단으로 제시되어서는 안 됩니다. 

 

4. 어느 누구도 객관적으로 정숙하지 못한 행동을 하거나 주관적으로 개인의 민감한 문제나 사적 감정을 거스를 수 있는 행동을 하도록 권유받거나 강요되어서는 안 됩니다.

 

[출처: 교황청 가정평의회, “인간의 성 그 참모습과 참뜻”, Origins 25, 32호 (1996.2.1.), 530-532면.]

 

 

2. “성 윤리상의 특정 문제에 관한 선언”

 

1. 현대 과학의 연구에 의하면 성욕이 인간에게 상당히 깊은 영향을 주기 때문에, 그것은 개인 생활에 주요 특성을 제공하는 요인들 중의 하나로 취급되어야 한다. 사실 한 사람이 생리적 심리적 영신적 차원에서 남자나 여자가 되게 하며 성숙에로의 전진과 사회 적응을 크게 좌우하는 특징을 인간은 성(性)에서 받는다. ……

 

3. 현대인들은 인간이 자신의 지력으로 인간성에 내재하는 가치를 발견하는 것을 인간의 존엄성과 소명이 요구한다고 확신한다. 또한 인간의 존엄성은 사람들이 그 가치를 개발하고 더 큰 발전에 도달하기 위해서 실생활에서 그 가치를 실현하기를 요청한다고 현대인은 믿는다. 

 

도덕 문제에 있어서 인간은 개인적 기분에 따라 가치 판단을 할 수는 없다.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부과하지는 않았으나 복종을 요구하는 규범을 양심의 심저에서 발견한다. 인간은 하느님이 마음속에 기록해 놓은 법을 갖고 있다. 그것에 복종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것에 따라 인간은 판결 받을 것이다.” ……

 

그러므로 인간성의 본질적 질서가 지켜지지 않는다면, 인간의 존엄성은 보존될 수 없다. 물론 문화사의 과정 중에 인간 생활의 많은 구체적 조건과 요구가 변하였고 또한 계속 변할 것이다. 그러나 도덕의 진화와 생활 형태는 인간의 구성 요소와 본질적 관계 위에 기초한 불변적 원칙에 의해서 규정된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 요소와 관계는 역사의 우연성을 초월한다. 

 

이런 기본적 원칙은 인간 이성으로써 파악될 수 있으며 “영원하고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신법에 포함되어 있다. 지혜와 사랑 안에 세워진 계획인 신법에 따라, 하느님은 전 우주와 인간 공동체의 모든 움직임을 정리하고 지도하고 통솔한다. 하느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 신법에 참여케 하였고 그 결과로 하느님의 안배의 지도 아래 인간은 불변적 진리를 점차로 더 파악할 수 있다.” 우리의 지성은 이 신법에 접근할 수 있다.

 

4. 그래서 인간성과 계시된 법규에서 인간 존엄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일반적 법을 발견할 수 있어도, 개별 행동을 위한 절대적이고 불변적 규범을 발견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은 잘못을 범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 주장의 입증으로 소위 자연법의 규범이나 성서의 계율은 역사의 일정한 순간에 존재했던 특정 문화의 표현으로만 취급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

 

5. 성도덕은 인간적이고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기본적 가치와 관련되므로, 이상의 일반적 교훈은 또한 성도덕에도 적용된다. 이 분야에는 속세의 견해와 도덕이 아무리 반대하였어도, 교회가 교리의 일부로서 항상 거침없이 전수해 온 원칙과 규범이 있다. 이 원칙과 규범은 결코 어떤 문화에 기초를 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신법과 인간성에 관한 지식에 근거를 둔다. 그러므로 새로운 문화적 상황이 출현하였다는 구실 하에 그것들은 구식이나 의심스러운 것이 되었다고 간주할 수 없다.

