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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가톨릭 경제윤리의 관점에서 본 한국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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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5-01-06 ㅣ No.493

가톨릭 경제윤리의 관점에서 본 한국경제

 

 

이 주제를 제대로 다루려면 우선 ‘교회 입장’의 바탕을 이루는 가톨릭 경제윤리의 내용과 구성을 검토하고 정리한 다음, 한국경제 현황 특히 그 문제점들을 중심으로 요약해야 할 것이다. 한국경제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거시적으로는 그 배경이 되는 시대 조류와 정책 우선순위를 둘러싼 논의를 이야기하고, 미시적으로는 경제 현안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 같은 전제에서 경제 현안에 대한 진단과 치유책을 제시하는 것이 이 글의 요구에 충실하게 부응하는 것이라 믿는다. 

 

따라서 제1장에서는 가톨릭 경제윤리를 검토하고 정리한다. 제2장에서는 한국경제 현황을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라는 시대적 사조로 요약하여 살펴보고, 이어서 경제정책 논의의 핵심이 되는 성장과 분배의 문제를 정리한 후, 마지막으로 구체적 현안들인 병적 증상들을 살펴본다. 제3장에서는 경제현황을 교회 시각에서 평가하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사회와 교회’의 바람직한 관계를 모색하고자 한다.

 

 

1. 가톨릭 경제윤리

 

창세기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주 하느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내용과 함께, 거듭해서 “보시기에 좋더라!”라는 평가를 통해 현세적 삶에 대한 긍정을 나타내고 있다. 나아가 ‘이웃 사랑’의 계명은 모든 믿는 이들에게 현세적 삶의 중심좌표가 되고 있다. 그리고 사회 경제적 영역은 바로 현세적 삶의 바탕을 이룬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는 인간의 사회 경제 차원의 삶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가르침을 마련할 수밖에 없다. 

 

1) 인간을 위한 사회 경제

 

하느님의 모습대로 만들어진 인간이기에 ‘모든 인간은 절대 존엄의 존재’라는 가르침이야말로 교회의 가장 으뜸가는 원칙이다. 따라서 레오 13세 교황이 회칙 『새로운 사태』에서 제시한 ‘인격성의 원리’는 바로 모든 믿는 이들의 실천적 지침이 되는 근간이다. 

 

하느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지상의 대리자로서 인간을 택하셨다. 그리하여 인간에게 이 세상 모든 것을 다스리도록 위임하셨다. 이것은, 인간은 현세의 지배자이며, 따라서 현세적 질서가 거꾸로 인간을 지배해서는 안 됨을 뜻한다. 곧 경제 정치 등 현세적 질서나 제도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닐 때, 또는 인간을 수단으로 전락시킬 때 교회는 그 같은 상황의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잡도록 가르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현세적 질서나 제도는 인간이 돌보고 가꾸어야 할 하느님의 선물이지, 인간의 현세적 삶을 좌우할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 하느님의 섭리이며 교회의 확고한 가르침의 바탕이다. 

 

2) 경제와 윤리의 관계

 

이러한 분명한 가르침이 있는데도 우리는 흔히 윤리와 경제는 전혀 무관한 관계의 대상으로 간주하거나, 나아가 윤리와 경제는 상호 배타적인 관계라고 인식하고 처신한다. 물과 불의 비유로 윤리와 경제의 상극관계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 같은 그릇된 인식의 배경에는 교회와 사회 모두에게 똑같이 잘못이 있다.

 

우선 교회로서는 ‘종말론’의 의미를 세속에 대한 무관심 내지 무시의 근거로 그릇 판단하게 하는 빌미를 제공하였기에 사회에 대한 참여나 관심을 억제하는 것이 미덕이라는 편견이 한때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세상 만물의 창조주가 하느님이시며 세상의 인간을 구하시고자 독생성자를 보내셨다는, 곧 천지창조와 강생구속의 교리는 현세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배려를 명시적으로 나타내는 것이기에 경제라는 사회현상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오늘의 가르침이다. 더욱이 ‘이웃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수 있는 장이 바로 경제영역이기에 잘못된 인식은 바로잡아야 한다.