 

사회 생활의 조직과 교육을 위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격려와 지령은 이 원칙에서 흘러나왔다. 사회 생활의 조직은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존중하면서 동등한 존엄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사람의 “성적 본성과 생식 능력”에 관하여 논하면서 인간은 “하급 생명체의 성벽을 훨씬 초월한다.”라는 점에 공의회는 주목하였다. 그리고서 결혼자의 성행위에 관련되며 성 기능의 목적에 기초하는 원칙과 기준을 설명하는 데 공의회는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이 점에 있어 결혼 생활에 합당한 인간 존엄에 따르는 행위의 도덕적 적합성은 의향의 성실성이나 동기의 내용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공의회는 선언한다. 윤리성은 객관적 기준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 인간성과 행동에 기초한 이 기준은 참된 사랑 안에 상호 자기 증여의 의미와 인간 생식을 보장한다.

 

이 마지막 말마디는 성행위의 목적과 성도덕의 중추적 기준에 관한 공의회의 교훈을 간략하게 요약한다. 같은 헌장의 전반부에 좀 더 충분한 설명이 있다. 성행위의 윤리성을 보장하는 것은 그것의 목적을 존중하는 것이다.

 

교회가 하느님의 계시와 자연법의 유권 해석에서 인출한 이 원칙은 전통적 교리의 기초이기도 하다. 전통적 교리에 의하면 성 기능의 사용은 참된 결혼 안에서만 진정한 의미와 윤리적 정당성을 갖는다.

 

6. 이 선언문의 목표는 성 능력의 온갖 남용과 순결 실천에 관련된 모든 요소를 취급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의 목표는 심각한 잘못과 널리 퍼진 이탈 행위에 대하여 반박할 필요가 긴급하여, 몇 가지 특정 문제에 관해서 교회의 교리를 재천명하려는 것이다.

 

7. 현대에는 결혼 전 성적 결합에 대한 권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적어도 결혼할 굳은 지향이 있고, 당사자의 심리에는 어느 정도 이미 부부적인 애정이 완성을 요청하고 애정은 태생적이라고 판단되는 경우에 그렇다. 이것은 특별히 결혼식이 사정으로 지연되거나 사랑이 지속되기에는 친밀한 관계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경우이다.

 

이 견해는 모든 성행위는 결혼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그리스도교적 교리에 반대된다. 이 같은 미숙한 성적 관계를 실천하는 이들의 지향이 아무리 견고해도, 이런 관계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상호 관계가 성실과 충실로 가득 차게 하지 못하고 특히 부부 관계를 기분과 변덕에서 보호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남아 있다. 예수님이 원한 것은 안정된 결합이므로, 그는 성(性)의 차이에서 시작하여 안정된 결합의 원초적 필요 조건을 복구하였다. “처음부터 창조주께서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것과 또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 제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리라고 하신 말씀을 당신들은 아직 읽어 보지 못하였습니까?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욕정으로 불타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결혼한 사람의 사랑은 결혼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교회에 대해서 공고히 가졌던 그 사랑으로 승격되는 반면에 방종한 성적 결합은 성령의 궁전이 된 그리스도 신자를 모독한다. 그러므로 성적 결합이 남자와 여자 사이에 확정된 생활 공동체가 이룩되었을 경우에만 합법적이다.

 

이것은 교회가 언제나 해득하고 가르친 것이다. 교회는 또한 인간의 사변과 역사의 교훈에서 이 교리와의 깊은 동의를 발견한다.

 

성교(性交)가 정말로 자기 목적의 필수 조건과 인간 존엄성의 조건에 상부하자면, 사랑이 결혼의 안정 안에서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이 필수 조건은 사회에 의하여 재가되고 보장된 부부의 계약을, 남자와 여자의 독점적 결합뿐 아니라 그들의 가정과 인류 공동체의 안전을 위해서 중대한 생활 상태를 설정하는 계약을 요청한다. 아주 흔히 결혼 전 성관계는 자녀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부부애라는 것은 반드시 부성애와 모성애로 발전해야 하면서도 그렇지 못하다. 그렇게 된다 해도 자녀들에게 해를 끼치게 된다. 그 자녀들은 안정된 환경을 박탈당하여 사회에 적응 침투하는 방법과 길을 발견할 만큼 성장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 안에 결합되기 원하는 이들의 동의는 외형으로와 사회의 눈앞에도 유효한 방식으로 표명되어야 한다. 신자들에 관한 것이라면, 부부 생활의 공동체를 시작하는 동의는 교회의 법규에 따라 표현될 것이다. 그 동의는 그들의 결혼을 그리스도의 성사로 만든다. ……

 

9. 자위 행위가 중대한 도덕적 이탈이라는 전통적 가톨릭 교리가 요즈음 자주 의심을 받고 명백히 부인되기도 한다. 심리학과 사회학은 그것이 특히 청소년에게 있어서는 성적 발전의 정상 현상임을 입증한다고 한다. 인간이 자기 안으로 은폐하고 고의적으로 단독 쾌락을 자행할 정도이어야만 진실로 중대한 과오가 있다고 주장한다. 성 능력의 사용에 있어 이성간의 사랑의 결합이 주로 추구되는 것임에도, 이상의 경우에는 자위 행위가 이 결합에 철저하게 반대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견해는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과 사목 실천에 위배된다. 신학자들이 가끔 사용해 온 생리학과 철학적 논증력이 어느 정도이든 간에, 영구적 전통을 가진 교회의 교도권과 신자들의 도덕 관념은 자위 행위가 내재적으로 중대한 타락 행위라고 거침없이 선언한다. 이러한 행동의 동기가 무엇이든지, 정상 부부 관계 밖에서 성 능력을 고의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성 능력의 목적에 위배된다는 것이 주요 이유이다. 그 행위에는 도덕 질서가 요청하는 성관계 곧 ‘참된 사랑 안에 상호 자기 증여의 의미와 인간 생식을’ 실현할 관계가 결여되기 때문이다. 모든 고의적 성행위는 이런 정규 관계 안에만 보류되어야 한다. 성서가 이 죄악을 지명해서 단죄한다는 것을 입증할 수는 없으나 신약성서가 ‘불결’과 ‘부정’과 순결과 절제에 반대되는 다른 죄악에 관하여 말할 때에 자위 행위도 단죄하였다고 교회의 전통은 바르게 해독하였다.

 

사회학적 조사는 장소, 인구, 환경에 따라 이 이탈 행위의 빈도가 변함을 보여 준다. 이런 방법으로 사실이 발견되나, 사실이 인간 행동의 윤리적 가치를 판단하기 위한 기준이 되지는 못한다. 문제는 현상의 빈도는 확실히 원죄에 따른 인간의 태생적 유약성에 연결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하느님에 대한 의식 상실, 악의 상품화로 인한 도덕의 퇴폐, 많은 공적 오락과 출판물의 무절제한 방종과 순결의 수호자인 정숙의 상실과도 관련되었다.

 

자위 행위의 문제에 관하여 현대 심리학은 도덕적 책임에 관해서 좀 더 공정히 판단하며 사목 방침을 설정하는 데 매우 유효하고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다. 청년기의 미숙, 심리적 불균형이나 습관이 행동의 신중성을 감소시키기도 하고 주관적 중대 과실성을 제거할 수도 있는 상황을 조성하면서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배우는 데 심리학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중대 책임성이 결여되었다고 추측하지 말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도덕 능력을 오인하는 것이 된다.

 

사목 활동에 있어 구체적 경우에 적절한 판단을 내리려면, 사람들의 습관적 행위가 총괄적으로 고찰되어야 한다. 그 개인이 사랑과 정의를 어떻게 실천하며, 또 순결의 특수 계율 준수에 얼마나 유의하는가가 고려되어야 한다. 특히 욕정을 극복하고 덕행에 진보하기 위해 그리스도교적 수덕학이 오랜 경험에서 추천하는 자연적 초자연적 필요한 방법을 그 개인이 사용하는지 않는지를 고찰해야 할 것이다.