 

사회로서도 자신의 본 영역은 가치중립적이어야 하므로 윤리규범이라는 가치영역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보고, 결과적으로 윤리를 외면하거나 무시해야 한다는 도식적 굴레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학문이나 세속 질서가 과연 가치중립적인가? 이는 짧은 생각의 결과로서, 당위로 비약된 허구인가? 아니면 악의적으로 윤리적 가치를 배제하기 위한 조작된 논리인가? 그릇된 논리의 다양한 근거를 살펴보자.

 

성장이냐 안정이냐, 생산 우선이냐 분배 우선이냐? 이러한 경제 현안은 현실적으로 중심이 되는 주제이며 학문으로서 경제학의 중요한 정책이다. 그러나 이 같은 정책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고용, 물가, 소득, 무역 등 기초 개념 역시 학문의 객관성을 입증하는 지표로서 가치중립성의 유지 전제는 전혀 합리적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예를 들어 상품의 중요성은 어떻게 가늠될까? 하나의 상품이 상점 진열장에 놓여있다는 사실에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소비자가 제품을 구입하여 주어진 용도에 사용할 때 비로소 그 상품의 중요성이 드러난다. 이 같은 사실은 우리의 보통 표현방식으로 바꾸면 ‘상품 가치는 인간이 그 상품을 사용할 때 비롯된다.’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만일 그 제품이 부엌칼이라면, 상점에 있었을 때는 화폐 단위로 표현된 가격으로서 잠재적 중요성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주부가 그것을 구입하여 음식 준비에 사용할 때 비로소 중요성 곧 가치를 실현하게 된다. 그런데 그 부엌칼이 범죄 용도로 사용됐다면 우리는 그때 역시 중요성을 가졌다고 할 수는 있지만 참 가치가 아니라 부정적 의미의 가치로서의 중요도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앞의 예를 정리하면 모든 경제 상품의 가치는 인간이 사용할 때 비롯하며, 사용 목적이 윤리적일 때 비로소 참된 가치가 드러나는 것이다. 이같이 생산과 소비라는 경제과정을 살펴보면 모든 과정 자체가 윤리와 무관할 수 없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학문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선 모든 학문의 기초개념은 처음부터 가치판단을 전제로 한 개념임을 알 수 있다. 물가고와 안정, 호황과 불황, 실업과 완전고용 등의 경제학 기초 개념들이 바로 그 예이다. 둘째로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는 대책이 둘 이상일 때 어느 정책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우선순위 결정의 문제는 바로 가치판단의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학문은 가치실현을 위한 것이 존재 이유이다. 이처럼 세속적 중요성은 바로 가치의 문제인 것이다.

 

경제와 윤리의 관계는 물과 불 같은 상호모순적 관계의 대상이 아니라, 중립적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곧 윤리성에 따라 가치 실현이 이루어지는 상호의존적 관계의 내용이다. 질료와 형상이라는 고전적 인식론의 관계처럼 경제와 윤리라는 관계로 인간의 현세적 삶이 구체화되는 과정을 비유할 수 있다.

 

3) 구체적 가르침

 

세속사회와 마찬가지로 교회 역시 시장경제제도를 바람직한 경제형태로 판단한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찬성이 아니라 시장경제가 인간을 위한 진정한 경제제도라는 사실을 입증할 때에 한해서이다. 왜냐하면 시장경제제도는 자동판매기가 아니라 인간이 다스리고 가꾸는 문화양식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의 사회회칙은 인간의 경제생활과 관련하여 구체적인 지침들을 정리하여 제시하고 있다. 이 같은 가르침을 노동과 자본, 사유재산제도, 가난한 자의 우선적 선택으로 나누어 간략하게 요약한다. 이러한 분야의 내용이 모든 경제문제의 기본이기도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경제 현안에서도 그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고 해결책을 강구하려면 필수적 바탕이 되는 열쇠들이기 때문이다. 