 

10. 적어도 사람들의 실생활에서 중죄의 실재를 공공연히 부인하지는 않아도, 되도록 과소 평가하는 현대의 경향 때문에, 성 문제에 관한 도덕률의 준수와 순결의 실천이 특히 덜 열렬한 그리스도인 중에는 상당히 위태로워졌다. 하느님과의 결별을 야기하는 대죄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직접 정식으로 거절할 때에나, 또는 이웃 사랑에 대하여 완전히 또 고의적으로 자신을 폐쇄하는 이기심의 경우에만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럴 때에만 ‘근본적 선택’이, 다시 말하면 대죄를 범하기에 꼭 필요한, 인간을 완전히 투신하는 결단이 작용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이런 선택으로써 인간은 인격의 심저에서부터 하느님이나 사람들에 대한 근본적 태도를 결정한다. 그와 반면에 소위 ‘주변적’ 행동은(결정적 선택을 내포하지 않는다고 한다) 흔히 습성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근본적 선택을 변경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주변적 행동은 근본적 선택을 약화시킬 수는 있어도 완전히 변경시킬 정도에 이르지는 않는다. 이 저자들에 의하면 하느님에 대한 근본적 선택의 변경은 성 활동 분야에서는 잘 발생하지 않는다. 성 분야에서는 사람이 충분히 고의적이고 책임 있는 양식으로가 아니라 오히려 욕정, 유약성, 미숙의 영향과 어떤 때에는 타인에게 사랑을 표시한다는 착각 하에 도덕 질서를 위반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원인들에 흔히 사회 환경의 압력이 첨가된다.

 

실제에 있어 최종적으로 인간의 도덕적 기질을 규정하는 것은 분명히 근본적 선택이다. 그러나 먼저 오는 더 피상적인 행동으로 준비되었을 때에는 개별 행동도 근본적 선택을 완전히 변경시킬 수 있다. 경우가 어떻든지, 개별 행동은 대죄를 구성하기에 부족하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느님에게 반대하는 대죄는 사랑의 계율에 직접 저항하는 데만 있지 않다. 중대한 문제에 있어 도덕률의 모든 고의적 위반에 포함된 진정한 사랑에 반대되는 행동에서 대죄는 발견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의 이중 계율이 도덕 생활의 기반이라고 지적하셨다. 그리고 이 계율에 모든 율법과 예언서는 요약된다. 그러므로 사랑의 계율은 다른 개별 법규도 포함한다.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라고 묻는 젊은이에게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려거든 계명을 지켜라. ……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고, 거짓 증언하지 말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라고 예수님은 대답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동이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직접 경멸할 때뿐 아니라, 무슨 이유에서든지 중대하게 이탈적인 것을 의식적이고 자유로 선택할 때에도 사람은 대죄를 범한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와 같은 선택에는 이미 하느님의 계율에 대한 경멸이 내포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느님에게서 자신을 멀리하고 사랑을 상실한다. 그리스도교적 전통과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올바른 이성도 인식하듯이, 성도덕은 인간 생활의 높은 가치와 관련되므로 성도덕의 모든 직접 위반은 객관적으로 중대하다.

 

성도덕의 범죄의 종류와 원인을 고찰하면, 자유로운 동의가 충분하지 않은 수가 흔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 사실은 성 범죄자의 책임성을 판단하는 데 진중을 요청한다. 이 문제에 있어, “사람은 외모를 보나 하느님은 마음을 본다.”는 성서의 구절을 회상하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 그러나 개별 범행의 주관적 심각성을 판결하는 데 지혜가 요청되지만 성 분야에서는 대죄를 범할 수 없다는 견해를 고수할 수 없다.

 

그러니 영혼의 지도자들은 인내와 친절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계율을 무효화시키거나 사람들의 책임성을 무리하게 축소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가르침을 축소하는 것은 결코 영혼을 위한 훌륭한 사랑의 행위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주님이 사람들을 다룰 때 모범을 보여 주셨듯이 그것은 인내와 친절을 동반해야 한다. 단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으므로 그는 악에 대해서 정말 비타협적이었으나 개인들에 대하여는 자비로웠다.”

 

11.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 선언문의 목적은 현대 상황에 놓인 신자들의 주의를 경계해야 할 행동 양식과 몇 가지 잘못에 집중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순결의 덕은 위에 열거된 결함을 피하는 데만 국한된 것이 절대 아니다. 그것은 내적 외적 행동을 포함한 전인격에 관련된 덕이다.

 

각 사람은 생활 상태에 따라 이 덕을 닦아야 한다. 어떤 이에게는 순결은 온전한 마음으로 하느님께만 자신을 용이하게 바치는 훌륭한 방법인, 하느님께 봉헌된 동정이나 독신 생활을 의미할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는 기혼자인지 독신자인지에 따라, 그것이 도덕률로 규정된 형식을 취할 것이다. 그러나 생활 상태가 무엇이든지 순결은 단순히 외적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사람의 마음을 순결하게 해야 한다. “간음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여러분은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 사람은 마음으로 벌써 그 여자와 간음한 것입니다.”

 

순결은 성 바오로가 성령의 선물 중에 넣는 절제에 포함되는 반면에, 그는 육욕을 그리스도인에게 특히 부당한 죄악이고, 천국에의 입장을 배제하는 죄악이라고 단죄한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음행을 피하고, 각자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거룩하게 자기 아내의 몸을 대하고,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교도들처럼 욕정에 빠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이런 일로 형제를 속이거나 그의 권리를 침범하거나 해서는 안 됩니다. ……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음탕하게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경고를 거역하는 사람은 사람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는 하느님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음행이나 온갖 더러운 탐욕 따위의 말은 여러분의 입에 담지도 마십시오. 그래야 성도로서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음행하는 자와 더러운 짓을 하는 자와 탐욕을 부리는 자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상속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단단히 알아두십시오. 탐욕을 부리는 자는 우상을 숭배하는 자입니다. 여러분은 아무한테도 허황한 이론에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이런 일 때문에 하느님의 진노가 당신을 거역하는 자들에게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런 사람들과 상종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전에는 어두움의 세계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주님을 믿고 빛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빛은 모든 선과 정의와 진실을 열매 맺습니다.”

 

그 외에 간음죄는 이웃 사람이나 사회 질서에 해로운 행동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간음자는 인간을 당신 피로 구원하였고 당신 지체로 만드신 그리스도와, 인간을 궁전으로 삼으신 성령을 거슬러 범하기 때문에 사도 바오로가 간음죄를 단죄할 때, 그는 순결을 실천하기 위한 특별히 그리스도적인 동기를 지적한다.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 인간이 짓는 모든 딴 죄는 자기 몸 밖에서 일어나는 것이지만, 음행하는 자는 제 몸에 대해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이 계신 성전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값을 치르고 여러분의 몸을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시오.”

 

신자들이 순결의 가치와 남자와 여자로서의 생활에 순결의 필수 역할을 올바르게 인식하면 할수록, 그들은 영신적 본능을 통하여 순결의 도덕적 요구와 조언을 더 잘 이해할 것이다. 같은 식으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교훈에 순종하는 정신에서 올바른 양심이 구체적 경우에 지시하는 것을 수락하고 이행하는 법을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12. 사도 성 바오로는 생기 있는 말마디로 죄에 노예된 사람의 고통스러운 내적 투쟁, ‘내 마음의 법’과 ‘나를 사로잡아 내 몸 속에 있는 죄의 법’ 사이의 투쟁을 서술한다. 그러나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해서 ‘죽음의 육체’에서 해방을 얻을 수 있다. 이 은총으로 의화된 이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준” 이들은 이 은총을 가진다. “그러므로 결국 죽어 버릴 육체의 욕망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이 죄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사도가 맹서한 것은 이 이유 때문이다.

 

새 생활 안에 하느님을 섬기는 데 적합하게 하는 이 해방은, 원죄에서 흘러나오는 욕정이나 ‘악마의 지배’에 있는 세상에서 악에로의 선동을 억제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들은 하느님의 힘으로 유혹을 극복하고, 신앙과 경계하는 기도와, 몸을 성령에게 굴복시키는 엄격한 생활로써 ‘악마의 속임수에 대항하도록’ 사도는 격려한다.

 

그리스도의 발자국을 따르면서 그리스도교인의 생활을 하는 것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 것이기 때문에” 상급 받을 희망을 안고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버리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기를” 요구한다.