 

노동과 자본이라는 생산의 기본요소는 가톨릭 사회교리가 출현한 직접적인 원인이다. 따라서 사회교리의 출현과 발전의 과정은 바로 노동과 자본에 대한 시대적 인식과 그 괘를 같이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그동안 축적된 교회의 가르침을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 노동과 자본은 상호보완적 관계로 노동 없이 자본이 제구실을 할 수 없듯이, 자본 없이 노동 역시 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 기본 가르침이다. 둘째, 이 같은 상호의존성을 인정하면서도,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특수상황이 아님에도 서로 간의 우선순위를 둘러싼 갈등이 발생했을 때 교회는 노동이 자본에 우선한다는 원칙을 밝히고 있다. 그 이유는 노동과 자본의 뒤에는 다 같이 인간이 있는데 물적 요소인 자본은 당연히 자본가라는 인간이 자본을 소유하게 되지만, 노동은 그 노동과 일체인 인간이 노동자로 자리하기 때문이다. 곧 전자는 간접적으로 인간과 연결되지만 후자는 직접적으로 인간과 관련되기에 노동과 자본 간의 우선순위는 당연히 인간과 직결된 노동이 차지한다. 

 

다음으로 사유재산제도에 대한 가르침 역시 처음부터 제시되고 다듬어져온 사회교리의 핵심 내용이다. 첫 번째 사회회칙 『새로운 사태』에서부터 교회가 가르치는 재산제도에 대한 명시적 표현이 담겨있다. 이를 살펴보면 재산은 개인이 소유하지만, 공동선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다. 개인의 소유권을 강조하는 이유는 창세기의 신학적 해석과 함께 현실적으로도 인간은 자기 것일 때 가장 잘 다루고 가꾸기 때문이다. 곧 현세적 부의 유지, 관리, 그리고 증식을 위해서는 재산의 개인소유가 적합하다. 그러나 이와 함께 이웃 사랑의 계명은 공동선 증진에 대한 각 개인들의 책임을 전제하기에 현세적 부의 사용을 이기적인 목적에만 한정할 것이 아니라 필요로 하는 이웃과 나누어야 한다는 사명이 모든 인간에게 부과된다. 

 

이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사유재산제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정리하면 재산의 소유권은 개인이, 그러나 그 재산의 사용권은 공동선 증진을 위해 처분해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요약된다.

 

앞에서 이야기한 노동과 자본, 소유와 사용에 대한 가르침은 다음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재산의 소유권은 개인이, 그러나 그 재산의 사용권은 공동선의 증진을 위해 처분해야 한다.”

 

지금까지 노동과 자본, 소유와 사용에 대한 가르침을 개별적으로 분석 정리하였다. 그러나 이 모두를 종합적으로 동시에 다루게 될 때 거기에는 모든 구성원이 따라가야 할 하나의 원칙이 있다. ‘가난한 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때로는 이러한 원칙이 가진 자를 소홀히 하라는 뜻으로 그릇 전달될 수도 있고, 기득권층의 수호자라는 교회의 오명을 벗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악의적 비판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원래의 의도는 어느 사회에서나 가장 가진 것 없는 사람이 떳떳한 구성원의 자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은, 그보다 조금이라도 더 가진 사람은 당연히 사람다운 대접을 받고 있다는 보편적 진리를 설명한 것일 뿐이다. 

 

종속경제, 해방신학이 논의되던 시점에서 정리된 이 같은 진리는 오늘에 와서는 복음의 표현 - 이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다 - 으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 새로운 양상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다루고 요약한 것이 경제영역에 대한 구체적인 교회 가르침의 핵심이다. 다음 장에서는 시대징표로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를 정리하고 경제정책의 최대 현안인 성장과 분배의 우선순위를 둘러싼 논의를 요약해 보겠다. 마지막으로는 구체적인 경제문제들을 살펴본다. 

 

 

2. 한국경제 현황

 

1) 시대적 사조

 

많은 사람이 현재의 한국경제를 1997년 외환위기 때와 비교한다. 경제불황의 늪이 심각하고 길게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환위기 때와 지금은 여러 면에서 비슷하기도 하지만 차이점도 있다. 