 

이런 긴급한 격려를 따라 다른 어느 때보다 현대의 신자들은 순결한 생활을 위해서 교회가 항상 추천해 온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그 방법이란 감각과 정신의 훈련, 죄의 기회를 피하기 위한 경계와 지혜, 정숙의 준수, 절제 있는 오락, 건전한 추구, 항구한 기도,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자주 받음이다. 젊은이들은 특히 하느님의 원죄 없는 모친께 대한 신심을 열심히 기르고, 성인들과 다른 성실한 사람들, 특별히 순결 실천에 탁월하였던 젊은이들의 생활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누구나 순결의 덕, 순결의 아름다움과 매력에 대한 높은 존경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이 덕은 인간의 존엄성을 높이고 인간으로 하여금 진정으로, 사심 없이, 헌신적으로, 타인을 존경하면서 사랑할 수 있게 한다.

 

[출처:신앙교리성, “성 윤리상의 특정 문제에 관한 선언”(1975.12.29.), Vatican Council II, 제2권, 1982년, 486-496면.]

 

 

3. “인간적 사랑에 관한 교육 지침”

 

성(性)의 의미

 

4. 성은 인격을 구성하는 하나의 기본적 요소로서, 그가 존재하고 자기를 드러내고, 다른 이와 친교하고, 느끼고, 표현함으로써 인간적 사랑을 주고받는 양식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격 개발과 교육 과정에 있어서 절대로 필요한 분야이다. “사실 인간은 자기의 성에 의하여 생리적, 심리적, 정신적 차원에서 하나의 남자 또는 여자가 되게 하는 특성을 얻으며, 또한 그것에 의하여 그의 성숙의 진보와 사회적 적응이 크게 좌우된다.”

 

5. 성은 육체적으로나 심리적, 정신적으로도 남성과 여성을 특징짓고 각자의 표현에서 자기의 성을 나타내게 한다. 성의 이러한 상이성은 상호 보완성을 이루며, 각자의 소명에 따라 하느님의 계획에 철저히 응답하도록 만들어 준다.

 

자녀 출산을 지향하는 성교는 결혼한 부부가 육체를 통하여 사랑의 친교를 나누는 가장 완전한 표현이다. 자기를 내어 주는 이러한 상호 증여는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실재로서 하느님의 은총에 의한 특별한 방법으로 유지되고 풍요로워지며, 그 상호 증여의 맥락을 벗어난 성교는 그 의미를 상실하고 개인의 이기주의를 드러내는 도덕적 무질서가 된다.

 

6. 성은 사랑에 의하여 방향 지어지고 고양되고 완성됨으로써 참다운 인간적 자질을 쌓게 된다. 성은 생리적, 심리적으로 개발됨으로써 조화 있게 성숙되며, 이타적 사랑과 전적인 자기 증여로써 성을 표현할 수 있는 정서적 성숙성으로써만 완전히 성취된다.

 

현실 상황

 

7. 성교육은 그리스도교 교육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 현저한 차이점들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도덕성이 혼란한 현대의 풍토 속에는 창조주의 손으로 창조된 인간 존재의 순수한 본성을 왜곡하는 해로운 동조주의나 편견이 생길 수 있는 위험이 존재한다. 

 

13. 그리고 문제를 학문적으로 신중하게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은 칭찬 받을 만하다. 그들은 인간적 학문의 차원을 뛰어 넘어 인간의 존엄성과 복음의 빛에 비추어 그러한 연구 결과를 종합하고 있는 것이다.

 

성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개념

 

22. 남자와 여자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관점에 있어서 우선 생명의 의미와 인간의 소명을 알아내는 데에 도움을 주는 육체의 특수한 기능을 인정해야 한다. 육체는 실제로 인간의 정신에 따라 존재하고 행동하는 양식이다. 우선 인간학적 성격으로 보는 의미에서, 육체는 인간을 계시하고, “인격을 표현한다.” 따라서 그것은 남자와 여자에게 전해 주신 하느님의 메시지이며, “영원으로부터 하느님 안에 감추어 있는 신비를 효과적으로 이 세상에 전해 주시는 표징으로서 하나의 원초적 성사”라고 할 수 있다.

 

23. 신학적 성격으로 보는 둘째 의미에서, 육체는 하느님과 그분의 창조적 사랑을 알아듣는 데에 도움을 준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가 피조물이라는 것과 그들의 의존성으로 사랑의 근본적 선물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육체는 사랑의 근본적 선물로서 창조의 증인이 되며, 그와 같은 선물이 흘러나오는 원천인 사랑의 증인이 된다.”

 

25. 하나의 인간이 결정됨으로써 드러나는 성적 구별은 인간으로서의 본성과 존엄성이 동등하면서도 성은 다르다는 남녀간의 차이를 뜻한다. 

 

인간은 자기의 내밀한 본성에 의하여 사랑의 상호성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산다. 남녀의 성은 상호 보완적인 것으로서 동시에 비슷하면서 다르고, 인격의 존엄성에 있어서도 동등하면서 동일하지 않다. 남녀는 상호 이해를 위하여 동료가 되고, 상호 보충을 위하여 서로 다른 것이다.

 

26. 남자와 여자는 하느님 안에 참여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피조물로서 자기를 실현하는 두 가지 양식이 된다. 그들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으므로, 개체적 인간으로서만이 아니라 사랑의 공동체인 부부로서도 그러한 소명을 완전히 성취한다. 부부 일치와 자녀 출산을 목적으로 하여 결혼한 남녀는 하느님의 창조적 사랑에 참여하며, 다른 사람과 일치함으로써 하느님과도 일치하여 산다.

 

28. 남자와 여자는 그들의 성을 생식 행위의 대상으로만 보는 쪽으로 기울어지면서부터 성의 가치를 하락시키게 되었고, 성의 본성 때문에 타락한 사람들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이 지침서는 그러한 가치 하락을 뒤집어 놓으려고 하는 것이다. 

 

30. 그리스도의 신비에 비추어 보면, 성은 성령께서 구원된 사람의 마음 속에 심어 주신 그 사랑을 실현해야 할 소명으로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랑의 소명을 혼인성사로 풍요롭게 하신다.

 

31.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모범으로 하느님 나라를 위한 동정 생활(독신 생활)의 소명을 가르쳐 주셨다. 동정 생활은 사랑을 위한 소명이며,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마음을 더욱 자유롭게 만들어 준다. 그러므로 부부애의 의무가 없는 동정자는 이웃 형제 자매들을 헌신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아량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를 위한 동정 생활은 우리를 대신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자신을 봉헌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더욱 적절하게 보여 주며, 애덕 안에서 완전히 실현된 영생의 실재성을 아주 선명하게 예시하는 것이다.

 

동정 생활은 결혼 형태의 사랑을 포기하는 대신 자기의 성이 지니고 있는 역동성, 곧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를 내어 주는 개방성을 더욱 활력 있게 발휘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하느님 아버지와 형제들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역동성을 강화하고 변모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32. 종합해서 말하면, 인간은 성에 내포되어 있는 여러 가지 가치를 거기에 필요한 도덕적 요구에 따라 실천해야 한다. 성은 상호 인격적 대화를 지향하고, 인간의 완전한 성숙에 도움을 주며, 사랑으로 자기를 내어 주도록 사람들을 개방시켜 준다. 그것은 또한 창조 질서와 출산력과 생명 전달을 위한 것이므로 이러한 내재적 목적에 충실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사랑과 출산은 성의 의미이며 가치이다. 성은 그 두 가지를 내포하면서 요구한다. 그 외에 달리 생각해서는 안 된다.

 

33. 남녀 각자의 애정 생활은 부부 생활, 천국을 위하여 선택한 봉헌된 독신 생활, 아직 결혼하지 않거나 독신으로 남아 있거나 독신 생활을 선택한 그리스도 신자 생활 등 여러 가지 생활 신분에서 하나의 특징적 양상으로 표현된다. 그것은 그 어느 생활 신분에 있어서도 항상 인간이라는 토대 위에 모아지고 통합되어야 한다.