 

우선 비슷한 점으로는 첫째, 극심한 내수 침체, 둘째, 기업 수익성 악화, 셋째, 대외여건의 불안 등이다. 곧 가계부채 문제가 내수 회복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으며 여기에 대외 변수들이 곁들여져 설상가상으로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신용불량자가 4백만 명에 이른 가운데 최근 우려되고 있는 부동산 가격 하락이 맞물릴 경우 ‘제2의 금융위기’가 현실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편, 외환위기 때와 지금의 위기는 직접적인 원인이 다르다. 외환위기의 원인이 단기적 금융문제였다면 현재 위기는 신용카드의 무분별한 남용과 산업공동화 등이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생긴 문제로 단기적 문제였던 외환위기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해석도 있다. 

 

같은 점, 다른 점을 통해 두 위기를 피상적으로 분석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현재의 위기가 내포하고 있는 문제의 심각성이다. 첫째는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을 통해 재무구조는 많이 개선되었지만 일부 우량기업들을 제외하면 열악한 기업의 영업수익이 그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는 점으로 장기적 산업 경쟁력의 근본문제를 들 수 있다. 둘째는 고유가나 중국 쇼크 등 일과성 문제가 원인이 아니라 구조적 측면으로 허약해진 성장 동력의 문제이다. 

 

이 같은 한국경제의 심각성은 우연적 발생이 아니라 필연적 결과이기에 교회는 우려한다. ‘복음의 빛’으로 시대의 특징을 식별하고, ‘복음의 빛’으로 그 문제들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교회의 사회교리 본령이다. 바로 이러한 경로를 따라 교회는 한국경제 현황의 배후에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라는 사조가 도사리고 있다고 판단하며, ‘세계화의 신자유주의’라는 ‘시대징표’는 필연의 성격을 지니기에 경계하는 것이다. ‘세계화’가 나눔보다는 독점을 우선하고, ‘신자유주의’가 부분의 풍요를 위해 경쟁의 공정성을 소홀히 하고 있기에 그리고 그 같은 경향이 필연적이기에 교회는 침묵할 수 없는 것이다.

 

2) 성장과 분배

 

한국경제의 최대 현안은 성장과 분배를 둘러싼 논쟁이다. 경제 주체인 기업과 노동 그리고 가계가 제각기 자기의 입장에서, 차분한 논리가 아니라 감정의 목청을 높이는 것 같다. 정치 주체인 정당들 간에도 공동선 증진보다는 득표 위주의 주장이 분분한 것 같다. 자생적인 시민단체들이 주장하는 논리나 근거도 타당성이 뒷받침되는 것같이 보이지 않는다. 미시적 차원에서도 자신의 입장이 바뀌면 지금까지의 소신은 그 즉시 바뀌는 것이 현실이다. 예를 들면 일자리를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에 따라, 소유의 다과에 따라 주장과 논리는 전혀 다르다. 

 

다양한 논의들의 줄거리는 크게 양자의 관계를 상호배척적 성격으로 파악하는 갈래와 상호순환적 성격으로 설명하는 갈래로 나누어진다. 상호배척적 갈래의 입장에는 두 가지 설명이 공존한다. 첫째로는, 우선적으로 분배를 억제할 때 성장 요건이 갖추어져 뒤에 나눔의 몫이 커진다는 논리이고, 둘째로는, 분배의 관행은 나눌 몫이 크지 않을 때부터 정착되어야 하지 작은 것도 나누지 못하는데 갑자기 몫이 커진다고 해서 나눔의 관행이 정착한다는 주장은 인간의 이기심을 고려할 때 비현실적인 주장이라는 것이다. 곧 우선순위를 둘러싼 논의이다.

 

상호순환적 갈래의 입장은 성장과 배분을 선후의 관계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선후가 지속적으로 바뀌는 동시적인 것으로 파악하며, 나아가서 나눔과 가짐의 상호보완성을 근거로 성장과 배분의 성격을 이해한다. 나누려면 가지고 있어야 하고, 가지려면 나누어야 한다는 진리를 경제이론화한 것이다. 경제력의 독점은 구매력의 고갈을 초래하고 결국 독점자 역시 도태될 수밖에 없기에, 구매력의 확산은 자신의 소유증식의 전제이기 때문이다. 

 

성장과 배분은 이론적으로 자유와 평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교회는 자유와 평등에 대해 뜀뛰기로 비유하자면, 평등은 출발선에서의 동일한 위치를 뜻하며, 자유는 각기 자기 능력에 따른 결과가 결승점에 도착한 시점이라고 본다. 그리고 경쟁과정은 공정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곧 기회의 균등과 결과의 차이를 인정한다. 이처럼 배분은 인격성에 바탕을 두어야 하고, 성장은 공동선의 증진을 목표로 해야 한다. 따라서 성장과 배분을 둘러싼 논쟁에 대해 교회는 불필요한 소모적 논쟁일 뿐이라고 판단한다.

 

일자리와 가격 안정을 위해 분명히 성장정책의 당위성은 인정된다. 그러나 그 전제는 이 같은 목표가 명목적이 아니라 실질적 경제목표가 될 때, 곧 약속이 지켜질 때이다. 공평한 분배와 약속의 준수가 상식이 될 때 가능한 것이다. 처음부터 공정성이 관행으로 자리 잡을 때 성장과 분배라는 경제정책의 우선순위를 둘러싼 논쟁은 무의미해지며, 경제는 인간을 위한 제도로 뿌리내리게 될 것이다.

 

3) 구체적 경제 현안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결과는 그늘진 면만이 두드러진다. 평균 실업률의 2배를 웃도는 청년 실업률, 취업자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비정규직 고용형태의 비중, 수출호조와 이주노동자라는 이중의 대외의존도 심화, 신용불량자의 양산 등이 그 대표적 분야이다. 이들 현안들은 개별 문제 자체도 난제인데, 실제로 밀접하게 서로 얽혀있어 심각성은 기하급수적 성격을 지닌다. 

 

비교적 단순한 내용으로 이주 노동자의 문제를 이해하지만 갈수록 쌓이는 부정적 퇴적물은 이미 다루기에 벅찬 수준이다. 우선 일부의 몰지각한 처신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고유한 문화전통을 송두리째 거절당하는 빌미를 제공하고 있고, 우리 경제 일부 분야에서의 그들의 결정적 역할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인격체와의 교류를 오로지 급부와 반대급부의 경제적 거래로만 간주하는 것은 교회의 가르침에도 어긋난다. 그뿐만 아니라 행여 기계적 거래관계 차원에서 평가한다고 하여도, 일부 경제 분야에서의 그들의 공헌을 고려한다면 정당한 내용이 되지 못함은 자명하다. 

 

이 나라를 책임져야 할 청년들이 일자리를 갖지 못하고, 그 결과 전 국민의 10%에 이르는 신용불량자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면 참으로 나라의 장래는 암담하다. 이미 상관관계가 밝혀지고 있듯이 신용불량자의 급증은 각종 범죄의 온상이 될 뿐 아니라, 전 가족을 포함한 자살률의 급증은 병든 사회의 단상으로 부각되고 있다. 기쁨보다는 슬픔을, 희망보다는 절망을 보편화하는 주범이 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고용형태로 정착되고 있는 전 국민의 10%에 이르는 비정규직 고용은 이른바 ‘신빈곤’의 원인이 되어 이등 국민이라는 자조적 이름으로 불리는 ‘신빈곤층’을 출현시켰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나 세계화에 따른 구조조정의 결과라고 치부하기에는 석연치 못한 점이 너무 뚜렷하다. 

 

이즈음 공식발표로, 분명 앞의 문제들과 비교할 때 긍정적 의미가 깔린 경제 현안은 수출호조이다. 그러나 수출을 위한 완제품의 부품이나 부대비용을 고려한다면, 그리고 조립 등 생산과정이 국외에서 이루어진다면 수출호조가 밝은 면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미 고용의 증가 없는 성장이라는 논리는 현실로 다가왔기에 밝음만을 강조한 것이 아님이 입증되고 있다. 