 

성교육의 성격, 목적, 의미

 

34. 성교육의 기본 목적은 성의 본성과 중요성에 대하여, 그리고 심리적 성숙성과 특히 신자들이 도달하여야 할 영신적 성숙성을 향한 인격의 조화롭고 통합된 발달에 대하여 충분히 인식시켜 주는 데에 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그리스도인 교육자는 신앙의 원칙을 지키고 다양한 교육 방법을 활용해야 하며, 성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보는 현대의 교육학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35. 그리스도교 인간학의 관점에서 애정 내지 성에 대한 교육은 인격 전체를 고려해야 하고, 따라서 생리적, 심리적 내지 정서적, 사회적, 정신적 요소들의 통합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 그러나 신자들은 신앙 생활의 시작부터 죄에 대한 부담을 안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그러한 통합이 더욱 어려울 수 있다. “인격 형성”을 위한 진정한 교육은 지식의 전달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의지와 느낌과 감정에도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실제로 애정 내지 성생활에 성숙하기 위해서는 정숙, 절제, 자기와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 이웃에 대한 개방성 등의 덕을 갖춘 자기 통제가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을 얻으려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구원의 힘이 있어야 한다.

 

[출처: 가톨릭교육성, “인간적 사랑에 관한 교육 지침”(1983.11.1.), Origins 13, 27호(1983.12.15.), 451-453면.]

 

 

정리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성을 출산과 자손의 번식이라는 생물학적인 측면에서 뿐만이 아니라 자아 성숙과 타인과의 관계적 측면에서 인격의 완성으로 파악한다. 아울러 창조 사상에 근거하여 하느님께 받은 은총의 선물로서 이해한다. 그래서 인간의 성은 자신의 행복 추구를 통하여 자아의 인격적 완성을 도모하여야 하고, 자신과 타인 사이의 헌신적이고 책임 있는 상호 봉사의 실현으로 타인의 인격적 완성에 기여하여 참된 일치의 공동체를 이루어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라는 사랑의 공동체에 참여함으로써 궁극적인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

 

또한 하느님께 받은 은총의 선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인간의 성은 은총의 부여자의 뜻에 맞게 사용되어야 한다는 뜻에서 이성간의 긴밀한 협조와 유대의 관계를 부부 관계를 통하여 구체화시킬 수 있다. 이것은 정상적인 부부 관계에 따른 자녀 출산과 양육으로 더욱 풍부해질 수 있는 신비로 파악될 수 있다. 이렇게 성은 오늘날 만연한 사고처럼 사랑과는 무관한 인스턴트식 쾌락의 도구가 아니라 완전한 사랑, 곧 아가페를 지향하는 것이어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성과 사랑은 뗄 수 없는 상호 조화의 관계여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이 올바른 것임에도 현실 속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현대에는 성 해방을 부르짖으며 청소년들의 성범죄를 비롯해서 또 다른 많은 문제들을 낳고 있다. 또한 ‘성의 개방화 물결’은 온 사회를 뒤덮어 현대인의 가치관을 바꾸어 놓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성과 사랑을 따로 떼어내고, 성을 오로지 쾌락을 위한 오락물 정도로 여겨 사고팔 수 있는 상품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이러한 문제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 우리 가정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에 대해 국가는 물론 종교적 차원에서도 예방적 성교육과 영적이고 영원한 가치에 대한 교육 그리고 인간 생명이 지니는 존엄성에 대한 윤리 의식의 회복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인간의 성은 창조주 하느님께 선물로 받았으며, 따라서 성은 일회적인 쾌락의 수단이 아니라 책임성과 성실성을 가지는 부부 관계에서 완성되고 또 완성되어야 하는 하나의 신비이다. 사랑과 연결된 성은 자신 안에 묶여 있지 않고 부부 상호 간의 전인격적인 나눔을 통해서, 자녀를 통해서 사회로 확대되고 급기야는 온 인류에게 봉사하게 되는 역동성을 가진 사랑의 신비이다. 이것이 성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근본적 가르침이다.

 

[사목, 2002년 7월호, 이창영 엮음(본지 주간 · 주교회의 사무차장 · 신부)]



264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