 

위에 열거한 구체적 경제 현안들은 하나같이 부정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이 같은 현상의 바탕에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라는 인격성의 원리에 배치되는 시대적 조류가 깔려있다. 현세적 지표나 제도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수단으로 하고 있는 데서 기인되는 결과이다. 따라서 교회는 이 같은 경제 현상을 외면하거나 중립적 입장이 될 수 없다. 

 

 

3. 평가와 제안

 

생산성과 품질의 향상은 자동화의 기계적 공정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노동력이 지닌 가치와 창의성이 총체적으로 투입될 때 가능하다. 한편 노동력의 질적 향상 노력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생산성과 임금의 체계적 관계가 성립하고 그 결과 고용조정의 대상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원칙도 받아들여져야 한다. 곧 사람의 소중함이 노·사 모두에게 깊이 인식될 때 한국경제의 현안들은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1) 웰빙의 평가

 

오늘 한국사회의 시대징표는 웰빙(Well-Being)이라는 현상으로 특징지을 수 있겠다. ‘잘 산다’라는 의미가 그 자체로 긍정이나 부정일 수는 없지만 요즈음 쓰이는 내용을 보면 육신적 건강과 물적 풍요만을 가리키는 것 같다. 세태적 해석을 바탕으로 한다면 분명히 미흡한 내용이다.

 

해방신학이 주도하던 1960-1970년대 발전의 개념은 사회 경제 차원의 내용으로 인지되었다. 그러나 회칙 『사회적 관심』 이후 참된 발전은 문화윤리 측면이 고려되어 전인적 발전을 지향할 때 비로소 조화를 그리고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이다. 

 

웰빙이라는 의미도 이 같은 교회의 가르침을 원용한다면 선명해진다. 인간이 잘 사는 데 현세적 조건들이 필요할 뿐이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교회 가르침의 기본이다. 웰빙의 세태적 이해가 육신의 건강이나 물질의 풍요를 뜻한다면 이는 도구적 가치가 목적적 가치로 바뀌고, 곧 전인적 성숙이라는 목적이 수단으로 전락함을 뜻하므로 교회의 가르침은 단연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라는 사조는 결국 ‘잘 삶’의 의미를 왜곡시키고 이 시대 특징으로 뚜렷이 자리 잡고 있다. 나아가 이 같은 유행에 동참할 수 있는 사람은 구성원의 극소수일 뿐이라는 현실은 한국사회의 상황을 한층 암담하게 만든다. 

 

2) 치유를 위한 제안

 

민생고의 절박성은 가진 사람보다 가지지 못한 계층에게 심각하고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여론조사를 통해서 그리고 서민들의 가계 악화를 통해서 입증되고 있는 것처럼 현재의 경제상황은 그 침체의 실황이 지난 1997년 때보다 훨씬 심각하다. 이대로 간다면 기업의 붕괴에 이어 가계의 붕괴는 불을 보듯 뻔하며 결국 한국경제기반의 붕괴는 시간문제로 보인다. 여기서 성장이냐 분배냐라는 경제정책의 우선순위에 대한 논의는 한가한 논쟁으로 비춰지는 현실이다.

 

교회의 제안을 ‘제3의 길’ 차원의 치유책으로 곡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분명히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제안들과 인격적 존재로 인간을 보는 교회와는 차원이 다르다. 교회는 인격성, 연대성, 보조성, 공동선의 원리를 사회원리로 가르치고 있다. 인격성의 원리는 개별성과 사회성으로 구별되어 현실에서 구체화되는데, 개성과 기본인권 등이 개별성의 인격을 바탕으로 표출되는 예이다. 반면에 개별성의 인격 주체가 집단적 차원에서 전인적 성숙을 다룰 수 있는 조건들의 총체를 공동선이라고 할 때 공동선 실현의 전제로 연대성과 보조성이 등장한다. 단지 집단 이기주의와 연대성을 식별해야 하며 보조성을 주관적으로 접근해서는 불가하다. 

 

지금까지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선택 사안이 아니라 필수이며 의무라는 점과 이의 구체적 실현과정은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우리 주님께 해준 것”이라는 간결하면서도 뚜렷한 가르침이다.

 

[사목, 2004년 7월호, 김어상(서강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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